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동남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죽은 사망과 실종자 숫자는 대략 30만 명에 이른다. 이 일이 일어난 지 6년이 지난 2010년에는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 희생자와 부상자가 거의 30만 명에 이르면서 아이티 인구 삼분의 일인 삼백 만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 쓰촨 성 지진과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한국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게 되는 사건들이 터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외신도 조명한 국내 최악의 안전사고 중 하나로 꼽힌 이태원 세계 음식거리에서 159명의 죽음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이다. 대형 참사가 ‘인재’(人災) 아니면 ‘자연재해’로 혹은 우연하게 일어났는가를 고심하면서 그 많은 희생자 중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은 얼마나 되며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 『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의하면 인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채 죽는다고 한다.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떤 이해도 없이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성경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다(막 16:15). 하지만 우리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 즉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말을 듣고 거부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롬 19:14)에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타 문화권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들의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인가?
더 난해한 것은 “철이 들기 전에 죽은 영아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어린 정신박약자가 죽었을 경우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므로 고의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영아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자비하심에 근거하여(애 3:22),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시 106:1),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아를 포함한(시 51:1), 모든 인간은 이미 원죄로 인해(롬 5:12),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히 9:27).
이러한 문제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한다. 즉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택함 받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행 14:38). 영아라도 선택받은 아이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롬 9:11).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신학자들은 선택받는 것과 상관없이 영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Ramesh Richard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유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영아살해 혹은 낙태로 죽었던 아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일까?
초대 교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일치한 주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 그리고 은사론과 종말론에서도 교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유아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의 운명에 대해 확실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유한한 지식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고전 13:12) 제한적인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조차도 죄의 영향과 피조적 한계로 인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신학자와 목사들은 짧은 단어 하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혹은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합의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죄악 된 본성을 가진 논쟁자들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어떤 중요한 주제에 있어 상당한 일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다(요 14:6). 불신자에게 있어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종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행 4:12).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최종적인 계시다(롬 16:25-26).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또 다른 계시는 없다.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계시의 원천이다(갈 1:11-12, 계 1:1). 모든 관점은 성경을 통해 증거를 찾고 해결한다. 이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다. 여기에는 칼빈주의자나 웨슬리주의자는 없다. 누군가 이 공통적인 특징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이단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따라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라는(행 4:12),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계시와 구원에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중보자다(딤전 2:5). 기독교 밖에서 구원 얻을 방법은 일절 없다(요 3:16).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논쟁적인 사람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형성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딤후 3:15-17).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특별한 성경해석 전통 아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성경을 해석할 때 교단과 신학적 배경, 혹은 자신이 신봉하는 늙은 교주로부터 전수받은 조잡한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가능성이 많다(고전 1:12). 이것은 우리가 인용할 본문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준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이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신학’을 자기의 신(神)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자신을 멸망으로 초래할 것이다(벧후 3:16).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요 1:1-5), 그분께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셨는지(히 10:11-14),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갈 3:13),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를(요 14:21), 성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도 알고 계신다’(요 21:15-17).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말이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롬 8:38),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9). 이 구절은 바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조건적인 그분 사랑의 증거다(롬 5:8). 일단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현존하는 어떤 능력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탄이고 나발(?)이고 없다(삼상 25:25).
하지만 나는 어떤 것에 대하여도 심지어 내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것에 조차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었거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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