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개혁주의자가 Lloyd Jones의 성령론을 불편해하며, 그를 비성경적이라거나 심지어 이단에 가깝다고 매도한다.  Princeton University 철학과 교수 Harry G. Frankfurt의 저서 제목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것을 솔직히 ‘개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평신도들 앞에서 이런 표현을 직접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신학자가 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메마른 지식만 가르치는 밥벌이 목사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다.  교인 하나를 얻어 자신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마 23:15) 잘못된 선생들로 인해(약 3:1), 현대 교회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

오늘날 은사중지론자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동반하는 영적 은사가 오직 사도 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주의적 은사지속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체험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는 성경의 권고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신학적 프레임에 맞지 않는 모든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장난’으로 단정 짓는 인지적 왜곡을 보인다.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 성도들의 정당한 영적 체험을 ‘무당의 신내림’이나 ‘정신 이상’으로 치부하며 심리적, 인격적 모독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분별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폭력적 신학이며, 교회의 영적 풍성함을 스스로 제한하는 교조주의적 궤변에 불과하다.

물론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극소수의 행동을 근거로, 은사를 인정하고 환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못되었거나 미혹의 영에 속았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성도라고 해서(고전 14:1) 모두가 감정적이고 영적인 도취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영적 분별력을 잃게 하는 사탄의 현혹(살후 2:9-10)과 인간 부패의 기만성(롬 3:9-18), 그리고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에 맞서 싸워야 한다(요일 2:16).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성경이라는 완성된 정경이 쥐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계 2:1-7), 버가모(계 2:12-17), 두아디라(계 2:18-29), 사데(계 3:1-6),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처럼 여러 면에서 쇠약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해설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어떤 이들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오직 ‘강해설교’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고(고전 4:6),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은 분명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진리를 전하는 일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서글픈 현실이다(눅 6:46-49).

최근의 여러 여론조사 결과는 세상이 교회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절망적인 통계를 보여준다.  이는 수준 높은 강해설교를 듣거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의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님을 방증하는 확실한 사례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조직신학이 규정한 한계에 갇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덧입을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은사중지론자들은 신앙 정통성을 사수한다는 명목 아래 “우리의 신학적 범주로는 그런 현상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전통과 지식으로 영혼을 옭아매고(마 23:15, 눅 11:52), 성령의 역사에 대해 냉소적인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들 중(마 12:24-37), 삶 속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빌 3:19)"

물론 은사중지론자들도 목회 현장에서 성령의 존재와 역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성령은 특정한 사역만을 수행하는 분으로 지극히 제한되고 격하되어 있다(고전 12:3).  예컨대, 이들은 성령의 주요 역할이 신자의 성품을 주님을 닮게 변화시키는 것뿐이라고 강조한다(갈 5:22-23).  이러한 주장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성령의 무한한 사역을 가두는 근시안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언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예수의 인격(빌 2:5)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사역(요 14:12)에까지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벧전 2:21). 

따라서 균형 잡힌 신앙관을 지닌 목회자라면, 단지 성품의 영역에서 예수를 닮는 것에만 만족할 수 없다.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이다(요 14:12).  다시 말해 올바른 사역자라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구하는 동시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능력에 있어서도 주님을 닮아 사역하고자 하는 내적 열망을 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말씀 선포 사역(마 5-7장)과 능력 현시 사역(눅 4:40, 5:15, 6:19, 8:26-39) 모두를 균형 있게 계승해야 한다(마 9:35)"

끝으로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Dallas Willard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저서 『In Search of Guidance』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만나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신학적 독단에서 벗어나, 말씀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이 성도들의 삶에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나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은사중지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학의 희생자들  (0) 2026.09.02
최고의 신학  (0) 2026.08.30
조잡한 신학  (0) 2026.08.26
공상허언증  (0) 2026.08.23
말씀 vs 성령  (0) 2026.08.1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