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24.04.14 꿀 먹은 벙어리들 1
  2. 2024.04.11 우리의 선택
  3. 2024.04.07 그리스도인의 책임 1
  4. 2023.07.16 진정한 개혁주의
  5. 2022.05.15 '아시타비' 신학
  6. 2022.05.01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1
  7. 2022.04.17 메마른 복음
  8. 2022.04.03 왕따 당하신 성령
  9. 2022.01.21 Martin Luther
  10. 2022.01.19 Jonathan Edwards
  11. 2022.01.16 John Gresham Machen
  12. 2021.11.21 소경들
  13. 2021.03.05 종교성이 강한 사람
  14. 2021.02.28 종교적 증상
  15. 2021.02.24 종교적인 영
  16. 2020.11.13 기독교 정치인
  17. 2020.10.04 비대면 예배
  18. 2020.09.17 피죤신앙 v 도브신앙
  19. 2020.02.02 정치 목사
  20. 2019.12.10 율법주의 신앙
  21. 2019.09.21 예언·환상·꿈
  22. 2019.08.18 축귀(逐鬼)사역
  23. 2019.07.21 성경적 치유사역
  24. 2019.05.01 성령의 은사
  25. 2019.03.16 방언
  26. 2019.03.03 칼빈주의 신학
  27. 2019.02.23 선택과 유기
  28. 2019.02.16 예정론
  29. 2019.01.26 은사중지론적인 견해

사울 왕이 제 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죄를 범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죽을 때까지 여자 문제가 많았던 다윗 왕이 간음죄를 짓고 간접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 나단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가며 다윗 왕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악한 왕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합 왕과 남편 못지않게 악녀로 불리는 이세벨이 사악한 죄를 저질렀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살벌한 예언적 죽음을 선포했다.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가 간음과 근친상간을 동시에 범했을 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를 신랄하게 책망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특별히 대형 교회 목사들과 교계에 이름난 지도자들 말이다.  입틀막을 당한 것인지, 입틀막을 당할 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압수수색이 무서워 말 한마디로 제대로 못하고 있는 꿀 먹은 벙어리들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는 온갖 난리부르스 치듯 성령 충만한 것처럼 요란하다.  문제는 입에 게거품을 물듯 설교로 떠들어 대지만 막상 세상 밖으로 나가면 무엇이 불의이고 잘못된 것인지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만큼 교회가 썩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통령을 만드는 데 충견 노릇을 했던 목사와 교인들은 회개해야 한다.    

성경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기독교를 무당 종교로 만들어 버리고, 안수를 남발하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누가 알았으리요?  그 사람이 손바닥에 ‘왕’이란 글자를 쓰고 나올 줄 말이다.  개나 소나 안수하고, 개나 소나 안수받는 이 더럽고 패역한 시대, 누구 한 사람 나단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목회자가 없다.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할 교회는 권력에 눈치를 보는 기생충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특권은 어디 갔는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노동자의 삶과 인권이 유린당할 때, 가장 먼저 정부를 향해 쓴소리로 비판하고 시국 기도회를 열었던 사람들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도대체 이들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털어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에 담대한 것 같다.  반면에 충견 노릇했던 회칠한 바리새인 같은 교계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책 잡힐 일이 없으면 담대하겠지만 무엇인가 뒤가 구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까 하는 것이다.  교인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시인하는 자들이지만 세상에서 행위로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다.    

미신을 정치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권위주의적인 통치형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미신을 확신하는 사람이 정치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똥이 삼 년 묵힌다고 된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 마디로 개소리다.  영적인 시야가 가려 똥과 된장을 구분할 줄 모르는 꿀 먹은 벙어리 목사들이 한국 교회에 너무나 많다.  국가의 중요한 위기 때마다 교계 지도자들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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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나님의 소리다.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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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

인권 후진국 한국의 미래를 위해

단 한 번의 선택은 5년을 좌우한다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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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회자가 쓴 “몰매 맞을 각오로 올린 글, <한국교회의 오적(五賊)>”이라는 글을 기독교 신문을 통해 읽은 적이 있었다.  이분의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감정을 흥분시키는 드럼은 교회 음악에 적합하지 않고, 십자가를 가려버린 노래방 수준의 대형 스크린과 주여를 외치는 복창기도, 그리고 단체 급식하듯 나누어 주는 성찬식과 젊은이들이 입는 청바지와 티셔츠의 개념 없는 싸구려 복식(服飾) 등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 외부의 핍박보다 무서운 것은 교회가 조용히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글을 썼다. 

삼일이 지나서 다시 SNS에 “오적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사고문을 게시했다.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제 마음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미숙함이 있었고 편향과 편견이 컸으며 음악에 대해 비전문가인 제가 너무 난체 했다”라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이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용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드럼을 치는 것이나 스크린을 띠워 찬양을 드리고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주여 삼창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분이 말대로 종교개혁의 무게에 너무 짓눌려 남들이 모르는 무슨 심오한 진리를 얻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다가 무수한 여론 몰매를 맞고 사과문을 냈다.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바리새인 기질과 종교적 자긍심을 갖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요란한 드럼과 대형 스크린, 통성 기도와 급식처럼 나눠주는 성찬식, 그리고 청바지와 티셔츠가 한국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은 따로 있다.  그것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세속화와 변질된 복음, 우상숭배와 같은 성전건축과 진영 논리에 빠진 교인들 간의 분열, 그리고 물질을 절대시 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이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독선과 편견으로 가득 찬 교단 신학 논쟁이 교회 타락의 원인이다.   

또 다른 목회자 한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하나 올려놓았다.  궁금한 것은 이분은 도대체 얼마나 성경적으로 목회를 하기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행 7:51) 입만 열면 저렇게 “성령을 거스려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유튜브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설교를 하고 베드로나(행 2장), 바울처럼 설교하는 줄 알고 기대하며 보았다(행 22장).  그러나 1분 이상을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내 눈과 귀가 보고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왜냐하면 비성경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분의 설교는 원고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읽어 내리는 스타일이다.  마치 아동 문학가 강소천의 동시(童詩) ‘닭’을 읽는 것 같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한 번은 설교 노트를 보고 다른 한 번은 교인들을 쳐다보는 것도 코미디 같은 일이다.  성령을 거스리며 머릿속에 입력된 것이 없는 목사가 출력이 가능할 수 있을까?(눅 12:12). 

만약 성경적으로 설교를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주님이 설교 노트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설교 원고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달하면 비성경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성경적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형제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마 7:3),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이나 하는 짓이다(마 23:33).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목사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에 겸손은 사라지고 교만만 극성을 부리게 된다.  이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판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4:11-12).   

혹시 놓치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오순절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나 성결교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 그리고 감리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와 침례교단에 소속된 목회자들 중에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American Pit Bull Terrier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을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독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은 항상 신학 논쟁을 통해 서로 물고 뜯고 난리 부르스를 친다(갈 5:15).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를 들어 E. P. Sanders에 의해 시작해서 James Dunn을 거쳐 존경받는 성경학자 중의 한 사람인 N. T. Wright가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을 내세웠을 때, 다른 교단 신학자들은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먹잇감을 만난 더러운 Hyena들처럼 일제히 비판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먼저 John Piper가 자신의 책 The Future of Justification』으로 Wright를 비판하면서 반박했다.  혹시나 놓치는 것이 있을지 몰라 Piper의 책을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N. T. Wright 책도 같이 읽었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 알려진 것처럼 주석적 근거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Piper가 완패당하고 물러났다.  여기에 발맞추어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라는 말처럼 한국의 신학자들도 기존의 구원론을 뒤엎고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옛 관점’과 대비되는 ‘새 관점’에 대해 일제히 공격 모드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  정말 다시 한번 묻고 싶은 것은 도대체 종교개혁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빌미로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일삼느냐는 것이다(딤후 2:23).  나하고 틀리면 다 이단인가?  용각산은 소리가 없는데 이것만큼은 시끄러운 ‘개소리’다.  특별히 목회의 열매는 없으면서 신학 논쟁에 열 올리는 목사들 말이다.       

개혁주의 신학에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유혹이 무엇일까?  아마 ‘종교적 자긍심’에 사로잡혀 다른 형제에 대해 불신자 못지않게 행동하는 것이다(마 5:13-16).  이런 자긍심은 개혁주의 전통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이 시대에 범람하는 이단들과 우상들을 향해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마 7:1),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가운데 다른 형제들을 향해 비판한다(고전 4:5).  야고보는 이런 목사에게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수사의문문을 던진다(약 4: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를 ‘자본주의’보다 영혼에 더 해로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Rick Warren 목사가 사역했던 Saddleback Church를 다른 나라의 문물(文物)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극단적 태도를 가진 ‘국수주의’의 유혹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긴다.  무엇보다도 다른 교단이나 교파의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신학과 신앙에 근시안적으로 몰입하면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돈키호테처럼 신학의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 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미친 백정의 칼날은 쉬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읽고 ‘허영의 시장’에 도사린 교활한 유혹에 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사실 신학 논쟁을 업으로 삼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사울처럼 신학적 위협과 살기만 등등하다(행 9:1).  목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들은 영적으로 교만하고 위선적인 바리새인 같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고(눅 18:9-14), 허구한 날 남의 허물만을 지적하고 들추어내는데 여념이 없다(민 12:8).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요 8:6).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고 떠벌리면서 사랑이 없이 Calvin의 5대 강령이라는 TULIP 만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다.  TULIP 교리를 빼놓으면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은 다른 기독교 전통과 신학을 무시하는 행위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을 반영하지 못한 허세다.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이들은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거대한 저택의 화려하게 장식된 ‘칼빈주의’라는 대문(大門)에 환각 상태로 빠진 것처럼 매료된 자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자교단이라는 명목아래 가부장적인 행실과 태도를 교활하다 못해 능수능란하게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의 소위 단순함과 무지함을 비난할 만큼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신학적 체계에 불과하다면 그 ‘골병’든 신학은 개나 돼지에게 갖다 주어야 한다(마 7:6).  이 신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영혼을 살리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논쟁만을 일으키는 신학이라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는 분명 ‘화’가 있을 것이다(마 23:15). 

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에 주의하지 않는 개혁주의는 사이비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닌 짝퉁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 대한 답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20), 사나 죽으나(롬 14:7-9),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23; 디도서 2:14)”.  나머지 답은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다.  이 질문의 답이 말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고 아드레날린(Adrenaline)처럼 감칠맛이 나는 듣기 좋은 말을 들려주는 신학 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갈 5:15, 26).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형제자매이자 양자 된 특별한 백성 됨을 드러내지 못하는 논쟁적 개혁주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개혁주의는 디모데전서 6장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장관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고 의원들의 질문에 반문 화법으로 따박따박 대꾸하며 언쟁을 일삼는, 속되게 말하면 ‘주둥이 싸움’ 신학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우리를 똑똑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용어 하나를 가지고 논쟁을 하기 위한 지적인 틀도 아니다.  일관된 논리와 이론적 매력으로 눈먼 교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는 복잡한 신학체계는 더더욱 아니다.  달리 말하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어 성령의 풍성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개혁주의든 골빈주의든 그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John Stott의 말을 빌리면 평신도에게 유익이 없는 논쟁을 일삼는 것은 확실히 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목회자가 주어진 목회에 생명을 받치지 않으면 그 목사는 100%로 삯꾼이다(요 10:10-15).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논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미련한 양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가 어떤 목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목사가 복음 외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 교회를 떠냐야 한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발육이 덜 된 미숙아처럼 논쟁과 말싸움을 일삼는(딤전 6:4), 스스로를 개혁주의라고 나팔을 부는 자들은 John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우리 종교의 토대가 겸손이라는 John Chrysostom의 말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하지만 Augustine의 다음의 말은 특히 그렇다. 가장 호소력 있는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한 웅변가가 첫째도 ‘전달’이요, 둘째도 ‘전달’이요, 셋째도 ‘전달’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답할 것이다”  개혁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덕은 논쟁이 아니라 ‘겸손’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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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 어떤 진영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과 능력에 의존하는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로 하나님의 주권(롬 11:36)과 이신칭의(롬 5:1), 그리고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강조한다.  반면에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나타나는 일들 중에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로 치유(행 4:30)와 표적(막 16:17)과 기사(행 5:12), 그리고 성령의 은사(고전 12:4-11)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마 10:32-33),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롬 12:3).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실 때 성령으로 난 사람 안에서 성령이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시기 위해 바람의 실례를 사용하신 적이 있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 3:8).  이 말씀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나는 성령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개혁주의자들이 가진 신학에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가 바람의 기원이나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을 알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성령은 그분의 뜻대로 자유롭게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오늘날 성령과 관련해서 개혁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근거한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왕상 19장).  따라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은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경건한 신자들은 무질서와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전 14:40).  한결같이 그분을 신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성령은 그리 부드럽거나 친절하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각지 못한 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것을 간략하게 예로 들어보겠다.     

먼저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춤추고 소리치며 열광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걸어갔다.  사무엘 앞에 이르러서는 옷까지 벗어 버리고 예언을 하며, 그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삼상 19:23-24).  사울이 거의 알몸에 가까울 정도로 옷을 벗고 예언을 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조현병 환자가 아니면 신비주의자, 이단에 속한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은 방언을 말하고(행 2:4-6, 11),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행 2:13).  다른 사람들 눈에 술 취한 사람으로, 귀에는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들린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자신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박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편견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행 10:9-16).  불편한 진실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전에 일어났던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일어날 수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행 7:51) 독사의 자식들인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마 12:22-37).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세 인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삼위의 한 위로서 다른 두 위와 동일하신 분으로(마 29:19, 고후 13:14), 하나님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신비한 관계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성령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각양 은사들을 주시고(고전 12:11)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행 1:1-2), 사탄과의 대치 상태에 있는(엡 6:10-13),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인 교회를 강력하게 세우시며,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할 정도로 복음을 힘 있게 하신다(살전 1:5, 벧전 1:12).  그런데 온 세상을 미혹케 하는 사탄(계 12:9)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뿐 아니라(고후 11:14),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하고(계 13:13), 애굽 바로의 왕의 술객들처럼(출 7-8장), 엄청난 능력과 표적과 기적(살후 2:9-10)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고후 11:3).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그릇되게 정당화해온 것처럼, 은사주의 교회들 역시 성령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비성경적인 행위들을 자행해 왔다.  이 시대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딤후 4:3-4)과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신앙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란 그다지 쉽지는 않다(마 24:24).  지금도 사탄은 현상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유사한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영들 분별함이 필요한 때이다(고전 12:10).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즉,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마 22:29) 그리고 영적 교만함 때문(고전 4:6)에 비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은사주의자를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자, 더 심하면 귀신 들린 사람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John MacArthur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다.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비판과 정죄의 칼을 마구 휘둘러 된다(마 26:5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반면에 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하는 비은사주의자가 미지근하고 냉랭하며 영적 체험 없이 메마른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다.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이 두 부류가 상대방에 대해 상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비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실제로 믿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증이 없으며, 심오한 영적 체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 교만하고, 실제보다는 의식에 더 관심이 많고 성육한 진리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선호하며, 전도하기보다는 신학 책을 쓰고 패배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 대해 방어적이고, 예배는 무미건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반면 비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대한 현대적 사랑에 빠져 진리마저 희생시키고 있고 심각하게 비성경적이며, 특히 방언 체험을 신학적 영적 십볼렛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전도하기보다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양 떼를 빼앗아 가며, 신실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기보다는 영적인 영웅주의에 빠져 있고, 예배에 질서가 없으며 증거 본문 암기하는 이상으로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이 두 부류를 양비론(兩非論), 즉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서로 배우려 하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재기다(고전 4:6-7).  물론 이러한 오해들을 통해 서로를 견제함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혼란케 하는 극단을 피하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말씀 편에 선 비은사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을 볼 때 성령의 은사들만 거론하면 행여나 성경 계시를 넘어갈까 하여 견제하고, 반대로 성령 편에 선 은사주의자들은 비은사주의자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의 역사 자체를 제한하는 극단에 빠지지 않게 견제해주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은사주의 신학보다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Calvin 중심으로 세워진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심각한 결과물 중 하나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철저히 제거한다.

그들을 만한다.  우리에게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지 않는가?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깨닫음에 지나치게 만족한다.  그 결과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줄어들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말씀을 증거 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메마른 복음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성경은 증거 한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에,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을 통하여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막 16:20).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이미  닫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는 독선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모든 신학(오순절, 성결교, 감리교)들, 특히 ‘성령론’에 대한 것은 이들 보기에 한 마디로 잘못된 신학이기 때문에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을 귀신들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라고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을 향해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는 말한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앞세우거나 또는 자신의 견해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려고 악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현대판 바리새인이다(요 11:47-53).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진을 치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약 3:14-16).  우리는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16:23).  이런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어느 특정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가 아니고, 균형 잡힌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이란 신적인 것을 깊이 연구하고 숙고한 결과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개혁주의 신학은 거의 ‘꼰대’에 가깝다.  신학이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Calvin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고백으로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을 많이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만난 개혁신학 대학원의 교수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지금의 칼빈주의자들처럼 천방지축 날뛰거나 허접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불거리지 않는 정통 개혁주의자들로서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수(下手)가 아닌 진짜 ‘고수’(高手)들이었다.  하수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우겨대는 못된 기질이 있어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딤전 6:4).  이것이 확증편향적 사고방식과 교조주의적 성향으로 중무장된 ‘꼰대’ 신학의 특징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에 가까운 이런 부류의 사람을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부른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이런 자는 개인적 나르시즘이 병적으로 강해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다고 확신한다.  과대망상증 환자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마 5:13-16), 이들은 ‘칼빈’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골빈’ 짓들(신학적 논쟁)만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J. I. Packer는 『Keep in the Step with the Spirit』에서 성령 은사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교리’와 ‘도덕’을 제시한다.  먼저 교리적 테스트는 요한일서 4장 2-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것이 결국 속죄의 죽음과 직결)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도덕적 테스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요일 2:4, 3:9-10, 17, 24, 4:7-13, 20-21, 5:1-3). 만약 우리들 중에 Packer가 말한 대로 이 두 가지 테스트에 근거한 성경적 입장을 취한다면 누구든지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7:1-5).  평생을 배워도 알지 못하는 짧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그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만큼 성령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Lloyd Jones의 말을 들어보길 바란다.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제도화되었고, 성령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의 능력의 현현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성령을 통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만 증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즉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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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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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모든 일에 있어 과정을 중시(重視)하는 목사다.  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한다.  이들이 누구인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직 예수’를 외쳤던 자들이다(마 25:11).  그러면 오직 예수만을 외쳤는가?  아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교제도 나누고, 성찬도 했다(눅 13:22-30).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등불이 꺼져 가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했다고 자부했던 신자들이다(마 25:1-13).  그런데 결과는 지옥행이었다.  이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목사가 ‘예수’를 지겹게 외쳤도 지옥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이 말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는 개혁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지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철학자들과 한판 논쟁을 벌인 후 아덴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그리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업의 중심지 고린도로 갔다(행 18:1).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몹시 탈진되어 있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쓰고 있다.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1-40).  이와 비슷한 일들을 데살로니가(행 17:1-9)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0-15).  또 다른 이유는 아덴에서 사역한 것이 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행 17:16-34).  이런 일들을 인해 그는 심히 좌절감을 느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바울의 자랑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면(갈 6:14), 굳이 떨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십자가 아닌가?

먼저 글(메마른 복음)에서 말했듯이 나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먼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성경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백날 외쳐도 구원은커녕 1원(?)도 받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반드시 부활도 같이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요 11:25-26).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행 4:12).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시고(행 2:24) 무덤에서 살아나신 유일한 ‘주’(主) 시기 때문이다(고전 15:20).  다시 말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행 2:32)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롬 10:9-10).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간혹 목사들 중에 부활은 몰라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열광하면서도 왜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사도행전 전반에 보면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반복적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선포했고(행 2:32, 3:15), 누가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행 4:33).  연이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라고 선포했다(행 5:30-32).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신’ 것과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언급한다(행 10:39-41).  사도행전 후반에 들어와서는 바울 역시 누가에 의해 부활의 증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행 23:6-8), 예를 들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고(행 9장),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행 22:15),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것을 전했고(행 26:2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13:27-39).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모든 설교가 거의 부활의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행 2:31, 4:2, 10, 33, 13:30, 32, 34, 37, 24:15, 21, 26:8).

이 부활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사도들이 자살한 가룟 유다(마 27:5)의 후임자를 임명할 때,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행 1:22).  정말 이상하지 않는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갈 3:13)를 증거 할 제자를 찾아야 하는데, 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전도자 Michael Green은 『Evangelism through the local church』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과 부활에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묻고 싶어 하는 모든 방식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 주신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는 독사의 새끼(마 23:33)들 같은 사두개인 목사들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다(행 4: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전적으로 상호 관련이 있는지 단언하고 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고전 15:13),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고전 15:17) 있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이 완성이라는 것이다(롬 6:5-10, 8:11, 10:9, 고전 15:7, 21-22, 벧전 1:3-4).  즉 대속의 사역으로(히 9:22),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구속의 완성으로(고전 15장),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복음의 핵심이다.  어느 한쪽 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이 인도하심 없이는 구원, 그것은 꿈같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복음을 힘 있게 하는 것은 날카로운 지성과 논쟁 능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의 능력은 메신저의 기술이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성령께서 도우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 학식이나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는 싶은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회심의 역사(役事)가 자신과 자신의 십자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리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살전 1:5)이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있어 복음은 어떤 것인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벧전 1:12).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외쳐도, 그 말만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으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씀이 듣는 자들을 위로하고 일깨워 주고 확신시키시는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많은 사람이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 말씀을 청종하여 믿게 되고(행 16:14), 그들의 마음과 삶을 빌립보 간수의 가정 같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받치게 할 수 있다(행 16:33).  이런 능력에는 또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한 마디로 성령이 빠진 복음은 그것이 예수든, 십자가든 그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에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의 복음전도 방법이 무엇인가?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NIV/고전 2:4)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4:20).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9).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을 받고(행 2:1-4)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막 16:20).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런 능력도 없이 말씀만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말 우리가 사도들보다 능력이 있단 말인가?  성령의 능력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 말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가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오랜 시간을 성령의 능력도 없이 ‘오직 예수’만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칼빈주의의 5대 교리 T.U.L.I.P을 얼마나 지겹게 가르쳤는지 신자들도 인정한다.  칼빈주의 목사라고 말이다.  성도들 보기에는 내가 예수의 사람인 것 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입만 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바울만이 십자가를 자랑했는가?(갈 6:14).  아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 십자가만 외치면 다 해결되는가?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았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때는 내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단의 냄새가 나는가?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도 내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요 1:27).  왜냐하면 사도들은 능력을 필요로 했지만(눅 24:49) 나는 능력 없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개혁주의 자들이 입만 열면 나팔을 불어대던 그 십자가의 복음을 능력도 없이 열심히 증거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이 쉬도록 외쳤겠는가?  마음은 뿌듯한 것 같지만 뭔가 허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성령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었다.  나만 ‘골빈’ 목사인가?  아니다.  오늘날도 나처럼 골빈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을 벗겨 주시기 전까지(행 9:18), 자신이 영적 조현병 환자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요 9:40-41).  

