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구원사역(요 3:3-5)이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같이 성경 말씀이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것 중 대부분의 내용에 생각이 일치하거나 똑같이 믿는다.  신자들 대부분은 성령이 우리에게 전도할 능력을 주신다는 데에 동의하며(행 1:8) 최소한 몇 가지 영적인 은사(고전 12:3-11)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롬 8:1-2),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요 16:13)에 동의한다.  그러나 간혹 특정 은사, 즉 ‘방언’이나‘예언’의 중요성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나 성령 세례를 받는 때가 회심 때의 사건인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신학적 입장들이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 

본고(本稿)에서는 내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입장을 변호하겠지만 내 개인의 편견이나 신학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리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성경에서 믿는 내용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 다양한 측면들을 공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몸은 교단이나 교파, 그리고 신학의 경계선을 넘어 어느 것에 한정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성도들의 교제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폭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다.  그런데 지금은 영적 은사를 실천하고 긍정하면 노골적으로 ‘은사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 심지어 ‘귀신 들린 자’로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여기서 한 가지만큼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나에게 있어 ‘은사주의’란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4-11, 28-31절,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의 영적인 은사를 지칭하는 용어인 ‘카리스마타’ (charismata)를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오해가 무엇인가?  ‘은사주의자’란 현세의 이득을 위한 기복신앙의 가르침을 옹호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미국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Jim Bakker는 진정한 복음이 아닌 ‘번영 복음’을 가르쳤다.  그는 『I was Wrong』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년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내용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감옥에 있으면서 문맥에 따른 성경 연구는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것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시기에(고전 4:3-5)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다. 

여기서 나 자신의 신앙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학사 과정을 오순절 신학에서 했기 때문에 오순절 교단을 한 때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오순절 교단이 아닌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밝으면서 미국 개혁교단에 소속이 되었다.  이런 다양한 배경 속에서 나는 기도원에서 20년 넘게 고생한 육체의 질병을 완벽하게 고침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경험했다.  지금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방언을 성령 안에서 하고 있다.   

내게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국의 합동과 고신과 통합, 그리고 미국의 Talbot와 Westminster, 그리고 Calvin과 Reformed 신학을 공부한 많은 친구들이 있다.  이들과 성령의 사역의 몇몇 측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비방하고 정죄하는 그런 좋지 못한 사이는 아니다.  언제나 만나면 좋은 친구이며 동역자들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 즉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 신자들이 하나같이 ‘성령의 사역자’ 혹은 ‘은사주의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일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먼저 우리의 관점이나 생각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는 충격적인 말을 한마디 하겠다.  예수님보다 유익하신 분이 성령이시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고 싶지 않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을 읽어보길 바란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또 다른 보혜사'(요 14:1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성의 두 위격이 같이 공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삼위일체란 두(모두 합하면 셋) 위격이 언제나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한 분 안에 계신 세 인격,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성삼위 안에는 시기나 경재 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지극히 높이신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한 번에 한 장소에 국한되었다.  다시 말해 그분은 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고(마 3:9)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능력은 있어도(마 14:13-21) 이스라엘 땅을 떠나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행 1:9-11) 육체적으로 지상을 떠나셨지만 성령을 보내기로 약속하셨다(요 14:16).  예수님의 떠나심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 가운데 거하실 수 있음을 의미했다(고전 3:16).  성령에 의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행 1:8).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다(요 16:7).  그리고 성령께서는 세상에서 하셔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으신지에 대해 그분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성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돌아가셔야만(요 12:6, 23) 성령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요 14:26, 15:26, 16:13).  이러한 이해는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이시며(엡 1:7), 신인(神人)이시다(롬 9:5, 골 2:9).  이 말의 의미는 영광에 관한 한 성령은 초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날에 모든 무릎이 끓을 대상은 성령이 아니다(엡 1:20-23).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 오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적용하시는 역할을 하신다(요 3:3-5).  성령은 자신에 대해 증언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요 15:26),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러 오신다(요 16:14).  예수님은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주님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자로서의 그분의 사역(딤전 2:5-6)과 그분이 받으실 합당한 찬양이다(계 5:13).       

