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 천국이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음은 물론 천국의 열쇠는 오직 가톨릭 교회에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간기 처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림보’(Limbu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라틴어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연옥’(Purgatory)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옥 변방(邊方)에 위치한 장소를 가리킨다.  이 지옥 변방을 두 종류로 나누어 하나는 ‘유아 림보’(Limbus Infantum), 다른 하나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고 부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조 림보’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롬 3:24),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옮길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에 ‘유아 림보’는 영아 때 죽어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할 죄는 짓지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유아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에는 이것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천국(마 5:3)과 지옥(마 5:30), 낙원(고후 12:4)과 음부(행 2:27) 등에 대하여는 직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연옥’이나 ‘선조 림보’ 혹은 ‘유아 림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과 연관 지울 수 있는 성경구절이 없다.  한 마디로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만 볼 수 있는 교리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의 세례관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유아 세례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세례 자체가 중생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례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된다.  가톨릭 신학자 Ludwig Ott는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순종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갈 3:10, 5:4).  이것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갈리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생각하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다(눅 23:43).  하지만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면 세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롬 5:12).  엄밀히 말해서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창 3:19)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에 앞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인생의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그분과 교통 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혼의 죽음’(엡 4:18)이 있다.  더 나아가 장차 영과 육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과 영원히 교통 하지 못하고 영육이 심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영원한 죽음’도 있다(마 25:41). 

교회사를 보면 사람이 죽어 의식 상태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칠일안식교다.  간혹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에 ‘영혼 소멸설’(annihilationism)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한때 칼빈주의자였던 Clark H. Pinnok과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John Stott, 그리고 Stott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John Wenham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Stott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른 신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복음주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댔다.  Stott는 이단인가?  여기서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다.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탄탄하게 세워 나가면서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과 Thomas Goodwin을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며,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의 편집자이고, 사망할 때까지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의 주요 기고자였던 B. B. Warfield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세계 3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Warfield도 이단인가?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Warfield의 저서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는 조금 충격적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다. 

영혼 소멸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무존재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심판으로 형벌이 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단지 그들만의 성경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궁금하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 말이다(요 8:7).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학자 중에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말씀을 가지고 ‘사후 전도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은 후에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하셨다(눅 16:24-26).  죽음 이후에는 단테의 신곡에서 말한 것처럼 희망이란 전혀 없다(눅 16:19-31).  무엇보다도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계 21:1-4).  그러나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형벌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히 9:29).  그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계 20;12), 지옥에서 그 영과 육이 세세토록 고통가운데 있게 된다(막 9:48).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들을 향한 심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계 22:11-12).  이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눅 12:47-48).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한다면(마 11:22-24), 마지막 날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눅 20:47).  이들의 죽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해 비로소 확인하게 되며 동시에 더 크고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3-15).  그야말로 슬피 울고 이를 가는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다(마 8:12).  이렇게 불신자들이 죽은 후에는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심판을 받고 이 심판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교리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마 26:41, 46, 막 9:43, 유 7절).       

반면에 성도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다르게 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이한 결과와 관련하여 성도와 불신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요 5:29).  이는 구속을 통한 구원의 기회를 거부한 불신자(요 8:24)와 달리, 비로소 모든 죄의 질고를 완전히 벗고 구원의 축복을 보다 더 온전히 누리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고후 5:1-3)에 불신자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빌 1:23).  다시 말해 성도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긴 하지만(눅 16:22), 일단 죽으면 그의 육체는 나사로처럼 이 땅에 묻히더라도 영혼은 기쁨 중에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눅 16:23, 23:43, 빌 1:23).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고(사 25: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의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는지 모른다(고후 5:8).

여기서도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여 성도가 죽고 난 후에 심판을 받지만(고후 5:10), 이 심판은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주장한다(고전 3:12-15).  반면 또 다른 부류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롬 14:10), 이들이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마 12:36).  즉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규명받기 위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딤후 4:1).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한다(고전 9: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하나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고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은 죽고 난 후(히 9:27),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고후 5:10), 그분의 최종적인 결정에 따라(계 22:11-13),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마 16:27, 롬 2:6-11). 

Robert N. Wilkin의 진술대로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0:28).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하지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이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 경의 신자들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똑같이 경계로 기록된 것이다(고전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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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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