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지 않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되는 행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합리주의적 세계에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복음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막 16:20).  그러나 성령 안에 안식을 경험한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에게 큰 유익이 되고 은혜로운 체험이 될 수 있다.

한편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종식되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쓰러질 때, 이것이 심리적인 작용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치유사역을 위해 안수하는 사역자들에게 행여 사람을 쓰러뜨리게 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한다.  나는 이들의 개인적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가지고 John Whit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아예 거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단지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권능을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권능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악의 세력이 부리는 고도의 속임수일지 모른다. 이 두려움은 교회 구석구석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이요 쇠약케 하는 불안이다”  이것을 Francis MacNutt 박사의 말로 짧게 다시 인용한다면, 오늘날 현대교회는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John Wimber이다.  그가 처음 이러한 장면을 본 것은 1979년 자신이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강사가 설교할 때였다.  초청받은 강사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오랫동안 성령님을 억제해 왔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오셔서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사모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와 염려하는 가운데 그 강사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고 방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으며 목사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기도를 해주자 사람들이 쓰러졌다.  

Wimber는 당시의 일어났던 상황을 『능력치유』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하나님, 제가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라는 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여파가 가라앉은 후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제직들은 아주 당혹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연이어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교회에 모일 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이 계속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 읽기,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의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더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요약된 결론을 내린다.  “교회에서 영적충돌이 벌어질 때 교양 있는 예절 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부흥운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20세기의 교회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시대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와 안수하여 쓰러뜨린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물론 손을 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Wimber의 예배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그가 설교하거나 개인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그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한 후 단순히 조용히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MacNutt 박사는 1986 England에서 있었던 Harrogate 집회를 포괄적으로 분석 시도한 사회인류학자 Davis Lewis 박사의 글을 인용하여 Sheffield 집회 때 일어난 일을 『Overcome by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치유(임상) 시간이 시작되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도록 초청받곤 했다. Wimber 목사가 성령께서 오시기를 짤막하게 기도하고 앞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마치 무엇을 받는 듯한 자세로 손바닥을 위로 향하거나 앞으로 내민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포개어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Wimber는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나 성령이 임재로 인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외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행복에 넘치는 평온 속에 조용히 있는가 하면 반면에 넘어져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아래 쓰러지는 현상을 보고 이것이 과연 “성경에서 나오는 현상과 같은 것인가?”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마가복음 9장 20절에서 아이가 쓰러진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악의 세력이 개입되어 쓰러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1:23-26).  그러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귀신이 이러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나타낸다(막 5:1-20).  반면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려진 것( 1:28)과 다니엘이 큰 이상을 볼 때 힘이 빠진 적이 있었다( 10:8-9).  그리고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린 베드로( 17:6)와 주의 날에 성령으로 감동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된 요한( 1:17), 나아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 쓰러진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9:4).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오늘날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집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 본 것과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본 결과, 오늘날 집회에서 나타나는 것과 성경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체험했던 것이 달랐다.  그것은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경배의 자세로 있다가 엎드려지거나 쓰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어 제사장이 능히 섬기지 못한 것처럼(대하 5:13-14),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그분의 권능아래 압도당하여 쓰러졌다.  여기에는 안수하는 동작이 일절 없었다.  다시 말해 일일이 세워 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첫 번째는 안수를 통해 쓰러졌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안수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식하리만큼 머리에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손으로 짓누르며 안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리에 살짝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이다.  사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역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요 3:8).  머리를 짓누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사역자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몸에 힘이 빠지고 쓰러졌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민 것도 아니고 안수를 받은 것도 아니다.  내가 귀신에게 홀려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은 멀쩡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은사적(고전 12:12-27),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공식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MacMutt 박사는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18, 19세기에 넘어지는 현상은 설교 중에 나타난데 비해 오늘날에는 안수 기도할 때 자주 일어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에는 치유를 위한 기도가 보편화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그 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대부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그 열매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될 것이다”(마 7:20).

사실 쓰러지는 현상은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증명할 길이 없다(고후 12:1-6).  물론 영적 체험이 일절 없는 무지한 목사가 이러한 현상을 귀신의 역사라고 우겨대면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이런 목사와 쓰러지는 현상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현상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한 현상을 체험한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막 5:20).  집회 현장을 방문하면 더욱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영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따라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혹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하면 된다(마 7:16).    

문제는 이러한 역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체험을 완강히 거부하고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궤변주의 목사들은 거짓 영에 크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골빈 목사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숙하거나 기만당할 정신 나간 신비주의적 목사가 아니다.  나 역시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할 말은 많지만(히 5:11) 폐일언하고 Teresa of Avila의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성령 안에서 안식, 즉 쓰러지는 체험을 찬성하든지 비난한다든지 할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단지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덕목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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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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