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 중에 Jonathan Edwards와 Lloyd Jones를 폄하하고 이단이라고 서슴지 않게 비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듯이 이 두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이 이단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짜깁기 신학’을 가진 이단사냥꾼들이 이단으로 몰아간 것뿐이다.  만약 그들이 이단이라면, Augustine, Luther, Calvin, 바울, 심지어 예수님도 ‘이단의 괴수’라고 믿는다(행 24:5).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단이 아닌 놈이 이단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Jonathan Edwards와 Lloyd Jones의 발꼽에 낀 때만치만 목회를 해보라는 것이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마 7:3), 신학적 ‘갑질’을 일삼는 목사들은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한다.  목회에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지 부끄럽지도 않는가?  정말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개나 소나 대통령 되고, 영어를 못해도 미국에서 신학 Ph. D를 공부하는 시대다.  이게 실화인가?    

Edwards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색가 중의 한 사람이며, 대각성 운동의 옹호자이고 종교적 체험에 탁월한 신학자였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하여 그보다 더 자세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쓴 사람은 없다.  그는 기름부음에 대해 『신앙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 비둘기는 온유, 무해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탁월한 상징이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요일 2:20, 27)”  그러면서 중요한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것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그 옷깃까지 내림과 같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기름부으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목사에게는 Edwards의 주장이 더러운 하이에나처럼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는다.  흠이 많고 깨어진 그릇들을 들어 사용하신다(고전 1:26-29).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을 생각해 보라.  이들 중에 흠이 없는 사람이 있는지 말이다(롬 3:9).  흠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리저리 다 쓰신다.  따라서 한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Edwards에 대해서는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하지, 마귀 새끼처럼 무엇인가 흠집을 잡으려고 잠꼬대 같은 헛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요 8:6).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한 번만 받으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Edwards와 Lloyd Jones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여기서 나는 Andrew Murray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는 『The Spirit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가 성령을 한번 받았다 해서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는 예수의 귀한 말씀으로부터 이제 벗어났다고 느끼고, 이 으뜸가는 복을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없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날마다 필요하듯이 그 복도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신 분을 통해 아버지와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딱 한 번 이루어진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날마다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Murray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해 가까스로 조금 아는 것과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충만하게 계시하시는 사이에 있는 차이는 무지나 혹은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은 성령을 쪼개어 나눈다는 의미로 신자들에게 그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다.  또한 그가 한 번 주심으로 더 이상 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더 많은 것을 간구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전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어떻게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Murray는 다시 대답한다.  “허파는 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매 순간마다 새로운 공급을 요구한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미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성령은 충만히 내주 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와 우리에게 더욱더 충만하게 유입되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고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성령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또 다른 극단에 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Ernest Boys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성령을 더 많이 소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Murray는 “왜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분의 역사가 제한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재차 대답한다.  “성령의 증언을 분간하는 데에 교회가 그토록 많은 어려움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내주 하시는 교사로서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말 한마디를 남긴다.  “오순절의 교훈은 모든 시대에 유효하다”  

만약 EdwardsMurray 말이 사실이라면 목사들 중에 이러한 기름부으심을 무당이 신내림 받는 것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보다 성령을 대적하는 일은 없다( 3:28-30).  분명 이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가짜다.  기름부으심을 무당 신내림으로 치부하는 자들과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나는 Edwards와 Murray 편에 서고 싶다.  기름부으심을 전혀 모르는 골빈 목사들 부류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일절 없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지나간 과거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 때 나도 그런 부류에 속한 목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령의 기름부으심, 즉 이들이 바리새인처럼 거침없이 내뱉는 ‘무당 신내림’(마 12:24) 받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사모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변함없다.   

오래전 J. I. Packer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의 희생자’이며 수혜자라고 말했다.  오늘날 귀신들의 역사가 많아서인지 아니면 박제화된 신학과 죽은 전통에 얽매여서인지 신자들 중에 쓸데없는 ‘성령 공포증(?)’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Lloyd Jones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히스테리적인 발작 증상, 혹은 귀신의 역사로 돌려버리는 것은 신성 모독하는 죄라고 말한다(마 12:22-37).  그는 오늘날 교회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배제시키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기름부음에 대해 “성령으로 흠뻑 젖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John Stott 역시 이 기름부음에 대해 William Temple의 말을 인용해서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인한 생수의 강”으로 묘사했다.  문제는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목사들이, 이런 성령의 성스러운 영향력을 귀신의 일로 치부해 버린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고 있는가?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리니,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는’ 시대다(행 2:17).  여기서 예언, 환상, 꿈은 성령 사역의 소산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배울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행 17:11).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고 …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한다(살전 5:19-21).  무조건 대적하지 말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한 후(고전 14:29) 참된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사역을 해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하는 시대다(눅 11:14-20). 더 큰 문제는 목사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하지 않고 자신의 신학적 편견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모든 것을 다 ‘도매금’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Edwards는 경고성 발언을 한다.  “성령께서 평소와 같지 않게 많이 부어지고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과 미적지근함과 위선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책망되었을 때가 바로 성령훼방 죄가 나타나기 쉬운 때이다. 악의를 가지고 이러한 역사를 대적하고 책망하며 그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 위해서는 다음 한 가지 요소만 더 갖추면 될 것이다. 그것은 내적인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게 그런 짓을 계속하는 것이다”  

나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고전 6:19)은 성령을 대적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말의 의미는 양심에 화인에 맞지 않고서는 성령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딤전 4:2).  독사의 새끼(마 23:33)들,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마귀의 자식들이 이 짓을 한다(요 8:44).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마 12:22-37).  그렇다면 오늘날 누가 성령을 대적하고 ‘은혜의 성령을 모독하는가?’(히 10:29).  주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이 없는 현대판 바리새인들,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한번 생각해 보았다.  만약 누군가가 이사야처럼 홀떡 벗은 몸을 가지고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증거 한다면 오늘날 교인들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하는 것 말이다(사 20:1-6).  분명 교회 안의 묵은닭(?)들은 난리부르스 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환장 파티, 마녀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을 알지 못하는 목사들은 ‘기름부으심’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이단, 혹은 신기를 부르는 기름부음이라는 말 같지 않는 소리로 떠들어 댄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가오겠지만 그들이 마녀 사냥식 이단몰이를 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확신할 것이다(요 16:2).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솔직히 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거나, 스테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행 7:54-60), 먼저 나 자신이 쪽팔려서 메시지를 증거 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목회사역.  하루도 아닌 3년 동안 예언적 행동, ‘알몸 시위 사역을 한 이사야가 정말 존경스럽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지도자, 즉 목사를 통해 시작되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져본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영적 소경인 목사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허락해 주신다면(엡 1:17),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Bill Hull과 같은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깨달은 부끄러운 사실은 목사인 내가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성령의 임재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들 앞에 목회자로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위선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해 봐서 아는데, 모른다고 하면 정말 쪽팔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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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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