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450건

  1. 2022.04.03 왕따 당하신 성령
  2. 2022.03.27 더 좋은 언약
  3. 2022.03.13 의(義)의 전가
  4. 2022.02.27 행위 언약의 유효성
  5. 2022.02.13 능동적 순종
  6. 2022.02.06 율법의 중요성
  7. 2022.01.23 행위 언약
  8. 2022.01.21 Martin Luther
  9. 2022.01.19 Jonathan Edwards
  10. 2022.01.16 John Gresham Machen
  11. 2022.01.14 환상 (幻像)
  12. 2022.01.12 염병 (染病)
  13. 2022.01.09 바울이 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14. 2022.01.07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신 (神)
  15. 2022.01.06 서원(誓願)의 종류
  16. 2021.12.26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17. 2021.12.25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18. 2021.12.23 일반계시와는 달리, 특별계시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19. 2021.12.22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죽은 성도의 부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일은 무엇인가?
  20. 2021.12.21 성경이란 무엇인가?
  21. 2021.12.19 노예에 대한 성경적 입장
  22. 2021.12.17 부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23. 2021.12.16 특별계시로 인하여 일반계시는 쓸모 없게 되는가?
  24. 2021.12.15 그리스도 재림 직후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를 다시 살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25. 2021.12.14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6. 2021.12.12 보혜사(保惠師)의 사역
  27. 2021.12.10 말세에 성도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신앙의 태도는 무엇인가?
  28. 2021.12.09 일반계시가 주어졌는데 특별계시가 왜 필요한가?
  29. 2021.12.08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바로 이어질 일이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는가?
  30. 2021.12.0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인간의 저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고전 4:6)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과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외에는 아무것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 기록된 말씀(히 1:1-2, 딤후 3:16)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감(벧후 1:21)을 통해 주신 귀중한 선물인 것만은 사실이다(약 1:17).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는 말씀이 단순히 기록된 말씀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아울러 문자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정체적인 관점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 13:8)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성경이 기록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요 10:27).  또한 그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처럼(창 17:1-2) 우리와도 똑같이 교제를 나누실 것이다(고후 13:13, 빌 12:1-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빌립(행 8:26-40)과 바울 같이(행 18:10-11) 주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혹은 베드로 같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행 1-18, 12:1-19),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느끼는 의구심과 주관성에 대한 염려는 사실상 성경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인간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계몽주의적인 형태의 기독교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바울의 삶과 사상에 나타난 성령 하나님의 중대한 역할에 대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나팔을 쉬지 않고 불어댔다.  일반적으로 신약 학자들, 특별히 개혁주의자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역할을 무시해온 것이 현실이다(마 12:22-37).  이들은 성령에 대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해 왔다.  마치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어떤 주장들을 내세웠다.  대부분 이런 좋지 못한 교만한 태도가 성령의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  거의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흐르는 적막함과 비슷하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었다(고전 14:33, 40).  이것은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끌어온 이미지에 근거한다(왕상 19:1-3).  그곳에서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도리어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도망자 엘리야를 찾아오셨다(왕상 19:11-13).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신약 성경에서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이를테면 바울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대목이다(갈 5:22-23).  그에 비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멋대로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고요하고 적막한 상태는 때때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으면 어지러움증이 생기듯이 영적인 빈혈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고자 시도해온 사실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입증된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기도해 보길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지 말이다. 혼자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중언부언하다가 관두기 쉽다(마 6:7).  영적 빈혈은 아무리 철분제(?)를 많이 복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배 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질부리고,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듯(약 5:17)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와 똑같이 약하고 상하기 쉬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다(창 1:27).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령에 대해서는 그들처럼 자신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타민족 교회와 다르게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없다.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예배가 있는지 모른다.  그 예배 속에는 우리의 신조(信條)와 찬송에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고(고후 13:13),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끔 성령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사실상 성령이 무시되어 왔다.  이들은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었고(엡 4:30), 심지어 성령을 소멸한 사람들도 있다(살전 5:19).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엡 4:30), 개인이나 목회 사역에 있어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눅 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요 3:1-11).  물론 십자가의 원수 같은 쓸데없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지만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같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고(행 2:14-42),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처럼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행 22:3), 이상하게도 진리의 성령(요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이들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난독증에 걸린 것인가?  분명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성령'(엡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원하신 성령(히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령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에서 나온 정신 나간 헛소리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성공을 거둔 비밀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중심을 둔 ‘복음’에 있었다(고전 15:1-6).  이것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보적인 성경 지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복음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지닌 문제는 성장 발육이 되다 만 것처럼 여기까지만 아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히 6:1-2).  이것은 너도나도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달랐다.  이들은 복음 플러스 자신들이 체험한 성령이 있었다.  성령 체험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력 있는 실체로 만들었고(행 3:1-10), 그로 인해 당시 문화 속에서 그들은 급진적인 대안이 되었다.  이러한 성령은 초대 교회의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임재였고(행 2:1-4), 그 능력은 열매(행 2:43-47)와 증거(행 4장) 및 은사들(행 5:12-16)과 모두 관계가 있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성령(마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한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 했다(눅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에 대해 말씀을 선포했고(행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고후 13:13), 이 '양자의 영'(롬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구약 성경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사 32:15, 겔 39:29), 선지자들 역시 정결하게 하는 불을 고대하였다(사 4:4, 말 3:2). 

사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란 열매(갈 5:22-23)와 은사 모두(고전 12-14장)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철저하게 중심에 서는 균형 잡힌 신앙의 삶이다.  나아가 신자가 경험할 수 있으며 능력을 부여하는 실체인 성령(눅 24:49)은 바울과 그의 교회 공동체에게는 신자의 모든 삶에서 시종일관 핵심 요소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롬 8:14)과 성장(롬 15:13, 엡 4:30),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3-11), 기도(롬 8:26-27), 증거(갈 4:6, 히 10:15-18)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이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치 있는 신학이란 스데반처럼 삶으로 전이된 성령이 충만한 신앙이다(행 7:55, 엡 5:18).  마른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죽은 학문이나 입만 살아 있는 메마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마 7:22, 눅 6:42).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1) 2022.05.01
메마른 복음  (0) 2022.04.17
Martin Luther  (0) 2022.01.21
Jonathan Edwards  (0) 2022.01.19
John Gresham Machen  (0) 2022.01.1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더 좋은 언약

행위 언약 2022. 3. 27. 18:59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해서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왜 한 부류는 인정하고 다른 한 부류는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왜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세대주의적(문자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언약 신학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집스럽게 장로교회 정치를 옹호하는 반면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회중교회적 형태를 완강하게 고집하며 옹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감히  묻고 싶다.  ‘꼰대’ 같은 교단 신학이 무엇인지, 왜 그리도 많은 의견과 주장이 존재하는지 말이다.      

성경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이견(異見)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끔찍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 3:16) 통일된 진리의 말씀이 과소평가돼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닌’ 것을 믿는다(벧후 1:20-21).  하지만 정경인 성경 66권이 글로 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신학적인 견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신학자의 말이 가장 성경적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는 책이라고 서로 나팔을 불어대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간혹 자신은 자기가 비평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중증 환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영적인 우월감, 혹은 관종에 가까운 교만한 비평을 밥먹듯이 하는 목사나 신학자들 말이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미덕(美德)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고집스러운 부정주의(negativism)는 자만심을 잘 자라게 하는 대단히 영양가 높은 음식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돼지가 ‘도살의 날’를 위해 교만을 살찌게 만든 것과 같다(약 5:5).  지금 이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형제를 향한 사랑과 용서이지 비평과 판단과 정죄, 더 나아가 논쟁을 통해 내 견해와 주장이 맞다는 얼빠진 소리를 하는 시대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이러한 몹쓸 병에 걸린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C. S. Lewis의 말을 인용하면 교만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전혀 모른다.  정신병원에 있는 조현병 환자가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헛소리 하는 것과 같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 앞에 스스로 겸손하지 않는다면, 이런 위험에서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혹은 성경을 해석하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마음에 심리적 동요가 일어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내면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배운 신학과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못하는 심각한 금단 현상이 나타난다.  증세가 조금 더 심각한 사람은 본인 스스로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뜻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석의’ 가 아닌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자신도 모르게 전통적인 해석에 성경의 권위를 이전시켜 해석한다.  이런 문제는 그 전통적인 해석에 맹목적일 정도로 확실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자기 입맛대로, 혹은 교주(?)가 시키는 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가령 성경을 해석하거나 석의할 때 그렇게 많은 함정들이 숨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내가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는 심적인 부담감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들을 신자들의 양심에 바리새인처럼 제멋대로 얹어 놓거나(마 15:1-6, 눅 11:52), 혹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양심에 찔리는 부담감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양심에 화인을 맞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그냥 넘어간다.  요지가 무엇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지와 무식 그리고 꼰대 같은 신학과 서튼 석의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피해를 입혔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선생들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인가?(약 3:1).  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마 23:15).