성령이 빠진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을 왕따 시키다 못해 근심을 넘어(엡 4:30) 소멸시킬 정도(살전 5:19)로 그분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는 하지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문을 이미 닫아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더 슬픈 현실은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계 3:17).  이들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족이긴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더라도 십자가만 증거 하면 되지 않을까?  Harry G. Frankfurt가 말한대로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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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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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구원사역(요 3:3-5)이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같이 성경 말씀이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것 중 대부분의 내용에 생각이 일치하거나 똑같이 믿는다.  신자들 대부분은 성령이 우리에게 전도할 능력을 주신다는 데에 동의하며(행 1:8) 최소한 몇 가지 영적인 은사(고전 12:3-11)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롬 8:1-2),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요 16:13)에 동의한다.  그러나 간혹 특정 은사, 즉 ‘방언’이나‘예언’의 중요성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나 성령 세례를 받는 때가 회심 때의 사건인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신학적 입장들이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 

본고(本稿)에서는 내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입장을 변호하겠지만 내 개인의 편견이나 신학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리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성경에서 믿는 내용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 다양한 측면들을 공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몸은 교단이나 교파, 그리고 신학의 경계선을 넘어 어느 것에 한정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성도들의 교제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폭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다.  그런데 지금은 영적 은사를 실천하고 긍정하면 노골적으로 ‘은사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 심지어 ‘귀신 들린 자’로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여기서 한 가지만큼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나에게 있어 ‘은사주의’란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4-11, 28-31절,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의 영적인 은사를 지칭하는 용어인 ‘카리스마타’ (charismata)를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오해가 무엇인가?  ‘은사주의자’란 현세의 이득을 위한 기복신앙의 가르침을 옹호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미국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Jim Bakker는 진정한 복음이 아닌 ‘번영 복음’을 가르쳤다.  그는 『I was Wrong』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년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내용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감옥에 있으면서 문맥에 따른 성경 연구는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것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시기에(고전 4:3-5)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다. 

여기서 나 자신의 신앙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학사 과정을 오순절 신학에서 했기 때문에 오순절 교단을 한 때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오순절 교단이 아닌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밝으면서 미국 개혁교단에 소속이 되었다.  이런 다양한 배경 속에서 나는 기도원에서 20년 넘게 고생한 육체의 질병을 완벽하게 고침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경험했다.  지금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방언을 성령 안에서 하고 있다.   

내게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국의 합동과 고신과 통합, 그리고 미국의 Talbot와 Westminster, 그리고 Calvin과 Reformed 신학을 공부한 많은 친구들이 있다.  이들과 성령의 사역의 몇몇 측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비방하고 정죄하는 그런 좋지 못한 사이는 아니다.  언제나 만나면 좋은 친구이며 동역자들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 즉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 신자들이 하나같이 ‘성령의 사역자’ 혹은 ‘은사주의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일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먼저 우리의 관점이나 생각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는 충격적인 말을 한마디 하겠다.  예수님보다 유익하신 분이 성령이시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고 싶지 않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을 읽어보길 바란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또 다른 보혜사'(요 14:1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성의 두 위격이 같이 공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삼위일체란 두(모두 합하면 셋) 위격이 언제나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한 분 안에 계신 세 인격,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성삼위 안에는 시기나 경재 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지극히 높이신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한 번에 한 장소에 국한되었다.  다시 말해 그분은 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고(마 3:9)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능력은 있어도(마 14:13-21) 이스라엘 땅을 떠나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행 1:9-11) 육체적으로 지상을 떠나셨지만 성령을 보내기로 약속하셨다(요 14:16).  예수님의 떠나심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 가운데 거하실 수 있음을 의미했다(고전 3:16).  성령에 의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행 1:8).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다(요 16:7).  그리고 성령께서는 세상에서 하셔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으신지에 대해 그분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성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돌아가셔야만(요 12:6, 23) 성령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요 14:26, 15:26, 16:13).  이러한 이해는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이시며(엡 1:7), 신인(神人)이시다(롬 9:5, 골 2:9).  이 말의 의미는 영광에 관한 한 성령은 초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날에 모든 무릎이 끓을 대상은 성령이 아니다(엡 1:20-23).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 오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적용하시는 역할을 하신다(요 3:3-5).  성령은 자신에 대해 증언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요 15:26),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러 오신다(요 16:14).  예수님은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주님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자로서의 그분의 사역(딤전 2:5-6)과 그분이 받으실 합당한 찬양이다(계 5:13).       

예수님의 떠나감이 없다면 성령의 사역은 불가능하게 된다(요 16:7).  구원도 없고(고전 12:3), 성화도 없고(살후 2:13-14), 영화도 없다(롬 8:11, 23).  한 마디로 너나 할 것이 없이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롬 2:9)은 지옥행이다.  그러나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이 떠나시면(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요 14:16) 즉, 성령께서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밝히셨다(요 14:17).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못하게 될 때(행 1:10),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요 16:13)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요 14:26) 능력을 주시는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눅 24:49).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결과들을 구약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사 11:1-10, 32:14-18, 42:1-4, 44:1-5, 겔 11:17-20, 36:24-27, 37:1-14, 욜 2:28-32).  이러한 실상들은 이제 세상에서 제자들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 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말씀(마 13:36-43)을 배우고 현장 실습(마 17:14-21)과 훈련을 받았지만(막 4:35-41)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9).  '은혜의 성령'(히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예수의 영'(행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성령을 왕따 시키고 예수를 유난히 더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가 좋은가?  물론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2:2).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 역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 한 없는 은혜와 감사를 날마다 고백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회적이며(엡 2:1) 단독적 사역(요 3:5), 즉 거듭남(엡 2:8)과 더불어 지속적 사역인 성화의 과정(골 1:9-12, 엡 4:22-24)을 내 인간적인 노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빌 1:6, 살후 2:13).  다시 말해 매 순간마다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 8:26-27), 소망을 갖게 하시며(롬 15:13) 왕 같은 제사장으로(벧전 2:9)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는(롬 8:16) 성령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다.  단 한순간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고전 10:13)이 나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하며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오래전  A. W. Tozer가 이런 말을 남겼다.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5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차이점을 모를 것이다”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는 성령님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유지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신학적 배경과 청산유수 같은 달변, 든든한 교회 재정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당회, 주보에 나열된 선교지의 열매와 대대로 내려오는 교회 전통 등을 생각하면 그다지 성령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갈라디아 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회가 많다(갈 3:3).  한번 눈여겨보길 바란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성령을 예배하는 것(빌 3:3)을 불편하게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롬 1:16).  능력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dynamis)는 우리 시대의 단어인 ‘dynamite’(다이너마이트)나 ‘dynamic’(역동적인)의 어원이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너마이트와 같다.  세상적인 관점과 전통을  파괴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는 더 견고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와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렘 23:29).  바울의 말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뇌관(?)이 제거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  교회들 마다 여러 종류의 집회가 많은 것은 초신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종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정말 다양하다.  각종 전도 집회와 예배가 많아 교인들이 정신이 없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하는 것이 복음(Good News)은 복음인데, 그 복음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메마른 복음, 즉 뇌관이 빠진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바울은 복음 메시지의 능력은 설교자의 달변이나 논리적 전달하는 재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이 말은 아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에 나온 고백이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지닌 진리를 아덴 청중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각 사람의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도행전 17장 16-34절까지 설교를 분석해 보았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섭리와 존재를 말했지만(24-2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섭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26-27절) 헬라 시인들의 말도 인용했지만(28절) 구속이나 계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세계의 역사를 말했으나(29-30절) 구원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부활은 강조했지만(31-32절) 십자가를 증거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종자가 많고 적음에 의해 전도의 성패를 평가할 수 없고, 또한 그 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아덴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의 전도는 실패했던 것 같다.        

탁월한 신학자인 바울은 앞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이 아닌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앞서 말했듯이 바울은 일찍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했다(롬 1:16).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4).  그러나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5:1-2)인 진정한 복음,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 했다(갈 5:11).  여기서 궁금하지 않은가?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다면 구태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필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직 말씀', 그것 하나만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진정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말이다. 

조금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1:14).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완전한 발현이시며(골 2:9), 요한은 태초에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이라고 불렀다(요 1:1).  여기서 ‘말씀’은 사탄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그분은 단지 말씀만으로 육체의 질병과 악한 영들을 제거하실 수 있었다(마 8:16).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4:12).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계 22:18-19).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이며, 이 성경의 저작권을 갖고 계신 분이 성령이시다(벧후 1:20-21).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닌(갈 1:11) 율법과 대조되는(요 1:16-17) 구원의 복음(엡 1:13)이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려져 있지만(고후 4:3)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고전 1:24)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했다면 반드시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어찌할꼬’ 말하면서 회개했다(행 2:36-38).  왜 베드로에게는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가?  베드로 역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것일까?  오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차별을 하시는 것 같다.  열 두 제자 중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더 사랑한 것 같았고(막 14:33, 눅 9:28)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셨다(요 11:3).  마치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처럼 말이다(롬 9:13).      

오늘날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을 외치는 목사들은 많다.  마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처럼 말이다(마 7:21).  문제는 기적같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기적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고전 2:2).  바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갈 6:14).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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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고전 4:6)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과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외에는 아무것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 기록된 말씀(히 1:1-2, 딤후 3:16)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감(벧후 1:21)을 통해 주신 귀중한 선물인 것만은 사실이다(약 1:17).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는 말씀이 단순히 기록된 말씀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아울러 문자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정체적인 관점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 13:8)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성경이 기록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요 10:27).  또한 그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처럼(창 17:1-2) 우리와도 똑같이 교제를 나누실 것이다(고후 13:13, 빌 12:1-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빌립(행 8:26-40)과 바울 같이(행 18:10-11) 주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혹은 베드로 같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행 1-18, 12:1-19),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느끼는 의구심과 주관성에 대한 염려는 사실상 성경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인간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계몽주의적인 형태의 기독교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바울의 삶과 사상에 나타난 성령 하나님의 중대한 역할에 대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나팔을 쉬지 않고 불어댔다.  일반적으로 신약 학자들, 특별히 개혁주의자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역할을 무시해온 것이 현실이다(마 12:22-37).  이들은 성령에 대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해 왔다.  마치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어떤 주장들을 내세웠다.  대부분 이런 좋지 못한 교만한 태도가 성령의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  거의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흐르는 적막함과 비슷하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었다(고전 14:33, 40).  이것은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끌어온 이미지에 근거한다(왕상 19:1-3).  그곳에서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도리어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도망자 엘리야를 찾아오셨다(왕상 19:11-13).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신약 성경에서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이를테면 바울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대목이다(갈 5:22-23).  그에 비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멋대로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고요하고 적막한 상태는 때때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으면 어지러움증이 생기듯이 영적인 빈혈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고자 시도해온 사실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입증된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기도해 보길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지 말이다. 혼자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중언부언하다가 관두기 쉽다(마 6:7).  영적 빈혈은 아무리 철분제(?)를 많이 복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배 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질부리고,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듯(약 5:17)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와 똑같이 약하고 상하기 쉬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다(창 1:27).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령에 대해서는 그들처럼 자신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타민족 교회와 다르게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없다.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예배가 있는지 모른다.  그 예배 속에는 우리의 신조(信條)와 찬송에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고(고후 13:13),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끔 성령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사실상 성령이 무시되어 왔다.  이들은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었고(엡 4:30), 심지어 성령을 소멸한 사람들도 있다(살전 5:19).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엡 4:30), 개인이나 목회 사역에 있어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눅 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요 3:1-11).  물론 십자가의 원수 같은 쓸데없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지만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같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고(행 2:14-42),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처럼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행 22:3), 이상하게도 진리의 성령(요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이들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난독증에 걸린 것인가?  분명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성령'(엡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원하신 성령(히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령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에서 나온 정신 나간 헛소리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성공을 거둔 비밀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중심을 둔 ‘복음’에 있었다(고전 15:1-6).  이것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보적인 성경 지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복음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지닌 문제는 성장 발육이 되다 만 것처럼 여기까지만 아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히 6:1-2).  이것은 너도나도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달랐다.  이들은 복음 플러스 자신들이 체험한 성령이 있었다.  성령 체험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력 있는 실체로 만들었고(행 3:1-10), 그로 인해 당시 문화 속에서 그들은 급진적인 대안이 되었다.  이러한 성령은 초대 교회의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임재였고(행 2:1-4), 그 능력은 열매(행 2:43-47)와 증거(행 4장) 및 은사들(행 5:12-16)과 모두 관계가 있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성령(마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한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 했다(눅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에 대해 말씀을 선포했고(행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고후 13:13), 이 '양자의 영'(롬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구약 성경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사 32:15, 겔 39:29), 선지자들 역시 정결하게 하는 불을 고대하였다(사 4:4, 말 3:2). 

사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란 열매(갈 5:22-23)와 은사 모두(고전 12-14장)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철저하게 중심에 서는 균형 잡힌 신앙의 삶이다.  나아가 신자가 경험할 수 있으며 능력을 부여하는 실체인 성령(눅 24:49)은 바울과 그의 교회 공동체에게는 신자의 모든 삶에서 시종일관 핵심 요소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롬 8:14)과 성장(롬 15:13, 엡 4:30),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3-11), 기도(롬 8:26-27), 증거(갈 4:6, 히 10:15-18)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이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치 있는 신학이란 스데반처럼 삶으로 전이된 성령이 충만한 신앙이다(행 7:55, 엡 5:18).  마른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죽은 학문이나 입만 살아 있는 메마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마 7:22, 눅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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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not a teacher of the Law but an obedient disciple of the Law, so the by his obedience he might redeem those who were under the Law. He was one who was acted upon, and not an agent, in respect to the Law. He bore its condemnation and delivered us from its curse.  What merit is that?  Not ours, but that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who, being born under Law, not for himself but for us, redeemed us who were under the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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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by that righteousness being imputed to us, is meant no other than this, that that righteousness of Christ is accepted for us, and admitted instead of that perfect inherent righteousness that ought to be in ourselves: Christ’s perfect obedience shall be reckoned to our account, so that we shall have the benefit of it, as though we had performed it ourselves: and so we suppose that a title to eternal life is given us as the reward of this righte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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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Thankful for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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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들

하고 싶은 이야기 2021. 11. 21. 16:18

지금으로부터 50-60년 전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여성 사역자는 Kathryn Kuhlman인데, 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Benny Hinn이었다.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사역을 할 때마다 치유 사역자들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어 늘 부정적인 관점으로 이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눈에 그가 입은 기생오라비 같은 하얀 양복이 우선 마음을 들지 않았고, 달변에 가까운 말솜씨와 요란한 몸짓과 손짓, 그리고 잔잔한 음악 속에서 극적인 연기를 연출해 내며 군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볼 때, 마치 사람들의 눈을 기만하는 마술사 시몬처럼 보였다(행 8:9). 

내가 무엇보다도 비위가 상했던 것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엘리사가 요단 언덕에 서서 물을 쳤던 것처럼(왕하 2:13-14), 자신의 양복 상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향해 휘두르는 행동을 보일 때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인가, 정말 하나님은 저렇게도 역사하시는가, 귀신에게 이용당하거나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한 최면술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오래전에 Hinn의 그러한 행동을 보고 나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러한 인상은 나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자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과 등을 돌리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쪽팔리는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교인들 앞에 서기만 하면 광경병에 걸린 개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는데 열중했다.  이 정신 나간 목사가 복음을 증거 했어야 하는데 신앙성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영혼 구원에 힘쓰지 못한 것에 대해 얼마나 후회하고 회개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날 나로 하여금 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사역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비위가 상하겠지만 목사가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전하는 모든 말, 특히 신학적 논쟁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Harry G. Frankfurt의 저서 『On Bullshit』에서 말한 것처럼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짓말보다 무서운 것이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Harry의 말에 따르면 개소리는 헛소리나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은 참인 것을 일부러 틀리게 말하는 것이다.  이 명제에 대한 사실은 누구나 진실의 값을 들이대면 된다.  그러나 개소리는 자기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목적을 위해 말 같지 말을 해대는 것이다.  나중에 허위임이 밝혀져도 누구나 개소리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도덕적인 책임과 민형사상의 소송도 필요 없다.  특정한 사실을 뒤받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Harry의 말대로 ‘뻔뻔함’, 속된 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으면 된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듣는 자로 하여금 유익이 하나도 없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개소리’라는 것이다(딤후 2:14).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침을 전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그 나라에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 13:13).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 즉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자 귀신은 나가고 벙어리 되었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 하였음에도 불구하고(눅 11:14), 자신들의 고정관념 깨기를 거부하며 짐짓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적이 있었다(마 13:14-15).

누가복음 11장 14-23절에 기록한 사건과 유사하지만 별개의 사건일 가능성 있는 마태복음 12장 22-45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다.  23장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독사(serpents)들이 많아 그런 말을 사용하신 것인가?  한국과 미국은 개(Dog)들이 많은데 바리새인 같은 신학자와 목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기도 하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요 8:1-11)도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하시던 예수님께서 유독 바리새인들에게는 한 번도 아닌 일곱 번 저주를 퍼부으시면서(눅 11:37-52) ‘소경들’(마 23:19), ‘회칠한 무덤’(마 23:27), ‘독사의 자식’(마 12:34), ‘뱀들’(마 23:33), ‘마귀의 자식’(요 8:44), ‘독사의 새끼들’(마 23:33)이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께 이끌려 왔다(마 12:22).  헬라어 어법은 눈이 멀고 말을 못 하는 것이 귀신 들림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치유가 되는 것을 보았을 때 무리들은 놀랐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엑시스타노’(existano) 즉, ‘깜짝 놀라다’가 이곳에서만 사용된 유일한 경우다.  이 단어는 강한 의아심과 놀라움의 의미를 띠고 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겠는가”라고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즉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표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33절).  그러므로 예수가 권능으로 병을 고친 것은 무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분이 실제로 귀신들을 쫓아냈기 때문이었다(마 4:24, 9:32-34).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와 백성들에게 받는 인기를 훼손시키기 위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온 능력을 소유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판한 내용이 조금 특이하다.  왜냐하면 유대 문헌이나 문학에서 나타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은 신약에만 나타나는데(마 10:25, 12:24, 27, 막 3:22, 눅 11:15, 18-19), 헬라어로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베엘제불(beelzeboul)이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 역(Septuagint)과 시리아 역본은 이 단어를 에그론의 신(god)인 베엘세붑(Beelzebub, 왕하 1:2-3, 6, 16)으로 바꿈으로써 이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고자 하였다.  아마 종교 지도자들이 두 히브리어 단어, 즉 가나안 지방의 풍요의 신을 상징하는 바알(ba’al, ‘주’, 호 2:16)과 제불(zebul, ‘고귀한 집’ 혹은 ‘거룩한 처소’, 왕상 8:13)을 합성하여 이 단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단어가 사탄, 즉 귀신의 왕(지도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 바알세불은 신약에서는 마귀의 왕으로서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된다(마 12:24-27, 막 3:22-26, 눅 11:18-19).  따라서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바알세불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메시아를 사탄으로 전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끔찍한 모독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 것이다(마 12:34).   

사실 그들이 새로운 관점에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한다면, 그들의 눈은 봄으로 그들의 귀는 들음으로 그들의 마음은 깨달음으로 돌이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마 13:16).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영역에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마음의 문을 닫을 경우에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고의적으로 거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고(마 12:22-37),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교회 전통과 균형 잡히지 않은 가분수(假分數) 신학, 더 나아가 교단 안에서의 패거리 목사들과 어느 특정 신학자들의 잡설로 인해 그러한 폐쇄성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것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처럼 짐짓 영적인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요 9:39-41),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아니면 진정한 실재인 그분을 인식하는 데 있어 가장 걸림돌의 역할을 하는 몇 가지 요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Blaise Pascal이 말한 대로 세속화된 세계관의 막대한 영향이다.  이 세속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한 치유사역을 거부하거나 은사에 대해 항상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현대 세속주의의 초석을 이루는 있는 두 가지 사상 중 하나는 ‘물질주의’이다.  즉 이 세상에는 물질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리주의’이다.  이 사상은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세계관이 지난 2세기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무엇을 집중해야 하며 사물들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에 관하여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유형들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문제는 이것들을 기초해서 우리가 형성하는 사고방식과 관점에 의해 소위 우리의 세계관과 고정관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관, 즉 전통과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사람들은 바리새인처럼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막 3:1-6), 확증 평향적 증상을 보인다.  거의 언제나 자신이 배운 것만을 받아들이고 배우지 않는 영역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거나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막 3:20-30).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세대주의 신학으로 성경 전체를 주석한 『Scofield Reference Bible』은 영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의 은사 중단 이론을 일반화시켜놓았다.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주장하듯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후, 즉 감독들이 모여 신약성경의 내용을 확정했던 주후 397년 카타르고 회의 이후에는 표적과 기사의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Calvin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받아들인다’(살전 5:21).  개혁주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인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자기 멋대로 주장한다.  “한 동안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이것이 Harry G. Frankfurt 교수가 말한 대로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Donald Trump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선거 유세에서 “오바마가 IS를 창설했다. 사기꾼 힐러리는 공동 창설자다”라고 나팔을 불어댄 적이 있었다.    한 마디로 증명할 길이 없는 개소리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나 치유, 혹은 그 어떠한 체험을 근거로 한 그리스도의 신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이들만의 생각이지 나를 비롯한 성령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이런 균형 잡히지 않은 치매 걸린듯한 신학과 신앙은 세속주의의 초석이 된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에 적응한 결과를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Martin Luther는 초기에는 “특별한 어떤 기적이나 계시가 필요지 않다”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그 후 그의 저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적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을 바꾸어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런데 Luther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한 때 마귀에게 충동질 당해 ‘개소리론’에 대해 나팔을 불어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적대적인 마지막 요인은 아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기질이 작용하는 것 같다.  만약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나 은사들(고전 12:4-11), 특히 누군가 ‘예언’이나 ‘방언’, ‘지식의 말씀’, ‘치유’에 대한 간증을 하거나 말을 할 때 지나칠 정도로 과민반응이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본인 자신이 알지 못하며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교인들 앞에 명색이 목사인데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교인들 앞에서 영적 소경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목사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쪽팔릴까!       

나는 목사나 신학자들이 하나님과 신자들 앞에서 솔직했으면 한다.  사실 이런 부류 사람들 중에 허언증 환자들이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 은사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염소가 하품할 일’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음식을 맛보지 않고 누구에게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이나 글을 읽고 음식의 맛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식당에 가서 그 음식을 직접 맛보지 않고 말이다.  오늘날 이러한 바리새인 정신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개소리론’을 가지고 나팔을 불어대는지 모른다.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보수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태도를 지닌 자유주의적인 사람이 어떤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듯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기질은 때로는 진정한 실재를 인식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TV에서 몇 번 본 것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의 사역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어떤 직접적인 체험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박스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과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되는 ‘꼰대 같은 신학’,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비판적인 성격’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사역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배후가 사탄의 세력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목사와 신학자들 중에 자신은 진리의 말씀에 충실하고 견고하며, 단단한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미 이천 년 전에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소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요 9:36-41).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시각을 찾는 사람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  소경임을 인정한 사람은 시력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자기들이 본다고 생각한 자들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머물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자 니고데모는 어떠한가?  이스라엘 선생이었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 역시 소경이었다(요 3:1-10).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요 9:28).  이것은 예수님과 그들이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헌신하고 있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통과 그 전통의 핵심인 모세 율법이었다.  자기들이 모세에 충실하다는 것을 완강히 옹호하고 있었다.  이 구절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하면 나는 칼빈주의자야!’ ‘우리 교회는 전통이야!’ 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나대지 말고 스스로 소경됨을 인정하여 시력을 되찾으라고 말씀하신다(요 9:41).  여기서 '죄가 그저 있다'라는 말은 지금 이들이 무시무시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해준다.  결론이 무엇인가?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개소리론’은 집어치우고,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라는 구절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시고 소경 된 눈을 밝혀주시면 누구든지 쉽게 인정하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엡 1:17-18).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런 것들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때로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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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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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영의 궁극적인 비난은 마태복음 7장 22-23절과 누가복음 13장 22-30절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결 같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롬 10:2).  이들은 장시간 기도하고(막 12:40), 더 많이 성경을 연구하며(요 5:39), 더 많이 금식하고(눅 18:12), 더 많이 메시아 오심을 간절히 소망했다(눅 2:25-37).  하지만 막상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가장 큰 대적자들이 되었다(마 12:14, 막 3:6, 요 8:40, 11:53).  이 사람들은 이방 종교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한 종교성이 강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irony) 한 것은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만 속으로는 주님을 죽이려는 살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요 8:31-37).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한 마디로 종교적 신념에 세뇌된 사람들이다(눅 13:22-27).

