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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0.08 선지자 1
  2. 2023.10.01 계시의 지속성 1
  3. 2023.09.17 인생의 마지막 순간
  4. 2023.09.10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5. 2023.09.03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
  6. 2023.08.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1
  7. 2023.08.13 목회자의 자살
  8. 2023.08.06 용납될 수 없는 죄
  9. 2023.07.30 그리스도인의 자살
  10. 2023.07.23 자살
  11. 2023.07.16 진정한 개혁주의
  12. 2023.07.02 신학 논쟁
  13. 2023.06.24 죽은 말씀
  14. 2023.06.11 신학 1
  15. 2023.06.04 지식 2
  16. 2023.05.28 불신
  17. 2023.05.21 질서
  18. 2023.05.07 사역자가 받는 유혹 1
  19. 2023.04.30 판단의 표준들
  20. 2023.04.23 육체적인 반응들
  21. 2023.04.16 에드워즈에게 나타난 현상 1
  22. 2023.04.09 웨슬리에게 나타난 현상 1
  23. 2023.04.02 쓰러지는 체험
  24. 2023.03.26 쓰러지는 원인
  25. 2023.03.19 쓰러지는 현상
  26. 2023.03.11 Winter
  27. 2023.02.17 율법과 복음 1
  28. 2023.02.11 율법의 가치 1
  29. 2023.02.05 하나님의 율법
  30. 2023.01.29 기름부음을 사모하라 2

선지자

계시 2023. 10. 8. 03:12

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 있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선지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렘 1:9).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선포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가 말로 메시지를 전한 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민 22:38).  

따라서 구약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면(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성경을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행 1:2).  그들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불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다.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갈 1:8-12, 벧후 3:2), 신약 교회의 권위 구조상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영역에 대해 다른 권위를 주셨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으로 호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또한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오늘날의 선지자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같이 자신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Wayne Grudem은 고린도의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Grudem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는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선지자는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겸손하게 확증받고 시정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다(요 4:19, 딛 1:12).  이 문제를 가지고 Helmut Kramer는 ‘선지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지 전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의 선지자가 구약의 선지자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히 간청할 때(행 21:12),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다(행 21:17).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9절에 분변 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살전 5:20-21).          

그러면 누군가 “예언자가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다.  백성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했다(렘 42장).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이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를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을뿐더러, Bruce Yocum이 말한 것처럼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다. 이것은 구약에만 있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롬 8:14).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딤후 3:16, 벧후 1:21)과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갈 5:18).  그렇다면 “신약의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는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한다(고전 14:3).  하지만 신약의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대신에 믿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해 줄 수 있다(고전 14:3). 

만약 신약의 선지자로부터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4:1).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통해(딤후 3:16), 옳게 분변 할 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벧후 3:16).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있다(계 11:3-13).  학자들은 ‘두 증인’에 대해 각기 해석을 달리한다.  나머지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믿으면 된다(롬 11:3).  그러나 이 세상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난다.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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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2023. 10. 1. 09:59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말한다.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다.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 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있었다( 2:17-18). 바울 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었다(고전 14:26). 그러나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있었다”(고전 14:26-33).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이다(고전 14:3).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 중지론자들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누군가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시대의 회중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은사 중지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그들만의 주장의 근거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 지속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orge Mallone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은사 지속론자들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한다. 

Mallone의 주장이 맞는 이유가 있다.  만약 신약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바울은 예언을 분변 하는 것(고전 14:29)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성경에서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 역시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다.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갈 1:6-9).  D. A. Carson도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 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중지론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오류와 남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Donald Gee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를 통해 경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Dennis와 Rita Bennett도 『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상기시켰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해있나 분별하라는 것이다(요일 4:1).

John MacArthur 역시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이다.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은사 중지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지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  또한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약 1:17)을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행 5:34-39).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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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 2023. 9. 17. 16:39

불교도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훌륭한 선생이지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이고,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구원은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제도 즉, 팔정도(Noble Eightfold Path)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팔정도’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통해 죽음과 환생(還生)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1993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5면에 보면 불교인들이 존경한다는 퇴옹성철(退翁性徹) 스님은 1983년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여… 대중이여, 석가가 세상에 오심을 망상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오심도 망상이라”.  1987년 석가탄신일 법어(法語)에서는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같은 날짜 조선일보 15면에 그가 운명 직전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28자로 된 열반송(涅槃頌)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말은 본인 자신이 죽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남긴 말이다.

나는 불교와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평생을 살다가 성철 스님처럼 죽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빵을 준다는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는 것 같다.  마치 400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신 것처럼(삼상 15:2), 교회에 가서 얻어먹은 빵을 기억하고 계셨다.  내 생각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를 목회자로 불러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러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죽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가령 누군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이나 오래전에 들었던 기독교 간증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지옥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평생을 망나니처럼 살다가 끝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몬 24절).  한때 신실한 사역자였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타락하고 말았다(딤후 4:10).  그가 세상으로 떠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 Handley Moule은 말한다.  “데마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떠났다”.  성경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지만 아마 그는 바울이 겪었던 고생과 고통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 역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다(마 10:1-4).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까지 부여받았다(눅 9:1).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주님을 팔고 회개도 하지 않고(마 26:24-25), 목매달아 죽었다(마 27:5).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눅 23:43)은 일평생 죽을죄만 짓고 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탕자처럼(눅 15:17-19), 회개하고 돌아왔다(눅 23:41).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사회적 지위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이 세상에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마 16:16).  이들은 무론대소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실 때 두 종류의 증인들이 나온다.  하나는 책들로 상징되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으로 상징되었는데(계 20:12), 각각의 경우에 증언이 일치할 것이다.  먼저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각 사람이 그의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시 62:12, 렘 17:10, 마 25:31-32, 롬 2:6, 14:10, 고전 3:13-14, 고후 5:10, 벧전 1:17).  이것은 구원이 선한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지만 선한 행위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요 15:8).  그리고 생명책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책이다(계 17:8).  이 생명책은 이미 세 번씩이나 계시록에 소개되었는데(계 3:5, 13:8, 17:8), 일종의 하늘의 시민권과 같다(빌 3: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엡 2:8-10, 딛 3:5).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며 아무도 그분에게 불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벧전 1:17, 3:25).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 특권에 대한 보다 큰 책임을, 적게 받은 사람은 작은 책임을 수반하게 된다(눅 12:47-48).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책망하신 말씀( 11:22-24)을 통해 마지막 날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15).  특별히 양들을 인도하고 돌봐야 할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많이 맡은 자이다.  잘못 가르치면 일반 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자다(약 3:1).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생활에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신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특별계시의 한 양식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2).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율법에 따라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안 것을 행한 것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된다(롬 2:21-23).  신약시대에는 점진적으로 발전된 계시의 양식인 복음이 완전히 주어진 시대로(요 5:24),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최후 심판을 받게 된다(롬 1:16-17, 요 12:48, 마 7:21-27). 

그러면 복음을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하고 죽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 인간 마음에 태생적으로 새겨진 율법, 즉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4-15).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는 도덕적인 감각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알려주는 내적인 감시자(monitor)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들의 도적적인 지각은 율법을 대신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느 순간, 혹은 어느 때가 되면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고후 5:1).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스데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남긴 말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교계의 거장 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인간은 마지막 죽기 직전에 무슨 말을 남기는가 중요하다. 

누군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잠 28:26)을 굳세게 믿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자다(눅 12:16-21).  인간의 마음은 날씨와 음식과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한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끝마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창 27:2).  자연재해로, 인재로, 병으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고 말한다.  요지가 무엇인가?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이러한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만 오랫동안 주어진 것이 아니다(벧후 3:9).  놓치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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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 천국이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음은 물론 천국의 열쇠는 오직 가톨릭 교회에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간기 처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림보’(Limbu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라틴어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연옥’(Purgatory)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옥 변방(邊方)에 위치한 장소를 가리킨다.  이 지옥 변방을 두 종류로 나누어 하나는 ‘유아 림보’(Limbus Infantum), 다른 하나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고 부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조 림보’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롬 3:24),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옮길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에 ‘유아 림보’는 영아 때 죽어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할 죄는 짓지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유아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에는 이것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천국(마 5:3)과 지옥(마 5:30), 낙원(고후 12:4)과 음부(행 2:27) 등에 대하여는 직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연옥’이나 ‘선조 림보’ 혹은 ‘유아 림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과 연관 지울 수 있는 성경구절이 없다.  한 마디로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만 볼 수 있는 교리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의 세례관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유아 세례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세례 자체가 중생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례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된다.  가톨릭 신학자 Ludwig Ott는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순종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갈 3:10, 5:4).  이것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갈리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생각하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다(눅 23:43).  하지만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면 세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롬 5:12).  엄밀히 말해서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창 3:19)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에 앞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인생의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그분과 교통 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혼의 죽음’(엡 4:18)이 있다.  더 나아가 장차 영과 육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과 영원히 교통 하지 못하고 영육이 심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영원한 죽음’도 있다(마 25:41). 

교회사를 보면 사람이 죽어 의식 상태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칠일안식교다.  간혹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에 ‘영혼 소멸설’(annihilationism)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한때 칼빈주의자였던 Clark H. Pinnok과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John Stott, 그리고 Stott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John Wenham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Stott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른 신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복음주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댔다.  Stott는 이단인가?  여기서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다.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탄탄하게 세워 나가면서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과 Thomas Goodwin을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며,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의 편집자이고, 사망할 때까지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의 주요 기고자였던 B. B. Warfield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세계 3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Warfield도 이단인가?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Warfield의 저서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는 조금 충격적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다. 

영혼 소멸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무존재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심판으로 형벌이 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단지 그들만의 성경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궁금하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 말이다(요 8:7).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학자 중에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말씀을 가지고 ‘사후 전도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은 후에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하셨다(눅 16:24-26).  죽음 이후에는 단테의 신곡에서 말한 것처럼 희망이란 전혀 없다(눅 16:19-31).  무엇보다도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계 21:1-4).  그러나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형벌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히 9:29).  그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계 20;12), 지옥에서 그 영과 육이 세세토록 고통가운데 있게 된다(막 9:48).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들을 향한 심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계 22:11-12).  이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눅 12:47-48).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한다면(마 11:22-24), 마지막 날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눅 20:47).  이들의 죽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해 비로소 확인하게 되며 동시에 더 크고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3-15).  그야말로 슬피 울고 이를 가는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다(마 8:12).  이렇게 불신자들이 죽은 후에는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심판을 받고 이 심판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교리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마 26:41, 46, 막 9:43, 유 7절).       

반면에 성도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다르게 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이한 결과와 관련하여 성도와 불신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요 5:29).  이는 구속을 통한 구원의 기회를 거부한 불신자(요 8:24)와 달리, 비로소 모든 죄의 질고를 완전히 벗고 구원의 축복을 보다 더 온전히 누리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고후 5:1-3)에 불신자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빌 1:23).  다시 말해 성도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긴 하지만(눅 16:22), 일단 죽으면 그의 육체는 나사로처럼 이 땅에 묻히더라도 영혼은 기쁨 중에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눅 16:23, 23:43, 빌 1:23).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고(사 25: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의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는지 모른다(고후 5:8).

여기서도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여 성도가 죽고 난 후에 심판을 받지만(고후 5:10), 이 심판은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주장한다(고전 3:12-15).  반면 또 다른 부류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롬 14:10), 이들이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마 12:36).  즉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규명받기 위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딤후 4:1).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한다(고전 9: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하나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고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은 죽고 난 후(히 9:27),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고후 5:10), 그분의 최종적인 결정에 따라(계 22:11-13),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마 16:27, 롬 2:6-11). 

Robert N. Wilkin의 진술대로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0:28).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하지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이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 경의 신자들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똑같이 경계로 기록된 것이다(고전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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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ethics: A Primer For Christians』 저자이며 생명윤리학자인 Gilbert Meilaend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대상은 태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에서 태아를 제외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제는 쉽게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서 죽은 영아나 유아들, 특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낙태나 살해로 희생된 아기들이 있다.  또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영아도 있다(삼하 12:15-18).  그런데 이 영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마 20:28)에 대해 알리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사람들을 구원한다면 “이 영아들의 운명을 어떻게 되며, 또한 구원받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한다택하심을 입은 유아들은 어려서 죽더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구원받는데, 그분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선택받은 유아들은 유아기에 죽었어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학자 B.B. Warfield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Augustine 오직 세례를 받은 유아만이 구원받을 있다고 말하는 반면 Charles Hodge는 유아시절에 죽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Herman Bavinck 역시 언약의 자손인 유아들은 세례와 상관없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아를 포함한( 9:11), 모든 사람이 아닌 영생주기로 작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13:48),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 사역에 대해 번도 들어보지 못한아들이 아담의 죄를 공유하기 때문( 5:12)에 선택을 받지 않아 구원받을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요일 4:10),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있겠느냐는 것이다( 30:18).  이 주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풀고 제한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는 Calvin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방대한 책 『기독교강요』에서는 사랑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지 중요하게 다루질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머지 판단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가톨릭에서는 사후 영혼이 머무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Pope Benedict 16세의 지시로 폐기되었지만 ‘영세’(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머무는 장소를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자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영혼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연옥’(Purgatory)이나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있는 영혼들과 달리 천국으로 옮겨가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선조 림보’ 교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어떠한 구원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눅 16:25-26), 육체와 정신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유아들 역시 원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5:12).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와 상관없이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엡 2:8).  즉 ‘영세’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4:6, 행 4:12).  무엇보다도 성경은 ‘유아 림보’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할 뿐 아니라(삼하 12:21-23), 영원히 존재할 인간의 처소는 오직 ‘천국’과 ‘지옥’뿐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계 20:10, 21:1-7).

조금 더 유아 구원에 대해 살펴보면 유아는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Christian Theology』에서 성경이 책임질 나이(age of accountability)에 관해 가르치고 있어(삼하 12:21-23), 그 나이에 이르지 않은 아이는 죄에 대한 책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최후 심판 때 이루어질 정죄의 기준은 개인적인 죄다(계 20:11-15).  그렇다면 유아들은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되기 전에 죽었거나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원죄에 관련하여 최후의 심판을 언급한 구절에서도(롬 2:4-8, 14:10, 고후 5:10, 계 20:12), 유아가 죽어서 실제적으로 옳고 그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경우 심판의 근거에 관해서는 언급한 것이 일절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성경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시 51:5).  만약 복음을 이해하고 믿기 어려운 나이에 죽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들의 공로와 의나 무죄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딤전 2:5)과 이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요 3:3).  이처럼 어려서 죽은 유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은 유아들, 특별히 불신자 자녀인 유아에 관해서도 성경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죽고 난 이후에도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사후 전도론’을 주창하는 자들이다.  증거 본문으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부터 4장 6절까지 말씀을 내세운다.  또한 구원받는 것에 있어 영아와 성인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괄적 구원론’ 자들이다.  이들도 사도행전 43절과 디모데전서 4장 10절을 증거 본문으로 내세운다.  ‘보편적 구원론’ 자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받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들 또한 증거 본문으로 로마서 5장 18절과 요한일서 2장 2절 말씀을 내세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논증이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는 이 질문들(구원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의 관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고난과 악은 인생 가운데 펼쳐진 위대한 드라마”인 것처럼 이 세상 안에 있는 악의 관한 문제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대해(욥 1-2장)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논쟁적이거나 이단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는 교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취급하고자 할 때 성경 한 구절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많은 자료에 의지할 수 있는 견해를 취하여야 한다.  물론 어떤 중요한 이슈들에서 입장 차이를 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으나 그 말씀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역설과 신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논리구조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55:8).  환언하면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문제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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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동남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죽은 사망과 실종자 숫자는 대략 30 명에 이른다.  이 일이 일어난 6년이 지난 2010년에는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 희생자와 부상자가 거의 30 명에 이르면서 아이티 인구 삼분의 일인 삼백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 쓰촨 성 지진과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한국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게 되는 사건들이 터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외신도 조명한 국내 최악의 안전사고 중 하나로 꼽힌 이태원 세계 음식거리에서 159명의 죽음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이다.  대형 참사가인재’(人災) 아니면 ‘자연재해’로 혹은 우연하게 일어났는가를 고심하면서 많은 희생자 중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은 얼마나 되며 복음을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의하면 인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죽는다고 한다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떤 이해도 없이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성경은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다( 16:15).  하지만 우리가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말을 듣고 거부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롬 19:14)에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문화권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들의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인가?