먼저 글(의(義)의 전가)에 이어 행위 언약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제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요구 조건, 즉 언약의 요구 사항들을 완전히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율법 순종이 아닌,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엡 2:15) 그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갈 3:13)을 통해 구원의 혜택을 값없이 누린다(엡 2:8).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교인들처럼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롬 10:2-3), 이는 자신을 구원의 소망에서 끊어 버리고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갈 3:10).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행 4:12)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여, 즉 우리의 공로와 성취에 근거해 나아가는 것이다.  불행히 이 방식은 율법의 기준을 이용하여 심판으로 이끌고 결국 정죄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율법 아래 놓는 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저주 아래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3:10).  한 마디로 율법은 구원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갈 2:16).  또한 그것은 저주를 돌이키게 할 수도 없다(롬 3:20-24).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지셨다(신 21:23).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부활도 같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즉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려’(갈 1: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요일 1:7).  다 끝난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죄 문제뿐 만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부활을 하셔야만 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를 넘어 부활이 완성이기 때문이다(롬 6:5-10, 8:11, 10:9, 고전 15:7, 21-22, 벧전 1:3-4).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고전 15:13),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고전 15:17) 있게 된다.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사역으로(히 9:22), 부활은 구속의 완성으로(고전 15장),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복음의 핵심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여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들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활도 똑같이 증거 하라는 것이다.    

A. A. Hodge는 행위 언약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어떤 의미에서 행위 언약은 완전히 철폐되었고,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 언약은 아담에 의해 깨뜨려졌으므로 그의 자연적 후손들 중의 한 사람도 그 조건들을 성취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그 조건들을 모두 성취하였으므로 구원은 이제 신앙의 조건 하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둘째 아담에 의해 성취된 행위 언약은 복음 하에서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변적 공의의 원리들에 기초되고 있으므로, 여전히 그리스도의 의에서 제공된 피난처로 피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얽매이고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자는 그 의로 살리라’(롬 10:5)와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법은 남아 있으며 또한 사람들의 불의의 결과로 그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성취할 수 없는 무능성의 결과로 그것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는 몽학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실패한 그 조건과 아담이 초래한 그 형벌을 동일하게 성취하셨으므로, 그는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 언약의 마침이 되셨다. 따라서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언약을 성취하고 그 약속된 보상을 받을 공로가 있는 자로 간주되고 취급되는 것이다’    

Hodge의 말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지금도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하고(갈 3:10),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 즉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영생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롬 10:5).  그 이유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롬 5:12)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롬 3:11-18)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는 율법(롬 4:15)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갈 2:16)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롬 3:28).  즉, 율법 아래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만(갈 5:4)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갈 5:18). 

따라서 행위 언약의 유효성은 부분적으로 지나간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이 언약의 완전한 순종 요구가 부분적으로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이 법적 요구를 완수하셨기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은 성도들은 이 언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한 마디로 불신자들에게 유효하지만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적으로 회개하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새 언약’(히 9:15) 혹은 ‘더 좋은(은혜) 언약’(히 8:6)에 속하게 됨으로 행위 언약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감당해 주셨다는 ‘수동적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 전체 즉, 율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응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 주실 뿐 아니라,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다는 ‘능동적 순종’.  이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고전적 입장에 있어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인정받는 충실하고 소중한 교리다.  물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적대적인 마음을 품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의 반쪽짜리 믿음을 존중한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주장만을 내세우지 말고 상대방의 견해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가운데 형제의 신앙과 신학을 존중해 주는 넓은 아량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단이 아닌 이상 말이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義)의 전가  (0) 2022.03.13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능동적 순종  (0) 2022.02.13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행위 언약  (0) 2022.01.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의(義)의 전가

행위 언약 2022. 3. 13. 17:59

Calvin은 칭의를 논할 때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죄 용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명인 십자가의 죽으심(수동적 순종)을 통해서(롬 5:8),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능동적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롬 5:19), 이 두 가지 순종을 구분은 했지만 결코 분리시키지 않았다.  Berkhof의 말을 빌리면 죄인이 의인으로 선포하는 칭의에서 “수동적 칭의는 능동적 칭의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십자가의 죽으심’과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능동적 순종 교리의 구성에 필요한 개념과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것’이 수동적 순종이라면, ‘의를 전가하는 것’은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글(능동적 순종)에서 밝혔듯이 행위 언약의 유효성은 여러 가지 주요한 일면에서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히 4:15) 행위의 언약을 완벽하게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행위 언약을 완전하게 지키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의의 전가(Imputation of Righteousness) 교리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인 로마서 5장 19절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두 대리자(agent)인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아담의 실패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용어는 ‘순종치 아니함’이다.  이 말은 아담이 지은 죄의 자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이것에 필적하는 말이 ‘한 사람(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앞 구절과는 대조적인 의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결과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Calvin은 이 구절을 가지고 로마서 주석을 통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한 경우,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이다.”  3장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필요가 있다. 이는 의로우신 그분만이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의를 전가시켜 주심으로서 우리를 의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오게 되면 먼저 그 안에서 율법의 정확한 의(the exact righteousness of the law)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열납 되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의의 전가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과 의가 되셨다는 것이다.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과 율법에 대한 온전하고 적극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Calvin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의의 전가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 된다는 표현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4장 주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을 주시려고 친히 율법 준수의 책임을 지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율법의 멍에에 순복한 것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Calvin의 글들을 요약하면 그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신자들의 의의 기반으로서 그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Martin Luther의 견해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책을 읽어 보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여 이해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우리들에게 의로서 전가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Luther의 순종의 개념 안에는 분명히 능동적 순종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갈라디아서 주석』의 말을 인용하면 “성령은 시편 40편에서 그리스도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 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절, 시 41:4, 69:5 참조).  여기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죄가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 증언은 무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 아니다. 바로 모든 죄인의 인격을 직접 취해 온 세상 죄의 죄책을 자기 몸에 짊어진 고난의 종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자신이 담당하셨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율법의 참된 기능은 내게 죄에 대해 알려 주어 나를 낮아지게 함으로써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지옥을 비롯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참된 기능이다. 여기서 요점은 죄인들을 율법이 자기들이 죄를 알려 주어 자기들을 낮춤으로써 자기들이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고소하고 괴롭힘으로써 자기들을 구주와 보혜사이신 그리스도께 이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Luther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리고 율법의 참된 기능이 무엇인지를 나열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셨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겪으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순종으로 율법 아래에 있던 자를 구속하실 수 있었다. 율법에 관해서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행위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를 감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어떤 공로인가, 우리의 공로는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율법 아래 들어가심으로써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속량하셨다.”  Luther의 말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은 율법 아래에 있던 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고, 죄를 위해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구속의 수단이며 공로가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글 속에서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개념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Westminster Confession』의 저자인 A. A. Hodge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이 어떻게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각기 우리의 칭의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둘 다 포함하고 있는가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이기는 하셨지만 신적인 인격이셨다. 신적 인격으로서 그는 자발적으로 ‘율법 아래 놓여지셨으며’ 또한 인간적 조건들 하에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모든 지상적 순종은 그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대리적이었다. 그의 ‘능동적 순종’은 대리적 순종으로 간주된 그의 전 생애와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수동적 순종’은 대리적 고난으로 간주된 그의 전 생애와 특히 그의 희생적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다. 아담은 원래적인 은혜스러운 행위 언약 하에서 인류를 대표하였다. 그는 타락하여 순종이 조건부였던 ‘영생’을 상실하고 불순종이 조건부였던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아담이 남겨놓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선택한 백성을 위하여 언약을 떠맡으신다. 그는 ‘형벌’(그것을 범하는 자는 죽으리라)을 받으시고, ‘보상’(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에 의해 살리라)을 획득하신다. 그의 전체 대리적인 고난적 순종이나 순종적 고난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수동적 수종’으로서 그것은 율법의 형벌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능동적 순종’으로서 그것은 우리를 위해 중생에서 영화까지 영생을 획득케 한다. 이 의로움이 우리들에게 전가된 것은 우리의 칭의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만족이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의 언약적 의무들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것들이 첫 아담에 타락에 의해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 언약의 인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는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을 의해 살리라’(레 18:5, 롬 10:5, 갈 3:12, 마 19:17)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형벌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다만 죽음의 형벌만을 받으셨다면 그리고 아담에게서 요구된 언약적 순종을 이행하지 않으셨다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조건들을 개정하시고 요구된 조건이 없을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이 결핍된 채로 영원히 계속해야만 하거나, 혹은 우리가 아담이 그의 배교 이전에 행하였던 곳에서 시작하고 우리 자신의 인력들에서 행위 언약의 조건들을 성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나중의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에 의하여 우리들을 위해 그것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입증되고 있다. 성경은 그가 형벌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 ‘아들의 양자’ 그리고 ‘영원한 기업’을 확고히 하셨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갈 3:13-14, 4:4-5, 엡 1:3-13, 5:25-27, 롬 8:15-17). 그는 그의 순종과 그의 고난에 의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명백히 언급되고 있다(롬 5:18-19).