Lloyd Jones 목사는 종교의 영을 ‘죽은 정통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단 못지 않게 가장 위험하고 교리적으로는 정통이지만 전혀 생명이 없는 화석화된 박제 신앙을 말한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얼마나 교리적으로 정통인지 초신자들도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회에 가면 목사로부터 늘 들었던 것이 “우리 교회는 정통”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을 지겹도록 들었는지 모른다.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이상 복음주의 목사들은 교리적으로 잘 가르치는 것이 이미 정평이 나있다.  입만 열면 사도 바울 못지 않게 해박한 성경지식과 신학적으로 건전한 것 같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해석할 정도면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 교수들도 울고 간다.  왜 그렇게 목사들은 아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무엇이든지 물어보면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칼빈주의 목사나 신학자들은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들이다.  감히 이들에게 도전할 사람이 있는가?  날카로운 개혁주의 칼날에 다른 신학들은 비명을 지르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미련한 양들은 경지에 오르다 못해 절벽 끝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그런 목자를 믿고 따른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엘리트 교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목사가 박사 가운을 입고 절제된 경건 속에 신학적 용어를 섞어가며 설교하면 시력(분별력)이 약한 양들은 그 메세지를 들으면서 자신이 엘리트 교회에 소속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들이 가르치는 교리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갈 3:3, 4:6).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런 현대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마 23:3).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선생이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이 올바른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이 여기까지만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친 교훈들과 정면충돌을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실 뿐 아니라(마 12:1-14, 15:1-20, 19:3-9), 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고 경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16:6-12).  여기서 ‘행하고 지키라’는 명령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율법 해석이 아니라 그들이 소리 내어 읽는 율법 자체를 가리킨다.   쉽게 말해 그들의 해석과 행동을 본받지 말고 율법 자체의 가르침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5:19).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말씀은 그다음 구절이다.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약 내용 자체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율법에 수천 가지 규례를 만들어 낸 그들의 해석(마 15:9)과 그에 따른 행동에는 문제가 많았다(마 23:5-7).  이들은 무거운 규례의 짐을 사람들 어깨에 지우지만 정작 사람들이 그 짐을 지고 나르는 데에는 자신들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마 23:4).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행동에만 열중했고(마 6:1, 5 16), 입만 살아 있어 대접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선생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던 것처럼(마 23:7), 오늘날도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 그리고 중직을 맡은 직분자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거의 회사 회장급 이상이다.  한 번 만나려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사전 예약을 하고 비서를 거쳐 철옹성 같은 문을 통과해야 만날 수 있다.  담임목사를 맹신하는 교인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까지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속담에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이 배운 신학이나 소속된 교단의 전통을 배경삼아 성경을 해석한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 해석에서 문제가 많았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성경 해석에는 자신이 갈고닦은 신학과 교단의 전통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확증편향과 인지왜곡이 난무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배운 신학과 틀리면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이들에게 많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이단으로 낙인을 찍히다 못해 삼단(?)까지 오른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단’이란 말은 더둘로가 종교적 분파를 뜻하는 용어로 바울에게 사용한 적이 있었다(행 24:5).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사도 바울도 이단 소리를 들었다면(빌 3:17), 우리들도 이단사냥꾼/이단제조자들에게 이 소리를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신학교 교육과 특정 교단 신학을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이름 있는 신학교에서 탁월하고 쟁쟁한 교수들의 가르침과 많은 토론을 통해 학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 교육이 학문적 유익이 있는 반면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요점이 무엇인가?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거나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목사가 성경 말씀만을 가지고 평생을 가르치고 전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문제는 교수인지, 교주인지 한 사람의 신학 사상에 맹신하는 목사들이다(딤후 4:3).  이들은 입만 열면 그 사람의 신학사상을 팔아먹기에 여념이 없다.  목사가 입을 열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어떤 특정 신학이나 어느 신학자의 조잡한 이론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나는 단언한다.  그것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을 것을 선포한다(갈 1:6-9).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사람 앞에 존경을 받는 목사(눅 16:15), 만담 수준의 설교를 통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사(갈 1:10), 진리의 말씀보다 인간적인 아부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목사(눅 6:26)는 이미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11:4).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움(혐오와 증오)을 받는다.  더 나아가 이성에 넘어가고, 돈을 사랑하고, 명예에 정신이 나간 사람들도 있다.  모든 목사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목사들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의 영은 얼마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마음속에 생각을 집어넣을 수 있고, 그분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목사가 종교의 영향력 아래 지배를 받으면 그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역시 종교성이 강한 사람으로 길들여지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한다(약 1:17).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양들은 목자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왜 교회 담임목사를 닮아가는 것일까?  이 문제를 가지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기도하면서 깨달았다.  목사가 입만 열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벧전 4:11), 그분만을 자랑하는 중매쟁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고후 11:2),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목사 자신의 의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주님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양들이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히 12:2), 삼시세끼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프면 약 먹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는 담임목사를 무슨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바라본다면(행 3:12), 그런 교회는 ‘이가봇’ 교회가 된다(삼상 4:21).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목사와 신자들이 내 말에 반발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치 성적인 문제들(변태, 동성애, 자위행위, 간음, 근친상간, 매춘)이나 감정적인 문제들(증오, 분노, 공포, 우울증, 걱정, 불안감),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에 의해 시달릴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의 영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억압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구절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마귀가 손을 못대”라고 핏대를 올리는 종교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을까 심히 염려스럽다.  목회 사역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인들은 본인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에 충실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피곤하지만 비몽사몽 간에 나오는 새벽기도, 남들이 내기 어려운 십일조와 각종 헌금들을 드리는 이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거짓된 신앙, 즉 종교적인 외양을 가져다주는 영에 의해 속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이단과 사이비 모두 합쳐도 기독교 역사에 끼친 악영향이 교회에 침입한 종교의 영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삭이 필 때까지 곡식과 구별할 수 없는 잡초가 가라지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누가 곡식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종교의 영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종교성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주님의 말씀은 이들이 사탄을 섬겼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겼다.  그렇다면 그들의 아비 마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해 믿음대로 산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사탄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구로 이용당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종교성이 강한 이 집단적인 존재들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의 전진 과정에 중요한 방해물들이며 십자가의 원수 같은 역할을 한다(빌 3:18).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는 것이다’(마 13:29).  마지막 날 ‘꺼지지 않는 불’로 심판을 받을 때까지 참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한다(마 3:12, 13:30, 계 14:14-16).

우리가 이 종교의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려면 성령께 매우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늘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고(롬 8:14), 민감하신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엡 4:30).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에서 발견되는 친밀한 사랑과 능력으로 이 종교의 영과 맞서야 한다.  이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엡 6:10-12).  왜냐하면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 누군가가 변화를 시도하면 거칠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울을 생각해 보면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이었을 때 다소 사람 사울은 종교성이 강한 영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마약 중독자와 같이 종교의 영향력 아래 있어, 그가 종교적인 생활을 떠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열심이 종교생활을 했는지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 하고’(갈 1:13),  ‘사람을 죽이기까지’(행 22:4),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9:1).  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성령 하나님의 새로운 일에 저항했지만,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다메섹에서 그가 바리새파의 영으로부터 자유케 하실 방법을 가지고 기다리셨다(행 9:3-19).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사울은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미친 듯이 섬겼던 하나님은 누구인가?(갈 1:14).  나는 오늘날 회심이전의 사울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말에 게거품 물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세상은 바리새파의 영에 의해 길들여진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창궐하는 시기다(눅 18:8).  신앙생활에는 중간지대란 없다.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롬 8:14-16)은 종교의 영,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요 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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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시대는 어떠했는가?  신약시대 역시 종교는 예수님께로부터 가장 신랄하게 질타를 받았고, 종교라는 관념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통해 종교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대적했는지를 알 수 있다(마 23장).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세리들과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셨고(막 2:13-17), 심지어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에게 값없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요 8:11).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미래에 당할 지옥 형벌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마 12:34), 마귀의 자식(요 8:4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 ‘화 있을진저’,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말은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을 사용하셨다(마 23:13, 15, 16, 23, 25, 27, 29).  혹독한 말투를 사용하신 것을 보면 조금 살벌한 느낌이 든다.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화를 내신 이유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외적인 겉치레에 집중하는 제도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율법을 지켰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더 잘 믿는다고 자부했다(눅 18:9-14).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 5:46-47).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실체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마 3:7, 요 8:37)이라고 나팔을 불어댔지만 삶(행위)으로는 철저하게 부인했던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딛 1:16).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이미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마 23:25-28).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우리들 역시 바리새인 못지 않게 교회당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면서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오후 예배 등등 많은 예배를 드린다.  솔직히 말해 한국사람처럼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민족도 많지 않다.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는 왜 그렇게 예배가 많은지 모르겠다.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무속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송구영신예배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인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배 말이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다고 자부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열심히 교회당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받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은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것을 믿고 드린다.  비록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마 5:13-16),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을지언정(롬 2:24), 예배만큼은 드려야 뭔가 마음에 불안감이 없어지는 것 같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의 신앙생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성공을 했고, 육신적인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교회를 핍박했고(행 9:1-2, 26:9-11), 외적인 의를 치중했던 가장 높은 서열의 바리새인이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자기를 살피고 주의를 기울였던 사람이다(빌 3:5-6).  바리새파 부모 밑에서 성장할 뿐 아니라 위대한 가마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행 22:3), 가장 엄격한 종파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유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갈 1:14).  당시에 이스라엘의 선생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은 비난의 명칭이 아니라 명예로운 명칭이었다(마 23:7, 요 3:10).     

나는 학식과 의로움과 종교적 열심으로 인해 명성을 얻었던 바울이 자신이 몸 담고 있었던 바리새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아그립바 앞에서도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했다’고 변명한다(행 26:5).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교성에 의해 지배받아 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딤전 1:13)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그의 종교적 바리새주의는 다른 어떤 죄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놓쳐버리고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종교적인 의식과 제도에 중독되어 버린 자신의 왜곡된 신앙이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영에 영향력 아래 있는 자들은 밀밭에 심긴 가라지와 같다(마 13:25).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려 죽이고’ 그 성장을 가로막기 위해 세상에 심겨진 악한 자들이다.   

여기서 종교의 영에게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나타나는 증상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외적인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마 6:1-4, 23:1-7).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을 가지고 있다.  정작 두려운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평가다.  두 번째 증상은 예배나 기도를 정한 시간이나 정한 장소에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마음에 부담감을 느낀다(요 4:20-24).  주일날 오전 11시 정각에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증상은 자기 노력과 수양을 통해 의로움을 얻으려고 한다(갈 3:1-14).  이 증상에 속해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육에 속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네 번째 증상은 관습과 전통과 제도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막 7:1-13).  반드시 주보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예배를 드려야 직성이 풀린다면 비록 그 교회가 정통이라고 자부할지라도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증상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로 잡아주도록 주요한 임무, 즉 하나님의 나라의 파수꾼의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마 23:13-15).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과대망상증을 가진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뭔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마지막 증상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하고 싶다.  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목사와 신학자, 그리고 교회 직분자들이 많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죄에 대해 영적으로 무디지만 신앙적 미숙함에서 오는 다른 형제의 부족한 점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문제는 덮어주거나 바로 세워주지 못하고 무거운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어 준다(마 18:6).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깊은 바다에 빠졌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눈을 가지고 있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영적인 현상을 심하게 거부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행 7:51-58).  평신도 앞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명색이 목사인데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쪽팔림의 문제가 아니라 정직함에 관련된 문제이다.  특히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에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치명적 망상은 상대방과 비교하여 자신이 진리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한결같이 종교의 영이 ‘순교자 증후군’(martyr syndrome)을 마음 속에 심어주면 그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엄청난 고난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다.  바로 한국의 사랑 제일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증상이다.     

특별히 신학적 논쟁이나 이단 사냥질을 목회보다 더 잘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이미 종교적인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딤전 6:4).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종교성이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그런 일들이기 때문이다.  Sébastien Castellion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 다른 세계관(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뛴다면 그는 성령이 아닌 종교의 영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논쟁과 사냥질 속에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어(약 3:14-15), 듣고 보는 자들로 하여금 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딤후 2:14).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다는 것이다(마 2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만을 증거 하라고 했지(마 28:18-19, 갈 1:8), 무익하고 헛된 신학적 논쟁이나 이단 사냥질을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딛 3:9).  만약 이것들 중에 하나 이상 발견하거나 혹은 이 다섯 가지 증상들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인색하고 사랑이 없는 비판적인 사람들로 정형화한다면 이미 그들에게 종교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물론 “나는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며 종교의 영 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는 소경 된 목사나 교인들도 있지만 말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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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만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 체계를 철저하게 신봉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믿고 가르쳤던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의 신자들의 삶 속에서 개입하셨던 것만큼 지금 우리들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경건하고 훌륭한 칼빈주의 교수들로부터 성령의 은사들이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었다는 신학적 전통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했던 것은 완성된 성경이 내 손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한 방법 외에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한 마디로 은사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성경과 신학, 그리고 교회사의 증거로써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철회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팔을 불어댔다.   

성경은 귀신론 교과서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귀신들의 세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물론 귀신을 믿지 않는 목사와 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신구약 성경은 특정 귀신(영)들을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군대 귀신(막 5:9),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막 9:25), 더러운 귀신(마 12:43-45), 점하는 귀신(행 16:16), 거짓말 하는 영(왕상 22:21-23),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거짓 이적을 행하는 귀신이 있다(계 16:14).  그 외에도 정사와 권세(엡 6:12), 악한 신(삿 9:23), 악한 천사들(시 78:49), 범죄 한 천사들(벧전 2:4), 한글 개역성경에는 ‘숫염소’로 번역되어 있지만 음란한 귀신도 있다(레 17:7).  그렇다고 모든 영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교의 영’이라는 단어나 용어를 접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신학교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교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없다.  본고에서 동의어로 사용하게 될 ‘종교의 영’(spirit of religion), 혹은 ‘종교성의 영’(spirit of religiosity), 또는 ‘종교적인 영’(religious spirit)은  성서 용어 색인에서 찾아볼 수 없을뿐더러 성경적 용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존재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었다.  종교의 영의 희생자인 동시에 목회 사역에서 이를 겪어본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상 낯선 존재는 아니다.  ‘종교’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단 두 번 정도 나온다.  한 번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할 때(행 26:5)와 다른 한 번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헛된 경건이 무엇이며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이다(약 1:26-27).  이들의 말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종교란 서너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마 6:1-18)와 외식 혹은 위선적인 삶(마 23:5-7), 그리고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다(막 7:1-9).    

나는 형식이나 관습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을 지배했던 영을 하나로 묶어 ‘종교적인 영’ 혹은 ‘바리새파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마 16:6).  실제로 종교의 영은 교회 안에서 빵의 누룩처럼 역사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질서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강력히 저항한다(마 12:22-37).  이 영은 사람들을 속여 겉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안은 변한 것이 없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만드는 영으로 교회 활동과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  믿지 않겠지만 종교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복음대로 살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변화를 거부하는 종교의 영이 제도화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태복음 4장 23절 말씀을 수도 없이 읽으며 가르쳐 보았지만 이 구절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몸으로 경험하고 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치유는 교회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약 5:14-16).  그래서 진리의 말씀만을 강조했던 우리 교회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교회에서 처음 성령의 사역을 시작할 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문제인 것처럼 교회 안에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매주 모여서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의 떡을 떼며 성령의 놀라운 임재가 나타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열망하며 갈급해 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받으려고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다.  하지만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제를 나누던 다른 사람들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눈에 거슬리는 어떤 종류이든 분명한 성령의 임재를 싫어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값없이 주시는 은사를 원치 않았다(고전 12:7).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키려고 할 때마다 이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외양적으로는 이 두 부류의 신자들 모두 주님께 헌신된 것처럼 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귀한 일꾼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이 성령의 은혜 속에 들어가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강력히 반대를 했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교제를 잘 나누던 사람들이 왜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실 때 바리새인들이 사함 받지 못할 정도의 심한 말로 대적했던 사건이 성경에 나온다(마 12:22-35, 눅 11:14-15).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생각과 말과 행동이 심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함부로 지껄어대는 이들의 말이 참으로 비위가 상한다(마 12:36-37).  예수님 당시의 일어났던 이 사건은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는 이것이 보기 드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겉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과정에 대하여 극도로 저항하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엡 6:10-12).  평상시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눌 때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은혜로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목사와 직분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거룩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칭찬해 주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여전히 종교의 영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종교의 영은 무엇이며 또한 그 움직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이어 나오는 ‘가라지 비유’는 교회 내에 알곡 신자들과 가라지 신자들이 함께 섞여 마지막 추수 때까지 공존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역할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일차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38절에서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 내의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 문제 이상의 것으로서 세상 가운데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는 폭넓은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비유가 ‘종교의 영’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진짜 곡식들 사이에 원수 마귀가 뿌려 놓은 ‘가라지’이다(25-28절).  가라지(지자니온)는 팔레스틴 지방에 서식하는 식물로서 밀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이삭이 필 때까지는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 잡초다.  결실할 때가 되어야만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해석하실 때 밀과 가라지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신다.  밀은 ‘천국의 아들들’(38절)을 의미하고, 밀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 기생하는 가라지를 ‘악한 자의 아들들’(38절)로 정의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씨는 세상이라는 밭에 인자에 의해 뿌려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셨다(24, 37절).  또한 이 세상에는 천국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사탄의 아들로서 악한 자에 의해 세상에 뿌려진 자들이다(25, 39절).   여기서 주님의 언급은 천국에 대한 것이지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만 아니라 교회도 세상 속에 있으며 따라서 그 진리는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 두 나라의 사람들을 밀과 가라지에 비유함으로써 그 두 부류가 외양적으로 똑같이 보인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에는 곡식과 가라지,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있어, 얼핏 보아서는 양자 행위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님의 자녀처럼 보이지만 결코 진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눅 6:46-49).  비유의 전체적인 요점이 무엇인가?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도 영락없이 천국의 아들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사탄의 주된 전략은 자신의 악한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탄은 언제나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나타났고, 목표는 단 한 가지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속이고 죽이기 위해 그분의 나라를 완벽하게 위조하여(요 10:10),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 천국의 자녀들의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사탄이 만든 하나님 나라의 모조품을 ‘종교’(Religion)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깊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심신 수양을 위해, 마음의 평안을 위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맞는 것 같지만 틀린 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종교적인 사람, 혹은 종교성이 강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 분 자신과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다(막 12:28-3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사울처럼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고(행 9:1-19),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롬 8:14), 세리와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있어야 한다(눅 18:13).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활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신 적이 없다.  성경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활동 그 자체를 좋은 것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사 1:10-20)와 예레미야의 시대(렘 7:8-15), 아모스의 시대(암 5:21-27),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종교성을 무슨 큰 벼슬이라고 얻은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들, 즉 제사, 기도, 예물, 찬양을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 것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호세아가 말한다.  ‘나는 인애(사랑,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신앙의 본질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한분만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호 4:1, 6).  한 마디로 계명을 지키며 살라는 것이다(요 14:21, 막 12:33).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가 없이 외적인 형식, 즉 껍데기 같은 종교에 길들려 진 백성들을 향해 말라기 선지자는 외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 1:10).   이 말씀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악을 바락바락 쓰며 대면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 말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삶의 열매를 통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롬 12:1-2).  암모스 선지자는 조금 더 세게 말한다.  ‘화 있을 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암 5: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한 삶을 살면서 선택받은 백성인 것만을 자랑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요즘 말로 표현하고 싶다.   “예배에 환장한 인간들아! 주일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들이 죽으려고 기를 쓰는구나”  만약 지옥이 저주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 것이 확실하다면(마 25:4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창 19:14).  요점이 무엇인가?  생명이 없는 동물 박제와 같은 외양적인 종교 형태는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종교적으로 중독되어 교회에 나가기만 하지 말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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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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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투표할 권리가 있었지만 선거때마다 투표한 것은 아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찍기 보다는 언제나 기도하는 가운데 투표에 참여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투표하지 않았다.  나의 신앙관에 비추어보면 이번 선거에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  하지만 투표하게 된 동기는 미국을 통합보다 분열로 이끌어 가는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이 재선되면 4년간의 악몽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그가 재임 기간 중 보여준 행보는 선동적인 언어 구사와 러시아 스캔들에 연류된 부패 의혹, 인종차별주의적인 반 이민 정책과 누구도 못 말리는 트위터 정치, 미중 관계 악화로 인한 외교적 갈등과 코비드19 대응 부실, 섹스 스캔들과 탈세 의혹 등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 행동을 했다.

지난 2016년에 치러진 선거를 뒤돌아 보면 교회가 정치에 너무 집착해던 것 같다.  당시 기독교인의 표심이 드럼프를 향했고, 그의 백악관 입성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지가 한 몫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Ryan Helfenbein이 진행하는 Christian Online Podcast에서 나온 내용처럼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고수하며 당국과 실내 예배에 관련한 법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Grace Community ChurchJohn F. MacArthur 목사 역시 민주당 정책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드럼프와 전화 통화를 한 이후 그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목사들 중에 드럼프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가 재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 대통령이 나라를 잘 치리(治理)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면 부정선거와 독재, 민중들을 억압했던 이승만, IMF 외환 위기 사태를 만들어낸 김영삼, BBK 사건과 DAS의 비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 혐의로 17년 형을 받은 이명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막말의 대가인 전광훈이 만든 기독자유통일당이 꾸준히 국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는데 왜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만든 당을 찍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정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생각은 기독교인이 정당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지 말아야 하고,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이번에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 이유는 단 하나다.  정당 정책을 떠나 분열보다는 화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미국 온건파 공화당 소속의 현직 주지사가 대선 투표 후 공개적으로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지지를 표명한 공화당 측 인사들이 있긴 했지만 현직 주지사가 공개적으로 바이든 후보에게 표를 줬다고 밝힌 건 처음이다.  Governor Phil Scott은 “평생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었지만 당을 넘어 나라를 위해 결국 바이든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지난 4년간 나라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바이든 후보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이 나라를 나아지게 하고 분열된 나라를 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실 다른 사람 신앙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이번에 느낀 것은 드럼프가 바이든에게 지고 나서 하는 행동을 보니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가관이었던 것은 백악관 앞 St. John’s Church로 가기 위해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위대를 향해 최류탄과 고무탄을 쏘았던 일이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교회 앞에서 성경책을 들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드럼프를 맹신하는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어필하려는 의도로 사진을 찍었는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쇼맨쉽을 보인 것이다.  교회를 관할하는 성공회 워싱턴교구 Mariann Budde 주교는 CNN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성스러운 성서와 교회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모든 것에 반대되는 메시지를 던지는 배경으로 사용했다”  나는 드럼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볼 때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 같이 보였다.   17살 먹은 스웨덴 출신 환경 운동가인 Greta Thunberg가 트위터를 통해 남긴 말이다.  “참 웃긴다. 도널드는 자신의 분노조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친구와 좋은 고전영화를 보러가! 진정해요 도널드, 진정해”  Thunberg가 1년만에 주어만 바꾸어 되돌려 준 것이다. 

