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서 안식'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3.05.07 사역자가 받는 유혹 1
  2. 2023.04.30 판단의 표준들
  3. 2023.04.23 육체적인 반응들
  4. 2023.04.16 에드워즈에게 나타난 현상 1
  5. 2023.04.09 웨슬리에게 나타난 현상 1
  6. 2023.04.02 쓰러지는 체험
  7. 2023.03.26 쓰러지는 원인
  8. 2023.03.19 쓰러지는 현상

나는 경험해 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깎이거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시 24:3-4).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역사이다’, 혹은 ‘악령의 역사이다’라고 말하면 나는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사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IHOP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나돌 때,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Peter Wagner 박사,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필수과목인 YWAM Kona, 치유와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Reinhard Bonnke 선교사, 그 외 Randy Clark을 비롯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자칭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사역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이들을 만난 이유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알아보고 쓰러지는 현상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책을 통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그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귀신이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말이다.     

그런데  이단 사냥질 하는 목사와 신학자 중에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영적세계에 대해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발췌독하는 가운데 영악하게도 빗나간 해석으로 독선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하게 모르면 “체험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라고 말하면 좋을 뗀데 명색이 목사라고 쪽팔리는지 신학적 궤변을 내세워 무조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세운다.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한 마디로 바리새인처럼 ‘싹수가 노란’ 것 같다(마 12:22-37).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할지 안 변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지금 이들의 영적 상태를 성경적으로 말하면 독을 품은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요 8:44). 

나는 장기간 말씀의 사역을 하다가 성령의 사역을 목회에 접목시켰다.  처음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나서 사역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인가에 대한 매우 강한 호기심에 사로 잡히곤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성령의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통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분의 역사를 기대한 적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져 보이고 싶어 했다.  이런 미숙한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역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목회의 모든 측면에서 동기자체가 순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쓰러지고 그것이 반복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사역자 스스로가 순수한 동기를 가지려는 노력은 어려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기름 부어 주신다는 그럴듯한 증거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역자 안에는, 즉 그 사람이 ‘성령의 사역’을 하거나 혹은 ‘말씀의 사역’을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행동들은 엄청난 유혹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이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구제, 기도, 금식을 했다(마 6:1-18).  이 성경구절이 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일을 했다면 우리들도 얼마든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고전 10:11).  그러나 자기 자신만큼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권능 아래 압도되어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오만의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현상이 극적이고 가시적이며 사역자 자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쓰러져 안식한다는 것은 사역자 자신이 거룩하다는 징표가 아님을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막 7:20-23).  정신과 의사이며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는 이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았다는 이런저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한두 가지의 비밀스러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천천히 익숙해져 간다. 그러한 죄가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그런 지도자를 쓰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사실 그 지도자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라는 말은 종교적인 상투어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능력이나 특권을 오용할 수 있기 때문에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가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사역자는 그런 일을 멈추고 단념해야 만 할 것이다.  만약 쓰러지는 현상이 사역자 자신이 직접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현상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은 안수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역자가 안수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상대방을 놓고 큰 소리나 혹은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의 효과적인 중재이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중재 형태는 때때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사역자가 쓰러지는 것을 열망한다고 여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 중요성에 대해 과장된 개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역자는 사람들 앞에서 극적인 효과를 노리게 된다(마 23:5).  그 결과 기도받는 사람은 최면술의 자기 암시로 성령의 임재와 무관하게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보이므로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죄의식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쓰러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성령의 임재와 상관없이 무언가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일부러 쓰러지고, 또 다른 사람은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맡김으로 그분의 임재 아래 쓰러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사역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미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너무 익숙해 있어 꼭 쓰러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또는 감정적으로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쓰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사역자의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고 치료하실 것을 열망하는 것이지(행 4:10), 그 사람이 성령 안에 쓰러져 안식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John White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물론 쓰러지는 것과 안식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7장 20절 말씀을 기억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안식할 때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혹은 영과 육이 치유받거나 또는 귀신으로부터 해방은 사역자의 노력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막 16:17-18), 사역자는 자기만족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보잘것이 없음을 통감해야 한다(눅 17:10).  이러한 현상이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것을 깨닫고 베드로와 요한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행 3:12).

따라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Lloyd Jones가 『부흥』에서 말한 것을 인용해서 결론을 내리고 싶다.  “현상들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들을 허락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우리의 눈을 언제나 주님의 영광에 고정시키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전 5:19-22).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행 16:7)에 사역자는 현상이나 체험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영적체험을 하더라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히 12:2).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오직 예수’다(행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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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최고의 기준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거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다(마 16:17).  예를 들어 “시저가 주다”라고 말하도록 요청받는 시대에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고전 12:3).  여기서 “예수가 주(主)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는 고백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애주의나 놀라운 표적과 기사 등의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고백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의 독특한 신성을 믿지만(요 5:58), 성부와의 동질성과 동일 영원성 및 성육신을 믿지 않는다면(요 10:30, 1:14), 그는 신자도 아니고 성령은 그 속에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세에 주의해야 할 부분은(마 7:21-23, 24:23),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일(막 16:17-18)을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행 16:16),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살후 2:9).  사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마다 마귀도 기회를 노려 가능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무산시키려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모조품을 제시하려고 애쓸 것이다(고후 11:1-3, 13-15).