더 나아가 Hodge는 율법의 계율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의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행위 언약의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었다. 첫 아담의 손에서 실패된 언약은 둘째 아담의 손에서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에서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 하에서의 그의 백성의 모든 이행되지 못한 의무들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고난은 형벌을 면제하지만, 그의 능동적 순종은 조건들을 성취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상적(無償的)이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비록 그리스도가 여자에게서 태어나심으로써 율법 하에 놓여지시고 또한 그의 피조된 인성의 수행에 있어서 그 율법에 순종하셨지만, 그는 그 자신을 위해 그와 같이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공로들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가될 수 있도록 무상적으로 그와 같이 하셨다.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들은 자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들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가 불의한 자를 위해 의로운 자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그는 율법의 주체 대신에 율법 수여자로서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돌려진 두 가지 결과를 제시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형벌과 행위 언약의 적극적 조건들(율법에 대한 순종)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로의 의의 전가는 형벌의 사면과 죄들의 용서, 그리고 신자를 언약이 성취되고 그 모든 약속들과 유익들이 법적으로 적용된 자로 인정하고 취급하는 사실을 확고히 하고 있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능동적 순종  (0) 2022.02.13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행위 언약  (0) 2022.01.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한가 아니면 완전히 폐기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좁히지 못할 정도로 주목할 만한 견해 차이가 있다.  심지어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라’(히 8:13)는 말씀을 가지고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에 의하면 옛 언약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었고,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러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17-19절의 예수님의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부분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을 때 그가 의도하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민한 이 문제(행위 언약의 유효성)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지만(롬 3:20), 만약 가능했다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 10:5)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가 담긴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함으로써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 의로’라는 말을 첨가한다(RSV).  NEB에서는 ‘그것들로 인하여’라고 번역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그 뜻에 순응하는’,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생명으로 인도했을 것이라고 했다(롬 7:10).  이 구절은 이미 70인 역을 따르고 있는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도 인용되었다.  이 두 서신에 있어서 강조점은 만일 살고자 하면 ‘행하라’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로마서 2장 13절에서 주장된 바 있다.  이러한 묘사의 어두운 측면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행위 언약의 형벌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 6:23).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하나님은 아담이 이행하지 못했던 그의 책임(창 2:15-17)과 비슷한 책임을 인간에게 지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한 고의적인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망이 죄의 결과라고 본다면 이 기간 동안 사망이 지배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가 그 당시에도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즉 나타난 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이며(롬 5:12), ‘한 사람이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롬 5:15), 그의 모든 후손과 관련된 죄이다.  이 경우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후 15:22),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인간에게 있어 행위 언약이 아직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넘어 본격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으로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나오는 모세의 설교에서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롬 10:6). 이 구절은 의를 획득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순종하려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신 30:6-10).  이 구절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도 손에 넣기 힘든 것을 열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지식이나 승인을 얻기 위해, 혹은 율법을 손에 쥐어서 자신들이 무엇에 순종해야 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하늘에 오르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데려오기 위해 음부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한 구원을 선포하시고(요 16:6), 또 이룩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요 1:14),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5:6).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말함으로써, 이 말씀을 자기 세대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롬 10:8-21).  즉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가 이제 알려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미 모세의 시대의 백성들에게 분명했던 것처럼,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바울 시대의 독자들의 입과 마음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롬 10:8, 신 30:14).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부분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린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아담은 인류에게 저주를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희생, 바울의 말대로 하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롬 5:18)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결과는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이다(롬 5:19).  빌립보서의 말을 인용하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 2:8 / 한글 흠정역).  여기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라는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죽음이 예수님을 지배하는 어떤 권세를 지녔으므로 예수께서 죽음에 복종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은 확정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으시고 지상에 계신 동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고뇌하며 자신과 씨름하셨다(마 26:36-46).  앞으로 닥칠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자신의 헌신을 확인할 정도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눅 22:43-44).  인간의 성정을 지니신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선택의 행위를 끊임없이 하셨다(요 10:18-19).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고민하셨고, 순종의 길이 고난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히 5:8).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히 2:10).  그리스도는 항상 도덕적으로 온전하신 분이다.  그러나 순종함을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신의 완전성을 증명하셨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완벽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을 개척하셨다.  만약 이단들처럼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한다면, 전능하시고(마 28:18) 전지하시며(골 2:3) 영원하신(히 1:8-10) 하나님이 무엇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겸손히 배우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고통이라는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심으로써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히 5:9)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시다(행 4:12).

수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강하게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들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고 생각한다(롬 12:3).  하지만 여기서 ‘죽기까지’란 십자가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떠한 저항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Gerald F. Hawthorne이 말한 것 같이 “그의 전 생애는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과 자기희생으로 특징” 지어졌다.  즉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온전한 순종 안에는 율법의 요구에 완전하게 응하신 그분의 삶도 포함되어 있다.   Louis Berkhof의 말을 인용하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그의 수동적 순종이 하나님께 받음직하게 되도록, 곧 하나님의 열납 대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집고 넘어가고 싶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의(義)를 위해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순종의 삶을 사셔야만 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십자가의 죽음만을 가지고 한정 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길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행하실 때 아들에게 세상에 가서 그저 죽기만 하면 백성들의 모든 죄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죽어 우리의 죗값만을 치르셨다면, 나는 지금도 궁금한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기 전에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조차도 자신들의 죄악 됨과 회개의 필요성을 고백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죄를 인정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범죄할 가능성과 유혹을 받으셨지만(요일 2:16), 죄가 없으며(히 4:15), 책잡을 만한 일이나(눅 23:13-25), 행위에서 전혀 악을 발견할 수 없었다(벧전 2:22).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단지 무죄성(히 4:15, 고후 5:21, 요일 3:5)만이 필요했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는’(히 5:8) 온전한 복종의 삶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면 그분이 “33년간 이 땅에 사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정신 나간 헤롯이 무고한 아이들을 살해할 당시(마 2:13-18), 베들레헴을 벗어나서 애굽까지 도망갈 필요가 없이, 그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무죄성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면 말이다.     

Saint Athanasius는 『On the Incarnation』에서 말한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시지 마자 모든 사람을 대신해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만약 이 땅에 오신 즉시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분은 더는 우리 지각(知覺)의 대상이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몸안에 머물며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하시면서, 자신이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시고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신성만을 강조하지 말고 인성도 똑같이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피곤하셨지만(마 4:2, 막 15:21, 요 4:6) 전능하셨다(마 8:26-27, 골 1:17, 히 1:3).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시지만(요 10:30) 종말의 시간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셨다(마 24:36).  특별히 병자를 고치실 때는 자신의 신적인 특권을 사용하시지 않고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셨다(눅 5:17).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전 생애를 통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면 Berkhof는 말한다.  “그의 인성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에 미달되었을 것이며, 그는 타인을 위해 속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오직 인간에게 부과된 형벌만을 받으셨다면, 그의 사역의 열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타락 전 아담의 위치에 남았을 것이다”    

세대주의 목사인 John F. MacArthur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다.  하지만 이 견해만큼은 Sproul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R. C. Sproul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주고 하나님 앞에서 무고한 상태가 되겠지만 의로운 상태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데(창 18:19, 출 15:26, 사 56:1, 미 6:8), 우리는 그 법에 복종하기 위해 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영원한 생명을 취하도록 하는 순종의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의를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완전한 순종은 십자가 위에서의 완전한 속죄만큼이나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중전가(double imputation)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말할 때, 바로 이런 의미이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의(義)의 전가  (0) 2022.03.13
능동적 순종  (0) 2022.02.13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행위 언약  (0) 2022.01.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능동적 순종

행위 언약 2022. 2. 13. 18:56

오늘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야기만 나오면 히스테리컬 반응을 보이는 병적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면 이단이고 저주받을 자인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하는 목사들 말이다.  참으로 궁금한 것은 목사가 저주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저주하실까?(눅 6:27-29).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왜 하셨는지 모르겠다(마 5:43-44).  이것도 말세의 징조인가?(딤후 3:1-5).  하지만 그렇게 상대방을 싸잡아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주로 이단 사냥꾼과 목회에 관심이 없는 관종스러운 사람들이 하는 짓들이지 평신도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심고 거두는 법칙’이 성경에 종이가 남아 돌아서 기록된 글이 아니다(갈 6:7).  적(敵)을 많이 만들어 놓으면 항상 끝이 비참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목사와 신학자를 이단사상을 가진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Synodicon in Gallia Reformata, or, the Acts, Decisions, Decrees, and Canons of those famous National Councils of 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 / John Quick Volume 2』 책에 나와 있듯이, 프랑스 개혁 교회가 1603년 총회에서 Johannes Piscator의 주장을 다룰 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혐오’을 표현하며 ‘오염된 자들’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왜 오염된 자들이라고 말을 했을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타 교단에 비해 논쟁과 분열의 역사가 하늘과 땅에 사무칠 정도로 많은 장로교단 안에는 능동적 순종 교리로 인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딤후 2:17-18) 늙은 ‘교주(?) 신학’에 오염된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교회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논쟁은 기독교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있어 왔다.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 드린 것이고, 우리를 속죄하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다가 자신의 반쪽짜리 견해를 철회한 독일 루터파 신학자 Karg, Georg.  당시 종이 구하기도 힘든 시대에 왜 그리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불거진 그 유명한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는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분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이 칭의의 유일한 공로적 원인이라고 주장한 Piscator, Johannes.  그리고 Michael Servetus가 처형된 다음에 Calvin의 입장을 변호하고, 그의 신학을 계승한 후계자 Theodore Beza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학자이고 Karg, Georg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칭의는 오직 죄 용서’ 일뿐임을 강조하는 Federal Vision의 교부격인 Norman Shepherd.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들(NPP).  “인간과 맺으신 첫 언약은 하나의 행위 언약이었는데(갈 3:12), 생명은 거기서 아담에게 약속되었고, 그의 안에서 그의 자손에게 약속되었다(롬 10:5, 5:12-20), 그 조건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이었다(창 2:17, 갈 3:10)”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행위 언약’에 대한 진술에 반발하면서 능동적 순종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Federal Vision 열성분자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라는 속담처럼 행위 언약과 능동적 순종 교리는 신약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단 내의 패거리 목사들이 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필요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을 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나도 인간의 죄 문제는 십자가의 죽음, 오직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피로 해결된다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롬 3:24, 5:9, 엡 2:13-14, 딛 2:14, 히 10:19, 요일 1:7).  물론 반쪽짜리 답이긴 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이런 예화까지 들어야 하는지 자괴감이 든다.  내가 짜장면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도 짜장면을 좋아해야 하는가?  내가 짬뽕을 먹으면 짬뽕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다 이상한 사람들인가?  이것은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미친 생각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활동들, 즉 간음, 동성애, 살인, 절도 등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떤 추가적인 규범이나 규칙 혹은 제도나 법규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개인적인 견해나 신학이 다를 경우, 같은 입장에 서 있지 않는 다른 사람을 향해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롬 14:3).  우리들 중에는 다른 형제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전 8:12).  요지가 무엇인가?  내가 먹는 짜장면이나 짬뽕(신학이든, 주장이든) 가장 맛있는(성경적인) 것처럼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이다. 