이번 대선 불복 의사를 비쳐 대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드럼프를 가톨릭 신자인 바이든과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 같다.  어떻게 기독교인이 불신자만도 못한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이 분이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 이민과 불평, 분열 등을 조장하는 발언을 노골적으로 공개 석상에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드럼프로 인해 분열된 미국을 향한 바이든의 말은 달랐다.  나는 분열시키지 않고 통합시키는 대통령이 되겠다. 상대방을 적으로 대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들은 적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도서의 말을 인용할 때였다.  “성경을 보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건설해야 할 때, 씨를 뿌려야 할 때, 거둬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치유해야 할 시간이다”.  그는 의회를 향해서도 “모든 사람, 그들의 정체성이나 종교 등을 떠나 모두를 위해 일해야 한다. 미국의 영혼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듯이 바이든 후보가 앞서자 대선 승리를 위해 선거 관리 사무소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대통령의 신앙 멘토이자 종교담당 특별 고문인 Paula White 목사의 기도다.  나는 함성과 노랫소리를 듣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실 것이다…..선거와 미국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의 동맹을 부숴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마의 동맹이 당장 모습을 드러내기를 명령한다"  나도 기도하는 목사이지만 이런 기도는 그져 맹신으로 가득찬 샤머니즘에 불과하다.  지금 누가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는지 모르고 민주당이 악의 동맹인 것처럼 이런 기도를 드린다 말인가?  나는 그녀가 들었다는 함성 소리는 바이든 당선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다.  탈무드에서 나온 말처럼 백성들의 소리는 곧 하나님의 소리라고 믿는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님은 어떤 당을 지지했느냐는 것이다.  White 목사의 기도를 들어보면 민주당을 악의 동맹으로 볼 때 공화당 드럼프를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정부나 세속적 정치에 관여하여 어떤 정당을 지지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요한복음 1836절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니다.  바리새인을 지지한 적도, 사두개인을 지지한 적도, 율법사를 지지한 적도 없었고, 어떤 정치 제도나 정치적 세력과도 거리를 두셨다.  한 마디로 세상 정치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드럼프는 우편 투표와 개표 과정의 불공성을 걸고 넘어지고 있지만, 연방 우체국에 따르면 유권자 본인과 증인 서명까지 받아 명부와 대조하기 때문에 우편 투표 절차상 위조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AP 통신에 의하면 미국 행정부 초청으로 미 대선을 참관한 해외 선거 전문가(국제선거참관단)들 조차도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부정선거 사례를 발견하지 못했고 우편 투표 시스템은 안전하다고 밝혔다.  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시기라 우편 투표를 통해 선거에 참여했다.  이 우편 투표를 하기 위해 먼저 두 번의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쳤고, 두 종류의 특수 봉투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 봉투는 비밀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봉투는 내가 서명한 용지를 넣고 지정된 곳에 가서 소형 카메라가 장착된 두표함에 넣었다.  이렇게 모아진 투표 용지는 집계하기 전 공공기관에 등록된 유권자의 서명과 봉투의 서명을 일일히 검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선거에 대해 같은 공화당 소속 George W. Bush 전 대통령도 공정했고 결과도 분명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이번 선거는 아주 공정하게 치루어졌고, 바이든 후보가 당선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을 가진다( 9:17). 

이번에 드럼프가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몇가지 결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먼저, 국민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을 사울 왕처럼 자기 중심적으로 휘둘렀고, 재임 기간 4년 동안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이웃 사랑과 약자를 무시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국민을 둘로 쪼갰으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고 코비드가 창궐하여 수십만 명의 사람이 죽어나가도 이생의 자랑인 재선에 눈이 멀어 국가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고, 나라의 지도자로서 국민을 이끌어 갈 인격과 역량이 분봉왕 헤롯 같이 수준 미달이라 민심을 잃었다.  한 가지 더 포함시킨다면 선거 결과에 승복하기 싫어 역대 대통령 중 120여년만에 승복 전통을 깬 기독교인으로서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을 남겼다.  미셸 오바마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말처럼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능력이 없다  한 마디로 대통령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사실 공화당을 지지해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사무엘상 1526절이 하나님께서 드럼프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이다. 

영국의 부흥운동 연구가이며 학자인 James Edwin Orr는 세상과 작별을 고하기 전 『My All, His All』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전국적인 조사에 의하면 수백만의 사람이 스스로를 가리켜 거듭난 성도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교계는 이 현상을복음적 대각성 부흥이라고 부르는데 신문을 읽어보면 이 현상이 국가의 도덕성 향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다. 회심자의 숫자는 증가하는데 살인, 강도, 강간, 매춘, 음란 영상물, 및 그 외 여러 가지 사회악도 함께 창궐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짧지만 아주 깊은 통찰력이 담긴 말을 남긴다.  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실수하고 착각하는 것은 누군가가 신앙적인 일에 열심히 헌신하고, 대내외적으로 많은 사역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 일들에 대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 신앙이 좋거나 확실히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신앙적인 의무와 규례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악을 행하면서 예배를 드렸고( 1:15), 바리새인도 성전에서 길게 기도하며 금식하고 헌금을 드렸지만( 18:9-14), 하나님은 이들의 예배를 외면하셨다( 5:21-23).  이것은 거짓된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적인 일들에 대해 열심을 내고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일에 할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Jonathan Edwards는『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싶어 하며 자신들의 입을 그분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라고 권면하고 싶어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이 은혜롭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여기는 같다. 그러나 모든 은혜로운 감정에 모조품이 있을 있다는 사실 역시 염두에 둔다면 어떤 사람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하다는 사실 역시 사람을 지지하는 논거로 합당하게 여길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곧 바로 그분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을 잊어버렸던 사건( 14-15)과 에스겔 시대의 유대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자신들의 이욕을 좇아 행한 것( 33:31-32), 그리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박혀 죽이기 직전까지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9) 큰 소리로 외치며 찬양한 사건들을 제시한다( 11:1-11).  다시 말해 돌밭과 같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헤롯조차도 괴로워하며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것처럼( 6:20), 거짓된 신앙고백을 가진 자도 자신의 무가치한 것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3:28-30, 6:25-27).  한 마디로 가짜 신앙이다.   

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체험은신유’, ‘축사’ ‘예언이 아니며, ‘방언이나방언통변도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회심의 체험이다.  문제는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7:21), Edwin Orr가 말한 것처럼 변화된 삶 외에 거듭난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가 없다면 그는거짓된 회심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7:23).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신앙생활에 흠 잡을 때가 없을 정도( 3:6)로 충성스럽게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다( 1:14).  하지만 거듭나지 않았던 것처럼( 9),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다면 모세처럼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3).  이 말은 누군가 온전한 회심을 했다면(고전 15:8), 그는 회개의 합당한 삶( 26:20)과 변화된 삶(살전 1:9-10)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히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5:22-25).

이것은 마치 결혼이라는 거룩한 연합의 행위( 5:31)가 곧 서로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는 진정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과 같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고 난후에 상대방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고( 2:20), 자기 뜻대로 행하려는 욕구에 대해 죽는 것임을 알지 못한 ( 5:24), 아무런 대가 없이 입으로만 고백한다고 해서( 7:21),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다( 6:46). 분명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좁은 문을 통과해서 좁은 길을 가기 ( 7:13-14)에 사려 깊게 계산하고 생각할 것( 14:25-32)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셨고( 16:24),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 14:33)과 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6:24),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 12:25)과 가족들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10:37).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원칙이 변함은 없다( 22:18-19).    

성경에 보면 자발적으로 아니면 친구나 친척의 권유를 받아 예수님을 따르려고 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다( 9:57-62).  재물이 많은 청년 역시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간 적도 있었다( 19:16-22).  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거저주시지만( 2:8), 거기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요구하셨다고 믿는다( 8:34).  문제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지만 그에 대한 비용을 계산해 보지도 않은 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계의 커다란 수치인 맛을 잃은 명목상 교인들을 양상해 냈고 종교성이 강한 가짜들로 교회는 가득차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은 오랫동안 다른 복음( 1:8)과 다른 예수(고후 11:4)를 가르쳐 왔던 목사들에게 있다(11:52).  이제 그 대가를 현재 교회가 치르고 있는 것이고( 6:7), 예수님을 통해 이미 예견했듯이( 18;8),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죄악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흐릿한 불빛만을 발하는 현실(5:16)은 우리에게는 결코 생소하거나 놀랄 일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는 가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다.  한 분은 사랑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아직도 레전드 사건으로 남아 있는 나 도지사인데그리고 새 버전으로 나온 나 국회의원 3번 했어로 유명세를 탔던 사람이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국회의원 3번 한 것 하고 코로나19 진단 검진받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한 분은 백악관 앞에서 피켓 들고 4.15 총선에 부정이 있었다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한 전직 국회의원이며 감리교 집사다.  왜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국 선거 문제를 미국으로 가지고 와서 나팔을 부는지 모르겠다.  한국이 미국의 속국이라도 된다 말인가?  나는 이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불신자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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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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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가 좋은 나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들고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붙이는 것을 보면 너무나 좋아진 세상인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의 흑역사(黑歷史)가 말해주고 있듯이 과연 역대 대통령들,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몰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오래 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가 되었는데, 6-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고문으로 얻어낸 진술을 근거로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조작부터 사형까지 박정희의 작품이라는 인혁당 사건은 야만적 사법 살인 의혹 32년만에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만약 지금처럼 대통령를 비판를 하면 그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모진 고문를 당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12·12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며, 전 재산 29만원 밖에 없다는 사람이 만든 인권 유린의 상징 삼청교육대는 어떠했는가?  당시 전두환을 비방하는 자는 가차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예배 중단 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 회장은 "신앙을 생명 같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 라고 강조하면서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듯이 코로나 확진자의 상당수가 신천지와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게 현실인데도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반발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지금 선에서 확산을 멈추고, 빠른 시일 안에 안정시켜 모두의 활동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최선이라며 정해진 기간까지만은 꼭 좀 협력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지금의 현실은 나라가 기독교를 탄합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나라를 겁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렇다면 대면(현장) 예배에 대한 신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열 명 가운데 여섯 명 정도는 정부의 종교 집회 자제 요청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게 아니라고 답했다.  도대체 대면 예배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일부 교계 지도자와 신자들이 예배에 생명을 거는 것일까?  이웃에게 해를 끼쳐 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교회와 교인들, 심지어 순교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불편한 말을 쓰기는 싫지만 지금은 개나소나 순교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볼 때, 주님이 오실 때가 다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최악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혹은 4단계로 격상한다면 사실상 대한민국 셧다운을 의미한다.  일상이 정지되고 많은 일자리가 무너지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모이는 예배를 중단하고 각자의 처소에서 가정예배의 형식으로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대면 예배 금지 조치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중에 일부 목회자들은 예배를 드리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으면 그것이 바로 순교’(殉敎)라고까지 말한다.  정말 궁금한 것은 스데반 같이 순수한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아닌(7:54-60), 그저 신천지 같이 사이비 믿음을 가진 것처럼 침(비말)을 튀겨가며 드려지는 현장 예배만이 참된 예배이고,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반대하는 비대면(온라인)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비대면 가정예배를 드리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바라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기가 지나가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현장 예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성도들간의 교제가 없는 온라인 예배도 괜찮다는 습관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만큼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대면 예배도 성령의 교통하심이 가능한 가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43: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들, 즉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43:21).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모든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79:9).  

Bruce Leafblad예배는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우선으로 삼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배는 생명과 같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솔직하게 말해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있는가?  지면상 여기서 일일히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미국인 교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예배가 너무 많다.  예배 종류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가?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은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35:1, 4:24).  한 마디로 교회에 모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0:2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배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냐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아니하는 예배가 있다(4:1-5).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1:11-1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에게 예배드릴 것을 명령하셨고(99:5),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그분께서 이들이 드리는 각종 예배, 즉 월삭, 안식일, 대회, 성회로 모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다(1:13).  한 마디로 예배가 지겹다는 것이다.  분명 율법의 요구에 따라 성전에 모이는 것을 열심히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제물 타는 냄새를 역겨워 하시고 정한 절기를 싫어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함께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어떤 악을 행했는가?  내 목전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4-17).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외형적인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선행, 즉 실천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 그분께 받은 사랑을 증명하라는 것이다(5:16).  달리 말하면 성경 말씀을 지겹게 강조하면서 경건하게 드려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5:23-24).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리는 것에 있어 상습(常習)에 가까운 백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들은 제사를 드릴 때 부정한 제물, 눈먼 짐승, 다리를 절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받친 전력이 있었고(1:8), 무조건 하나님께 제사만을 드리면 기뻐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많은 제물을 드렸으며(1:11), 더 나아가서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22:3)의 약점(?)을 이용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같이 많은 사람이 동원된 성가대의 웅장함과 교회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5:23)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예배가 꽹과리 소리 같이 시끄럽다는 것이다(고전 13:1).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모스는 말한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5:24).  ,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말고 먼저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법을 올바르게 지켜며 살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처럼 방역 본부장을 살인죄로 검찰에 고발하고, 검사 거부, 병원 탈출, 방역 거부, 보건소 직원 껴안고 침 뱉으며 난동, 심지어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줄행랑 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교회당에 와서 예배만을 드리면 구원 받은 백성으로 착각하는데 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말한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로하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양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7:9-11).  구원 받은 생각, “꿈 같은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못지 않게 신약에 와서도 대면 예배를 드리겠다고 고집하는 교인을 예수님께서 만나신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예배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이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과 제도에 매여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이다.  특정한 장소, 즉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믿었다(4:20).  사마리아 여자의 전통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오직 산에만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눈여겨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여자의 그릇된 예배 스타일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자가 조상 야곱의 우물을 최고로 생각하고,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받는 것처럼 믿었듯이, 꼭 대면 예배를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목사와 교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신약의 예배란 어떠한 것인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4:24).  이 말씀은 예배의 장소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여자가 말한 것처럼 산에서만, 즉 건물로 지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려야만 받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 마당뜰만 밟고 다닌 꼴이 된다(1:12).  이 어려운 시기에 대면 예배를 드리지 않고 비대면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8:20).  문제는 오랫동안 교회당 위주로 사역을 한 목사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장소와 건물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3:8).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듯이’(고후 3:17), 어느 곳이든지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4:23). 

호세아 선지자 역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바로 알고 오직 그분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고( 6:4-5),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22:37), 예배는 둘째로 치고, 먼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지 않기 위해( 2:24), 생활 속에서도 행실을 선하게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벧전 2:12).  이런 외형적인 의식(예배)은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이 핵심적인 사실을 놓치게 되면 현장 예배만이 참 예배인 것처럼 광기 서린 살인적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해 지는 것은 과연 대면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대면 예배의 진정한 목적 말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주일 예배를 집에서 드리면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먼저 부끄러운 과거 하나를 고백하려고 한다.  그때는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목회를 했었다.  당시 헌금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었던 적이 많았고, 나도 모르게 헌금을 많이 한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를 편애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겉은 거룩한 척, 은혜로운 척, 바리새인 같이 외식적인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고 말했지만, 나는 욕심을 이기지 못해 십자가에서 못 빼고 내려왔던 적이 많았다.  이제는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사는 훈련을 십 년이 넘도록해서인지 돈에 대한 자유함을 조금 얻은 것 같다.        

이 말이 비위가 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가 헌금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마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럴 가능성이 크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1)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에 지면이 많이 남아 기록된 글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돈의 맛을 알지 않고서야 그렇게 기를 쓰고 대면 예배를 고집할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조금 더 솔직해 보자.  성전주의 혹은 건물위주의 예배만을 고집하던 목사가 교회의 운영이라는 현실적 측면에서 볼 때,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되면 헌금이 대폭 줄어드는 어려움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본인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 헌금 문제에 자유로운 교회 담임목사는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아니야!”라고 핏대를 세우는 거룩한 목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디도는 신자가 국가와 불신자인 이웃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를 이렇게 말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라’(3:1-2).  신자는 국가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필요하여 세우신 기관으로 인정하며 사회에 유익하고 선한 일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이웃 사람들에게는 해를 끼치거나 싸우지 말고 용서하는 가운데 매사에  온유한 태도를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구약 성경에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불신자들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 사람이 다니엘이다.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신앙과 접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세상 왕에게 충성을 다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참소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바벨론 왕 벨사살의 뒤를 이어 통치자가 된 메대 사람 다리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6:19-22).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6:22).  신앙적인면 외에 대통령의 통치에 무조건 반항하거나 거역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혼자 가정예배를 드렸던 사람이다(단 6:10).  이 믿음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신 것이다.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예배관은 어떠했는가?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된 성경 구절은 없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그는 이미 삶 전체로 예배를 드렸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득죄 하리니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39:9-10).  한 마디로 일상생활 속에서 몸으로 예배를 드렸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종교의 자유는 정말 중요하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활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  나라 법을 무시하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서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두고 '너무 이기적이다' 혹은 '세균 덩어리', 심지어 개를 빗대어 개독교라고 부른다.  기독교인들에게서 환멸을 느낄 정도로 악취가 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5:16).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뱀같이 지혜롭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하는데(10:16), 예배를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것과 영구적으로 금지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해 무조건 종교탄합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다.  지금 기독교가 비난의 대상이 된 현실에 대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하나님은 교회만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도 사랑하는 것일까 묻고 싶다.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목사처럼 하나님은 교회만을 사랑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어대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은게 현실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마치 유대인이 이방인을 개 같이 여긴 것처럼(15:21-28), “나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생각말이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종교단체와 사업장을 다르게 보실까?”  만약 다르게 보신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처럼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는 짓들을 보면 불신자 이상으로 악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신천지나 기독교인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반사회적이며 반신앙적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사회적 어려움이 하루 빨리 종식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들이 먼저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기독교가 세상 앞에서 예수님의 희생 정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주님은 우리가 쓰는 이 말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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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한다.  한국을 두고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전 고문 William Schaffner 박사를 비롯해서 전 세계 외신들이 빠른 준비, 광범위한 검사, 위치추적, 사회적 거리두기로 코로나 19 방역 대응을 극찬했다.  한국은 오늘 기준으로 372명이 죽었고, 그에 비해 미국은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만나 지금 현재 201,348명이라는 엄청난 사람이 죽어갔다.  사재기 없는 유일한 한국은 작지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만약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미국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런 나라를 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간첩이고, 415일 총선을 조작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공산화된다”, “정부와 방역 당국이 교회를 탄합하기 위해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종교 집회를 가장하여 분별력이 없고 공산주의 귀신(?)에게 두려움에 떠는 노인네들을 선동하여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질이 좋지 못한 자칭 선지자인 전광훈씨다.  정치적 편향성과 자기 중심적 신념을 가진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종북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정치판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더 가관인 것은 <옥중서간>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독일이 낳은 행동주의적인 신학자이며 보수적 신학과 진보적 실천이 균형을 이룬 본회퍼 목사를 자신과 비교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과대망상증환자를 따르는 피해망상증추종자들과 맹신적인 교인들이다.  메스컴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이들은 입으로만 사랑제일교회신자이지 행동은 거의 조폭 수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나는 이 교회를 ‘코로나전파교회’라고 부르고 싶다.  비말(droplet)을 튀겨가면서 통성기도는 큰소리로 세게, 찬송은 목이 터지라고 크게, 예배는 거의 신들린 것처럼 요란하게 드린다.  심각한 문제는 너무 시끄럽고 덕스럽지 못한 행실로 인해 교회 인근 지역 상권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주변 상인들은 매출 90% 감소와 생계 위협으로 인해 손해배상 청구를 추진중에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지겹게 해를 끼쳤으면 주변 식당들은 한결 같이 그 교회 교인들을 받지 않겠다고 팻말을 써붙였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자칭 믿음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들이 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종의 영이 아닌 거룩하고 존귀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믿는다(8:15-16).  하지만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7:16).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지어 주는 주된 표지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고전 13).  한 마디로 다른 영(another spirit)을 받은 것이다(고후 11:4).    

모든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평균적으로 그리스도인 중에는 성령,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에 관해 아는 바가 지극히 적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의 성령’(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중에는 아들의 영’(4:6), 즉 성령 하나님의 관한 말씀 듣는 것을 몹시 불편해 한다.  마치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가 은사주의자들이 오직 예수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성령’(8:2)에 관해 더 많이 가르치고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장까지 하나님의 성령’(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고, 성경 말씀 어느 곳에서나 성결의 영’(1:4)이신 성령’(51:11)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이 약속의 성령’( 1:13)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인가?  심지어 자기 자신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조차도 아들의 영’(4:6)이며대언의 영’(19:10)이신 영원하신 성령’(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난 성령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와 무식이 충만한데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령’(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하고 있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한다(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 8:9)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고(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성삼위의 삼위를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나아가 양자의 영’(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확신을 시켜주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16:7).  솔직히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지 의심스럽다.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성령을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오직 예수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보혜사’( 14:16, 2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동거동락(同苦同樂)하며 말씀을 배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4:49).  영광의 영’(벧전 4:14), 은혜의 성령’(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단언컨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예수의 영’(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20세기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A. W. Tozer가 현대 교회를 향해 날카롭게 지적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하나님의 신’(1:2),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5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차이점을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글을 접했을 때 빌립보서 33절을 생각하며 조금 끔찍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예언적인 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인지 안다.  Tozer의 말에 반발하여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만큼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교회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송장 같은 교회말이다(3:1). 

요한복음 1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진리의 성령에 관해 듣는 것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두려움과 위협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도대체 이들이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반기지 않고 불편해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14:1-4).  한 마디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잃는다는 뜻이었다.  성령에 관한 언급은 예수님의 떠나심을 수반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달갑지 않는 일이지만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던(24:25), 이들은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따라 부르거나 기도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거나 영광을 돌린다는 가사가 나오면 어떤 이들은 머뭇거리고 또 다른 이들은 어색해 하며 부르기를 두려워한다.  마치 성령께서 예배와 찬양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나 성부와 성자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께 직접 기도와 찬양,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삼위 안에는 어떤 시기심이나 질투, 경쟁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과 대화를 하면(6:18),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모두가 기뻐하시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령을 존중하시듯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과 예수님을 존중하신다.  한 마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지극히 높이신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주의 은사 지속론자’가 되기 전에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탁월한 교수들로부터 은사중지론적인 체계 속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그다지 심도 있게 공부를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A.D. 1세기 말에 모든 은사가 끝난 것처럼 배웠고, 그것을 굳게 믿었다.  한 마디로 ‘골수 칼빈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은사주의적 성향이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고 나서 성령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구약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신’이 메시야 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언했던 성령 강림 사건이다( 6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14:16) 있게 될 변호자이시고 상담자이신 그 분은 어떠한 분이신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창조에 통참하셨고(1:2),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적용시키는(14:26, 요일 2:27), 성경의 저작권을 갖고 계신 분으로(딤후 3:16, 벧후 1:21),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신다(16:14).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은 영원하신 성령이시다(9:14).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령은 매우 민감하시고 예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둘기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3:16). 마가는 이것에 대해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말하고(1:10),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1:32).  비록 공관복음서의 모든 기자들이 성령의 강림을 비둘기에 비유하였지만 그들은 성령과 비둘기를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누가는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강림하였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고(3:22), 그는 이러한 성령 강림을 이사야 611절과 같은 기름부음으로 이해했다.   

특히 광야 생활을 했던 세례 요한이 비둘기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 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첫 상징물로  비둘기를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한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단번에 알아 차렸다는 것이다(1:33-34).  정말 놀랍지 않은가?  비둘기가 스스로 인간에게 내려온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고, 게다가 내려와서 머문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다.  여기에서 그 위에 머물렀더라라는 단어를 주위 깊게 눈여겨 보아야 한다.  Lloyd Jones는 설교 시간에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 하나님은 천천히 걸어오셨다가 빨리 말을 타고 떠나신다”는 청교도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만큼 성령은 매우 민감하시며 작은 일에도 근심하거나 슬퍼하고 예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다.  비둘기가 예수님 위에 내려와서 머물렀던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둘기가 두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는 집비둘기(pigeon)이고 다른 하나는 산비둘기(Turtle dove)이다(12:6).  구약 성경에서 양과 염소가 화목제의 제물로 사용된 것처럼(3), 이 두 종류 모두 가난한 자를 위한 속건제물로 제사에 사용되었다(5:7, 12:8).  신약 성경에서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정결의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들고 갔는데, 그것이 피죤이었는지 도브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2:24).  아무튼 이 둘은 같은 과()에 속하고 생긴 것도 여러모로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달랐다.  사실 모든 한글 성경은 비둘기라고 번역하지만, 영어 번역본은 피죤과 도브를 구분하고 있다.  분명 성경은 성령께서 피죤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다고 증거 하고 있지 않다.  만약 피죤이 사람에게 내려와 머물렀다고 했다면 하나도 특별하거나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광장이나 공원에 모여 시끄럽게 구구거리며 지저분 하고 더러운 비둘기가 피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라시아(Eurasia) 대륙 일부가 포함된 중앙아시아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도브는 전혀 달랐다.  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동물로 알려진 도브를 예수님께서는 순결하다고 묘사하셨다(10:16).   

