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션(unction)

기름부으심 2022. 12. 3. 13:54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가 ‘기름부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unctio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Princess Diana 장례식 때 불러진 ‘The King of Love My Shepherd Is’라는 찬양에 나타나는데, 아마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이 단어(KJV)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unction과 유사한 anointing이란 단어 역시 헬라어 chrism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히 ‘기름을 바르다’이다.    

‘기름부음’(chrisma)은 보통 사람의 머리에 특별한 올리브기름을 붓는 것을 가리킨다.  ‘chrisma’는 헬라어 ‘chrio’에서 파생된 것으로 ‘메시아’ 혹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Christ’의 어근이다.  이 기름은 왕들과 특별한 사역자들을 성별 하는 데 사용되었고(삼상 16:1, 13), 또 병든 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장로들이 기름을 사용하기도 했다(약 5:14).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chrisma’라는 단어는 개인의 강한 개성을 말하는 ‘charisma’, 혹은 성령의 은사들을 지칭하는 ‘charismata’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모두 기름 부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단순히 성별(聖別)이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최소한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올리브에 몰약(myrrh)과 육계(sweet cinnamon)와 창포(sweet calamus), 그리고 계피(cassia) 등의 향을 섞어 만든 기름과 관련(출 30:22-25)이 있는데, 이 기름 부음은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것이었다(출 30:26-29).  둘째로, 제사장(레 8:10-13)과 왕을 세울 때(삼상 10:1) 사용되었다. 

셋째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은 후에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으며(삼상 10:6) 새 마음을 주셔서(삼상 10:9) 그가 예언하기를 시작한 것처럼(삼상 10:10-11) 성령의 임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사울은 왕이었지만 여호와의 신은 이미 그를 떠났다(삼상 16:14).  하지만 다윗에게는 왕관은 없었지만 기름 부음 즉,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 것’(삼 16:13)처럼 실제로 성령께서 친히 임하셨다는 것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상징 이상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며 보내실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6:13).  그러므로 기름은 상징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름을 바르는 행동과 무관하지 않았다(약 5:14-15).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실제로 기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면서 ‘기름 부은 받은 자’, ‘나의 선지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고, 아비멜렉에게는 그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창 20:7).  선지자가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왕상 19:16), 이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러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떠한가?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사도적 교회에 있어 ‘안수’가 교훈의 터,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고 언급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의식과 관련된 신앙생활의 기본임을 나타내고 있다(히 6:1-3).  신약 성경에서는 개인을 향한 은혜의 수단인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마 8:3, 막 5:23, 6:5, 8:23-25, 눅 4:40, 13:13)과 초대 교회의 사역에서(행 4:29-30) 사용되었다(행 14:3).  또 다른 목적으로는 특정한 사역과 섬김의 큰 능력으로 무장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한 경우가 있다.  처음 집사들이 임명되었을 때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했고(행 6:6),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다(행 13:3).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의 임재에 대해 정해진 패턴이 나와 있지 않고, 신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기도 했고(행 2:38),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으며(행 8:14-17), 때로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을 받기도 했다(행 10:44-48). 

사울의 회심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에서의 가장 중심 된 인물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울과 아나니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논하고 싶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불가항력적 만남은 신적 기원이며 신적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후 1:1).  그가 이단자들을 뒤쫓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빛과 소리를 통한 신적 현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행 9:3-5).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울은 삼일 동안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금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행 9:8-11).    

다메섹 유다의 집에 있던 사울을 방문한 아나니아는 예수께서 사울에게 보여 주신 환상대로(행 9:12) 안수하며 기도하였다(행 9:17).   사울은 영적으로 고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치유를 경험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 치유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행 22:12) 아나니아의 안수에서 왔다(행 9:12).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동반될 표적 중의 하나로서 ‘저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8)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안수가 치유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어루만짐을 통해 그의 능력을 베풀기 위해 안수를 선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수를 통하지 않고 말씀만을 가지고(마 8:16) 얼마든지 시공간을 초월해 치유하시거나(요 4:46-54) 우리들 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로로 사용해서 그림자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신 적도 있었고(행 5:15),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권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갔다(행 19:12).  이런 일들은 골빈 신학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을 믿는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고(마 12:22-37)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마 15:1-9)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분의 역사가 나타난다(롬 12:3).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요 3:8),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목도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위협과 살기를 띠고(행 9:1),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 하며(갈 1:13),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행 22:4), 핍박자였던(딤전 1:13),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한 능력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사흘 동안 회개하면서 생각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배운 가말리엘 신학(행 22:3)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이단 사냥질(행 24:5)에 열을 올렸던 사람이다(행 9:1-2).  그는 3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비뚤어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소행(행 7:58-8:3)이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행 9:4-5).  아나니아가 도착했을 때, 평상시에 하지 않았던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행 9:11).  금식도 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데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요한 영적 연습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울은 후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기름 부음의 전이를 통해 은사를 준 경우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 예언의 말씀으로 인해 받은 것’(딤전 4:14)을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한다고 말했다(딤후 1:6).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는 신령한 은사, 즉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도의 자격으로(엡 1:1),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롬 1:11). 

“은사를 나누어 준다”  바울에게 이단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통’과 ‘이단’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바울이 나눠 주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가르침’(롬 12:7)이나 ‘권고’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해석은 Alfred Plummer가 말한 것처럼 사역자가 되게 하는 ‘권위’(롬 12:8)와 ‘통찰력’, 즉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직임’이라고 말한다.  St. Bernard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은 평범한 은사가 아니라 목회 직무에 조화시키기 위해 받은 특별한 은혜다”  그 외 복음 전도를 위한 은사, 혹은 교회를 다스리는 은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빼놓고 한결 같이 ‘신령한 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 8-10, 28-30절, 또는 로마서 12장 6-8절과 에베소서 4장에 나열된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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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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