왜 유독 장로교가 타 교단에 비해 교리적 논쟁과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가?  다른 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 ‘꼰대’ 같은 신학, 즉 단편적인 신앙 지식을 가지고 서로 잘났다고 주절주절 찌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한번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우리들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학과 신앙에 있어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지식은 사람들 교만하게 만드는데(고전 8:1) 알면 얼마나 아느냐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 앞에서(벧후 3:8) 티끌 같은 인생들이 고작 몇십 년 동안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고전 4:3), 누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고 탁월한 신학을 가졌다고 자랑질할 수 있겠는가?(고전 4:7).  이런 것들은 다 육신의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열매들이다(고전 3:3).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구별했으면 한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이미 심각한 인지장애의 초기단계이다.  나하고 다르면 다 이단인가?  듣기 거북하겠지만 Harry G. Frankfurt교수의 말대로 ‘개소리’다.  나하고 다르다고 해서 다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면 다른 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1560년대 이전에는 이 용어가 사용된 적이 없었다.  물론 능동적 순종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사용해도 그만, 사용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그 용어를 사용하고, 싫으면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이단이거나 저주받을 자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고전 4:3-5).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들은 율법의 준행자이지 재판자가 아니다(약 4:11).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혹은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면 그것은 이단 사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가”  개가 초식동물이 아닌데 풀을 먹는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처럼 목사가 입만 열면 복음을 전해야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능동적 순종 교리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자료들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 필요한 개념(槪念)과 모든 요소(要素) 들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개념과 요소들이 있다면, 이 교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논리적 서술(敍述)을 통하여 상호 연관성을 밝히며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적절한 용어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합리적인(reasonable)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이나 요소가 없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겨대지 말라는 것이다.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성경에 담긴 중요한 주제를 논리적이고 체계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서술한 학문이 조직신학인데, 왜 목사와 신학자들은 ‘조직신학’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식하게 보이는가?  그리스도가 죽을 때 우리의 죗값을 치렀다는 의미에서 형벌상의 사건이고,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의미에서 대속을 말하는 ‘형벌 대속론’이란 용어도 있다.  그다지 좋은 용어가 아닌 ‘이중 예정론’은 주로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유효적 소명’도 있다.  그 외 ‘천년왕국’, ‘제한 속죄론’ ‘타락 전/후 선택설’, ‘삼분설’, ‘하나님의 속성’, ‘신인 협력설’ 등등,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만약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렇게 많은 용어들을 만들어 냈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별히 칼빈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나팔을 불어대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영원한 안전’ 말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신학 용어들을 신학자들이 조어(造語) 하여 성경의 내용을 정리하며, 그 성격을 규명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도 개혁 신학을 공부했지만 난독증이 걸린 것인지 아직도 위에 열거된 단어들을 성경에서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단어들을 찾아서 알려준다면 나는 그날부로 목사직을 반납하고 평신도로 돌아가겠다.  종교가 타락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성직자들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이다.  요즘같이 개나 소나 목사/신학자 되고, 성직자의 이미지가 바닥을 기는 수준으로 전략한 이 시대에 나 한 사람이라도 일반인 되고 싶은 심정이다.  

행위 언약을 수용하는 Louis Berkhof의 말을 인용하면, 삼위일체’ 용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는 식으로 무식하게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 자체가 없거나 사용되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 혹은 ‘완전한 순종’, 즉 '모든 순종' 안에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개념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순종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이 구절들을 통해 얼마든지 추론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다 추론해 내면서 왜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는 히스테리컬 한 신학적 망상을 가진 목사들이 그렇게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갈라디아서 1장 23절은 ‘복음의 교리’를 의미하고, 로마서 14장 23절은 ‘어떤 행동이 옳다고 믿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며, 디모데전서 5장 12절은 ‘참 과부로서의 명부에 올릴 때(딤전 5:9)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서약’을 뜻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 단어가 늘 똑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만은 아닐뿐더러 그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능동적 순종)의 전가’’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교리를 지지하는 구절들이 성경 안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성경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교리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순종’이라는 단어의 용법이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목사다.  이런 사람은 한 단어의 전체 의미 범위가 얼마나 넓은 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단어의 의미론적 범위를 고집스럽게, 때로는 무식하게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온전한 순종’이나 ‘모든 순종’을 두 가지 측면으로, 혹은 하나의 순종 안에 분리되지 않는 두 가지 특성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 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글을 읽으면 ‘개소리론’으로 나팔을 불어댈 수 있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의(義)의 전가  (0) 2022.03.13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행위 언약  (0) 2022.01.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성(有效性)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아담이 타락할 당시 완전하게 폐기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과거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졌던 행위 언약 전부가 인간 타락 이후 폐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행위 언약으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여부가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효력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하나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지금도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저주와 형벌이 임하는 반면 이를 순종하면 생명을 얻는다는 원칙이 현재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레 18:5, 갈 3:12).  반면에 실제적으로는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본고(本稿)는 내 개인의 편견과 감정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편견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교리를 부인하는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도 아니고, 능동적 순종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율법폐기론자도 아니다.  행위 언약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행위 언약을 부정하면서까지 은혜 언약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엡 2:8)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위 언약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듯이(레 11:44), 신약에 와서도 신자들에게 여전히 거룩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벧전 1:16).  한 가지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긍정하던 부정하던 상관하지 않지만, 나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딤후 3:16) 성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남들보다 흠이 많고 죄가 많은 인간이긴 하지만 ‘복음을 적당히 왜곡시켜 팔고’(현대어 성경) 다니는 삯꾼이 아닐뿐더러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고전 4:6) 진리를 전하는 자가 아닌 것만을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다.   

먼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행위 언약 사상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Calvin에게 없는가” 하는 것이다.  Herman Bavinck는 언약은 개혁 신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언약을 모르면 개혁신학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Bavinck의 말이 사실이라면 Calvin은 개혁 신학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alvin이 쓴 책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학의 가장 큰 틀인 ‘행위 언약’, ‘은혜 언약’, ‘구속 언약’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난독증이 걸린 것인가?  아무튼 Calvin에게는 행위 언약에 대한 신학이 없다.  그에게 있어 행위와 율법 그리고 공로 사상이, 창조와 은혜에 대한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언약 교리가 발전하지 못했지만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서 언약 신학이 시작되었고, 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이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지지한 Zacharias Ursinus부터 언약 신학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Binding of God』의 저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총장인 Peter Lillback 역시 Calvin 신학에는 행위 언약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Calvin 주석 창세기 2장 16절을 근거로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을 언급하면서 그가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모세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인간이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것을 가르친다. 율법은 인간의 복종의 표시로 부여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느 과실이든지 마음대로 먹었다 해도 하나님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경외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계획하셨다”  이 인용구에서 Calvin은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언약적 개념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Calvin의 대작 『기독교강요』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노아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성례)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를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  여기서 Calvin이 생명나무와 무지개, 이 둘을 언약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행위 언약이라는 명칭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Calvin은 하나님이 이들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여러 성격과 요소를 가지고 언약적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 언약 사상이 Calvin과는 무관한 이론이며, 그가 가지고 있던 언약 개념이 아닌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는 구절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기 전까지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사람들이 로마서 1장 19-20절과 2장 14-15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려는지 궁금하다.  분명 확증편향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exegesis(석의)가 아닌 eisegesis(자기해석)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금이라도 구약의 역사와 유대교에 관한 책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그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은 랍비(Rabbi)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방인 중에는 모세의 율법과 규례에 대한 것을 단 한번 들어보거나 소유하지 못한 불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율법의 요구를 ‘본성으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만 요구하는 특별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류가 널리 인정되고 존중되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요구 사항들이다.  수많은 작품을 남긴 유대인 학자이며 철학자인 Philo of Alexandria는 율법과 본성 사이의 일치를 가르쳤다.  그는 모세가 그 제정된 법령이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가 세상 창조에 대한 기록을 맨 앞에 놓음으로써 “세계가 율법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이로써 충성된 시민이 되어 전 세계 그 자체가 통치되는 조화 속에서 본성(Nature)의 목적과 의지에 그의 행동을 통제한다는 것을 시사하였다”라고 주장한다『On the Creation, 3』.  