조류 전문가들에 의하면 피죤과 도브는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된다는 사실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물론 피죤과 도브에도 각각 많은 종류들이 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피죤과 성령을 상징하는 도브 사이에는 분명하게 뚜렷한 기질상의 특징과 차이점이 있다.  오십 년 이상 비둘기를 키워온 Pete Cantrell의 말에 의하면 피죤은 사람이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지만, 도브는 전혀 길들일 수 없다고 한다.  피죤은 시끄러운 것을 개의치 않고 모이기만 하면 싸우는 반면 도브는 소음을 싫어하고 절대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피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도브는 사람이 곁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죤은 성질이 사납고 공격적이며 여러 마리와 교미하지만, 도브는 조용하고 온화하며 오직 한 마리와 짝을 짓는다고 한다.  겁이 많은 야생 조류이고 과민하기까지 한 도브는 공원이나 광장에서 사람들이 주는 모이를 주워 먹고, 지저분한 환경에 잘 적응하는 피죤과 달리  절대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날아오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두 종류의 비둘기 중에 텃세가 강한 피죤은 절대 성령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 R. T. Kendall이 말했듯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의 피죤을 도브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종종 사람들이 거룩한 영이 나에게, 우리 교회에 임했다라고 나팔을 불거나 혹은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들 중에 하늘로부터 온 도브(거룩한 영)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도브와 유사한 피죤(다른 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것을 피죤 신앙이라고 불렀다.  즉 성령이 아닌 위조된 다른 영 말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임재는 우리가 믿고 싶은 만큼 그렇게 흔치 않다고 말한다.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히 피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브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장했던 수많은 일들이 도브가 아닌 피죤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끔찍스럽고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7:22).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13:22-27).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피죤 신앙을 가진 교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이들은 무엇이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한반도 평화를 주장하면 종북좌파로 몰리는 세상”, “대통령을 주사파로 모는 목사들 오늘날 가짜 뉴스로 인한 종북몰이의 희생양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만일 사랑제일교회처럼 분노와 싸움과 중상모략이 가득한 상태에서 성령이 능력으로 임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영을 받은 것이다(3:14-16).     

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의심 없이 믿는다(9:17, 13:1).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 법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당시 로마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던 신자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바울의 국가관은 어떠한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바라’(13:1).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받치듯’(22:21),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예수님 위에 머문 도브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과 세상에서의 역할말이다(5:13-16).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인가를 보여주는 기준은 우리가 이웃과의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다(요일 4:20).  다시 말해 광신자(狂信者)처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나팔을 불지 말고, 이 어려운 시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2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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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내에 교단이나 교파, 그리고 어떤 신학적 입장, 특히 순기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느 특정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야장천(晝夜長川) 고집하거나 우겨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미 극단적 진영논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진영논리(陣營論理) 과도하게 자기 편만을 두둔하면서 상대편을 공격하는 즉,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옳고, 다른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진영논리 전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는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양극화(polarization)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세계속에, 내 편 만을 옹호하거나 내 진영의 사람이 아닌 모두를 적으로 혹은 틀렸다는 식으로 간주하며 공격하는 극단적 대립의 진영논리를 펼치는 사람들 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에 관심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한 가지 만큼 하는 것이 있다.  디모데전서 21절에 나와 있는 말씀대로 나라를 치리(治理)하는 대통령을 비롯해서 위정자(爲政者)들을 위해 기도한다.  특히 주적(主敵)인 북한과 대립 관계에 있는 한국을 위해서 말이다.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것처럼(1:1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비굴하게 행동하거나 주눅들어 살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물론 육신이 연약하여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할 때마다 사탄은 내 죄를 가지고 신랄하게 정죄하지만, 나는 언제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벧전 2:9)으로 당당하게 회개하고 일어섰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나에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굴이 화끈이 달아오를 정도였다.    

여기서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지, 어느 한쪽 편에 서서 상대편을 적()으로 간주하는 진영논리의 덫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사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애국자는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살아왔다.  문제는 한국과 미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나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오랜 신앙생활을 하던 나에게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한 사람은 프린스턴 석좌교수 John Ikenberry마피아가 보호비를 갈취하는 것 같다고 말한 것처럼 한국을 호구(虎口)로 생각해서 뼈속까지 장사꾼에 가까운 돈에 환장한 실리주의자 드럼프이고, 다른 두 사람은 전도사 직분을 가지고 있는 황교안 대표와 복음을 전하는 귀한 직분을 주님께로 받았지만 정치 귀신(?)에게 홀려 복음을 전하는데 힘쓰기 보다는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같은 정치판에 뛰어든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빤스목사로 알려진 전광훈씨다.  

John F. Kelly 전 백악관 비서실장이 말한 것처럼 실리주의자이며 돈독()에 들려 있고, 미국 유권자 절반 이상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드럼프와 세상에서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10:16), 조계종에 육포(肉脯)를 보낸 자한당 대표는 논할 가치가 없어 생략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극우 성향의 전 목사 한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솔직히 민망하기도 하고 개콘을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이 분이 궤설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의 말에 놀아나는 사람들이 더욱 한심하게 보였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아멘하라고 배웠지(고후 1:20), 사람들을 선동질하고 길거리의 약장수 같은 말 같지 않는 말을 할 때마다 사교(邪敎)에 빠진 광신도들처럼 아멘을 남발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해 영적 분별력이 없어 아멘 하는 사람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가 배운 신학과 신앙에서 사람들을 선동질 하거나 막말과 욕설과 폭력으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한 가지만큼 확실하게 아는 것은 가정폭력이든 사회적 폭력이든 모든 폭력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그리고 파송된 큰 무리들에게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상해(傷害)를 입히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다(26:5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말씀 한 마디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부르실 수도 있다.  이라고 하는 레기온(legion) 6,000명을 한 단위로 하는 로마군단이다.  열 두영의 천사는 무려 72,000 천사가 된다.  한 마디로 수도 없이 많은 천사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사 한명이 칼을 한번 휘두르면 하루 아침에 십 팔만 오천명이 송장이 될 수 있다(왕하 19:35).  만약 72,000명의 천사가 칼춤을 춘다면 세상 종말이 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아가 예수님은 세속적인 정치인 빌라도 앞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18:36).  이 말씀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교회 구성원들을 동원하여 정치적 이익이나 살기와 광기가 넘치는 폭력 시위 집회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것이다.    

이 사람 뒤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의 사악한 요물 사탄과 귀신들이 충동질 하고 있다(6:12).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적 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7:16).  “10 25일 광화문광장 안 나오면 생명책에서 이름 지우겠다”,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앞으로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니까요".  더 가관인 것은 이 분이 대한민국은 망한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할 때, 이단 사냥꾼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 생각해 보면 소름이 끼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하는 확증편향(確證偏向)에 사로잡힌 이단사냥꾼들에게 마귀처럼 참소할 수 있는 빌미 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설(雜說)과 낭설(浪說)을 통해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 하고 폭력 집회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며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좋은 열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분은 과대망상증 환자이다.  여기에 놀아나는 사람들 역시 유유상종 (類類相從)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비가 와도 벗지 않는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왜 들고 있는지, 왜 그곳에 모였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마치 아데미(Artemis) 신전에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신전 주변의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장사군과 행상인들처럼 말이다(19:24-32).       

로마서 131-2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북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국가의 권세를 상징하는 대통령의 직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롬 9:17), 국민은 그 권세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딛 3: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정부에 불순종하거나 전복(顚覆) 시키려는 반() 정부주의적인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 2:1-3).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한가?  북한처럼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하여 믿을 수 있는 나라다.  한 마디로 북한과 달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다.  로마 정부의 속국이라는 굴레에 있었던 유대인들보다 백번 낫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불신자로서 비폭력을 무기로 폭력과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와 투쟁하며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Mahatma Gandhi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예수님은 좋다. 그러나 기독교는 싫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24)라고 말한 것처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모범이 되지 않게 행동을 했으면 불신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우리는 깊이 회개해야 한다(마 5:16). 

나는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성경이 얼마든지 위험한 책으로 둔갑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인용하여 아직도 논쟁거리고 남아 있는 Calvin이 제네바에서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알듯이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경을 오용(誤用)하거나 오해해서 야기된 수많은 문제들이 일어났다.  거짓된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었는가 하면 오늘날처럼 광화문에서 각목을 휘두르고 휘발류 통을 들고 난동을 부리지는 않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그 많은 사건들 중에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상반된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내세워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십자군 전쟁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 집회를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의 목사 직분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다.  분명 성경은 비폭력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12:17-19).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듯이 지배자의 힘이 미치고 통치권이 행사되는 곳에 주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은 그것과는 성격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힘과 지배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2:36).  무력이나 폭력이 아닌 고난 당한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수립되었듯이 말이다.  반면에 불신자의 세계 속에서는 복종을 강요하고 강자의 원리가 지배하며 힘의 논리가 우세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무력이나 폭력에 의하여 수립되지 않는다.  그분의 대의(大義)를 널리 추구하되 폭력이 아닌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과 사랑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나 정치적인 목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나라 법을 무시하고 각목을 들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벧전 2:13-14).  만약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이끌고 희생과 봉사로 따르지 않는다면 그 누구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벧전 2:20-2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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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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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 율법의 구속력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의와 형벌의 요구를 그분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즉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반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 구약만을 믿으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지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율법절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나는 Sinclair B. Ferguson의 말을 인용하여 이들을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오늘 이사야서를 통해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 논하고 싶다.  

신앙생할을 하면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 성경에 가장 근접한 올바른 믿음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런 나의 거짓된 믿음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교회 장소를 빌리기 위해 미국인 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내가 성경에서 나오는 바리새인 못지 않게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교회 목사의 머리 스타일은 반짝반짝 빛나는 민머리였고, 코에는 코걸이, 귀에는 귀걸이, 손가락에는 여러 개의 반지와 문신들.  혹시 내가 교회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속으로는 이것저것 판단하며 그를 정죄하고 있었고, 이런 펑크 스타일 목사와 대화하기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과연 이 분이 정말 목사인가? 어떻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만 골라서 했을까? 담임목사를 바라보는 교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별생각이 다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에 나타났다.  목사 사모 역시 평크 스타일이었고, 자녀들도 똑같았다.  이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교회 중직자들을 만났을 때인데, 그들은 담임목사의 스타일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한결 같이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림사 무술영화에 나올법한 그 목사를 말이다.  이것은 한국이나 한인 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의 이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좋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그 교회를 빌려 쓰는 동안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적으로 나타나거나 그 능력이 철회되는 것에 대한 이유들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하시거나( 14:14, 1:34, 41), 혹은 어떤 설명도 없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듯’(9:13), 구원하시기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는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왕의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12:2), 베드로에게는 인간이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구원하셨다( 12:5-11).  이것에 대해 성경은 그렇게 하신 이유에 대해 일절 설명하지 않고( 50:21), 이 신비를 풀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11:33).  여기서 우리가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출은 단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삼상 2:6-7).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신가?(5:4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적인 능력을 값없이 베풀어 주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가?”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 4: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55:8),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32:39).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왜 여러 상황 속에서 철회될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불신앙 때문에 오는 영적 무감각으로 인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해진 가장 비극적인 심판 들 중의 하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29:10).  구약성경에 보면 가장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이며, 이스라엘을 위한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던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이 있었지만(삼상 9:9),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  이사야는 그 민족의 심판에 대한 환상을 보고 그들에게 메세지를 전했지만(1:1, 6:1-13), 그들의 눈멀음, 즉 향락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대한 편견과 자신들의 부패한 교훈으로 인하여 그것을 읽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29:11-12).  여기서 궁금한 것은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로부터 그의 계시의 영을 제거하시도록 하였는가?  이사야는 이 심판을 기록한 직후에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선지자와 선견자들의 눈멀음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그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29:13).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몰아냈다는 것이다( 3:10).  한 마디로 그들은 종교적인 외적 형식을 잘 지켰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7:6). 

이 율법주의에 관하여 최악의 것은 그것이 성령의 계시의 사역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사역의 초기에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가져오는 수많은 희생제사에 관하여 한탄하시는 것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1:1).  그는 하나님께서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1:11-13).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외면하시며, 그들이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1:15), 그들의 금식조차도 그분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58:3).  신앙 행위가 너무 위선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다(1:13).  한 마디로 지겹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43:7), 그분을 찬양하려고 창조된 백성들을 향해(43:21),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율법주의는 단순히 인간이 만든 율법을 따르는 것 혹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동안(7:6-8)에 외적으로만 올바른 행동을 하려는 것 이상의 것이다.  즉 율법주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인 행위들을 믿는다.  하나님의 한 위() 보다는 오히려 행위를 더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그 위()보다 행위를 더 사랑하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호세아 61-6절에 기록된 대로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오직 그분만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3).  즉 하나님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4-5).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예배드릴 때만 주의 자녀인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하고( 6:44),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지 않기 위해( 2:24), 생활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행실을 선하게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벧전 2:12).  올바른 삶이 뒤따르지 않는 예배는 말씀을 지겹도록 강조하고, 교회 전통과 종교적인 의식으로 엄숙하게 드려질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울리는 꽹과리 같고(고전 13:1),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21-27).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딤전 3:16),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거나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딤전 4:8).  하지만 이런 의식들은 본질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삶이 부정과 불의로 형편없이 오염이 되어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진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 7:21-26)는 그것이 주일, 수요, 금요, 철야, 새벽, 각종 절기예배일지라도, 그 모든 의식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고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7:13), 오히려 그분의 심판을 불러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13:24-27). 

사도바울은 신명기 272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율법 행위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한다( 3:10).  이 좋지 못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여자가 요한복음 4장에서 나온다.  여섯 번째의 남자와 살면서도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이 사마리아 여자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조상들은 이 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말했을 때( 4:20), 주님이 그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21-24).  여기서 ‘신령’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영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진정’은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진리, 즉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2:8)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1:16), 그분이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고전 15:1-4).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명확한 지식과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예배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이방신들을 영입한 혼합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에 있어 유대인들보다 신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4:2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이 크게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지식이 있어 사마리아인들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령하지 못한 형식적인 예배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나는 유대인들보다 성경지식이 짧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는 예배가 있다(4:1-5).  무엇이 문제인가?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예배( 4:22)를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서 오랜 세월 동안 드렸던 것이다( 4:20).  특정한 장소(40:34-35, 왕상 9:2-3),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으로 굳게 믿었다( 11:26-29, 27:12).  이 여자의 전통적인 개념은 하나님은 오직 산에만 계시는 하나님이다.  이 구절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시간에 맞추어 주보에 짜여진 대로 교회 전통과 제도에 따라 열심히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으로 믿었다.  실상 마당 뜰만 밟고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다( 1:10-17).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가증스러운 신앙생활(1:13)을 하는 것과 여자가 조상 야곱의 우물을 최고로 생각하고, 산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 사마리아인들의 그릇된 예배 유형의 신앙이 오늘날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죄사함을 받은 감격 속에서 드려지는 진실 되고 온전한 예배를 말한다.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7:21)이 아닌 것처럼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6:46), 성령 안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인 참된 예배만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12:1-2).  나아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것처럼 산에서만, 즉 특정한 장소(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받는 것이 아니다.  환언하면 예배의 본질은 건물이나 물질, 장소나 의식, 옷차림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18:20),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6:6).  이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로마서 14장을 통해 비추어 보면 몇가지 좋지 못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성경적 원리보다 교회의 전통과 제도, 그리고 질서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 관습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둘째, 믿음이 약한 신자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때 영적인 잣대를 가지고 경멸하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 율법의 준행자인데 재판자인 것처럼 자신의 신분을 격상시킨다(4:11-12).  마지막으로 성경이 모든 윤리적인 문제와 신학적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에 심히 불편함을 느낀다.  

마지막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집고 넘어가고 싶다.  이들에게 있어 가장 좋아하는 색은 검정색 아니면 흰색이다.  회색 지대가 없다.  풀어서 말하자면 나와 다른 모든 것은 다 적()이고 비판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경의 침묵에 불편함을 느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을 때에도 굳이 신학적으로 나팔을 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이 없는데도 성경에서 침묵하거나 혹은 일부러 열어 놓으신 부분에 대해 제멋대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적용을 만들어내는 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다른 형제의 실수나 연약함을 찾아낼 때, 생존 본능을 활성화시키지만 동시에 중독성이 강한 아드레날린처럼 희열과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이다.  의학용어로 말하면 정신질환의 일종인 신학적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에 가깝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에서 술취함은 분명하게 금하지만(6:18), 금주(禁酒)는 요구하지 않고, 흡연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를 믿기 전에 이러한 것들을 즐긴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금주나 금연을 생활양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신앙의 초보이거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적당하게 술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비교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일에 일을 하지 않고, TV도 보지 않고, 인터넷도 하지 않고, 영화관람도 하지 않고 심지어 자동차에 주유하는 것과 마겟에 가서 장보는 것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들의 믿음 역시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주일에 일을 하거나  TV를 보고, 혹은 영화 관람, 아니면 마겟에 가서 장을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처럼 그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요한복음 8장에서 나오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에게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도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고자질(告者-)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12:2).  누가복음에서는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20:20).  마가복음 32절은 어떤가?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한 마디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허물이나 죄를 찾기 보다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거나 격려하기 보다는 약하고 잘못된 점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비판하고 정죄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율법주의 신앙의 해악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신학이나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7:9),  바리새인처럼 성경에도 없는 자신만이 만들어 낸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쌍심지를 켜고 호시탐탐 엿본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트집을 잡고 비판하기 위해 태어난 바리새인 속성을 가진 자들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이런 부류에 속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 나아가 이 율법주의 신앙이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헛된 망상을 줌으로서 주님과의 친밀감보다는 여러 가지 의식과 교회 전통과 제도를 더 의지하고 믿도록 하여( 15:1-9),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행위를 신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18:9-14).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순서지에 적힌 대로 격조 높은 예배와 수준 높은 연주와 찬양을 웅장하게 드리고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드려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희생 제사를 이렇게 한탄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너희가 내게 벤제나 소베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5:21-24).   

실제로 율법주의 신앙이 심판을 초래하는 이유는 신약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기만족에 빠지는 신앙이기 때문에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토하여 내칠 정도의 역겨운 신앙이다( 3:15-16).  동시에 성령을 거스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단절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7:51).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목표는 온 마음과 영혼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는 것인데( 22:36-40), 율법주의 신앙은 우리의 관심과 믿음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종교적인 행위이기 때문( 23:1-7)에 모든 명령들 중에 가장 큰 명령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서 율법주의 신앙을 묵인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는 율법주의를 결코 묵인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날에도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율법주의 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묵인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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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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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은사중지론자로서 오랜 기간 동안 Calvin 5대 교리를 견고히 붙들었던 Charles Carrin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초대 침례교회의 목사였다.  어느날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세요. 하지만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저는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도 끌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방언도 싫어요. 이 세 가지를 염두해 두시고 이루어 주세요.  제멋대로 기도를 드린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그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소재한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교도소의 교목이었다.  그는 교도소에 들어와 회심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죄수를 맡게 되었다. 

Carrin는 매주 그 사람에게 사역하러 갔지만, 언제부턴가 그 성령충만한 죄수가 Carrin에게 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장 놀라운 반전이었다.  Carrin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Carrin는 결국 간수가 보는 가운데 그 죄수에게 안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죄수는 어떤 조건도 없이 성령께서 Carrin에게 임하시도록 기도했다.  바로 그날 Carrin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신학과 교리라는 박스 안에 갇혀 살았던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외부로부터 거친 반응이 나타났다.  Carrin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일로 그는 교회로부터 사임을 강요받게 되었다.  이 소설 같은 실화는 Charles Carrin의 소책자 『On Whose Authority?: The Removal of Unwanted Scriptures』에 나오는 이야기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심한 논쟁이 일어나는 부분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사실 성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고 높여야 할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7:51).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논쟁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왜 철회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부류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주권적인 은혜의 교리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심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은사지속론자의 경험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신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육체적인 반응 즉,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이것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다시 두 부류로 갈라지면서 한 부류는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고, 다른 한 부류는 악령의 역사라고 쉽게 판단해 버린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교회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은혜가 넘치고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은(고전 4:6), 진리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예배는 드리되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없는 죽은 전통 신학에 사로잡혀 있는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산송장과 같은 교회였다( 3:1-6).  이렇게 죽어 있는 송장과 같은 현대교회에서 오순절 날처럼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임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오순절 날( 2:1-4)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인간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 일들로 인해 분명 그리스도인들 간에 논쟁이 일어나고 충격을 받거나 갈등이 생길 것이다( 2:6-8, 12).  이런 현상은 Calvin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러운 하이에나가 먹이를 만난 것처럼 살기(殺氣) 어린 눈으로 자신이 배운 신학적 잣대와 바리새적 욕망을 가지고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비판한다(4:11-12).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있고(3:12), 초자연적인 기적 속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반면 악령의 역사도 있다.  오랫동안 ‘강신술’(降神術)에 심취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된 Raphael Gasson이 『The Challenging Counterfeit』에서 말한 것처럼 사탄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모방한다.  그에게는 거짓 크리스천과 선지자들이  있고, 그들에게 거짓으로 가득찬 증표와 불가사의한 일들, 그리고 기적들을 전하도록 힘을 부어준다(24:24, 16:14).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며(고후 11:14),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6:12, 12:9), 엄청난 표적과 기적을 행한다(살후 2:9-10). 더 나아가 거짓말하는 영을 그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부어 사람을 속이게 하고(왕상 22:21), 어떤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정확성이 있는 예언의 영을 주어 미래를 예언하게 하여(16:16), 바로 왕의 술객들( 7-8)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열광시킨 마술사 시몬( 8:9), 그리고 점치는 여자( 16:16)처럼 사람들을 심히 놀라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이유다(요일 4:1).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던 복음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 Lloyd Jones.  그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중에 특히 기도 받고 쓰러지거나 몸의 경련(진동)을 일으키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킨다.  “부흥이 있을 때 항상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무질서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의 깨달음 속에 신음하고 아파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부흥이 있는 곳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Jonathan Edwards 역시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인간적인 것인지 분별하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눈에 거슬리고 낯선 것일지라도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해야만 한다.  “첫째,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둘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셋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넷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다섯째,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그 뒤에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6:44).  

나는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 중에 이성주의적인 서구 세계와 B. B. Warfield 계승자들에게 냉대를 당하고 있는 예언/계시와 꿈과 환상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구약시대 때에는 소수의 예언자들이 있었고(대상 29:29, 대하 9:29, 12:15), 예언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예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은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2:1-4).  이렇게 믿는 자에게 성령이 강하게 부어지면 눈에 가려졌던 영적인 세계가 열리면서( 1:17-18),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2:17).  오순절 날 베드로가 백성에게 선포한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예언적 선포였다.  요엘서 228-32절에 기록된 옛 예언의 성취가 방금 시작되었다.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 마디로 성령 강림으로 계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세대별로 몇 명의 선지자들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언과 환상과 꿈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놀라운 특권이며 선물이다(고전 12:7, 1:17).  이천년 전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이란 무엇인가?(고전 12:10).  신약의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격려의 말로서 개인, 혹은 교회 공동체에 전달해주는 것으로(고전 14:26),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을 위해 위로하고 세워주기 위해 전해주는 말이다(고전 14:3).  그러나 사람들이 예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으면 성경이 계속 쓰여지는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이것을 ‘직통계시’ 라고 운운하며 이단 혹은 사이비로 매도한다.  특히 John MacArthur를 비롯해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 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계시’ 혹은 ‘계시하다’ 라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 16:17), 베드로는 그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바울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나타난다.  갈라디아서 1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 11:27, 고전 2:10).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시’(1:17)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은사 중단론 신학자나 무경험 목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히스테리컬한 신학적 망상이다.  내가 아는 한 신비주의자가 아닌 이상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완성된 성경의 계시와 전혀 다르고 그 범주가 다를 뿐 아니라, 오늘날 주어지는 예언의 말씀은 현재의 말씀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한 특별한 방향 계시로 만나처럼 오늘에만 적용된다.  즉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요일 4:1).

나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 득()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구약의 선지자(9:1, 삼상 10:18, 18:19, 33:7)와 그렇지 않은 신약의 선지자(고전 14:29-30)의 차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벧후 3:16).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15:14)이기에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3:1).  D. A. Carson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어떤 해석자가 ‘계시하다’를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늘 생각한다면, 그는 빌립보 315절을 해석하기가 힘들 것이다”  나아가 개신교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 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가?  구약성경에서 ‘꿈’은 주로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졌고( 12:6), 신약에 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2:17).  문제는 은사들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이 단 한 번도 없는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꿈을 비웃으며, 이러한 것들은 특별계시를 주실 때에 사용했던 계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완성과 함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고 나팔을 분다.  Warfield의 말을 빌리면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기능이 사도시대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단시비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런 요상한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공갈(?)협박 하는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진 목사도 있다.  오늘날 꿈과 환상, 그리고 계시를 인정하면 불법이고 용서 받지 못할 사악한 이단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성경을 모르거나 신학적 무지에서 나온 몰지각한 말이다. 

