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예정

칼빈과 웨슬리 2024. 4. 21. 16:09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8)는 말씀처럼 Wesley는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의 중심성을 확고히 인정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을 강조한 것이다(엡 2:8).  여기까지는 Calvin의 주장과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시키느냐에서는 다른 차이를 보였다.  이 차이는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지만, 그 응용에서는 대단한 의미와 차이점을 드러낸다. 

Calvin은 은혜의 작용을 ‘이중 예정’ (double predestination) 교리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택(election) 받아 구원으로, 또 다른 이들은 유기(reprobation) 즉,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정해졌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 Calvin의 불변적 입장이었다.      

반면에 Wesley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에 연관시켜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셨으니’(롬 3:21)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롬 3:24)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에게’(롬 3:26)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셨다.    

Wesley는 Calvin의 예정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막고, 선을 행하기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셨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은총은 값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하시며, 그들은 때어나기도 전부터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적으로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육신과 영혼이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도록 태어났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Wesley는 이 설교를 하고 나서 Calvin의 예정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이 바로 그 가공할 만한 무서운 예정의 교리에 담긴 신성모독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내 입장은 확고하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이 교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예정 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악마보다 악한 것으로 더 거짓되고 더 잔인하고 더 불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런 신성모독적인 내용 때문에 나는 예정 교리를 혐오하는 것이다”

이렇게 Wesley가 예정론을 신성모독적인 교리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모욕하는 결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만큼 그 예정을 아실 터인데(마 9:2-7, 막 2:6-8, 눅 6:8, 요 1:47-51, 4:18, 11:11-15, 행 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 즉,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자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요 6:40).  구태여 예정된 사람에게 꼭 이렇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Calvin의 입장에서 보면 창세 전에 선택받고 예정된 사람이라면(엡 1:4-5) 죽기 전에 구원받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창세 전에 누가 선택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Wesley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며 Calvinist에게 말했다.  “Calvinist들은 예정을 붙들지 않으면 자유의지를 붙들게 되어 인간의 구원 속에 있는 영광의 하나님께 누가 될까 두려워한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 나온 이 말은 짧지만 강력한 말이었다.  Wesley의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은혜의 수위성을 강조하는 여러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때, 그는 Calvinist들과 서로 다른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입장을 Harold Lindstrom는 『Wesley and Sanctification』에서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Wesley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개념을 거부한다. 즉 은혜는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양태로는 작용하지 않는다. 은혜의 효과성은 인간의 협력에 달려 있다. 이런 기본 사상에 동조하면서 그는 무조건적인 견인 교리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배교할 수 없는 자들로 간주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 문제를 가지고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참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요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히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롬 11:22).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3:12).  

Wesley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한다(마 7:21-23, 10:33, 12:31-32, 24:13, 눅 8:13-15, 요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갈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히 2:1, 3:6-14, 6:4-8, 10:26-39, 12:14, 약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절, 계 3:5, 15-16, 22:19).

무엇보다도 Wesley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킨다고 믿지 않았다.   이 말이 상당히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하나님의 주권’이란 인간 스스로 내리는 어떤 선택이든 이를 얼마든지 함께 고려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손상을 입지 않는 차원의 주권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Wesley는 자신이 Calvinist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여긴다고 실제로 믿었다.  스스로 제의를 거절할 수 없는 누군가를 구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전에 정해져서 저항할 수 없는 작정에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Wesley의 입장에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이 상급을 받거나 벌을 받을 수도 없는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결핍된 인간론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면서 동시에 인간론을 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주권적 창조주 개념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공의로운 통치자라는 개념을 추가했다.  Wesley의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Allan Coppedge는 『John Wesley in Theological Debate』에서 이런 추가로 인해 인간의 결정이 끼어들 자리 및 가능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에 응답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통치로 인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화를 이룬다고 Wesley는 주장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prevenient grace)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응답할 책임이 있고(막 16:16), 또한 영적 흑암에 빠져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전도할 필요성을 강조한다(마 28:19-20).  마태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감춰져 있는 만큼 Calvin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도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지 설명해 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Wesley는 사랑의 하나님은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은혜를 베풀어 제대로 누리게 한다고 확신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배타적으로 구원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추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인간이 어떤 노력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처럼 무식하게 떠들어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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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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