그렇다면 성경은 Philo의 주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들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여 자기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여 준다’(롬 2:14-15 / 바른 성경).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제정한 법이 아니면 그 어떠한 법이든 간에 그 법은 사람들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3절과 히브리서 8장 10절에 묘사된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대한 새 언약의 약속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즉 율법의 기본적 요구사항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을 간략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다.  율법이란 신구약을 망라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 규정 및 인간 양심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까지 다 포괄하고 있는데(롬 7:7-9), 이것을 조금 더 구분하면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기본적 율법’(Elemental Law)이다.  이것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엡 1:11) 즉,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자체 안에 심어 놓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신 29:29).  이는 그 대상이 비이성적인 피조물인가, 이성적인 피조물인가에 따라 자연율과 도덕률로 구분된다.  먼저 자연율(Nature Law)이란 비이성적인 피조물에 내재(內在)한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롬 1:19-21).  반면에 도덕률(Moral Law)은 자유 의지를 갖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이성과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롬 2:14-15). 

조금 더 살펴보면 도덕률은 이성적(理性的) 피조물 내부에 선천적(先天的)으로 심어준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무지(無知)나 몰이해(沒理解)가 있을 수 없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은 요한복음 1장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다.  “부패한 성품 속에 남아 있는 그 빛 가운데는 두 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가 뿌려져 있고, 또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겪게 되는 죄책감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알았던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 이성과 양심으로 반영된 것이다(창 4:13).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강압적으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신적 지혜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것이므로 그 대상도 도덕률의 내용이 합리적임을 인식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이나 어떤 상황과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不變) 하시는 속성(민 23:19-20, 삼상 15:29)의 반영(反映)이므로 그 내용 및 원리(原理)가 영원하다.  더 나아가 성문적 율법이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진 법인 반면 도덕률은 인간성 내부에 존재하는 기본적 율법으로, 이는 시간이 제한을 받지 않음과 마찬가지로 공간적 제한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다른 하나는 ‘성문적 율법’(Enactive Law)이다.  기본적 율법이 창조 시부터 모든 피조물 내부에 심어진 하나님의 의지인 반면 성문적 율법은 그 후에 특별 계시(초자연 계시)의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지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기본적 율법 가운데 도덕률을 요약하여 성문화 한 ‘도덕법’(출 20:1-17)과 모세에 의해 주어진 제사법과 같은 종교적인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한 사회생활 유지를 위해 주어진 ‘시민법’(레 25:39-41)이다.  이처럼 율법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이러한 율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정의하면 “모든 피조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Hodge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법의 기관으로서의 양심 그 자체는 마음에 기록된 법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구절을 가지고 모세 이전에는 율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로 율법이란 용어가 꼭 성문화(成文化)된 율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의(義)의 전가  (0) 2022.03.13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능동적 순종  (0) 2022.02.13
행위 언약  (0) 2022.01.2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행위 언약

행위 언약 2022. 1. 23. 19:00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참된 지식(창 2:19-20, 골 3:10)과 의와 거룩함(엡 4:24)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내부적 특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할 수 있는 외형적 특권까지 부여하셨다(출 19:5).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창 1:26-27, 5:1, 9:6) 인간 외에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인간에 대한 그분의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다(창 9:9-16).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만(창 1:27)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류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교류가 언약(Covenant)이란 형태로 표출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창 2:15-17, 레 18:5), 언약의 약속은 영생이며(느 9:29), 언약의 조건은 순종이고(겔 20:11), 언약의 형벌은 죽음이었다(창 3:19).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약속(롬 10:5)과 여러 가지 요구사항들로 결정되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 언약으로서(창 2:16-17), 인간 역사의 최대 비극인 죄의 기원과도 관계를 가지며(창 3장, 롬 5:12), 이후에 있을 여러 언약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약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로 쓰였는데(창 6:18), 이는 제물을 쪼개어 바치는 제사 관습에서 기원된 것으로 본다(창 15:10, 17).  즉 언약의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언약을 어기면 희생 제물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엄숙하고 엄격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렘 34:18-20).  또한 신약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헬라어 '디아데케'(diatheke)로 쓰였는데(갈 3:15-16), 어떤 번역의 형태가 이 단어의 가장 적절한 번역인가 하는 점에서 많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흠정역 가운데 절반은 ‘언약’으로(겔 16:62), 그리고 절반은 ‘유언’(遺言)이란 뜻으로 번역되었다(히 9:16-17, ARV).  이와 같이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짐승을 죽여 제물을 바치는 제사 행위(레 1:3-9)와 법적 효력을 지니는 유언과 관련된다(히 9:16-17).  따라서 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속력을 가진 법적 협정(legal agreement) 즉, 죽음을 걸고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적 약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먼저 언약의 구분을 살펴보면 계약의 주체로서 양 당사자(當事者)가 있고, 그 계약 내용이 당사자의 의견 일치에 의해 성립되는 것을 쌍무 언약(雙務言約이라고 한다면, 성경의 언약은 당사자 사이의 의견 일치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하였으며(창 2:16-17), 하나님이 조건과 약속을 정하셨고(출 19:5-6),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렘 31:33)에 인간이 하나님과 협상하거나 언약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편무 언약(片務言約)이다.  물론 이 언약이 다른 언약에 의해 대치될 수도 있지만(호 2:23, 슥 8:8), 한번 세워지면 내용을 추가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의 일부가 무효화되게 할 수도 없으며 변경되거나 바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시 105:8-10, 갈 3:15).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언약의 의무를 받아들이거나 깨트리는 것이다(렘 22:9, 겔 16:59).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신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려함이 없이 아담에게 일방적으로 행위의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노아나 아브라함의 경우 이들이 언약을 맺을 때 동의하고 수납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 나체쇼를 보인 노아(창 9:18-25)나, 첩을 둠으로써 가정불화를 일으킨 아브라함(창 17:1-21)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왜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할 수 없으셨겠는가?”  얼마든지 창조주에 의해 피조물에게 그의 의지를 고려함이 없이 자신의 주권적 정체(constitution)를 적용시킬 수 있고(겔 16:62-63), 동시에 인간과 언약 관계 들어가실 때 언제나 조건을 설정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렘 1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은 언약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축복하기 위해 체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신 5:1-3).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언약이지만 은혜로운 언약이었다(말 2:5).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신 모든 언약이 그렇듯이(민 18:19), 그 중심에 있는 본질 요소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31:33).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건의 제시와 이에 대한 결과를 약속한 것을 언약으로 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성경에는 직접 행위 언약(行爲言約)이란 용어가 실제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언약의 교리를 구성하게 될 모든 요소들이 있고, 두 당사자가 확실하게 정의되어 있으며(창 2:16), 그 관계의 상태를 정해놓은 법적인 조건과 규범들이 있었다(창 2:17).  또한 순종을 위한 축복의 약속(신 28:1-19) 및 그와 같은 축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제시되었다(신 5:33).   이것은 후에 있을 새 언약(히 8:5-8)과 대비된다는 점에서나 성경 자체가 이를 언약이라 불렀다는 점에 있어(시 106:45), 그리고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호 6:7)라는 호세아의 말 같이 분명한 언약임을 틀림없다.  이 구절에 의하면 아담은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었다(롬 5:12-21).     

앞서 말했듯이 이 언약에 있어서는 반드시 둘 이상의 당사자가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것으로 보아서는 두 당사자가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행위 언약은 삼위 하나님과 전 인류의 대표인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을 그 당사자로 한다.  여기서 삼위 하나님을 제1 당사자라 하는 것은 아담의 동의가 없이 세우신 행위 언약의 약속 및 조건의 제안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행위 언약은 하나님으로서는 의무 조항이 없는 주권적 조치로 볼 수 있다.  반면에 아담은 자연적인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의존적이기 때문에 제2 당사자가 된다.  그러나 아담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류의 법적, 혈통적 대표자로서 그가 맺은 언약의 효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된다.  이것은 아담에게 선고된 형벌 자체가 자연적 후손에게서 효력을 발생했다는 사실에서부터(창 2:17, 3:17-18), 죄와 죽음(롬 6:23) 그리고 모든 형벌적 악이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성경적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다(롬 5:12, 고전 15:22).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명령에 분명히 정의되어 있으며(창 1:28-30, 2:15),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최초의 금지 명령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창 2:16-17). 