나는 성경 안에 꿈(20:2)과 환상(10:7)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성경 본문을 가지고 계시지 못했을 때에만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신학적 견해에 따르자면,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수중에 가지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열등하고 하찮은 수단을 사용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성경에 기록된 많은 꿈들 중에 하나는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계시적인 꿈이다( 1:18-22).  솔직히 이 꿈과 관련해서 놀란 사실은 그것이 불필요한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구약성경 이사야 714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더라말씀만 상기시켜주시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확인시켜 주셨다(1:23).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의 살인적인 진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시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셨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2:13).  아내 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안전을 오늘날 현대 신학자와 목사들이 비웃는 꿈과 같은 취약한 것에 의존하는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실제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 본문인 호세아 111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말씀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셨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통신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환상에 대해 말해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11:1-18).  이 환상은 사도행전 1516-17절 기록에 의하면 앞으로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구절 역시 하나님께서 그냥 아모스 911-12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지 않고, 이단 시비에 걸릴 확률이 높은 신비스러운 환상을 통해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핍박을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고린도로 갔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다(18:9-10).  이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바울의 마음에 상기시켜 주시는데 적합한 구약성경 본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417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를 상기시켜 주실 수도 있었다.  이미 구약성경 정경이 완전히 형성되어 있어, 이러한 신비스러운 환상이 불필요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날 이단 사냥꾼들이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환상을 보여주시는 편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고집스럽게 꿈이나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 말이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8:2, 22:17),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1:1).  우리는 그 해답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12:6).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잘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33:14-18).  이 말씀의 의미는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성령이 사용하시는 정상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아 믿지 못하는 것이다(8:44).  듣는 것이 둔하거나 분별력이 없는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다(5:11-14).  하지만 가르치는 목사가 입만 열면 신학적 오류가 많은 잡다한 학설을 짖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예언과 꿈과 환상이 없다고 나팔을 부는 것은 그 배후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의 교묘한 전술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12:38).  조금 끔찍한 말이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신학자와 목회자를 포함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인 교리와 율법에 흠뻑 젖어 있던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들(마 23:33)은 이로 인해 눈이 멀어 진정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5:37).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이 배운 신학적 학문에 중독(addiction)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신학적 회의주의라는 주문(呪文)에 걸려 오랫동안 예언과 꿈과 환상을 믿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나의 불신앙을 정당화해줄 어느 특정 신학을 미친듯이 신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성령께서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교도소 교목인 Charles Carrin이 흉악하고 살벌했던 죄수에게 비록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겸손히 무릎 꿇고 안수를 받은 것처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겔 37:1-10)와 같이 메마른 교리만을 붙들고 있는 Calvin의 계승자들에게도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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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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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신학적인 사고는 하나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 이미 치유나 기적의 역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한다.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가르치고 있듯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후, 즉 감독들이 모여 신약성서의 내용을 확정했던 주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 이후 표적과 기사의 필요성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교회가 세워진 이상 치유를 비롯한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은사들을 모두 거두어들이셨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기적의 중단이론을 일반화 시켜놓았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Martin Luther는 그의 초기 저작인 『Sermons on the Gospel of St. John』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의 시대는 초대교회로 한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했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별한 기적이나 계시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Luther는 확실히 은사중지론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의 저작들에서는 입장을 바꿔 기적들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는 Luthers Work』에서 이렇게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고 그분의 이름을 기도속에서 부름으로써 병든 자들이 치유되는 일은 지금까지 무수히 일어났으며 또한 지금에도 역시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약 200년 전의 사람인 John Calvin은 성령의 은사들이 주후 1세기 이후에는 중단되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 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선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치유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행사하라는 어떠한 위임도 받지 않았다”  나는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능력을 가진 Calvin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살후 5:21).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 받는 것을 볼 때( 3:6), 이러한 주장은 Calvin 자신만의 생각이지, 말세에 성령의 은사를 물 붓듯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2:1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55:8-9).    

내가 『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Catholic 교회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가진 Calvin이 종교 개혁기 시대에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 특히 거짓 이적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Calvin이 지목한 거짓 이적들 중 당시 Catholic 구마(驅魔) 사제들이 활발히 행하던 exorcism 의식, 푸닥거리도 포함돼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역사적이고 교회사적인 이유가 반드시 존재한다.

교회사에 나와 있듯이 당시 교황은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 것(2:8) 위에 행위를 포함시켰다(2:16).  무엇보다도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기독교 진리를 크게 왜곡시켰고, 여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Dominican 수도사였던 Johann Tetzel이다.  면죄부’(免罰符)  혹은 면벌부’ (免罪符)판매가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Martin Luther를 크게 자극했던 Tetzel의 설교를 요약하면 이러했다.  “면죄부(indulgence)는 하나님의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오시라. 나는 여러분이 범하려고 하는 죄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잘 인()쳐진 문서를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동전이 부모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purgatory)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옮겨집니다.  길거리 약장사 이상으로 과대선전을 하면서 가짜 약(면죄부)을 팔았던 그는 모든 죄에 대해 완전한 면책을 보장해 주며, 적당한 돈을 지불할 경우 면죄부의 혜택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까지 미친다고 했다.  심지어 면죄부가 비싼 것일수록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이 단축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대략 알고 있는 교회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시 Catholic 교회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면죄부 판매를 위해 세운 전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면죄부 판매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역사 기록과 당대 면죄부 판매에 용왕매진(勇往邁進)했던 사제들의 행각을 비판한 문학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대다수의 경우 이들은 면죄부의 효력을 과장하기 위해 감정적인 호소에 가까운 만담 수준의 설교와 거짓된 이적을 통해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진다면 평민에게 1 플로린, 35-45만원에 면죄부을 판매했던 것이다.  하위 귀족이나 고위 귀족인 경우에는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사야만 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역사학 교수 Yuval Noah Harari는 면죄부 판매를 가리켜 구원팔이라고 비꼬면서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이런 구원팔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미니크 수도회의 Johann Tetzel은 모금함에 동전이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날아오른다고 말했다  실제 Martin Luther와 대립각을 세운 바 있던 면죄부 판매사 Tetzel 등의 설교 기록과 스페인의 Picaresque novel인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 판매사들은 청중에게 호소하는 인간적인 설교와 함께 자주 회중 앞에서 초자연적 이적을 선보이며 면죄부 판매를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작품은 반승려주의(Anticlericalismo) , 사제에 대한 고발로 하층계급 출신의 주인공 소년이 부패한 성직자들을 만나고 나서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교활한 맹인(盲人)을 필두로 여러 주인(신부, 수도사, 수석사제, 포교사, 전속사제)을 만나 섬기게 되는데, 면죄부를 파는 포교사가 어떻게 구마예식(驅魔禮式)을 통해 판매를 성사시키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작품 속 내용 가운데 포교사는 면죄부의 효력에 대한 길거리 약장사 같은 장황스러운 설교를 진행한다.  설교를 듣던 신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면죄부는 거짓이라며 포교사를 신랄하게 공격하며 비난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모든 눈은 공격하고 비난하는 신자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귀신들린 것처럼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심하게 떠는 증상을 보이면서 쓰러진다.  옆에 있던 면죄부 포교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귀신을 내어 쫓는 의식(exorcism)을 행하여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킨다.  사람들 눈 앞에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교사를 비난했던 사람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면죄부가 참으로 죄를 사해주는 증서라고 진솔하게 고백한다.  이에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을 버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이며 획기적인 기획상품인 면죄부를 의심없이 사들인다.  주인공 Lazarillo는 이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나중에 여관에서 포교사와 귀신들린 행세를 했던 사람이 서로 돈을 주고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한 마디로 구마(驅魔) 의식과 귀신들린 것은 면죄부 팔아 먹기 위해 조작된 거짓 연기였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단지 소설 속 허구(虛構)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 『The Life of Lazarillo de Tormes』 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스페인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서, 훗날 세계적인 뛰어난 작가이자 『Don Quixote』 의 저자 Miguel de Cervantes 등에게 심대한 영향을 준 작품이다.  시대적 정신 운동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Renaissance) 당시 사회의 지도층인 Catholic 사제들의 위선을 고발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群像), 즉 오늘날처럼 물질적이고 성적으로 타락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당시 실제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야고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깍아내렸던 Martin Luther와 개신교 신학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저술했지만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 ‘잔인하고 절대적인 독재자’라고 불리웠던 John Calvin은 누구인가?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이들은 이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느끼며 성장해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이들은 성경의 축귀 사역이 이교적 Occultism과 결합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의식으로 변질된 것도 눈여겨 보아온 자들이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개혁자들에게 구마(驅魔)의식이란 조작된 사기극 아니면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행한 것처럼 이교적 주술(呪術) 정도로 각인(刻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학 용어로 말하면 외상성 신경증Trauma 후유증으로 인한 과민반응이 유난히 치유와 축귀사역에 대해 hysterical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축귀 사역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확고하게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다.   

Catholic 교회의 사기극에 가까운 거짓 이적과 이교도(異敎徒)들이 행하는 망자(亡者)의 혼을 불러드리는 의식에 참예하지 않으려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나는 신비주의와 광신주의의 확산을 막을 가르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 이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이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과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위해 열심히 싸웠던 신앙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만큼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이들이 귀신을 내어 쫓는 의식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나머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축귀(逐鬼)사역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역은 기적의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 즉 사도들과 스데반과 빌립에게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킨 B. B. Warfield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역사가 아닌 마귀의 역사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늘날 기적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무당이나 박수 등 신접한 영매(靈媒)자들이 행하는 초혼(招魂)의식이 귀신이나 악령을 힘 입는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이들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을 무속과 협작하는 귀신을 쫓는 의식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한때 강신술사였던 Raphael Gasson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삶을 회상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탄의 힘에 의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거짓으로 모방한다”  이러한 일들이 앞으로 나타날 것을 알고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다(요일 4:1).  바울 역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21), ‘분변할 것’을 명한 것이다(고전 14:29).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Calvin이 성경적으로 바르고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체험한 치유나 축귀 사역에 대해서도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참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것임을 직접 확인했다면, 결코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정하거나 반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 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던 그가 성경에 기록되고 약속된 사역(16:17-18, 14:12, 2:17)의 실현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고 하는 것은 Calvin 자신에게 있어 성경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22:18-19). 

나는 성경에 기록된 치유나 축귀 사역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더러운 귀신과 악령을 쫓아내는 귀중한 사역이라고 믿는다( 12:28).  Catholic 교회에서만큼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개신교 내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균형잡힌 목회자는 성경에 입각한 치유와 축귀 사역을 행한다.  이런 목회자들의 공통점은 신자들이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귀신에게 눌려 자유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치유와 축귀 사역에 대해 여전히 불신과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일부 무경험자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본질을 놓쳐 버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벗어난 껍데기 같은 신학적 궤변으로 나팔을 불어대는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사도행전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말초신경의 손상으로 인해 다발성 신경병증을 가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다면(3:1-10), 그 놀라운 기적을 박제화된 신학으로 해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4:14).  신학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횡설수설 하는 와해된 언어를 가진 조현병 환자가 아닌 이상, 그 기적을 설명하려고 기를 쓰는 석두(石頭) 목사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19:31)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영매자들과 무당들의 초혼 의식이 인간을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귀신들이나(10:10), 엔돌의 신접한 여자에게 임한 악령(삼상 28:3-25)을 힘입는 것이라면(10:10, 살후 2:9), 성경에 기록된 축귀 사역은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4:10)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는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11:20).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종교개혁기 당시 개신교회의 역사적이고 교회사적인 정황을 충분하게 알지 못한 데서 생겨난 심각한 오해이고, 동시에 이것은 신학적 망상장애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인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과대망상 속에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 특히 은사주의자들이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하고 신비주의적 과도성, 즉 성경적 신앙과 무관하게 축귀 사역의 현상적 측면에만 치우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이미 영적/육체적으로 황폐한 상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 즉 귀신들렸거나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선생인 목사와 신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8:44).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 당시  질병과 귀신에게 억압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1:32-34).  그렇다면 현대의학과 첨단과학 기술이 발달된 오늘날은 어떠한가?  성경에 의하면 마귀도 제 때가 얼마 남지않은 것을 알고 있다(12:12).  지금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벧전 5:8), 그만큼 이 시대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귀신에게 포로가 되어 눈 멀고 눌린 자가  많다는 것이다(4:18-19).    

이러한 문제들은 모든 교회들이 가지고 있다.  물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만큼은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는 바리새인 같은 영적 소경인 목회자도 없지 않아 있다(9:40-41).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들은 말라비틀어진 북어처럼 메마른 말씀만을 강조했지, 병든 양이 교회를 찾아와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도와주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는 것이다.  입만 열면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나팔을 불면서도 치유와 축귀 사역이라는 영적 전쟁에 있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정황을 성경적이고 교회사적이며 역사적으로 깊이 숙고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들의 진술을 약간 비틀어 자의적으로 해석해 결국 성경이 약속한 예수님의 사역 일부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복음에 대한 지적인 깨달음에만 지나치게 만족했지(고전 8:1),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일절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14:12). 

예수님께서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3).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5-7), 열 두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9:1), 칠십인의 제자들에게도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고’(10:19), 예수님 자신도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1:32-34).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 20:30).  뿐만 아니라 앞으로 복음(고전 15:1-4)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을 자에게도 귀신을 쫓아내며 뱀을 집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16:17-18).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벧전 2:21),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반드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치유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기도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5:14-16).    

사족이긴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을 병에 걸리거나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음의 문을 쉽게 연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처럼 불치의 병만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5:25-34).  그래서 Douglas MacArthur가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 무신론자는 없다”  오늘날 치유나 축귀사역에 대해 잡설에 가까운 무익한 말을 쏟아내는 바리새인의 영을 가진 신학자와 목사들(마 12:22-37)은 한 번쯤 본인 자신이나 가족이 히스기야처럼 죽을 병에 걸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서 보는 것도 좋다.  혹시 누가 아는가 내가 경험한 것처럼 아날로그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지 말이다(왕하 20:1-11). 

내가 성경에서 발견하고 확신하는 것은 치유나 기적들은 일시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전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스스로를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교회 안에 귀신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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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치유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강신술의 기법과 관련되어 있거나 잘못(사탄의 속임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나 뉴 에이지(New age) 종교로 알려져 있고 정신수양을 위해 묵상하는 ‘Eckankar’ 와 같은 동양의 종교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집단들도 자신들이 병든 자들을 꾸준히 치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러한 치유들의 근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애굽의 마술사들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7:8-13).  그리스도인들이 치유에 관하여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단 한분이신 참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한 치유라는 점이다(15:26).  만약 이점을 놓치게 된다면 성경적 치유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사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경계하라는 말을 주변 친구 목회자들을 통해 들은 적이 많았다.  치유나 방언, 예언 같은 것은 우리를 미혹케 하는 사탄의 속임수야그것들을 멀리 하는 것이 좋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전한 교리이지, 요상하고 마술적인 기법 같은 은사들이 아니야 솔직히 신적 치유를 부인하지 않는 불신자들 가운데, 특히 무가(巫家)에서 나타난 신내림굿(강신/降神)을 통해서도 신병(身病) 치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속적인 회의론자들에게 동조하여 오늘날에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그럴듯한 잡설(雜說)을 늘어 놓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때문에 성경적 치유를 인정하는 기독교적인 입장이 거부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Blaise Pascal이 『Pensees』에서 남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우리는 거짓 기적이 많기 때문에 참된 기적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기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해야할 것이다.  오직 참된 기적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거짓 기적이 존재하며 또한 참된 종교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거짓 종교들이 그토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며, 이 세상에는 물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질주의(物質主義)와 이성이나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인식하거나 판단하고 신의 섭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합리주의(合理主義)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서양적 세계관의 막대한 영향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적 치유를 부정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기적을 체험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성경을 주관적인 자기해석에 목이 메여 있거나 혹은 이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짧지만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초자연적인 치유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간증이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먼저 『Holy Fire』에 나오는 R. T. Kendal 목사에 대한 간증이다.  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나에 대한 간증이다.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 사역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아내와 성도들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13시간의 비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거의 2주가 되어갈 무렵, 아침예배를 드리고 숙소로 돌아와 힘이 없어 드러누운 상태에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고 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지금 너무 갈급합니다. 저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미련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돌아갈 수 없어요  조금 지나 갑자기 위와 식도 부분이 아프고 따끔거리며 통증이 오면서 운동할 때 근육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들었다.  금식을 잘못해서 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반면 이것이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사실 위궤양과 만성위염으로 인해 거의 25년 이상 위장약을 복용했지만 약을 먹을 때만 효과가 조금 나타나는 것 같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똑같은 증상이 계속 일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증상이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말라기 2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신 것이다.  생각지 않았던 질병이 깨끗하게 고침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표적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는다(13:8).  이 사건이 있은 후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교회 성도들에게도 이런 간증들은 너무나 많다.  내가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래 전 성령의 은사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치유는 이상한 불인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인간사 속에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일관된 pattern이 있다는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주의 종들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 외에 하나님의 대적자들과 싸우는 미가엘 천사를 비롯해서(10:21), 예수님께 수종을 들고(4:11), 기도로 지치신 것을 도와주며(22:43), 성도를 보호하는(12:7-10), 돕는 천사들의 활동(1:14)과 방문(18:1-15, 1:26), 그리고 치유(3:1-10)와 꿈(37:9, 1:18-22)과 환상(11:1-18)등의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레미야 3220절에 주께서 애굽 땅에서 징조와 기사로 행하셨고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외인(온 세계/모든 사람) 중에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나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논증(論證)의 위험성을 일깨워 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던 출애굽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표적과 기사의 예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런 일들이 아직도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거나 어느 정도의 빈도로는 행하지 않으셨다고 궤변을 늘어놓을 위험성을 가진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21:25)하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한다.  나의 요지는 단순명료하다.  성경적으로 옹호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가설에 가까운 신학적인 추론으로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사랑하고 강조하는 5대교리(TULIP)와 『기독교강요』에 대해 그리 많은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개혁주의 목회자들 못지 않게 Calvin 의 『기독교강요』를 사랑하지 않지만 좋아한다.  박해를 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의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쓴 『기독교강요』는 로마교회가 두려워 했던 책이다.  당시 신앙의 형제들을 위한 교리 문답서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는 박해의 중단을 위해 왕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한의 첫 머리에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오로지 본인의 목적은 신앙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서 그들에게 확실한 기본 원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Calvin 26살의 젊은 나이에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물건을 선반에 올려 놓듯이 마음에 두고 오랫 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해 본다.  『기독교강요』도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강요』Calvin이 종교개혁이 하나님 앞에서 성서적으로 합당하고 적합한 것임을 변증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당시 Francis I of France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그는 이 서문(序文)에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異蹟)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들(가톨릭 성직자들)은 우리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진리로 확증하신 바로 그 복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이상한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이적이란, 원래는 잘 안정되었던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경박하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비록 그 이적들이 신기한 것이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대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 진술만을 본다면 Calvin은 초자연적 이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훗날 이 진술은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은사중지론교리로 널리펴져 나갔고, 19세기 구 프린스턴 학파 신학자들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를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경 66권이 주어진 오늘날에는 어떠한 초자연적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그 신학적 근거로 Francis I of France에게 바쳤던 Calvin의 진술을 제시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Calvin의 입장은 축귀를 비롯한 모든 기적(Miracle)과 기사(Wonder)를 거짓 표적(sign) 혹은 데살로니가후서 2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귀의 역사에 따라 나타나는 속임수 정도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Calvin의 이런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남들보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놀라운 지혜를 가진 그의 말이 정확히 옳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이들의 주장을 여기까지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진술 의도 가운데 한 쪽만을 바라본 데서 나온 것이고, Calvin 의도(意圖)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진술을 반드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적의 정당한 목적과 그 효용을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이 헛된 생각들은 한층 더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사도의 설교 다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이적들을 그 설교를 확증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16:20), 누가도 역시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14:3)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은 사도의 주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2:34, 15:1819). 이 말씀에서 우리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의 인장임을 알게 되었는데, 복음의 신앙을 파멸하도록 우리가 이것들을 악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의 말대로, 이적보다 우위인 이 교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검토되며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줄로 압니다. 그것이 확증되면 그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건전한 교리의 표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7:18, 8:50).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의 시험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적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어떤 다른 목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13:2).

이 진술에서 Calvin은 당시 Catholic 교회가 일부 거짓된 교리들을 악용하기 위해 초자연적 이적을 이용한다는 점을 바르고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다.  또한 성경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여전히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만 예정되어 있는상황이며(16:20), 따라서 온전히 내용을 분석하고 깊이 있게 연구되어 확실하게 증명된다면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달리 말하면 Catholic 사제들에 의해 잘못 악용되고 있던 은사를 지목해 비판하였던 것이지, 말씀에 입각한 성경적 치유나 초자연적인 이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8:16)라는 성경 말씀처럼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그 말씀이 메마르고 죽은 말씀이 아닌 운동력 있고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말씀(히 4:12)이라면 반드시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5:18).  제자들 역시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했고, 사도 바울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한다(살전 1:5).  오늘날 Warfield의 계승자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이 있다.  왜 구 프린스턴 학파 신학자들은 Calvin이 모든 은사와 기적을 오직 사도들과 관련이 있으며 교회 창설기 시대에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 것일까?  여기에는 Charles Hodge B. B. Warfield 등의 신학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당시 학계의 지배적 조류였던 근대주의(Modernism)와 모든 문제가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만능주의 사고가 일부 관여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는 Calvin이 원래 진술하려 했던 의도를 약간 비뜰어 자신들의 학문적이며 문화적 동향에 맞춰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조금 원색적으로 말하면 밴댕이소갈딱지같은 신학으로 편협하게 해석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완벽한 신학적 범죄(?)를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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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은사중지론)자들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를 목표로 한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28:19-20), 논쟁을 하기 위해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은 기적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도 시대조차 기적이 항상 일어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영적 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비위와 자주나는 병 문제를 위해 물 대신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고 했다(딤전 5:23).  치유의 은사를 가진 바울(28:8)이 왜 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치료할 수 없었고(2:25-27), 디모데후서 420절에 드로비모가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는 분명 초자연적인 역사가 중지된 때가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항상 치유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철회하셨기 때문인가?  왜 한 세대에는 그분의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시고 다음 세대는 그냥 지나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말씀처럼(45:15), 하나님께는 그분의 얼굴을 숨기실 수 있는 주권적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9:15).   

예수님께서 평생을 걷지 못했던 남자가 있던 성전 미문을 많이 지나다니셨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주님은 그곳을 다니셨고 오순절 이후 제자들도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할 때 그는 즉시 나았다(3:1-10).  왜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치유하지 않았을까?  말씀 한마디면 문둥병자처럼 즉시로 고침받을 수 있었을 뗀데(8:3), 그냥 지나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적의 은사가 사라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은사중지론의 토대가 된 원리다.  개혁주의자들은 정경이 완성된 이래로 기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들은 기적의 부재를 정당화 하고, 어떤 특정 기간을 제외하고 하나님은 결코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교리를 내세웠다.  이런 가르침의 결과로 이들은 기적은 모두 부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이론을 지나치게 지키려다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다.

