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ley는 Calvin 신학에서 신학적 원리로 제시한 단일 예정(single predestination)과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중에서 어느 것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Augustine과 Luther를 따르는 신자들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단일 예정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1739년 4월 29일 주일 아침, 그의 전체 설교 사역 가운데 한 획을 긋는 한 편의 설교를 한다.  이 설교는 로마서 8장 32절에서의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이며, 제목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Free Grace. A Sermon Preached at Bristol. By John Wesley』에서 나오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불변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예정에 따른 결론은 대다수의 인류가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 가운데 속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절대적으로 구원하지 않을 것을 작정했다고 믿는다. 이는 그들을 멸망당하도록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영원한 죽음을 명하시면 저주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든, ‘간과’이든, ‘단일 예정’이든, ‘영원한 멸망’이든,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하고 무엇이라 부르건 간에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Wesley는 신학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든지 간에 Calvin의 모든 신학적 변주(變奏)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술어들이 뜻 하는 것은 분명하다.  Calvin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계획에 따라 구원에 이르도록 결정하신 자들과 한편 멸망으로 내어 맡길 자들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무슨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 중의 누구라도 구원받게 되는 사람도 없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싶어도 저주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믿는 것과 상관없이 지옥에 갈 수 받게 없다는 것이다.       

Herbert Boyd McGonigle는 Wesley가 증거 한 설교, 『Free Grace』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 설교는 신학적인 대작이다. 예정에 대한 이 첫 번째 설교와 출판물은 Wesley가 교리적으로 반칼빈주의(anti Calvinism)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Calvin과 Calvinist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설교에서 대상으로 삼은 것이 Calvin의 무서운 결정, 즉 ‘잔인한 작정 교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Wesley는 이 설교를 한 다음 날 “난 잔인한 작정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라고 선언했다. 

Wesley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설교를 조금 더 들어보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교하는 것이 모두 다 공허한 일이 된다. 이미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다. 설교를 듣던지 아니 듣던지 간에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설교는 유기된 자들에게는 헛된 일이 된다. 선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설교가 소용없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교와 상관없이 그들은 틀림없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헛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Calvin의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솔직하게 말해 Calvinism 입장에서 보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단지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복음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눅 15:3-5),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지겹도록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예정)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거을 예견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Wesley 역시 Calvin의 이러한 주장에 논박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성화를 직접적으로 소멸시킨다. 그 교리 자체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화를 추구해야 함을 파멸시키는 뚜렷한 경향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성결함을 따르고자 하는 맨 처음 동기들을 전적으로 없애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는 자에게는 인생의 싸움을 경주하게 할 아무런 동기가 되지 못한다. 자기가 영생이든, 사망이든 둘 중의 하나로 이미 판결이 났다고 믿는다면 성화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예정의 교리는 성화의 몇몇 특별한 가지들, 즉 온유함과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잘라 버리는 경향이 있다   

Wesley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Calvin은 하나님의 다른 특성들, 즉 사랑(요일 4:16), 거룩하심(시 99:9), 의로우심(계 15:3), 공의(사 5:16), 선하심(시 34:8)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Wesley는 말라기 3장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불변성을 믿었다.  이것이 성경적 사실이라면, 영생의 선물(요 1:12)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불변한 사랑(약 1:17)과 선하심(시 86:5) 역시 포함된다고 그는 믿었다.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에서 나오는 Wesley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명령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 명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즉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이다”(막 16:16).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예수님 당시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셨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영적인 자살을 범하고 있었다(요 8:21-24).  Wesley는 예정(predestination)과 선택(election)과 관련해서 개인의 삶에 영향력을 가지고 저항할 수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지보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의지라는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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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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