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류학자 David Lewis 박사는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을 할 때, 대체로 자신이 깨끗하게 죄 씻음 받는 느낌의 체험을 한다고 덧붙이면서 Harrogate 대성회에 참석했던 어느 한 사람의 간증을 인용하여 『Healing: Fiction Fantasy or Fact』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지금 바닥에 누워 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내게 뭔가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자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서 아주 깨끗이 씻어버린 기분이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Benedict Haren 목사 역시 수년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Francis MacNutt 박사에 의해 방언으로 기도를 받고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두 시간 동안 안식을 경험하고 나서 자신이 치유받은 것을 『Praying for Healing』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을 한다.  “1975년 어느 신유집회에서 MacNutt 박사가 내게 안수기도를 해주었을 때 난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성령 안에 안식을 하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누워있는 동안 평소에 대화나 책을 통해 이해했던 것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게 이 문제에 관해 한결 깊이 있는 통찰력을 부어주셨고 그 체험이 이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있는 영적 축복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물리적인 현상은 교회사에 걸쳐 일반적으로 나타났었다.  John Wesley와 같은 기간 동안 미국 역사상에서 가장 큰 신앙 부흥운동 중의 하나인 제1차 대각성 운동이 1735년 북미 식민지에서 Jonathan Edwards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났다.  사실 Edwards는 조용하고 이성적인 설교자였지만 그는 종교적 체험에 탁월한 신학자로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하여 그보다 더 자세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쓴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때 “설교는 눈물, 진동, 울부짖음, 육신의 고뇌, 그리고 몸의 힘이 빠져버리는 것과 같은 인간의 육체에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평가되어서는 된다”라고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조하기를성경에서는 몸이 힘이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은 특이한 체험에 관한 것을 금하라는 규정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4번 이상 설교를 한 적이 있는 George Whitefield가 고향 마을인 Northampton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그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The Great Awakening』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교회 전체가 울음바다였고 쓰러지는 등의 역사로 가득했다. …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시간이나 계속된 기도, 찬송, 상담, 등으로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의 사람들에게는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마을전체의 신앙에도 발전을 가져다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Whitefield가 방문한 이후에 같은 현상이 Edwards 자신의 목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듬해인 1974 그의 집에서 설교할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하게 압도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Edwards의 아내가 집회 기간 동안 강력한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았는데 Guy Chevreau는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의 글을 인용해 『Catch the Fi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orthampton 교회는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다. Edwards 부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나 충만하여 육신의 힘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녀는나는 계속해서 미래 세계의 뚜렷한 환상과 영원한 행복, 그리고 영원한 비극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라고 썼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 몇은 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시간이나 교회에 남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신이 힘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Sarah Edwards는 부흥 집회기간에 하나님의 능력과 환희의 임재를 계속해서 비슷하게 체험하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십칠 일간 멈춘 적이 없었다고 간증한다. Edwards 역시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Jonathan Edwards on Revival』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감동은 빠르게 전체로 퍼졌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되고 비참한 상태와 상황에 대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전체는 오로지 부르짖음과 기절과 같은 것으로 가득 있었다.”

그러면서 Edwards는 부흥에 기간 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일어났던 일과 집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먼저 아내에 대해 “어떠한 영적인 자부심도 보이지 않고 더욱더 온유하고 겸손해졌으며 남을 배려하고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가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역사라는 명확한 ”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만일 이것이 열망의 혹은 나사 빠진 두뇌의 열매라면 두뇌를 그렇게 행복하게 나사 빠지게 해 주시고, 이것이 정신착란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비롭고 부드럽고 은혜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에 빠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열매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단 말이며, 그분이 임재하실 어떤 종류의 열매를 우리에게서 내셔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나는 성령께서 영광으로 부어주시는 그러한 것들, 신앙적인 만남에서 기쁨과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거부된다면 무엇이 남아서 우리가 무슨 관념과 사상으로 높고 축복되고 환희에 소망의 시간을 맛볼 있을 것인가? 다른 무엇에 달콤하고 경이롭고 환희에 신앙의 본질이 있단 말인가?” 사실 18세기 청교도 개혁신학자 Edwards의 고백은 오늘날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사들, 특히 이단 사냥꾼들에게는 상당히 비위가 상하는 말이거나 비성경적일 것이다.  거의 이단이나 사이비에 가까운 신비주의적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Lloyd Jones는 “Edwards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며, 그는 200년 전에 이러한 현상을 목격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였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Edwards는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Christian History, Vol. VIII』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지나친 감정 표출이나 사탄의 개입에 대한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래서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살전 5:21),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요일 4:1), 그 나타남의 강도와 크기가 아닌 뒤따르는 열매로 판단하였다(마 7:20). 

또한 세심하게 육체적 임재 체험과 열매의 관계, 즉 성령의 내적역사와 이 역사가 육체 밖으로 나타나는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은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 안에서 감정과 의지에 영향을 주지 않은 임재의 능력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의 일부 사람들은 이런 무질서한 현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마귀의 역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Edwards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질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한, 수단으로써의 그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와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것 같다(행 7:51).  주로 영적으로 무지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소수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행 9:18) 없어진 것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영적 소경인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단연코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리새인 같이 성령을 대적하는 일에 열을 올릴 것 말이다(마 12:22-37).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막 14:21). 

사족이긴 하지만 한때 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은 내가 정통 신앙을 자부하는 자랑스러운 목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눈에 콩 꺼풀(?)이 씌워져 있어 성령의 사역에 대해 아는 것이 일절 없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영적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와 무식이 충만했다.  명색이 목사라고 입은 살아있어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를 얼마나 많이 전했는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나는 개혁주의자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얼굴이 두꺼운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고 싶다.  메마른 말씀을 들어준 착하고 귀한 성도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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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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