Lloyd Jones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성령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소멸의 위험과 다른 하나는 무작정 수용하는 것으로 성령을 소멸할까 두려워 영적인 분별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들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부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현상들을 장려하거나 추구해서도 안 된다. 나는 그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나왔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성의 연약성과 우리 육체의 체질이 약하기 때문에 혼합되기 쉬우며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심리적인 면에서 부분적으로는 마귀의 활동 결과로써 함께 섞이기 쉽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전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일은 없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신약 전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언제나 다른 세력들이 개입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거짓된 것을 떼어내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각오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술책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물리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때마다 무조건 마귀의 자식인 바리새인들(요 8:44)처럼 ‘귀신의 역사’라고 말하지 말고(마 12:22-37),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라는 것이다(살후 5:19-22).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싸잡아 비판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바리새인 가마리엘처럼 말이다(행 5:38-39).    

정신과 의사 제3 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역시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표적들 가운데에는 변태적인 심리 혹은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의 표적들은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고 계시다는 징표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쓰러지고 진동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아니라면 성령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실 것이고, 반면에 쓰러지고 진동하는 경험이 없어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열매이다”  

이 말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자가 경건하거나 모든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열매를 보아야 그 결과를 알 수 있듯이 쓰러진다든지 몸이 진동한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보다는 그 현상을 체험한 사람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가 더 중요하다(마 7:19-20).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임재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에서 체험의 결과와 열매에 대해 자신의 아내 Sarah Edwards에 대해 말했듯이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생활 속에 그분의 영광과 열매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13:1).   

Edwards도 무엇이 성령의 진짜 역사하심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판단의 표준들을 설명하였다.  그의 첫 번째 문제는 그의 집회 기간 동안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것으로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떨거나 신음을 하거나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몸의 고통을 느끼거나 신체의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감동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영향력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감동에 의해서 어느 쪽이든 판단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규칙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표현 자체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이러한 표현들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표현들이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에 대한 정당한 반응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진짜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가려내야 한다(요일 4:1).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 우리에게 있어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우선이 되는 기준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이다.  즉 성경에 무식하리만큼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주관주의적 ‘자기 해석’이나 앞뒤가 꽉 막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독단적인 주장’, 그리고 쓸모없고 죽어 있는 ‘교회 전통’과 어떤 조잡스러운 ‘신학적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만약 어떤 행위가 성서적이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Edwards는 성경이 어느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짜 역사하심을 결정하기 위한 유일한 테스트는 그 역사하심과 그로 인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느냐는 것으로 판단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참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도록 주신 테스트이다.  성경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7:18-20).  간추려 말한다면 교회나 집회에서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베드로처럼 편견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행 10:9-16).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날마다 아내를 핍박하던 불신자 남편이 어떤 계기로 인해 집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통해 놀라운 체험, 즉 몸을 떨고 쓰러지거나 비명소리를 질렸다고 가정해 볼 때, 아니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면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못해 그러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수군거리며 멀리할 것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쉽게 판단을 내린다.  거의 심판 자리에 앉으신 하나님의 수준이다(약 4:11-12).  하지만 그 현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예전과 같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께서 그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막 5:1-20).  

요지가 무엇인가?  눈에 거슬리는 이상한 현상은 어떤 행위나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를 결정하는 성경적인 유일한 규칙이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22-23).  Edwards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마디로 정리한다.  “과수원의 토양보다는 그 열매가 중요하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메마른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묵은닭(?)들보다는 한번 쓰러지고 난 후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녹내장 환자처럼 할례 받지 못한 눈을 가지고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삼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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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Jebb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과 요한일서 4장 1절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No Laughing Matter』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성령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사람들의 반응은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웃거나 몸을 흔들거나 넘어질 때 이들 위에 성령이 계신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며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받은 전체적인 인상은 이러한 현상이 주로 그 상황에서 자기 유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지 않았고 그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과 존경심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령을 소멸하는 데는 많은 방법들이 있는데 ‘토론토’ 현상도 이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1994년 초 Toronto Airport Church에서 일어난 현상을 두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성령께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쓴 글이다.  그는 John F. MacArthur의 책 『Charismatic Chaos』의 글을 인용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크게 체험하는 것은 어떤 굉장하고 이상한 기적이나 기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성령께서 다스리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현상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비성경적이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기괴하고 무질서한 것은 멀리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Jonathan Edwards의 시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고전 14:33, 40)에 대각성을 성령의 역사로 보지 못했다.  이들은 집회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반응들이 너무 이상하고 혼란스러움으로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절대 역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비난들은 Edwards 당시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행 2:6-13),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와 비슷한 종류의 집회에로 돌려지고 있다.

