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ley Jebb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과 요한일서 4장 1절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No Laughing Matter』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성령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은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웃거나 몸을 흔들거나 넘어질 때 이들 위에 성령이 계신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며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받은 전체적인 인상은 이러한 현상이 주로 그 상황에서 자기 유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지 않았고 그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과 존경심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령을 소멸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토론토’ 현상도 이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1994년 초 Toronto Airport Church에서 일어난 현상을 두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쓴 글이다.  그는 John F. MacArthur의 책 『Charismatic Chaos』의 글을 인용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크게 체험하는 것은 어떤 굉장하고 이상한 기적이나 기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성령께서 다스리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현상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비성경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기괴하고 무질서한 것은 멀리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Jonathan Edwards의 시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고전 14:33, 40)에 대각성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못했다.  이들은 집회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반응들이 너무 이상하고 혼란스러움으로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절대 역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비난들은 Edwards 당시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행 2:6-13),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종류의 집회에로 돌려지고 있다.

Edward N. Gross는 『Miracles, Demons, and Spiritual Warfare』에서 Charles Hodge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감동을 종교적인 감동의 올바른 결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성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결과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설교에 따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집회 내에서의 울부짖음이나 기절이나 경련 혹은 헛소리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성경의 권위는 그러한 모든 혼란에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모든 것들이 점잖게 질서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올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스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나는 Charles Hodge의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한다(살전 5:21).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무질서 속에서 질서 있게 일을 행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창 11:9), 하나님의 역사가 때로는 조용하게(왕상 19:12), 때로는 강하게 나타나는 것(행 4:31)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성급하게 싸잡아 취급하는 잡설(雜說)에 가까운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이렇게 Gross가 인용한 Hodge의 말에 반하여 성경에는 육체의 감동이 성령에 대한 올바른 영향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부분이 많이 있다.  신구약 성경에 따르면 성령의 임재는 때때로 사람들 속에서 육체적 반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즉 눈물, 울부짖음, 경련, 황홀경, 몸의 힘이 빠짐, 흔들림과 떨림, 육체의 쓰러짐까지 다양할 수 있고, 이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연합하여 일어나는 극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현현(출 19:16-25), 천사의 출현(마 28:4), 귀로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음성(마 17:6-7), 환상들(단 10:7-11), 주님께 대한 반응들(요 18:6), 그리고 예수님의 출현을 통해 일어났는데(행 9:3-9),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다소 명백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경험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도의 차이가 아주 작지만 확실한 현상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하므로 떨며’라고 기록하고 있다(시 119:120).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을 기대하셨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렘 5:2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무형의 임재 속에서 떠는 것은 결코 육체적으로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사 66:2, 스 9:4).

더 나아가 우는 것도 하나님의 무형의 임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사실 이렇게 우는 것이 히스테리나 심리적인 속임수의 결과가 아닌 이유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그들이 자연스럽게 울었기 때문이다(느 8:8-10).  그리고 때로는 술 취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도하는 동안 한나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삼상 1:12-17).  입술만 움직일 뿐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은 한나의 이 같은 모습은 내적으로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여호와 앞에 해결해 보려는 진정한 경건의 표현이었다.  본문에는 ‘취한’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 왕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을 때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면서 취한 것 같이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삼상 19:23-24).  신약에 와서는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새 술에 취했다는 소리를 들었다(행 2:13).

무아지경 역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기도하는 기간 동안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후에 내가 예루살렘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무리들 앞에 스스로를 변호한 적이 있었다(행 22:17-18).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의 또 다른 범주는 날카로운 비명과 의식불명, 그리고 경련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갈 때 나타나는 반응들이 있다(막 1:21-28, 9:14-29).  이것에 대해 John Wimber는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과의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Gross는 또다시 Hodge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서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러한 구절은 대중 예배를 행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언급으로 질서와 엄숙함과 헌신적인 태도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금해야 한다. 큰 소리로 울부짖음과 경련은 이러한 것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목사가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으로 뛰어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없다면 그 신학은 메마른 박제(剝製) 신학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한 두 가지 상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교회는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은사적(고전 12:12-27),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행 7:51)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져 있어(행 9:18) ‘의견의 다양성’과 ‘시각의 다양성’, 그리고 ‘경험의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관종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무식하게 우겨 되는 교조주의적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특별히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을 자신이 배운 신학 안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자의적 해석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은 항상 옳고 상대방은 언제나 틀렸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확증편향에 의한 아전인수식 사고방식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것은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과대망상증 환자 같이 자기 생각 속에 그릇된 자부심을 고취시킨다.  더 무서운 증세는 피해망상과 피해의식이다.  자신만이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태가 좋지 않다.  이런 사람은 하루빨리 영적 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할 시급한 환자라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 배후가 귀신의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고, 의학적으로 말하면 조현병이 서서히 진행 중에 있다.  가장 큰 불행은 본인이 이것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제시한 대답은 이러한 무경험 비판자들, 특히 히스테리컬 한 병적 증세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는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큰 외적인 표현들을 회피하지 않도록 그들이 참석하고 있는 공적인 수단을 방해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내가 이것이 혼란스러움이나 불행한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비오기를 기도하기 위해서 들에 모였다가 소나기가 오면 그들의 행위를 멈추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명령이 주어지는 목적을 이룸으로써 중용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마귀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고 있는 동안에 땅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질서적이거나 경건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진실로 사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혼란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의 시작 무렵에 손을 자발적으로 흔들거나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떠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전증 환자이거나 파킨슨 병에 걸려 떠는 것인가?  절대 아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예배를 드린다(고전 14:26).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하는 진정한 육체의 표현들이 있는 곳에 진짜의 것을 모방한 자기 과시적인 가짜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고전 14:29).  보통 이런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이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아니다.  경험한 바로는 이들이 종종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좋은 신자들이다.  메마른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함 사람들이다.  John Wimber 말한다.  “20세기의 교회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는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이지, 인간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박스 안에 가두어 놓은 질서가 아니다”(사 55:9). 

Lloyd Jones 역시 모든 일은 질서 있게 해야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살전 5:19).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는 만일 우리가 실제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킨 정도까지 질서 있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점잖게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사용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실제적인 육체적 반응을 억제하려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불을 끄는 위험 속에 빠질 수 있다(살전 5:19).  만약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표현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도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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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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