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험해 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깎이거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시 24:3-4).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이다’, 혹은 ‘악령의 역사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사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IHOP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 때,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Peter Wagner 박사,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필수과목인 YWAM Kona, 치유와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Reinhard Bonnke 선교사, 그 외 Randy Clark을 비롯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자칭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사역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이들을 만난 이유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알아보고 쓰러지는 현상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책을 통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그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귀신이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말이다.     

그런데  이단 사냥질 하는 목사와 신학자 중에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영적세계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발췌독하는 가운데 영악하게도 빗나간 해석으로 독선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하게 모르면 “체험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라고 말하면 좋을 뗀데 명색이 목사라고 쪽팔리는지 신학적 궤변을 내세워 무조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세운다.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한 마디로 바리새인처럼 ‘싹수가 노란’ 것 같다(마 12:22-37).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할지 안 변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지금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성경적으로 말하면 독을 품은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요 8:44). 

나는 장기간 말씀의 사역을 하다가 성령의 사역을 목회에 접목시켰다.  처음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나서 사역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강한 호기심에 사로 잡히곤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성령의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통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분의 역사를 기대한 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싶어 했다.  이런 미숙한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역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목회의 모든 측면에서 동기자체가 순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쓰러지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사역자 스스로가 순수한 동기를 가지려는 노력은 어려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기름 부어 주신다는 그럴듯한 증거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역자 안에는, 즉 그 사람이 ‘성령의 사역’을 하거나 혹은 ‘말씀의 사역’을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행동들은 엄청난 유혹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구제, 기도, 금식을 했다(마 6:1-18).  이 성경구절이 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을 했다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고전 10:11).  그러나 자기 자신만큼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권능 아래 압도되어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오만의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현상이 극적이고 가시적이며 사역자 자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쓰러져 안식한다는 것은 사역자 자신이 거룩하다는 징표가 아님을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막 7:20-23).  정신과 의사이며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는 이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았다는 이런저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한두 가지의 비밀스러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천천히 익숙해져 간다. 그러한 죄가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런 지도자를 쓰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사실 그 지도자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상투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이나 특권을 오용할 수 있기 때문에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가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사역자는 그런 일을 멈추고 단념해야 만 할 것이다.  만약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 자신이 직접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현상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안수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역자가 안수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상대방을 놓고 큰 소리나 혹은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효과적인 중재이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중재 형태는 때때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역자가 쓰러지는 것을 열망한다고 여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 중요성에 대해 과장된 개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역자는 사람들 앞에서 극적인 효과를 노리게 된다(마 23:5).  그 결과 기도받는 사람은 최면술의 자기 암시로 성령의 임재와 무관하게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보이므로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죄의식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쓰러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성령의 임재와 상관없이 무언가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일부러 쓰러지고, 또 다른 사람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맡김으로 그분의 임재 아래 쓰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사역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미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너무 익숙해 있어 꼭 쓰러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는 감정적으로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쓰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사역자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고 치료하실 것을 열망하는 것이지(행 4:10), 그 사람이 성령 안에 쓰러져 안식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John White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물론 쓰러지는 것과 안식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20절 말씀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안식할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혹은 영과 육이 치유받거나 또는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사역자의 노력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막 16:17-18), 사역자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보잘것이 없음을 통감해야 한다(눅 17:10).  이러한 현상이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것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행 3:12).

따라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Lloyd Jones가 『부흥』에서 말한 것을 인용해서 결론을 내리고 싶다.  “현상들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들을 허락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우리의 눈을 언제나 주님의 영광에 고정시키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전 5:19-22).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행 16:7)에 사역자는 현상이나 체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영적체험을 하더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히 12:2).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오직 예수’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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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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