Edward N. Gross는 『Miracles, Demons, and Spiritual Warfare』에서 Charles Hodge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감동을 종교적인 감동의 올바른 결과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성경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결과들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의 설교에 따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집회 내에서의 울부짖음이나 기절이나 경련 혹은 헛소리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성경의 권위는 그러한 모든 혼란에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모든 것들이 점잖게 질서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올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혼란스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나는 Charles Hodge의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다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을 취한다(살전 5:21).  모든 것을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무질서 속에서 질서 있게 일을 행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창 11:9), 하나님의 역사가 때로는 조용하게(왕상 19:12), 때로는 강하게 나타나는 것(행 4:31)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성급하게 싸잡아 취급하는 잡설(雜說)에 가까운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이렇게 Gross가 인용한 Hodge의 말에 반하여 성경에는 육체의 감동이 성령에 대한 올바른 영향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부분이 많이 있다.  신구약 성경에 따르면 성령의 임재는 때때로 사람들 속에서 육체적 반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즉 눈물, 울부짖음, 경련, 황홀경, 몸의 힘이 빠짐, 흔들림과 떨림, 육체의 쓰러짐까지 다양할 수 있고, 이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연합하여 일어나는 극적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표현의 현상으로 하나님의 현현(출 19:16-25), 천사의 출현(마 28:4), 귀로 들을 수 있는 주님의 음성(마 17:6-7), 환상들(단 10:7-11), 주님께 대한 반응들(요 18:6), 그리고 예수님의 출현을 통해 일어났는데(행 9:3-9),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다소 명백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경험들이다.

다른 하나는 정도의 차이가 아주 작지만 확실한 현상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분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하므로 떨며’라고 기록하고 있다(시 119:120).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반응을 기대하셨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렘 5:2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무형의 임재 속에서 떠는 것은 결코 육체적으로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사 66:2, 스 9:4).

더 나아가 우는 것도 하나님의 무형의 임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사실 이렇게 우는 것이 히스테리나 심리적인 속임수의 결과가 아닌 이유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그들이 자연스럽게 울었기 때문이다(느 8:8-10).  그리고 때로는 술 취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도하는 동안 한나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삼상 1:12-17).  입술만 움직일 뿐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은 한나의 이 같은 모습은 내적으로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여호와 앞에 해결해 보려는 진정한 경건의 표현이었다.  본문에는 ‘취한’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 왕은 분명히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했을 때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면서 취한 것 같이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삼상 19:23-24).  신약에 와서는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새 술에 취했다는 소리를 들었다(행 2:13).

무아지경 역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인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기도하는 기간 동안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후에 내가 예루살렘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무리들 앞에 스스로를 변호한 적이 있었다(행 22:17-18).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역사의 또 다른 범주는 날카로운 비명과 의식불명, 그리고 경련으로 귀신들이 쫓겨나갈 때 나타나는 반응들이 있다(막 1:21-28, 9:14-29).  이것에 대해 John Wimber는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과의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반응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육체적인 반응이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Gross는 또다시 Hodge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서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러한 구절은 대중 예배를 행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언급으로 질서와 엄숙함과 헌신적인 태도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금해야 한다. 큰 소리로 울부짖음과 경련은 이러한 것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마디로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목사가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그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으로 뛰어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적이 없다면 그 신학은 메마른 박제(剝製) 신학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한 두 가지 상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먼저 교회는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은사적(고전 12:12-27),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행 7:51) 눈에 비늘 같은 것이 씌워져 있어(행 9:18) ‘의견의 다양성’과 ‘시각의 다양성’, 그리고 ‘경험의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관종처럼 튀어나오는 것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무식하게 우겨 되는 교조주의적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특별히 옳고 그름의 논리적 배타성을 자신이 배운 신학 안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자의적 해석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은 항상 옳고 상대방은 언제나 틀렸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확증편향에 의한 아전인수식 사고방식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것은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세뇌시키면서 과대망상증 환자 같이 자기 생각 속에 그릇된 자부심을 고취시킨다.  더 무서운 증세는 피해망상과 피해의식이다.  자신만이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상태가 좋지 않다.  이런 사람은 하루빨리 영적 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할 시급한 환자라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 배후가 귀신의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고, 의학적으로 말하면 조현병이 서서히 진행 중에 있다.  가장 큰 불행은 본인이 이것을 절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가 제시한 대답은 이러한 무경험 비판자들, 특히 히스테리컬 한 병적 증세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는 『The Distinguishing Mark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큰 외적인 표현들을 회피하지 않도록 그들이 참석하고 있는 공적인 수단을 방해하거나 흩어져 버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내가 이것이 혼란스러움이나 불행한 방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비오기를 기도하기 위해서 들에 모였다가 소나기가 오면 그들의 행위를 멈추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명령이 주어지는 목적을 이룸으로써 중용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유감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마귀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고 있는 동안에 땅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질서적이거나 경건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 사람이 진실로 사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혼란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의 시작 무렵에 손을 자발적으로 흔들거나 몸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떠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수전증 환자이거나 파킨슨 병에 걸려 떠는 것인가?  절대 아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예배를 드린다(고전 14:26).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반응하는 진정한 육체의 표현들이 있는 곳에 진짜의 것을 모방한 자기 과시적인 가짜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고전 14:29).  보통 이런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이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아니다.  경험한 바로는 이들이 종종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은 좋은 신자들이다.  메마른 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함 사람들이다.  John Wimber 말한다.  “20세기의 교회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는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는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이지, 인간들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박스 안에 가두어 놓은 질서가 아니다”(사 55:9). 

