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모든 일에 있어 과정을 중시(重視)하는 목사다.  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한다.  이들이 누구인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직 예수’를 외쳤던 자들이다(마 25:11).  그러면 오직 예수만을 외쳤는가?  아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교제도 나누고, 성찬도 했다(눅 13:22-30).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등불이 꺼져 가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했다고 자부했던 신자들이다(마 25:1-13).  그런데 결과는 지옥행이었다.  이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목사가 ‘예수’를 지겹게 외쳤도 지옥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이 말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는 개혁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지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철학자들과 한판 논쟁을 벌인 후 아덴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그리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업의 중심지 고린도로 갔다(행 18:1).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몹시 탈진되어 있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쓰고 있다.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1-40).  이와 비슷한 일들을 데살로니가(행 17:1-9)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0-15).  또 다른 이유는 아덴에서 사역한 것이 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행 17:16-34).  이런 일들을 인해 그는 심히 좌절감을 느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바울의 자랑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면(갈 6:14), 굳이 떨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십자가 아닌가?

먼저 글(메마른 복음)에서 말했듯이 나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먼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성경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백날 외쳐도 구원은커녕 1원(?)도 받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반드시 부활도 같이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요 11:25-26).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행 4:12).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시고(행 2:24) 무덤에서 살아나신 유일한 ‘주’(主) 시기 때문이다(고전 15:20).  다시 말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행 2:32)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롬 10:9-10).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간혹 목사들 중에 부활은 몰라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열광하면서도 왜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사도행전 전반에 보면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반복적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선포했고(행 2:32, 3:15), 누가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행 4:33).  연이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라고 선포했다(행 5:30-32).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신’ 것과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언급한다(행 10:39-41).  사도행전 후반에 들어와서는 바울 역시 누가에 의해 부활의 증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행 23:6-8), 예를 들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고(행 9장),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행 22:15),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것을 전했고(행 26:2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13:27-39).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모든 설교가 거의 부활의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행 2:31, 4:2, 10, 33, 13:30, 32, 34, 37, 24:15, 21, 26:8).

이 부활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사도들이 자살한 가룟 유다(마 27:5)의 후임자를 임명할 때,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행 1:22).  정말 이상하지 않는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갈 3:13)를 증거 할 제자를 찾아야 하는데, 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전도자 Michael Green은 『Evangelism through the local church』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과 부활에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묻고 싶어 하는 모든 방식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 주신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는 독사의 새끼(마 23:33)들 같은 사두개인 목사들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다(행 4: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전적으로 상호 관련이 있는지 단언하고 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고전 15:13),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고전 15:17) 있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이 완성이라는 것이다(롬 6:5-10, 8:11, 10:9, 고전 15:7, 21-22, 벧전 1:3-4).  즉 대속의 사역으로(히 9:22),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구속의 완성으로(고전 15장),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복음의 핵심이다.  어느 한쪽 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이 인도하심 없이는 구원, 그것은 꿈같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복음을 힘 있게 하는 것은 날카로운 지성과 논쟁 능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의 능력은 메신저의 기술이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성령께서 도우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 학식이나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는 싶은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회심의 역사(役事)가 자신과 자신의 십자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리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살전 1:5)이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있어 복음은 어떤 것인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벧전 1:12).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외쳐도, 그 말만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으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씀이 듣는 자들을 위로하고 일깨워 주고 확신시키시는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많은 사람이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 말씀을 청종하여 믿게 되고(행 16:14), 그들의 마음과 삶을 빌립보 간수의 가정 같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받치게 할 수 있다(행 16:33).  이런 능력에는 또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한 마디로 성령이 빠진 복음은 그것이 예수든, 십자가든 그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에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의 복음전도 방법이 무엇인가?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NIV/고전 2:4)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4:20).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9).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을 받고(행 2:1-4)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막 16:20).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런 능력도 없이 말씀만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말 우리가 사도들보다 능력이 있단 말인가?  성령의 능력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 말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가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오랜 시간을 성령의 능력도 없이 ‘오직 예수’만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칼빈주의의 5대 교리 T.U.L.I.P을 얼마나 지겹게 가르쳤는지 신자들도 인정한다.  칼빈주의 목사라고 말이다.  성도들 보기에는 내가 예수의 사람인 것 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입만 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바울만이 십자가를 자랑했는가?(갈 6:14).  아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 십자가만 외치면 다 해결되는가?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았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때는 내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단의 냄새가 나는가?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도 내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요 1:27).  왜냐하면 사도들은 능력을 필요로 했지만(눅 24:49) 나는 능력 없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개혁주의 자들이 입만 열면 나팔을 불어대던 그 십자가의 복음을 능력도 없이 열심히 증거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이 쉬도록 외쳤겠는가?  마음은 뿌듯한 것 같지만 뭔가 허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성령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었다.  나만 ‘골빈’ 목사인가?  아니다.  오늘날도 나처럼 골빈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을 벗겨 주시기 전까지(행 9:18), 자신이 영적 조현병 환자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요 9:40-41).  

성령이 빠진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을 왕따 시키다 못해 근심을 넘어(엡 4:30) 소멸시킬 정도(살전 5:19)로 그분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는 하지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문을 이미 닫아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더 슬픈 현실은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계 3:17).  이들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족이긴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더라도 십자가만 증거 하면 되지 않을까?  Harry G. Frankfurt가 말한대로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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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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