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쉽게 율법이라고 통칭하는 ‘언약법’의 실체는 그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며 각 분야마다 또는 전체로서 범위 및 역할이 다양하고 구원의 복음과도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갈 3:22).  흔히 종교사학파에 속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율법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율법의 본질을 창조부터 종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약과 대응되는 구약의 언약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신약시대의 복음과 관련하여 갖는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갈 3:24)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시 19:7-1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율법서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이 대부분 각종 제사 제도, 정결 예법, 이스라엘의 절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율법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이 율법을 포함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즉 율법은 반포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출 24:12),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딤전 1:8).

먼저 구약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제사 제도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모세오경에 기록된 제사 규례(레 1:1-7:38)는 그 세밀함과 구체성, 그리고 반복적인 강조 등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이런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죽음(빌 2:6-11)과 부활(행 2:23-24) 이후 폐지된 것을 생각한다면( 2:15), 우리에게 과연 그렇게 상세한 기록이 필요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규례를 상세히 가르치시고 그 율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 즉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레 17:11)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희생제물의 피는 정결함과 용서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었다’ 사실상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히 9:22)  아울러 제사장이 매일 서서 반복되는 제사와 짐승의 피로서는 결코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다( 10:11).  오직 무흠 하신 예수 그리스도( 4:15)의 구속의 보혈만이 단번에 영원토록 모든 죄인의 죄와 허물을 사할 수 있다(히 9:12).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적으로 완벽하고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8:1).  

그런데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갈 3:10).  율법이 성취할 수 없는 요구 사항들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범죄 한 인간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다(롬 2:13).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았다(갈 3:13).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히 5:8-9), 죄 없는 희생, 즉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롬 5:18)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온전하신 분이었다.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짊어지셨다(신 21:23).  결국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생명에 이르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받는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이런 의미에서 구약 율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이기에( 8:5), 우리는 율법의 각종 규례와 가르침을 통해 그것들이 예표하는 실체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바라볼 있어야 한다( 3:13).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율법은 결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율법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율법 중의 핵심인 십계명( 20:1-17)도 크게 그 내용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신 6:5)과 이웃 사랑’이다(레 19:18).  만약 율법의 가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표면만을 바라본 사람들은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억지스러운 계명으로, 혹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법률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 22:36),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이것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12:28-31).  십계명과 다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두 계명을 지킨다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롬 13:8-10).  말씀의 의미는 구약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에 바탕을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바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례인 것이다( 22:35-40). 

사도 바울 역시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13:10)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3:20, 3:11, 5:4).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옥에 가야 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6).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이것을 있다면 율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율법을 받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는 것이다(신 30:10).  이런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출 24:12).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신앙(출 20장, 레 1-7장)과 공동체 내에서의 질서 유지(신 19-25장), 더 나아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였다(신 10:12-22).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거스리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셨다(신 30:15-20).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반복하는 역사를 전개함으로 인해 그에 따른 번영과 오욕을 역사에 남겨야만 했다(히 3-4장).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전 10:11).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하며 율법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 14:21, 계 1:3).  아울러 불순종하는 삶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엄청난 불행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고전 10:1-12).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율법은 구약시대의 백성만을 위한 법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는 생명의 법이 된다(마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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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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