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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2.14 성령세례란?
  3. 2013.02.08 하나님은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4. 2013.02.05 파인애플 스토리
  5. 2013.01.30 성경적인 결혼관
  6. 2013.01.29 제자훈련의 필요성
  7. 2013.01.29 제자훈련의 목표
  8. 2013.01.29 제자훈련의 목회철학
  9. 2013.01.16 감정의 강도
  10. 2013.01.05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시는가?

기도의 장소

광야의 소리 2013. 2. 17. 10:24

신자의 기도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의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장소가 단지 

우리의 불안과 조바심과 두려움을 쏟아 버리는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자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한히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쇼핑 목록을 제출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장소는 우리의 짐을 내려놓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짐을 지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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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분되기에 그것은 회심 후에 따라오는 경험이며, 그 첫 번째 육체적 증거는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선조들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이미 거듭난 신자들에게성령세례’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그리고 오순절 사건인 사도행전 2장과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역사( 8),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와( 10),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 받은 일을 내세우며( 19), 이러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도 먼저 거듭나고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삶속에서 오순절과 같은 ‘이차적 체험’ 즉 ‘제2의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어야 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능력을 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보통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의 전제 조건이 ‘회심’이라고 말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지만 일단 회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조건들,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죄와의 결별과 회개’, ‘순종과 기도’, 그리고 ‘인내와 믿음’ 등이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회심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한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세례’란 새 시대를 여는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 이후 신자 개개인의 삶속에 회심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지 그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속으로 유입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다르게 중생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며 구원 이후에 오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을 ‘성령충만’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묘사적 본문, 즉 서술적 본문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서술적 본문들을 교리로 근거 삼는 것을 기피하고 오히려 교훈적 본문들, 즉 일반적인 바울의 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벤자민 B. 위필드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칼빈은 오늘날 논쟁이 심한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주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 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냈을 때에만 성령으로 베푸신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해 둔다. 그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며 또 마찬가지로 날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는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중생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사건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넬료가 그리스도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음에 틀림없다.   쉽게 말하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중생의 영’이기보다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부가적인 ‘성령의 은사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3:2),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내려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처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을( 2:38/주석), 구원의 은혜보다는 ‘은사’로 해석하고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을 제외한 네 번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구원 이후에 받는 ‘제2의 축복’, 즉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이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영’으로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고전 12:3), 다른 하나는 Anthony D. Palma가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력 있는 증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증인들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 이외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영적인 은사와 기사와 이적을 베풀게 하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능력과 은사의 영’을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순절주의자들과 칼빈이 같은 점이 있다면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는 은사들을 동반하는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빈은 사도행전에 일어난 성령사건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2:38/주석), 오순절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The Sovereign Spirit』에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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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인간을 범죄 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죄까지도 만드신 것은 아닌가?”인데 과연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시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죄를 짓도록 적극 간섭하셨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이미 그들이 장차 범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지만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범죄를 예견하시고 그것을 허용하실 뿐(시 78:29, 행 14:16), 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주선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창 2:17).  다시 말해서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정의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창 2:7, 살전 5:23).  그리고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고 그들의 자의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방해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잘못인가를 일깨워 주셨고 인간의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간섭하시고 또 관여했습니다(창 4:6-9).

 

루이스 벌코프는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기동하고 우리의 존재를 갖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행 17:28). 이 신적인 활동은 매순간 인간의 행동을 동반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는다. 행동은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 즉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사10:23).  그러나 만일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되신다면 “하나님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이 질문에 접근함에 있어 우선 하나님이 악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게 하신 원인이었다고 한 가장 분명한 예는 요셉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창 37-50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에서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음을 거듭 강조하시면서(출 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출 8:15, 32, 9:34).  어떤 사람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스스로가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반역한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출 4:21, 7:3),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출 8:15), 말하기 훨씬 전에 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같은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두 가지 요소 모두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하심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단지 바로의 마음속에 있던 악한 정욕과 선택을 더욱 강렬하게 하신 것뿐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이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악에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에 악한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렘 17:9, 막 7:21-2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출애굽기 9장16절에 관해 생각하면서 로마서 9장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구체적인 예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추론해 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까지 쫓아오게 하셨고(출 14:17, 시105:25), 또 다른 예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멸망되었던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구약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으며(수 11:20, 삿 3:12, 9:23), 믿지 않는 팔레스타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삼손의 요구에서(삿 14:4), 또한 엘리의 아들들이 악행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삼상 2:25), 심지어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말합니다(삼상 16:14).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지만(렘 33:2),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욥 34:10. 대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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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제단에

당신의 모든 권리를 내어 놓는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머리 숙여 당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드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 재산, 친국, 주장,

그리고 명성을 가질 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권리 중 어떤 것들은

당신의 영적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됨을 아십니다.