예수님의 떠나감이 없다면 성령의 사역은 불가능하게 된다(요 16:7).  구원도 없고(고전 12:3), 성화도 없고(살후 2:13-14), 영화도 없다(롬 8:11, 23).  한 마디로 너나 할 것이 없이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롬 2:9)은 지옥행이다.  그러나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이 떠나시면(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요 14:16) 즉, 성령께서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밝히셨다(요 14:17).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못하게 될 때(행 1:10),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요 16:13)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요 14:26) 능력을 주시는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눅 24:49).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결과들을 구약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사 11:1-10, 32:14-18, 42:1-4, 44:1-5, 겔 11:17-20, 36:24-27, 37:1-14, 욜 2:28-32).  이러한 실상들은 이제 세상에서 제자들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 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말씀(마 13:36-43)을 배우고 현장 실습(마 17:14-21)과 훈련을 받았지만(막 4:35-41)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9).  '은혜의 성령'(히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예수의 영'(행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성령을 왕따 시키고 예수를 유난히 더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가 좋은가?  물론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2:2).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 역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 한 없는 은혜와 감사를 날마다 고백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회적이며(엡 2:1) 단독적 사역(요 3:5), 즉 거듭남(엡 2:8)과 더불어 지속적 사역인 성화의 과정(골 1:9-12, 엡 4:22-24)을 내 인간적인 노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빌 1:6, 살후 2:13).  다시 말해 매 순간마다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 8:26-27), 소망을 갖게 하시며(롬 15:13) 왕 같은 제사장으로(벧전 2:9)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는(롬 8:16) 성령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다.  단 한순간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고전 10:13)이 나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하며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오래전  A. W. Tozer가 이런 말을 남겼다.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5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차이점을 모를 것이다”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는 성령님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유지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신학적 배경과 청산유수 같은 달변, 든든한 교회 재정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당회, 주보에 나열된 선교지의 열매와 대대로 내려오는 교회 전통 등을 생각하면 그다지 성령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갈라디아 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회가 많다(갈 3:3).  한번 눈여겨보길 바란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성령을 예배하는 것(빌 3:3)을 불편하게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롬 1:16).  능력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dynamis)는 우리 시대의 단어인 ‘dynamite’(다이너마이트)나 ‘dynamic’(역동적인)의 어원이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너마이트와 같다.  세상적인 관점과 전통을  파괴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는 더 견고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와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렘 23:29).  바울의 말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뇌관(?)이 제거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  교회들 마다 여러 종류의 집회가 많은 것은 초신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종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정말 다양하다.  각종 전도 집회와 예배가 많아 교인들이 정신이 없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하는 것이 복음(Good News)은 복음인데, 그 복음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메마른 복음, 즉 뇌관이 빠진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바울은 복음 메시지의 능력은 설교자의 달변이나 논리적 전달하는 재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이 말은 아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에 나온 고백이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지닌 진리를 아덴 청중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각 사람의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도행전 17장 16-34절까지 설교를 분석해 보았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섭리와 존재를 말했지만(24-2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섭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26-27절) 헬라 시인들의 말도 인용했지만(28절) 구속이나 계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세계의 역사를 말했으나(29-30절) 구원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부활은 강조했지만(31-32절) 십자가를 증거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종자가 많고 적음에 의해 전도의 성패를 평가할 수 없고, 또한 그 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아덴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의 전도는 실패했던 것 같다.        

탁월한 신학자인 바울은 앞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이 아닌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앞서 말했듯이 바울은 일찍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했다(롬 1:16).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4).  그러나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5:1-2)인 진정한 복음,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 했다(갈 5:11).  여기서 궁금하지 않은가?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다면 구태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필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직 말씀', 그것 하나만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진정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말이다. 

조금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1:14).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완전한 발현이시며(골 2:9), 요한은 태초에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이라고 불렀다(요 1:1).  여기서 ‘말씀’은 사탄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그분은 단지 말씀만으로 육체의 질병과 악한 영들을 제거하실 수 있었다(마 8:16).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4:12).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계 22:18-19).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이며, 이 성경의 저작권을 갖고 계신 분이 성령이시다(벧후 1:20-21).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닌(갈 1:11) 율법과 대조되는(요 1:16-17) 구원의 복음(엡 1:13)이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려져 있지만(고후 4:3)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고전 1:24)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했다면 반드시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어찌할꼬’ 말하면서 회개했다(행 2:36-38).  왜 베드로에게는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가?  베드로 역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것일까?  오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차별을 하시는 것 같다.  열 두 제자 중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더 사랑한 것 같았고(막 14:33, 눅 9:28)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셨다(요 11:3).  마치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처럼 말이다(롬 9:13).      

오늘날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을 외치는 목사들은 많다.  마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처럼 말이다(마 7:21).  문제는 기적같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기적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고전 2:2).  바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갈 6:14).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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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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