은사중지론자들은 교회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성령의 은사가 사도들이 죽은 이후의 신자들에게 유효하다면 왜 그런 현상이 교회사 전체의 걸쳐, 혹은 많은 기간 동안 상실될 수 있겠는가?”  만일 기적적인 은사가 다른 시기에는 빈번하지 않았다면 이유를 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교회사의 똑같은 기간 어떤 은사가 상대적으로 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 은사의 사용에 반대하셨거나(11:29), 현 시대의 남은 자들에 대한 그 은사의 유효성을 부정하셨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고(살전 5:19), 근심케 만드는데(4:30), 기여하는 불신(6:5)과 배교(74) 그리고 신학적 무지(3:10)와 개인적인 부도덕으로 인해 교회사의 시기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자주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성경에 기록된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3:10).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많은 병든 자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와 나병환자를 고치신다.  2장에서 중풍병자를, 3장에서는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4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다.  5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죽은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쳐주신다.  그러나 6장에 와서는 예수님조차도 아무런 권능을 행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기적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던 것은(6:5)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않으셨기 때문이다(13:58).  한 마디로 치유의 사역이 제한된 이유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불신앙 때문이지, 기적의 부재를 정당화 하기 위해 내세운 어떤 가정된 신학적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살펴보자.  교부 Chrysostom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Augustine방언의 은사는 그 시대(초대교회)에 맞춰진 표적이라고 했다.  이것을 근거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약 초기의 교부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은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령의 은사들을 사도들이 살아있는 기간에만 한정하는 것은 상당한 양의 증거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한 역사적인 문헌들을 연구한 D. A. Carson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론적인 근거로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가 위조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인 이상의 결과라는 교조주의적 이유들을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  그러면서 그가 『Showing the Spirit』에서 은사들의 존재에 대한 주장을 고증하기 위한 연구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꽤 많은 형태의 카리스마적은사들이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의 여러 세기에 걸쳐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 소멸되었는가?  Augustine, Luther, Calvin의 생애 속에 특별한 체험(방언, 예언, 환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서 그런 경험이 현재적 유효성을 의심하기 위한 이유로 언급하는 것은 신학적 편견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지( 11:5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사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은사들이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아무런 증거를 성경이 제시하지 않을 뿐더러(고전 14:39), 모든 신자가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29-30).  즉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실패나 성공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주의의 성경해석학을 충실히 배웠다.  탁월한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쌓았던 적이 있어 조직신학의 가치를 알고 있다.  이들의 조직신학에 관한 저서나 글들이 나에게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때때로 성경 본문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성경 내용을 여과하는 장치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조직 신학은 효과적으로 사고하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본문에서 벗어난 주관적인 자기해석, 즉 자신의 사상을 개입시키는 해석방식으로 성경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를 도출해 내는 방식인 주해와 다르다.  따라서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오류와 왜곡을 낳을 뿐 아니라 교만을 불러 일으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이나 책을 읽을 때 본문 안에 있는 의미를 본문 밖으로 끌어내는 exegesis(석의)와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는 eisegesis(자기해석)를 구분하지 못해 빗나간 해석을 하면서도 가장 성경적이라고 우겨대는 양심에 화인 맞은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딤전 4:2).  이런 주관주의적 사람들은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Sproul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내가 믿고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나의 견해라고 해서 내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대표적인 교만의 형태다  한 마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정보는 강하게 거부하는 그릇된 신념에서 발현되는 위험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4:30), 개인적으로나 목회사역에 있어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성전에 올라온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3:1-11).  그러나 자신들의 은사중지론적인 신념 때문(12:22-37)에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목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을 잃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교수들로부터 어떤 은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매우 정교하고 주경적 시도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를 들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고전 14:22)라는 사도 바울의 진술은 은사중지론적인 체계에서 SkateboardRoller Coaster를 타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논리적인 비약을 하게 된다.  즉 방언은 이사야서 2811-12절 때문에 먼저 유대인의 불신앙과 연관되며 다시 그 불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와 연결된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부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주님의  예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멸망은 실제로 주후 70년에 발생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이 주후 70년에 멸망한 이후로 유대인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표적이었던 방언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가 폐기된다.  그렇다면 모든 은사가 다 끝난 것인가?  내가 지금 기도 시간에 하는 방언은 성령이 아닌 귀신의 역사인가?  이러한 탁상공론적인 은사중지론에 대한 논증은 D. A. Carson, Gordon D. Fee, C. Samuel Storms, Michael Green, R. T. Kendall 외에 많은 은사지속론 신학자들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받는다. 

성령의 은사들에 나타나는 권능은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뿐만 아니라 주님을  닮은 사역을 하도록 인도한다.  1세기의 것으로 격하되는 이 은사들은 단지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현대교회에도 주어진 것이었다( 13:8, 14:12).  이러한 은사들은 오늘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은사지속론을 지지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초자연적인 은사와 관련된 위험성에 대해 피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때 표적과 기사가 복음을 확증하는 것은 사실이다( 16:19-20).  하지만 방심하면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을 진리의 말씀과 믿음보다 더 중시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들도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돌봄, 그리고 목회사역과 분리될 때에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은사지속론 전통에 나타나는 비성경적 주장과 몰지각한 과도성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오순절 학자인 Gordon D.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말한다.  “성령께서 능력과 은사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쉽게 그 능력과 은사들이 성령의 임재의 실재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활동의 긍극적인 표준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높이는가 하는 여부에 있다”  나아가 그는 『바울,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서 “바울은 표적들은 자신의 복음이나 사역을 받아들이는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런 기준을 어떤 종류의 사역을 확증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도 거부한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이야말로 바울이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전부”라고 말한다.

오늘날 영적으로 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그는 현대판 니고데모가 아닌 성령의 바람에 민감한 사람일 것이다(3:1-10).  이런 목회자야말로 새로운 활력이 넘치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적적인 역사 사이에 아무런 분리도 없는 총체적인 목회로 이어갈 것이다.  이런 성령의 민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예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은사들이 교회에 부여되었음을 보여준다(4:23).  따라서 교회에는 분명히 말씀 선포사역능력 현시사역에 있어 모두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14:12).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덧입은 목회의 모범이 되셨고(벧전 2:21), 자신의 교회를 성령의 참된 권능으로 덧입혀 작은 목자들을 자신과 동일한 목회로 이끄신다.

예수님의 전지하심의 발현과 그분의 신성에 대한 논거라고 해석되는 복음서의 본문들은 종종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 주어진 예언적 계시와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편이 아닌 사람과 동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부끄러워 무릎을 꿇거나 내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앞에 있구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라고 말한다.  그녀가 예수님을 성경상의 선지자로 분류한 것은 주님께서 상세하게 계시된 정보, 즉 그녀가 영원히 마음 속에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정보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직접 지적하신 예배 뿐만 아니라(4:23-24), 신학의 다른 면에 있어서는 율법적이고 부족했지만(4:20), ‘선지자에 대해서는 바른 성경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약 성경에 있는 예언은 은사중지론적 주장들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 행위는 은사중지론자들의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는 계시에 필적하거나 그것을 위협하지 않는다.  Wayne Grudem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예언의 은사에 대해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에서 예언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등하지 않으며 단지 성령께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것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보고였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한 마디로 오늘날 예언적 계시에 대해 hysterical한 병적인 증세를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예언의 은사가 Grudem의 주장대로 성령께서 자연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것을 인간의 언어로 보고하는 것이라면, Charles R. Swindoll이 신자와 상담하는 과정 중에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감동들을 계시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Christian Counseling To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계속 내면에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성경의 원리들과 진술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알지 못했을 어떤 설명들 가운데 하나를 떠오르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말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계시하신다. 따라서 그것들이 계시될 때 성령은 그 계시들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보장한다

내 생각으로는 Swindoll은 권위에 있어 기록된 말씀이 동등한 진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보다는 성령께서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을 인간의 말로 전한다는 보다 덜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  분별이 필요하지만(고전 14:28), 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들, 성경의 진술들과 원리들(14:26), 그리고 이해들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 은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문제 삼는 바리새적 비판의 영을 소유한 무경험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비판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신앙의 유비(analogy of faith) 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성령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은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어떤 복음주의 교파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보다 넓은 신학적인 전통의 맥락에서 우리의 차이점들을 서로 인정하고 보다 유화적으로 그것은 차이일 뿐이며 그 차이를 용납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틀렸거나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성경의 주된 속성인 권위’, ‘명료성’, ‘필요성’, ‘충분성’, 이 네 가지 완전한 속성은 불가분리적이고 상호 규정적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불안전한 신학적 범주 속에 집어 넣으려는 잘못된 전통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신컨대 은사적인 요소을 걸러내는 역활만하는 신학적인 체계를 사용해서는 성경의 권위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고찰이다.  아직도 누군가 성경 외에 초자연적인 발화의 은사(예언, 방언, 방언통역)을 인정하고 환영하면 이것이 성경을 필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교회의 덕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듣보잡’ 같은 신학적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분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나아가 어떤 특정 신학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기 위해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 3:14-16).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성경적 근거나 신학적 근거가 결여된 삐뚤어진 시각으로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목회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성령의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정의에 대한 지나친 열심은 언제나 악마로 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단순함과 미숙함, 그리고 모든 사소한 차이와 결점의 이면에서 고소할 조건(8:6)과 책 잡을 것(8:46)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사악하기 그지 없는 극단적 귀신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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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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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하고 싶은 이야기 2019. 3. 16. 17:34

리는 주보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신령과 진정한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묘지에서 드려지는 하관예배와 같은 분위기 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은사를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인데(고전 12:7),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은사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다면 교회에서 얻는 유익은 전무할 것이다.  우리가 모임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며( 34:3), 서로간의 상호 격려를 얻기 위한 것이다( 3:42).  따라서 교회는 성령을 환영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하며(고전 14:26),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만을 기념하는(고전 11:26), ‘죽은 예수 추모(?) 동호회’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 20:19-29),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28:20), 즉 예수의 영( 16:7), 성령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3:3). 

사도 바울이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로마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15:18).   고린도 신자들에게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한다(살전 1:5).  사데교회처럼 메마르고 죽은 교회( 3:1)가 아닌 이상 진리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는 분명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4:12).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두 개의 비정상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하나는 변태방언’, ‘좀비로 만드는 방언’, ‘무당 헛소리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방언기도에 대해 신비주의적 행동이 나타날 정도로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John Calvin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에 대해 병적인 증세를 보일 정도로 미치게 열광하는 것이다.  자세히 눈여겨 보면 이 두 가지는 열광(熱狂)하다 못해 거의 발광(發狂)하는 수준이다.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것보다(15:3-7), 어느 특정 신학이나 은사를 더 우선시 하며 흥분한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일들을 두루 경험했다.  두 가지 불, 곧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놀라운 임재인 거룩한 불(Holy Fire)과 아래로부터 오는 사탄의 역사를 따라 나타난 이상한 불(Strange Fire)을 모두 보았다(살후 2:9).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성령의 열매에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데(5:23), 절제가 결여된 상태에서 혼자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과대망상 속에 사는 신비주의적이며 감정적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말씀의 기초가 없거나 성숙하지 않는 상태에서 은사를 받았던지(11:29) 아니면 ‘거룩한 불’이 아닌 ‘이상한 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인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참된 성령의 역사를 평가절하 하거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기가 쉽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복음주의자이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7: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의 행실을 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는 주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면 안 되듯이(고전 11: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배워야 한다(살전 5:21).  하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내세워 상대방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기 위해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들어와 있다는 증거다(3:14-16).  이 신앙의 특징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26), 서로 물고 뜯고(5:15) 편가르기(19)와 논쟁(딤전 6:4), 그리고 싸움과 중상모략(4:31)을 일삼는 한 마디로 답이 없는 기레기같은 신앙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골치거리 중 하나이고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부류이기도 하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하려는 시도는 절대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한 것처럼(10:1-2), 명령받지 않는 일에는 상급은 없고 오직 무서운 심판만 있다(25:24-3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방언의 주요 기능은 개인의 경건 생활을 도와주는 유익한 은사다(고전 12:7).  방언은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위어(僞語)로 문장과 단어로 이해하는 우리의 이해 체계를 통해 걸러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언은 간구와 중보로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며(고전 14:28), 그분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합당한 방법이다(고전 14:16).  바울은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말한다(고전 14:16-18).  만약 방언이 필요하지 않거나 유익이 없다면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방언이 고넬료 집안의 사람( 10:44-46)들 같은 새 신자뿐만 아니라 성숙한 신자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의 은사로 인해 놀라운 축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은 의문에 여지가 없다. 

성경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 덕을 세운다고 말한다(고전 14:4).  기독교적 활동(예배, 찬양, 기도, 봉사, 성경공부, 전도)이 자기 교화(敎化)의 효과적인 수단인 것처럼, 방언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영적으로 바르게 세우는데 크게 유익하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기도 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방언기도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20).  사람마다 신앙의 성숙도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방언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유익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영으로’(15) 기도하고, ‘영으로’(16)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다.  에베소서 618절에서 그는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에베소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우리가 이해하는 말로 하는 기도와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모두 포함된다(고전 14:15).  여기서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을 언급하는 바울의 권면은 방언 기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언 기도를 포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경험한 바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누르고 있을 때, 축귀사역을 진행하고 있을 때, 성령 하나님은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방언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고린도전서 1419절의 말씀인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구절을 들어 반론을 제기한다.  이 말은 결코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고전 14:28), 방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14:39).  아이로니컬하게도 성령의 은사들을 오남용하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더 많은 은사를 갈망하고 사모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4:1, 39).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통역하는 자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가지 지침을 내려준다.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을 고려하면 바울은 집단적인 모임이 아닌 상황에서의 방언기도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이 통역되면 그것은 예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고전 14:5),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방언 말하기를 원했다(고전 14:5).  이 은사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척도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이다(7:16).  한 마디로 교회에서 덕을 세우는데 유익한가, 아닌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전 14:12).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 외국어인가?  나는 방언이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자기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분명히 이해되고 알아듣는 외국어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인가?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또한 방언이 인간의 언어라면 오순절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었다(2:8-14).  하지만 다국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항구도시였던 고린도에서 굳이 외국어를 주셔서 하나님께 이야기 하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그리고 외국어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떻게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더 나아가 알아듣는 외국어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왜 굳이 통역의 은사를 구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13).  결론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한 마디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는 증거다(고전 14:23). 

방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초대교회 때만 주어진 은사이거나 혹은 귀신에게 미혹당해 거짓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방언을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사람들 중에 성령이 주시는 방언을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을 받았다면 바리새인 같이 노골적으로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12:34).  자신은 오랫동안 방언기도를 했는데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다보니까 자신이 하던 방언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을 ‘개 짖는 소리’ 혹은 마귀의 주술’, ‘거짓 은사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목사도 있다.  나는 이 분들이 성령께서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스스로 방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방언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무경험자들의 공통점( 12:30)은 한결같이 빗나간 자기해석을 가지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인 성경을 사사로이 푸는데 있다(벧후 1:20).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해석하려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성경에 포함시키려는 주관주의와 싸워야 하는데 이들은 주관주의(subjectivism)에 굴복한 자들이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 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1:17) 라고 말한 것처럼 은사를 비판하거나 부정한다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 4:7)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과 같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주신 것이고(고전 12:7),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사모해야지(고전 14:1, 39), 결코 비판해서는 안 된다( 7:1).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고전 13:10) 이라는 구절은 신약의 완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온전한 것을 교회가 최종적으로 동의한 정경(Canon) 곧 성경이라고 본다.  나 역시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온전한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딤후 3:16).  성경의 정경은 닫혀 있다(22:18-19).  이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의도한 바는 그것이 아니다.  만약 온전한 것을 신약 정경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교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리면 신학적 강박장애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은사들을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시키거나( 2:17), 방언은 초대교회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전 13:8-12).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은사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4:12-15).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가 ‘사랑’이라는 동기에 의해 활성화될 때(고전 13), 교회의 유익을 준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지금도 방언에 대해 의심이 계속 일어나는가?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충동질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2:2).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의심을 가지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14:23).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지(3:1), 하나님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딤후 1:7).    

바울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고전 13:1)이라고 말한 것처럼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과 이웃(22:37-40)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것을 사용한다면 은사의 본래 목적에서 어긋날 수도 있다.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다른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혹감을 안겨줄 수 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절제와 통역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고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전 14:23).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겠지만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교도로 살아가던 시절에 받았던 사탄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방언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고전 12:2-3), 방언의 출처에 관계없이 무비판적으로 강조하거나 그것만을 가장 높은 은사로 여긴다면 그 사람 역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나는 방언을 바르게만 사용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은 덕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고전 14:4).  자기 교화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다.  비록 방언이 논쟁이 심한 은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방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딤전 4:1),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방언은 무당이 작두를 타면서 헛소리 하는 이상한 불인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방언의 은사가 우선적이거나 영성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것에만 몰두하거나 광적으로 집착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은사를 허락해 주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개인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이 소중한 은사가 내 기도생활에 무척 유익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배운 칼빈주의 신학은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오늘날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6:46),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3:7-10).  이들은 성령을 심히 대적하거나(12:22-37).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소모적 교리 논쟁을 일으킨다(8:6).  솔직히 우리는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각기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사시시대와 같다(21:25).  성경도 자기주관주의로 해석하는 시대다.  소경된 인도자인 이들이(23:16, 17, 19, 24, 26),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성경을 가지고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신학적 나팔을 계속 분다면 하나님은 종교성이 강하고 성경지식을 과신하는 이런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지 모른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말씀이 있다면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반복적으로 경고한 것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1:24, 26, 28).   지옥의 궁극적인 고통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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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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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치료하셨을 때, 가장 심하게 대적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선생 바리새인이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대놓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독설을 퍼부었다(12:22-24).  예수님도 이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인 것을 알고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책망하신다(12:34).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 당시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들만 거듭나지 못한 지옥의 자식인가?(23:33).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교인 하나만 생기면(23:15), 자신보다 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우맹이요 소경들(23:17)인 현대판 바리새인이라고 불리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8:44).  당시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3:10),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거짓을 일삼는 마귀의 하수인이며 신학의 암살자들이었다.

Calvin을 성령 신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Calvin만큼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푸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기독교강요』 1권에서는 성경을 버리고 계시를 좇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시킴이라는 제목으로 한 장을 썼다.  그런데 로마서126절에 대한 주석에서 예언의 이중적인 성격 즉, 예언적 성격과 해석적 성격을 언급하면서 예언적인 예언은 명백히 복음서가 기록되고 있던 동안에만 번성한 반면 해석적인 예언은 교회 안에서 지속되었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주석에서 단지 자취나 그림자 외에는 너무 오랫동안 교회에 존재하지 않아서 지금도 찾아야 할 은사와 직분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점을 불분명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필요가 요구할 때비상한 은사들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런 유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거나 일반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난독증에 걸리지 않은 이상 Calvin의 해석은 참으로 아리송하고 오락가락 하는 것 같다. 

그는 방언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나타냈다.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한 마디로 갈팡질팡 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Calvin의 계승자들인 세계 3대 개혁주의 신학자 Abraham KuyperHerman Bavinck, 그리고 Benjamin B. Warfield가 있다.  Warfield는 변증학을 버리고 성령의 증거를 더 신뢰하는 시대적 경향을 혐오했고, 신비주의와 은사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사람이다.  성경을 확고히 믿는 그는 시대의 오류와 싸웠고, Charles G. Finney 의 후기 사역 속에 나타난 극단주의와 피상적인 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광신주의의 확산을 막을 가르침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신칭의, 그리고 건전한 가르침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운 이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오늘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3명의 신학자 외에 정통 장로교의 주요 설립자인 John Gresham Machen의 탁월한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듯 수용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은사중지론을 교리로 바꿔버렸다.  은사중지론은 대부분 이들 개혁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나 역시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대표하는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은사중지론에 관한 한 이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지적인 깨달음에 지나치게 만족하면서 오직 성경 속의 초자연적인 기적들만을 기꺼이 수용한다.  다만 바리새인 같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계시를 통해 자신을 즉각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으신다고 확신있게 믿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삶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않는다.     

이신론자는 한 분 하나님을 믿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 칼빈주의자는 성경 속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  이들의 신학에는 하나님은 직접적인 초자연적인 방법을 오래 전에 중지하셨다(히 13:8).  새 언약 아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환상과 꿈과 예언은 이미 끝났다(2:17).  더 이상 기적이나 치유도 필요 없게 되었다(약 5:14-16).  고린도전서 1210-12절에서 설명하는 은사들에 대한 개념은 안중에도 없다(고전 13:10).  오직 질서의 하나님만 있지(고전 14:33),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없다(1:37).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고쳐서는 안 되는 것처럼(4:13), 이들에게 있어 지금도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 

오늘날 칼빈주의자들만큼 진리의 말씀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들만큼 입만 열면 Calvin들먹거리며 성경말씀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없다.  정말 궁금한 것은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면서 말씀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4:14).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  한 마디로 입으로만 주여 주여, 진리의 말씀을 외쳤지(6:46), 믿음은 개떡이다(2:26).   

오늘날 Calvin의 계승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조직 신학들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성령의 놀라운 권능을 덧입을 기회를 놓칠 것인가? 아니면 성령께서는 오늘날 그런 식으로 역사할 수 없어. 우리의 신학적인 범주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라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계속할 것인가?  기억하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신학이 허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교회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자신의 뜻대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 12:7, 11).  그 분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있어 인간이 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로마서 920절 말씀은 이럴때 사용하라고 쓰여진 구절이다.  나의 요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우리의 신학적 관점으로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을 살지 말자는 것이다.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자.  스데반이 오순절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유대인들 앞에서 증명할 수 있었는가?  공회 중에 모인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믿었다( 7:54-58).  그렇다면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 만난 것( 3:2)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 있었을까?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거나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들의 말을 믿거나 거절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다(고후 12:6).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은사(고전 12:7-11)를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성경적인 근거가 뚜렸하며(고전 14:26), 신뢰할 만한게 나타나는 모든 은사를 허용해야 한다(고전 14:39-40).  아마도 칼빈주의자는 종교적 자긍심에 사로 잡혀 참으로 겸손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로 겸손한 척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설()을 풀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주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적이며 건전하다고 여기는 신학적 논거들 때문에 하나님의 은사들 가운데 일부를 철회하기로 결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성령께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할례받지 못한 입으로 왈가왈부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 같은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12:34).  우리는 은사들이 성령의 현시로 묘사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2:7).  성령을 길들이려는 칼빈주의자들은 교리적 논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열과 편 가르기를 조장하면서 장광설들을 계속 늘어놓는다.  나는 오늘날 모든 지면을 통해 쓰여지는 언어상의 폭행들이 어떤  특정 신학을 사수하기 위한 선한 행위의 증거가 아니라 실제로 성령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일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신학적 논쟁을 하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사울(딤전 1:13)이 교회를 핍박할 때(9:1),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표적의 은사들이 1세기에 소멸되었지만 성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 특히 표적의 은사들은 내주하고 계신 성령의 현시라고 명확히 정의한다.  그것들은 교회에서의 자신의 주권을 확장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현존의 증거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영적 은사들을 제거하는 것만큼 똑같은 정도로 성령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명칭 가운데 한 가지가 바울이 말한 예수의 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6:7).  한 마디로 칼빈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은사중지론은 헛점이 많은 신학 체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적인 신학은 우물 안에 갇힌 한정된 신학이고, 초교파적인 신학은 풍성한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독선적인 신학이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닮아가는 일들을 상실하게 만든다.  성경말씀 그대로 인용한다면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회칠한 무덤같은 신학이다(23:27).

1세기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은 하속들에게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뺕는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7:48).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칼빈주의 신학을 떠나 오순절 신학을 받아들일 수 있어!”  물론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자도 성령의 존재를 남겨 놓는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한 한 가지 사역만을 하시는 분으로 제한되고 격하시킨다.  한 가지 사역이란 불충분한 예수님의 형상으로 목회자와 성도를 변화시키는 사역이다.  한 마디로 성품에 있어서만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함양하는 일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제한된 시각은 오로지 성령의 열매에만 집중하게 되므로(5:22-23),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을 형성시키는 일은 성령의 본질적이며 유일한 기능이 된다.  이것은 불안전하고 균형잡히지 않은 절름발이신학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주님을 닮는 것의 절반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칼빈주의 신학이 주요 초점을 성령의 열매에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참되고 지속적인 거룩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에베소서 413절의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모든 부문에 있어 복음주의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닮았는지를 설명해 주는 통계에 근거한 절망적인 보고를 읽은 적이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5:14), 불신자 이상으로 세상에 동화되어 있다.  빈혈에 걸린 것 같은 현대교회의 심각한 상황을 깨닫고 인정하는 어떤 목회자는 우리가 필요한 것은 보다 말씀에 입각한 강해설교와 칼빈주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한다.  복음주의 교회는 거룩하게도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며 전달하는데 있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않으려고 상당한 열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전 4:6).  그러나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면 진리를 전달하는 일이 삶을 전달하는 일로 이어지지 않을 뿐더러 구원파 같은 사이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낸다.  