우리가 이런 관계를 언약이라고 규정할 때,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관해 아담에게 하신 말씀 안에는 순종할 경우 ‘영원한 생명’이(신 4:1, 롬 10:5), 불순종하는 경우 ‘정녕 죽을 것’(렘 11:2-3)이 약속되었다.  만일 불순종이 죽음과 연결된다면 순종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레 18:5, 느 9:29, 롬 10:5).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 생명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영원한 행복과 끊임없는 영광의 상태로 지속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계 21:1-4).  반면에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자연적 사망(전 12:7, 약 2:26)과 아울러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히 격리되는 도덕적이고 영적(마 8:22, 요 3:3, 엡 2:1, 딤전 5:6, 계 3:1), 그리고 영원한 사망(계 20:6-14)도 포함된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는 제1 당사자의 적극적 명령은 행위 언약이 제2 당사자의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함을 보여 준다.  이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율법에 공통되는 것으로서 율법과 계명을 지켜야만이 생명이 있음이 강조되어 있다(신 30:15-16, 겔 20:11, 마 19:17).  나아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경우에는 더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신 7:8-9).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바울이 로마서 7장 10절에서 ‘계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생명을 말한다(겔 20:13, 눅 10:28).  즉 행위 언약의 원리는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는 말씀 같이, 이 계명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돕기 위해 주어졌다.  결코 아담을 속박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었다.  Charles Hodges는 이 구절을 가지고 주석하면서 말한다.  “율법은 원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갈 3:12).  이 점은 바울이 모세의 글인 레위기 18장 5절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는 로마서 10장 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언약의 관계로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먼저 행위 언약 체결 이전의 자연적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은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와 같았다(사 29:16).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칙적으로는 어떠한 청구도 할 수 없으며 수동적으로 그분의 조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적인 관계 안에서 절대적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과 교통 할 수 있고 또한 언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를 향상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자신을 인간의 수준까지 낮추어 인간과 법적인 계약을 맺으셨다.  다시 말해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하나님 의지에 순종하는 길을 여심은, 물론 여기에 수반되는 순종의 방법을 통한 영생의 결과를 약속하심으로 인간에게 자연적 관계를 극복한 조건적 권리를 획득하도록 조치해 주신 것이다.  한 마디로 행위 언약은 인간을 축복하기 위한(창 17:2, 신 5:1-20),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언약의 특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은혜 언약은 하나님과 이미 타락한  인간 사이에 맺어진 것인데(렘 31:33, 히 9:15), 반해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과 맺은 언약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닌다.  즉, 이후에 여러 차례 체결되는 은혜 언약들(창 6:18, 9:9-17, 17:7, 18-21, 출 19:5, 24:1-11)에게 있어서는 피조된 원래의 상태를 상실한 비자연적인 인간이 언약의 제2 당사자인 반면 이 행위 언약은 창조한 원래 모습을 간직한 자연적 인간이 언약의 제2 당사자라는 점에서 ‘자연 언약’이다.  또한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쌍방 언약이나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으로서의 성격이 있다(출 19:5, 24:1-11).  즉, 후에 맺어진 은혜 언약들이 순종보다는 믿음에 치중하는 반면 행위 언약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율법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내용으로 구성된 이 언약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자기 성찰과 행동의 제한 내포하고 있으며, 이 언약의 준수 여부가 생명의 지속과 죽음이(신 11:26-28)란 결과를 낳는다는 측면에서 이는 ‘생명 언약’이다.  끝으로 신학적 의미에서 행위 언약은 이를 어긴 인간에게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후에 주어진 은혜 언약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행위 언약에 있어서도 순종의 의무가 당연히 있는 피조물 인간에 순종에 대한 상급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겔 20:11), 이 역시 ‘은혜 언약’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행위 언약을 주신 것은 순종을 조건으로 인간의 거룩함을 고정시키고 영생을 확실케 하려는 은혜로운 조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의 자발적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히 거룩한 교류를 나누시기 위해 행위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행위의 언약이 아직도 유효성(有效性)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아담이 타락할 당시 완전하게 폐기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민감한 문제를 놓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드러내며 때로는 날카롭게 대립하기도 한다.

'행위 언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좋은 언약  (0) 2022.03.27
의(義)의 전가  (0) 2022.03.13
행위 언약의 유효성  (0) 2022.02.27
능동적 순종  (0) 2022.02.13
율법의 중요성  (0) 2022.02.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He was not a teacher of the Law but an obedient disciple of the Law, so the by his obedience he might redeem those who were under the Law. He was one who was acted upon, and not an agent, in respect to the Law. He bore its condemnation and delivered us from its curse.  What merit is that?  Not ours, but that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who, being born under Law, not for himself but for us, redeemed us who were under the Law.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마른 복음  (0) 2022.04.17
왕따 당하신 성령  (0) 2022.04.03
Jonathan Edwards  (0) 2022.01.19
John Gresham Machen  (0) 2022.01.16
소경들  (0) 2021.11.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And by that righteousness being imputed to us, is meant no other than this, that that righteousness of Christ is accepted for us, and admitted instead of that perfect inherent righteousness that ought to be in ourselves: Christ’s perfect obedience shall be reckoned to our account, so that we shall have the benefit of it, as though we had performed it ourselves: and so we suppose that a title to eternal life is given us as the reward of this righteousness.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따 당하신 성령  (0) 2022.04.03
Martin Luther  (0) 2022.01.21
John Gresham Machen  (0) 2022.01.16
소경들  (0) 2021.11.21
종교성이 강한 사람  (0) 2021.03.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So Thankful for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No Hope without It.

 

'하고 싶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Martin Luther  (0) 2022.01.21
Jonathan Edwards  (0) 2022.01.19
소경들  (0) 2021.11.21
종교성이 강한 사람  (0) 2021.03.05
종교적 증상  (0) 2021.02.28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환상 (幻像)

연구자료 2022. 1. 14. 13:34

환상 또는 이상(異像) 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한 방법으로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편에 의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광경을 목격케 하는 것을 가리킨다(겔 1:1-25).  이러한 환상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겔 8:4, 11:24, 사 1:1, 단 8:1, 9:23), 아브라함(창 15:10)이나 야곱(창 28:10-16),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행 10:9-16, 고후 12:1-4, 계 1:9-20)에게도 주어졌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에는 이와 같은 환상(vision)을 가리키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온다.  우선 구약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로서 대표적인 것을 들 것 같으면 <하존>과 <로에>, <마르에>가 있다.  <하존>은 ‘꿈’, ‘이상’, ‘환상’, ‘계시’, ‘신탁’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에스겔 7장 26절과 사무엘상 3장 1절, 그리고 역대상 17장 15절 등에 나온다.  그리고 <로에>는 이사야 28장 7절에 나오는데 선지자가 보는 이상을 의미한다.  <마르에>는 ‘광경’, ‘출현’, ‘모양’, ‘이상’이란 의미로서 에스겔 8장 4절, 11장 24절, 다니엘 8장 16절, 9장 23절 등에 나와 있다.  또한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에도 ‘초자연적인 광경’을 의미하는 <호라시스>와 같은 단어가 있다.  이 가운데 <호라마>는 주로 사도행전에 많이 나오며(행 9:10, 11:5, 16:9, 26:19), <옵타시아>는 누가복음 1장 22절, 24장 23절, 고린도후서 12장 1절 등에 나온다.  반면 <호라시스>는 사도행전 2장 17절과 계시록 9장 17절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상(以上)과 같은 같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 환상의 주된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救贖)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시(啓示)란 무엇인가?  (0) 2022.06.02
로마의 항소(抗訴) 제도  (0) 2022.05.29
염병 (染病)  (0) 2022.01.12
바울이 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0) 2022.01.09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신 (神)  (0) 2022.01.0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염병 (染病)

연구자료 2022. 1. 12. 13:17

성경에는 염병(pestilence)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염병은 크게 자연 발생적인 것과 하나님의 형벌에 의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레 26:25, 렘 14: 12, 21:6, 대하 7:13, 겔 28:23).  하지만 성경에는 염병의 증상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단어가 쓰이고 있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는데, 흑사병(pest), 티푸스(typhus), 콜레라(cholera), 천연두(smallpox) 등이 성경에서 말하는 염병에 속한다.  이 같은 염병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던 병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병에 걸리면 대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이러한 염병의 형벌을 네 차례나 받았었다(민 11:33, 14:37, 16:46, 25:9).  그뿐 아니라 에례미야와 에스겔도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써 임할 염병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렘 14:12, 21:7, 24:10, 겔 7:15, 12:6).  하지만 경건한 시편 기자는 이 같은 병으로부터 지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기도 하다(시 91:3-6).  한편 신약 성경에서는 이 염병이 그리스도에 의한 종말론적 고난의 한 전조로 묘사되어 있다(눅 21:11).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의 항소(抗訴) 제도  (0) 2022.05.29
환상 (幻像)  (0) 2022.01.14
바울이 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0) 2022.01.09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신 (神)  (0) 2022.01.07
서원(誓願)의 종류  (0) 2022.01.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을 통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구체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갈 4:4-5).  이런 의미에서 본고(本稿)는 단편적이나마 바울 서신서들을 중심 하여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알아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인격

바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단순한 예언자요, 독특한 선생에 불과했던 예수를 신인(神人)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았다고 비난받고 있다.  사실 그가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한 훌륭한 신학자임에는 부인할 수 없으나 위와 같은 비난은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그가 사용한 예수께 대한 호칭(이 호칭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열쇠)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신인적인 속성을 그가 임의로 조작했다고 하는 견해는 인정될 수 없다.  즉 유대교에서 개종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 ‘주의 종’, ‘대제사장’,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천사’, ‘의인’, 목자’ 및 ‘하나님의 어린 양’ 등 다양하게 묘사했다.  심지어 바울 서신은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라는 칭호조차도 마태복음, 요한복음, 히브리서보다 그 빈도수가 헐씬 적다.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가 단 세 번(롬 1:4, 고후 1:19, 갈 2:20), ‘아들’이란 단어가 12번(롬 1:3, 9, 5:10, 8:3, 29, 32, 고전 1:9, 15:28, 갈 1:16, 4:4, 6, 살전 1:10) 언급되어 있다. 

