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말한다.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다.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 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있었다( 2:17-18). 바울 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었다(고전 14:26). 그러나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있었다”(고전 14:26-33).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이다(고전 14:3).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 중지론자들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누군가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시대의 회중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은사 중지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그들만의 주장의 근거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 지속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orge Mallone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은사 지속론자들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한다. 

Mallone의 주장이 맞는 이유가 있다.  만약 신약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바울은 예언을 분변 하는 것(고전 14:29)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성경에서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 역시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다.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갈 1:6-9).  D. A. Carson도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 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중지론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오류와 남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Donald Gee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를 통해 경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Dennis와 Rita Bennett도 『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상기시켰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해있나 분별하라는 것이다(요일 4:1).

John MacArthur 역시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이다.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은사 중지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지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  또한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약 1:17)을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행 5:34-39).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논쟁거리 > 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통 계시  (1) 2023.10.30
선지자  (1) 2023.10.0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