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3.08.13 목회자의 자살
  2. 2023.08.06 용납될 수 없는 죄
  3. 2023.07.30 그리스도인의 자살
  4. 2023.07.23 자살

목회자의 자살

자살 2023. 8. 13. 14:45

지금 우리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기업가들, 연예인들 중에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한다.  이들 중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가진 자들도 있다.  특별히 목회자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슈화되지 않는다.  1년 전 어느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의견 충돌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목숨을 끊었다.  한 분은 교회 종탑에서, 다른 한 분은 장로 집 근처 나무에서, 또 다른 한 분은 교회 화장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귀중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정말 자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남아 있는 유가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다.  이 심적 고통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16:26).  문제는 그 귀한 영혼이 자살한 후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들어간 낙원으로 간 것일까?(눅 23:43).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으로 간 것일까?(마 27:5).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며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런 주장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그 자살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살한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죽은 사람이 야곱처럼 선택을 받았는지, 에서처럼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롬 9:9-13). 

Jonathan Edwards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누가 참되게 믿는 자들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이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신앙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신앙이 무엇인지 체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것은 스스로 알 수 있다(고후 13:5),  하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조한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여 탁월한 성도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교회 안에서는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결정적인 판단을 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4:5).  만약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누가 예정이 되고 선택을 받았는지 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지 목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살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자나 목사들은 서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배워온 방식대로 해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생명(창 1:27)은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 자체 외에 목적(사 43:7, 21)과 존엄성(고전 15:39-40)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의 존재 여부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며(창 1:28),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시 8:3-8),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요 3:16).  이러한 인간의 가치의 중요성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그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다(마 6:25, 10:31, 12:12, 20:28, 막 2:27, 8:36).  이 모든 것은 그 가치에 있어 인간은 매우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창 5:1-2).   

그런데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살인하지 말 것(출 20:13)을 누차 경고하셨다(롬 13:9).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신 5:17), 밑바탕에는 인간 가치의 중요성과 존엄성,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명은 그분께 속한다는 근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겔 18:4).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되지만(렘 22:3), 아히도벨이나(삼하 17:23), 가룟 유다처럼(마 27:5),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 2:7).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간에 생명을 죽이는 것(출 21:12)은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이 된다(민 16:2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5문에서도 살인의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이웃을 해쳐서도 안 된다”.  자살은 그분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는 말은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욘 2:9).  극단적 선택한 사람을 가리켜 지옥에 갔다는 명시적인 구절도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구절과 ‘열매로 그들을 알라’라는 구절은 있다(마 7:7:16).  이 구절들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진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전 4:5).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직분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수밖에 없다(마 7:20).  이것은 주님이 삶과 행실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부추기는 구절들이 일절 없다(렘 29:11).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향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신 5:17).  목회자에게 양을 맡기신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21:15-17).  만약 목사의 직분을 받은 사람이 자살을 한다면 그는 일반 신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약 3:1).  그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신자도 자살하면 그 죄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마 5:21).  하물며 복음을 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는 양들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Werther effect, 즉 ‘베르테르 효과’를 나을 가능성이 크다.  오래전 유명 연예인이 자살할 때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은 자살 고위험군이다. 

한 번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자살한 사람에게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말이다(마 25:21).  “네가 목매어 죽을 때 내 마음이 정말 기쁘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까?  만약 내 자식이 죽겠다고 소란을 피우는데, 그런 자식에게 칼을 주고 “사무라이처럼 죽어봐!”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 부모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친아버지(마 7:9-11)가 아닌 의붓아버지 마귀다(요 10:10).  누군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예수님은 분명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25:30).  왜냐하면 주어진 재능을 썩히고 생명의 존엄성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모든 생명의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민 27:16).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것임(창 9:6)은 물론,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낳아주신 부모에게 최악의 불효를 끼치는 것이다. 

자살한 사람은 이미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행 1:25).  문제는 가르치는 자들이다.  이들의 주된 잘못은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마 23:15).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눅 11:52),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쳐(마 15:9)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마 15:14).  가르치는 선생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최후는 말할 것도 없다.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있어 중립적인 태도는 불가능하다(막 9:40).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잡소리 신학으로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한다.  자살에 대한 문제를 놓고 신학적 교리를 끌어다가 궤변을 늘어놓거나, 혹은 질병(우울증, 정신병) 문제라고 운운하면서 자살을 정당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선지자 엘리야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왕상 19장).  그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약 5:17). 

가끔 신학자나 목사가 입만 열면 무슨 주옥같은 복음적인 말씀이 나오는 줄 알고 열심히 귀담아듣는 멍한 교인들이 있다.  시력이 나쁜 양들, 즉 분별력이 없는 양들은 잘 속아 넘어간다.  이런 양들은 방향 감각이 없고 미련해서 한 번 시험에 들고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한다.  참 목자를 만나 푸른 초장에 나가서 싱싱한 꼴을 먹고 영혼을 소생시켜야 하는데(시 23:2)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건강한 양은 들은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연구하고(행 17:11),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처럼(고전 11:29),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헤아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인다(살전 5:21).