Lloyd Jones 역시 모든 일은 질서 있게 해야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살전 5:19).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는 만일 우리가 실제로 성령의 불을 소멸시킨 정도까지 질서 있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이 점잖게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사용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실제적인 육체적 반응을 억제하려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불을 끄는 위험 속에 빠질 수 있다(살전 5:19).  만약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표현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실 때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도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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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류학자 David Lewis 박사는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을 할 때, 대체로 자신이 깨끗하게 죄 씻음 받는 느낌의 체험을 한다고 덧붙이면서 Harrogate 대성회에 참석했던 어느 한 사람의 간증을 인용하여 『Healing: Fiction Fantasy or Fact』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지금 바닥에 누워 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내게 뭔가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자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서 아주 깨끗이 씻어버린 기분이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Benedict Haren 목사 역시 수년간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Francis MacNutt 박사에 의해 방언으로 기도를 받고 성령의 권능에 압도되어 두 시간 동안 안식을 경험하고 나서 자신이 치유받은 것을 『Praying for Healing』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을 한다.  “1975년 어느 신유집회에서 MacNutt 박사가 내게 안수기도를 해주었을 때 난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성령 안에 안식을 하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누워있는 동안 평소에 대화나 책을 통해 이해했던 것보다 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게 이 문제에 관해 한결 깊이 있는 통찰력을 부어주셨고 그 체험이 이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있는 영적 축복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물리적인 현상은 교회사에 걸쳐 일반적으로 나타났었다.  John Wesley와 같은 기간 동안 미국 역사상에서 가장 큰 신앙 부흥운동 중의 하나인 제1차 대각성 운동이 1735년 북미 식민지에서 Jonathan Edwards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났다.  사실 Edwards는 조용하고 이성적인 설교자였지만 그는 종교적 체험에 탁월한 신학자로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에 대하여 그보다 더 자세하고 합리적인 논증을 쓴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감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을 때 “설교는 눈물, 진동, 울부짖음, 육신의 고뇌, 그리고 몸의 힘이 빠져버리는 것과 같은 인간의 육체에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평가되어서는 된다”라고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조하기를성경에서는 몸이 힘이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은 특이한 체험에 관한 것을 금하라는 규정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4번 이상 설교를 한 적이 있는 George Whitefield가 고향 마을인 Northampton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그 놀라운 회심의 역사를 『The Great Awakening』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교회 전체가 울음바다였고 쓰러지는 등의 역사로 가득했다. …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시간이나 계속된 기도, 찬송, 상담, 등으로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의 사람들에게는 벅찬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마을전체의 신앙에도 발전을 가져다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Whitefield가 방문한 이후에 같은 현상이 Edwards 자신의 목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듬해인 1974 그의 집에서 설교할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하게 압도되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놀라운 것은 Edwards의 아내가 집회 기간 동안 강력한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았는데 Guy Chevreau는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의 글을 인용해 『Catch the Fi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Northampton 교회는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다. Edwards 부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나 충만하여 육신의 힘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녀는나는 계속해서 미래 세계의 뚜렷한 환상과 영원한 행복, 그리고 영원한 비극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라고 썼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 몇은 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시간이나 교회에 남아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육신이 힘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Sarah Edwards는 부흥 집회기간에 하나님의 능력과 환희의 임재를 계속해서 비슷하게 체험하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십칠 일간 멈춘 적이 없었다고 간증한다. Edwards 역시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Jonathan Edwards on Revival』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감동은 빠르게 전체로 퍼졌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되고 비참한 상태와 상황에 대한 고통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전체는 오로지 부르짖음과 기절과 같은 것으로 가득 있었다.”

그러면서 Edwards는 부흥에 기간 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일어났던 일과 집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린다.  먼저 아내에 대해 “어떠한 영적인 자부심도 보이지 않고 더욱더 온유하고 겸손해졌으며 남을 배려하고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가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역사라는 명확한 ”라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만일 이것이 열망의 혹은 나사 빠진 두뇌의 열매라면 두뇌를 그렇게 행복하게 나사 빠지게 해 주시고, 이것이 정신착란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비롭고 부드럽고 은혜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에 빠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열매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단 말이며, 그분이 임재하실 어떤 종류의 열매를 우리에게서 내셔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나는 성령께서 영광으로 부어주시는 그러한 것들, 신앙적인 만남에서 기쁨과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거부된다면 무엇이 남아서 우리가 무슨 관념과 사상으로 높고 축복되고 환희에 소망의 시간을 맛볼 있을 것인가? 다른 무엇에 달콤하고 경이롭고 환희에 신앙의 본질이 있단 말인가?” 사실 18세기 청교도 개혁신학자 Edwards의 고백은 오늘날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사들, 특히 이단 사냥꾼들에게는 상당히 비위가 상하는 말이거나 비성경적일 것이다.  거의 이단이나 사이비에 가까운 신비주의적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Lloyd Jones는 “Edwards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며, 그는 200년 전에 이러한 현상을 목격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였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Edwards는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Christian History, Vol. VIII』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지나친 감정 표출이나 사탄의 개입에 대한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래서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살전 5:21),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요일 4:1), 그 나타남의 강도와 크기가 아닌 뒤따르는 열매로 판단하였다(마 7:20). 

또한 세심하게 육체적 임재 체험과 열매의 관계, 즉 성령의 내적역사와 이 역사가 육체 밖으로 나타나는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은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앙 안에서 감정과 의지에 영향을 주지 않은 임재의 능력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의 일부 사람들은 이런 무질서한 현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마귀의 역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Edwards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질서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한, 수단으로써의 그 질서가 깨어지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와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것 같다(행 7:51).  주로 영적으로 무지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소수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행 9:18) 없어진 것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영적 소경인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단연코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리새인 같이 성령을 대적하는 일에 열을 올릴 것 말이다(마 12:22-37).  가룟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막 14:21). 