그분은 그러한 요소를 당신에게 제해 버리실 것이며

당신은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권리들을 당신에게 되돌려 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인해 역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우리가 쓰임 받게 되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모든 권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온유하게 됩니다.

온유란 우리의 권리를 하나님께 순복시키는 것입니다.

온유의 반대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때 일어납니다.

사실 화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께 아직도 드리지 않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나면 아직도 주님께 드리지 않는 권리를 찾아내서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단계를 따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IBLP 『파인애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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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에 있어서 결혼의 형태는 다양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취해진 것들이므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결혼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 지으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그 당시의 다양한 결혼 형태, 즉 일부다처제(창 16;3, 29:18, 25, 30, 30:1-5, 삼하 5:13-16, 왕상 11:1-3, 대하 11:21) 등 모계 중심적인 결혼(창 24:28, 룻 1:8, 아 3:4) 등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율법은 “일부일처제” 및 “가부장제”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출 20:17, 21:5, 레 18:8, 16, 20, 20:10, 민 5:12, 신 5:21, 22:22, 24:5).  이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창 2:24), 하나님의 명령 및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말씀과(고전 11:13) 조화되며 이혼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던 예수님과의 말씀과도 일치한다(마 5:32).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께서는 영이 유여하여도 한 영혼밖에 짓지 아니한 사실을 밝히면서 그분께선 일부일처의 결혼제도를 수립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셨다고 말했다(말 2:15).  한편 아브라함은 애굽인 여종을 취함으로써 평온했던 자신이 가정에 불화가 싹트고 있음을 깨닫고 자기 아내 사람의 말을 좇아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었다(창 21:1-21).  그리고 다윗 왕도 많은 처첩을 두었으므로 수많은 자녀를 낳게 되었다(삼 5:13).  그런데 바로 이 자녀들이 형제를 죽이기도 하고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삼하 15장).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왕상 11:3).  또한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세벨이라는 바알을 섬기는 왕후로 인해 숱한 잘못을 범하여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을 받았다(왕상 16:29-33).  이것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로서의 권위를 상실했을 때 발생한 불행의 대표적인 예이다.  “남편”을 뜻하는 히브리어〈바알〉은 “주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성경은 혼인 전의 순결(처녀성)을 율법으로 규명했다.  즉 혼인식이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신부의 처녀성을 증명하는 의식이 있었다.  여기서 신부의 처녀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그녀의 아버지 집 문 앞에서 성읍 사람들에 의해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신 22:13-21).  결론적으로 결혼은 안식일 및 노동에 관한 규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정하여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다(고전 7:1-7).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 결혼을 습관적으로 이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창조 질서를 세우는 의미에서 이를 신성하고 아름답게 여기고(히 13:4),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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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가 아니라 제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모든 족속을 신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라는 명령을 뛰어넘어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예수님이 남기신 유언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를 만들 수 있습니까?  본문의 말씀처럼 지킬 때까지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쳤는데 지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실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목회자는 평신도가 지킬 때까지 가르치고 평신도는 지킬 때까지 열심히 배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적은 인원이라도 제자훈련을 통해서 건강한 성도로 세우는 것이 사실은 성장하는 교회, 즉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가장 효과 있는 성경적 전략임을 믿습니다.

 

