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살

자살 2023. 7. 30. 15:56

고대 세계에서 자살을 예찬한 자들은 ‘스토익주의자’(Stoicism)들이었다.  이들은 생활의 모든 비참함과 불행에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향락주의자’(hedonism)들 역시 사는 것이 인간에게 견디기 어렵게 될 때에는 언제든지 자살이라는 도피의 문이 열려 있다고 가르쳤다.  자살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도 달랐다.  그리스의 철학자 Aristotle는 '자살은 국가에 대한 범죄'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Plato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을 경우 자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다변화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명 경시 풍조로 극단적 선택인 자살 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별히 청소년들은 학업문제나 열등감, 그리고 ‘왕따’ 등을 이유로 투신 또는 목을 매어 자살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학부모의 폭언에 시달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중년층은 생활고나 가정불화로 인해 가족과 함께 연탄가스로 동반자살을 시도한다.  고령층도 예외는 아니다.  신병을 비관하거나 절망감 등을 이기지 못해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심지어 목회자조차 신앙생활을 하다가 삶의 마지막 선택을 자살로 끝마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자살에 대해 고대 세계에서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한 문제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것에 대해 정당시 되는 경향이 많다.  특별히 불신자들은 자살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일률적으로 자살을 정죄하는 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자살한 사람을 놓고 무차별하게 정죄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에 대해 우호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생존법칙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Durante Alighieri는 『신곡』에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서 받는 형벌을 살인자 못지않게 가혹하게 다루고 있다.  교회사에 보면 대체로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자살미수로 살아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다.  또한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만인에게 공개하면서 그의 재산을 몰수할 뿐만 아니라 시체는 교회묘지에 매장하지 못하도록 했다.  중세기에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게 될 때 자기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Augustine은 이런 강제적인 폭행은 처녀성의 면류관은 깨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자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인 Thomas Aquinas는 자살 문제를 놓고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남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결정할 권리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자살 긍정론’이 펴져 나갔다.  William Shakespeare는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14건 이상의 작품들이 자살 사건을 다루어 자살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스토아 철학이나 향락주의에서 자살을 변호하는 것처럼 이슬람이나 불교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애써 비난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시대와 종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자살 행위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여인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한 아비멜렉이 나온다.  이 죽음을 통해 아비멜렉은 모든 것을 잃었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은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삿 9:54-55).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지만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원수를 갚은 삼손도 죽음을 선택했다(삿 16:28-30).  병기든 자의 도움을 받은 사울 왕 역시 스스로 칼 위로 엎드러지어 목숨을 끊었다(삼상 31-4).  곁에 있던 병기든 자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삼상 31:5).  다윗의 정치적 자문역할을 했던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획이 채택되지 않자 패배를 직감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삼하 17:23).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시므리는 왕권 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분신자살처럼 왕궁에 불을 놓고 목숨을 끊었다(왕상 16:18).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후에 자책감에 이겨 스스로 목을 맨 가룟 유다가 나온다( 27:3-5).  이 사람은 멸망의 자식으로(요 17:12)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마 26:24).  사도행전 1장 18절은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비극의 배후에는 한결 같이 탐욕’과 증오’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성경은 자살행위를 결코 미화하거나 그러한 행위의 대가로 저지른 죄악과 잘못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이 일절 없다.  물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  그러나 ‘제 곳에 갔다’(행 1:25)라는 표현은 있다.  이 말은 자살한 가룟유다에 대해 제자들이 한 말이다.  신학자들은 ‘제 곳’이라는 표현을 한결 같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비껴 나갔다.  일반적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거나 혹은 사도직을 버리고 반역의 자리로 돌아간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제 곳’은 어디일까?  나는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지옥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제 곳’은 ‘지옥’이란 표현의 완곡어법이다.  비참한 죽음을 기록한 18절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은 가룟유다의 영적 운명의 무서운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자신의 살아오면서 지은 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창 1:27)과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하나의 죄를 포함시킨다(창 9:6).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라도 자살을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14:7-9),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사셨기 때문(히 9:12)에 우리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고전 6:20).   

러시아의 작가 Fyodor Dostoyevsky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를 남겨 놓지 않기 때문에(히 12:17), 자살은 살인의 최악의 형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신자의 자살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어 자살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27).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고전 3: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고전 6:19-20).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살한다면 그것은 모든 육체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겔 18:4).  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는 그분의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출 20:13).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요일 3:15).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읽고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므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욕망과 외면의 행위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마 5:28).  미움을 가진 자와 살인자는 도덕적인 형질을 놓고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계 21:8).  하지만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마 5:21-22).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68-69문에 보면 “모든 합법적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보존하고, 불의하게 빼앗거나 해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자나 스스로 생명을 끊는 자는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말씀하셨다(창 9:5-6).  

그러므로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죄목을 피할 수 없다(계 22:15).  만약 에서처럼 회개의 기회(히 12:17)를 놓친 자살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같다(마 19:24).  살인자는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자살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일절 없다.  따라서 신학자와 목사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치가 없는 논쟁을 통해 조잡한 궤변을 내세워 자살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삶의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은 가룟유다간 지옥이다(행 1:25). 

사족이긴 하지만 Calvin은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살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오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사울의 죽음(삿 31:4-5)과 나귀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 자살한 아히도벨(삼하 17:23)의 부분만을 설교했다.  정말 궁금하다.  자살을 구원의 문제로 다루지 않은 이유 말이다.  TULIP교리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견인교리(Final Perseverance)와 상충되기 때문일까?

'자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회자의 자살  (0) 2023.08.13
용납될 수 없는 죄  (0) 2023.08.06
자살  (0) 2023.07.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