사족이긴 하지만 한때 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은 내가 정통 신앙을 자부하는 자랑스러운 목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눈에 콩 꺼풀(?)이 씌워져 있어 성령의 사역에 대해 아는 것이 일절 없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영적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와 무식이 충만했다.  명색이 목사라고 입은 살아있어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를 얼마나 많이 전했는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나는 개혁주의자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얼굴이 두꺼운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고 싶다.  메마른 말씀을 들어준 착하고 귀한 성도들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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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비롯한 내륙의 복음전도자들은 말세에 나타날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은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인 Charles Spurgeon은 1857년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이제 수년 안에 언제가 될지 어떤 방식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이 부어지게 될 것이다. 사역자들은 단조롭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설교를 하고 또 설교를 해서 아주 약간의 변화만 일으킬 뿐이지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 앞에 열리기 바라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원하며 성령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임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위해 왕래한다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땅 위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게 되리라는 확신에 눈이 뻔쩍 뜨인다.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때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그분을 경험하는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시간을 들여 성경에 이러한 경험이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는 영적세계에 대해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신학자나 목사의 어설픈 주장이나 서적, 그리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닌 신빙성 없는 자료를 수집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쉽게 정죄하며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에 관해서 관념적으로만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호 6:3, 6), 그분이 우리 안에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경험한 것이 그분의 임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오감으로 분별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듯이(요 10:27),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우리는 실제로 몸으로 느끼거나 감지할 수 있다(사 6:5).  마치 다니엘이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느끼는 것처럼 경험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다니엘에게 임하여 환상을 전할 때 그 임재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환상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임재가 얼마나 강했던지 육체적이고 감정적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도망을 가듯 숨어버렸다(단 10:7).  반면에 다니엘은 육체에 힘이 빠져 약해지고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어 땅에 쓰러져 떨림과 흔들림의 반응을 보였다(단 10:8-10).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분 자신을 이런 식으로 알리셨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기도 하다(출 20:18-20, 삼상 19:18-24, 사 6:1-5, 렘 23:9, 겔 1:28, 행 2:1-13, 계 1:9-17).  다시 말해 ‘약해짐’, ‘쓰러짐’, ‘떨림’, ‘취함’ 등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러난 육체의 반응들로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이런 ‘품위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교회사에 걸쳐 특별히 신앙부흥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거룩한 사역자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들이기도 하다.  먼저 1730년대 후반과 1740년대 초에 있었던 영국 신교의 신앙부흥 기간 동안 John Wesley는 수많은 외적인 표적들과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의해 여러 가지 육체적 반응이 그가 전도하는 동안에 일어났다.  1739년 6월 17일 Wesley가 야외에서 설교하는 동안 일어났던 사건을 『The Works of John Wesley, 3rd Edition』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외치고 울면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일부의 사람들은 몸이 구부러졌고 그들에게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떨며 진동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격렬해서 네다섯 사람이 그들 중의 한 사람도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5개월 전인 1739년 1월 1일 일기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룻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Wesley가 설교 도중에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것은 그가 목회를 시작한 지 14년이 되는 해였다.  이 쓰러지는 현상은 Wesley가 새로 건설된 식민지 조지아 주에서의 선교활동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후 1738년 5월 24일 9시 15분 전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유명한 Aldersgate 체험으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고 나서부터였다.

또한 Wesley의 여행기록 일기 『The Journal Of The Rev. John Wesley V5』에서는 “화요일 뉴게이트에서 설교하다가 나는 그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실 것인지를 묻는 기도를 하도록 요청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땅 위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쓰러졌다. 한 사람이 크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그녀의 무거운 짐을 희락으로 바꾸어주셨다.” 그는 연이어 “4월 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의 울음이 어떤 이들을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월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웃음에 대해 전보다 더 많이 불쾌해했다. 하지만 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통곡과 울부짖음,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을 부르는 부르짖음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땅에다 내던지시거나 그분의 임재 앞에 떨며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 그리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처럼(요 7:38), 목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닌 배(belly)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사 61:3).  하지만 성경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현상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쓰러지기도 하며(시 119:120, 렘 5:22), 또 다른 경우 몸에 힘이 빠지거나(단 10:8), 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Wesley가 설교할 때마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동료 중의 한 사람인 John Cennick의 말을 Arnold A. Dallimore의 저서 『George Whitefiel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Wesley가 이러한 현상을 장려하는 것을 보자 거기에 반대하여 감리회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나는 종종 그런 현상이 사탄의 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에 의문을 가졌고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Wesley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Cennick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은 동료 설교자이며 친구인 George Whitefield였다.  그는 Wesley의 집회에서 보고되는 현상들을 듣고 심각하게 우려했지만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Whitefield가 설교할 때 그러한 현상이 똑같이 일어났다. 

