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증

기름부으심 2023. 1. 21. 14:0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하겠지만, 나는 평상시 골방 기도(마 6:6)와 묵상 기도(창 24:63)를 즐긴다.  때로는 부르짖는 기도(렘 33:3)와 금식기도(마 6:16-18), 그리고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예외 없이 통곡 기도(스 10:1)나 얍복 나루터 기도(창 32장)를 한다.  거의 죽기 살기로, 때로는 까무러칠 정도로 매달린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에는 마음 놓고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는 수양관이나 기도원이 없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바다 건너 어느 작은 기도원겸 수양관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날아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로 3시간, 택시로 45분을 더 달려서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꼭 기도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하시는 것 같았다.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에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 주님께서 사무엘상 30장 24절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셨다.  그 구절을 하루 종일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 구절을 떠오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집에 있는 아내가 생각이 나면서 마음에 “너와 똑같은 은혜를 네 아내에게도 부어주겠다”라는 감동이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응답을 받고 4주간의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틀 뒤 새벽기도 시간에 아내에게 기도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기도하고 싶다고 말하자 아내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내가 평상시 하지 않았던 행동으로 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주님께서 똑같은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때는 나에게 있어 성령의 사역에 눈을 처음 뜨는 시기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의심을 물리치고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했지만, 일주일 다되어가는데도 아내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귀신의 속삭임을 들은 것인지 의심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할 때마다 아내의 표정이 “어디 해봐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당신에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거야”라고 말해주면서 일주일째 되던 날 기도할 때,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망부석 같은 아내에게 임하였다.  밀어서 쓰러뜨리지 않았다.  손을 가볍게 얹고 기도하는 순간 맥없이 쓰러졌다.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성령 안의 안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후 아내는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아주 신비스럽게(?) 며칠 동안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험을 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할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고후 12:6).  이 이야기는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의심이 밀려오고 ‘구라’ 같다는 느낌이 드는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의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성령의 권능,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고’(눅 4:14), 안식일에 회당에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Gerald F. Hawthome는 예수님과 성령에 관한 누가의 기사에 대해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와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밖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  Hawthome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두 번째 위격으로서(요일 5:20),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요(골 1:15), 본체의 형상이시며(히 1:3),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시다(요 14:9).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요 1:1),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빌 2:6-11),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는 사역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와 축귀 사역을 하셨다면, 나는 지금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서(요 1:14), 누가복음 4장 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충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선포하신 적이 있다(막 2:1-12).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는(요 10:30),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마 26:62-64).  하지만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눅 11:20) 즉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온전히 계시의 약속(성경)에 의지했고(사 11:1-5), 사역에 있어 언제나 성령을 의존하셨으며(사 61:1-3), 공생애 기간 철저히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요 5:19).  Hawthome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지상사역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성령을 의존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딤전 2:5), 또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성령께서 지상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께 기름부어 세우셨다면(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눅 11:13),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에 더 큰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수 있다(눅 24:49).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 28:19),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며’(막 16:15) 더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막 16:17-18).  이 말이 믿어지는가?  골병든 믿음이나 개떡 같은 신앙을 가지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히 1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하고 의탁하셨다면,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도 성령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프면 골골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능력이 개뿔도 없으면서 메마른 말씀만 증거 하면 ‘장땡’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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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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