바울 서신에서 예수께 주로 사용하고 있는 칭호는 ‘주’(Lord)이다.  이 말은 A. D. 1세기 때 단순한 존경의 대상(Sir)에서 하나님(God)을 지칭하는 것에까지 폭넓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수를 향하여 그분이 곧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며 하나님이시라고 지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롬 10:9, 빌 2:11).  바울이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예수의 인성을 신인(神人)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았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한편 골로새서 1장 13-20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수의 상(image)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바울은 예수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보존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고 밝혔다.  이처럼 바울이 이해한 예수는 분명 하나님(롬 9:5, 살후 1:12, 딛 2:13)과 구주(엡 2:23, 빌 3:20, 딤후 1:10)가 되신 하늘 인간이셨다(빌 2:5-11).

 

2. 그리스도의 사역

바울은 율법과의 관계상에 비추어 예수의 사역을 많이 취급하였다.  즉 그분은 율법 아래 나심으로써 율법의 저주와 짐을 대신 담당하셨으며, 이를 통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21, 갈 3:13, 골 1:22, 2:14).  그런데 바울은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를 벗겨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흠 하게 세우는 구원만 이루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 가운데 명시된 조항을 그대로 수행하여 누구든지 자기 안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의롭게 설 수 있게 하셨다(롬 3:19-31, 8:1-4, 갈 2:16, 3:22, 엡 3:12, 빌 3:9).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희생과 순종으로 인해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구원과 의(義)와 자유를 허락하셨다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사상의 집약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고백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 (幻像)  (0) 2022.01.14
염병 (染病)  (0) 2022.01.12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신 (神)  (0) 2022.01.07
서원(誓願)의 종류  (0) 2022.01.06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0) 2021.12.2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본서에서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신(神)인 몰록, 즉 몰렉(레 18:21, 왕하 23:20) 외에도 쏘스와 허메, 아데미, 레판과 같은 이방신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고(本稿)는 이들이 어떠한 신(god)인지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1. 쏘스 (Zeus)

‘쏘스’는 우리가 흔히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의 최고의 신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이 신을 ‘주피터’(Jupiter)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신은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주관하는 신인 동시에 날씨를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러므로 호머(Homer)는 그의 서사시에서 제우스를 ‘정의의 수호자’이자 인간과 각양 신들의 아버지로 묘사하였다.  한편 본서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본 루스드라인들이 바나바를 가리켜 ‘쏘스’라고 칭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행 14:12).   

 

2. 허메 (Hermes)

‘허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로서 로마인들의 ‘머큐리’(Mercury)와 동일한 신이다.  그리스 신황에 의하면 이 신은 ‘제우스’의 아들로서 웅변이 능한 신이며 여행자들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 한다.  따라서 루스드라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허메’라고 했던 것은 바울이 훌륭한 설교가였기 때문인 듯하다(행 14:8:12). 

 

3. 아데미 (Artemis)

보통 ‘아르테미스’로 불리는 이 여신은 ‘제우스’의 딸이다.  이 여신은 처녀의 수호신이자 출산과 풍요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특히 에베소인들에 의해 열렬히 숭배되었다(행 19:34).  한편 오늘날까지도 에베소에 남아 있는 아데미 신전은 세계 7대 신전 중의 하나로 꼽힌다.

 

4. 레판 (Rephan)

분명치 않으나 고대 애굽인들이 섬기던 ‘목성신’(木星神) ‘레파’(Repa)이거나 근동인들이 섬기던 ‘토성신’(土星神) ‘렘판’(Remphan)인 것 같다.  그런데 본서에 나오는 바울의 언급(행 7:42-43)에 의하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도 이 신을 숭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병 (染病)  (0) 2022.01.12
바울이 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0) 2022.01.09
서원(誓願)의 종류  (0) 2022.01.06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0) 2021.12.26
노예에 대한 성경적 입장  (0) 2021.12.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사람이 하나님께 입으로 말하며 ‘맹세’나 ‘약속’이 되는 서원은 성경에서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므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① 쌍무적(雙務的)인 서원 : 이는 야곱이 자기의 형 에서를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전을 세우며 십일조를 받치겠다고 한 서원과 같은 것이다(창 28:20-22).  또한 이 같은 서원은 입다(삿 11:30-31), 한나(삼상 1:11), 압살롬(삼하 15:7-12)에게서도 볼 수 있다.  ② 일방적인 헌신(獻身) : 이것은 서원자가 무조건 하나님께 자신의 정성과 사랑을 바치는 것이다(참조, 시 132:2-5).  ③ 각성(覺醒)과 절제를 위한 서원 : 이에는 아랏(Arad) 백성을 멸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서원(민 21:1-3), 자신의 군사들을 각성케 하려는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삼상 14:24) 등과 같은 실례(實例)가 있다.  ④ 일반적인 예배와 의무 : 사무엘상 1장 21절에 나타난 내용을 지닌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제사나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잠 31:2, 나 1:15).  ⑤소망과 감사 : 시편에 나타난 서원에는 주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것이 많다(참조, 시 56:12-13, 66:13-1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로마서 11장 25-26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시기에 앞서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이 같은 사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것(사 1:26-27, 겔 20:40, 쓱 10:6, 12:10, 13:1)으로서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온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에 관해 계속적으로 문제시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신학자들 간에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本稿)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고 한다. 

 

1. 온 이스라엘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신학자들간에 의견이 크게 이분되고 있는데, 하나는 온 이스라엘을 ‘모든 영적 이스라엘 자손’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자적(如字的)으로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는 Calvin으로서 그는 본장에서 말하고 있는 온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Calvin의 견해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25절)는 말과 상충되는 것으로서 수긍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25-26절의 문맥 관계상 후자의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Matthew Henry와 한국의 박형룡 박사 등이 있다.   

 

2. 온 이스라엘의 범위

이상과 같이 ‘온 이스라엘’이 ‘육적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남는다.  즉 ‘육적 이스라엘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생존해 있는 모든 이스라엘인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으신 참 이스라엘인들만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그 누구도 명쾌하게 대답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성경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 사상(롬 9장, 엡 1장) 및 아브라함 자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치 않는 자는 버림을 당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 8:11-12, 눅 13:6-9)에 의거해 볼 때, 우리는 본장에서 말하고 있는 ‘온 이스라엘’ 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모든 육적 이스라엘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 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에 나오는 각종 신 (神)  (0) 2022.01.07
서원(誓願)의 종류  (0) 2022.01.06
노예에 대한 성경적 입장  (0) 2021.12.19
보혜사(保惠師)의 사역  (0) 2021.12.12
음식물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  (0) 2021.12.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부활은 인간의 생각과 의학적 지식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적이 없다고 믿으며,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는 인간의 경험과 사고의 결과일 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결코 유한한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정(私情)은 하나님만 아실뿐 결코 사람이 모릅니다(고전 2:11).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마 19:23).  사람의 생각으로는 죽음이 끝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육체의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반드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요 5:28-29).    