Wesley는 1739년 7월 17일 그의 일기 속에서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토요일에 Whitefield와 나는 하나님의 내적역사와 함께 매우 자주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적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반대가 주로 사실상 조잡한 허설에 근거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음날 그는 이 문제를 더 잘 알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모든 죄인들을 그리스도를 믿도록 초청하기 시작하자마자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그 앞에서 꼬꾸라졌다. 그중 한 사람은 아무런 동작도 없이 쓰러졌고, 두 번째 사람은 몹시 떨고 있었고, 세 번째 사람은 온몸에 강한 경련을 일으키며 신음소리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네 번째 사람 역시 똑같이 경련을 일으켰고 큰 소리로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Wesley는 이런 말로 그날의 일기를 맺었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이끌어 가시도록 해드려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 Wesley와 Whitefield가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이러한 사역을 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겠느냐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 가짜 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사악한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의 집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기괴한 현상들, 소리 지르고, 울고, 흐느끼고, 통곡하고, 쓰러지는 것들이 녹화되어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전파를 탔을 것이다.

Wesley와 Whitefield의 집회는 성령의 운행하심에 의하여 강력한 감동(감정)을 불러오는 놀라운 능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만일 그 당시에 방송이 있어 오늘날의 현실로 본다면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이 수도 없이 올라와 “귀신의 역사니, 늙은 사도 운동이니” 하면서 이들을 정죄하며 침을 튀겨가며 비난하기에 바빴을 것이다(마 12:34).  솔직히 말해 목회를 못하는 목사들이 이 짓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당시 사역을 하면서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을 당한 역사적 인물들이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대각성 운동이 처음 세간에 알려졌던 것처럼 그런 ‘대혼란’이 다가올 때 거기에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은혜를 받는 자는 소수이지 다수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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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지 않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되는 행동이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합리주의적 세계에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복음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막 16:20).  그러나 성령 안에 안식을 경험한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에게 큰 유익이 되고 은혜로운 체험이 될 수 있다.

한편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종식되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성령의 임재로 인해 쓰러질 때, 이것이 심리적인 작용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치유사역을 위해 안수하는 사역자들에게 행여 사람을 쓰러뜨리게 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한다.  나는 이들의 개인적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가지고 John Whit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아예 거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단지 위험 부담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권능을 무시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권능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악의 세력이 부리는 고도의 속임수일지 모른다. 이 두려움은 교회 구석구석을 마비시키는 두려움이요 쇠약케 하는 불안이다”  이것을 Francis MacNutt 박사의 말로 짧게 다시 인용한다면, 오늘날 현대교회는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지나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John Wimber이다.  그가 처음 이러한 장면을 본 것은 1979년 자신이 목회하는 작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강사가 설교할 때였다.  초청받은 강사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오랫동안 성령님을 억제해 왔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오셔서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사모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와 염려하는 가운데 그 강사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고 방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으며 목사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기도를 해주자 사람들이 쓰러졌다.  

Wimber는 당시의 일어났던 상황을 『능력치유』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하나님, 제가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주세요 라는 말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여파가 가라앉은 후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제직들은 아주 당혹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연이어 “성령이 임재하시도록 장려하지도 않았는데도 교회에 모일 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이 계속 일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 읽기,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일과 하나님의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더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요약된 결론을 내린다.  “교회에서 영적충돌이 벌어질 때 교양 있는 예절 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부흥운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20세기의 교회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시대 초대교회 때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와 안수하여 쓰러뜨린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한다.  물론 손을 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Wimber의 예배에서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그가 설교하거나 개인을 위해 기도할 때가 아니라 그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한 후 단순히 조용히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MacNutt 박사는 1986 England에서 있었던 Harrogate 집회를 포괄적으로 분석 시도한 사회인류학자 Davis Lewis 박사의 글을 인용하여 Sheffield 집회 때 일어난 일을 『Overcome by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치유(임상) 시간이 시작되면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도록 초청받곤 했다. Wimber 목사가 성령께서 오시기를 짤막하게 기도하고 앞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마치 무엇을 받는 듯한 자세로 손바닥을 위로 향하거나 앞으로 내민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포개어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Wimber는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나 성령이 임재로 인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외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행복에 넘치는 평온 속에 조용히 있는가 하면 반면에 넘어져서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 아래 쓰러지는 현상을 보고 이것이 과연 “성경에서 나오는 현상과 같은 것인가?”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마가복음 9장 20절에서 아이가 쓰러진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아닌 악의 세력이 개입되어 쓰러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1:23-26).  그러나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처럼 귀신이 이러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나타낸다(막 5:1-20).  반면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려진 것( 1:28)과 다니엘이 큰 이상을 볼 때 힘이 빠진 적이 있었다( 10:8-9).  그리고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린 베드로( 17:6)와 주의 날에 성령으로 감동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된 요한( 1:17), 나아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 쓰러진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9:4).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오늘날 집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집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 본 것과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본 결과, 오늘날 집회에서 나타나는 것과 성경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체험했던 것이 달랐다.  그것은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경배의 자세로 있다가 엎드려지거나 쓰러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 있어 제사장이 능히 섬기지 못한 것처럼(대하 5:13-14),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체험한 것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그분의 권능아래 압도당하여 쓰러졌다.  여기에는 안수하는 동작이 일절 없었다.  다시 말해 일일이 세워 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첫 번째는 안수를 통해 쓰러졌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안수와는 확연히 달랐다.  무식하리만큼 머리에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손으로 짓누르며 안수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리에 살짝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이다.  사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사역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요 3:8).  머리를 짓누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사역자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몸에 힘이 빠지고 쓰러졌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민 것도 아니고 안수를 받은 것도 아니다.  내가 귀신에게 홀려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은 멀쩡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은사적(고전 12:12-27), 구성원적(골 3:11), 인종적(계 5:9)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공식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MacMutt 박사는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18, 19세기에 넘어지는 현상은 설교 중에 나타난데 비해 오늘날에는 안수 기도할 때 자주 일어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에는 치유를 위한 기도가 보편화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그 현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대부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그 열매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될 것이다”(마 7:20).

