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논쟁거리/계시 2023. 10. 8. 03:12

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 있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선지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렘 1:9).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선포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가 말로 메시지를 전한 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민 22:38).  

따라서 구약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면(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성경을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행 1:2).  그들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불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다.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갈 1:8-12, 벧후 3:2), 신약 교회의 권위 구조상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영역에 대해 다른 권위를 주셨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으로 호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또한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오늘날의 선지자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같이 자신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Wayne Grudem은 고린도의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Grudem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는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선지자는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겸손하게 확증받고 시정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다(요 4:19, 딛 1:12).  이 문제를 가지고 Helmut Kramer는 ‘선지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지 전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의 선지자가 구약의 선지자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히 간청할 때(행 21:12),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다(행 21:17).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9절에 분변 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살전 5:20-21).          

그러면 누군가 “예언자가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다.  백성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했다(렘 42장).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이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를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을뿐더러, Bruce Yocum이 말한 것처럼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다. 이것은 구약에만 있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롬 8:14).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딤후 3:16, 벧후 1:21)과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갈 5:18).  그렇다면 “신약의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는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한다(고전 14:3).  하지만 신약의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대신에 믿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해 줄 수 있다(고전 14:3). 

만약 신약의 선지자로부터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4:1).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통해(딤후 3:16), 옳게 분변 할 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벧후 3:16).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있다(계 11:3-13).  학자들은 ‘두 증인’에 대해 각기 해석을 달리한다.  나머지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믿으면 된다(롬 11:3).  그러나 이 세상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난다.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논쟁거리 > 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통 계시  (1) 2023.10.30
계시의 지속성  (1) 2023.10.0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