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증

기름부으심 2023. 1. 21. 14:0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하겠지만, 나는 평상시 골방 기도(마 6:6)와 묵상 기도(창 24:63)를 즐긴다.  때로는 부르짖는 기도(렘 33:3)와 금식기도(마 6:16-18), 그리고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예외 없이 통곡 기도(스 10:1)나 얍복 나루터 기도(창 32장)를 한다.  거의 죽기 살기로, 때로는 까무러칠 정도로 매달린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에는 마음 놓고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는 수양관이나 기도원이 없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바다 건너 어느 작은 기도원겸 수양관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13시간을 날아 도착했다.  그리고 버스로 3시간, 택시로 45분을 더 달려서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꼭 기도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원하시는 것 같았다.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금식기도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침에 성경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 주님께서 사무엘상 30장 24절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셨다.  그 구절을 하루 종일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 구절을 떠오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집에 있는 아내가 생각이 나면서 마음에 “너와 똑같은 은혜를 네 아내에게도 부어주겠다”라는 감동이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응답을 받고 4주간의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틀 뒤 새벽기도 시간에 아내에게 기도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기도하고 싶다고 말하자 아내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내가 평상시 하지 않았던 행동으로 보였던 것 같다.  아무튼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주님께서 똑같은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때는 나에게 있어 성령의 사역에 눈을 처음 뜨는 시기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의심을 물리치고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했지만, 일주일 다되어가는데도 아내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귀신의 속삭임을 들은 것인지 의심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할 때마다 아내의 표정이 “어디 해봐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당신에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거야”라고 말해주면서 일주일째 되던 날 기도할 때,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망부석 같은 아내에게 임하였다.  밀어서 쓰러뜨리지 않았다.  손을 가볍게 얹고 기도하는 순간 맥없이 쓰러졌다.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성령 안의 안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후 아내는 지식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아주 신비스럽게(?) 며칠 동안 몸과 마음으로 직접 체험을 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할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고후 12:6).  이 이야기는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의심이 밀려오고 ‘구라’ 같다는 느낌이 드는가?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의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성령의 권능,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고’(눅 4:14), 안식일에 회당에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구절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Gerald F. Hawthome는 예수님과 성령에 관한 누가의 기사에 대해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와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밖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아간다”  Hawthome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두 번째 위격으로서(요일 5:20),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요(골 1:15), 본체의 형상이시며(히 1:3),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실체시다(요 14:9).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요 1:1),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빌 2:6-11),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는 사역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와 축귀 사역을 하셨다면, 나는 지금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서(요 1:14), 누가복음 4장 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으로 충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선포하신 적이 있다(막 2:1-12).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선언하는(요 10:30),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마 26:62-64).  하지만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눅 11:20) 즉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온전히 계시의 약속(성경)에 의지했고(사 11:1-5), 사역에 있어 언제나 성령을 의존하셨으며(사 61:1-3), 공생애 기간 철저히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요 5:19).  Hawthome의 말을 다시 빌리면 지상사역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 성령을 의존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딤전 2:5), 또 하나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성령께서 지상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께 기름부어 세우셨다면(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눅 11:13),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에 더 큰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수 있다(눅 24:49).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마 28:19),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며’(막 16:15) 더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막 16:17-18).  이 말이 믿어지는가?  골병든 믿음이나 개떡 같은 신앙을 가지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히 1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하고 의탁하셨다면,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도 성령의 놀라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프면 골골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능력이 개뿔도 없으면서 메마른 말씀만 증거 하면 ‘장땡’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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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 신학

기름부으심 2023. 1. 8. 15:17

성경에 나오는 아볼로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로 소문나고 수많은 학자들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당대에 가장 훌륭한 교육 환경 속에서 자라나 훈련을 잘 받고 열정적으로 지역교회 목회에 힘썼던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아볼로를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고전 4:6).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 구약성경에 능한 설득력 있는 웅변가였다(행 18:24).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정확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완전했다.  비록 그가 박식함과 열심을 가진 탁월한 목회자이기는 했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다.  십중팔구 아볼로의 설교는 요한의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리라’(마 3:2)를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아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성령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볼로는 자신의 재능과 학문, 그리고 열성적으로 말씀 전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롬 8:9, 고전 12:3).  그가 회개를 선포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여러 교훈 및 구약의 가르침과 연계해 가르쳤지만(행 18:25), 성령의 능력 없이 그분에 대해 증거 했고,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성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행 19:2).  다시 말해서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알았지 그분이 성령을 보내주시고(요 16:7),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요 1:33).

조금 더 살펴보면 아볼로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는 두 가지가 빠진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의 죽음(요 19:30)과 부활(요 20:19)로 이어지는 대속의 사역(히 9:26)과 그에 입각한 ‘기독론’의 구원관이다.  즉 예수가 대속적 죽음(마 20:28)을 통해 인류의 구원(요 3:15)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신학적 지식에는 탁월했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롬 8:11),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겔 36:26-28)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환언하면 세례 요한이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처럼(눅 16:16), 아볼로의 성경 지식은 오순절 이전 기독교 신학이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떠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 신자들에게 ‘내가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디모데에게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권면하면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강조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이 구절들은 바울의 확고한 결심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낸다.  자신이 증거 하는 복음(고전 15:1-4)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다.  따라서 그들이 돈과 권력, 인기, 쾌락, 특권 등, 이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분과 살아 있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볼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18:25).  또한 그가 예수님과 함께 했었다는 증거도 얻지 못했다.  성경에 의하면  아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유창하고 열심을 다한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설교자였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15:26), 그 성령이 빠진 상태에서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서 나타난 열매가 무엇인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까지 에베소 지방에는 성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무후무했다( 19:1-7).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 것 말이다(고전 12:3).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시 에베소에는 장막을 만드는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보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행 18:1-3).  그들은 아볼로의 설교를 듣자 그의 메시지 속에 무엇인가 불완전한 부분들이 있음을 이내 발견하였다.  결국 그들은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의 진수인 ‘하나님의 도’,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19:26).

우리는 아볼로가 이러한 경험을 한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목회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얼마 후 아가야 지방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서 언뜻 볼 수 있듯이, 성경은 아볼로에 대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18:27).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나서 더 완전한 신학 체계를 구비한 아볼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이 알고 있던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설득력 있고 확신 있게 증거 했다는 것이다(행 18:28).     

이때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러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내주시고(요 16:7),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오시는 성령을 거스려(행 7:51) 욕되게 하며(히 10:29)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엡 4:30)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물세례’만 아는 시대에 뒤떨어진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들 중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자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를 들먹거리며 거의 ‘신들린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예수를 전한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 좋은가?  한 술 더 뜨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4장 6절 말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적이지 않는가?  문제는 인간이 조류과에 속한 것도 아닌데, ‘주둥이’만 살아있어 능력이 없는 죽은 예수만 전한다는 것이다(히 4:12).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여기서 Gordon Fee의 말을 빌리고 싶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요한의 물세례만을 아는 목사에게 ‘기름부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전 2:14).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 아볼로처럼 성경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바울처럼 따르는 표적으로 열매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설교가 죽을 맛(?)이고, 교회 안에 병든 신자들이 많은데 담임목사로서 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너스나 먹고 갈려나?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가?  로마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베푼 표적(semeia)과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기사(terata)를 행했다(18절).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전했다(19절).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 일어난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고전 2:4).  더 나아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증거 한다(살전 1:5).  바울의 설교만으로는 아무도 믿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게 되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에는 반드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볼로처럼 예수를 지겹게 외쳐도 성령이 빠지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내가 먹어봐서 아는데 도루묵은 맛이 없다.  영혼을 건조하게 만드는 메마른 설교 말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무슨 소리야!  우리는 오직 예수야!”  이런 골빈 소리로 떠드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단이나 사이비 먹사들도 ‘예수’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이들이 주로 우려먹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는 구절이다.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는 목사다(고전 2:2).  하지만 이것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는 것과 같다(롬 10:9).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갈 3:13).  다 끝난 것인가?  내 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죽음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영생을 얻는 것 말이다.  그래서 부활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요 11:25-26).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이렇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히 5:11) 여기까지만 하겠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을 거스리며 예수를 증거 하는 반쪽짜리 신학을 가진 목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목사를 만나면 가룟 유다처럼 영혼을 마귀에게 받치는 꼴이 된다(요 13:2).  바리새인보다 더 한 지옥의 자식이 된다(마 23:15).  한 마디로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약 3:1).      

이 기름부음을 이야기하려고 아볼로가 처음 가졌던 절름발이 신학을 예로 들어 지금까지 성경적 ‘썰’((說)을 풀었다.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기름부음’과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시는 일이기에 전적으로 그분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눅 4:18, 행 10:38).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즉, 기름부음은 성경적일 뿐 아니라(요일 2:20, 27)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목사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평신도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다.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겸손히 배운 것처럼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쓰레기 같은 자존심, 의심의 씨앗 불신앙, 자기 성취감인 교만, 성령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쓴 뿌리(악독)를 버리고 기름부음을 사모한다면 혹시 누가 아는가 다른 성령의 사역자나, 혹은 개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역사할지 말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목사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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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 사역

기름부으심 2022. 12. 25. 14:48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거나 혹은 귀신이 들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폄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인들 중에 귀신이 들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놓칠 리 만무한 이단 사냥꾼들, 즉 신학적 논쟁에 열을 올리는 목사들은 먹이를 만난 하이에나처럼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공격적으로 글을 쓰거나 어떤 말 같지 않는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나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신 들려 떠드는 이 사람이 진정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귀신 들린 자 한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세상에는 ‘국민에게 짐 지우는 패륜당’처럼 ‘신구개하’(信口開河)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돈 문제, 혹은 이성 문제, 아니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서 그 한 사람을 통해 모든 목사를 똑같이 매도할 수는 없다.  개중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며(빌 2:12) 맡겨진 사역에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있다(고전 4:2).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신비주의적 망상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주어진 목회에는 관심이 없고 눈만 뜨면, 입만 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보고 듣는 것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한다.  대단한 착각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도 모르고(마 12:36-37), 이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8)라는 말씀을 망각한 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나팔을 불어댄다(마 3:7-10).  그러나 열매가 없이(마 7:16) 하는 짓들을 보면(막 3:20-30, 눅 11:14-23) 늘 성령을 대적하는(눅 12:10)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마 12:22-37).  아니, 거듭나지 않았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구원받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목사다(눅 13:23-24).  이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갈 2:16).  내가 배운 성경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엡 2:8, 딛 3:5).  물론 세상에는 개나 소나 쉽게 대통령 되고 장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좇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눅 9:57-6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마 7:13-14).    

사도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는 격렬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14절).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광적으로,  때로는 난폭할 정도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 없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과대망상증 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갈 1:14).  중생의 체험이 없었던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설물 같은 더러운 신학이었다(행 9:4).  마찬가지로 목사라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쓰레기’(빌 3:8) 같은 신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딤전 1:13).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오래전 후배 목회자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로 판명되었다.  이 사람은 바른 진리를 전한다는 신념하에 그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늘 부정적이고 대적하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읽을 가치도 없지만 그의 설교를 글로 쓴 것도 있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개혁교단에 소속되었지만 신앙 노선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경이 완성되면서 더 이상 기적이 필요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그리고 귀신 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일뿐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39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 역시 사탄에게 붙들려 있다고 주장한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런 설교에(딤후 4:3) ‘아멘’으로 화답한다.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싫어하는 일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그가 설교를 하면서 바리새인처럼(막 3:22-30)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엡 4:30) 거스리는 가운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히 10:29).  마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능력을 성령이 아니라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듯 말이다(마 12:24).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오해가 없기 바란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갔다고는 말할 수 없다(삼상 2:6).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교단에 속한 것 하나만을 가지고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큰 병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중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운동의 모태가 된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규칙들을 만들어 내려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어떤 것들을 알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원칙을 세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러한 원칙들을 강요한다.  마치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사이비 목사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태극기 부대 늙은이들을 모아 놓고 이태원 참사가 북한의 공작이라고 세뇌시키듯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는 말씀처럼(사 55:8) 하나님께서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 이들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보면 기독교 초기의 히브라인들 역시 이러한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이 되어야 하며 히브리인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15:5).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사용하셨다는 것이 이유였고,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 관한 그들의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규칙들을 깨시고 할례고 나발(?)이고, 히브리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15:1-21).

여기서 John Stott가 『Baptism and Fullness』에서 한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은사주의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나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 사람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를 묻고 있었다(요 9:2).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신학적인 것만을 문제 삼았다(요 9:16).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잣대로 소경이 치유받은 엄청난 기적(요 9:18)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다(요 9:22).  오히려 소경을 치유한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요 9:24).  반면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대히 간증할 수 있었다(요 9:25).

바리새인들이 문제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식’, 즉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과 안식일에 율법을 어긴다는 표면적인 모습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류금지를 결의한 것이다(요 9:22-23).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유대적 세계관에서 나왔다(갈 1:14).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 그리고 골빈 신학에서 나온다.  만약 이들이 바울처럼 자신이 배운 신학을 ‘오물’로 여겼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빌 3:7-9).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소경이 체험한 그 증거를 무시하고 스스로 소경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요 9:39-40).    

꼭 기억하길 바란다.  메시지 전달자에 대한 거부는(심지어 성자 하나님께 대한 것일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마 12:32).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마 12:31).  이 죄는 용서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완전히 도말(塗抹)된다(요일 1:7).

지금 이 시대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으로 소경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Francis of Assisi는 말한다.  “지극히 높으시며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소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적이 있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23).  특별히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아볼로처럼 ‘반쪽짜리’ 성경지식을(행 18:24-26) 끝까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 요엘이 말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행 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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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고’(고전 12:3),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말씀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7),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도 받았다(엡 1:3).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고전 14: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고’(고전 12:31),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명령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절대적인 의미에서 다 받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항상 충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은사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롬 12:6, 약 1:17, 엡 4:7, 11, 고전 12:11).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 11장 17, 25-2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신 34:9),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한 것 같이(왕하 2:9) 사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인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반드시 사람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히 2:4).  즉 성경의 말씀대로 사도를 통해(롬 1:11) 기도하는 대로(고후 1:11) 후회함이 없이(롬 11:29)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어진다(롬 12:6).    