더 난해한 것은철이 들기 전에 죽은 영아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어린 정신박약자가 죽었을 경우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므로 고의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영아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3:22),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106:1),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영아를 포함한( 51:1), 모든 인간은 이미 원죄로 인해( 5:12),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9:27).

이러한 문제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한다.  즉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택함 받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14:38).  영아라도 선택받은 아이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을 없다는 것이다( 9:11).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신학자들은 선택받는 것과 상관없이 영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Ramesh Richard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유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영아살해 혹은 낙태로 죽었던 아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일까?

초대 교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것인가에 대해 일치한 주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 그리고 은사론과 종말론에서도 교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유아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의 운명에 대해 확실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유한한 지식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고전 13:12) 제한적인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조차도 죄의 영향과 피조적 한계로 인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신학자와 목사들은 짧은 단어 하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혹은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합의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죄악 된 본성을 가진 논쟁자들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어떤 중요한 주제에 있어 상당한 일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14:6).  불신자에게 있어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종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행 4:12).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최종적인 계시다( 16:25-26).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또 다른 계시는 없다.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계시의 원천이다( 1:11-12, 1:1).  모든 관점은 성경을 통해 증거를 찾고 해결한다.  이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다.  여기에는 칼빈주의자나 웨슬리주의자는 없다.  누군가 이 공통적인 특징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이단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따라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라는(행 4:12),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계시와 구원에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중보자다(딤전 2:5).  기독교 밖에서 구원 얻을 방법은 일절 없다(요 3:16).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논쟁적인 사람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형성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딤후 3:15-17).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특별한 성경해석 전통 아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성경을 해석할 때 교단과 신학적 배경, 혹은 자신이 신봉하는 늙은 교주로부터 전수받은 조잡한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가능성이 많다(고전 1:12).  이것은 우리가 인용할 본문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준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이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신학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자신을 멸망으로 초래할 것이다(벧후 3:16).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요 1:1-5), 그분께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셨는지(히 10:11-14),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갈 3:13),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를(요 14:21), 성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도 알고 계신다’(요 21:15-17).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말이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롬 8:38),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9).  이 구절은 바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조건적인 그분 사랑의 증거다(롬 5:8).  일단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현존하는 어떤 능력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탄이고 나발(?)이고 없다(삼상 25:25).

하지만 나는 어떤 것에 대하여도 심지어 내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것에 조차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었거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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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자살

자살 2023. 8. 13. 14:45

지금 우리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기업가들, 연예인들 중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한다.  이들 중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가진 자들도 있다.  특별히 목회자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슈화되지 않는다.  1년 전 어느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의견 충돌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목숨을 끊었다.  한 분은 교회 종탑에서, 다른 한 분은 장로 집 근처 나무에서, 또 다른 한 분은 교회 화장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귀중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정말 자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남아 있는 유가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이 심적 고통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문제는 그 귀한 영혼이 자살한 후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들어간 낙원으로 간 것일까?(눅 23:43).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으로 간 것일까?(마 27:5).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며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런 주장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그 자살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살한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죽은 사람이 야곱처럼 선택을 받았는지, 에서처럼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롬 9:9-13). 

Jonathan Edwards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신앙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신앙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스스로 알 수 있다(고후 13:5),  하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조한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교회 안에서는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4:5).  만약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누가 예정이 되고 선택을 받았는지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지 목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자나 목사들은 서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배워온 방식대로 해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생명(창 1:27)은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 자체 외에 목적(사 43:7, 21)과 존엄성(고전 15:39-40)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의 존재 여부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며(창 1:28),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시 8:3-8),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요 3:16).  이러한 인간의 가치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그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다(마 6:25, 10:31, 12:12, 20:28, 막 2:27, 8:36).  이 모든 것은 그 가치에 있어 인간은 매우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창 5:1-2).   

그런데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살인하지 말 것(출 20:13)을 누차 경고하셨다(롬 13:9).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신 5:17), 밑바탕에는 인간 가치의 중요성과 존엄성,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그분께 속한다는 근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겔 18:4).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지만(렘 22:3), 아히도벨이나(삼하 17:23), 가룟 유다처럼(마 27:5),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 2:7).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간에 생명을 죽이는 것(출 21:12)은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이 된다(민 16:2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5문에서도 살인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이웃을 해쳐서도 안 된다”.  자살은 그분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는 말은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욘 2:9).  극단적 선택한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명시적인 구절도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구절과 ‘열매로 그들을 알라’라는 구절은 있다(마 7:7:16).  이 구절들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진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전 4:5).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직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수밖에 없다(마 7:20).  이것은 주님이 삶과 행실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부추기는 구절들이 일절 없다(렘 29:11).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향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신 5:17).  목회자에게 양을 맡기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21:15-17).  만약 목사의 직분을 받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그는 일반 신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약 3:1).  그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신자도 자살하면 그 죄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마 5:21).  하물며 복음을 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양들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Werther effect, 즉 ‘베르테르 효과’를 나을 가능성이 크다.  오래전 유명 연예인이 자살할 때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자살 고위험군이다.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살한 사람에게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이다(마 25:21).  “네가 목매어 죽을 때 내 마음이 정말 기쁘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까?  만약 내 자식이 죽겠다고 소란을 피우는데, 그런 자식에게 칼을 주고 “사무라이처럼 죽어봐!”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 부모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친아버지(마 7:9-11)가 아닌 의붓아버지 마귀다(요 10:10).  누군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예수님은 분명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30).  왜냐하면 주어진 재능을 썩히고 생명의 존엄성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모든 생명의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민 27:16).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것임(창 9:6)은 물론,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낳아주신 부모에게 최악의 불효를 끼치는 것이다. 

자살한 사람은 이미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행 1:25).  문제는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들의 주된 잘못은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마 23:15).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눅 11:52),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쳐(마 15:9)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마 15:14).  가르치는 선생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최후는 말할 것도 없다.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있어 중립적인 태도는 불가능하다(막 9:40).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잡소리 신학으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신학적 교리를 끌어다가 궤변을 늘어놓거나, 혹은 질병(우울증, 정신병) 문제라고 운운하면서 자살을 정당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자 엘리야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왕상 19장).  그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약 5:17). 

가끔 신학자나 목사가 입만 열면 무슨 주옥같은 복음적인 말씀이 나오는 줄 알고 열심히 귀담아듣는 멍한 교인들이 있다.  시력이 나쁜 양들, 즉 분별력이 없는 양들은 잘 속아 넘어간다.  이런 양들은 방향 감각이 없고 미련해서 한 번 시험에 들고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한다.  참 목자를 만나 푸른 초장에 나가서 싱싱한 꼴을 먹고 영혼을 소생시켜야 하는데(시 23:2)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건강한 양은 들은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연구하고(행 17:11),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처럼(고전 11:29),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헤아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인다(살전 5:21).

자살은 여러 가지 많은 죄(롬 1:29-32)들 중에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죄가 다른 죄들과는 다르다.  다른 죄는 살면서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신 대로 회개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딤후 2:25, 슥 12:10).  하지만 자살은 에서처럼 회개할 기회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죄다(히 12:7).  C. John Collins 박사는 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처음 믿음을 버리고(딤전 5:12),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마 26:24).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죄들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11절에서 강조한다.  이런 유형의 죄악을 저지른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하물며 자살자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선생들은 ‘자살은 지옥’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살만큼은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일 온 전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자, 혹은 자살 위험에 노출된 자들을 위해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 혹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엡 6:12).  이들은 단순히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강력한 존재들이다.  이 전투의 실재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이다(엡 6:13).  다시 말해 자살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벧전 5:9).  이것이 교회 안에 성령의 사역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 교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성경은 말한다.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는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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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될 수 없는 죄

자살 2023. 8. 6. 15:41

『신곡』은 죽음 이후 사후세계로의 여행을 주제로 한 13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Durante Alighieri가 1308년부터 죽은 해인 1321년 사이에 쓴 대표적인 서사시다.  이 책은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 Vergilius를 지옥의 안내자로 묘사하고 있다.  지옥편에서 보면 지옥의 두 번째 문을 지나면 망자들이 모여 있는 제칠 영역이 나온다.   이 영역 안에는 세 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에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지옥문 입구에는 무서운 경고문이 하나 붙어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문을 지나는 자여”

『천로역정』의 저자 John Bunyan은 일인칭 소설 기법으로 『Visions of Heaven and Hell』이란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주인공 Epenetus를 등장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구원을 받아 천사의 인도로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penetus가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할 때 세미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 나직한 음성을 Bunyan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 자신을 영원한 불행에 던져서 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기쁘게 하지 말라. 네가 스스로 치명적인 ‘자해’(自害)를  가하면 그것으로 네 멸망의 도장을 찍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실진대 이렇게 고의로 그분의 형상을 멸하고서 어찌 그분에게 자비를 얻을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이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그 답이 나온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이것은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연민을 느끼면서 하신 말씀이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느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알 길이 없다.  물론 맛보기로 경험해 볼 수는 있다.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불이 켜진 가스레인지 쿡탑에 벌거벗은 몸으로 올라가 앉아 있으면 된다.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단 10초면 된다.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누구든지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다.  여기에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꺼지지 않는 불’(마 3:12)이 있는 곳, ‘게헨나’다(마 5:29).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각은 한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고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극도로 노령이거나 고통스럽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의 경우에는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자살이 허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일부 사회에서는 자살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 자살을 특정한 범주에 제한하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종교적인 자살, 예를 들면 ‘사무라이’는 자신의 실패를 불명예로 여겨 할복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때에 사용된 ‘가미가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삶의 의미에 있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했다.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자살 테러’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기독교의 영향으로 삶의 소중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범죄로 여겼다.  Augustine은 『신국론』에서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살은 자기 살인이며 회개의 기회를 완전히 가로막는 죄로 정죄를 했다.  Thomas Aquinas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릴 권리와 하나님의 주신 생명을 거부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은 교회 공동체를 대항하는 무서운 죄로 정죄했다.  Jonathan Edwards도 자신의 이모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마귀가 그를 절망적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자살은 ‘용납될 수 없는 죄’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성경에 보면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7).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는 말씀이다(벧전 4:11).  예를 들면 아히도벨과 같이 인생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있다(삼하 17:23).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혹은 시므리처럼 권력의 눈이 멀어 왕권을 쟁취하지 못해 왕궁에 불을 놓고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왕상 16:18).  과연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 자들이 있다.  더 나아가 본인 스스로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한다.  문제는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가치가 없는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다.  성경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9:4).  격을 높이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시신’(屍身)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혐오스러운 느낌을 주는 차가운 ‘송장’(corpse)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 자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죽음을 구하였던 자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요셉을 잃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야곱(창 37:35)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질적인 병,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받았던 모세(민 11:15), 그리고 바알 숭배자였던(왕하 9:22) 이세벨에게 쫓겨 절망에 빠진 엘리야(왕상 19:4)가 있다.  또한 가정의 풍비박산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던 욥(욥 3:21)과 부인 천 명과 살아봤지만(왕상 11:3) 인생무상을 느낀 솔로몬(전 2:17).  그리고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구했던 요나(욘 4:3, 8)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민 27:16),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고후 12:9), 그분께 소망을 둠으로(딤전 6:17), 무서운 유혹을 이겨냈다.  

자살은 신중하게 계획된 행동인 경우는 거의 드물고 극단적이고 충동적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좌절감과 고독함, 그리고 경제적 상실감과 정신질병인 경우 자살의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삶에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다(욥 5:7).  하지만 이것은 욥이 말한 것처럼 인생을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믿어야 한다(욥 23:10).  왜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이다(마 16:26). 

무엇보다도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 혼자 힘으로 감당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약 5:14-16).  예수님께서 각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 잃어버린 영혼, 방황하는 영혼, 삶의 소망이 없는 영혼, 자포자기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것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며 순교한 사도 바울이 있다(딤후 4:6-8).  반면에  신앙을 포기하고 목매어 죽은 가룟 유다가 있다(마 27:5).  이들이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은 하늘과 땅 차이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온다.  종이가 남아돌아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다.  이것은 자기 기준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인간은 오래전부터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좋지 못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삿 21:25).  슬픈 현실은 불신자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다.  내 인생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많은 부류 중 한 부류가 소중한 생명이 자기 것인 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누구든지 자살하면 그 사람은 지옥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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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살

자살 2023. 7. 30. 15:56

고대 세계에서 자살을 예찬한 자들은 ‘스토익주의자’(Stoicism)들이었다.  이들은 생활의 모든 비참함과 불행에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향락주의자’(hedonism)들 역시 사는 것이 인간에게 견디기 어렵게 될 때에는 언제든지 자살이라는 도피의 문이 열려 있다고 가르쳤다.  자살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도 달랐다.  그리스의 철학자 Aristotle는 '자살은 국가에 대한 범죄'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Plato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을 경우 자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다변화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명 경시 풍조로 극단적 선택인 자살 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들은 학업문제나 열등감, 그리고 ‘왕따’ 등을 이유로 투신 또는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학부모의 폭언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중년층은 생활고나 가정불화로 인해 가족과 함께 연탄가스로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고령층도 예외는 아니다.  신병을 비관하거나 절망감 등을 이기지 못해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심지어 목회자조차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의 마지막 선택을 자살로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자살에 대해 고대 세계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문제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것에 대해 정당시 되는 경향이 많다.  특별히 불신자들은 자살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일률적으로 자살을 정죄하는 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자살한 사람을 놓고 무차별하게 정죄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에 대해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Durante Alighieri는 『신곡』에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서 받는 형벌을 살인자 못지않게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  교회사에 보면 대체로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자살미수로 살아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다.  또한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만인에게 공개하면서 그의 재산을 몰수할 뿐만 아니라 시체는 교회묘지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중세기에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게 될 때 자기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Augustine은 이런 강제적인 폭행은 처녀성의 면류관은 깨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자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인 Thomas Aquinas는 자살 문제를 놓고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남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할 권리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자살 긍정론’이 펴져 나갔다.  William Shakespeare는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14건 이상의 작품들이 자살 사건을 다루어 자살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스토아 철학이나 향락주의에서 자살을 변호하는 것처럼 이슬람이나 불교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애써 비난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자살 행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여인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한 아비멜렉이 나온다.  이 죽음을 통해 아비멜렉은 모든 것을 잃었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삿 9:54-55).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지만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를 갚은 삼손도 죽음을 선택했다(삿 16:28-30).  병기든 자의 도움을 받은 사울 왕 역시 스스로 칼 위로 엎드러지어 목숨을 끊었다(삼상 31-4).  곁에 있던 병기든 자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삼상 31:5).  다윗의 정치적 자문역할을 했던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자 패배를 직감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삼하 17:23).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시므리는 왕권 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분신자살처럼 왕궁에 불을 놓고 목숨을 끊었다(왕상 16:18).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후에 자책감에 이겨 스스로 목을 맨 가룟 유다가 나온다( 27:3-5).  이 사람은 멸망의 자식으로(요 17:12)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마 26:24).  사도행전 1장 18절은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비극의 배후에는 한결 같이 탐욕’과 증오’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성경은 자살행위를 결코 미화하거나 그러한 행위의 대가로 저지른 죄악과 잘못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이 일절 없다.  물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표현은 있다.  이 말은 자살한 가룟유다에 대해 제자들이 한 말이다.  신학자들은 ‘제 곳’이라는 표현을 한결 같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비껴 나갔다.  일반적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거나 혹은 사도직을 버리고 반역의 자리로 돌아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제 곳’은 어디일까?  나는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제 곳’은 ‘지옥’이란 표현의 완곡어법이다.  비참한 죽음을 기록한 18절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은 가룟유다의 영적 운명의 무서운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자신의 살아오면서 지은 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창 1:27)과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하나의 죄를 포함시킨다(창 9:6).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라도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14:7-9),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사셨기 때문(히 9:12)에 우리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고전 6:20).   