2. 평신도는 사역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411-1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에 목회자를 주신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성도의 인격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으로 변화시키는 훈련을 목회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성도를 온전케 한 후에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두 번째 책임입니다.  바로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집니다.  건강한 교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란 ‘섬김’이 아니라 ‘사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은 사역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를 사역자로 세울 책임이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사역자란 목회자이며 평신도는 목회자가 사역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따르면 사역자는 평신도이며 목회자는 평신도가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사역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합니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목회자만 맡고 있었던 양육사역을 평신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지도자가 평신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의 주체가 되려면 먼저 온전케 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온전케 되어야만 봉사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을 통한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는 두 번째 성경적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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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훈련 목표는 “모든 성도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제자훈련' 목회철학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국에 1,00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미국에서도 수많은 한인교회와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와 사회가 새로워지지 아니하고 모든 분야에 있어서 부정과 불의와 죄악이 팽배해 있는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서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교회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만 구원받고 내 가족들만 구원받으면 되지 하는 자기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의 자세, 사회와 나라가 어찌되든지 나만 평안하고 복을 받으면 되지 하는 무사 안일한 신앙의 자세, 주일 하루 외에 다른 날은 전혀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의 자세, 개인의 신앙이 사회 구석구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한 신앙의 자세 등을 거부하고 강한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하고 훈련을 시키는 것이 제자훈련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는 훈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훈련’입니다.  즉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실과 인격이 주님을 닮아가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나의 내면이 변화되는 훈련이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훈련이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 나가는 훈련입니다.  또 하나는 ‘외적인 훈련’입니다.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자세를 갖추는 적극적인 훈련이며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훈련이요, 사회 속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봉사와 섬김을 통해 빛과 소금과 등대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과감하게 감당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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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신도의 재발견에서 그 철학을 찾는다.

교회 안에는 99% 이상의 평신도가 있습니다.  세상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가견적(可見的) 교회는 교직을 가진 소수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하는 평신도의 교회입니다.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사람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변화된 새 생활을 구가하던 평신도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객체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은 교회의 주체가 됩니다.  교역자와 평등하게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며 그들 모두가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 소명을 위해 성령님은 각자에게 분수에 맞는 은사를 주시어 몸의 지체로서 그 기능을 다 하게 하십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에서 평신도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엄청난 저력을 가진 거인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을 성경의 관점에서 재발견하고 그들을 깨워야 합니다.

 

2. 교회의 본질에서 그 철학을 찾는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왜 존재합니까?  우리가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이 교회의 본질 가운데 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할 때 교회는 교역자의 교회도 아니며 평신도의 교회도 아닌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교회입니다.  또 하나, 교회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은 교회 안의 누구입니까?  99%의 평신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시키고 영적무장을 시켜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으로 내보내야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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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매우 높이 고양된 감정들을 품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율법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마치 말로는 그 정도를 표현하기 부족한 듯이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런 말씀도 있다.  ‘의인을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같은 시편에서 성도들은 종종 ‘즐거운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고 요구받으며 누가복음 6장23절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최고로 완벽한 경건을 소요하고 있는 천국의 성도들과 천사들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을 보고 묵상할 때 감정적으로 크게 감화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 감정이 단지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무오한 기준인 성경은 매우 높이 고양되기 했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 감정이 있음을 분병하게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 4:11).  이스라엘 자손들도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크게 감화되어 그분을 찬송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무리는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떤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요 12:18).   하지만 그리스도께는 당시에 참된 제자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이 야단법석이 끝이 나 버렸던가?   그리고 이전처럼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이 크게 외쳤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침이었다.  “호산나, 호산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었다.

 

신앙 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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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인간의 도움이나 협력 없이 혼자의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이후부터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인간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영광을 받으셨고 앞으로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사람과 협력하시되 그분의 거룩한 사역 수행에 동참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도덕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인간의 범죄까지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신적인 질문은 고대로부터 계속 제기되어 왔고 때때로 우리들 자신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의문을 갖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죄악과는 절대 무관한 분이시고 인간의 범죄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으십니다.  다만 악인이 그 사악한 마음으로 범죄 하여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뿐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시라는 구절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도덕적인 피조물의 의지적인 행동을 통하여 악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셨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66:3-4, 전 7:29).  성경에는 악으로 인해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을 비난한 적이 없으며(출 15:11, 사 5:16), 하나님은 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고(욥 34:10), 인간들이 범한 잘못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겔 18:4, 롬 8:13).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악을 즐기시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4, 시 5:4).  사실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악한 일이 행해지도록 하셨다고 한 성경구절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경우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기로 한 사람이나 마귀가 악을 행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의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기를 원했고 결국 그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마침내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시 105:17),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창 37장).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창 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창 50:20).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죄악된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는데 이 둘 모두 사실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이사야 45장7절의 말씀도 하나님이 친히 악을 행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악이 행해지도록 예정하셨지만 구체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하나님은 실제로 악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 강요』에서 지혜롭게 말합니다.  “다른 악행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주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신 심판을 이루시도록 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행동을 사용하시고 그의 심판이 임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모든 악으로부터 순결을 유지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위해 악을 사용하시지만 악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거나 의로우신 분이 아니시며 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고(욥 34:10),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악이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28).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지도 않으셨는데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분이 원치 않고 의도하지 않은 악들이 이 세상에 점점 더 많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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