한 가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에베소서 2장 8-10절 말씀을 들먹거리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라고 판에 박힌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깨끗이 씻어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딛 3:5)는 성경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셨느냐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처럼 직접 불러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가?(행 9장) 아니면  목사, 전도자, 집사, 이웃집 사람, 가족, 친구들을 통해 은혜로 불러주신 것인가?(요 6:44).  목사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이다(마 28:19-20, 행 13:1-3).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받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냄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라고 말한 것처럼 나다나엘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요 1:43-48).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을 얹는 종교적 행위인 안수는 어떠한가?(막 10:16, 눅 4:40, 행 8:17, 13:2-3).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딤후 1:6) 즉 꺼져가는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그가 성직을 위임받을 때 받았던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다시 불 붙여 살게 한다는 뜻이다.  어떠한 방식으로 불 타오르게 하는가?  안수를 통한 임파테이션이다.  사실 우리가 집회에 참석했을 때 그 누군가가 임파테이션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게 되면 누구도 예외로 두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누구에게든지 부으실 수 있다.  보통은 골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기름부음(chrisma)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집회 군중 속에서 만지신다.       

구세군 창설자인 William Booth는 말한다.  “불은 꺼지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능력을 한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달리 말하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주일날 말씀 한 번 듣고 1년간 ‘열중쉬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열중쉬어’ 한 마디를 못해 완벽한 3 무(무능, 무지, 무식)를 가진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기름부음을 인정하는 것의 기본이다.  우리는 은사가 식어지고 사명 의식이 희미해질 때, 다시 은혜를 받아 은사를 불타게 하여야 한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처럼 주어진 기름부음 안에 살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목회를 열심히 하지만 피로와 탈진, 그리고 영적 무기력에 쉽게 빠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지만(고전 2:14) 영적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삶 속에서는 바리새인 같이 위선자(마 23:27)의 모습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은사가 나타나거나, 혹은 남들보다 설교를 잘하고, 신학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고 속단하는 경우다(마 26:31-35).  성령과 무관하게 병 고침의 역사가 나타나고, 설교를 할 때마다 신자들로 하여금 ‘아멘’ 혹은 “은혜를 받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착각이다.  이것은 단지 거짓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롬 11:29).       

나는 오래전 성령의 사역에 눈을 뜨고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말씀을 증거하고 안수를 받는 시간에 한 번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받기 원했다.  여러 집회를 참석해 보았지만, 특별히 Randy Clark과 Reinhard Bonnke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했을 때, 안수하는 그들을 통해 내게로 흘러 들어오길를 간절히 바랐다.  이 기름 부으심을 받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사모했는지 모른다.  자동차가 기름을 한 번 넣고 일평생 탈 수 없는 것처럼 기름 부으심을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엡 5:18).  

그러나 사람들 중에 은사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고전 12:7, 11), 사역자가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개인적으로 은사 내리기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어떻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먹이 사냥을 위해 상투적으로 꺼내 쓰는 골빈 소리다.  만약 이들이 성경에서 특정 구절을 들어 자기해석(eisegesis)을 하는 데 사용한다면 바리새인(마 23:33)이 성경을 곡해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마 15:9).  참으로 두려운 것은 이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항상 성령을 대적하고 궤변 같은  가설(假說)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정말, 피조물인 인간이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가?  간혹 신비주의적 중증 환자에 가까운 미친놈(?)이 있기는 하다.  브라질에도 있고, 광화문에도 있다.  하지만 성령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고 반쪽짜리 성경 지식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을 독점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점유할 수 없다.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요 3:8) 그분은 우리와 타협하실 위치에 계신 분이 아니며, 우리에게 매수될 분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체인 시스템처럼 라이선스(license) 를 함부로 남발하시는 분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분을 공경하고 존중해야 하며, 그분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돌 같이 굳은 완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겸손하게 은혜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야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맞추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농사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간청하고, 영적 아버지인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하는 것이 정신 나간 짓이 아닌 것처럼 기름 부으심이 사역자의 손을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오늘날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역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내리시기도 하고 또한 가지고 있는 은사를 더욱 강하게 다지는데 도움이 되게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엡 1:11),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신다’(시 103:19).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그분의 뜻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들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든지 슬프게 할 수 있고(엡 4:30), 또한 기쁘게 할 수 있듯이(시 147:11),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히스기야(왕하 20:2)나 베드로처럼(행 12:5), 그분의 뜻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도 그분은 어지럽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과부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지(눅 18:7) 그것도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마 6:6, 9).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내버려 두시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통반장 다 하시면 되는데 말이다. 

성경은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기도가 그분의 뜻에 미치는 영향 모두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신비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듯이(창 216-17), 우리는 마음에 사모하고(고전 14:39) 있는 성령의 은사를 위해 구하거나(고전 14:13), 상대방을 놓고 기도해 줄 때 기름부음이 흘러나갈 수 있고(약 5:14-16),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마 21:22).  결론이 무엇인가?  안수를 통한 기름 부으심은 다양한 것을 좋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고전 12:11), 신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받아본 자만 안다(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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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션(unction)

기름부으심 2022. 12. 3. 13:54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 하나가 ‘기름부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unctio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Princess Diana 장례식 때 불러진 ‘The King of Love My Shepherd Is’라는 찬양에 나타나는데, 아마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이 단어(KJV)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unction과 유사한 anointing이란 단어 역시 헬라어 chrism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단순히 ‘기름을 바르다’이다.    

‘기름부음’(chrisma)은 보통 사람의 머리에 특별한 올리브기름을 붓는 것을 가리킨다.  ‘chrisma’는 헬라어 ‘chrio’에서 파생된 것으로 ‘메시아’ 혹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의 ‘Christ’의 어근이다.  이 기름은 왕들과 특별한 사역자들을 성별 하는 데 사용되었고(삼상 16:1, 13), 또 병든 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장로들이 기름을 사용하기도 했다(약 5:14).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chrisma’라는 단어는 개인의 강한 개성을 말하는 ‘charisma’, 혹은 성령의 은사들을 지칭하는 ‘charismata’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모두 기름 부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단순히 성별(聖別)이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최소한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올리브에 몰약(myrrh)과 육계(sweet cinnamon)와 창포(sweet calamus), 그리고 계피(cassia) 등의 향을 섞어 만든 기름과 관련(출 30:22-25)이 있는데, 이 기름 부음은 거룩한 물건들에 대한 것이었다(출 30:26-29).  둘째로, 제사장(레 8:10-13)과 왕을 세울 때(삼상 10:1) 사용되었다. 

셋째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은 후에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했으며(삼상 10:6) 새 마음을 주셔서(삼상 10:9) 그가 예언하기를 시작한 것처럼(삼상 10:10-11) 성령의 임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사울은 왕이었지만 여호와의 신은 이미 그를 떠났다(삼상 16:14).  하지만 다윗에게는 왕관은 없었지만 기름 부음 즉,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 것’(삼 16:13)처럼 실제로 성령께서 친히 임하셨다는 것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상징 이상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며 보내실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6:13).  그러므로 기름은 상징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름을 바르는 행동과 무관하지 않았다(약 5:14-15).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시편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실제로 기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시면서 ‘기름 부은 받은 자’, ‘나의 선지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고, 아비멜렉에게는 그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창 20:7).  선지자가 실제로 기름부음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왕상 19:16), 이 말씀 속에서 아브라함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러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떠한가?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사도적 교회에 있어 ‘안수’가 교훈의 터,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고 언급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의식과 관련된 신앙생활의 기본임을 나타내고 있다(히 6:1-3).  신약 성경에서는 개인을 향한 은혜의 수단인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마 8:3, 막 5:23, 6:5, 8:23-25, 눅 4:40, 13:13)과 초대 교회의 사역에서(행 4:29-30) 사용되었다(행 14:3).  또 다른 목적으로는 특정한 사역과 섬김의 큰 능력으로 무장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한 경우가 있다.  처음 집사들이 임명되었을 때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했고(행 6:6),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다(행 13:3).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의 임재에 대해 정해진 패턴이 나와 있지 않고, 신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안수와 상관없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기도 했고(행 2:38),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으며(행 8:14-17), 때로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을 받기도 했다(행 10:44-48). 

사울의 회심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 9장에서의 가장 중심 된 인물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울과 아나니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논하고 싶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의 불가항력적 만남은 신적 기원이며 신적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후 1:1).  그가 이단자들을 뒤쫓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빛과 소리를 통한 신적 현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행 9:3-5).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울은 삼일 동안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금한 채 기도하고 있었다(행 9:8-11).    

다메섹 유다의 집에 있던 사울을 방문한 아나니아는 예수께서 사울에게 보여 주신 환상대로(행 9:12) 안수하며 기도하였다(행 9:17).   사울은 영적으로 고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치유를 경험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 치유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행 22:12) 아나니아의 안수에서 왔다(행 9:12).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동반될 표적 중의 하나로서 ‘저들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막 16:18)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안수가 치유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치유의 어루만짐을 통해 그의 능력을 베풀기 위해 안수를 선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수를 통하지 않고 말씀만을 가지고(마 8:16) 얼마든지 시공간을 초월해 치유하시거나(요 4:46-54) 우리들 보기에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로로 사용해서 그림자를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신 적도 있었고(행 5:15), 바울의 몸에 있는 손수권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치유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갔다(행 19:12).  이런 일들은 골빈 신학으로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나는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을 믿는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고(마 12:22-37)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마 15:1-9)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그분의 역사가 나타난다(롬 12:3).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요 3:8),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목도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위협과 살기를 띠고(행 9:1),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 하며(갈 1:13),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행 22:4), 핍박자였던(딤전 1:13),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한 능력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사흘 동안 회개하면서 생각할 것이 많았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배운 가말리엘 신학(행 22:3)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이단 사냥질(행 24:5)에 열을 올렸던 사람이다(행 9:1-2).  그는 3일간 금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비뚤어진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소행(행 7:58-8:3)이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행 9:4-5).  아나니아가 도착했을 때, 평상시에 하지 않았던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행 9:11).  금식도 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데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요한 영적 연습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울은 후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19:6). 

기름 부음의 전이를 통해 은사를 준 경우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 예언의 말씀으로 인해 받은 것’(딤전 4:14)을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한다고 말했다(딤후 1:6).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는 신령한 은사, 즉 ‘성령의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도의 자격으로(엡 1:1), 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롬 1:11). 

“은사를 나누어 준다”  바울에게 이단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정통’과 ‘이단’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바울이 나눠 주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가?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가르침’(롬 12:7)이나 ‘권고’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해석은 Alfred Plummer가 말한 것처럼 사역자가 되게 하는 ‘권위’(롬 12:8)와 ‘통찰력’, 즉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직임’이라고 말한다.  St. Bernard는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은 평범한 은사가 아니라 목회 직무에 조화시키기 위해 받은 특별한 은혜다”  그 외 복음 전도를 위한 은사, 혹은 교회를 다스리는 은사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에 열려 있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빼놓고 한결 같이 ‘신령한 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 8-10, 28-30절, 또는 로마서 12장 6-8절과 에베소서 4장에 나열된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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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한 번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에 런던의 Clapham이라는 동네에서 한 집을 쳐다보았는데 문패에 George Jeffeys라고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John Wesley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 전도자라고 여기는 자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거기서 그는 나와 함께 기도했는데 성경적 표현을 쓴다면, 그것은 마치 그의 겉옷이 내 위에 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Jeffeys를 만나고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바로 그날은 내가 하나님의 전임 사역자로 일하기 위해 Swansea에 위치한 바이블 칼리지를 떠났던 날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사역으로 부르시면서 이처럼 나를 덮으시는 특별한 경험을 주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의 『Mighty Manifestations』에서 나오는 간증이다.  누군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나 역시 이 말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심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영적 상태는 ‘영적 소경’을 넘어 ‘영적 귀머거리’로 중증환자에 가까웠다.  사실 기름부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고, 때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기까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마 13:14). 

Bonnke의 글을 접하면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기름부음’ 즉,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고후 1:21)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열매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름부음의 전이가 성경적인가?”  혹은 “귀신들의 장난이 아닌가?”  같은 질문들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광범위한 주장들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성경을 보존하는 일보다 더 높은 우선수위는 없다고 말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사도 운동과 연관시키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몰아세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Bonnke는 기름부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대치되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안수함으로 기름부음을 주겠다고 제안할 때에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일회성의 기름부음(An Anointing)과 같은 것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The Anointing)만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신학적 개념, 즉 성령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움이나 능력을 구하는 기도의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용어의 사용에 관해 너무 엄격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Bonnke가 말한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견해는 비판이나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Hyena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목회에 충성하기보다는 먹잇감(신학적 논쟁)을 찾아다니는 목사들은 누군가 기름부음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면 거침없이 이단이라고 떠들어 댄다.  내가 목회자로서 지금까지 들은 것들 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이단 사냥꾼들이 떠들어 대는 골빈 소리들이 아니다.   정말 소름이 끼치고 두려운 것은 “성령께서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는 일들의 90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성령 하나님의 개입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적 활동만을 해대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계 3:1)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케 하는 능력을 가진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개인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에 관한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기름부으심은 어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들 또는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었을 수 있다.  Reinhard Bonnke와 R. T. Kendall은 기름부음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요한일서 2장 27절 말씀을 인용하여 ‘기름부음’은 성령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즉, “처음 분과 같은 다른 보혜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요 14:16).  이것은 예수님이 첫 번째 ‘보혜사’이시고(요일 2:1) 성령께서 그와 같은 ‘보혜사이실 것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신비이긴 하지만 기름부음은 신자 각자의 삶 속에 계신 성령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요일 2:20). 