자살은 여러 가지 많은 죄(롬 1:29-32)들 중에 하나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죄가 다른 죄들과는 다르다.  다른 죄는 살면서 성령께서 생각나게 해 주신 대로 회개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딤후 2:25, 슥 12:10).  하지만 자살은 에서처럼 회개할 기회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죄다(히 12:7).  C. John Collins 박사는 말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처음 믿음을 버리고(딤전 5:12),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마 26:24).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죄들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11절에서 강조한다.  이런 유형의 죄악을 저지른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하물며 자살자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선생들은 ‘자살은 지옥’이라고 분명하게 말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살만큼은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일 온 전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자, 혹은 자살 위험에 노출된 자들을 위해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 혹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다’(엡 6:12).  이들은 단순히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강력한 존재들이다.  이 전투의 실재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이다(엡 6:13).  다시 말해 자살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벧전 5:9).  이것이 교회 안에 성령의 사역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 교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성경은 말한다.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는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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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납될 수 없는 죄

자살 2023. 8. 6. 15:41

『신곡』은 죽음 이후 사후세계로의 여행을 주제로 한 13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Durante Alighieri가 1308년부터 죽은 해인 1321년 사이에 쓴 대표적인 서사시다.  이 책은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 Vergilius를 지옥의 안내자로 묘사하고 있다.  지옥편에서 보면 지옥의 두 번째 문을 지나면 망자들이 모여 있는 제칠 영역이 나온다.   이 영역 안에는 세 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1층에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지옥문 입구에는 무서운 경고문이 하나 붙어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문을 지나는 자여”

『천로역정』의 저자 John Bunyan은 일인칭 소설 기법으로 『Visions of Heaven and Hell』이란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주인공 Epenetus를 등장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에 구원을 받아 천사의 인도로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penetus가 절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할 때 세미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 나직한 음성을 Bunyan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 자신을 영원한 불행에 던져서 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기쁘게 하지 말라. 네가 스스로 치명적인 ‘자해’(自害)를  가하면 그것으로 네 멸망의 도장을 찍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실진대 이렇게 고의로 그분의 형상을 멸하고서 어찌 그분에게 자비를 얻을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이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그 답이 나온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이것은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연민을 느끼면서 하신 말씀이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느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알 길이 없다.  물론 맛보기로 경험해 볼 수는 있다.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불이 켜진 가스레인지 쿡탑에 벌거벗은 몸으로 올라가 앉아 있으면 된다.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단 10초면 된다.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누구든지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다.  여기에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꺼지지 않는 불’(마 3:12)이 있는 곳, ‘게헨나’다(마 5:29).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각은 한 사람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고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극도로 노령이거나 고통스럽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의 경우에는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자살이 허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일부 사회에서는 자살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 자살을 특정한 범주에 제한하려고 한다.  특히 일본의 종교적인 자살, 예를 들면 ‘사무라이’는 자신의 실패를 불명예로 여겨 할복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때에 사용된 ‘가미가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삶의 의미에 있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했다.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자살 테러’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기독교의 영향으로 삶의 소중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범죄로 여겼다.  Augustine은 『신국론』에서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죽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살은 자기 살인이며 회개의 기회를 완전히 가로막는 죄로 정죄를 했다.  Thomas Aquinas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릴 권리와 하나님의 주신 생명을 거부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은 교회 공동체를 대항하는 무서운 죄로 정죄했다.  Jonathan Edwards도 자신의 이모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마귀가 그를 절망적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자살은 ‘용납될 수 없는 죄’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성경에 보면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7).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는 말씀이다(벧전 4:11).  예를 들면 아히도벨과 같이 인생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있다(삼하 17:23).  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혹은 시므리처럼 권력의 눈이 멀어 왕권을 쟁취하지 못해 왕궁에 불을 놓고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왕상 16:18).  과연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 자들이 있다.  더 나아가 본인 스스로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한다.  문제는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가치가 없는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다.  성경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라고 말한다( 9:4).  격을 높이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시신’(屍身)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혐오스러운 느낌을 주는 차가운 ‘송장’(corpse)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 자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죽음을 구하였던 자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요셉을 잃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야곱(창 37:35)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질적인 병, 원망과 불평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받았던 모세(민 11:15), 그리고 바알 숭배자였던(왕하 9:22) 이세벨에게 쫓겨 절망에 빠진 엘리야(왕상 19:4)가 있다.  또한 가정의 풍비박산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던 욥(욥 3:21)과 부인 천 명과 살아봤지만(왕상 11:3) 인생무상을 느낀 솔로몬(전 2:17).  그리고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구했던 요나(욘 4:3, 8)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죽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민 27:16),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고후 12:9), 그분께 소망을 둠으로(딤전 6:17), 무서운 유혹을 이겨냈다.  