러시아의 작가 Fyodor Dostoyevsky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를 남겨 놓지 않기 때문에(히 12:17), 자살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의 자살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어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27).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고전 3: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고전 6:19-20).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살한다면 그것은 모든 육체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겔 18:4).  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그분의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출 20:13).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요일 3:15).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읽고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므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욕망과 외면의 행위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마 5:28).  미움을 가진 자와 살인자는 도덕적인 형질을 놓고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계 21:8).  하지만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마 5:21-22).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68-69문에 보면 “모든 합법적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보존하고, 불의하게 빼앗거나 해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자나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자는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말씀하셨다(창 9:5-6).  

그러므로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죄목을 피할 수 없다(계 22:15).  만약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히 12:17)를 놓친 자살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같다(마 19:24).  살인자는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자살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일절 없다.  따라서 신학자와 목사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치가 없는 논쟁을 통해 조잡한 궤변을 내세워 자살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삶의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룟유다간 지옥이다(행 1:25). 

사족이긴 하지만 Calvin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살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오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사울의 죽음(삿 31:4-5)과 나귀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 자살한 아히도벨(삼하 17:23)의 부분만을 설교했다.  정말 궁금하다.  자살을 구원의 문제로 다루지 않은 이유 말이다.  TULIP교리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견인교리(Final Perseverance)와 상충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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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자살 2023. 7. 23. 17:09

오늘날 신문과 TV와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삶의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가 다르다.  오랜 전에 읽었던 Erwin W. Lutzer가 쓴 『One Minute After You Die』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자살은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천국 문으로 들어간다”라고 주장한다.  Lutzer가 말한 것처럼 자살을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주님을 믿더라도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까?

나는 자살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벧후 1:21)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가장 유일한 기준이고 답이다(딤후 3:15-17).  지금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서는 자살을 공동체를 훼손하는 반사회적 위험한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교회가 전통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보다 깊은 신학적인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첫째, 자살은 창조주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다(창 1:27).  개인의 생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지( 25:14), 제멋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권자가 아니다(벧전 4:10).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다.  누군가가 반문하겠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고후 5:17).  값없는 은혜(엡 2:8)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일과 삶에 있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벧전 4:11).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때문이다(히 9:12).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죄악이.  구약성경은 살인의 행위에 대해 극형을 명령하셨다( 24:17).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홍수가 끝나고 나서 가장 먼저 노아의 가정에게 살인에 대한 법을 주셨다(창 9:6).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창 5:1).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마찬가지로 개인의 생명을 스스로 취하는 행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20:13).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8:4).

셋째, 자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헛되게 만든다.  죽음은 인간의 공통적인 두려움이며 모든 인간의 최종적 경험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야만 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죽으심을 통해서만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다(히 2:14-15).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사망이 패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롬 6:9).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요 10:10)을 값없이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켰다(롬 8: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요 5:24)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면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은 우리가 이겨야 할 원수다(고전 15:55-57).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사망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자살은 신학적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먼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말이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이 자살한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중독되어 있다.  술, 도박, 성, 마약에 중독되어 자신을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자학하는 사람이 이 길을 선택한다.  세 번째는 장기간 독신으로 살거나 직업을 잃은 실직자, 혹은 오랫동안 불치의 병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독감, 그리고 자괴감에 빠진 경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 사람의 자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동기와 원인이 어떠하든지 그와 관계된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준다.  자살로 인해 가족들은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가지 남겨진 문제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본인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

그러므로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마귀가 인간을 도적질 하고 죽이기 위한 속임수와 계략이다(요 10:10).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두려운 마음조차 주시지 않을뿐더러(딤후 1:7), 자살할 마음은 더더욱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마 7:9-11). 따라서 자살할 마음이나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 성전 꼭대기 위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는 것과 같다(마 4:5-6).  만약 사람이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주 오래전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목격한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내세워 자살은 구원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된다는 주장은 신학적 근거가 없다. 한 순간의 자살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막거나 무효화할 수 없고 구원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한 마디로 ‘개소리’다.  작금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왜 그렇게 개소리들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도 시간이 없고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만약 누구든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동조한다면 그 사람이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그는 분명히 마귀새끼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 이기 때문이다(요 8:44).  그리스도인이 자살의 충동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혼자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물론 귀신은 속삭일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고민할 필요가 없어, 한 번만 해봐”  이럴 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행 16:16-18).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고(약 5:14),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마귀의 억압과 고통에서 놓여남을 받아야 한다(눅 4:18, 행 10:38).  사실 이러한 사역은 교회 담임 목사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눅 10:17).  예수님이 지역 교회 목회자들에게 양을 맡겨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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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회자가 쓴 “몰매 맞을 각오로 올린 글, <한국교회의 오적(五賊)>”이라는 글을 기독교 신문을 통해 읽은 적이 있었다.  이분의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감정을 흥분시키는 드럼은 교회 음악에 적합하지 않고, 십자가를 가려버린 노래방 수준의 대형 스크린과 주여를 외치는 복창기도, 그리고 단체 급식하듯 나누어 주는 성찬식과 젊은이들이 입는 청바지와 티셔츠의 개념 없는 싸구려 복식(服飾) 등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 외부의 핍박보다 무서운 것은 교회가 조용히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글을 썼다. 

삼일이 지나서 다시 SNS에 “오적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사고문을 게시했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제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미숙함이 있었고 편향과 편견이 컸으며 음악에 대해 비전문가인 제가 너무 난체 했다”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용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드럼을 치는 것이나 스크린을 띠워 찬양을 드리고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주여 삼창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분이 말대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남들이 모르는 무슨 심오한 진리를 얻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다가 무수한 여론 몰매를 맞고 사과문을 냈다.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바리새인 기질과 종교적 자긍심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요란한 드럼과 대형 스크린, 통성 기도와 급식처럼 나눠주는 성찬식, 그리고 청바지와 티셔츠가 한국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세속화와 변질된 복음, 우상숭배와 같은 성전건축과 진영 논리에 빠진 교인들 간의 분열, 그리고 물질을 절대시 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이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독선과 편견으로 가득 찬 교단 신학 논쟁이 교회 타락의 원인이다.   

또 다른 목회자 한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하나 올려놓았다.  궁금한 것은 이분은 도대체 얼마나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기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행 7:51) 입만 열면 저렇게 “성령을 거스려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유튜브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설교를 하고 베드로나(행 2장), 바울처럼 설교하는 줄 알고 기대하며 보았다(행 22장).  그러나 1분 이상을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내 눈과 귀가 보고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왜냐하면 비성경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분의 설교는 원고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읽어 내리는 스타일이다.  마치 아동 문학가 강소천의 동시(童詩) ‘닭’을 읽는 것 같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한 번은 설교 노트를 보고 다른 한 번은 교인들을 쳐다보는 것도 코미디 같은 일이다.  성령을 거스리며 머릿속에 입력된 것이 없는 목사가 출력이 가능할 수 있을까?(눅 12:12). 

만약 성경적으로 설교를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주님이 설교 노트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설교 원고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면 비성경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성경적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형제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마 7:3),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이나 하는 짓이다(마 23:33).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목사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에 겸손은 사라지고 교만만 극성을 부리게 된다.  이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판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4:11-12).   

혹시 놓치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오순절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나 성결교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 그리고 감리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와 침례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 중에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American Pit Bull Terrier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을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독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은 항상 신학 논쟁을 통해 서로 물고 뜯고 난리 부르스를 친다(갈 5:15).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 E. P. Sanders에 의해 시작해서 James Dunn을 거쳐 존경받는 성경학자 중의 한 사람인 N. T. Wright가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을 내세웠을 때, 다른 교단 신학자들은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먹잇감을 만난 더러운 Hyena들처럼 일제히 비판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먼저 John Piper가 자신의 책 The Future of Justification』으로 Wright를 비판하면서 반박했다.  혹시나 놓치는 것이 있을지 몰라 Piper의 책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N. T. Wright 책도 같이 읽었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처럼 주석적 근거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Piper가 완패당하고 물러났다.  여기에 발맞추어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라는 말처럼 한국의 신학자들도 기존의 구원론을 뒤엎고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옛 관점’과 대비되는 ‘새 관점’에 대해 일제히 공격 모드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  정말 다시 한번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빌미로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일삼느냐는 것이다(딤후 2:23).  나하고 틀리면 다 이단인가?  용각산은 소리가 없는데 이것만큼은 시끄러운 ‘개소리’다.  특별히 목회의 열매는 없으면서 신학 논쟁에 열 올리는 목사들 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유혹이 무엇일까?  아마 ‘종교적 자긍심’에 사로잡혀 다른 형제에 대해 불신자 못지않게 행동하는 것이다(마 5:13-16).  이런 자긍심은 개혁주의 전통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단들과 우상들을 향해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마 7:1),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가운데 다른 형제들을 향해 비판한다(고전 4:5).  야고보는 이런 목사에게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수사의문문을 던진다(약 4: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를 ‘자본주의’보다 영혼에 더 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Rick Warren 목사가 사역했던 Saddleback Church를 다른 나라의 문물(文物)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극단적 태도를 가진 ‘국수주의’의 유혹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  무엇보다도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신학과 신앙에 근시안적으로 몰입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돈키호테처럼 신학의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 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미친 백정의 칼날은 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읽고 ‘허영의 시장’에 도사린 교활한 유혹에 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사실 신학 논쟁을 업으로 삼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사울처럼 신학적 위협과 살기만 등등하다(행 9:1).  목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영적으로 교만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 같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고(눅 18:9-14), 허구한 날 남의 허물만을 지적하고 들추어내는데 여념이 없다(민 12:8).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요 8:6).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고 떠벌리면서 사랑이 없이 Calvin의 5대 강령이라는 TULIP 만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TULIP 교리를 빼놓으면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다른 기독교 전통과 신학을 무시하는 행위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을 반영하지 못한 허세다.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이들은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거대한 저택의 화려하게 장식된 ‘칼빈주의’라는 대문(大門)에 환각 상태로 빠진 것처럼 매료된 자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자교단이라는 명목아래 가부장적인 행실과 태도를 교활하다 못해 능수능란하게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의 소위 단순함과 무지함을 비난할 만큼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신학적 체계에 불과하다면 그 ‘골병’든 신학은 개나 돼지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마 7:6).  이 신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영혼을 살리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논쟁만을 일으키는 신학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는 분명 ‘화’가 있을 것이다(마 23:15). 

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에 주의하지 않는 개혁주의는 사이비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닌 짝퉁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20), 사나 죽으나(롬 14:7-9),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나머지 답은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다.  이 질문의 답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고 아드레날린(Adrenaline)처럼 감칠맛이 나는 듣기 좋은 말을 들려주는 신학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갈 5:15, 26).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형제자매이자 양자 된 특별한 백성 됨을 드러내지 못하는 논쟁적 개혁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개혁주의는 디모데전서 6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관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고 의원들의 질문에 반문 화법으로 따박따박 대꾸하며 언쟁을 일삼는, 속되게 말하면 ‘주둥이 싸움’ 신학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를 똑똑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용어 하나를 가지고 논쟁을 하기 위한 지적인 틀도 아니다.  일관된 논리와 이론적 매력으로 눈먼 교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복잡한 신학체계는 더더욱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어 성령의 풍성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개혁주의든 골빈주의든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John Stott의 말을 빌리면 평신도에게 유익이 없는 논쟁을 일삼는 것은 확실히 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목회자가 주어진 목회에 생명을 받치지 않으면 그 목사는 100%로 삯꾼이다(요 10:10-15).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논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미련한 양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가 어떤 목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목사가 복음 외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 교회를 떠냐야 한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발육이 덜 된 미숙아처럼 논쟁과 말싸움을 일삼는(딤전 6:4), 스스로를 개혁주의라고 나팔을 부는 자들은 John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 종교의 토대가 겸손이라는 John Chrysostom의 말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하지만 Augustine의 다음의 말은 특히 그렇다. 가장 호소력 있는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 웅변가가 첫째도 ‘전달’이요, 둘째도 ‘전달’이요, 셋째도 ‘전달’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할 것이다”  개혁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덕은 논쟁이 아니라 ‘겸손’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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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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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복음 아래 완전히 패배하여 결박당하고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승리하여 천년동안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계 20:4).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하다.  먼저 천년 왕국이 도래할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고, 또한 천년이란 기간을 실제 역사적 기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기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천년왕국에 대해 ‘무천년설’, ‘후천년설’, ‘전천년설’(세대주의적/역사적)로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하나를 단정하여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모든 입장들은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상징적인 것인 동시에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상징적으로 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 견해들이 다양해질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느 한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도 그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천년왕국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신학적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듯 양측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그들 각자가 발견한 교리가 성경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보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그는 분명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된다.  만약 동일한 사람이 댈러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전천년주의자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무엇보다도 신학적 전통과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과 믿는 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금 더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 그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구약의 시편 2장 7절과 이사야 42장 1절 두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는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왕의 대관식’(슥 9:9), 혹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즉위식’,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직 하신다는 뜻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승인식으로 해석한다.  즉 하늘 보좌에서 들려온 두 구절의 소리는 예수님의 신분을 고난당하고 죽을 종이자 영원히 다스리실 왕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은 신학교 교수로부터 배운 ‘신학’ 아니면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왕의 대관식’, 혹은 ‘메시아 즉위식’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이나 요소가 없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겨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마든지 신학적 용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많은 용어와 표현들이 신학적 개념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유용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성육신,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 등의 용어들이 성경에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교회사를 통하여 발전된 확증들이다.  이런 신학적 용어들은 성경에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가치, 실천을 바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유다지파(창 49:10),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눅 1:32),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미 5:2),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사 9:6), 영원한 왕(계 11:15), 구원의 왕인 것을 성경은 증거 한다(슥 9:9).  하지만 요단강에서 물세례 받는 것을 가지고(막 1:9-11) 주야장천 ‘왕의 대관식’이라고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성경에 근접한 해석을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눅 1:35),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은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빌 2:6-8).  더 나아가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요 3:34)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았다(행 10:38).  다시 말해 성경에 ‘왕의 대관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과 직접 관련해서 ‘기름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사 61:1, 단 9:24-26, 눅 4:18, 행 4:27, 10:38, 히 1:9), 더 성경적이고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각 사람이 가진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본문에 충실하게 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해 신학 교수로부터 왕의 대관식으로 배웠던 사람은 장로의 유전이(마 15:3)나 안식일의 규정을 준수하는 바리새인처럼(막 2:24), 이 ‘전통적인 틀’을 깨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 가지 견해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문제는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견해를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성경해석이다”라고 비판해 버리는 좋지 못한 삐딱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신학교에서 배운 전통적인 해석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살벌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성경에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여 본문에도 없는 주관주의적인 ‘자기 해석’을 하는지 아니면 성경대로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해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보통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을 비논리적이고 잘못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할 때가 많고,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확신을 가진다.  그래서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분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 즉 교수로부터 배웠던 방법만이 가장 올바른 해석으로 굳세게 믿기 때문에, 이런 교조적 태도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킨다.  여기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다른 견해를 가질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ul은 말을 들어 보자.  “만일 우리가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주관주의를 피해야 한다. 주관주의는 오류와 왜곡을 낳을 뿐 아니라 교만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내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나의 견해라고 해서 나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대표적인 교만의 형태다.  나의 견해가 객관적인 분석과 증명의 시험을 견디지 못할 경우에는 겸손하게 그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주관주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교만을 부린다. 

D. A. Carson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해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전통적인 해석을 성경 본문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읽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전통적인 해석에다 성경의 권위를 이전시키고 그 전통적인 해석에 그릇되고 맹목적일 정도로 확실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전통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재형성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어딘가에 표류하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비평적인 자세가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면 분명 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Robert K. Johnston의 글을 인용한다.  “복음주의자들이 한결 같이 성경을 규범으로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많은 주요 이슈에 대해 서로 모순된 신학적인 공식들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현재 이해하고 있는 신학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이 권위 있는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복음주의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전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멸적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은 이견들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다른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신학과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바와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배워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 분야들, 즉 성경의 여러 난해한 구절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욥 11:7-9).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을(딤후 3:16-17, 벧후 1:20-21), 죄로 인해 어두움과 무지함 속(마 22:29)에 허덕이는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행 9-16)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눅 24:16, 25).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사 55:8-9).  즉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신학적 논쟁을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 논쟁을 일삼는 자들은 개혁신학의 원조(元祖)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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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의사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가끔 아내가 “남자는 여자가 아이 낳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모를 거야”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 당시 아내가 겪었던 고통, 분만 과정에서 얼굴에 실핏줄이 터진 것은 나에게 있어 조금 충격적 있었다.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좋아했지만 아내처럼 얼굴 전체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운동을 한 적은 없다.  사실 이러한 예화까지 든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밀려온다.  