‘은사’와 ‘기름부음’은 때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구약에 나오는 사울 왕이 버림을 받았으나(삼상 16:1) 그는 여전히 기름부음 받은 자(삼상 24:6)로 불렸던 것처럼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한 가지 의미 이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듯이, 이러한 기름부음이 안수를 통하여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의 전이를 받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에서 ‘임파테이션’(Impartation)이라는 영어 단어의 가장 좋은 번역을 찾는다면 ‘기름 부음의 전이’이다.  이 개념에 관련된 첫 번째 근거를 민수기 11장 16-17절에서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모세가 장로들에게 안수를 했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기름부음의 전이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Philip J. Budd는 이 구절을 가지고 열왕기하 2장 9-10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세가 받은 유산(endowment)은 양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장로 칠십 인에게 나누어지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임파테이션이 외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표적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의 본성에 일치하는 방법으로써 내면적으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구절에서 증명되는 원칙은 기름부음의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모세의 후계자에 대한 신명기의 마지막 증거인 34장 9절 말씀은 성경의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과도적 단계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도 임파테이션을 찾아볼 수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게 임하였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안수는 기도에 수반되는 행동으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으로 선발하여 그를 위해 공개적으로 특별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미 모세는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민 27:18).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인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열왕기하 2장 9-1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엘리야의 기름부음이 엘리사에게 전이된 것을 기록한 구절이다.  이 말씀은 기름부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이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 직접 구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구했는가 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약 5:17).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엘리야의 인간적 영력(靈力)을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승을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신(神)을 구하였던 것이다.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라고 말할 때(왕하 2:15),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엘리사가 엘리야라는 인간의 영적 능력을 전수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에게서 보았던 능력이 매우 비슷한 역사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엘리사를 통하여서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기름부음의 전이는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것이며,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사건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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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부음

기름부으심 2022. 11. 13. 16:21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직무를 행할 사람, 즉 제사장(출 29:7, 30:30, 40:15)과 선지자(왕상 19:16), 그리고 왕(삼상 10:1, 16:13-14, 단 9:4)을 세울 때, 그들을 불러 거룩하게 구별시키고 기름을 부었다.  다른 하나는 성막에서 사용될 평범한 물건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때 기름을 발랐다(출 40:9-11).  여기서 기름을 부는 것과 바르는 것은 이 물건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받쳐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사용하는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붓거나 바르지 않았고, 아주 특별한 기름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셨는데 그것을 ‘관유’라고 부르며, 그 의미는 “붓는 기름”이라는 뜻이다(출 30:31).  물론 물건이나 사람 몸에 붓는 기름 자체에 어떠한 특별한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사실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지 이것이 기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기름을 만드는 방법을 비밀에 부치지 않고 누구든지 다 알도록 공개하셨다(출 30:22-25).  만약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마치 그 기름 자체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신비스러운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기름부음을 통해 나타내는 의미는 아주 특별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이 물건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인을 치시는 것이기에( 1:13)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8:10-12).  이렇게 하나님께서 몇몇 물건과 사람들에게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지만( 4:11) 그들을 특별하게 불러서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하기 위한 표시로 기름을 부으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과 물건들은 구별되었기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구별하셨다.  물론 여리고 성에 기름 부으신 것은 아니지만 죄의 상징이었던 이 성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셨기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모든 물건에 손대는 자는 똑같이 받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성은 완전히 멸망을 당했고 물건에 손댄 아간과 그의 식구들도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6-7).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구별시킨 것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그분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8:10-12).

그렇다면 기름부음이 없는 장막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 기름부음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천막에 불과할 것이고 증거궤를 비롯해서 상, 등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과 받침대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만약 기름부으심이 없다면 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28:41, 29:7-9).  달리 말하면 기름부음이 교회 안에 없으면 분명히 교회는 교회인데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라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라는 것이다( 3: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바르게 하신 후에야( 30:26-29), 그것을 사용하셨고, 제사장이 직무와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도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부터였다(출출 30:30).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을 중요시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세례와 성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용서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6:8).  설교도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강대상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고, 거기서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과 일치하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살전 2:13).  이렇게 기름부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기름부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3:17, 1:11, 눅 3:22)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마 17:5, 9:7, 눅 9:35).  훗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지극히 큰 영광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벧후 1:17).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1:35), 궁금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2:10), 지상 사역을 감당하셨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사역을 감당하셨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으심을 받으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신데( 1:1), 누가 감히 하나님에게 기름 부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9:5).  그러나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4:27).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어주셨다(행 10:4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4:18-19).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2:6-11).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인간으로서 성령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2:28).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병자를 고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치유하거나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이사야서의 말을 인용하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왔으며 성령은 메시아의 인성에 은혜와 지혜와 기적적인 능력들을 넣어주셨다고 말한다( 11:1-5).  즉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신적 능력의 완전성을 가능케 하는 거룩하신 성령의 영향을 필요로 하셨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히 받으셨다(마 3:16, 눅 2:40, 4:1, 14, 18, 요 3:34).  Calvin은 이 구절의 교훈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에서 철저하게 성령을 힘입어 일을 행하셨지( 61:1-3), 성령이 없이 아무것도 스스로 행하신 적이 없었다( 5:3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고( 3:34), 예수님은 언제나 병자를 고치실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셨으며( 5:17), 귀신을 쫓아내실 때도 성령을 힘입어 쫓아내셨다( 12:28, 눅 11:20).  예수님에게 있어 성령의 기름부음은 지상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충분히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49-50).  또한 예수님은 번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고( 5:19), 언제나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다( 8:28).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보통 인간에 불과했을 것이고 다만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4:15).

오늘날 사람들은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을 특별한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특별한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특별하게 사역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4:12).  만일 주님의 사역이 특별한 위치로서 한 것이라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그 사람 안에 기름부음이 있고(요일 2:20, 27),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막 16:17-18). Calvin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그가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그는 영의 은사를 받아 우리에게 그것을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이요.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유래했으며 그 이름을 그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렇듯 기름부음은 믿는 자 안에 있는데(고후 1:21-22),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진리의 말씀을 아볼로처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행 18:24-26).  본인들은 잘 배웠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을 배워도 한쪽으로 치우쳐 배웠기 때문에 기름부음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이다.  믿는 자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곧 기름부음(요일 2:27)이라고 ‘주야장천’ 나팔을 불면서 오늘날 기름부음의 사상은 신기를 부르거나 접신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 기름부음인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요일 2:20).  반쪽짜리 답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으로 세뇌를 당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분만이 기적과 치유를 행할 수 있지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가르쳐 온 목사와 신학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마치 돌나라 한농복구회 교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이나 사이비 전광훈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종교적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정신질환의 일종인 복합적 망상장애를 가진 ‘광신도’에 가깝다.  내 경험상 이 고정관념이 깨지려면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육신적인 소경보다 영적 소경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요 9:40-41).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말이다(마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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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율법관

율법 2022. 10. 30. 16:52

오늘날 ‘율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 예수님을 삼위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들의 혈통적 선민의 지위에만 연연하여(마 4:7-10, 요 8:31-59), 구약만을 믿으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지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율법 절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부류는 ‘도덕률 폐기론’ 혹은 ‘반율법주의’로 불리는 자들로(롬 7:7-13),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 율법의 구속력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의와 형벌의 요구를 그분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유 4절),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으므로(갈 5:1),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성경적인 율법관’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엡 2:8), 여전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한 것으로(롬 7:12), 자기 힘이 아닌 성령을 힘입어(롬 8:4),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한다(겔 11:19-20). 즉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바른 도리(道理)로 율법이 교훈하는 삶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의 고유한 본질에 대해 알아본다면 율법은 근본적으로 그 법의 주체자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사 33:22).  나아가 그 원리가 그분의 창조와 섭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집행과정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므로 절대적으로 완전하다(시 19:7).  율법은 선택된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과 내용으로 체결한 법이지만(출 19:1-24:11), 구속사점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 효력이 시간적인 면에서 제한이 있고(마 11:13) 능력면에서 한계가 있다(히 10:1-2).  하지만 그 내용 자체만은 영원히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시 119:89).  따라서 율법은 단순한 구약시대의 생활규범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과 연결되어 매우 오묘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갈 3:24).  원칙적으로는 신구약을 망라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 규정 및 인간 양심에 내재(시 37-31)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까지 다 포괄하고 있지만(롬 7:7), 이것을 조금 더 구분하면 둘로 나누어진다.  

먼저 ‘기본적 율법’(Elemental Law)이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자체 안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신 29:29, 롬 2:15).  이는 그 대상이 비이성적 피조물인가(롬 1:19-21), 혹은 이성적 피조물인가(롬 2:14-15)에 따라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비이성적 피조물에 내재(內在)한 고유한 특성을 가리켜 ‘자연율’(Natural Law)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도덕률(Moral Law)은 자유 의지를 갖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이성과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롬 2:15).  도덕률은 이성적 피조물 내부에 선천적으로 심어준 것이므로 이에 대해 무지나 몰이해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강압적으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신적 지혜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것이므로 그 대상도 도덕률의 내용이 합리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의 『기독교강요』을 인용하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겪게 되는 죄책감을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안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 이성과 양심으로 반영된 것이다(창 4:13).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홍수가 인류 대부분을 쓸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창 6:5).

기본적 율법이 창조 시부터 모든 피조물 내부에 심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인 반면 ‘성문적 율법’(Enactive Law)은 그 후에 특별 계시의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히 1:1), 하나님의 의지로써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마 22:37-40).  이는 기본적 율법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닐 뿐 아니라(출 20:1-17), 간접적이고 제한적이나마 멸망받을 인간 구원의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탁월성을 지니고 있으며(갈 3:19-22), 이 성문적 율법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이 세 부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법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법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점은 어떤 측면은 한시적이고 또 다른 측면은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먼저의식법’은 구약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제사법( 1:1-7:38)과 성결법(레 17:1-22:33), 그리고 절기( 23:1-44), 특히 종교생활의 의식적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 24-27), 입법 원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원리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모든 제사에 관련된 의식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10:1).  따라서 법은 아직 예수님께서 성육신 강림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 전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 사역의 여러 원리와 측면을 반영하지만( 20:28), 그것이 예표 하던 본래의 내용이 성취된 신약시대에 와서는 규범으로서의 문자적 구속력은 상실되었다( 8:7, 13).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에 매일 드리던 모든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다( 10:10-12).  십자가 사건( 19:30)을 통해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제사와 의식들이 끝이 난 것이다( 15:38).  따라서 오늘날 짐승을 잡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26:28)을 힘입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4:16). 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의식적 율법이 성취된 것이고( 10:19-20), 신약의 예배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4:24), 생활 속에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이다( 12:1). 우리가 더는 의식법의 구속을 받지 않지만 그 배후의 원리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른 하나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함께 모여 살면서 성결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시민법’이다.  이 법은 재산법( 21:2-11, 19:14)과 형사법( 21:12-32, 21:1-9, 21:18-23, 24:16, 25:1-3), 이혼법( 24:1-4)과 재판법( 23:1-9, 19:15-21, 24:17-18), 그리고 민사법( 21:15-17)과 보장법( 23:24-25, 24:6-13, 14-15, 25:5-10)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분야의 율법은 그야말로 특정 시대와 공간의 상황, 역사 발전 단계에 맞추어 주어진 매우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법이기 때문에 자구적으로 영원히 적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데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문제를 판결해 이런저런 법을 만들어 주셨지만, 시민법도 예수님이 오시므로 막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21:43).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만을 두고너는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 16:16)이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10).  따라서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시민법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15).  그러나 이 법들의 배후에 있는 원리는 우리의 행동 지침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신약에 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시민법의 규정보다 그 원리를 극대화하여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더욱 고도의 시민법 규정을 주셨기 때문이다(마 5-7장). 

끝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을 규정한도덕법’이다( 12:28-31).  이 도덕법은 기본적 율법 가운데 도덕률(道德律)을 요약하여 성문화 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구속력을 가진 모든 법에 기본이 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구 불변한 창조와 섭리 원리에 근거한 것이므로 시대에 따라 불변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 및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강령이다(마 22:37-40).  이 법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8문항에서 이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도덕적 율법은 십계명에 요약적으로 포함되어있다. 이것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성으로 주어지고 판에 친히 써주신 것으로 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 나머지 여섯 계명에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10:4).  

도덕법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범죄 한 인간이 지키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10:4).  하지만 성경은 이 법에 대해서는 다른 두 법(의식법과 시민법)과 다르게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119:89).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의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공포된 가지 계명( 22:37-40)은 도덕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는 결국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눅 10:26-28).   도덕법의 핵심은 하나님( 6:5)과 이웃 사랑이며( 19:18), 주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답게 살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법으로( 3:31),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토록 존속되는 이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5:17).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이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폐지된 율법으로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의식법과 시민법이다(엡 2:15).  이 두 가지 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찢어질 때(눅 23:45), 의문에 속한 각 절기들과 안식일, 그리고 제사에 관한 모든 의식들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골 2:16-17, 갈 4:9-10).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율법에 내재된 정신과 원리들, 즉 거기 담긴 교훈적인 면과 내적 의미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할례’가 ‘세례’로, ‘무교절’이 ‘성만찬’으로 ‘제사’가 ‘예배’로 이어진 것이 그 사례이다.  그리고 폐지할 수 없는 율법으로는 도덕법이 남은 것이다(마 5:17).  

만약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폐지한다면 죄가 죄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롬 3:20, 5:13), 결국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율법은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죄를 지적해 주는 거울의 역할을 했지만(롬 7:7),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의 역할이 달라졌다.  즉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롬 5:20)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딤전 1:8).  따라서 율법은 비록 부정적인 측면을 반영하기도 하지만(롬 4:15) 반면에 인간 구원에 공헌을 하며 구원사역에 필요한 것이다(갈 3:24).  결론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을 받았지만(갈 3:13) 율법 자체만은 삶의 지표로 삼아 존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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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실재성

연구자료 2022. 10. 23. 13:39

예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내려지는 천벌이 바로 저주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성경에 언급되는 저주는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기분에 따라 내려지는 신의 진노가 아니라 분명한 언약과 규례에 따라 내려지는 것이다(신 27:15-26, 28:16-19).  이에 따라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졌다(창 4:11, 사 24:6, 렘 23:10, 단 9:11, 슥 5:3, 말 2: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범죄 한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기도 하였다(렘 24:9, 25:18, 42:18, 44:8, 49:13).  이러한 징계 조항이 있기에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남왕국의 요시야 왕은 제사장 힐기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고 두려워하며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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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회 사역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요 1:12), 예수님께서 부끄러움 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형제(히 2:12)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회적 소명은 주님의 목회 사역을 권능 있게 하는 성령의 동일한 능력을 덧입는다.  성경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요 14:12)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보다 더 큰 역사까지도 수행할 것을 그들에게 기대하신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기대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능력 밖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생 동안 팔레스타인 경계선 밖으로 나가 여행해 보신 적이 없으셨지만 제자들은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전 세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더욱 큰 기적들을 행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의 원인(막 6:53-56)을 단지 성육신하신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그분의 실재에만 돌린다면 우리는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 5:20)과 인성(마 1:25)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복음주의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존재한다는 신비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증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목회적 삶을 관찰하고 그분의 말씀과 능력이 단지 ‘처음과 나중’(계 1:17)이며, ‘알파와 오메가’(계 22:13)되신 전능하신(사 9:6) 그분의 신성에만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귀감이라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고, 그분을 목자장으로서 따르며(요 10:1-5), 선생님으로서 그분과 같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은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그분의 목회 사역이 전적으로 ‘모든 사람의 주’(롬 10:12) 되신 그분의 신성에만 기초했다면, 우리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처럼 ‘나를 따르라’(마 4:19)는 그분의 부름대로 살고자 하는 희망을 결코 품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요한복음 14장 12절 말씀은 예수님의 ‘실언’(失言)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하시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는가?(사 11:2, 42:1).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다.  먼저 누가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사야서 61장의 약속에 근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 약속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덧입음을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청중들에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더 나아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골 4:14)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지금 누가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분이 하나님이신데(요 1:1) 굳이 병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또 말하겠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음(롬 9:5)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한계를 받아들이셔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빌어 병자를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자신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권능을 주실(행 10:38) 때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Gerald Hawthorne은 『The Presence and The Power: the Significance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에서 이같이 말했다.  “명백히 누가에게 있어 성령은 예수님과 구별되어야 하는 예수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예수님에게 임하여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역사하고, 그분에게 영감과 권능 모두를 덧입힌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는 자신의 사명을 성령의 권능과 더불어 감당하며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나가신다.”   