자살은 신중하게 계획된 행동인 경우는 거의 드물고 극단적이고 충동적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좌절감과 고독함, 그리고 경제적 상실감과 정신질병인 경우 자살의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삶에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다(욥 5:7).  하지만 이것은 욥이 말한 것처럼 인생을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믿어야 한다(욥 23:10).  왜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이다(마 16:26). 

무엇보다도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 혼자 힘으로 감당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약 5:14-16).  예수님께서 각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 잃어버린 영혼, 방황하는 영혼, 삶의 소망이 없는 영혼, 자포자기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할 것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며 순교한 사도 바울이 있다(딤후 4:6-8).  반면에  신앙을 포기하고 목매어 죽은 가룟 유다가 있다(마 27:5).  이들이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은 하늘과 땅 차이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온다.  종이가 남아돌아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씀이다.  이것은 자기 기준대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원래 인간은 오래전부터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좋지 못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삿 21:25).  슬픈 현실은 불신자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다.  내 인생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많은 부류 중 한 부류가 소중한 생명이 자기 것인 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누구든지 자살하면 그 사람은 지옥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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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살

자살 2023. 7. 30. 15:56

고대 세계에서 자살을 예찬한 자들은 ‘스토익주의자’(Stoicism)들이었다.  이들은 생활의 모든 비참함과 불행에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향락주의자’(hedonism)들 역시 사는 것이 인간에게 견디기 어렵게 될 때에는 언제든지 자살이라는 도피의 문이 열려 있다고 가르쳤다.  자살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도 달랐다.  그리스의 철학자 Aristotle는 '자살은 국가에 대한 범죄'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Plato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을 경우 자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다변화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명 경시 풍조로 극단적 선택인 자살 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들은 학업문제나 열등감, 그리고 ‘왕따’ 등을 이유로 투신 또는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학부모의 폭언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중년층은 생활고나 가정불화로 인해 가족과 함께 연탄가스로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고령층도 예외는 아니다.  신병을 비관하거나 절망감 등을 이기지 못해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심지어 목회자조차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의 마지막 선택을 자살로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자살에 대해 고대 세계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문제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것에 대해 정당시 되는 경향이 많다.  특별히 불신자들은 자살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일률적으로 자살을 정죄하는 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자살한 사람을 놓고 무차별하게 정죄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에 대해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Durante Alighieri는 『신곡』에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서 받는 형벌을 살인자 못지않게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  교회사에 보면 대체로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자살미수로 살아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다.  또한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만인에게 공개하면서 그의 재산을 몰수할 뿐만 아니라 시체는 교회묘지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중세기에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게 될 때 자기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Augustine은 이런 강제적인 폭행은 처녀성의 면류관은 깨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자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인 Thomas Aquinas는 자살 문제를 놓고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남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할 권리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자살 긍정론’이 펴져 나갔다.  William Shakespeare는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14건 이상의 작품들이 자살 사건을 다루어 자살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스토아 철학이나 향락주의에서 자살을 변호하는 것처럼 이슬람이나 불교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애써 비난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자살 행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여인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한 아비멜렉이 나온다.  이 죽음을 통해 아비멜렉은 모든 것을 잃었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삿 9:54-55).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지만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를 갚은 삼손도 죽음을 선택했다(삿 16:28-30).  병기든 자의 도움을 받은 사울 왕 역시 스스로 칼 위로 엎드러지어 목숨을 끊었다(삼상 31-4).  곁에 있던 병기든 자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삼상 31:5).  다윗의 정치적 자문역할을 했던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자 패배를 직감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삼하 17:23).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시므리는 왕권 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분신자살처럼 왕궁에 불을 놓고 목숨을 끊었다(왕상 16:18).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후에 자책감에 이겨 스스로 목을 맨 가룟 유다가 나온다( 27:3-5).  이 사람은 멸망의 자식으로(요 17:12)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마 26:24).  사도행전 1장 18절은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비극의 배후에는 한결 같이 탐욕’과 증오’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성경은 자살행위를 결코 미화하거나 그러한 행위의 대가로 저지른 죄악과 잘못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이 일절 없다.  물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표현은 있다.  이 말은 자살한 가룟유다에 대해 제자들이 한 말이다.  신학자들은 ‘제 곳’이라는 표현을 한결 같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비껴 나갔다.  일반적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거나 혹은 사도직을 버리고 반역의 자리로 돌아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제 곳’은 어디일까?  나는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제 곳’은 ‘지옥’이란 표현의 완곡어법이다.  비참한 죽음을 기록한 18절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은 가룟유다의 영적 운명의 무서운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자신의 살아오면서 지은 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창 1:27)과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하나의 죄를 포함시킨다(창 9:6).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라도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14:7-9),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사셨기 때문(히 9:12)에 우리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고전 6:20).   