진정으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목회자와 교회는 단지 성품에 있어서만 예수님을 닮는 일에 만족할 수 없다.  목회자와 성도는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한다(14:12).  참으로 우리가 그분의 능력 없이 주님의 성품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5:5).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은 애석하게 그런 희망에서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논쟁만 일으키는 박제(剝製) 신학으로 변하고 있다. 

나는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했지만 교수들로부터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이단들처럼 꼬투리를 잡아가며 논쟁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누가 사사건건 논쟁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가?(딤전 6:3-5).  물론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 겸손하고 성숙하며 존경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과 사랑과 남에 대한 배려를 배운 것이 아니라 어디서 못된 것(인신공격, 중상모략, 말바꾸기)들만을 잔뜩 배워 온 성숙하지 못한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목사들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권능을 덧입은 깨어 있는 목회자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만을 닮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 열망을 가진다.  이들에게 있어 무릎을 꿇고 나라와 민족(딤전 2:1-2)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은 있어도 변론과 언쟁할 시간은 없다.   

성령의 은사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 성공에 대한 설교를 하며 치유를 행하듯 속이면서 매스컴에 등장하는 이름난 목회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은사들은 예수님과 바울이 하나님 나라라고 선포한 거룩한 생기로 충만한 세계 속에서 말없이 주어진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이름 없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만약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사도들과 함께 소멸되었다면 우리는 이 사역의 상실을 무엇으로 대체하고 있는가?  보다 많은 교육과 세미나, 보다 많은 소통의 기술과 시장 분석, 보다 많은 설교의 기술과 시대의 흐름에 대한 고려, 무엇보다도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쏟아지는 보다 많은 선정적인 비판과 비난, 그리고 정죄와 편 가르기 등으로 대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  성령께서는 기름부으사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사명을 이루게 하시고(4:18), 인성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귀감으로서 주님은 명백히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철저히 성령을 의탁하셨다(5:17, 10:38).  만일 그것이 예수님께도 필수적이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14:12). 

천사가 타락하면 사탄이 되듯이(14:12-15, 28:13-17, 10:18, 12:9), 신학이 변질되면 교회가 타락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세기 종교 지도자들이 독선적이고 저질스러운 행태에서 보인 것처럼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해석학적 원리로 삼는 칼빈주의 신학이 아니다.  나의 변함 없는 생각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보다 많은 다스림과 그분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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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많은 교파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교파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성공회 등이 있다.  장로교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교파는 화합이 잘 되서인지 서너 개로 갈라진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유독 장로교만 수백 개로 갈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스코틀랜드 장로교나 미국 장로교는 300-400년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지 서너 개 교단으로 나누어졌지만, 거기에 비해 한국 장로교회는 지난 100년간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한국 장로 교회들을 갈라놓기로 작정하신 것인가? 아니면 목사들이 자신의 탐욕과 정욕에 이끌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다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인가?      

한국 장로교는 말로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인 신본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이들의 모습 속에서 인본주의와 처세술, 그리고 세력다툼과 이해관계, 더 나아가 목회자의 도덕성 문제에 있다.  교단 분열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겠지만,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신학적 견해 차이로 내세우는 Calvin의 사상과 교리가 가장 큰 문제로 작용했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이들은 신학적인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Calvin을 내세우는데, 마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모든 기준을 그가 한 말에 맞춘다.  이들의 전형적 사고방식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공장에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듯 오직 자신이 배운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만 성경을 해석한다.  다른 하나는 흑백 논리가 강해 항상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의 기질이 있다.  더 나아가 개인적 나르시즘으로 인해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고 가르친다고 확신한다.    

왜 사람들이 목사를 먹사라고 부르는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지, 교회가 분쟁과 분열 되고 갈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양심에 화인 맞는 목사들이 신학적 논쟁으로 뿌려 놓은 열매다.  이들은 이단 못지 않게 변론과 언쟁, 투기와 분쟁,  훼방과 악한 생각을 가지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다(딤후 6:4-5).  나는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잘 알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3:39-43).  장로교회가 수 백개로 분열된 이유는 바로 이런 목사들이 하라는 목회는 안하고 논쟁을 업()으로 삼고 편을 가르며, 거의 발광(發狂)에 가까운 기()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준수에 관심이 있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다.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며 싸웠다.  이렇게 모이기만 하면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4:7)고 일깨워 준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논쟁되어 온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정론이다.  신학자와 목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지를 보면 우리는 그들이 신학적 spectrum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핵심이 되는 조직 원리로 삼는 교리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무조건적 선택이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6:44, 고후 4:3-4, 2:1-3).  곧 하나님은 주권자이기 때문에 인간 구원에 있어 유일한 행위자이며(2:9), 그분은 구원받을 자와 유기될 자를 선택하고 예정하신다(9:11-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택자들의 미래 결정에 대해 지식을 근거로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3:48, 9:19-21).  한 마디로 구원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다(1:17).

칼빈주의자들은 Calvin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가르쳤는지에 대해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 교리는 하나님이 택함 받을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7:2, 6, 9, 24).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영원히 버림 받을 자들의 죄와 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하신다.  후대 칼빈주의자들은 Calvin이 제한속죄론을 믿었는지 혹은 일반속죄론을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성경의 증거를 따라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기독교강요』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방대한 책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는 사도 요한의 진술을 충분하게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을 상세하게 푸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Calvin은 이 주제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선택과 유기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다루는 과정에 있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일까?  그는 이 구절들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무시하고 지나갔다.  후택설 지지자의 한 사람인 Louis Berkhof 역시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을 한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주의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그 분의 사랑의 표현이다(9:13).  D. A. Carson은 『The Difficult Doctrine of the Love of God』에서 사랑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나누면서 요한복음 316절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선택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이사야서 43 1-4절과 에베소서 5 25-27절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반적인 사랑의 정의와는 다르게 오직 제한된 ‘특별하고 선택적이며 차별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Carson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은 특별하고 선택적이며 차별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천국으로, 다른 사람은 영원히 버림 받는 지옥으로 보내는데 있어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편견 없는 평등한 사랑에 대해 가르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6:32). 

나는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분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사랑하시는데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생각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5).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된 이들에게만 적용되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무한하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음이니라’(요일 4:10),  성경은 가족, 이웃,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한다(6:35, 19:19).  우리가 우리의 적들까지 사랑한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며(5:45),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 질것이라고 하셨다(5:48).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한적 선택(속죄)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을 미워하신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3:20).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이시라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데 실패한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을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일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 4:21).  한 그릇의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를 사랑했던 이삭이(25:26),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삭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인 것이다.  한 마디로 개혁주의 신학 안에는 논리적 모순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랑에 비추어 보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한 타락 전 선택론(전택설)은 엄격하다 못해 ‘살벌하고 비참한 교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해 신학적 오류가 많은 이중예정론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Dave Hunt가 말한 것처럼 칼빈주의의 잘못된 해석들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Calvin의 색안경을 통해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의미에서의 배타성은 깨기 어려운 전통인 동시에 쓸데없는 논쟁거리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교리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들으면 불쾌할 수 있겠지만, 인문주의 역사가인 Will Durant는 『The Reform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에서 기독교강요에 대해 말하기를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며 영향력 있는 굉장한 책”이다  하지만 그의 예정교리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불합리한 분으로 만들고 그분을 욕되게 만듦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정론은 신학적 교조주의로 인해 수 세기 동안 기독교 복음의 기초적인 교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날카로운 논쟁과 그리스도의 몸에 분열을 낳았다.  나는 인류를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로 나누는 좁고 배타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유린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과 관련된 그 분의 성품 및 활동에 대한 통합적 이야기다.  특정한 교리들은 성경의 다른 요소들로부터 추출되고 서로 기여하면서 연결된다.  이 말은 하나의 교리가 다른 교리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신학은 잘게 쪼개어 파편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악하게도 빗나간 해석이 온전한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 온 예정론 교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신학적 오류가 많은 교리다.  분명 성경은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반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분의 보편적인 뜻도 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진리 모두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나아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우리는 자유롭고 책임있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으로 상호 모순되지 않는 양립 가능한 진리다.  이 두 진리를 다 인정해야 성경적이다. 

Jonathan Edwards는 『The Freedom of the Will』에서 자유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경향성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각 사람은 자신의 요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각자에게 있다.  즉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각자의 삶에서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사도 베드로도 ‘오직 주께서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16).   

 이상 중세시대 때처럼 ‘똥파리’ 신학 문제로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였던 것 같이, 오늘날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밖으로는 다른 교단을 향해 ‘우리 대 그()들’이라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선택과 유기’ 문제로 소모적 교리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14:3).  결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1:3).  그리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Euclid of Alexandria가 제자에게 한 말을 남기고 싶다.  There is no other Royal path which leads to geometry  이 말은 기하학을 잘할 수 있는 왕도(王道)가 없다는 뜻이다.  나 역시 신학(神學)에는 왕도가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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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하고 싶은 이야기 2019. 2. 16. 19:04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웠던 중세 시대에는 마녀 사냥으로 인한 끝없는 공포와 이교에 대한 편협성, 그리고 성적 타락과 대량 학살로 인한 빈곤과 역병으로 문화적으로 쇠퇴한 시대다.  이 시대만큼은 모든 학문이 살벌한 신학 아래 있었다.  교회의 권위가 인간의 이성을 속박하고 학자들이 논쟁만 일으키는 신학 연구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당시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이 일을 가지고 한 부류는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했고 다른 한 부류는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했다.  (?)파리신학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로 갈라져 머리가 터지도록 치열하게 논쟁을 일삼았다.  중세 신학자들이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를 두고서 궤변적 논리로 싸웠다.    

Lloyd Jones는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가 완벽한 정통적이면서도 메마르고 죽어 있는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2:24), 이 메마르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관심이 없고( 16:15), 로마 교인들이 먹는 문제로 싸우는 듯이, 오늘날도 유독 장로교 신학자와 목사들은 어떤 신학적 해석의 차이를 두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  그 많은 논쟁들 중 하나가 선택과 유기, 즉 예정론에 대한 것이다.    

예정론(predestination)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뜨거운 논쟁을 일으켜 온 교리다.  과연 하나님의 주권적 선결정,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인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만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을 가져야 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제한을 받는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구원이 무엇인가 기여했다고 자랑할 수 없도록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품인가?”        

칼빈주의자들이 무조건적 선택 교리의 입증을 위해 항상 제시하는 성경의 핵심 본문은 에베소서 13-6절 말씀이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세 가지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일부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4).  다른 하나는 이렇게 선택받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예정되어 있다(5).  그리고 예정과 선택은 은혜와 영광 속에서만 찬미해야 한다(6).  이 구절만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하시고 선택하시며 성취하신다.  선택과 예정에 관련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때 행하시는 어떤 일도 인간의 의지와 관련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 선택받은 자인지 선택받지 않은 자인지 알 수 없고,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 부르심을 입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들의 영역이 아닌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이다(2:9).  다만 각 개인이 자신을 시험하고 믿음으로 확증하는 가운데 스스로 선택받은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후 13:5).  하지만 이런 믿음조차도 백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17:9).  나는 신학에 있어서는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해 주는 것을 넘어서 논리적인 추론을 하려는 것은 단지 사변(思辨) 정도로 밖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예정론에 대한 문제는 사변적으로 접근할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예정이나 선택을 믿는 사람이 있고, 또한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궁금한 것은 예정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가?  내가 한 가지 만큼 확신하는 것은 예정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누구든지 이 교리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3:16, 10:9-10, 13).  만약 이 점을 놓치게 되면 신학적으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형제들에게 예정론은 두려운 교리가 되고 극단적인 입장에 빠지게 된다.  쉽게 말해 수 백개의 교단으로 갈라질 만큼 서로 물고 뜯고 싸움박질을 일삼는 장로교단에만 구원이 있고 나머지 모든 교단들, 즉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나사렛 등 교단에는 구원이 없다는 종교적 테러범 같은 광기 어린 살인적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셨다는 예정론을 믿는다.  조금 더 선택교리에 배타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거나, 요한일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구절을 무시하는 사람은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쉽게 받아들인다.  반면에 John Wesley의 입장을 정통으로 받아들인 감리교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누구를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닌 역사 속에서 주님을 받아들이고 믿을 사람이 누구인가를 미리 아시고, 그 예지에 근거해서 그 사람을 택했다는 예지예정론을 믿는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장로교는 성경적이고 감리교는 이단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복음적 신앙고백을 인정하는 두 교단 모두 성경적이다. 

앞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개혁주의 신학 체계에서 예정론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예정이 칼빈신학의 전부가 아닌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택 교리를 이해하는 다양성이 개혁주의 신학 내부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정론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가진 다른 교단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의 신학적 논의는 결코 적(이단/사이비)들 사이의 통렬한 매도(罵倒)가 아닌 같은 지체들 간의 입장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뜨거운 논쟁을 일으켜 온 예정론 안에서도 몇 가지 모델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 Calvin이 확립하고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정립한 소위 이중예정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인류의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일부를 버리시기로 예정하셨다.  Calvin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다른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으로 예정한다는 자신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작정 교리는 잔인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Clark Pinnock은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지지하고 변증해야 할 신학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위대한 악의 조성자가 되기 때문이다.  Dave Hunt는 『What Love Is This? Calvinism's Misrepresentation of God』에서 칼빈주의의 잘못된 해석은 무신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는가?”(요일 4:8)라고 반문한다.  John Wesley1739  429일에 로마서 832절 말씀을 가지고 ‘Free Grace’이란 제목으로, 그의 전체 설교 가운데 한 획을 긋는 은혜로운 설교를 하고 나서 Calvin 잔인한 작정 교리를 공식적으로 반대한다고 외쳤다.  이들에게 있어 예정론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살벌한 공포로 대체시키는 교리다.      

이러한 엄격한 의미의 예정론은 후대에 와서 Supralapsarianism 의 입장, 즉 전택설로 확립되었다.  전택설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Theodore Beza, Abraham Kuype, Herman Bavinck, Westminster 총회의 초대의장 William Twisse, 같은 이들을 들 수 있다.  타락 전 선택론이 주류였던 16세기 후반 Leiden University의 교수 Jacob Arminius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전택설에 반기를 들면서 5개조의 항론을 제기한다.  자유의지/인간의 능력, 조건적 선택, 보편적 구속/일반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 은혜로부터의 타락, 이 항론의 핵심은 한 마디로 타락 전 선택론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전택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를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예지는 구원받을 자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이며 선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8:29, 벧전 1:1-2).

같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Calvin을 전택설주의자가 아닌 후택설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아르미니우스주의 일부 입장을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예지), 그것(악한 일에 대한 계획)을 허용하시기로 했다는 허용적 작정론,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동적(能動的) 선택과 수동적(受動的) 유기 사이의 비대칭(Asymmetric) 관계를 강조하는 타락 후 선택론, 즉 후택설(Infralapsarianism)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저명한 신학자들 중에 Charles Hodge, Louis Berkhof, 고대의 Augustine도 후택설자로 분류할 수 있다.  이 후택설 교리를 받아들이는 학자들 중에 제한속죄를 수용하는 파와 거부하는 파로 다시 갈라진다.  이들은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4개는 받아들이는 일명 ‘four point’ 칼빈주의자로 불리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침례교 조직신학자인 온건 칼빈주의자 Millard J. Erickson이다.  그는 이중예정론을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다루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교리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 계획의 불변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타락 전 선택론(전택설)자들은 예지와 예정을 동일시 하는 예정 유일론을 주창한다.  전택설자인 Herman Bavinck는 『The Doctrine of God』에서 하나님의 예지는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그 대상을 예지한다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예지는 예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칼빈주의 교리는 사실상 예지가 아니라 예정에 대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이들에게 있어 예지는 예정이다.  반면 타락 후 선택론(후택설)자들은 예지와 예정을 구분하지만, 이 둘이 함께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서 존중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효적 작정으로 모든 사건에 대한 계획, 즉 하나님의 적극적인 면으로 사물의 창조와 보존과 통치 등 목적적 의지인 효과적 사역이 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소극적인 면으로 허용적 의지인 악한 일, 즉 인간의 범죄의 허용과 사탄과 악의 활동을 허락하는 허용적 작정이 있다.  악한 일에 대해서 유효적 작정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악의 조성자가 되신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Louis Berkhof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예정하시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로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계의 입장은 어떠한가?  한국 장로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신조문서들,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The Westminster Standards)은 후택설 교리를 함의하고 있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Westminster 회의를 주관한 초대의장 William Twisse는 전택설자였다.  이러한 다양한 모델들 외에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꼽히는 Karl Barth의 선택론과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결합시킨 아미랄두스(Amiraldus)가 있다.  이처럼 예정론에 대해 다양한 모델들이 있다는 것은 이 교리가 그만큼 모순이 많고 난해한 문제인 것을 말해준다.  칼빈주의 내에 존재하는 전택설과 후택설 간의 논쟁은 지금까지도 속시원하게 해결된 적이 없다.  한 마디로 없어져야 할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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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이것만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질문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교리 체계 속에서 박사과정 교육을 받았다.  은사중지론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인지되는 발현을 증명하는 영적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들만 연관되어 있으며, 마지막 사도인 요한과 더불어 심지어 그가 죽기 전 주후 90년 경에 이미 소멸되었다고 믿는다.   은사중지론에 따르면 초자연적인 표적의 은사들은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  또는 주후 70년경 유대인의 불신앙의 근거지인 예루살렘이 로마 장군 Titus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필요했다고 한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 중에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실 수 있으며 이따금 그렇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병 고치는 은사는 더 이상 교회에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한때 은사중지론적 입장에 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이 교리의 신학적 원리나 특정한 본문에 기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가 성경시대에 조차 관습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구속사에서 중대한 계시적 활동의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John F. MacArthur가 『Charismatic Chaos』에서 노골적으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주장한 것처럼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즉 세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논리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자신이 영적 체험이 없는 메마른 상태에서 수많은 난제들을 가진 무경험자들의 논리를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한 마디로 표적과 기사에 대한 욕구는 죄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James Montgomery Boice를 포함해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과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에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또한 신비주의자나 주정주의(主情主義)에 빠져 통제력을 잃는 광신주의(狂信主義)로 평가받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놓지 못할 경우 그것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 내가 소속된 교단과 주변에 많은 동료 목회자들에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왕따당할지 모른는다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교육과 나를 가르쳐 주신 정통 Calvinism 교수들을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은사중지론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은사주의적 성향이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은 광범위한 주경적인 재고뿐만 아니라 진지한 목회적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지닌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성경해석을 존중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이들의 본문에 대한 접근 방식을 의심하게 되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들이 진지한 주경적인 연구보다 쓸데없는 성령에 대한 두려움, 즉 성령공포(?)을 더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연구와 목회적 분별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솔직 담백하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약 영적 은사들에 관한 주요 성경 본문들에 대한 주의 깊은 재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은사지속론적인 복음주의가 옳다는 확고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물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가운데 바리새인 같이 은사중지론자로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마 12:22-37). 

나는 개혁주의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은사지속론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들이 나를 은사에 대해 MacArthur가 정의한 성령체험을 유난히 강조하거나 오순절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나는 은사중지론적 견해가 교회에서 행하는 성령 하나님의 잠재 능력을 축소시킨다고 믿는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제한하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은 영혼의 정관수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청승맞게 드려지는 장례식 같은 예배이지만 성령께서는 그들 가운데 인지되고, 그 예배를 통해 충만히 채워달라는 간구를 들으시며, 기록된 계시 즉 성경의 근본적인 출처로서 존경을 받으신다.  사실 은사중지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의 지속성을 제외하고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인정한다.  그 지속성이란 점은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간단한 문제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정관수술 역시 간단한 수술이지만 그 파급 효과는 크다.

성경을  통해 초대 교회에 분명히 나타났던 능력과 초자연적인 은사들에 대해 읽고 들었지만, 은사중지론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그것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사람들은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그와 동일한 실제들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평신도보다 목회자가 더 갈급해 할 것이다.  이런 교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 속에서 초자연적이며 특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길 바라는 사람들의 깊은 갈망을 둔화시킬 수는 있지만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조차 바리새인 같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열심히 가르친다(12:22-37).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들은 지식적으로는 충성스럽게 그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현존의 실제를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기를 은밀히 갈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왜 사도들과 초대 교회에만 주어지고 오늘날에는 주어지지 않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잃어버린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 속에 표적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 예언적 계시, 치유, 방언,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가질 필요가 없다. 초대 교회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삶의 상태와 교회의 낮은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들도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탄의 현혹(6:10-18)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3:9), 그리고 타락한 세상 체제의 냉혹한 파괴(2:2)와 맞서 싸워야 한다.  분명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손에 완성된 성경이 있는 동안에도 교회가 모든 면에서 세상을 닮아가며 쇠약해졌음을 본다.  마태복음의 글을 인용한다면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고있다(5:13).  그런데도 유감스럽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6:3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은사중지론자들은 그런 성령을 소유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사람들은 성령께서 1세기 때처럼 완전하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배운다.       

Dallas Willard는 성경의 정경을 제외한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목회적인 관점에서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라고 확신시키는 것이다  독단적인 논리와 특정 신학에 발목 잡혀 있는 균형 잡히지 않은 목회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우리는 목회적으로 비참한 결과들에 직면하지 않으면서 교단 신학이라는 명칭 아래 오늘날 단지 몇 가지 은사들은 유효하지 않다는 식으로 성령의 사역을 조금이라도 억제시킬 수는 없다.

은사중지론적 견해를 가진 목회자들은 은사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이 성령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딤후 1:7)라는 구절을 망각 속에 묻혀 버린 채 의심의 눈초리(7:22)로 두려워하는 논거들만을 말한다.  그것은 귀신의 장난이다” “무속인들의 무당 신내림 현상과 같다” “변태 방언이야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은사지속론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이 은사중지론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처럼 이상한 눈빛을 가진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도취들만을 추구하거나 귀신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조금 더 열정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령충만한 하나님의 자녀일 뿐이다.

은사중지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왜 오늘날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주거나 그것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이 확실한 진리를 게가 거품을 물듯이 거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질문들은 분열과 의심을 일으키는 두려움의 증상이다.  이러한 의심을 일으키는 두려움은 Dallas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이었던 Charles SwindollChristianity Today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볼 수 있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가 언제가는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형제들과 교류를 할까요?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저서 『Flying Closer to the Flame』를 읽어본 사람은 성령에 대한 나의 견해가 완화 되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학교가 부지중의 두려움 (오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통제를 벗어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교리적 차별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견지에서 움직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허용했던 것보다 폭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이런 지각있는 목회적 반응을 보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두려움이 없는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책을 쓴 바 있는 Charles Stanley 역시 『The Wonderful Spirit-Filled Life』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주님께 맡긴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기꺼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를 두려워하거나 위협받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협을 느끼시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생명의 보좌 위에 주님으로서 앉아 계실 때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결코 성부의 뜻에 위협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모든 은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은사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고전 12:7).  그리고 모든 은사들의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다(4:13).  그것은 성령께서 인간의 삶 속에 자신의 열매를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때때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발현하실 때 더 많이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초자연적인 발현들을 부인한다면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고전 12:7), 그 은사들의 목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방해하고(4:11-16), 십자가의 원수(3:19)로 최악의 경우엔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노골적으로 성령을 대적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12:31-32).

은사중지론자들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자유 가운데 소위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새 언약 아래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예언(2, 2)과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14-17), 그리고 사도행전과 신약 서신들의 증거와 똑같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역사하고 계신다(13:8).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닐 뿐더러(고전 14:33), 질서있게 행하신다(고전 14:40).  하지만 우리의 세밀한 신학적인 차별성에 있어서는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시지 않는다(행 11:5, 고후 12:4).  예수님은 신학자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3:8).  그 누구도 야바이(やばい) 같은 특정 신학으로 바람을 통제하거나 그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분의 활동 영역의 한계를 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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