가령 아기를 낳아 본 적이 없는 처녀가 마치 아기를 낳아본 경험 있는 여성 같이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황스럽게 늘어놓는다면 어떨까?  이는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과 과장이 심한 사람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인 ‘공상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에 걸린 중증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적인 상황이 논리적이지 않다.  둘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 극도로 싫어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와 같다.  한 마디로 이 병은 조현병 시초다.  

그렇다면 방언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신학적 혹은 성경적으로 이러쿵저러쿵 어떠한 주장을 내세우면 어떠할까?  하지도 않는 방언에 대해 무엇인가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것 말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이다(딤전 4:2).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처녀가 아기를 낳아본 것처럼 죄책감 없이 거짓으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마구 지껄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D. A. Carson 박사는 이런 사람들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며 떠들어 대는 것을 ‘소름 끼치는 허튼소리’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소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료들을 수집해서 무엇인가 다 아는 것 같이 말하면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마치 경험해 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때론 그들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리기도 한다.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불거린다.  하지만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  서울 가보지 않는 놈이 오히려 더 그럴듯한 이론이나 과장된 이야기를 통해 서울 갔다 온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하고 고집 센 사람이 우기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은사에 대해 말만 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인다.  이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Martin Luther가 외쳤던 ‘오직 성경’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성경을 증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 나간 목회자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성령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는데(엡 4:7-12), 왜 그 은사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느냐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 창설을 위해 주어진 것이고 사도직과 연결된 모든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을 지겨울 정도로 강조한다.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이다(롬 12:3).  이들은 성경 말씀을 엄청 강조하고 줄기차게 증거 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은 진리의 말씀(골 1:5),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벧전 1:23), 분명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야 정상적이다(롬 15:18).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2).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이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살전 1:5).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표적과 기사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믿는다(히 13:8).  그런데 말씀만을 지독하게 강조하는 교회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많이 모인다.  공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빵만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요 6:26-27).  문제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사에게 종합 진찰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검진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하물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영적 종합 검진을 받으면 교회 안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 병든 자가 있어도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눅 4:31-37).  그저 죽어 있는 메마른 메시지만을 전한다.  나는 목회자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쫓아내기 전까지는 그 더러운 귀신은 교회 안에 잠복해 있다고 믿는다(눅 4:31-37).  마치 가버나움 회당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막 1:21-28).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자들이 이런 사역을 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Lloyd Jones는 성령을 빼놓고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는 지극히 정통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사데 교회처럼 그 속에 생명력이 없어(계 3:1),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목회자 입으로 선포되는 그 모든 말씀은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볼로처럼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행 18:24), 본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심지어 아람어 성경을 들먹거리며 신학적으로 탁월한 학문을 소유할지라도 그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성경지식이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다(고전 4:20).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진리라면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요일 5:7),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살전 2:13).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마 5:1-2), ‘성령의 사역’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2:28).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진리의 말을 가르치셨다(마 4:23).  다 끝난 것인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눅 11:20),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막 1:29-34), 주의 능력으로 행하셨다(눅 5:17).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병 고치는 권세를 주신 적이 있었고(마 10:1-15),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도 똑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눅 10:1-20).  또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7-18).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막 16:20). 

사도 바울 역시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에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한다(행 14:3).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온 후에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했다(행 18:1-17).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6-40).  이와 비슷한 일들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15).  아덴에서는 어떠했는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행 17:16-34).  요지가 무엇인가?  복음의 능력은 날카로운 지성이나 논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학식과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은 그들의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다(고전 2:3-5).        

오늘날 교회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에는 열심이 특심이다(행 15:35).  그러나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들에 대해서는(고전 12:7), 바리새인처럼 적대적이다(마 9:34).  다른 것들은 다 주님을 위해 따른다고 나팔을 불어대면서 유독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만약 그 당시 그런 일들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했다면(요 14:12), 현대 교회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벧전 2:2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오직 말씀’이라고 말할 때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을 말하는 것인지(눅 1:37) 메마른 성경지식이나 죽은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렘 23:29).  ‘믿음’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히 11:6)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믿음이 아니다(약 2:26).  다시 말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진리의 말씀을 강조해도 그 말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면(막 16:20), 그 가르침과 설교는 죽은 말씀이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령의 일을 말해주는 것은 썩은 고기를 먹는 들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다(마 7:6).  구약 율법에 따르면 돼지(레 11:7, 신 14:8)는 불결한 동물로 일편단심 먹는 것만 알지 값비싼 진주를 모른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아는가?  만일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열어주지 않는다면(마 13:1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을 때(요 1:1-18), 바리새인들이 불신의 눈을 가지고 평생 그분을 핍박한 것처럼 대적할 것이다(요 8장).  예수의 이름으로(행 3:6),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행 10:38), 기적이 일어나더라도(요 11:1-44),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는다(눅 12:10).  이런 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복음의 가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경멸하고 돼지처럼 발로 밟고 내던져 버린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인 사람으로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이런저런 신학적 용어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나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약 2:8),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된다는 것이다(약 4:11).  하나님의 위상을 찬탈하는 이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말한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이런 부류의 사람은 신뢰와 진실보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를 위해 신앙생활에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는 논쟁(딛 3:9)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한 마디로 욕망이 높은 ‘관심종자’다.     

우리는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시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유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가식적인 위장꾼 들이며…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부흥의 흠집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분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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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성애’ 못지않게 ‘뉴에이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뉴에이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Dave Hunt가 쓴 『The Seduction of Christianity』에서 ‘코끼리와 소경들’이라는 재미있는 인도의 우화가 나온다.  하루는 네 명의 소경들이 동물원으로 코끼리를 구경하러 갔는데 한 소경이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지고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겼네.”  그러자 다른 소경이 코를 잡아보고는 “아니야, 코끼리란 놈은 뱀과 같이 생겼거든”  이번에는 또 다른 소경이 다리를 만지고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코끼리란 놈은 기둥같이 생겼어.  너희는 이렇게 만져보면 모르냐”  그러자 마지막으로 옆에 듣고 있던 소경이 꼬리를 잡으며 말하기를 “무식한 놈들 같으니! 다들 틀렸어, 코끼리란 놈은 빗자루같이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네 명의 소경들은 서로 상대방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대면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의 성급한 결론은 자신들이 만져본 일부분만을 이해했을 뿐 코끼리 전체를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의 잘못된 판단은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나서 그 지식을 통해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일반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각자의 제한된 지식을 기초로 해서 부분적이며 불분명한 사물만을 보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우화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하여 독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비논리적이고 그릇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절대적으로 옳은 것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틀렸다고 우겨 되거나 심하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마치 자신만이 진정한 실재를 파악한 것처럼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문제는 자기가 인식한 실재를 하나님의 진정한 실재와 동일시하는 망상증 환자 같은 병적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심리적 현상 중의 하나인 확증편향과 선택적 회피(Selective Avoidance)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우리 삶을 헌신코자 하는 어떤 일, 혹은 서로 다른 성경해석을 가지고 있는 분야들이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행 1:5), ‘천년왕국’(계 20:6), ‘은사들’(고전 12:8-10), ‘예정’(행 13:48,), ‘율법’(마 1:17), ‘삼위일체’(고후 13:13) 등등 여러 가지 난해한 것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욥 11:7-9).  다른 사람의 신학, 혹은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눅 18:9-14). 

혹시 입에 게거품을 물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메시지만을 증거 하면 된다(고전 15:1-5).  이렇게 말이다.  ‘이는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 일러라’(행 18:2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고전 2:2)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마 18:22)만을 증거 하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쓸데없는 신학적 논쟁을 통해 정신질환의 일종인 ‘관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인정받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 목사들은 연예인도 아니면서 자기 좀 알아달라는 관심종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행동양식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섣부른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요 8:15).  그 이유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관습 또는 관점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시 119:137), 불안하고 범죄 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14:4).  

예를 들어 누군가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기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이 기둥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코끼리를 빗자루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빗자루인 것처럼 인간의 유일한 실재란 자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기둥’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빗자루’나 ‘뱀’ 혹은 ‘벽’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경 그 자체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딤후 3:16), 사실조차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언제나 정확하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벧후 3:16).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한 것은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벧후 2:21)의 진정한 실재가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이라는 인식된 실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행 10:9-17).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사람들의 해석은 제각기 달랐다(12:28-30).  여기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정확하게 해석하실 수 있다마찬가지로 예수님 외에 각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완벽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롬 3:9).  정신 나간 소리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란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고, 혀로는 거짓말만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 저주와 독설이 가득한’(롬 3:13-14) 자들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썩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 즉 그것이 석의(exegesis)든 자기 해석(eisegesis)이든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 139:6).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린도전서 4장 3-5절 말씀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굉장히 신실한 종으로 보이는 목회자라도 그 마음속에는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을 감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탁월하지도 않고 뚜렷한 열매를 거두지도 못한 목회자로 보일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일 수 있다.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롬 2:1).  주제넘게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마 7:1).  신학적 ‘꼴값’을 떨지 말아야 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 교회에서 잘 알려져 있는 칼빈주의 신학자 Richard Gaffin 박사가 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고 싶다.           

먼저 동시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겠지만 사도행전 10장과 19장이고, 그 후에 받은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이다.  중생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과 중생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주장하면 이단인가?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목사와 신학자들은 Harry G. Frankfurt 박사가 말한 대로 ‘개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둘 다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기 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물세례를 받은 후에 받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물세례 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서이다.  그 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마리아 사람들(행 8장)과 에베소 사람들인데(행 19장), 막상 사도행전 2장에는 전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혹시 목사들 중에 인도의 우화에 나오는 네 명의 소경 같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그 짧은 신학을 통해 코끼리 전체를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정신이 몽롱한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세례 받기 전이나 물세례 받은 후나 모두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무식하게 우겨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다른 질문은 성령세례는 “사역자의 안수를 통해 받는 것인가?” 아니면 “안수 없이 그냥 받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성경에 보면 사역자의 안수와 함께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은 것으로 기록된 곳은 2장과 10장이다.  성령세례를 목사의 안수  없이 받으면 이단인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세가 안수한 적이 없는 장로 칠십 명에게 임한 신(spirit)은 어떻게 해석할지 참으로 궁금하다(민 11:17, 25).  안수를 통해 받든, 안수 없이 받든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무식하게 논쟁(딤전 2:23)을 일으키는 목사가 있다면 그 배후가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99%가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다.  100%다.  왜냐하면 논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신학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딤전 6:4-5)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귀적이다(약 3:14-16)..  

이와 같이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의 사건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볼 때에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교단 신학이나 다른 교파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것에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오순절 신학과 웨슬리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을 ‘개떡’ 같이 배운 사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만을 ‘주야장천’ 배운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확증편향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자신이 배워 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확실하다고 믿을 때에 나타나는 독선적인 반응이다.  이런 목사를 만난 신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삯꾼은 신학적 논쟁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복음과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요 10:10-12).  진실을 말하자면 신학적 논쟁만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어진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매가 그것을 증명한다(마 7:20).      

심지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단들처럼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딤전 6:4).  하지만 토론과 각자의 입장을 비교하는 일을 통해 많은 것을 서로 겸손히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또한 우리의 이해를 진정한 실재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야 한다(벧후 1:20-21).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듯이(사 55:8-9) 우리 자신의 ‘신학적 해석’이나 ‘신앙관’이 그분의 생각과 견해에 일치한다고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롬 11:33-34).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신학은 목이 곧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심하게 대적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행 7:51).  

사족이지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고‘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마 23:33).  독사의 새끼들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어느 목사가 독사의 새끼처럼 신학적 논쟁을 통해 분쟁을 일으키는지 말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목사만이 존재한다.  참된 목자와 삯꾼 목자.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다.  누군가가 참 목자가 아니면 그놈은 삯꾼 목사다.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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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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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온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성경 원서의 언어를 알고 성경의 문학적 구성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체계적인 신학 이론 등을 잘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즉 성경지식이 풍부한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처럼(요 10:27),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대신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잠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잠 2:10),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축복이다(호 6:3).  우리는 언제나 ‘성경관주’와 ‘신학해설사전’, 그리고 ‘성서용어색인’과 ‘신학 논문’, 혹은 ‘다양한 번역본’과 여러 ‘주석’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또한 그 많은 서적들이 모두 지식층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열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 지식이 풍부해질 때 생기는 교만과 자만심이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들, 특별히 신학자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풍부한 지식으로 업적을 이루거나 연구할 때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들은 매일 성경을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요 5:37-47).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눅 11:52), 그 계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 마음에 있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절의 종교 지도자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랍비’라 칭함을 받으면서(마 23:1-7),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던 이스라엘의 선생들이었다(요 3:10).  하지만 이들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마음이 강퍅하고(요 8:13),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이었기에(눅 16:15), 하나님의 음성(요 5:37)과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생명을 주며 깨우침을 주는 말씀이 그들의 닫힌 마음과 귀, 생각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요 8:47).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이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인위적인 법의 강요로 인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눅 11:52).  그 결과는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보내졌다(마 23:13).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사 9:16).  이 종교 지도자들의 눈먼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다’(마 23:24).  사소한 신학적 논쟁 즉 외식적인 정결법에는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영역 ‘의’(justice), ‘인’(mercy), ‘신’(faithfulness)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해 가차 없이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한 경고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곱 가지 행위를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퍼부으셨다(마 23:13, 15, 16-22, 23-24, 25-26, 27-28, 29-36).  이들은 이미 구원받을 희망에서 제외된 자들이다(마 23:33).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만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마 17:5-6).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음성을 들으셨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 대신 우레와 천둥 치는 듯한 소리만을 들었다(요 12:28-30).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이 올바로 서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해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소리는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30절).  그러나 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들이 제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오직 예수다(28절).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 구절을 꼭 기억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을 심히 핍박한 바리새인들은 어떤가?  이들은 명석하고 총명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한 지식은 성경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자신들의 귀를 막았다(요 8:45-59).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항상 겸손하셨기에(마 11:29), 한 번도 아버지의 음성을 놓치신 적이 없었다(요 5:30, 8:28, 12:49, 14:10).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지(잠 3:34), 성경지식이 많아서 그 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바리새인 같은 ‘관심 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딤전 6:4).  이런 자들에게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쓸데없는 변론과 궤변에 병적으로 열광적이라는 것이다(REB).  유익이 없는 논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병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이런 악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타난다(딤전 6:5).  

사실 겸손하거나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다지 총명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현대교회 목회자들처럼 세련되어 보였을까?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  이 분의 약력은 이렇다.  우선 가방 끈(학벌)이 짧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가문의 배경이나 정치적 기반이 전무하다.  인맥(人脈)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조차도 없다.  세상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낄만한 조건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절).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할 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요 5:19)과 순종할 자세(마 26:39)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 지식을 통해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자기만족, 즉 ‘교만’이라는 시험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지식의 소유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의 지식과 수양, 그리고 전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낙오자들이었다(마 15:1-9).  이러한 이들의 고집과 교만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상하신 적이 있었다(막 7:1-13).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말씀만을 하셨다(눅 8:10).  또한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도록 교만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감추어 버렸다(마 13:10-15).  다시 말해 지식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도록 숨겨 두신 것이다(막 4:11-13).