러시아의 작가 Fyodor Dostoyevsky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를 남겨 놓지 않기 때문에(히 12:17), 자살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의 자살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어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27).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고전 3: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고전 6:19-20).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살한다면 그것은 모든 육체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겔 18:4).  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그분의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출 20:13).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요일 3:15).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읽고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므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욕망과 외면의 행위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마 5:28).  미움을 가진 자와 살인자는 도덕적인 형질을 놓고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계 21:8).  하지만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마 5:21-22).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68-69문에 보면 “모든 합법적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보존하고, 불의하게 빼앗거나 해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자나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자는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말씀하셨다(창 9:5-6).  

그러므로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죄목을 피할 수 없다(계 22:15).  만약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히 12:17)를 놓친 자살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같다(마 19:24).  살인자는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자살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일절 없다.  따라서 신학자와 목사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치가 없는 논쟁을 통해 조잡한 궤변을 내세워 자살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삶의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룟유다간 지옥이다(행 1:25). 

사족이긴 하지만 Calvin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살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오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사울의 죽음(삿 31:4-5)과 나귀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 자살한 아히도벨(삼하 17:23)의 부분만을 설교했다.  정말 궁금하다.  자살을 구원의 문제로 다루지 않은 이유 말이다.  TULIP교리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견인교리(Final Perseverance)와 상충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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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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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자살 2023. 7. 23. 17:09

오늘날 신문과 TV와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삶의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가 다르다.  오랜 전에 읽었던 Erwin W. Lutzer가 쓴 『One Minute After You Die』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자살은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천국 문으로 들어간다”라고 주장한다.  Lutzer가 말한 것처럼 자살을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주님을 믿더라도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까?

나는 자살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벧후 1:21)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가장 유일한 기준이고 답이다(딤후 3:15-17).  지금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서는 자살을 공동체를 훼손하는 반사회적 위험한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교회가 전통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보다 깊은 신학적인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첫째, 자살은 창조주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다(창 1:27).  개인의 생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지( 25:14), 제멋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권자가 아니다(벧전 4:10).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다.  누군가가 반문하겠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고후 5:17).  값없는 은혜(엡 2:8)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일과 삶에 있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벧전 4:11).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때문이다(히 9:12).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죄악이.  구약성경은 살인의 행위에 대해 극형을 명령하셨다( 24:17).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홍수가 끝나고 나서 가장 먼저 노아의 가정에게 살인에 대한 법을 주셨다(창 9:6).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창 5:1).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마찬가지로 개인의 생명을 스스로 취하는 행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20:13).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8:4).

셋째, 자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헛되게 만든다.  죽음은 인간의 공통적인 두려움이며 모든 인간의 최종적 경험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야만 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죽으심을 통해서만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다(히 2:14-15).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사망이 패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롬 6:9).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요 10:10)을 값없이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켰다(롬 8: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요 5:24)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면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은 우리가 이겨야 할 원수다(고전 15:55-57).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사망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자살은 신학적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먼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말이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이 자살한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중독되어 있다.  술, 도박, 성, 마약에 중독되어 자신을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자학하는 사람이 이 길을 선택한다.  세 번째는 장기간 독신으로 살거나 직업을 잃은 실직자, 혹은 오랫동안 불치의 병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독감, 그리고 자괴감에 빠진 경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 사람의 자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동기와 원인이 어떠하든지 그와 관계된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준다.  자살로 인해 가족들은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가지 남겨진 문제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본인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

그러므로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마귀가 인간을 도적질 하고 죽이기 위한 속임수와 계략이다(요 10:10).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두려운 마음조차 주시지 않을뿐더러(딤후 1:7), 자살할 마음은 더더욱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마 7:9-11). 따라서 자살할 마음이나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 성전 꼭대기 위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는 것과 같다(마 4:5-6).  만약 사람이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주 오래전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목격한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내세워 자살은 구원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된다는 주장은 신학적 근거가 없다. 한 순간의 자살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막거나 무효화할 수 없고 구원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한 마디로 ‘개소리’다.  작금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왜 그렇게 개소리들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도 시간이 없고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만약 누구든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동조한다면 그 사람이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그는 분명히 마귀새끼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 이기 때문이다(요 8:44).  그리스도인이 자살의 충동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혼자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물론 귀신은 속삭일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고민할 필요가 없어, 한 번만 해봐”  이럴 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행 16:16-18).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고(약 5:14),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마귀의 억압과 고통에서 놓여남을 받아야 한다(눅 4:18, 행 10:38).  사실 이러한 사역은 교회 담임 목사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눅 10:17).  예수님이 지역 교회 목회자들에게 양을 맡겨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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