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온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성경 원서의 언어를 알고 성경의 문학적 구성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체계적인 신학 이론 등을 잘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즉 성경지식이 풍부한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처럼(요 10:27),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대신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잠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잠 2:10),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축복이다(호 6:3).  우리는 언제나 ‘성경관주’와 ‘신학해설사전’, 그리고 ‘성서용어색인’과 ‘신학 논문’, 혹은 ‘다양한 번역본’과 여러 ‘주석’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또한 그 많은 서적들이 모두 지식층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열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 지식이 풍부해질 때 생기는 교만과 자만심이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들, 특별히 신학자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풍부한 지식으로 업적을 이루거나 연구할 때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들은 매일 성경을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요 5:37-47).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눅 11:52), 그 계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 마음에 있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절의 종교 지도자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랍비’라 칭함을 받으면서(마 23:1-7),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던 이스라엘의 선생들이었다(요 3:10).  하지만 이들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마음이 강퍅하고(요 8:13),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이었기에(눅 16:15), 하나님의 음성(요 5:37)과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생명을 주며 깨우침을 주는 말씀이 그들의 닫힌 마음과 귀, 생각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요 8:47).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이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인위적인 법의 강요로 인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눅 11:52).  그 결과는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보내졌다(마 23:13).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사 9:16).  이 종교 지도자들의 눈먼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다’(마 23:24).  사소한 신학적 논쟁 즉 외식적인 정결법에는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영역 ‘의’(justice), ‘인’(mercy), ‘신’(faithfulness)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해 가차 없이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한 경고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곱 가지 행위를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퍼부으셨다(마 23:13, 15, 16-22, 23-24, 25-26, 27-28, 29-36).  이들은 이미 구원받을 희망에서 제외된 자들이다(마 23:33).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만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마 17:5-6).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음성을 들으셨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 대신 우레와 천둥 치는 듯한 소리만을 들었다(요 12:28-30).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이 올바로 서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해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소리는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30절).  그러나 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들이 제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오직 예수다(28절).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 구절을 꼭 기억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을 심히 핍박한 바리새인들은 어떤가?  이들은 명석하고 총명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한 지식은 성경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자신들의 귀를 막았다(요 8:45-59).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항상 겸손하셨기에(마 11:29), 한 번도 아버지의 음성을 놓치신 적이 없었다(요 5:30, 8:28, 12:49, 14:10).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지(잠 3:34), 성경지식이 많아서 그 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바리새인 같은 ‘관심 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딤전 6:4).  이런 자들에게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쓸데없는 변론과 궤변에 병적으로 열광적이라는 것이다(REB).  유익이 없는 논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병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이런 악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타난다(딤전 6:5).  

사실 겸손하거나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다지 총명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현대교회 목회자들처럼 세련되어 보였을까?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  이 분의 약력은 이렇다.  우선 가방 끈(학벌)이 짧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가문의 배경이나 정치적 기반이 전무하다.  인맥(人脈)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조차도 없다.  세상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낄만한 조건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절).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할 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요 5:19)과 순종할 자세(마 26:39)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 지식을 통해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자기만족, 즉 ‘교만’이라는 시험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지식의 소유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의 지식과 수양, 그리고 전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낙오자들이었다(마 15:1-9).  이러한 이들의 고집과 교만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상하신 적이 있었다(막 7:1-13).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말씀만을 하셨다(눅 8:10).  또한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도록 교만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감추어 버렸다(마 13:10-15).  다시 말해 지식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도록 숨겨 두신 것이다(막 4:11-13).

이런 지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뜻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하나님 말씀이 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22)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듣기에는 자신의 박식함을 모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기에 불쾌하게 여겼다(막 11:18).  이들은 누구인가?  대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이자 교사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대단히 경멸하는 관계였지만(행 23:6-10),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마음을 같이 했다.  예수님의 모호한 진술은 완고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좌절시키는 한편, 동시에 진지한 추구자들의 호기심을 북돋우는 이중의 과제를 성취한 좋은 실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상징적인 표현법에 매우 불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건이 있었다(요 6:41-60).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해결해 주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육의 양식을 향한 그들의 욕망에 대응하여 은유법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다.  이는 기적적인 겉표면만 보는 육적인 사람들에게 빵 이외의 더 깊은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요 6:53-58).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시험거리였다(요 6:60). 

만약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끝까지 그분과 함께 했더라면 이런 상징적인 표현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의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군중의 주위를 맴돌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의 양식’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불쾌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 그것이 성경지식이든 신학적 지식이든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는 것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누구든지 늘 겸손하지 않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성령을 대적하는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D. A. Carson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리와 지식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지적인 교만에 빠지기 십상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지적인 교만은 자기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해 ‘자기 부인하는 사랑’(self-denying love)을 발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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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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