이런 지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뜻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하나님 말씀이 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22)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듣기에는 자신의 박식함을 모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기에 불쾌하게 여겼다(막 11:18).  이들은 누구인가?  대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이자 교사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대단히 경멸하는 관계였지만(행 23:6-10),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마음을 같이 했다.  예수님의 모호한 진술은 완고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좌절시키는 한편, 동시에 진지한 추구자들의 호기심을 북돋우는 이중의 과제를 성취한 좋은 실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상징적인 표현법에 매우 불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건이 있었다(요 6:41-60).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해결해 주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육의 양식을 향한 그들의 욕망에 대응하여 은유법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다.  이는 기적적인 겉표면만 보는 육적인 사람들에게 빵 이외의 더 깊은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요 6:53-58).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시험거리였다(요 6:60). 

만약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끝까지 그분과 함께 했더라면 이런 상징적인 표현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의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군중의 주위를 맴돌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의 양식’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불쾌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 그것이 성경지식이든 신학적 지식이든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는 것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누구든지 늘 겸손하지 않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성령을 대적하는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D. A. Carson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리와 지식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지적인 교만에 빠지기 십상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지적인 교만은 자기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해 ‘자기 부인하는 사랑’(self-denying love)을 발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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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은 타인에게 이목을 끄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명령받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가져온 불은 NIV 성경에서 ‘인가받지 않은 불’(unauthorized fire)로, KJV성경에서는 ‘이상한 불’(strange fire)로 번역했다.   이 불은 공인되거나 율법의 규정된 방법대로 드려지지 않은 ‘불경한 불’이다(출 30:9).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 불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는 반대되는 ‘다른 불’이었다(레 10:1).  이 불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Rabbi David Rosen의 말을 인용하면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드려진 불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의법’을 어긴 것이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제사를 업신여겼을 뿐 아니라(삼상 2:17),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울처럼 두렵고 떨림 없이 마음대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삼상 13:9).  이런 불신은 의도적인 거역으로 이어져 모세와 아론, 그리고 다른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드리는 불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만큼이나 좋을 것이라고 믿었던 잘못된 신앙, 즉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은 그분 보시기에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가령 어떤 불신자가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지(갈 3:13)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단지 마음이 열려있을 뿐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롬 1:3),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죽는다면(요 14:6), 그 사람은 성경에서 기록된 대로 당연히 지옥에 갈 것이다(요 8:24).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은 단지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요 8:31-37),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행 2:39), 그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7:21-27). 

예수님께서도 “나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 있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눅 11:28).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해 적대적인 것보다는 열려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사실이다(눅 9:50).  하지만 이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영적인 것을 진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열려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고전 12:31).  그 역시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모하며 구하라고 말한다(고전 14:1, 39).  여기서 은사들을 ‘사모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추구하다’, 달라고 요구하다’, ‘열망하다’, 얻으려고 애쓰다’ 등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그 속에 함축된 의미를 따라 해석하면 ‘사모하기를 계속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세기에 사람들은 치유와 기적들을 찾아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녔다(막 6:53-56).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져서 낫기 위해 왔다.  그들은 질병과 귀신들이 떠나가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병든 자들을 주님께 데려왔다(마 8:14-16).  이들은 산을 옮길만한 열정을 가진 믿음이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것을 열망하고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같은 성령의 놀라운 기적과 치유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겔 20:7).  여기서 ‘우상숭배’가 순결함의 상실이라고 말한다면(요일 5:21), ‘율법주의’는 수가성의 여인이 가진 신앙처럼 하나님과의 친밀성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4:20-24).  이것 못지않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거두어가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하며 차단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바리새적 ‘불신’을 들 수 있다(마 12:22-37).  이러한 것들은 현대의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한다.

여기서 불신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주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신과 경멸에 직면하셨던 적이 있었다(마 13:53-58).  이러한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기적적인 사역에 어떤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가는 그것에 대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라고 기록한다(막 6:5).  이상하지 않는가?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서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이유 말이다.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기적을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가 마리아의 아들인 평범한 목수일뿐(막 6:3),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사 53:1-3).  다시 말해 보잘것없는 목수와 초자연적인 선지자 사이의 대조가 너무 극명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결정이었다(막 6:6).  그 결과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으로 인해 야이로 회당자의 딸을 살리신 일(막 5:39-43)이 무색할 정도의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할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다(엡 1:17-18).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히 4:2).  한 마디로 불신앙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히 13:8).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초대교회처럼 아무런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초신자들도 알고 있듯이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오직 예수’를 지겨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설교를 한다.  그런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마 8:16)라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신이 성령의 능력을 가로막고 철회시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모두가 건강하고 귀신 들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눅 4:18, 행 10:38).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대교회가 가진 슬픈 현실이다.  여기서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에는 기적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거짓 선생들이다.  나는 분명하게 드러난 이단이나 사이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개신교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유명무실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이들(딤후 2:17-18)의 왜곡된 가르침이 믿음을 파선시켜 잘못된 신앙으로 양산(量産)해 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치유하시고자 한다는 것에 관하여, 혹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시 않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일부이지만 James Montgomery Boice는 마태복음 12장 39-42절을 가지고 실제로 기적을 구하는 것은 악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교회의 목사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바로 그것을 교회에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는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신자들은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직접 체험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현대교회에 사역하러 방문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분명 이들의 신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전통이나 불신으로 온몸이 묶여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시고’(막 6:5-6), 나사렛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많은 병자들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로 나사렛을 떠나신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셨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 기회가 한정 없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다고 말만 해 놓고 믿음을 온전히 갖지 않는다면(히 11:6), 우리는 결코 그분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Thank you’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복음주의 지성 가운데 한 명으로 잘 알려진 Dallas A. Willard 박사가 오래전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 Developing a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God』에서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렇게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로움과 악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죄들에 대한 일화는 하나님의 한분 위(位)를 추구함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이라고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니라’(대하 7:14).  우리 시대의 교회 목회자들의 중요한 임무들 중의 하나는 교회가 이 약속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을 버리고 성경의 한없는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 더 나아가 기적의 하나님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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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농장으로 유명한 South Africa Worcester의 어느 강당에서 Andrew Murray와 함께 사역하던 부목사 J. C. de Vries의 인도로 60여 명의 교회 청년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는 동안 갑자기 성령의 불이 임하자 사람들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와 임재를 느끼며 일시에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858년경 남아프리카 공화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Murray 목사는 다른 예배실에서 저녁설교를 마치고 교회 장로 한 사람을 통해 청년모임에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현장으로 갔을 때,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부목사는 통제할 생각이 없는지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Murray는 청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당부하였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큰소리로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의 목사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도 호응하지 않고 그들은 계속 기도를 하면서 견딜 수 없는 죄의 무게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몰두해 있었다. 

부목사 역시 하나님이 임재 앞에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계속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다시 Murray는 힘껏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셨지만 결국 화를 내며 예배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여기는 모든 게 엉망이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날도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모임에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청중들의 자발적인 통성기도가 터져 나올 때마다 신비스러운 천둥소리가 세차게 울리면서 교회 건물 전체를 감쌌다. 

이번에도 Murray 목사는 통로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동분서주할 때, 마침 미국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한 부흥의 현장을 보고 돌아온 무명의 한 성도가 그에게 다가와 “이 교회 목사님이시군요. 당신의 행동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목격하고 왔는데 이와 꼭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곳에 주의 영이 역사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후에 Murray는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과 그동안 성령의 깊은 역사를 방해했던 것을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통회 자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였다. 

이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인 소설이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눈과 귀에 성령으로 할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막 4:12).  이것은 J. Edwin Orr의 책 『The Fervent Prayer』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Murray는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부흥이 임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인간의 감정의 폭발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흥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교리 안에 갇힌 신학과 편협한 신앙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오늘날 Andrew Murray의 깊이 있는 가르침과 저술을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Murray가 쓴 모든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신학자나 목사라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엡 1:17-19),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이 감겨 있는’(마 13:14-15) Murray처럼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고전 2:14). 

이러한 일은 1730년-174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에 있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에도 일어났었다.  그 당시 Jonathan Edwards는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사람으로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는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의 현상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중 『The Great Awakening /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Series, Volume 4』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큰 은혜에 복받치는 것 같았고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픔을 느끼면서 방안은 통곡과 꺼꾸러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부르짖음과 고꾸라짐, 경련과 같은 현상들과 함께 애통함과 기쁨도 방안 가득히 충만했다”라고 말한다.  또한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서는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향한 큰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도 했다. … 때로 그들은 소리 높여 크게 찬양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고 때로 그들은 혼절하기까지 했다”라고 증언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 먼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적 대각성을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열매로 판단할 것과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다섯 가지를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제시하였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설사, 그 현상이 눈에 거슬리고 보기에 낯선 것일지라도 이러한 다섯 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둘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셋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성경에 대한 높은 관심).  넷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건전한 교리와 신학).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러면서 그는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강조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이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걸림돌 역할을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배교와 무서운 범죄를 보게 될 것과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면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를뿐더러 그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언적인 말까지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면 바리새인의 비판 정신과 불신앙 때문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Edwards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패역하고 트집을 잡는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을 하실 때마다 물(?) 귀신처럼 물고 늘어졌다(마 12:22-37, 막 3:20-30, 눅 6:43-45, 11:14-23, 12:10, 요 8:1-11).  얼마나 지겹게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런 일은 지나간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종처럼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쟁을 일삼는 목사들 말이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들이다(막 14:21).  나는 이런 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고 싶다(마 23:33).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에는 독사가 많다.  그러면 한국은 ‘개’(Dog)가 많은데, 예수님이 오시면 이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빌 3:2).

사실 교회사를 보면 참 부흥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이것을 가장 반대했던 세력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가톨릭이 신앙의 위인들을 이런 이유로 박해했고, 개신교 안에서도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이유로 핍박했던 것이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갈 4:29).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상기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을 핍박하는 것 말이다. 

이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제도주의와 전통과 예의, 그리고 질서와 형식과 의식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몇 세기 동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법에 수백 개의 종교적인 전통들을 추가하여 유대인의 각 영역들을 통제하면서 모든 규칙과 의식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한 자로 낙인찍었다(막 7장).  Murray 역시 모든 것을 질서대로 통제하려는 것과 위엄 있는 거룩한 종교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애즈베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각성 운동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장난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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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해 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깎이거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시 24:3-4).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이다’, 혹은 ‘악령의 역사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사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IHOP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 때,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Peter Wagner 박사,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필수과목인 YWAM Kona, 치유와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Reinhard Bonnke 선교사, 그 외 Randy Clark을 비롯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자칭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사역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이들을 만난 이유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알아보고 쓰러지는 현상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책을 통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그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귀신이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말이다.     

그런데  이단 사냥질 하는 목사와 신학자 중에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영적세계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발췌독하는 가운데 영악하게도 빗나간 해석으로 독선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하게 모르면 “체험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라고 말하면 좋을 뗀데 명색이 목사라고 쪽팔리는지 신학적 궤변을 내세워 무조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세운다.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한 마디로 바리새인처럼 ‘싹수가 노란’ 것 같다(마 12:22-37).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할지 안 변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지금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성경적으로 말하면 독을 품은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요 8:44). 

나는 장기간 말씀의 사역을 하다가 성령의 사역을 목회에 접목시켰다.  처음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나서 사역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강한 호기심에 사로 잡히곤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성령의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통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분의 역사를 기대한 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싶어 했다.  이런 미숙한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역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목회의 모든 측면에서 동기자체가 순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쓰러지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사역자 스스로가 순수한 동기를 가지려는 노력은 어려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기름 부어 주신다는 그럴듯한 증거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역자 안에는, 즉 그 사람이 ‘성령의 사역’을 하거나 혹은 ‘말씀의 사역’을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행동들은 엄청난 유혹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구제, 기도, 금식을 했다(마 6:1-18).  이 성경구절이 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을 했다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고전 10:11).  그러나 자기 자신만큼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권능 아래 압도되어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오만의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현상이 극적이고 가시적이며 사역자 자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쓰러져 안식한다는 것은 사역자 자신이 거룩하다는 징표가 아님을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막 7:20-23).  정신과 의사이며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는 이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았다는 이런저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한두 가지의 비밀스러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천천히 익숙해져 간다. 그러한 죄가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런 지도자를 쓰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사실 그 지도자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상투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이나 특권을 오용할 수 있기 때문에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가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사역자는 그런 일을 멈추고 단념해야 만 할 것이다.  만약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 자신이 직접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현상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안수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역자가 안수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상대방을 놓고 큰 소리나 혹은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효과적인 중재이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중재 형태는 때때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역자가 쓰러지는 것을 열망한다고 여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 중요성에 대해 과장된 개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역자는 사람들 앞에서 극적인 효과를 노리게 된다(마 23:5).  그 결과 기도받는 사람은 최면술의 자기 암시로 성령의 임재와 무관하게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보이므로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죄의식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쓰러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성령의 임재와 상관없이 무언가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일부러 쓰러지고, 또 다른 사람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맡김으로 그분의 임재 아래 쓰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사역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미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너무 익숙해 있어 꼭 쓰러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는 감정적으로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쓰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사역자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고 치료하실 것을 열망하는 것이지(행 4:10), 그 사람이 성령 안에 쓰러져 안식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John White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물론 쓰러지는 것과 안식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20절 말씀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안식할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혹은 영과 육이 치유받거나 또는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사역자의 노력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막 16:17-18), 사역자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보잘것이 없음을 통감해야 한다(눅 17:10).  이러한 현상이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것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행 3:12).

따라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Lloyd Jones가 『부흥』에서 말한 것을 인용해서 결론을 내리고 싶다.  “현상들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들을 허락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우리의 눈을 언제나 주님의 영광에 고정시키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전 5:19-22).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행 16:7)에 사역자는 현상이나 체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영적체험을 하더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히 12:2).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오직 예수’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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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거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마 16:17).  예를 들어 “시저가 주다”라고 말하도록 요청받는 시대에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고전 12:3).  여기서 “예수가 주(主)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고백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애주의나 놀라운 표적과 기사 등의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고백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의 독특한 신성을 믿지만(요 5:58), 성부와의 동질성과 동일 영원성 및 성육신을 믿지 않는다면(요 10:30, 1:14), 그는 신자도 아니고 성령은 그 속에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세에 주의해야 할 부분은(마 7:21-23, 24:23),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일(막 16:17-18)을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행 16:16),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살후 2:9).  사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마다 마귀도 기회를 노려 가능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무산시키려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모조품을 제시하려고 애쓸 것이다(고후 11:1-3, 13-15).

Lloyd Jones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성령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소멸의 위험과 다른 하나는 무작정 수용하는 것으로 성령을 소멸할까 두려워 영적인 분별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부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현상들을 장려하거나 추구해서도 안 된다. 나는 그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나왔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성의 연약성과 우리 육체의 체질이 약하기 때문에 혼합되기 쉬우며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심리적인 면에서 부분적으로는 마귀의 활동 결과로써 함께 섞이기 쉽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일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신약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언제나 다른 세력들이 개입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거짓된 것을 떼어내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각오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술책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물리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때마다 무조건 마귀의 자식인 바리새인들(요 8:44)처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하지 말고(마 12:22-37),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후 5:19-22).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싸잡아 비판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바리새인 가마리엘처럼 말이다(행 5:38-39).    

정신과 의사 제3 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역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표적들 가운데에는 변태적인 심리 혹은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표적들은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고 계시다는 징표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쓰러지고 진동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아니라면 성령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실 것이고, 반면에 쓰러지고 진동하는 경험이 없어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열매이다”  

이 말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자가 경건하거나 모든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열매를 보아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듯이 쓰러진다든지 몸이 진동한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보다는 그 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마 7:19-20).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임재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에서 체험의 결과와 열매에 대해 자신의 아내 Sarah Edwards에 대해 말했듯이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생활 속에 그분의 영광과 열매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13:1).   

