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고’(고전 12:3),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말씀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도 받았다(엡 1:3).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 14: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고전 12:31),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명령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 받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항상 충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은사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롬 12:6, 약 1:17, 엡 4:7, 11, 고전 12:11).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 11장 17, 25-2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신 34:9),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한 것 같이(왕하 2:9) 사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인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반드시 사람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히 2:4).  즉 성경의 말씀대로 사도를 통해(롬 1:11) 기도하는 대로(고후 1:11) 후회함이 없이(롬 11:29)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롬 12:6).    

한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에베소서 2장 8-10절 말씀을 들먹거리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라고 판에 박힌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깨끗이 씻어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딛 3:5)는 성경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느냐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처럼 직접 불러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행 9장) 아니면  목사, 전도자, 집사, 이웃집 사람, 가족, 친구들을 통해 은혜로 불러주신 것인가?(요 6:44).  목사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이다(마 28:19-20, 행 13:1-3).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받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냄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라고 말한 것처럼 나다나엘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요 1:43-48).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을 얹는 종교적 행위인 안수는 어떠한가?(막 10:16, 눅 4:40, 행 8:17, 13:2-3).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딤후 1:6) 즉 꺼져가는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그가 성직을 위임받을 때 받았던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다시 불 붙여 살게 한다는 뜻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불 타오르게 하는가?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이다.  사실 우리가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 누군가가 임파테이션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게 되면 누구도 예외로 두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누구에게든지 부으실 수 있다.  보통은 골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기름부음(chrisma)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집회 군중 속에서 만지신다.       

구세군 창설자인 William Booth는 말한다.  “불은 꺼지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능력을 한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달리 말하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주일날 말씀 한 번 듣고 1년간 ‘열중쉬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열중쉬어’ 한 마디를 못해 완벽한 3 무(무능, 무지, 무식)를 가진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기름부음을 인정하는 것의 기본이다.  우리는 은사가 식어지고 사명 의식이 희미해질 때, 다시 은혜를 받아 은사를 불타게 하여야 한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처럼 주어진 기름부음 안에 살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목회를 열심히 하지만 피로와 탈진, 그리고 영적 무기력에 쉽게 빠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지만(고전 2:14) 영적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바리새인 같이 위선자(마 23:27)의 모습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은사가 나타나거나, 혹은 남들보다 설교를 잘하고, 신학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고 속단하는 경우다(마 26:31-35).  성령과 무관하게 병 고침의 역사가 나타나고, 설교를 할 때마다 신자들로 하여금 ‘아멘’ 혹은 “은혜를 받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착각이다.  이것은 단지 거짓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롬 11:29).       

나는 오래전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말씀을 증거하고 안수를 받는 시간에 한 번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받기 원했다.  여러 집회를 참석해 보았지만, 특별히 Randy Clark과 Reinhard Bonnke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을 때, 안수하는 그들을 통해 내게로 흘러 들어오길를 간절히 바랐다.  이 기름 부으심을 받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사모했는지 모른다.  자동차가 기름을 한 번 넣고 일평생 탈 수 없는 것처럼 기름 부으심을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엡 5:18).  

그러나 사람들 중에 은사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고전 12:7, 11), 사역자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개인적으로 은사 내리기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어떻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먹이 사냥을 위해 상투적으로 꺼내 쓰는 골빈 소리다.  만약 이들이 성경에서 특정 구절을 들어 자기해석(eisegesis)을 하는 데 사용한다면 바리새인(마 23:33)이 성경을 곡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마 15:9).  참으로 두려운 것은 이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항상 성령을 대적하고 궤변 같은  가설(假說)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정말, 피조물인 인간이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가?  간혹 신비주의적 중증 환자에 가까운 미친놈(?)이 있기는 하다.  브라질에도 있고, 광화문에도 있다.  하지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고 반쪽짜리 성경 지식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을 독점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점유할 수 없다.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요 3:8) 그분은 우리와 타협하실 위치에 계신 분이 아니며, 우리에게 매수될 분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체인 시스템처럼 라이선스(license) 를 함부로 남발하시는 분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분을 공경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분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돌 같이 굳은 완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겸손하게 은혜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야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맞추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농사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하고,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 아닌 것처럼 기름 부으심이 사역자의 손을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오늘날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역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내리시기도 하고 또한 가지고 있는 은사를 더욱 강하게 다지는데 도움이 되게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엡 1:11),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시 103:19).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그분의 뜻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들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든지 슬프게 할 수 있고(엡 4:30), 또한 기쁘게 할 수 있듯이(시 147:11),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왕하 20:2)나 베드로처럼(행 12:5), 그분의 뜻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도 그분은 어지럽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과부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지(눅 18:7) 그것도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마 6:6, 9).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내버려 두시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통반장 다 하시면 되는데 말이다. 

성경은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기도가 그분의 뜻에 미치는 영향 모두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신비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듯이(창 216-17), 우리는 마음에 사모하고(고전 14:39) 있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 구하거나(고전 14:13), 상대방을 놓고 기도해 줄 때 기름부음이 흘러나갈 수 있고(약 5:14-16),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마 21:22).  결론이 무엇인가?  안수를 통한 기름 부으심은 다양한 것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고전 12:11), 신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받아본 자만 안다(계 2:17).  

'기름부으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볼로 신학  (1) 2023.01.08
기름부음 사역  (0) 2022.12.25
엉션(unction)  (0) 2022.12.03
임파테이션(Impartation)  (1) 2022.11.26
기름부음  (1) 2022.11.13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