'역사 종말론 > 전 인류의 부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0) 2021.12.1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첫째, 특별계시만이 참 종교의 근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그분과 구체적으로 교리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오직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특별계시만이 인간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둘째, 특별계시만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 이후, 죄인을 구원할 목적으로 주어진 특별계시만이 근본적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셋째, 특별계시만이 구원의 진리를 제공해 줍니다.  즉 특별계시가 죄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인 만큼 우리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충분하고도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특별계시를 통하여 확실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반계시로는 애매하고 모호한 것들이, 특별계시에 이르러 확실해지고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특별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우리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적 진리들을 성경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 당시까지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생존 성도의 몸이 변형되는 것입니다.  즉 이 지구 상에 살아 있는 성도의 몸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기에 합당한 몸으로 신령하게 변화됩니다.  과정상 죽은 성도의 부활체와는 다르지만 성질상 부활체와 똑같은 신령체로 변화됩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이처럼 그리스도는 악한 자들의 심판과 더불어 성도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바, 재림에 바로 뒤이어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성도의 육체를 먼저 영광스럽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자신의 뜻을 인류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책입니다(벧후 1:21).  다시 말하면 성경은 구원의 진리가 담긴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의 기독교의 소중한 경전입니다(요 5:39).  따라서 이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무이한 기준이 됩니다(딤후 3:16, 롬 15:4).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고대 세계에 있어서 노예의 역할은 결코 무시될 수 없었다.  그 당시의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들이었으며 매매가 가능했다. 그런데 17세기에 이르러 미국에서는 연초 재배에 있어서의 경영난을 계기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노예 해방론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861년 미국에서는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이 일어나 1865년 결국 노예 해방은 실현되었다.  그래서 본고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성경에서는 노예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구약 시대의 노예

구약 성경에 따르면 노예는 전쟁 포로, 매매(참조, 례 25:44-46), 채무(출 21:2-4, 신 15:12), 증여(창 29:24), 상속(참조, 레 25:46) 그리고 출생에 의하여 공급되었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근동 지방에서 통용되었던 노예 제도를 살펴볼 때에 더욱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바벨론, 앗수르, 수리아와 이스라엘 이전의 불레셋의 이용 가능한 자료를 검토해 보면 노예들의 노동력이 농업과 공업 분야 및 국가의 대사역 등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소지주의 농민들은 노예의 값이 비쌌기 때문에 노예 노동을 이용하지 않고 대가족 형태의 노동력으로만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처럼 많은 노예는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적 배경하에서 노예를 노동력으로 이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히브리 사회에서의 노예는 대부분의 근동 국가에서와 같이 말이나 소처럼 취급되지는 않았고, 다만 주인 밑에서 천한 일을 담당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노예를 어떻게 처우했는가를 살펴볼 때에 더욱 분명해진다.

 

2. 구약 시대에 있어서 노예의 처우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가 되는 경우로는 채무자 자신이나 그 자녀를 빚의 담보물로 잡혀 그 빚을 갚지 못해을 때가 가장 많았다(참조, 출 21:5-6, 신 15:16이하).  일반적으로 어떤 채무자가 그의 딸을 채권자에게 팔면 그녀는 성숙해질 때 주인 또는 그 아들의 처나 첩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 집의 어떤 남자도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그녀는 속량금을 내지 않고도  해방될 수 있었다(출 21:11).  뿐만 아니라 채무 관계로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은 안식년, 즉 제7년 만에 해방될 수 있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주인에 의해서 불구자가 된 노예는 해방될 수 있었다(출 21:26-27).  그리고 노예가 주인에게 맞아 죽으면 그 주인은 형벌을 받아야 했다(출 11:20).  종교 생활면에 있어서도 노예들은 안식에 휴식할 권리가 부여되었으며, 만일 그가 할례를 받았다면 언제나 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출 12:43-45).  뿐만 아니라 제사장  집의 노예는 거룩한 제물도 먹을 수 있었다(레 22:11).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노예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3. 신약 시대의 노예

이 당시의 노예 제도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A. D. 1세기경 로마인들이 노예를 취급했던 방식과 노예를 대단위로 해방시켰던 정책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자유 시민이 감소하여 군역(軍役)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예들은 주인의 이름과 후원 아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노예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로마로 끌려온 유대인 노예들도 로마에 와서 곧 해방되었는데, 그 근거로 우리는 카타콤의 묘비에서 노예에 관하여 언급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로마의 해방 노예들이 사업에 성공한 예가 많으며 심지어는 지방 행정관으로도 봉직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는 범죄 한 노예도 자유민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A. D. 20년 로마 원로원의 포고령이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당시의 노예 제도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바울과 베드로는 노예 제도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개종한 노예들에게 주인을 섬기라고 권고하고 있다(참조, 몬 1장).  이와 같이 어느 서신에서도 기독교인이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거나 그 노예를 포기한다는 가르침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주인들에게 노예를 친절과 배려로 다루어야 한다고 권면했다(엡 6:9, 골 4:1).  이 말은 노예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격체임을 나타내 준다.  다시 말해 개종한 노예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란 의미이다(골 3:11).   

 

4. 결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신구약 성경에는 노예 해방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언급한 귀절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노예를 율법으로 보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나 자매로 받아들이며 함께 교제했다는 사실은 근대 사회에 이르러 노예 해방 운동의 한 실천적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원(誓願)의 종류  (0) 2022.01.06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0) 2021.12.26
보혜사(保惠師)의 사역  (0) 2021.12.12
음식물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  (0) 2021.12.05
여호와 증인  (0) 2021.09.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한 마디로 부활이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동양 종교, 특히 불교에서는 환생(幻生) 즉 형상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다는 사상을 갖고 있지만 기독교는 이와 다르게 죽었던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죽는 일이 없는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고전 15:53-54).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기독교는 한 마디로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리는 부활의 신앙이 바로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반계시를 보다 명료하게 하며,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 타락 이전에는 일반계시만으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으나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그것은 흐려지고, 또한 사람의 영안도 어두워져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와 사람의 마음속에 쓰신 글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계시로써 그것을 재교정, 재해석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런 목적에서 하나님은 일반계시에다 특별한 말씀의 빛을 더 첨가했던 것입니다(John Calvin).  그러므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를 그 배경으로 할 때보다 효과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쉽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특별계시인 천국의 진리 및 구원의 도리를 교훈하실 때, 씨 뿌리는 비유나 감추인 보화의 비유 등(마 13장) 일반계시적인 세상 진리를 근거로 해서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시사해 줍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여기서 죽은 성도라고 하면 그 육체는 땅에서 썩어 흙으로 변하였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던 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나 그 육체는 아직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육체는 썩어 흙이 되었지만 영혼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던 성도들이 무덤 가운데에서 일어나 현재 사람이 지니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것을 죽은 성도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때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육체와 온전한 영혼이 하나로 연합되어 신령한 부활체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5:28-29).  죽은 성도에게 이처럼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이 있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고전 15:52-53).  즉 재림 직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은 성도가 신령한 부활체를 입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몸으로 천국의 기업과 상을 받아 영원한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롬 8:17-18, 고전 15:5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히 4:12).  즉 인간의 말은 실행되기 전까지는 효력이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창 27:33).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는 방편이 되었으며(창 1:3, 시 33:6, 히 11:3), 또한 예수의 이적적 탄생을 확실케 하였듯이(눅 1:37) 반드시 성취되는 능력을 자체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구원의 도리로 신뢰하는 까닭이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이 지닌 능력에 연유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요한복음 14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신 후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 언급되어 있다(16절).  ‘보혜사’(paraclete)에 해당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는 ‘대언자’, ‘변호인’, ‘옹호자’, ‘중재자’, ‘조력자’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것 외(16, 26절, 15:26, 16:7)에 단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다(요일 2:1).  그러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우리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인간을 위한 구속 사역을 수행케 하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보혜사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정(擇定)해 놓으신 자(롬 8:30, 엡 1:4)의 마음속에 내주(內住) 하신다(요 14:17).  그리고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하여(요 15:26),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가르침에 대하여(요 14:26), 기독교의 모든 진리에 대하여(요 16:13), 가르쳐 주시고 믿게 해 주신다.  그 결과 그들은 죄 가운데 살아온 지난날을 뉘우치며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된다(참조, 행 2:37-38).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이미 구원의 반열에 든 자’라고 칭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렇지만 인간을 위한 보혜사의 구원 사역이 이로써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는 계속해서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신다(참조, 갈 5:16-23).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성도들이 온전히 구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참조, 히 6:11-12).

'연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0) 2021.12.26
노예에 대한 성경적 입장  (0) 2021.12.19
음식물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  (0) 2021.12.05
여호와 증인  (0) 2021.09.12
성경의 영감 (靈感)  (0) 2021.09.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먼저 처처에 전쟁과 기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마 25:6).  그 누구도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 자라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분쟁이 있는 곳에는 화해자로, 기근이 있는 곳에는 봉사자로 나서되, 현실이 허락지 않으면 현장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통하여 도울 방법을 찾아 도와야 합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 신앙의 세계를 어지럽힐지라도 우리는 온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마 24:14).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그들을 돕되 때로는 떡으로, 때로는 섬김으로 봉사하되, 무엇보다도 복음의 말씀을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환난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마 25:9).  우리 예수님은 어떠한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환난이나 핍박을 당하더라도 담대하게 대처하며 믿음으로 더욱더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끝으로 온갖 유혹과 불법이 성행하여 서로 미워하고 사랑이 식어가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마 24:10-12).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고 세상의 불법을 바로 잡되 서로 미워하는 영에 속지 말고 서로 사랑하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죄로 인하여 일반계시가 흐려지고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일반계시는 완전하게 주어졌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과 역사와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일반계시만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더구나 일반계시는 구원의 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계시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불충족성을 극복하고 인간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계시의 핵심이 구원의 책인 ‘성경’이고, 성경의 절정이 구원의 실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를 명백히 입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계시인 성경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외엔 우리 인생들에게 다른 구원의 방도가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의 부활이 있다고 증거합니다(고전 15:51-52).  즉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곧 부활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불신자의 부활도 있게 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한한 인간의 저술은 상대적 가치만을 지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더불어 절대성을 갖습니다.  즉 성경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한 도덕적 원리와 영적 진리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선악(善惡)과 진위(眞僞)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이는 성경이 창조자로서 모든 것이 기준을 세우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신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