Edwards도 무엇이 성령의 진짜 역사하심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판단의 표준들을 설명하였다.  그의 첫 번째 문제는 그의 집회 기간 동안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으로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떨거나 신음을 하거나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몸의 고통을 느끼거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동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영향력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감동에 의해서 어느 쪽이든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규칙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표현 자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이러한 표현들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표현들이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에 대한 정당한 반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진짜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가려내야 한다(요일 4:1).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있어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이 되는 기준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즉 성경에 무식하리만큼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주관주의적 ‘자기 해석’이나 앞뒤가 꽉 막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독단적인 주장’, 그리고 쓸모없고 죽어 있는 ‘교회 전통’과 어떤 조잡스러운 ‘신학적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행위가 성서적이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Edwards는 성경이 어느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을 결정하기 위한 유일한 테스트는 그 역사하심과 그로 인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느냐는 것으로 판단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참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도록 주신 테스트이다.  성경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7:18-20).  간추려 말한다면 교회나 집회에서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편견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행 10:9-16).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날마다 아내를 핍박하던 불신자 남편이 어떤 계기로 인해 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통해 놀라운 체험, 즉 몸을 떨고 쓰러지거나 비명소리를 질렸다고 가정해 볼 때, 아니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면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못해 그러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수군거리며 멀리할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쉽게 판단을 내린다.  거의 심판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수준이다(약 4:11-12).  하지만 그 현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예전과 같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께서 그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막 5:1-20).  

요지가 무엇인가?  눈에 거슬리는 이상한 현상은 어떤 행위나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를 결정하는 성경적인 유일한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22-23).  Edwards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마디로 정리한다.  “과수원의 토양보다는 그 열매가 중요하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메마른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묵은닭(?)들보다는 한번 쓰러지고 난 후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녹내장 환자처럼 할례 받지 못한 눈을 가지고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삼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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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Jebb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과 요한일서 4장 1절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No Laughing Matter』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성령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은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웃거나 몸을 흔들거나 넘어질 때 이들 위에 성령이 계신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며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받은 전체적인 인상은 이러한 현상이 주로 그 상황에서 자기 유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지 않았고 그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과 존경심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령을 소멸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토론토’ 현상도 이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1994년 초 Toronto Airport Church에서 일어난 현상을 두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쓴 글이다.  그는 John F. MacArthur의 책 『Charismatic Chaos』의 글을 인용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크게 체험하는 것은 어떤 굉장하고 이상한 기적이나 기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성령께서 다스리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현상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비성경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기괴하고 무질서한 것은 멀리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Jonathan Edwards의 시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고전 14:33, 40)에 대각성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못했다.  이들은 집회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반응들이 너무 이상하고 혼란스러움으로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절대 역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비난들은 Edwards 당시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행 2:6-13),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종류의 집회에로 돌려지고 있다.

Edward N. Gross는 『Miracles, Demons, and Spiritual Warfare』에서 Charles Hodge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감동을 종교적인 감동의 올바른 결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성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결과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설교에 따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집회 내에서의 울부짖음이나 기절이나 경련 혹은 헛소리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성경의 권위는 그러한 모든 혼란에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모든 것들이 점잖게 질서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올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스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나는 Charles Hodge의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한다(살전 5:21).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무질서 속에서 질서 있게 일을 행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창 11:9), 하나님의 역사가 때로는 조용하게(왕상 19:12), 때로는 강하게 나타나는 것(행 4:31)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성급하게 싸잡아 취급하는 잡설(雜說)에 가까운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이렇게 Gross가 인용한 Hodge의 말에 반하여 성경에는 육체의 감동이 성령에 대한 올바른 영향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부분이 많이 있다.  신구약 성경에 따르면 성령의 임재는 때때로 사람들 속에서 육체적 반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즉 눈물, 울부짖음, 경련, 황홀경, 몸의 힘이 빠짐, 흔들림과 떨림, 육체의 쓰러짐까지 다양할 수 있고, 이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연합하여 일어나는 극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현현(출 19:16-25), 천사의 출현(마 28:4), 귀로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음성(마 17:6-7), 환상들(단 10:7-11), 주님께 대한 반응들(요 18:6), 그리고 예수님의 출현을 통해 일어났는데(행 9:3-9),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다소 명백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경험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도의 차이가 아주 작지만 확실한 현상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하므로 떨며’라고 기록하고 있다(시 119:120).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을 기대하셨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렘 5:2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무형의 임재 속에서 떠는 것은 결코 육체적으로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사 66:2, 스 9:4).

더 나아가 우는 것도 하나님의 무형의 임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사실 이렇게 우는 것이 히스테리나 심리적인 속임수의 결과가 아닌 이유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그들이 자연스럽게 울었기 때문이다(느 8:8-10).  그리고 때로는 술 취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도하는 동안 한나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삼상 1:12-17).  입술만 움직일 뿐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은 한나의 이 같은 모습은 내적으로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여호와 앞에 해결해 보려는 진정한 경건의 표현이었다.  본문에는 ‘취한’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 왕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을 때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면서 취한 것 같이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삼상 19:23-24).  신약에 와서는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새 술에 취했다는 소리를 들었다(행 2:13).

무아지경 역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기도하는 기간 동안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후에 내가 예루살렘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무리들 앞에 스스로를 변호한 적이 있었다(행 22:17-18).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의 또 다른 범주는 날카로운 비명과 의식불명, 그리고 경련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갈 때 나타나는 반응들이 있다(막 1:21-28, 9:14-29).  이것에 대해 John Wimber는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과의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Gross는 또다시 Hodge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서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러한 구절은 대중 예배를 행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언급으로 질서와 엄숙함과 헌신적인 태도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금해야 한다. 큰 소리로 울부짖음과 경련은 이러한 것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목사가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으로 뛰어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없다면 그 신학은 메마른 박제(剝製) 신학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한 두 가지 상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교회는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은사적(고전 12:12-27),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행 7:51)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져 있어(행 9:18) ‘의견의 다양성’과 ‘시각의 다양성’, 그리고 ‘경험의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관종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무식하게 우겨 되는 교조주의적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특별히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을 자신이 배운 신학 안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자의적 해석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은 항상 옳고 상대방은 언제나 틀렸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확증편향에 의한 아전인수식 사고방식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것은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과대망상증 환자 같이 자기 생각 속에 그릇된 자부심을 고취시킨다.  더 무서운 증세는 피해망상과 피해의식이다.  자신만이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태가 좋지 않다.  이런 사람은 하루빨리 영적 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할 시급한 환자라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 배후가 귀신의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고, 의학적으로 말하면 조현병이 서서히 진행 중에 있다.  가장 큰 불행은 본인이 이것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제시한 대답은 이러한 무경험 비판자들, 특히 히스테리컬 한 병적 증세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는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큰 외적인 표현들을 회피하지 않도록 그들이 참석하고 있는 공적인 수단을 방해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내가 이것이 혼란스러움이나 불행한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비오기를 기도하기 위해서 들에 모였다가 소나기가 오면 그들의 행위를 멈추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명령이 주어지는 목적을 이룸으로써 중용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마귀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고 있는 동안에 땅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질서적이거나 경건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진실로 사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혼란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의 시작 무렵에 손을 자발적으로 흔들거나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떠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전증 환자이거나 파킨슨 병에 걸려 떠는 것인가?  절대 아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예배를 드린다(고전 14:26).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하는 진정한 육체의 표현들이 있는 곳에 진짜의 것을 모방한 자기 과시적인 가짜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고전 14:29).  보통 이런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이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아니다.  경험한 바로는 이들이 종종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좋은 신자들이다.  메마른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함 사람들이다.  John Wimber 말한다.  “20세기의 교회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는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이지, 인간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박스 안에 가두어 놓은 질서가 아니다”(사 55:9). 

Lloyd Jones 역시 모든 일은 질서 있게 해야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살전 5:19).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는 만일 우리가 실제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킨 정도까지 질서 있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점잖게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사용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실제적인 육체적 반응을 억제하려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불을 끄는 위험 속에 빠질 수 있다(살전 5:19).  만약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표현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도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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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자 David Lewis 박사는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을 할 때, 대체로 자신이 깨끗하게 죄 씻음 받는 느낌의 체험을 한다고 덧붙이면서 Harrogate 대성회에 참석했던 어느 한 사람의 간증을 인용하여 『Healing: Fiction Fantasy or Fact』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지금 바닥에 누워 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내게 뭔가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자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서 아주 깨끗이 씻어버린 기분이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Benedict Haren 목사 역시 수년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Francis MacNutt 박사에 의해 방언으로 기도를 받고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두 시간 동안 안식을 경험하고 나서 자신이 치유받은 것을 『Praying for Healing』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을 한다.  “1975년 어느 신유집회에서 MacNutt 박사가 내게 안수기도를 해주었을 때 난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성령 안에 안식을 하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누워있는 동안 평소에 대화나 책을 통해 이해했던 것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게 이 문제에 관해 한결 깊이 있는 통찰력을 부어주셨고 그 체험이 이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있는 영적 축복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물리적인 현상은 교회사에 걸쳐 일반적으로 나타났었다.  John Wesley와 같은 기간 동안 미국 역사상에서 가장 큰 신앙 부흥운동 중의 하나인 제1차 대각성 운동이 1735년 북미 식민지에서 Jonathan Edwards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났다.  사실 Edwards는 조용하고 이성적인 설교자였지만 그는 종교적 체험에 탁월한 신학자로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하여 그보다 더 자세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쓴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때 “설교는 눈물, 진동, 울부짖음, 육신의 고뇌, 그리고 몸의 힘이 빠져버리는 것과 같은 인간의 육체에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평가되어서는 된다”라고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조하기를성경에서는 몸이 힘이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은 특이한 체험에 관한 것을 금하라는 규정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4번 이상 설교를 한 적이 있는 George Whitefield가 고향 마을인 Northampton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그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The Great Awakening』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교회 전체가 울음바다였고 쓰러지는 등의 역사로 가득했다. …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시간이나 계속된 기도, 찬송, 상담, 등으로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의 사람들에게는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마을전체의 신앙에도 발전을 가져다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Whitefield가 방문한 이후에 같은 현상이 Edwards 자신의 목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듬해인 1974 그의 집에서 설교할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하게 압도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Edwards의 아내가 집회 기간 동안 강력한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았는데 Guy Chevreau는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의 글을 인용해 『Catch the Fi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orthampton 교회는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다. Edwards 부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나 충만하여 육신의 힘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녀는나는 계속해서 미래 세계의 뚜렷한 환상과 영원한 행복, 그리고 영원한 비극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라고 썼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 몇은 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시간이나 교회에 남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신이 힘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Sarah Edwards는 부흥 집회기간에 하나님의 능력과 환희의 임재를 계속해서 비슷하게 체험하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십칠 일간 멈춘 적이 없었다고 간증한다. Edwards 역시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Jonathan Edwards on Revival』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감동은 빠르게 전체로 퍼졌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되고 비참한 상태와 상황에 대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전체는 오로지 부르짖음과 기절과 같은 것으로 가득 있었다.”

그러면서 Edwards는 부흥에 기간 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일어났던 일과 집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먼저 아내에 대해 “어떠한 영적인 자부심도 보이지 않고 더욱더 온유하고 겸손해졌으며 남을 배려하고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가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역사라는 명확한 ”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만일 이것이 열망의 혹은 나사 빠진 두뇌의 열매라면 두뇌를 그렇게 행복하게 나사 빠지게 해 주시고, 이것이 정신착란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비롭고 부드럽고 은혜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에 빠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열매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단 말이며, 그분이 임재하실 어떤 종류의 열매를 우리에게서 내셔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나는 성령께서 영광으로 부어주시는 그러한 것들, 신앙적인 만남에서 기쁨과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거부된다면 무엇이 남아서 우리가 무슨 관념과 사상으로 높고 축복되고 환희에 소망의 시간을 맛볼 있을 것인가? 다른 무엇에 달콤하고 경이롭고 환희에 신앙의 본질이 있단 말인가?” 사실 18세기 청교도 개혁신학자 Edwards의 고백은 오늘날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사들, 특히 이단 사냥꾼들에게는 상당히 비위가 상하는 말이거나 비성경적일 것이다.  거의 이단이나 사이비에 가까운 신비주의적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Lloyd Jones는 “Edwards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며, 그는 200년 전에 이러한 현상을 목격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였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Edwards는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Christian History, Vol. VIII』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지나친 감정 표출이나 사탄의 개입에 대한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래서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살전 5:21),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요일 4:1), 그 나타남의 강도와 크기가 아닌 뒤따르는 열매로 판단하였다(마 7:20). 

또한 세심하게 육체적 임재 체험과 열매의 관계, 즉 성령의 내적역사와 이 역사가 육체 밖으로 나타나는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은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 안에서 감정과 의지에 영향을 주지 않은 임재의 능력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의 일부 사람들은 이런 무질서한 현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마귀의 역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Edwards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질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한, 수단으로써의 그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와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것 같다(행 7:51).  주로 영적으로 무지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소수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행 9:18) 없어진 것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영적 소경인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단연코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리새인 같이 성령을 대적하는 일에 열을 올릴 것 말이다(마 12:22-37).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막 14:21). 

사족이긴 하지만 한때 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은 내가 정통 신앙을 자부하는 자랑스러운 목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눈에 콩 꺼풀(?)이 씌워져 있어 성령의 사역에 대해 아는 것이 일절 없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영적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와 무식이 충만했다.  명색이 목사라고 입은 살아있어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를 얼마나 많이 전했는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나는 개혁주의자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얼굴이 두꺼운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고 싶다.  메마른 말씀을 들어준 착하고 귀한 성도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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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비롯한 내륙의 복음전도자들은 말세에 나타날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은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인 Charles Spurgeon은 1857년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수년 안에 언제가 될지 어떤 방식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이 부어지게 될 것이다. 사역자들은 단조롭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설교를 하고 또 설교를 해서 아주 약간의 변화만 일으킬 뿐이지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 앞에 열리기 바라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원하며 성령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임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위해 왕래한다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땅 위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게 되리라는 확신에 눈이 뻔쩍 뜨인다.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때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분을 경험하는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시간을 들여 성경에 이러한 경험이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는 영적세계에 대해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신학자나 목사의 어설픈 주장이나 서적, 그리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닌 신빙성 없는 자료를 수집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쉽게 정죄하며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에 관해서 관념적으로만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호 6:3, 6), 그분이 우리 안에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경험한 것이 그분의 임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오감으로 분별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듯이(요 10:27),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우리는 실제로 몸으로 느끼거나 감지할 수 있다(사 6:5).  마치 다니엘이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느끼는 것처럼 경험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다니엘에게 임하여 환상을 전할 때 그 임재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환상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임재가 얼마나 강했던지 육체적이고 감정적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도망을 가듯 숨어버렸다(단 10:7).  반면에 다니엘은 육체에 힘이 빠져 약해지고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 땅에 쓰러져 떨림과 흔들림의 반응을 보였다(단 10:8-10).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분 자신을 이런 식으로 알리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기도 하다(출 20:18-20, 삼상 19:18-24, 사 6:1-5, 렘 23:9, 겔 1:28, 행 2:1-13, 계 1:9-17).  다시 말해 ‘약해짐’, ‘쓰러짐’, ‘떨림’, ‘취함’ 등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러난 육체의 반응들로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품위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교회사에 걸쳐 특별히 신앙부흥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거룩한 사역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들이기도 하다.  먼저 1730년대 후반과 1740년대 초에 있었던 영국 신교의 신앙부흥 기간 동안 John Wesley는 수많은 외적인 표적들과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의해 여러 가지 육체적 반응이 그가 전도하는 동안에 일어났다.  1739년 6월 17일 Wesley가 야외에서 설교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The Works of John Wesley, 3rd Edition』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외치고 울면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일부의 사람들은 몸이 구부러졌고 그들에게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떨며 진동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격렬해서 네다섯 사람이 그들 중의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5개월 전인 1739년 1월 1일 일기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룻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Wesley가 설교 도중에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것은 그가 목회를 시작한 지 14년이 되는 해였다.  이 쓰러지는 현상은 Wesley가 새로 건설된 식민지 조지아 주에서의 선교활동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후 1738년 5월 24일 9시 15분 전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유명한 Aldersgate 체험으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또한 Wesley의 여행기록 일기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V5』에서는 “화요일 뉴게이트에서 설교하다가 나는 그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실 것인지를 묻는 기도를 하도록 요청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땅 위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쓰러졌다. 한 사람이 크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그녀의 무거운 짐을 희락으로 바꾸어주셨다.” 그는 연이어 “4월 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의 울음이 어떤 이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월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웃음에 대해 전보다 더 많이 불쾌해했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통곡과 울부짖음,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을 부르는 부르짖음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땅에다 내던지시거나 그분의 임재 앞에 떨며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 그리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처럼(요 7:38), 목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배(belly)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사 61:3).  하지만 성경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현상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쓰러지기도 하며(시 119:120, 렘 5:22), 또 다른 경우 몸에 힘이 빠지거나(단 10:8), 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Wesley가 설교할 때마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동료 중의 한 사람인 John Cennick의 말을 Arnold A. Dallimore의 저서 『George Whitefiel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Wesley가 이러한 현상을 장려하는 것을 보자 거기에 반대하여 감리회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나는 종종 그런 현상이 사탄의 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에 의문을 가졌고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Wesle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Cennick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은 동료 설교자이며 친구인 George Whitefield였다.  그는 Wesley의 집회에서 보고되는 현상들을 듣고 심각하게 우려했지만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Whitefield가 설교할 때 그러한 현상이 똑같이 일어났다. 

