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거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마 16:17).  예를 들어 “시저가 주다”라고 말하도록 요청받는 시대에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고전 12:3).  여기서 “예수가 주(主)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고백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애주의나 놀라운 표적과 기사 등의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고백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의 독특한 신성을 믿지만(요 5:58), 성부와의 동질성과 동일 영원성 및 성육신을 믿지 않는다면(요 10:30, 1:14), 그는 신자도 아니고 성령은 그 속에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세에 주의해야 할 부분은(마 7:21-23, 24:23),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일(막 16:17-18)을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행 16:16),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살후 2:9).  사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마다 마귀도 기회를 노려 가능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무산시키려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모조품을 제시하려고 애쓸 것이다(고후 11:1-3, 13-15).

Lloyd Jones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성령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소멸의 위험과 다른 하나는 무작정 수용하는 것으로 성령을 소멸할까 두려워 영적인 분별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부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현상들을 장려하거나 추구해서도 안 된다. 나는 그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나왔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성의 연약성과 우리 육체의 체질이 약하기 때문에 혼합되기 쉬우며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심리적인 면에서 부분적으로는 마귀의 활동 결과로써 함께 섞이기 쉽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일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신약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언제나 다른 세력들이 개입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거짓된 것을 떼어내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각오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술책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물리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때마다 무조건 마귀의 자식인 바리새인들(요 8:44)처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하지 말고(마 12:22-37),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후 5:19-22).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싸잡아 비판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바리새인 가마리엘처럼 말이다(행 5:38-39).    

정신과 의사 제3 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역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표적들 가운데에는 변태적인 심리 혹은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표적들은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고 계시다는 징표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쓰러지고 진동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아니라면 성령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실 것이고, 반면에 쓰러지고 진동하는 경험이 없어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열매이다”  

이 말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자가 경건하거나 모든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열매를 보아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듯이 쓰러진다든지 몸이 진동한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보다는 그 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마 7:19-20).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임재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에서 체험의 결과와 열매에 대해 자신의 아내 Sarah Edwards에 대해 말했듯이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생활 속에 그분의 영광과 열매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13:1).   

Edwards도 무엇이 성령의 진짜 역사하심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판단의 표준들을 설명하였다.  그의 첫 번째 문제는 그의 집회 기간 동안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으로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떨거나 신음을 하거나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몸의 고통을 느끼거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동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영향력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감동에 의해서 어느 쪽이든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규칙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표현 자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이러한 표현들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표현들이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에 대한 정당한 반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진짜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가려내야 한다(요일 4:1).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있어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이 되는 기준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즉 성경에 무식하리만큼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주관주의적 ‘자기 해석’이나 앞뒤가 꽉 막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독단적인 주장’, 그리고 쓸모없고 죽어 있는 ‘교회 전통’과 어떤 조잡스러운 ‘신학적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행위가 성서적이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Edwards는 성경이 어느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을 결정하기 위한 유일한 테스트는 그 역사하심과 그로 인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느냐는 것으로 판단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참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도록 주신 테스트이다.  성경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7:18-20).  간추려 말한다면 교회나 집회에서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편견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행 10:9-16).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날마다 아내를 핍박하던 불신자 남편이 어떤 계기로 인해 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통해 놀라운 체험, 즉 몸을 떨고 쓰러지거나 비명소리를 질렸다고 가정해 볼 때, 아니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면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못해 그러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수군거리며 멀리할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쉽게 판단을 내린다.  거의 심판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수준이다(약 4:11-12).  하지만 그 현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예전과 같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께서 그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막 5:1-20).  

요지가 무엇인가?  눈에 거슬리는 이상한 현상은 어떤 행위나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를 결정하는 성경적인 유일한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22-23).  Edwards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마디로 정리한다.  “과수원의 토양보다는 그 열매가 중요하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메마른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묵은닭(?)들보다는 한번 쓰러지고 난 후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녹내장 환자처럼 할례 받지 못한 눈을 가지고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삼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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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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