Hawthorne의 말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기초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역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진다(눅 11:20).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권능을  받는다(막 16:17-18).  바로 그 성령의 위격과 사역이 성품과 능력으로써 그리스도인들, 즉 권능을 덧입은 교회가 예수님을 닮는 일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한 바람으로 불같이 오셨을 때(행 2:1-4),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요약하면서 그분을 이렇게 증거 했다.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행 2:22).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의 눈에 주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분으로 비쳤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말씀(요 1:14), 즉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라는 사실을 평가절하하거나 그분의 신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격으로 영원히 결합된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요 10:30), 또한 완전한 인간이다(빌 2:8).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역에 대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눅 11:20), 즉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었다고 단언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출애굽기 8장 19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애굽이 마술사들이 애굽에 재앙이 내리도록 한 모세의 행위를 ‘하나님의 손’이 역사한 것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신다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께서 신적 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가르쳐준다(빌 2:6-11).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 한 인간으로서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눅 4:18-19).

우리의 목자장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모두가 따라야 할 방식으로 목회적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셨다(벧전 2:21).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을 때(빌 2:7), 목회’라는 운동장을 고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오셨으며(히 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목회하도록 공급하는 동일한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갈 2:20).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에 의지했으며(요 5:19, 12:49, 14:10), 언제나 초자연적인 권능, 즉 성령에 의존하셨다(마 12:28, 눅 4:18, 롬 1:4).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요 5:30).  Hawthorne이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의존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인성의 진정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역 기간 내내 성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다(요 8:2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목회 비전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소유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은 치유의 은사들을 포함한다(행 3:1-12).  나는 특별한 경우 성령께서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부여하신다고 믿는다.  치유자는 아니지만 병자를 놓고 손을 없고 간절히 기도할 때 질병으로 고통받는 그들이 치유를 받으면서 예수님과 협력하는 특권과 은혜와 기쁨을 누린 적이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도 한 분이 청력 상실에서 고침 받을 때였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치유의 은사들을 의도적이며 주권적으로 베푸신다(고전 12:11).  이것은 나와 같은 목회자나 장로들이 기도하기만 하면(약 5:14-16), 언제나 치유의 역사가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베푸시는 주권적이며 동정 어린 ‘치유의 은사들’ 관점에서 우리는 치유를 구하는 담대함과 기쁨이 넘치는 자유를 소유한다(막 11:24).  비록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그분께서는 고통과 근심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여전히 애정과 온전한 지혜와 사랑으로 병든 사람들을 대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성령께서는 목자장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을 기름 부어 세우셨다.  성경은 증거 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부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 동일한 성령께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나타나신다.  Jonathan Edwards는 『신앙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로 내려오신 성령은 그 지체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오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비둘기처럼 내려오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Andrew Murray 역시 『The Spirit of Christ』에서 “신자가 성령을 한번 받았다 해서…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 날마다 필요하듯이… 그 축복도 늘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신 분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고착화된 교리를 가지고 Edwards를 폄하하는 사람 중에 말 바꾸기, 거짓말, 주작(做作)의 달인으로 소문난 인품이 좋지 못한 천방지축,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목사가 있다고 한다.  확증평향에 사로잡혀 있고, 건설적인 대화, 즉 서로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신학적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거나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무경험자인 목사가 Edwards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이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끝까지  우기는 정신 나간 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  나는 Edwards가 냉철하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인 성령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다.  폐일언하고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성령이 권능을 덧입혀 달라고 간구할 때, 그분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큰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주실 것이다(막 11:24).  나아가 권능을 덧입은 목회 사역을 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분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마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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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뽑기

연구자료 2022. 9. 25. 10:08

민수기 26장에는 ‘제비뽑기’ 기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곳의 땅을 제비 뽑아 각 지파별로 나누어 가진 것을 의미한다(민 33:51-54, 수 14:2).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어떠한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종종 제비를 사용하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택하곤 하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신구약 성경에 골고루 나타나 있다(수 18:6, 대상 26:13-15, 행 1:26).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제비뽑기를 하면서도 늘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에게 있느니라’(잠 16:33)는 의식(意識)을 잃지 아니하였다.  즉 그들은 무슨 일을 실행함에 앞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여러 지역을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할 때 제비를 사용하였다(수 14:2, 18:6).  다윗이 성전에서 음악을 담당할 사람의 직임을 결정할 때(대상 25:7-8), 그리고 성전의 각 문을 지킬 사람을 결정할 때(대상 26:13-15)에도 제비뽑기를 시행하였다.  특히 이스라엘 전체가 관계가 되거나 여러 사람이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일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그 근원이 되는 범죄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내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는데 이때도 역시 제비뽑기가 시행되었다(수 7:14, 삼상 14:36-42).  이러한 일 외에도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스라엘 초대 왕을 선정하는 일에 있어서까지 제비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삼상 10:17-24).  온 이스라엘 지파가 모인 자리에서 선지자 사무엘은 그들로 하여금 제비를 뽑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다.

한편 신약에도 유대인들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가끔 제비를 뽑아 일을 처리하곤 하였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종 시 로마 군병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제비를 뽑아 그분의 옷을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마 27:35).  하지만 초대 교회 시대에 사도들은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택함으로써 가룟 유다의 뒤를 이을 자를 얻기도 하였다(행 1:26).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제비뽑기’란 일종의 요행수를 바라는 주술적 행위인 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나지기를 바라는 신앙적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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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교육에 뒤따를 수 있는 약간의 부작용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나는 학문적인 훈련의 네 가지 유익점을 간략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신학 과목들에서 타인들을 철저하게 교육하고자 하는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이다.  어느 누구도 말씀에 대한 깊은 사모함 없이 성경학이나 신학을 배울 수 없다.  다음은 교회사에 대한 식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역사하신 방식에 대해 조망하는 것은 큰 자산이 된다.  그리고 개인학습의 훈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게으른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강제적인 책임과 규칙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신실한 교수들과의 만남이다.  성경의 진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스승들로부터 흘러나올 때 참된 목회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학문적인 유익 외에 다른 유익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경험했던 신학 교육에도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차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방 끈이 짧은 제자들은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다(행 4:13).  한 마디로 '스펙'(한국식 잘못된 영어 표현)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있어 목회적 자격을 증명해 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자로서 목회관을 형성하거나 수행해야 할 필수적인 기초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요즘처럼 개나 소나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처럼, 그 흔한 대형 교단 안수 증명서나 유명무실한 신학교 박사학위 증서가 아니다.  사실 눈먼 교인들은 중심을 보지 못하고(삼상 16:7),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 즉 교육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판단한다(약 2:1).  이것은 패역한 이 시대에 가장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성이 강한 엘리트 집단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이 구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계속해서 그분과 함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자들의 목회관(행 4:19)과 깜짝 놀랄 만한 용기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왔다.  이 친밀감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과 담대함이다(행 4:8, 31, 9:27-28, 13:46, 14:3, 18:26, 19:8, 26:26, 28:31).  한마디로 어떤 신학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예수님과는 아무런 친밀감이 없으면서도 세상적인 학위를 북한의 장성들이 갑옷 입은 것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많이 달고 있으면 능력 있게 쓰임을 받느냐는 것이다.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유익한 것도 있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거나 대접받는 것 말이다(마 23:7).  하지만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마귀의 새끼들처럼 십자가의 원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마 23장).      

내가 학교 교육과 어느 특정 교단 신학을 평가절하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학문적인 훈련을 통해 말씀에 대한 사모와 개인 학습 그리고 교회사에 대한 식견과 이름난 쟁쟁한 교수들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학문적 교육에 큰 유익점이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탁월한 교수들의 가르침과 수많은 토론을 통해 교육과 훈련받은 것에 대해 늘 감사를 하고 있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 당시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강의 시간에 성령의 은사 문제로 교수와 살벌한 논쟁을 벌여 학교 전체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건을 빼놓고는 모범 학생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리가 배운 교육은 학문적 유익이 있는 반면에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학문적인 훈련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원천도 기초도 아님을 확신한다.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예수님(막 6:3)과 그분의 제자들은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고전 1:26).

심지어 신학 교육의 부작용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교만과 소원(疏遠)이다.  자신이 배우고 습득한 성경 지식과 주경학적인 기술들이 마치 목회의 능력을 제공하거나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할 때 우리는 방자한 생각과 교만한 마음에 빠진다.  물론 지식과 기술도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신학적 지식을 남용한다면 그것들은 목회의 도구가 아니라 형제들 간의 분열과 논쟁만을 일으키는 교만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고전 8:1).  이런 도구와 기술과 같은 부차적인 것이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그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딤전 6:4-5),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이단(異端)들처럼 목회를 타락시킨다. 

솔직하게 말해 신학적 논쟁을 일삼는 목사 치고 목회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영혼 구령의 불타는 마음이 없으니까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관종’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박수 엘루마처럼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함으로’ 사람들을 혼란시키고(행 13:10),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혼잡스럽게 만들거나 잘못된 성경해석을 통해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조차 믿음을 파괴시킨다(딤후 2:18).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눅 11:52),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막는다’(마 23:13).  한 마디로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마 23:33).  왜 이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을까?(마 12:34).  이들이 받은 형벌은 게헨나, 즉 지옥과 그곳의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구원받을 희망에서 이미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끝없는 신화와 족보’(딤전 1:3-4) 이야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딤전 4:7), 즉 신학적 논쟁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듣는 자로 하여금 멸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딤후 2:14).  

이렇듯 교만은 소원을 수반하듯 자신이 배운 신학이 다른 교단 신학보다 높게 해 준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있다.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비방하거나 배척하려고 하는 유해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 당시 저주받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마 23:33).  이들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48-49).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다른 교단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예언과 방언을 인정할 수 있어?” 오늘날 이런 골빈 소리로 찌껄이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교회를 다니는 같은 부류에 속한 눈먼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이웃이 되고자” 성육신 하신 지혜자이시라면(요 1:14), 참된 목회 지식과 기술들은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시킨 것처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중간에 막힌 담(교단신학)을 무너뜨리고 서로에게 다가가게 할 것이다(엡 2:14-16).  예수님께서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셨지만 결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 역시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았고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빌 3:5-8),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골 1:5-6).  자신이 배운 가마리엘 신학을 가지고 소모적 교리 논쟁을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딤후 2:23). 

목회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을 나타내려면(고전 15:41), 자신의 삶 속에서 성령을 통해 깨달은 진리의 말씀(요 14:26)을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전함으로써(딤후 4:2),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이다(단 12:3).  그 삶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을 닮고자 하는 진실하고 부단한 노력이 있을 뿐,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없다(딛 3:9).  다시 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전 1:13)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 신학, 아볼로 신학, 베드로 신학, 그리스도 신학을 가지고(고전 1:12), 서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뛰어난 것처럼 나팔을 불거나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  책 한 권 만을 읽은 사람이다.  성경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오직 자신이 읽은 책 한 권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성경해석 능력이나 성경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지식과 추종하는 교주(敎主)로부터 받은 신학적 체계를 믿고 있어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연합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문제는 자기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신학의 틀을 가지고 다른 신학을 비판하면서 당을 지어 자기편에 속한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편에 선 사람에게는 입에 게거품을 물듯 무자비한 모습으로 마녀 사냥하며 몰아세운다.  심리학 용어로 확증편향(確證偏向)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목사다. 이런 목사를 만난 교인들은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  마치 돌나라 박명호 밑에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서 Pope Gregory XIII에 의해 사라질뻔한 책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에서 Luther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수많은, 진정 셀 수 없는 증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토록 거만하고 자신만만해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Craig S. Keener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신다는 참된 표징을 겸손이라고 말했다(엡 4:2-3).  오늘날 목회자들은 비록 자신의 성경 해석과 견해에 대해 옳다고 믿더라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실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겸손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심각한 문제는 목사가 입만 열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보너스다.  양심이 화인을 맞은 목사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교인들 앞에서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딤전 4:1-2).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20세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아버지 James W. Sire는 『Scripture Twisting』에서 말한다.  “우리들은 쉽게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날마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이해한 것에 순종하고 새로운 통찰력이 주어졌다면 이전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Luther 역시 “하나님 앞에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말하는 겸손한 목회자만이 성경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알듯이 성경을 알아가는 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이 길에는 지름길이나 왕도(王道)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가능한 안전장치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편견을 섞는 일 없이, 성경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받아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벧전 1:20-21).   나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고 주관주의와 싸우면서 터득한 성경 지식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 덕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관주의와 싸우지 않고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학자 한 사람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성경에 자신의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자기 해석을 고수한다면 신자들은 이런 무지한 목사를 만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만 가르침을 전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그 나라에 바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마 13:13), 감추어질 것이라고 대답하신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눅 11:14-23), 자신의 고정관념 깨기를 거부하고 짐짓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다(마 13:14-15).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박스 안에 갇혀 소모적 교리 논쟁만을 일삼지 말고 밖으로 나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 시야를 넓히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그릇된 교회 전통과 제도, 그리고 박제(剝製)와 같은 신학으로 인해, 이러한 폐쇄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바리새인 같이 소경으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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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느 목회자가 성경을 백독 이상을 하면 굉장히 신령하거나 영적인 세계를 잘 알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주의 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흔한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신학적 배경과 그 목사가 하는 말을 거의 진리인 것처럼 대단하게 여기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도 없지 않나 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성경을 수 백독 하거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명무실한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성경에 대해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지만 개중에는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성경적인 예를 들어보자.  바리새인들은 평생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요 5:39),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했고(요 3:7-10), 성경을 곡해(曲解)하며(마 15:9), 죽은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막 7:1-10),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요 8:44).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마 3:9),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고(요 3:3), 마음속 깊은 곳에 가인의 살인적인 미움의 피가 흐르는(창 4:8), 예수님의 말씀대로 독을 뿜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마 23:33).  다시 말해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달달 외우거나 원어성경을 막힌 없이 좔좔 읽어 내리고 남들이 알아주는 신학교를 졸업했어도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아닌 마귀의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나 목사가 어떤 신학적인 주장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Lloyd Jones는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날 것을 예측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고향인 South Wales 지방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개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지고 있는 학위로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는 경향을 유감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Iain H. Murray의 『Life of Martyn Lloyd Jones』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면 Lloyd Jones는 웨일즈가 낳은 복음 전도자들 Daniel Rowland, Howell Harris, William Williams, John Elias 등의 예를 들면서 이들이 무슨 이름이 있거나 알아주는 학위를 가지고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제자들은 어떠한가?  사도 바울을 빼놓고(행 22:3), 다른 제자들은 신학교 근처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행 4:13).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학위를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는 공식적인 훈련이나 사회적인 품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소외되고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고전 1:26).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부르신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7, 마 5:16),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학적/신앙 배경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이다(고전 1:29).  반면에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보면 세상적인 지위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있고(마 23:2),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진리인 것처럼 어떤 골빈 주장을 강력히 내세울 수 있다.  