Wesley는 1739년 7월 17일 그의 일기 속에서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토요일에 Whitefield와 나는 하나님의 내적역사와 함께 매우 자주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적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반대가 주로 사실상 조잡한 허설에 근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날 그는 이 문제를 더 잘 알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모든 죄인들을 그리스도를 믿도록 초청하기 시작하자마자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 앞에서 꼬꾸라졌다. 그중 한 사람은 아무런 동작도 없이 쓰러졌고, 두 번째 사람은 몹시 떨고 있었고, 세 번째 사람은 온몸에 강한 경련을 일으키며 신음소리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네 번째 사람 역시 똑같이 경련을 일으켰고 큰 소리로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Wesley는 이런 말로 그날의 일기를 맺었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이끌어 가시도록 해드려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 Wesley와 Whitefield가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이러한 사역을 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겠느냐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 가짜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사악한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의 집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기괴한 현상들, 소리 지르고, 울고, 흐느끼고, 통곡하고, 쓰러지는 것들이 녹화되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전파를 탔을 것이다.

Wesley와 Whitefield의 집회는 성령의 운행하심에 의하여 강력한 감동(감정)을 불러오는 놀라운 능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만일 그 당시에 방송이 있어 오늘날의 현실로 본다면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이 수도 없이 올라와 “귀신의 역사니, 늙은 사도 운동이니” 하면서 이들을 정죄하며 침을 튀겨가며 비난하기에 바빴을 것이다(마 12:34).  솔직히 말해 목회를 못하는 목사들이 이 짓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당시 사역을 하면서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을 당한 역사적 인물들이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대각성 운동이 처음 세간에 알려졌던 것처럼 그런 ‘대혼란’이 다가올 때 거기에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은혜를 받는 자는 소수이지 다수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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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지 않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되는 행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합리주의적 세계에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복음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막 16:20).  그러나 성령 안에 안식을 경험한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에게 큰 유익이 되고 은혜로운 체험이 될 수 있다.

한편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종식되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쓰러질 때, 이것이 심리적인 작용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치유사역을 위해 안수하는 사역자들에게 행여 사람을 쓰러뜨리게 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한다.  나는 이들의 개인적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가지고 John Whit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아예 거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단지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권능을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권능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악의 세력이 부리는 고도의 속임수일지 모른다. 이 두려움은 교회 구석구석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이요 쇠약케 하는 불안이다”  이것을 Francis MacNutt 박사의 말로 짧게 다시 인용한다면, 오늘날 현대교회는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John Wimber이다.  그가 처음 이러한 장면을 본 것은 1979년 자신이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강사가 설교할 때였다.  초청받은 강사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오랫동안 성령님을 억제해 왔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오셔서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사모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와 염려하는 가운데 그 강사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고 방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으며 목사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기도를 해주자 사람들이 쓰러졌다.  

Wimber는 당시의 일어났던 상황을 『능력치유』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하나님, 제가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라는 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여파가 가라앉은 후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제직들은 아주 당혹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연이어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교회에 모일 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이 계속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 읽기,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의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더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요약된 결론을 내린다.  “교회에서 영적충돌이 벌어질 때 교양 있는 예절 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부흥운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20세기의 교회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시대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와 안수하여 쓰러뜨린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물론 손을 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Wimber의 예배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그가 설교하거나 개인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그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한 후 단순히 조용히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MacNutt 박사는 1986 England에서 있었던 Harrogate 집회를 포괄적으로 분석 시도한 사회인류학자 Davis Lewis 박사의 글을 인용하여 Sheffield 집회 때 일어난 일을 『Overcome by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치유(임상) 시간이 시작되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도록 초청받곤 했다. Wimber 목사가 성령께서 오시기를 짤막하게 기도하고 앞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마치 무엇을 받는 듯한 자세로 손바닥을 위로 향하거나 앞으로 내민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포개어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Wimber는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나 성령이 임재로 인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외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행복에 넘치는 평온 속에 조용히 있는가 하면 반면에 넘어져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아래 쓰러지는 현상을 보고 이것이 과연 “성경에서 나오는 현상과 같은 것인가?”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마가복음 9장 20절에서 아이가 쓰러진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악의 세력이 개입되어 쓰러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1:23-26).  그러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귀신이 이러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나타낸다(막 5:1-20).  반면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려진 것( 1:28)과 다니엘이 큰 이상을 볼 때 힘이 빠진 적이 있었다( 10:8-9).  그리고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린 베드로( 17:6)와 주의 날에 성령으로 감동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된 요한( 1:17), 나아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 쓰러진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9:4).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오늘날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집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 본 것과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본 결과, 오늘날 집회에서 나타나는 것과 성경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체험했던 것이 달랐다.  그것은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경배의 자세로 있다가 엎드려지거나 쓰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어 제사장이 능히 섬기지 못한 것처럼(대하 5:13-14),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그분의 권능아래 압도당하여 쓰러졌다.  여기에는 안수하는 동작이 일절 없었다.  다시 말해 일일이 세워 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첫 번째는 안수를 통해 쓰러졌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안수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식하리만큼 머리에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손으로 짓누르며 안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리에 살짝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이다.  사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역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요 3:8).  머리를 짓누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사역자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몸에 힘이 빠지고 쓰러졌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민 것도 아니고 안수를 받은 것도 아니다.  내가 귀신에게 홀려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은 멀쩡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은사적(고전 12:12-27),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공식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MacMutt 박사는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18, 19세기에 넘어지는 현상은 설교 중에 나타난데 비해 오늘날에는 안수 기도할 때 자주 일어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에는 치유를 위한 기도가 보편화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그 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대부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그 열매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될 것이다”(마 7:20).

사실 쓰러지는 현상은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증명할 길이 없다(고후 12:1-6).  물론 영적 체험이 일절 없는 무지한 목사가 이러한 현상을 귀신의 역사라고 우겨대면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이런 목사와 쓰러지는 현상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현상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한 현상을 체험한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막 5:20).  집회 현장을 방문하면 더욱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영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따라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혹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하면 된다(마 7:16).    

문제는 이러한 역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체험을 완강히 거부하고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궤변주의 목사들은 거짓 영에 크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골빈 목사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숙하거나 기만당할 정신 나간 신비주의적 목사가 아니다.  나 역시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할 말은 많지만(히 5:11) 폐일언하고 Teresa of Avila의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성령 안에서 안식, 즉 쓰러지는 체험을 찬성하든지 비난한다든지 할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단지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덕목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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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MacNutt 박사는 목회자들 중에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순서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리 짜여 놓은 순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불안해하거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글들을 보면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과 ‘주정론’(主情論)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한다. 실제로 오늘날 성령의 권능 아래 쓰러지는 것을 인도의 정통적 수련행법 Kundalini 명상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Joseph Suenens는 『Ecumenism and Charismatic Renewal』에서쓰러지는 현상은 과거의 종교에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원시부족에서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여러 종파에서 두루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역들 기도받고 성령 하나님에 의해 압도되어 쓰러지는 현상을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읊다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적인 차원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수밖에 없다.  사실 아프리카나 동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악령이 행하는 것인지 차이점을 그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더 확실한 것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에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4: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서 십 대들이 우상처럼 바라보는 가수가 앞에 있을 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절하거나 졸도, 혹은 쓰러지는 것과 같은 집단적인 광란에 의한 심리적인 현상들이 있다.  또한 인도의 Kundalini 명상은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명상에서 가르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몸의 떨림을 허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행하는 수련에서 떨림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기독교 사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교해서 쓰러지는 것과 떠는 현상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마 12:22-32).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고전 14:29)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행 7:51)처럼 모든 것을 다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나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목회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이 사탄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도를 받고 쓰러질 때 그것이 ‘성령에 의한 임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원인’인지 아니면 ‘악한 영에 의한 초자연적인 힘’(살후 2:9)인지를 단순히 옆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무슨 힘으로 쓰러졌는지 식별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쓰러지는 현상이 기독교인이 기도받을 때도 일어나지만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외형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그 현상은 비슷할 수 있다.  나 역시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마 7:20).   그것은 치유시간에 기도해 주는 목사와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치유의 근원으로 받아들였음을(행 4:10) 확인함으로써 사탄의 힘을 통한 치유를 효과적으로 배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으로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하고 있다(계 1:17).  다른 하나는 귀신에 의한 힘으로 쓰러진 경우이다.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고 말한다(막 9:20).  이 두 사건 모두 땅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도 요한의 반응은 실제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고 이전에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겔 1:28, 단 8:17, 10:9)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이는 악한 영이 예수를 보자 그는 그 아이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귀신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가진 사탄이 쫓겨 나갈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식별하는 근거 중에 하나는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먼저 아이가 몸을 뒤틀고 소리를 지르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악령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막 9:26).  축귀 사역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자신의 분노와 저항을 보이기 위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귀신이 나갈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막 1:26).  그와 달리 사도 요한은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나 발작하는 것 없이 성령의 권능 아래 다니엘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졌다(단 10:8).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셨을 때 모세(출 3:6)나 다니엘이 보여주듯이 반드시 경배가 뒤따랐다(단 8:17-18).  그리고 경배에는 축복이 따랐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것만 가지고는 그 현상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그 체험의 효과 등을 알 수는 없다.  정확한 영분별의 은사를 받지 않는 이상 말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받고 쓰러져 안식을 취하는 동안 나타나는 그 효과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즉 쓰러짐을 통해 무슨 열매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기도하는 사람이나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며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고 기도를 받는다면(요일 4:2-3), 그 쓰러짐을 통해 삶 전체를 변화시킬 만큼 주님과의 획기적인 만남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사람은 쓰러짐을 통해 회개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도 하며, 혹은 귀신에게 놓여나는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쓰러지는 현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체험이 신자의 삶에 지속적인 효과를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보다는 신비적인 체험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모순도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모순은 우리 삶에서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감이 넘치는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순간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행 7:54),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한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는 데 있어 유익한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할 때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모세(출 3장)나 바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듯이(행 9장), 삶의 어떤 시점에서 성령 안에 안식을 통해 주님을 긴밀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 박사는 자신이 성령 안에서의 안식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 인간적인 예법(틀에 박힌 전통적인 사고방식) 따위는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아서 좋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고질적인 회의적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조사해 보고, 시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면서도 그분의 역사를 충분하게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해 본 결과 그중 몇몇은 정신적 이상에 의한 현상이고, 또는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귀신들의 발악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표적(역사)들은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White 박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고 쓰러지거나 몸이 흔들리는 현상, 즉 성령 안에 안식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한 대가가 아닌 것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경성 발작이나 최면술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더더욱 아닌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일방적인 놀라운 은혜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재하시는 진정한 증거(징표)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분별이 필요하다(요일 4:1).  하지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붙잡아야 한다’(살전 5:21).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마귀가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믿지 말어 귀신의 장난이야”  이 말의 의미는 영적소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며 살라는 것이다(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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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대로 연결되는 뒷문을 통해 전시회장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한 젊은 남자가 한쪽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나중에 예배 중에 들으니 그 젊은이는 나와 부딪혀 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 넘어졌다고 했다.  다시 일어선 그는 더 이상 목발이 필요하지 않았다.  넓은 실내를 약 1만 2천 명의 청소년 대표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주님과 깊은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주님, 오늘 밤에 무엇을 하시렵니까?”  내가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왼쪽 끝에 있는 한 여성을 주목하게 하셨고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휠체어에 앉은 저 여자가 오늘 완쾌될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단상에서 급히 내려가 그 여자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  오늘 완쾌될 것입니다. 자매님은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일어서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 아내는 골반이 없어요.  골반 뼈가 연결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 나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천천히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일어나다가 휠체어에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넘어졌다.  그다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쓰러진 것은 골반이 몸을 지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쓰러졌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즉시 쓰러진 그녀에게로 몸을 굽히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자매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알아요, 알아요. 목사님, 제가 마취된 느낌이에요.”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자매를 수술하고 계십니다”  그때 Jean은 강력하고 놀라운 어떤 일이 몸속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다. 그녀는 골반 뼈가 제자리에 들어맞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한 다리는 다른 다리보다 5센티미터 짧았다.  그런데 그 다리가 길어져서 다른 다리와 같아졌다.  그다음에 뜨거운 쇠막대기가 그녀의 척추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위축되었던 그녀의 뼈, 신경조직, 근육이 유연해져 새 생명으로 역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내가 John(남편) 보니 나를 금방 때릴 것 같았다.  Jean은 몸을 추슬러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두 발로 섰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비디오카메라는 돌아갔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일어섰다.  Jean Neil은 양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외치면서 실내를 빙빙 돌았다.  그 집회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불구가 아닌 사람들이 거짓으로 휠체어에 앉은 일도 있다.  하지만 Jean Neil의 경우에는 그녀 교회의 교인들이 그 간증의 능력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그녀를 담당했던 의사들도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었다.  이 치료의 역사는 하나님의 치유능력에 무관심했던 교회와 교인들을 일깨웠다.

이 간증은 오래전 모든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올 때 인천 공항 서점에서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가 쓴 『부흥, 성령의 축제』라는 책을 우연히 구입하는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던 스릴 넘치는 성령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런 것은 하나님께로 것이 아니고 분명히 마귀의 장난 아니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일거야”라고 판단하거나 의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논쟁의 여지가 많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인 것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부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그 쓰러지는 현상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임재와 능력 아래 쓰러졌는지( 1:28, 10:9, 17:6, 9:4, 1:17) 아니면 악령의 역사로 쓰러졌는지( 9:16-20, 눅 9:37-42) 혹은 또 다른 집단의 히스테리 현상이나( 19:32) 자기 최면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가 궁금했다.  분별이 필요했다(고전 14:29).  더 나아가 기도받고 쓰러질 때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과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나 글을 통해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질 때, 이것이 확실히 “성령의 역사이다”, “사탄의 역사이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것과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나에게 똑같이 적용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경험해 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은 어떤 영적세계를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말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독단이나 독선적인 주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 자신이 직접 그러한 집회에 참석해 보기로 마음에 결정을 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자를 찾아 그 사람의 신앙성장과 신학배경, 그리고 집회 때마다 일어나는 일들과 서적들을 읽으면서 일 년 간 연구하고 기도하며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이미 집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그리고 참석 후에도 임하기 시작했다.  막상 그 집회에 참석했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가 악령의 역사인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가운데 집회에 참석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약 1:6-8).

솔직히 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청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1:15).  호기심과 거룩한 두려움,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뒤섞여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듣고 나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 되었을 때,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심정으로 서 있었다( 5:28).  내가 경험한 바로는 기도해 주는 사역자가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과 함께 몸의 무게와 상관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고 맥박과 호흡도 정상적이며 정신만큼은 멀쩡해서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저항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말하는 순간 온몸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강한 에너지가 흘렀다.

기도받고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조금도 불편하거나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초라함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몇 시간 동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실 개인적인 체험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후 12:1-6).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면서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임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실신’이나 ‘의식불명혹은집단최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기도받고 쓰러진 후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건전한 성령의 사역인지 또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순수한 동기를 가진 헌신된 사역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눅 18:13),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마 16:16),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때 일어나는 현상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는 말처럼(요일 4:2),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전 12:3).

