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ethics: A Primer For Christians』 저자이며 생명윤리학자인 Gilbert Meilaend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대상은 태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에서 태아를 제외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제는 쉽게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서 죽은 영아나 유아들, 특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낙태나 살해로 희생된 아기들이 있다.  또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영아도 있다(삼하 12:15-18).  그런데 이 영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마 20:28)에 대해 알리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사람들을 구원한다면 “이 영아들의 운명을 어떻게 되며, 또한 구원받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한다택하심을 입은 유아들은 어려서 죽더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구원받는데, 그분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선택받은 유아들은 유아기에 죽었어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학자 B.B. Warfield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Augustine 오직 세례를 받은 유아만이 구원받을 있다고 말하는 반면 Charles Hodge는 유아시절에 죽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Herman Bavinck 역시 언약의 자손인 유아들은 세례와 상관없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아를 포함한( 9:11), 모든 사람이 아닌 영생주기로 작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13:48),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 사역에 대해 번도 들어보지 못한아들이 아담의 죄를 공유하기 때문( 5:12)에 선택을 받지 않아 구원받을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요일 4:10),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있겠느냐는 것이다( 30:18).  이 주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풀고 제한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는 Calvin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방대한 책 『기독교강요』에서는 사랑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지 중요하게 다루질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머지 판단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가톨릭에서는 사후 영혼이 머무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Pope Benedict 16세의 지시로 폐기되었지만 ‘영세’(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머무는 장소를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자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영혼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연옥’(Purgatory)이나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있는 영혼들과 달리 천국으로 옮겨가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선조 림보’ 교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어떠한 구원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눅 16:25-26), 육체와 정신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유아들 역시 원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5:12).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와 상관없이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엡 2:8).  즉 ‘영세’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4:6, 행 4:12).  무엇보다도 성경은 ‘유아 림보’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할 뿐 아니라(삼하 12:21-23), 영원히 존재할 인간의 처소는 오직 ‘천국’과 ‘지옥’뿐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계 20:10, 21:1-7).

조금 더 유아 구원에 대해 살펴보면 유아는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Christian Theology』에서 성경이 책임질 나이(age of accountability)에 관해 가르치고 있어(삼하 12:21-23), 그 나이에 이르지 않은 아이는 죄에 대한 책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최후 심판 때 이루어질 정죄의 기준은 개인적인 죄다(계 20:11-15).  그렇다면 유아들은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되기 전에 죽었거나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원죄에 관련하여 최후의 심판을 언급한 구절에서도(롬 2:4-8, 14:10, 고후 5:10, 계 20:12), 유아가 죽어서 실제적으로 옳고 그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경우 심판의 근거에 관해서는 언급한 것이 일절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성경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시 51:5).  만약 복음을 이해하고 믿기 어려운 나이에 죽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들의 공로와 의나 무죄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딤전 2:5)과 이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요 3:3).  이처럼 어려서 죽은 유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은 유아들, 특별히 불신자 자녀인 유아에 관해서도 성경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죽고 난 이후에도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사후 전도론’을 주창하는 자들이다.  증거 본문으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부터 4장 6절까지 말씀을 내세운다.  또한 구원받는 것에 있어 영아와 성인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괄적 구원론’ 자들이다.  이들도 사도행전 43절과 디모데전서 4장 10절을 증거 본문으로 내세운다.  ‘보편적 구원론’ 자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받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들 또한 증거 본문으로 로마서 5장 18절과 요한일서 2장 2절 말씀을 내세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논증이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는 이 질문들(구원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의 관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고난과 악은 인생 가운데 펼쳐진 위대한 드라마”인 것처럼 이 세상 안에 있는 악의 관한 문제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대해(욥 1-2장)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논쟁적이거나 이단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는 교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취급하고자 할 때 성경 한 구절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많은 자료에 의지할 수 있는 견해를 취하여야 한다.  물론 어떤 중요한 이슈들에서 입장 차이를 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으나 그 말씀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역설과 신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논리구조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55:8).  환언하면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문제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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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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