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성애’ 못지않게 ‘뉴에이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뉴에이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Dave Hunt가 쓴 『The Seduction of Christianity』에서 ‘코끼리와 소경들’이라는 재미있는 인도의 우화가 나온다.  하루는 네 명의 소경들이 동물원으로 코끼리를 구경하러 갔는데 한 소경이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지고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겼네.”  그러자 다른 소경이 코를 잡아보고는 “아니야, 코끼리란 놈은 뱀과 같이 생겼거든”  이번에는 또 다른 소경이 다리를 만지고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코끼리란 놈은 기둥같이 생겼어.  너희는 이렇게 만져보면 모르냐”  그러자 마지막으로 옆에 듣고 있던 소경이 꼬리를 잡으며 말하기를 “무식한 놈들 같으니! 다들 틀렸어, 코끼리란 놈은 빗자루같이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네 명의 소경들은 서로 상대방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대면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의 성급한 결론은 자신들이 만져본 일부분만을 이해했을 뿐 코끼리 전체를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의 잘못된 판단은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나서 그 지식을 통해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일반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각자의 제한된 지식을 기초로 해서 부분적이며 불분명한 사물만을 보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우화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하여 독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비논리적이고 그릇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절대적으로 옳은 것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틀렸다고 우겨 되거나 심하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마치 자신만이 진정한 실재를 파악한 것처럼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문제는 자기가 인식한 실재를 하나님의 진정한 실재와 동일시하는 망상증 환자 같은 병적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심리적 현상 중의 하나인 확증편향과 선택적 회피(Selective Avoidance)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우리 삶을 헌신코자 하는 어떤 일, 혹은 서로 다른 성경해석을 가지고 있는 분야들이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행 1:5), ‘천년왕국’(계 20:6), ‘은사들’(고전 12:8-10), ‘예정’(행 13:48,), ‘율법’(마 1:17), ‘삼위일체’(고후 13:13) 등등 여러 가지 난해한 것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욥 11:7-9).  다른 사람의 신학, 혹은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눅 18:9-14). 

혹시 입에 게거품을 물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메시지만을 증거 하면 된다(고전 15:1-5).  이렇게 말이다.  ‘이는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 일러라’(행 18:2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고전 2:2)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마 18:22)만을 증거 하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쓸데없는 신학적 논쟁을 통해 정신질환의 일종인 ‘관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인정받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 목사들은 연예인도 아니면서 자기 좀 알아달라는 관심종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행동양식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섣부른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요 8:15).  그 이유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관습 또는 관점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시 119:137), 불안하고 범죄 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14:4).  

예를 들어 누군가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기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이 기둥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코끼리를 빗자루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빗자루인 것처럼 인간의 유일한 실재란 자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기둥’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빗자루’나 ‘뱀’ 혹은 ‘벽’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경 그 자체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딤후 3:16), 사실조차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언제나 정확하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벧후 3:16).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한 것은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벧후 2:21)의 진정한 실재가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이라는 인식된 실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행 10:9-17).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사람들의 해석은 제각기 달랐다(12:28-30).  여기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정확하게 해석하실 수 있다마찬가지로 예수님 외에 각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완벽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롬 3:9).  정신 나간 소리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란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고, 혀로는 거짓말만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 저주와 독설이 가득한’(롬 3:13-14) 자들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썩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 즉 그것이 석의(exegesis)든 자기 해석(eisegesis)이든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 139:6).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린도전서 4장 3-5절 말씀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굉장히 신실한 종으로 보이는 목회자라도 그 마음속에는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을 감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탁월하지도 않고 뚜렷한 열매를 거두지도 못한 목회자로 보일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일 수 있다.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롬 2:1).  주제넘게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마 7:1).  신학적 ‘꼴값’을 떨지 말아야 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 교회에서 잘 알려져 있는 칼빈주의 신학자 Richard Gaffin 박사가 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고 싶다.           

먼저 동시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겠지만 사도행전 10장과 19장이고, 그 후에 받은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이다.  중생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과 중생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주장하면 이단인가?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목사와 신학자들은 Harry G. Frankfurt 박사가 말한 대로 ‘개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둘 다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기 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물세례를 받은 후에 받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물세례 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서이다.  그 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마리아 사람들(행 8장)과 에베소 사람들인데(행 19장), 막상 사도행전 2장에는 전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혹시 목사들 중에 인도의 우화에 나오는 네 명의 소경 같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그 짧은 신학을 통해 코끼리 전체를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정신이 몽롱한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세례 받기 전이나 물세례 받은 후나 모두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무식하게 우겨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다른 질문은 성령세례는 “사역자의 안수를 통해 받는 것인가?” 아니면 “안수 없이 그냥 받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성경에 보면 사역자의 안수와 함께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은 것으로 기록된 곳은 2장과 10장이다.  성령세례를 목사의 안수  없이 받으면 이단인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세가 안수한 적이 없는 장로 칠십 명에게 임한 신(spirit)은 어떻게 해석할지 참으로 궁금하다(민 11:17, 25).  안수를 통해 받든, 안수 없이 받든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무식하게 논쟁(딤전 2:23)을 일으키는 목사가 있다면 그 배후가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99%가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다.  100%다.  왜냐하면 논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신학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딤전 6:4-5)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귀적이다(약 3:14-16)..  

이와 같이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의 사건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볼 때에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교단 신학이나 다른 교파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것에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오순절 신학과 웨슬리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을 ‘개떡’ 같이 배운 사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만을 ‘주야장천’ 배운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확증편향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자신이 배워 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확실하다고 믿을 때에 나타나는 독선적인 반응이다.  이런 목사를 만난 신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삯꾼은 신학적 논쟁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복음과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요 10:10-12).  진실을 말하자면 신학적 논쟁만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어진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매가 그것을 증명한다(마 7:20).      

심지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단들처럼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딤전 6:4).  하지만 토론과 각자의 입장을 비교하는 일을 통해 많은 것을 서로 겸손히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또한 우리의 이해를 진정한 실재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야 한다(벧후 1:20-21).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듯이(사 55:8-9) 우리 자신의 ‘신학적 해석’이나 ‘신앙관’이 그분의 생각과 견해에 일치한다고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롬 11:33-34).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신학은 목이 곧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심하게 대적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행 7:51).  

사족이지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고‘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마 23:33).  독사의 새끼들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어느 목사가 독사의 새끼처럼 신학적 논쟁을 통해 분쟁을 일으키는지 말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목사만이 존재한다.  참된 목자와 삯꾼 목자.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다.  누군가가 참 목자가 아니면 그놈은 삯꾼 목사다.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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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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