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은 타인에게 이목을 끄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명령받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가져온 불은 NIV 성경에서 ‘인가받지 않은 불’(unauthorized fire)로, KJV성경에서는 ‘이상한 불’(strange fire)로 번역했다.   이 불은 공인되거나 율법의 규정된 방법대로 드려지지 않은 ‘불경한 불’이다(출 30:9).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 불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는 반대되는 ‘다른 불’이었다(레 10:1).  이 불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Rabbi David Rosen의 말을 인용하면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드려진 불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의법’을 어긴 것이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제사를 업신여겼을 뿐 아니라(삼상 2:17),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울처럼 두렵고 떨림 없이 마음대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삼상 13:9).  이런 불신은 의도적인 거역으로 이어져 모세와 아론, 그리고 다른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드리는 불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만큼이나 좋을 것이라고 믿었던 잘못된 신앙, 즉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은 그분 보시기에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가령 어떤 불신자가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지(갈 3:13)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단지 마음이 열려있을 뿐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롬 1:3),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죽는다면(요 14:6), 그 사람은 성경에서 기록된 대로 당연히 지옥에 갈 것이다(요 8:24).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은 단지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요 8:31-37),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행 2:39), 그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7:21-27). 

예수님께서도 “나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 있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눅 11:28).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해 적대적인 것보다는 열려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사실이다(눅 9:50).  하지만 이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영적인 것을 진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열려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고전 12:31).  그 역시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모하며 구하라고 말한다(고전 14:1, 39).  여기서 은사들을 ‘사모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추구하다’, 달라고 요구하다’, ‘열망하다’, 얻으려고 애쓰다’ 등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그 속에 함축된 의미를 따라 해석하면 ‘사모하기를 계속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세기에 사람들은 치유와 기적들을 찾아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녔다(막 6:53-56).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져서 낫기 위해 왔다.  그들은 질병과 귀신들이 떠나가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병든 자들을 주님께 데려왔다(마 8:14-16).  이들은 산을 옮길만한 열정을 가진 믿음이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것을 열망하고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같은 성령의 놀라운 기적과 치유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겔 20:7).  여기서 ‘우상숭배’가 순결함의 상실이라고 말한다면(요일 5:21), ‘율법주의’는 수가성의 여인이 가진 신앙처럼 하나님과의 친밀성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4:20-24).  이것 못지않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거두어가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하며 차단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바리새적 ‘불신’을 들 수 있다(마 12:22-37).  이러한 것들은 현대의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한다.

여기서 불신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주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신과 경멸에 직면하셨던 적이 있었다(마 13:53-58).  이러한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기적적인 사역에 어떤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가는 그것에 대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라고 기록한다(막 6:5).  이상하지 않는가?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서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이유 말이다.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기적을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가 마리아의 아들인 평범한 목수일뿐(막 6:3),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사 53:1-3).  다시 말해 보잘것없는 목수와 초자연적인 선지자 사이의 대조가 너무 극명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결정이었다(막 6:6).  그 결과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으로 인해 야이로 회당자의 딸을 살리신 일(막 5:39-43)이 무색할 정도의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할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다(엡 1:17-18).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히 4:2).  한 마디로 불신앙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히 13:8).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초대교회처럼 아무런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초신자들도 알고 있듯이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오직 예수’를 지겨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설교를 한다.  그런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마 8:16)라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신이 성령의 능력을 가로막고 철회시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모두가 건강하고 귀신 들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눅 4:18, 행 10:38).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대교회가 가진 슬픈 현실이다.  여기서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에는 기적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거짓 선생들이다.  나는 분명하게 드러난 이단이나 사이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개신교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유명무실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이들(딤후 2:17-18)의 왜곡된 가르침이 믿음을 파선시켜 잘못된 신앙으로 양산(量産)해 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치유하시고자 한다는 것에 관하여, 혹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시 않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일부이지만 James Montgomery Boice는 마태복음 12장 39-42절을 가지고 실제로 기적을 구하는 것은 악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교회의 목사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바로 그것을 교회에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는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신자들은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직접 체험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현대교회에 사역하러 방문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분명 이들의 신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전통이나 불신으로 온몸이 묶여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시고’(막 6:5-6), 나사렛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많은 병자들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로 나사렛을 떠나신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셨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 기회가 한정 없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다고 말만 해 놓고 믿음을 온전히 갖지 않는다면(히 11:6), 우리는 결코 그분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Thank you’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복음주의 지성 가운데 한 명으로 잘 알려진 Dallas A. Willard 박사가 오래전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 Developing a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God』에서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렇게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로움과 악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죄들에 대한 일화는 하나님의 한분 위(位)를 추구함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이라고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니라’(대하 7:14).  우리 시대의 교회 목회자들의 중요한 임무들 중의 하나는 교회가 이 약속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을 버리고 성경의 한없는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 더 나아가 기적의 하나님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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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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