성경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릇들은 무엇인가?  나는 모든 사역자들이 유능하든 무능하든, 큰 교회를 목회하든, 작은 교회를 목회하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은사중지론자든, 은사지속론자든, 심지어 유익이 하나도 없고 듣는 자로 하여금 믿음을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열심히 전하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가짜 선생이든 간에(딤후 2:16-18) 시몬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마 16:16), 자신의 신학적 울타리를 벗어나 위엄의 보좌 우편(히 8:1)에 계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히 12:2)를 바라볼 것을 거듭 요청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교회의 썩어빠진 죽은 전통과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선한 목자’(요 10:14)로 지칭하시는 분을 바라보는 일보다 우리를 자유롭고 활력 있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지혜로운 목회자는 자신의 눈을 단호하게 예수님에게 고정시킬 것이다(히 12:2).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마 7:3).  이러한 사람은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차이점이 있을지라도 자신에 대한 냉철한 평가로부터 서로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까지 개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 4:13),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교리적이며 교단적인 광범위한 차이점들이 진정으로 목회자들을 서로 헐뜯고 비방하거나 논쟁을 일으키며(롬 1:2-32), 당을 지어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다면(유 19절), 나는 그것들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목회자 상호 간의 비교와 비판과 근거 없는 신학적 판단, 그리고 시기와 종교적 분쟁 같은 더러운 짓들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것’이고(롬 2:24),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신학교 교육을 받거나 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목회 사역을 시작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의 목회관은 당시의 어떤 고등 교육 기관에 의해 형성된 것도 아니다.  Everett Harrison은 『A Shot Life of Chri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식 교육을 거의 받지 않으셨다. 대중적으로 종교 교사 또는 랍비라고 알려졌지만 그분의 명성은 어떤 전문 교육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목회 이력상에 학문적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삶과 메시지에 대해 가혹할 만큼 조소 어린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날 목회를 하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들은 잘 모르겠다.  아마 장로교단 합동이나 고신에서는 분명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먹이 만난 하이에나처럼 길길이 날뛰는 관종스러운 이단 사냥꾼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적이 있었다(요 9:1-14).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던지 간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재빨리 속 좁은 결론을 내렸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9:16).  이들은 그 기적의 부당함을 골빈 신학으로 설명하려고 야단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게거품을 물듯 기를 쓰며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명백한 해답을 전에 소경이었던 그 사람이 지적하자(요 9:25), 바리새인들은 그를 꾸짖으며 자기들 앞에서 쫓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요 9:29).  여기서 소경이었던 자가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이 여긴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리는 말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 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가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은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 신학에 충실하다는 것을 완강히 옹호했다.  골빈 목사들이 흔히 쓰는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칼빈의 제자야!!”라고 나팔을 불어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문 교육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경멸의 눈으로 예수님을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한다(빌 3:5).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육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교육이 랍비를 존경받고 인정받는 ‘흠이 없는’ 중요한 인물로 만든다고 믿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러한 교육과 훈련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승인된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여긴 것 같다.  우리들 역시, 어느 특정 신학을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높이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목회자들 중에 이러한 위험스러운 바리새적인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본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입만 열면 별 볼 일 없는 궤변주의 늙은 신학자의 말을 팔아먹는다. 

그렇다면 신학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물론 교육이 중요하다.  나도 그 흔한 학위를 하나 갖기 위해 연방 정부 학자금을 빌려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말씀에 비추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학벌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의존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smart 한 머리가 뜨거운 heart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머리가 똑똑해서 배운 것이 많아 천상 유수(靑山流水)처럼 말을 잘하는 자들은 많지만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목회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머리로 배운 신학 교육보다는 더 강력한 원천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뜨거운 가슴에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Derek J. Tidball는 『Skillful Shepherds』 에서 신학 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목회 상의 결핍을 다음과 같이 확인시켜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목회 전략들과 목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그들은 목회 현장에서 신학교 시절 직면했던 것과 다른 문제들에 봉착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배운 이론으로써 그 문제들을 대처한다. 그들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교리의 목회적인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며, 신약성경에 나온 목회 전략들이 자신들의 목회를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목회는 자주 신학적 기반으로부터 멀어지고 결핍된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해보아야 한다.  “목회자로서 수행할 모든 것들이 영구적이고 필수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신학 교육이 실제로 목회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 확고한 말씀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가? 교육이 목회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신학 교육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선두 역할을 한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  Moody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목회를 하는 데 있어 주된 기반이 아닌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다.  더욱이 예수님이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종교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 의한 강력한 박해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핍박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가방 끈이 짧은 학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행 4:13).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은 랍비 학교에서 공식적인 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자랑할만한 학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목회적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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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의미에서의 벌금 제도 곧 국가나 사회에 대하여 속죄를 위한 돈을 지불하는 제도가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어떤 범죄나 허물을 속죄하기 위해서 제사장들에게 가지고 가는 돈(왕하 12:7)은 벌금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규례는 사형이나 기타 중형에 해당되지 않는 가벼운 범죄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타인의 재산이나 권리면에서 손해를 끼쳤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만일 훔쳐온 양을 산채로 다시 돌려주는 경우라면 그 도둑은 단지 2배의 손해 배상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만일 죽이거나 팔면 4배로 보상해야 했다(출 22:1-4).  그리고 처녀를 유혹하여 통간한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했다(출 22:16).  또한 한 남자가 혼인 전에 아내의 부정이 있었다고 거짓으로 고소했다면, 그는 공개적으로 매를 맞는 태형에 해당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장인에게 100세겔을 벌금으로 주어야 했다(신 22:18-19).  성질이 나쁜 소가 받아서 사람을 죽인 경우에 그 소의 주인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만큼 살아 있는 남은 가족에게 돈을 지불하였다(출 21:30).  다만 주인이 사전에 소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경우는 예외이다.  만일 어떤 여인이 그의 남편과 싸우던 어떤 가해자로 인해서 유산하게 되었으면, 그 가해자는 남편의 청구대로 벌금을 내야 할 책임이 있으나 이 사건은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야 했다(출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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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자라고(마 2:23), 또래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셨지만 언제나 그들보다 훨씬 뛰어나셨다.  심지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전 뜰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을 놀라게 하셨다(눅 2:46-47).  다른 유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관례적인 교육을 받으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 지혜가 자라났다(눅 2:51-52).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신 분이지만 보통 인간과 동일한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거쳤음을 보여준다.  성장 과정에서 우리와 같은 단계를 밟아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과연 예수님에게 있어 목회 사역의 원천은 무엇이었는가?”  아마 그분에게 있어 학문적인 지혜도 중요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거나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주로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부르셨기 때문이다(행 4:13).  세상 기준으로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전 1:26).  한 마디로 ‘가방끈(?)이 짧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를 학문적인 교육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유능한 목회자가 되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착하는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늙은 바리새인의 신학 강의나 골빈 사두개인이 개최하는 설교 세미나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눅 2:39-40), 목수 일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막 6:3) 어느 날 갑자기 무인가 신학교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변신하신 것도 아니다.  목자장으로서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성경의 계시라는 약속의 땅에서 자라났다.  그분은 매일매일 성부를 의존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과 사역에 대해 규정한 구약의 약속들과 예언들을 받아들이고 숙고하셨다(창 3:15, 사 53장, 슥 12:10, 말 3:1).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사역을 절대적으로 결정했다(요 5:19, 30).  관계의 역학은 교육적인 요인들보다 목회적 유효성에 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즉 목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학교 교육과 학위 취득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다.  

Helmut Thielicke는 세상에서 가장 별 볼일 없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는 예수님의 경향에 대해 논하며 『Beyond Pushing and Produc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그들이 쓸모없고 뛰어난 점도 없고 중요한 인물도 아니며 단지 하늘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불행한 자녀들이라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 듯하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구원하셔야 했다. 그러한 자들에 대한 사역에 있어서 그분은 ‘절대적인 공평함’에 의거해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소위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신 듯하다”  오늘날  목회 사역의 회복을 논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목회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목회적 소명에 대한 확고한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속사적 관점들을 무시하듯 날마다 성부 하나님께 의지할 때 활성화되는 성경의 약속이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살벌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사렛에서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 전에는 이웃이었지만 이제 검은 색안경을 끼고 성난 폭도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들 가운데로 지나서 자기 길을 가셨다(눅 4:22-30).  도대체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어떠한 행동이 그런 미친놈들만 모여 있는 평상 마을 시위처럼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  그분은 단지 자신의 성경의 약속의 현신(現身) 임을 선언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오실 성령의 기름부음 받는 자에 대한 이사야의 약속의 성취라고 밝히셨다(사 61:1-3).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펴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라는 구절을 읽으셨다.  약속이 사람이 되었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마귀와 치열한 접전을 펼치신 후, 그분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으셨다(눅 4:14).  다시 한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의 근거를 정확히 어디에 두셨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회 비전’ 말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유능한 목사가 되기 위해 남들이 알아주는 훌륭한 신학 교육과 뛰어난 언어 소통술 그리고 화려한 경력들, 예를 들어 본인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들먹거리며, 눈이 빠질 정도로 성경을 수 백독 하고, 새벽기도를 많이 한 것처럼 천식 걸린 목소리, 그리고 공업용 본드 같은 끈끈한 ‘인맥’을 최우선 순위로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갖추기보다는 먼저 성경의 약속이라는 영원한 기초와 성령의 능력에 뿌리를 내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예언된 소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학문적인 지혜의 축적이 아니라 계시의 약속인 성경(사 11:1-5)과 소유하신 성령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사 61:1-3).  Douglas Webster 박사는 『A Passion for Christ』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자신의 정신과 감성과 영혼이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도록 훈련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를 두신 곳에 목회자들도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두는 것만큼 시급한 일은 없다고 말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는 바울의 질문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에베소의 제자들이 대답한다.  에베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들었다면 분명 성령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요 1:32-34).  하지만 이들은 약속된 성령(행 1:4)을 이제 그들도 받을 수 있다는 것(행 2:17)과 성령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삼상 10:6, 고후 5:17).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이들도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저 교회 안에서 하는 전형적인 얘기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자신들처럼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성령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해 성경은 여러 가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위에서 임하시고, 인치시고, 채우시고, 세례를 주시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내주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역사는 인격적인 그분의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면만 알기보다는(요 16:8-9), 병을 고치시고(눅 5:17, 행 10:38), 예언의 말씀을 주시며(고전 12:10-11), 동시에 거룩하게도 하시고(살후 2:1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도 있다(롬 8:26-27). 뿐만 아니라 능력도 주시고(눅 24:49), 거듭나게 하시고(요 3:3-5),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며(갈 4:6), 삶 속에 아홉 가지 열매도 맺게 해 주신다(갈 5:22-23).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다 알기 전에 그분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가설(假說)에 가까운 어떤 신학적 주장을 내세운다면 아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만하고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고전 8:2).  성령의 사역은 주님 앞에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만을 알 수 있기에(요 14:26), 그분이 영적 세계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엡 1:17-19).  문제는 목사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의 한 부분만 바라보고 얻은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성령을 안다고 속단해 버리는 경우다.  예를 들어 성령은 “이러한 분이시고 이런 분은 아니야”, “이런 일을 하시지만 저런 일은 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종 스스로 계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제멋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주 하시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시고 성숙하게 세워 가시는 데 있어 그 방법이 감정적이지 않고 경험적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성령의 다른 사역이 나타나면 무조건 의심하고 이단이나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을 보듯 판단하고 비판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운동을 접한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사역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치유와 예언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초자연적인 능력, 영분별, 귀신 쫓아내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은 오직 능력 사역에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다른 신자를 바라볼 때 과연 저들 마음속에도 성령이 계실까 라는 의구심을 가진다. 그 결과 교회의 머리 되신 한 분 예수님을 두고(엡 4:15), 같은 지체인 그리스도인들끼리(고전 12:12-27),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갈 5:15),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가 너무 많이 여러 파(派)로 나누어져 있다(고전 1:12).  마치 ‘쪽파’, ‘실파’, ‘양파’, ‘대파’ 같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분열된 그룹들이 각기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 각각 다른 설교자들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이들 말에 의하면 과연 어느 교파가 믿는 예수님이 진짜일까 궁금하다(고전 1:10-13).  사도 바울은 육신의 혈통으로 맺어진 형제자매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감을 나누어야 할 그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어두움 세상 속으로 가져가는 그들의 사명이었다.  ‘내부 총질’로 인해 불신자들에게 교회가 손가락질과 조롱을 당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롬 2:24).

오늘날 개혁주의에서는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받기 쉽기 때문에 오직 말씀만을 강조한다.  진리의 말씀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물론 전하는 말씀이 북어포처럼 메말라 있지만 나는 그것이 정확히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은사주의에서는 성경 지식보다는 능력만을 강조할 때가 많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도 없다.  이들이 남들보다 조금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복음주의자들은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 같고, 은사주의자들은 질서를 불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는 내주 사역을 강조한 것이고, 은사주의에서는 능력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 사역’과 ‘특수사역’, 즉 ‘성령의 간접 사역’과 ‘성령의 직접 사역’이라고 부른다.      