사실 쓰러지는 현상은 개개인의 체험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증명할 길이 없다(고후 12:1-6).  물론 영적 체험이 일절 없는 무지한 목사가 이러한 현상을 귀신의 역사라고 우겨대면 할 말이 없다.  솔직히 이런 목사와 쓰러지는 현상을 가지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현상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한 현상을 체험한 사람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막 5:20).  집회 현장을 방문하면 더욱 좋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모든 영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따라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혹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하면 된다(마 7:16).    

문제는 이러한 역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체험을 완강히 거부하고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궤변주의 목사들은 거짓 영에 크게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골빈 목사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숙하거나 기만당할 정신 나간 신비주의적 목사가 아니다.  나 역시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할 말은 많지만(히 5:11) 폐일언하고 Teresa of Avila의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성령 안에서 안식, 즉 쓰러지는 체험을 찬성하든지 비난한다든지 할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단지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덕목에 근거하여 모든 일을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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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MacNutt 박사는 목회자들 중에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순서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리 짜여 놓은 순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불안해하거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글들을 보면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과 ‘주정론’(主情論)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한다. 실제로 오늘날 성령의 권능 아래 쓰러지는 것을 인도의 정통적 수련행법 Kundalini 명상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Joseph Suenens는 『Ecumenism and Charismatic Renewal』에서쓰러지는 현상은 과거의 종교에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원시부족에서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여러 종파에서 두루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역들 기도받고 성령 하나님에 의해 압도되어 쓰러지는 현상을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읊다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적인 차원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수밖에 없다.  사실 아프리카나 동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악령이 행하는 것인지 차이점을 그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더 확실한 것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에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4: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서 십 대들이 우상처럼 바라보는 가수가 앞에 있을 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절하거나 졸도, 혹은 쓰러지는 것과 같은 집단적인 광란에 의한 심리적인 현상들이 있다.  또한 인도의 Kundalini 명상은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명상에서 가르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몸의 떨림을 허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행하는 수련에서 떨림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기독교 사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교해서 쓰러지는 것과 떠는 현상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마 12:22-32).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고전 14:29)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행 7:51)처럼 모든 것을 다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나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목회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이 사탄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도를 받고 쓰러질 때 그것이 ‘성령에 의한 임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원인’인지 아니면 ‘악한 영에 의한 초자연적인 힘’(살후 2:9)인지를 단순히 옆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무슨 힘으로 쓰러졌는지 식별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쓰러지는 현상이 기독교인이 기도받을 때도 일어나지만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외형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그 현상은 비슷할 수 있다.  나 역시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마 7:20).   그것은 치유시간에 기도해 주는 목사와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치유의 근원으로 받아들였음을(행 4:10) 확인함으로써 사탄의 힘을 통한 치유를 효과적으로 배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으로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하고 있다(계 1:17).  다른 하나는 귀신에 의한 힘으로 쓰러진 경우이다.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고 말한다(막 9:20).  이 두 사건 모두 땅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도 요한의 반응은 실제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고 이전에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겔 1:28, 단 8:17, 10:9)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이는 악한 영이 예수를 보자 그는 그 아이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귀신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가진 사탄이 쫓겨 나갈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식별하는 근거 중에 하나는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먼저 아이가 몸을 뒤틀고 소리를 지르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악령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막 9:26).  축귀 사역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자신의 분노와 저항을 보이기 위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귀신이 나갈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막 1:26).  그와 달리 사도 요한은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나 발작하는 것 없이 성령의 권능 아래 다니엘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졌다(단 10:8).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셨을 때 모세(출 3:6)나 다니엘이 보여주듯이 반드시 경배가 뒤따랐다(단 8:17-18).  그리고 경배에는 축복이 따랐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것만 가지고는 그 현상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그 체험의 효과 등을 알 수는 없다.  정확한 영분별의 은사를 받지 않는 이상 말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받고 쓰러져 안식을 취하는 동안 나타나는 그 효과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즉 쓰러짐을 통해 무슨 열매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기도하는 사람이나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며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고 기도를 받는다면(요일 4:2-3), 그 쓰러짐을 통해 삶 전체를 변화시킬 만큼 주님과의 획기적인 만남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사람은 쓰러짐을 통해 회개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도 하며, 혹은 귀신에게 놓여나는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쓰러지는 현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체험이 신자의 삶에 지속적인 효과를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보다는 신비적인 체험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모순도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모순은 우리 삶에서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감이 넘치는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순간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행 7:54),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한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는 데 있어 유익한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할 때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모세(출 3장)나 바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듯이(행 9장), 삶의 어떤 시점에서 성령 안에 안식을 통해 주님을 긴밀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 박사는 자신이 성령 안에서의 안식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 인간적인 예법(틀에 박힌 전통적인 사고방식) 따위는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아서 좋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고질적인 회의적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조사해 보고, 시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면서도 그분의 역사를 충분하게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해 본 결과 그중 몇몇은 정신적 이상에 의한 현상이고, 또는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귀신들의 발악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표적(역사)들은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White 박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고 쓰러지거나 몸이 흔들리는 현상, 즉 성령 안에 안식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한 대가가 아닌 것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경성 발작이나 최면술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더더욱 아닌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일방적인 놀라운 은혜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재하시는 진정한 증거(징표)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분별이 필요하다(요일 4:1).  하지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붙잡아야 한다’(살전 5:21).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마귀가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믿지 말어 귀신의 장난이야”  이 말의 의미는 영적소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며 살라는 것이다(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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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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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대로 연결되는 뒷문을 통해 전시회장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한 젊은 남자가 한쪽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나중에 예배 중에 들으니 그 젊은이는 나와 부딪혀 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 넘어졌다고 했다.  다시 일어선 그는 더 이상 목발이 필요하지 않았다.  넓은 실내를 약 1만 2천 명의 청소년 대표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주님과 깊은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주님, 오늘 밤에 무엇을 하시렵니까?”  내가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왼쪽 끝에 있는 한 여성을 주목하게 하셨고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휠체어에 앉은 저 여자가 오늘 완쾌될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단상에서 급히 내려가 그 여자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  오늘 완쾌될 것입니다. 자매님은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일어서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 아내는 골반이 없어요.  골반 뼈가 연결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 나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천천히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일어나다가 휠체어에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넘어졌다.  그다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쓰러진 것은 골반이 몸을 지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쓰러졌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즉시 쓰러진 그녀에게로 몸을 굽히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자매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알아요, 알아요. 목사님, 제가 마취된 느낌이에요.”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자매를 수술하고 계십니다”  그때 Jean은 강력하고 놀라운 어떤 일이 몸속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다. 그녀는 골반 뼈가 제자리에 들어맞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한 다리는 다른 다리보다 5센티미터 짧았다.  그런데 그 다리가 길어져서 다른 다리와 같아졌다.  그다음에 뜨거운 쇠막대기가 그녀의 척추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위축되었던 그녀의 뼈, 신경조직, 근육이 유연해져 새 생명으로 역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내가 John(남편) 보니 나를 금방 때릴 것 같았다.  Jean은 몸을 추슬러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두 발로 섰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비디오카메라는 돌아갔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일어섰다.  Jean Neil은 양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외치면서 실내를 빙빙 돌았다.  그 집회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불구가 아닌 사람들이 거짓으로 휠체어에 앉은 일도 있다.  하지만 Jean Neil의 경우에는 그녀 교회의 교인들이 그 간증의 능력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그녀를 담당했던 의사들도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었다.  이 치료의 역사는 하나님의 치유능력에 무관심했던 교회와 교인들을 일깨웠다.