물론 이런 경우 타락한 인간의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 그리고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것들로 인해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해서 되어지는 행동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것이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마 18:7).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치고 걸림돌이 생기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롬 9:33).  따라서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강조하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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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Picturesque/여행 2023. 3. 1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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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율법 2023. 2. 17. 21:57

반율법주의’란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은 물론, 율법에서 유추할 있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생활을 구애받게 없다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 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케 되었으므로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로마서 3장 28절 말씀에 나와 있듯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2:8)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2:1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4:1-4),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종류의 율법이든 이상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진노를 이루게 하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4:15),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이다( 5:18).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율법 폐기론자 혹은 도덕률 폐기론자’라고 부른다(롬 6:1-2).  이들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 안에 속한 인간의 삶을 경시하거나 지식에 근거한 영적인 삶만을 우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별히 Martin Luther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Johann Agricola 같은 사람도 가장 전형적인 반율법주의자로서, 오늘날 역시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율법 하면 구약의 모세 율법만을 생각하고 반대로 복음 하면 신약의 복음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롬 1:19-21)과 인간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 2:14-15), 구약 모세의 율법(성문적 율법)인 도덕법(출 20:1-17)과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시민법(레 25:39-41)과 신약의 산상수훈의 교훈(마 5-7장)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규범과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이란 Jonathan Edwards가 『구속사』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의 복음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사역(고전 15:1-8)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계시, 즉 에덴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 이후( 3:15), 각종 언약의 내용들( 19:1-6, 5), 더 나아가 예수님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 선포( 53:1-12, 31:31-34), 역시 복음일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역사 전개를 위한 경륜의 방법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구속사역을 행하실 것에 대한 언약( 9:1-10)과 구원의 객관적 조건을 제시하는 율법을 주로 강조하셨다( 3:24).  반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10:9-14), 천국에서의 최종 구원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 맺어주신 새 언약( 26:28)과 이미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모든 죗값을‘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치르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을 주로 강조하셨다( 9:11-15).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시대’이고, 신약은 ‘복음시대’라는 통념이 생겨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성육신 사건)으로 전후로 나누어지면서 그 강조점은 다르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속사역을 통한 죄인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이 된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이 그 역할은 다를지라도 구원이란 목적 하에서 서로 연결된 계시들 인 것을 보여준다( 3:22-24).  

먼저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여 인간이 죄인인지를 보여주고( 7:7), 죄의 대가인 형벌을 규정한다(딤전 1:8-10).  또한 모든 인간은 다윗의 고백한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죄인(시 51:5)인 동시에 태어나서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롬 5:12)로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형벌받을 마땅한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여기서 율법의 약점을 찾는다면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제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7:19, 10:1).  반면에 복음은 죄인에 대한 정죄에서 머무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속량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무서운 죄인을 구원하기까지를 선포한다( 3:13).  

그러므로 신구약을 불문하고 선택받은 자는( 1:4),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결과인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딛 3:5), 구속의 은총을 적용받아 그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살후 1:8-9)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역시 율법의 적용을 받아 심판을 받게 된다( 2:12-16).

조금 풀어서 말하면 율법의 근본 역할 자체가 복음의 전단계 계시인 동시에 율법은 필연적으로 복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그 목적이 상호동일하게 인간 구원이란 점과 그 수여자 및 집행자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점에서는 같다(사 33:22).  그러나 맡은 바 기능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롬 3:19-20), 어떻게 정죄당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딤전 1:9-11)을 제시해 주는 반면 복음은 율법이 죄인으로 규정한 자(롬 7:7)와 그에 관한 형벌의 해결까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갈 3:13). 즉 율법이 최소한의 선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 규범이라면 복음은 인간에게 절대적 선을 보여주는 영원한 규범이라고 볼 수 있다(히 7:28).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율법이 어떻게 해서 복음과 같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일 수 있는가(사 33:22)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야만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눅 5:8, 19:1-10, 행 16:30-32).  또한 율법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 것을 알아야(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롬 10:4, 갈 2:21).  그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갈 3:24), 율법은 우리를 복음이라는 완전한 계시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롬 3:31).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만이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행할 수 있다(롬 8:3-4).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며(롬 13:8-1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다(갈 3:24-29).  믿음은 율법을 적합한 자기 자리로 돌려놓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 안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대인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딤전 1:8).  요지가 무엇인가?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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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가치

율법 2023. 2. 11. 15:23

우리가 쉽게 율법이라고 통칭하는 ‘언약법’의 실체는 그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며 각 분야마다 또는 전체로서 범위 및 역할이 다양하고 구원의 복음과도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갈 3:22).  흔히 종교사학파에 속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율법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율법의 본질을 창조부터 종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약과 대응되는 구약의 언약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신약시대의 복음과 관련하여 갖는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갈 3:24)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시 19:7-1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율법서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이 대부분 각종 제사 제도, 정결 예법, 이스라엘의 절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율법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이 율법을 포함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즉 율법은 반포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출 24:12),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딤전 1:8).

먼저 구약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제사 제도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모세오경에 기록된 제사 규례(레 1:1-7:38)는 그 세밀함과 구체성, 그리고 반복적인 강조 등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이런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죽음(빌 2:6-11)과 부활(행 2:23-24) 이후 폐지된 것을 생각한다면( 2:15), 우리에게 과연 그렇게 상세한 기록이 필요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규례를 상세히 가르치시고 그 율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 즉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레 17:11)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희생제물의 피는 정결함과 용서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었다’ 사실상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히 9:22)  아울러 제사장이 매일 서서 반복되는 제사와 짐승의 피로서는 결코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다( 10:11).  오직 무흠 하신 예수 그리스도( 4:15)의 구속의 보혈만이 단번에 영원토록 모든 죄인의 죄와 허물을 사할 수 있다(히 9:12).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적으로 완벽하고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8:1).  

그런데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갈 3:10).  율법이 성취할 수 없는 요구 사항들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범죄 한 인간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다(롬 2:13).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았다(갈 3:13).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히 5:8-9), 죄 없는 희생, 즉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롬 5:18)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온전하신 분이었다.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짊어지셨다(신 21:23).  결국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생명에 이르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받는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이런 의미에서 구약 율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이기에( 8:5), 우리는 율법의 각종 규례와 가르침을 통해 그것들이 예표하는 실체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바라볼 있어야 한다( 3:13).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율법은 결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율법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율법 중의 핵심인 십계명( 20:1-17)도 크게 그 내용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신 6:5)과 이웃 사랑’이다(레 19:18).  만약 율법의 가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표면만을 바라본 사람들은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억지스러운 계명으로, 혹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법률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 22:36),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이것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12:28-31).  십계명과 다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두 계명을 지킨다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롬 13:8-10).  말씀의 의미는 구약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에 바탕을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바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례인 것이다( 22:35-40). 

사도 바울 역시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13:10)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3:20, 3:11, 5:4).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옥에 가야 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6).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이것을 있다면 율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율법을 받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는 것이다(신 30:10).  이런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출 24:12).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신앙(출 20장, 레 1-7장)과 공동체 내에서의 질서 유지(신 19-25장), 더 나아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였다(신 10:12-22).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거스리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셨다(신 30:15-20).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반복하는 역사를 전개함으로 인해 그에 따른 번영과 오욕을 역사에 남겨야만 했다(히 3-4장).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전 10:11).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하며 율법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 14:21, 계 1:3).  아울러 불순종하는 삶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엄청난 불행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고전 10:1-12).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율법은 구약시대의 백성만을 위한 법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는 생명의 법이 된다(마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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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

율법 2023. 2. 5. 10:32

오늘날 국민의 인권이 보장됨을 원칙으로 하여 자유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나라에서는 일 년에도 수백 건의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지며 또한 폐지된다.  어떤 법률은 제정된 후 몇 번 사용되지도 않고 개정, 혹은 폐지되어 그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의 사람들조차 그 법률의 존폐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법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모든 상황과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률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법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상황에 맞게 개정되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불안전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법은 지극히 엄정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번 제정 반포된 후에는 결코 폐지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일 그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이고(레 26:14-39),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임을 성경은 언급한다(레 26:3-13).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이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사 33:32).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율법을 기껏해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나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 법전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이 모든 피조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때(롬 2:15),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먼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제정하신 ‘자연법칙’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속에 특별한 본성을 심어 놓으셨다.  이 본성에 따라 곡식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1:11-12), 동물들은 육식 혹은 채식을 하며( 1:21-25),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르고 수많은 별들이 궤도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 1:14-19)도 모두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거역할 없는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서의 율법은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법칙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롬 1:19-21). 

예를 들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 2:23),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고( 5:45),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신다( 8:22).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이적을 통해 범죄 한나라와 사람들에게 진노와 경고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창 6:5-7, 7-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법칙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내재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 11:8).  반면에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자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법을 발견할 수 있다(골 3:10).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는 데 반해 불신자들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진다’(엡 4:18).

또한 이 율법에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양심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2:15).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엡 4:19)과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전 10:15).  하지만 이러한 양심과 이성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5:12), 많은 부분이 손상을 입고 부패해졌다( 17:9).  한 마디로 ‘썩어 문드러졌다’(창 6:12).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이성만으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3:12).  그러나 재물 많은 부자청년처럼 오직 상대적인 선만을 행할 수 있다( 19:16-22).  또한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딤전 4:1-2) 그 사람에게는 양심이 없는 것처럼 도덕적 불감증의 상태에 빠져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전한다(딤전 1:19-20).  그러나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러한 양심을 통해 사람들은 신앙유무를 떠나서도 도덕적인 것을 보고 선하게 여길 있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여기는 본능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8:9).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 양심은 가장 방해꾼이다( 10:22).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양심이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양심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계속 권유할 뿐만 아니라(삼상 24:5-7), 죄에 대하여 평가할 있도록 판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4:16).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율법을 새겨주셨다( 8:10).  따라서 인간의 심령에 새겨진 양심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렇게 피조 세계에 주어진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자연율과 양심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할 수 없다(롬 1:21-22).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런 ‘기본적 율법’ 이외에 성경에 기록된 ‘특별계시’로서의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율법’이라고 부르는 ‘성문 율법’(成文律法)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7:7-9), 그분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있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범죄 한 인간을 위한( 7:28),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아는 것처럼 그 율법을 준수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딤전 1:8).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3:20). 왜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갈 5: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롬 7:7).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필연적으로 요청됨을 직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다( 3:19-24).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2: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갈 3:22, 2:8).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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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 중에 Jonathan Edwards와 Lloyd Jones를 폄하하고 이단이라고 서슴지 않게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듯이 이 두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이 이단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짜깁기 신학’을 가진 이단사냥꾼들이 이단으로 몰아간 것뿐이다.  만약 그들이 이단이라면, Augustine, Luther, Calvin, 바울, 심지어 예수님도 ‘이단의 괴수’라고 믿는다(행 24:5).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단이 아닌 놈이 이단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Jonathan Edwards와 Lloyd Jones의 발꼽에 낀 때만치만 목회를 해보라는 것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마 7:3), 신학적 ‘갑질’을 일삼는 목사들은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한다.  목회에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지 부끄럽지도 않는가?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개나 소나 대통령 되고, 영어를 못해도 미국에서 신학 Ph. D를 공부하는 시대다.  이게 실화인가?    

Edwards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색가 중의 한 사람이며, 대각성 운동의 옹호자이고 종교적 체험에 탁월한 신학자였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하여 그보다 더 자세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쓴 사람은 없다.  그는 기름부음에 대해 『신앙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러면서 중요한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것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 옷깃까지 내림과 같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기름부으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목사에게는 Edwards의 주장이 더러운 하이에나처럼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는다.  흠이 많고 깨어진 그릇들을 들어 사용하신다(고전 1:26-29).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을 생각해 보라.  이들 중에 흠이 없는 사람이 있는지 말이다(롬 3:9).  흠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리저리 다 쓰신다.  따라서 한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Edwards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하지, 마귀 새끼처럼 무엇인가 흠집을 잡으려고 잠꼬대 같은 헛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요 8:6).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한 번만 받으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Edwards와 Lloyd Jones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여기서 나는 Andrew Murray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는 『The Spirit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가 성령을 한번 받았다 해서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는 예수의 귀한 말씀으로부터 이제 벗어났다고 느끼고, 이 으뜸가는 복을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없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날마다 필요하듯이 그 복도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신 분을 통해 아버지와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딱 한 번 이루어진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날마다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Murray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해 가까스로 조금 아는 것과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충만하게 계시하시는 사이에 있는 차이는 무지나 혹은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은 성령을 쪼개어 나눈다는 의미로 신자들에게 그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한 번 주심으로 더 이상 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더 많은 것을 간구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전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어떻게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Murray는 다시 대답한다.  “허파는 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매 순간마다 새로운 공급을 요구한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미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성령은 충만히 내주 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에게 더욱더 충만하게 유입되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고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성령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또 다른 극단에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Ernest Boys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성령을 더 많이 소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Murray는 “왜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분의 역사가 제한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재차 대답한다.  “성령의 증언을 분간하는 데에 교회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내주 하시는 교사로서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말 한마디를 남긴다.  “오순절의 교훈은 모든 시대에 유효하다”  

만약 EdwardsMurray 말이 사실이라면 목사들 중에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무당이 신내림 받는 것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보다 성령을 대적하는 일은 없다( 3:28-30).  분명 이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가짜다.  기름부으심을 무당 신내림으로 치부하는 자들과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Edwards와 Murray 편에 서고 싶다.  기름부으심을 전혀 모르는 골빈 목사들 부류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일절 없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지나간 과거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 때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 목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령의 기름부으심, 즉 이들이 바리새인처럼 거침없이 내뱉는 ‘무당 신내림’(마 12:24) 받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변함없다.   

오래전 J. I. Packer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의 희생자’이며 수혜자라고 말했다.  오늘날 귀신들의 역사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박제화된 신학과 죽은 전통에 얽매여서인지 신자들 중에 쓸데없는 ‘성령 공포증(?)’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Lloyd Jones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히스테리적인 발작 증상, 혹은 귀신의 역사로 돌려버리는 것은 신성 모독하는 죄라고 말한다(마 12:22-37).  그는 오늘날 교회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배제시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기름부음에 대해 “성령으로 흠뻑 젖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John Stott 역시 이 기름부음에 대해 William Temple의 말을 인용해서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인한 생수의 강”으로 묘사했다.  문제는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목사들이, 이런 성령의 성스러운 영향력을 귀신의 일로 치부해 버린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리니,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는’ 시대다(행 2:17).  여기서 예언, 환상, 꿈은 성령 사역의 소산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배울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행 17:11).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고 …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한다(살전 5:19-21).  무조건 대적하지 말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한 후(고전 14:29) 참된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사역을 해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는 시대다(눅 11:14-20). 더 큰 문제는 목사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하지 않고 자신의 신학적 편견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모든 것을 다 ‘도매금’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Edwards는 경고성 발언을 한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이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이다.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고전 6:19)은 성령을 대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말의 의미는 양심에 화인에 맞지 않고서는 성령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딤전 4:2).  독사의 새끼(마 23:33)들,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마귀의 자식들이 이 짓을 한다(요 8:44).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마 12:22-37).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성령을 대적하고 ‘은혜의 성령을 모독하는가?’(히 10:29).  주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이 없는 현대판 바리새인들,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만약 누군가가 이사야처럼 홀떡 벗은 몸을 가지고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 한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하는 것 말이다(사 20:1-6).  분명 교회 안의 묵은닭(?)들은 난리부르스 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환장 파티, 마녀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을 알지 못하는 목사들은 ‘기름부으심’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이단, 혹은 신기를 부르는 기름부음이라는 말 같지 않는 소리로 떠들어 댄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가오겠지만 그들이 마녀 사냥식 이단몰이를 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확신할 것이다(요 16:2).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솔직히 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거나, 스테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행 7:54-60), 먼저 나 자신이 쪽팔려서 메시지를 증거 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목회사역.  하루도 아닌 3년 동안 예언적 행동, ‘알몸 시위 사역을 한 이사야가 정말 존경스럽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지도자, 즉 목사를 통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져본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영적 소경인 목사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허락해 주신다면(엡 1:17),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Bill Hull과 같은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깨달은 부끄러운 사실은 목사인 내가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성령의 임재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들 앞에 목회자로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모른다고 하면 정말 쪽팔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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