나는 대학원에서 웨슬리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두 진영에서 삼십 년이 넘게 있어본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다.  먼저 성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질서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갈 5:22-24).  자유만 강조하거나(갈 5:1), 혹은 질서만 강조한다면(고전 14:33, 40),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게 된다.  신앙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같은 교회 안에서, 혹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이는 가장 큰 비극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연약함과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잡도록 반대세력을 항상 일으키신다.  마치 Calvin이 독주를 막기 위해 Wesley가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는 말씀 운동을 넘어 은사 운동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운동을 일으키셨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서 배우기를 바라시는 교훈을 은사 운동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된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된다(마 12:50).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가족 용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2, 14, 25-27절).  요지가 무엇인가?  개혁주의(비은사주의)자들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19-20절)라는 경고의 말씀과 더불어 오순절주의(은사주의) 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2-13절)고 권면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 권고는 1세기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역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사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에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균형이 잡혀 있고, 또한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의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회적인 정체성의 원천을 성부께서 구체화시킨 성경의 약속에서 찾으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 원천을 성령의 권능을 덧입는 일에서 찾으셨다.  즉 목회적 정체성과 소명의 기초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에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성경 계시의 약속과 성부의 실제적인 현존에 근거를 두셨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그곳에 근거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수면제 같은 설교와 머리만 커지는 성경 공부만 하지 말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치유사역도 해야 된다는 것이다(약 5:14-16).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 목회 사역의 유일한 모델이 되시기 때문이다(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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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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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견해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거나 인지하고 있는 견해도 있는 반면에 자신에게 길들여진 문화적 환경에서 터득한 어느 한 사람의 신학적 견해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거나 다양한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착수할 때,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선입견이 우리 주의를 맴돈다.  문제는 자신이 성경에서 파악하는 내용이나 성경과 조화된다고 주장하는 생각이 이런 견해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어떠한 한 가지 해석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단지 그것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희미하고도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 자신의 해석이 하나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게 된다.     

나는 엄청난 학비와 시간을 들여가면서 정식 신학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성훈련의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영성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려면 언제나 부정적이고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이 영성에 관한 책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교회 전통과 교단 신학에 짓눌려 내 영혼의 보잘것없는 초라한 상태에 대한 반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마치 Bill Hull 목사가 목회 말년에 쓴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솔직한 대화』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깨달은 부끄러운 사실은 목사인 내가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성령의 임재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내가 받은 신학 교육 어디에서도 신앙생활에서 은혜롭게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실습해야 하는 고전적인 영성훈련 과정들은 없었다.  특히 영성훈련을 전혀 해보지 않은 목회자들로부터 여러 번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라고 권고를 받았다.  또한 영성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경건한 생활과 전도, 그리고 하기 싫은 금식을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보다 다양한 영성훈련을 하라는 Dallas Willard나 Eugene Peterson, 그리고 내가 다녔던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인 Richard J. Foster의 요청들은 지나치게 행위들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종교 개혁가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주장한 진리의 법정적 paradigm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들을 은혜스럽지 않고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처럼 성경을 읽고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며(딤후 3:14),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갖지 않기 위해 골방에서 기도하고(마 6:1-15), 전도하는 것(마 28:18-20) 이외에 어떠한 영적인 지도를 받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좋은 mentor를 만나지 못했다.  처음으로 고독과 침묵, 순종과 섬김, 그리고 고백과 명상에 대해 읽었을 때 나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갈 2:16)라는 말씀 같이, 이것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스스로 획득한다는 의미의 ‘행위 구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시 고백하지만 나는 수년 동안 고전적인 대부분의 영성훈련들에 대해 무지하고 불순종한 채 죽은 전통과 메마른 신학에 얽매어 사역해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가진 목회 비전의 꿈과 계획이 서서히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왜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생명력 없는 정체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성훈련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가 친히 그 훈련을 하셨다는 점이다.  목자장이신 분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따를 모범으로서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벧전 2:21) 하시려고 그것을 행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영적 거장 Dallas Willard는 예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의 방식 자체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깨우치는데 교회에 크게 공헌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영성훈련의 견실한 연습 표본이다.  나의 생각은 영성훈련 없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었다(롬 8:2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했고(갈 4:19),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라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신념으로 사역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라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며(벧전 2:9),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벧전 2:21).  이 구절에 대한 Glenn Baker의 말을 인용한다면 “저자는 예수님의 행적을 완전히 닮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기를 진지하게 요청하는 신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어떻게 사셨는가?”  복음서를 읽어 보면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해답이 나온다.  예수님은 금식과 기도와 고독(마 4:1, 막 1:35, 눅 5:16), 순종과 헌신(마 26:36-46, 눅 22:42, 요 5:30, 13:4-5), 그리고 묵상(눅 15장) 같은 경건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전달하기 위해 독창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시는 것은 그분이 깊은 영성 훈련을 하셨음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목자장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성훈련을 해야만 한다(딤전 5:7).  이 진리를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훈련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벧전 2:21).  만약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영성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사마리아 여자처럼 율법주의자로 변할 수 있다(요 4:20-24). 

Dallas Willard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는 일”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복음주의적 완전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Willard는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 이외의 여러 가지 수단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견해를 훌륭하게 옹호한다.  물론 개혁주의자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결코 성경에 모순되는 것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입증되는 것들이다.  성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인도한다.  사실 개인적이고 영적인 훈련이 없는 신학 교육은 치명적이고 박제(剝製)화 될 수 있다.  교육과 인격, 능력과 경험, 그 어느 것도 목회적 완전성과 권위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영성훈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때때로 이 만남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거나 성경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시키고, 그것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위한 그분의 풍성하신 권능을 덧입게 하기 위해 이 만남을 계획하셨다. 

우리는 바리새인 같이 주관적인 경험에 극단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반응은 오랫동안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해왔던 구분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 사이의 구분이 된다.  A. W. Tozer는 『The Pursuit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진술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다.  따라서 그것은 잉크와 종이와 가죽 등의 필수적인 용품들에 의해 한정되고 제한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절대자이신 그분께서 자유로우신 것처럼 살아 움직이며 자유롭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들은 영이며 생명이다’ 생명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상응될 때에만 능력을 가진다. 기록된 말씀을 전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재적인 음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책 표지에 갇혀 잠들어 버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사역을 하기 전에 기다리셨고(요 5:19),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고(요 8:28), 성부께서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며(빌 2:9-11), 성령께서 그 전 과정에 권능을 덧입히셨다(눅 4:18).  이사야서 50장을 살펴보면 마가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이유를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고독, 침묵, 경청하는 기도, 순종, 사역의 수용, 이 모든 것들은 날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행적의 일부였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갈 2:20), 우리는 그분이 하신 대로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신 방식대로 살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마 25:21), 목회자가 되는 길은 결코 없다.

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Howard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철저히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다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Hendricks는 학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단독적으로 만나는 일의 귀중함을 아셨던 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대인 관계의 장점이 때때로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목회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역자로 쉽게 변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실망시키는 올무인지 알고 있다. 

고독 훈련은 역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에게 영향력 있는 목사가 되고, 주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려면 목회자들은 성부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기 위해 성도들을 떠나야 한다.  Eugene H. Peterson도 성도들로부터 물러남이라는 이 필수적인 개념을 ‘바쁘지 않은 목회자’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목회하는데 있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질문에서 보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이사야서 50장 4-5절과 마가복음 1장 35절의 말씀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영성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의 의도적인 고립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적인 만남이 절대 필요하다.   

한 가지 더 붙이고 싶은 것은 개신교의 영성을 ‘거짓 성령운동’이라고 치부하거나, ‘영성훈련’이라는 단어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성훈련을 하지 말고 성령께 순종하기를 힘쓰라”라고 주창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영성훈련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성령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런 특정 신학과 오염된 교리, 바리새인 같은 종교적 자긍심에 얽매여 있는 무경험자들이 끔찍한 교만과 살벌한 편견 속에서 성령을 길들이려는 시도를 지금까지 해왔다고 생각한다.  확신컨대 이렇게 굳게 닫힌 마음으로 산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의 편견을 깨시는 일은 드물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교만의 편견을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나의 고찰이다.  꼭 기억하길 바란다.  대다수 ‘골빈’ 신학에 묶혀있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과 편견의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면서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소경 되기 원하며 죽어갔다는 것이다(요 9: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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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제반 규례와 법률 체계는 인간이 거룩한 생활로써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계도(啓導)하는 데 그 근본 목적이 있었다(출 19:5-8).  이 점은 형벌 제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본고는 유대인들이 범법자를 징계하였던 형벌 제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나마 이해해 보려 한다.

 

1. 사형(死刑)

① 돌로 침 : 이 같은 형벌에 해당하는 죄로는 신성 모독죄(레 24:15-16, 행 7:57-58), 우상 숭배 죄(레 20:2-5, 신 17:2-7), 간음죄(신 22:22-23), 안식일을 범한 죄(민 15:32-36) 등이 있었다.

② 칼로 침 : 한 성읍 주민 전체가 우상을 숭배하였을 때 그들은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신 13:12-15).  예레미야는 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한 결과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다’(애 2:21)라고 하였다.

③ 화형(火刑) : 제사장 딸이 간음한 경우(레 21:9), 한 남자가 아내와 장모를 범한 경우, 세 사람 모두 화형 당했다(레 20:14).

④ 교수형(絞首刑) : 실제적인 사형 방법으로 사용된 경우는 없다.  다만 사람들을 경계시킬 목적으로 이미 죽은 범법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을 뿐이다(창 40:22, 신 21:23, 수 8:29).

 

2. 태형(笞刑)

이에 해당한 죄가 어떤 것인지 분명치 않다.  재판 결과 태형이 합당한 경우 최고 40대까지의 매가 선고될 수 있었다(신 25:1-3).   

 

3. 절단(切斷)

두 사람이 싸울 때 한 사람의 아내가 상대방 남자의 음낭(陰囊)을 잡았을 경우 그녀는 손을 잘리는 형에 처해졌다(신 25:11-12).

 

4. 투옥(投獄)

투옥은 대개 재판을 기다리는 형사 피고인(被告人)을 구류에 처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렘 37:11-21).

 

5. 노예로 삼음

이것은 민사상(民事上)의 문제로서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채주(債主)의 종살이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왕하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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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 이는 사상적 개념 중의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예레미야서에도 나와 있으나(렘 31:29-30) 에스겔은 이것을 자신의 독특한 화술(話術)로 재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일면 당연한 것이기도 한 이러한 개념이 새삼스럽게 강조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공동 책임’(Shared Responsibility)이라는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즉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한 사람의 범과(犯過)에 대하여 마을 전체가 공동 책임을 느껴 왔던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신 13:12-18, 21:1-9).  그러나 이와 같은 미덕(美德)이 결코 개인이 져야 할 고유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주지는 못한다.  오직 자신의 범과 사실에 대하여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라고 기본 원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그는 ‘가령 어느 나라가 불법하여 여호와께 범죄하므로 그분께서 기근을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나라에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13-14)라고 까지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개인이 져야 할 책임에 관한 개념은 예레미야가 에스겔보다 먼저 강조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가 결코 어떤 회개한 죄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없다는 원칙을 가장 논리적으로 발전시킨 자는 바로 에스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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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짜기는 일명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수 15:8, 왕하 23:10, 렘 31-32, 19:2, 6,)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 골짜기 이름에 붙여진 ‘힌놈’ 또는 ‘힌놈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곳에 최초로 거주했던 여부스족(Jebusites) 땅 임자의 이름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 골짜기는 왕정 시대 말기에 이르러 그렇게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자신의 자녀를 바알(Baal)과 몰렉(Molech)에게 바치기 위하여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도벳(Tophet)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렘 7:31-32).  이처럼 사악한 우상숭배 행위를 일삼던 자들 중에는 유다의 아하스(Ahaz, B. C. 742-725)와 므낫세(Manasseh, B. C. 697-642) 같은 왕도 포함되었다(대하 28:3, 33:6).  그러나 요시야(Josiah, B. C. 640-609)와 같은 왕은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있는 도벳 산당을 더럽히기까지 하였다. 

예례미야는 이러한 힌놈의 골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이 골짜기는 가증하고 패역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어 황폐케 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골짜기는 장차 ‘살육의 골짜기’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렘 7:31-34).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이 있기 이전부터도 이곳은 예루살렘 성읍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소각(燒却)하는 장소였으며 죽은 죄인들과 동물의 시체를 태우는 장소였으므로 일반적으로 죄와 형벌, 고통의 장소로 상징되었다. 

이러한 상징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지옥’(헬, 게엔나)의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죄인들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처소인 ‘게엔나’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는  말인 히브리어 <게벤힌놈>이 전와(轉訛)된 것이다(참조, 막 9:43-49).  한편 이 골짜기의 위치에 대하여서 명확한 성경적 언급이 없기 때문에 여러 학설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전에는 예루살렘 주변에 위치한 기드론, 두로베온 그리고 ‘와디 에르 라바비’(Wadier Rababi) 이 세 골짜기가 모두 힌놈 골짜기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루살렘 서편에 있는 와디 에르 라바비 골짜기가 힌놈의 골짜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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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감(Malcam)

연구자료 2022. 6. 25. 12:45

일명 밀곰(Milcom, 왕상 11:5) 또는 몰렉 (Molech, 렘 32:35)으로도 불리는 이 신은 암몸인(Ammonites)들이 섬기던 가증한 신이다.  이 신에 대한 제의(祭儀) 가운데는 어린아이를 타오르는 불속에 던지는 희생 의식이 있었는데, 예레미야 7장 31절, 19장 5절, 신명기 12장 31절, 왕하 16장 3절, 이사야 30장 33절 등에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암몸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는 일찍부터 이스라엘인들에게도 전래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에 몰렉을 위한 도벳(Tophet) 사당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자녀들을 불에 사르는 의식을 자행하였다(렘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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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는 교회를 지칭하는 여러 용어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 같은 용어들은 교회가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을 살펴보는 것은 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몸

이것은 교회의 통일성과 교인들 간의 상호 이존성 그리고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고전 12:27, 엡 1:22-23).