이 간증은 오래전 모든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올 때 인천 공항 서점에서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가 쓴 『부흥, 성령의 축제』라는 책을 우연히 구입하는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던 스릴 넘치는 성령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런 것은 하나님께로 것이 아니고 분명히 마귀의 장난 아니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일거야”라고 판단하거나 의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논쟁의 여지가 많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인 것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부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그 쓰러지는 현상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임재와 능력 아래 쓰러졌는지( 1:28, 10:9, 17:6, 9:4, 1:17) 아니면 악령의 역사로 쓰러졌는지( 9:16-20, 눅 9:37-42) 혹은 또 다른 집단의 히스테리 현상이나( 19:32) 자기 최면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가 궁금했다.  분별이 필요했다(고전 14:29).  더 나아가 기도받고 쓰러질 때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과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나 글을 통해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질 때, 이것이 확실히 “성령의 역사이다”, “사탄의 역사이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것과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나에게 똑같이 적용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경험해 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은 어떤 영적세계를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말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독단이나 독선적인 주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 자신이 직접 그러한 집회에 참석해 보기로 마음에 결정을 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자를 찾아 그 사람의 신앙성장과 신학배경, 그리고 집회 때마다 일어나는 일들과 서적들을 읽으면서 일 년 간 연구하고 기도하며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이미 집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그리고 참석 후에도 임하기 시작했다.  막상 그 집회에 참석했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가 악령의 역사인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가운데 집회에 참석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약 1:6-8).

솔직히 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청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1:15).  호기심과 거룩한 두려움,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뒤섞여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듣고 나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 되었을 때,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심정으로 서 있었다( 5:28).  내가 경험한 바로는 기도해 주는 사역자가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과 함께 몸의 무게와 상관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고 맥박과 호흡도 정상적이며 정신만큼은 멀쩡해서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저항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말하는 순간 온몸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강한 에너지가 흘렀다.

기도받고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조금도 불편하거나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초라함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몇 시간 동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실 개인적인 체험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후 12:1-6).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면서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임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실신’이나 ‘의식불명혹은집단최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기도받고 쓰러진 후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건전한 성령의 사역인지 또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순수한 동기를 가진 헌신된 사역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눅 18:13),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마 16:16),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때 일어나는 현상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는 말처럼(요일 4:2),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전 12:3).

물론 이런 경우 타락한 인간의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 그리고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것들로 인해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해서 되어지는 행동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것이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마 18:7).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치고 걸림돌이 생기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롬 9:33).  따라서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강조하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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