 

 2. 성령 하나님의 전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였다(참조, 왕상 8:10-11).  따라서 교회를 가리켜 ‘성령의 전’이라 함은 하나님의 성령이 신자 개개인과 연합체로서의 교회 가운데 내주하고 계심을 의미한다(고전 3:16).

 

 3. 새 하늘의 예루살렘

구약 시대부터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장소로 이해되어 왔다(히 12:12).

 

 4. 새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유업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유업을 상속하지 못하고 이제는 인종에 관계없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마다 그 유업을 차지하는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 되었다(마 21ㅣ43).

 

 5. 진리의 기둥과 터

이는 교회가 진리 위에 서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지켜 보호하는 모임을 의미한다(딤전 3:15).

 

6. 하나님의 권속

성도들은 모두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형제, 자매들이다(갈 6:10).

 

7. 그리스도의 신부

이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롭고 영원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계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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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deacon)라는 명칭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의 본래 의미는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 ‘수행원’, ‘종’, ‘일군’, ‘시중군’ 등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디아코노스>는 집사 외의 다른 직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제 이를 살펴봄으로써 간접적이나마 집사가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자.

① 청지기: <디아코노스>라는 단어가 누가복음 12장 46절, 16장 1절, 디도서  1장 7절,  베드로전서 4장 8, 10절 등에서는 ‘청지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집사는 하나님의 소유물인 교회의 재정을 맡아 착복하는 일이 없이 잘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하인: 요한복음 2장 5, 9절에서는 이 단어가 ‘하인’을 가리키고 있으나 집사는 언제든지 교회가 시키는 일을 기꺼이 도맡아 수행하여야 할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③ 섬기는 자: 고린도전서 16장 15절에서는 이 단어가 ‘섬기는 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을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듯이(마 20:28), 집사는 교회를 받들며 봉사하는 자이어야 한다.

④ 일군: 로마서 16장 1절, 에베소서 3장 7절에서와 같이 이 단어는 일군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집사가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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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능

연구자료 2022. 6. 12. 16:48

사도행전 4장에는 초대 교인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기록이 나온다(32절).  이러한 점에 비추어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기관일 뿐 아니라(엡 3:10, 벧전 2:9) 인간들에게 기여하는 몇 가지 기능을 가진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첫째, 교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교제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주심으로써 그들 간에 대화와 친교의 장(場)이 형성되었던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서로 교제하며 나아가 상부상조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을 갖게 된 것이다(행 2:42-47).

둘째,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야 한다.  사실 교회는 이 같은 목적을 입각하여 설립된 성도들의 연합체이다.  그러므로 교회 구성원인 성도들은 세상을 복음화시킬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이라 하겠다(마 28:19-20).  그러니 우리들은 사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먼 곳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가 갖고 있는 또 다른 기능 중의 하나는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도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긍휼을 베푸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주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인 우리는 자교회(自敎會)의 부흥 발전에만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되며 지역 사회와 어려운 형제를 위해 봉사하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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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현설(Docetism)

연구자료 2022. 6. 9. 15:50

요한 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과 장차 육체를 입으신 채 재림하실 것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고 있다(요이 1:7).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몸을 입으신 것에 대하여 부인하는 이단 사상 중의 하나가 곧 가현설(假現說)이다.  이 같은 사상을 취하는 자들은 주장하기를 예수께서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을 지니시고 음식을 드시며 피를 흘린 채 죽으신 것 등은 다만 그와 같이 보인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현설은 그 근원을 영지주의(Gnosticism)에 두고 있다.  물질은 악한 것이며 영적인 것만이 선하다고 하는 영지주의 사상에 입각할 때, 신적 존재이신 예수가 더럽고 악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을 리 없다는 가현설이 태동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데, 곧 마태복음 12장 48절과 로마서 8장 3절이다.  대표적인 가현론자인 마르시온(Marcion)은 마태복음 12장 48절을 가리켜 이는 예수가 육신적 어머니를 갖고 있지 않았음을 증거해 주는 구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간의 관계가 혈육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 결코 예수께서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또한 마르시온은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 ‘육신의 모양’이란 육신과 같이 보이는 환영을 입었었음을 단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도 재고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모양’(헬, 호모이오마)이란 실제적인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실제적인 인간의 몸을 입으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현설을 배격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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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선지자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사실이 나온다(왕하 2:11).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와 달리 예수의 승천 사건은 그리스도 자신에게뿐 아니라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예수께서 승천하신 사실은 그가 다시금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셨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며 죽기까지 낮아지셨기에 그의 승천은 성육신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지닌다(빌 2:9).  둘째, 그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성령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장중(掌中)에 사로잡혀 살 수 있게 되었다(롬 8:14).  그 뿐 아니라 승천하신 예수는 지금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며(히 7:25), 장차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맞이들이기 위하여 다시금 재림하실 것(행 1:11, 요 14:3)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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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로부터 기독교와 유대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종교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계시’(revelation)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연이나 인간의 양심 또는 성경이나 그 밖의 특수한 매개체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 및 인간을 위하여 가지고 계신 자신의 계획을 알려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편의상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방법 또는 매개체에 의해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와 ‘초자연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로 구분된다.  여기서 ‘자연 계시’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양심(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롬 1:9-20)을 뜻한다.  그리고 ‘초자연적 계시’란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직접적인 현현(顯現) 또는 성경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뜻한다(참조, 마 1:18-24).  

둘째, 전달되는 계시 내용에 따라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와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로 구분될 수 있다.  여기서 ‘일반 계시’란 하나님 자신의 신성과 영원하신 능력 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을 의미한다(롬 1:20).  그러나 ‘특별 계시’란 죄악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이와 관련된 지식을 전달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요 3:16-17).  한편 이상과 같은 구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계시’와 ‘일반 계시’란 말을 교호적(交互的)으로 쓸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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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신이 가장 잘 실현되었다고 활 수 있는 로마법에는 시민들이 부당한 처벌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호하는 장치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즉 로마법에는 항소권에 대한 법령이 발달되어 있었는데, 로마인이면 로마 시 경계 밖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일 지라도 언제나 항소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거나 중요도가 높은 문제일 경우에는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 재판은 황제가 직접 심리(審理) 하거나 아니면 원로원 또는 칙명 재판소가 심리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인들 간에서는 ‘로마인이면 가이사에게 호소하라’는 말이 유행하여 속담으로 굳어지게 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 24장에는 바울이 총독 벨릭스의 심문을 받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는데(1-23절), 바로 이 같은 것이 이에 속하는 경우이다.  한편 바울이 항소를 신청한 것은 단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행 25:10, 21).  이는 그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권리였다(행 2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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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 어떤 진영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과 능력에 의존하는데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과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로 하나님의 주권(롬 11:36)과 이신칭의(롬 5:1), 그리고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강조한다.  반면에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나타나는 일들 중에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로 치유(행 4:30)와 표적(막 16:17)과 기사(행 5:12), 그리고 성령의 은사(고전 12:4-11)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 문제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마 10:32-33),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롬 12:3).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실 때 성령으로 난 사람 안에서 성령이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시기 위해 바람의 실례를 사용하신 적이 있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 3:8).  이 말씀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나는 성령이 오순절주의자들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개혁주의자들이 가진 신학에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가 바람의 기원이나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성령을 알거나 통제하지 못한다.  성령은 그분의 뜻대로 자유롭게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오늘날 성령과 관련해서 개혁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근거한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왕상 19장).  따라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은 성령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경건한 신자들은 무질서와 혼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전 14:40).  한결같이 그분을 신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했던 성령은 그리 부드럽거나 친절하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각지 못한 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것을 간략하게 예로 들어보겠다.     

먼저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춤추고 소리치며 열광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걸어갔다.  사무엘 앞에 이르러서는 옷까지 벗어 버리고 예언을 하며, 그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삼상 19:23-24).  사울이 거의 알몸에 가까울 정도로 옷을 벗고 예언을 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조현병 환자가 아니면 신비주의자, 이단에 속한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은 방언을 말하고(행 2:4-6, 11),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행 2:13).  다른 사람들 눈에 술 취한 사람으로, 귀에는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들린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자신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활동한 John White 박사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한다.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폐쇄적인 사람도 있다. 반응이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권능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도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놀랄 필요는 없다.”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사 6:1-5), 그것이 우리에게 색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편견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행 10:9-16).  불편한 진실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전에 일어났던 일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일어날 수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행 7:51) 독사의 자식들인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사역을 오인하고 조롱하고, 그 사역의 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마 12:22-37).    

그렇다면 성령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세 인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삼위의 한 위로서 다른 두 위와 동일하신 분으로(마 29:19, 고후 13:14), 하나님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신비한 관계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성령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각양 은사들을 주시고(고전 12:11)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행 1:1-2), 사탄과의 대치 상태에 있는(엡 6:10-13),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인 교회를 강력하게 세우시며,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할 정도로 복음을 힘 있게 하신다(살전 1:5, 벧전 1:12).  그런데 온 세상을 미혹케 하는 사탄(계 12:9)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뿐 아니라(고후 11:14),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하고(계 13:13), 애굽 바로의 왕의 술객들처럼(출 7-8장), 엄청난 능력과 표적과 기적(살후 2:9-10)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고후 11:3).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그릇되게 정당화해온 것처럼, 은사주의 교회들 역시 성령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비성경적인 행위들을 자행해 왔다.  이 시대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딤후 4:3-4)과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신앙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란 그다지 쉽지는 않다(마 24:24).  지금도 사탄은 현상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유사한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영들 분별함이 필요한 때이다(고전 12:10).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즉,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마 22:29) 그리고 영적 교만함 때문(고전 4:6)에 비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은사주의자를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자, 더 심하면 귀신 들린 사람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John MacArthur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다.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비판과 정죄의 칼을 마구 휘둘러 된다(마 26:5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반면에 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하는 비은사주의자가 미지근하고 냉랭하며 영적 체험 없이 메마른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다.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이 두 부류가 상대방에 대해 상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비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실제로 믿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증이 없으며, 심오한 영적 체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 교만하고, 실제보다는 의식에 더 관심이 많고 성육한 진리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선호하며, 전도하기보다는 신학 책을 쓰고 패배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 대해 방어적이고, 예배는 무미건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반면 비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대한 현대적 사랑에 빠져 진리마저 희생시키고 있고 심각하게 비성경적이며, 특히 방언 체험을 신학적 영적 십볼렛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전도하기보다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양 떼를 빼앗아 가며, 신실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기보다는 영적인 영웅주의에 빠져 있고, 예배에 질서가 없으며 증거 본문 암기하는 이상으로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이 두 부류를 양비론(兩非論), 즉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서로 배우려 하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재기다(고전 4:6-7).  물론 이러한 오해들을 통해 서로를 견제함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혼란케 하는 극단을 피하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말씀 편에 선 비은사주의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을 볼 때 성령의 은사들만 거론하면 행여나 성경 계시를 넘어갈까 하여 견제하고, 반대로 성령 편에 선 은사주의자들은 비은사주의자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의 역사 자체를 제한하는 극단에 빠지지 않게 견제해주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은사주의 신학보다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Calvin 중심으로 세워진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심각한 결과물 중 하나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철저히 제거한다.

그들을 만한다.  우리에게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지 않는가?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깨닫음에 지나치게 만족한다.  그 결과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줄어들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말씀을 증거 하면 어떤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메마른 복음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성경은 증거 한다.  ‘그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에, 주께서 함께 일하시며 따르는 표적들을 통하여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막 16:20).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이미  닫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다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는 독선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모든 신학(오순절, 성결교, 감리교)들, 특히 ‘성령론’에 대한 것은 이들 보기에 한 마디로 잘못된 신학이기 때문에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을 귀신들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라고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을 향해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는 말한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앞세우거나 또는 자신의 견해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려고 악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자가 현대판 바리새인이다(요 11:47-53).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진을 치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약 3:14-16).  우리는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16:23).  이런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어느 특정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가 아니고, 균형 잡힌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이란 신적인 것을 깊이 연구하고 숙고한 결과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개혁주의 신학은 거의 ‘꼰대’에 가깝다.  신학이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Calvin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고백으로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을 많이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만난 개혁신학 대학원의 교수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지금의 칼빈주의자들처럼 천방지축 날뛰거나 허접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나불거리지 않는 정통 개혁주의자들로서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수(下手)가 아닌 진짜 ‘고수’(高手)들이었다.  하수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우겨대는 못된 기질이 있어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딤전 6:4).  이것이 확증편향적 사고방식과 교조주의적 성향으로 중무장된 ‘꼰대’ 신학의 특징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에 가까운 이런 부류의 사람을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부른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이런 자는 개인적 나르시즘이 병적으로 강해 자신만이 의롭고 올바르며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다고 확신한다.  과대망상증 환자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마 5:13-16), 이들은 ‘칼빈’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골빈’ 짓들(신학적 논쟁)만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J. I. Packer는 『Keep in the Step with the Spirit』에서 성령 은사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교리’와 ‘도덕’을 제시한다.  먼저 교리적 테스트는 요한일서 4장 2-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것이 결국 속죄의 죽음과 직결)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도덕적 테스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요일 2:4, 3:9-10, 17, 24, 4:7-13, 20-21, 5:1-3). 만약 우리들 중에 Packer가 말한 대로 이 두 가지 테스트에 근거한 성경적 입장을 취한다면 누구든지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7:1-5).  평생을 배워도 알지 못하는 짧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그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만큼 성령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Lloyd Jones의 말을 들어보길 바란다.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제도화되었고, 성령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의 능력의 현현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성령을 통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만 증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즉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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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겠지만 나는 모든 일에 있어 과정을 중시(重視)하는 목사다.  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한다.  이들이 누구인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직 예수’를 외쳤던 자들이다(마 25:11).  그러면 오직 예수만을 외쳤는가?  아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교제도 나누고, 성찬도 했다(눅 13:22-30).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등불이 꺼져 가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했다고 자부했던 신자들이다(마 25:1-13).  그런데 결과는 지옥행이었다.  이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목사가 ‘예수’를 지겹게 외쳤도 지옥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이 말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 교리는 개혁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지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철학자들과 한판 논쟁을 벌인 후 아덴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그리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상업의 중심지 고린도로 갔다(행 18:1).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몹시 탈진되어 있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자신의 상태를 가리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쓰고 있다.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하였다.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1-40).  이와 비슷한 일들을 데살로니가(행 17:1-9)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0-15).  또 다른 이유는 아덴에서 사역한 것이 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행 17:16-34).  이런 일들을 인해 그는 심히 좌절감을 느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바울의 자랑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면(갈 6:14), 굳이 떨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십자가 아닌가?

먼저 글(메마른 복음)에서 말했듯이 나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먼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닌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성경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백날 외쳐도 구원은커녕 1원(?)도 받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반드시 부활도 같이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요 11:25-26).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행 4:12).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시고(행 2:24) 무덤에서 살아나신 유일한 ‘주’(主) 시기 때문이다(고전 15:20).  다시 말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행 2:32)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롬 10:9-10).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간혹 목사들 중에 부활은 몰라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다.  나는 이들이 개혁주의 신학에 열광하면서도 왜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사도행전 전반에 보면 베드로는 백성들에게 반복적으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선포했고(행 2:32, 3:15), 누가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행 4:33).  연이어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라고 선포했다(행 5:30-32).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신’ 것과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언급한다(행 10:39-41).  사도행전 후반에 들어와서는 바울 역시 누가에 의해 부활의 증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행 23:6-8), 예를 들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이었고(행 9장),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행 22:15),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것을 전했고(행 26:2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13:27-39).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모든 설교가 거의 부활의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행 2:31, 4:2, 10, 33, 13:30, 32, 34, 37, 24:15, 21, 26:8).

이 부활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사도들이 자살한 가룟 유다(마 27:5)의 후임자를 임명할 때,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행 1:22).  정말 이상하지 않는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갈 3:13)를 증거 할 제자를 찾아야 하는데, 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전도자 Michael Green은 『Evangelism through the local church』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과 부활에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묻고 싶어 하는 모든 방식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를 제공해 주신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는 독사의 새끼(마 23:33)들 같은 사두개인 목사들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다(행 4: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전적으로 상호 관련이 있는지 단언하고 있다.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고전 15:13),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고전 15:17) 있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이 완성이라는 것이다(롬 6:5-10, 8:11, 10:9, 고전 15:7, 21-22, 벧전 1:3-4).  즉 대속의 사역으로(히 9:22),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구속의 완성으로(고전 15장),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이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이 복음의 핵심이다.  어느 한쪽 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복음을 반쪽짜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이 인도하심 없이는 구원, 그것은 꿈같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복음을 힘 있게 하는 것은 날카로운 지성과 논쟁 능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복음의 능력은 메신저의 기술이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성령께서 도우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 학식이나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는 싶은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회심의 역사(役事)가 자신과 자신의 십자가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리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살전 1:5)이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있어 복음은 어떤 것인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벧전 1:12).  이 구절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외쳐도, 그 말만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으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씀이 듣는 자들을 위로하고 일깨워 주고 확신시키시는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많은 사람이 자주 장사 루디아처럼 말씀을 청종하여 믿게 되고(행 16:14), 그들의 마음과 삶을 빌립보 간수의 가정 같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받치게 할 수 있다(행 16:33).  이런 능력에는 또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한 마디로 성령이 빠진 복음은 그것이 예수든, 십자가든 그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메마른 설교에는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의 복음전도 방법이 무엇인가?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NIV/고전 2:4)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고전 4:20).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9).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능력을 받고(행 2:1-4)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막 16:20).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 사도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런 능력도 없이 말씀만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말 우리가 사도들보다 능력이 있단 말인가?  성령의 능력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 말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을 가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다.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오랜 시간을 성령의 능력도 없이 ‘오직 예수’만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칼빈주의의 5대 교리 T.U.L.I.P을 얼마나 지겹게 가르쳤는지 신자들도 인정한다.  칼빈주의 목사라고 말이다.  성도들 보기에는 내가 예수의 사람인 것 같이 보였다.  왜냐하면 입만 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바울만이 십자가를 자랑했는가?(갈 6:14).  아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다.  이렇게 십자가만 외치면 다 해결되는가?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았다.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때는 내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단의 냄새가 나는가?  심지어 사도 바울조차도 내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요 1:27).  왜냐하면 사도들은 능력을 필요로 했지만(눅 24:49) 나는 능력 없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개혁주의 자들이 입만 열면 나팔을 불어대던 그 십자가의 복음을 능력도 없이 열심히 증거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이 쉬도록 외쳤겠는가?  마음은 뿌듯한 것 같지만 뭔가 허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성령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었다.  나만 ‘골빈’ 목사인가?  아니다.  오늘날도 나처럼 골빈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을 벗겨 주시기 전까지(행 9:18), 자신이 영적 조현병 환자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요 9:40-41).  

성령이 빠진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  성령을 왕따 시키다 못해 근심을 넘어(엡 4:30) 소멸시킬 정도(살전 5:19)로 그분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기도는 하지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문을 이미 닫아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더 슬픈 현실은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계 3:17).  이들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족이긴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더라도 십자가만 증거 하면 되지 않을까?  Harry G. Frankfurt가 말한대로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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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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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구원사역(요 3:3-5)이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같이 성경 말씀이 성령에 대해 가르치는 것 중 대부분의 내용에 생각이 일치하거나 똑같이 믿는다.  신자들 대부분은 성령이 우리에게 전도할 능력을 주신다는 데에 동의하며(행 1:8) 최소한 몇 가지 영적인 은사(고전 12:3-11)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롬 8:1-2), 그리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요 16:13)에 동의한다.  그러나 간혹 특정 은사, 즉 ‘방언’이나‘예언’의 중요성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나 성령 세례를 받는 때가 회심 때의 사건인지, 회심 이후의 경험적 사건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모든 신학적 입장들이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 

본고(本稿)에서는 내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입장을 변호하겠지만 내 개인의 편견이나 신학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내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리고 반론을 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성경에서 믿는 내용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 다양한 측면들을 공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몸은 교단이나 교파, 그리고 신학의 경계선을 넘어 어느 것에 한정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성도들의 교제 범위는 그리스도의 몸만큼 폭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다.  그런데 지금은 영적 은사를 실천하고 긍정하면 노골적으로 ‘은사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 심지어 ‘귀신 들린 자’로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여기서 한 가지만큼은 꼭 집고 넘어가고 싶다.  나에게 있어 ‘은사주의’란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4-11, 28-31절,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1절의 영적인 은사를 지칭하는 용어인 ‘카리스마타’ (charismata)를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용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오해가 무엇인가?  ‘은사주의자’란 현세의 이득을 위한 기복신앙의 가르침을 옹호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해 물질적 축복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미국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Jim Bakker는 진정한 복음이 아닌 ‘번영 복음’을 가르쳤다.  그는 『I was Wrong』라는 책에서 자신이 수년간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내용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감옥에 있으면서 문맥에 따른 성경 연구는 그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이것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것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판단하실 분이 주님이시기에(고전 4:3-5)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다. 

여기서 나 자신의 신앙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학사 과정을 오순절 신학에서 했기 때문에 오순절 교단을 한 때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오순절 교단이 아닌 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밝으면서 미국 개혁교단에 소속이 되었다.  이런 다양한 배경 속에서 나는 기도원에서 20년 넘게 고생한 육체의 질병을 완벽하게 고침 받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경험했다.  지금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방언을 성령 안에서 하고 있다.   

내게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국의 합동과 고신과 통합, 그리고 미국의 Talbot와 Westminster, 그리고 Calvin과 Reformed 신학을 공부한 많은 친구들이 있다.  이들과 성령의 사역의 몇몇 측면에 대해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비방하고 정죄하는 그런 좋지 못한 사이는 아니다.  언제나 만나면 좋은 친구이며 동역자들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 즉 은사주의자들과 오순절 신자들이 하나같이 ‘성령의 사역자’ 혹은 ‘은사주의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일에 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먼저 우리의 관점이나 생각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는 충격적인 말을 한마디 하겠다.  예수님보다 유익하신 분이 성령이시다.  오직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고 싶지 않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을 읽어보길 바란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또 다른 보혜사'(요 14:16)가 우리 곁에 계신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성의 두 위격이 같이 공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삼위일체란 두(모두 합하면 셋) 위격이 언제나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한 분 안에 계신 세 인격, 곧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성삼위 안에는 시기나 경재 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지극히 높이신다.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은 한 번에 한 장소에 국한되었다.  다시 말해 그분은 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고(마 3:9)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능력은 있어도(마 14:13-21) 이스라엘 땅을 떠나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행 1:9-11) 육체적으로 지상을 떠나셨지만 성령을 보내기로 약속하셨다(요 14:16).  예수님의 떠나심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 가운데 거하실 수 있음을 의미했다(고전 3:16).  성령에 의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행 1:8). 

만약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다(요 16:7).  그리고 성령께서는 세상에서 하셔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께서 오실 수 없으신지에 대해 그분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성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돌아가셔야만(요 12:6, 23) 성령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서 일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요 14:26, 15:26, 16:13).  이러한 이해는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이시며(엡 1:7), 신인(神人)이시다(롬 9:5, 골 2:9).  이 말의 의미는 영광에 관한 한 성령은 초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날에 모든 무릎이 끓을 대상은 성령이 아니다(엡 1:20-23).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 오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적용하시는 역할을 하신다(요 3:3-5).  성령은 자신에 대해 증언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요 15:26),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러 오신다(요 16:14).  예수님은 성령께서 ‘내 것’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주님의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자로서의 그분의 사역(딤전 2:5-6)과 그분이 받으실 합당한 찬양이다(계 5:13).       

예수님의 떠나감이 없다면 성령의 사역은 불가능하게 된다(요 16:7).  구원도 없고(고전 12:3), 성화도 없고(살후 2:13-14), 영화도 없다(롬 8:11, 23).  한 마디로 너나 할 것이 없이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롬 2:9)은 지옥행이다.  그러나 첫 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이 떠나시면(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요 14:16) 즉, 성령께서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밝히셨다(요 14:17).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육체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못하게 될 때(행 1:10),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요 16:13)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요 14:26) 능력을 주시는 지속적인 동반자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눅 24:49).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결과들을 구약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사 11:1-10, 32:14-18, 42:1-4, 44:1-5, 겔 11:17-20, 36:24-27, 37:1-14, 욜 2:28-32).  이러한 실상들은 이제 세상에서 제자들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에 이처럼 가치를 부여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도들이 삼 년 동안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말씀(마 13:36-43)을 배우고 현장 실습(마 17:14-21)과 훈련을 받았지만(막 4:35-41)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24:49).  '은혜의 성령'(히 10:29)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했다면 우리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예수의 영'(행 16:7)에 대한 진리만큼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성령을 왕따 시키고 예수를 유난히 더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가 좋은가?  물론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2:2).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 역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 한 없는 은혜와 감사를 날마다 고백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회적이며(엡 2:1) 단독적 사역(요 3:5), 즉 거듭남(엡 2:8)과 더불어 지속적 사역인 성화의 과정(골 1:9-12, 엡 4:22-24)을 내 인간적인 노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빌 1:6, 살후 2:13).  다시 말해 매 순간마다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 8:26-27), 소망을 갖게 하시며(롬 15:13) 왕 같은 제사장으로(벧전 2:9)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는(롬 8:16) 성령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다.  단 한순간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고전 10:13)이 나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하며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예수님이 나에게 있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오래전  A. W. Tozer가 이런 말을 남겼다.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5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차이점을 모를 것이다”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는 성령님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잘 유지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신학적 배경과 청산유수 같은 달변, 든든한 교회 재정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당회, 주보에 나열된 선교지의 열매와 대대로 내려오는 교회 전통 등을 생각하면 그다지 성령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갈라디아 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회가 많다(갈 3:3).  한번 눈여겨보길 바란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 성령을 예배하는 것(빌 3:3)을 불편하게 느끼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로뎅’처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롬 1:16).  능력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dynamis)는 우리 시대의 단어인 ‘dynamite’(다이너마이트)나 ‘dynamic’(역동적인)의 어원이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너마이트와 같다.  세상적인 관점과 전통을  파괴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는 더 견고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산산조각 부수는 쇠망치와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렘 23:29).  바울의 말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뇌관(?)이 제거된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  교회들 마다 여러 종류의 집회가 많은 것은 초신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종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정말 다양하다.  각종 전도 집회와 예배가 많아 교인들이 정신이 없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하는 것이 복음(Good News)은 복음인데, 그 복음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증거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메마른 복음, 즉 뇌관이 빠진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바울은 복음 메시지의 능력은 설교자의 달변이나 논리적 전달하는 재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이 말은 아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에 나온 고백이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가 지닌 진리를 아덴 청중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각 사람의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도행전 17장 16-34절까지 설교를 분석해 보았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섭리와 존재를 말했지만(24-2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섭리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26-27절) 헬라 시인들의 말도 인용했지만(28절) 구속이나 계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세계의 역사를 말했으나(29-30절) 구원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부활은 강조했지만(31-32절) 십자가를 증거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종자가 많고 적음에 의해 전도의 성패를 평가할 수 없고, 또한 그 후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아덴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의 전도는 실패했던 것 같다.        

탁월한 신학자인 바울은 앞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이 아닌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앞서 말했듯이 바울은 일찍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했다(롬 1:16).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4).  그러나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5:1-2)인 진정한 복음,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 했다(갈 5:11).  여기서 궁금하지 않은가?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다면 구태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필요했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직 말씀', 그것 하나만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진정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라면 말이다. 

조금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요 1:14).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완전한 발현이시며(골 2:9), 요한은 태초에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이라고 불렀다(요 1:1).  여기서 ‘말씀’은 사탄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그분은 단지 말씀만으로 육체의 질병과 악한 영들을 제거하실 수 있었다(마 8:16).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4:12).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성경의 정경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계 22:18-19).  그것은 절대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이며, 이 성경의 저작권을 갖고 계신 분이 성령이시다(벧후 1:20-21).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닌(갈 1:11) 율법과 대조되는(요 1:16-17) 구원의 복음(엡 1:13)이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려져 있지만(고후 4:3)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고전 1:24)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했다면 반드시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어찌할꼬’ 말하면서 회개했다(행 2:36-38).  왜 베드로에게는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가?  베드로 역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서 차별하시는 것일까?  오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는 차별을 하시는 것 같다.  열 두 제자 중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더 사랑한 것 같았고(막 14:33, 눅 9:28)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셨다(요 11:3).  마치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처럼 말이다(롬 9:13).      

오늘날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을 외치는 목사들은 많다.  마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들어갈 것’처럼 말이다(마 7:21).  문제는 기적같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편한 기적이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고전 2:2).  바울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부였다(갈 6:14).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에 있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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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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