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 2023. 9. 17. 16:39

불교도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훌륭한 선생이지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이고,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구원은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제도 즉, 팔정도(Noble Eightfold Path)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팔정도’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통해 죽음과 환생(還生)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1993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5면에 보면 불교인들이 존경한다는 퇴옹성철(退翁性徹) 스님은 1983년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여… 대중이여, 석가가 세상에 오심을 망상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오심도 망상이라”.  1987년 석가탄신일 법어(法語)에서는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같은 날짜 조선일보 15면에 그가 운명 직전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28자로 된 열반송(涅槃頌)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말은 본인 자신이 죽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남긴 말이다.

나는 불교와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평생을 살다가 성철 스님처럼 죽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빵을 준다는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는 것 같다.  마치 400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신 것처럼(삼상 15:2), 교회에 가서 얻어먹은 빵을 기억하고 계셨다.  내 생각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를 목회자로 불러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러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죽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가령 누군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이나 오래전에 들었던 기독교 간증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지옥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평생을 망나니처럼 살다가 끝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몬 24절).  한때 신실한 사역자였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타락하고 말았다(딤후 4:10).  그가 세상으로 떠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 Handley Moule은 말한다.  “데마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떠났다”.  성경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지만 아마 그는 바울이 겪었던 고생과 고통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 역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다(마 10:1-4).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까지 부여받았다(눅 9:1).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주님을 팔고 회개도 하지 않고(마 26:24-25), 목매달아 죽었다(마 27:5).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눅 23:43)은 일평생 죽을죄만 짓고 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탕자처럼(눅 15:17-19), 회개하고 돌아왔다(눅 23:41).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사회적 지위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이 세상에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마 16:16).  이들은 무론대소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실 때 두 종류의 증인들이 나온다.  하나는 책들로 상징되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으로 상징되었는데(계 20:12), 각각의 경우에 증언이 일치할 것이다.  먼저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각 사람이 그의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시 62:12, 렘 17:10, 마 25:31-32, 롬 2:6, 14:10, 고전 3:13-14, 고후 5:10, 벧전 1:17).  이것은 구원이 선한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지만 선한 행위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요 15:8).  그리고 생명책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책이다(계 17:8).  이 생명책은 이미 세 번씩이나 계시록에 소개되었는데(계 3:5, 13:8, 17:8), 일종의 하늘의 시민권과 같다(빌 3: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엡 2:8-10, 딛 3:5).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며 아무도 그분에게 불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벧전 1:17, 3:25).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 특권에 대한 보다 큰 책임을, 적게 받은 사람은 작은 책임을 수반하게 된다(눅 12:47-48).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책망하신 말씀( 11:22-24)을 통해 마지막 날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15).  특별히 양들을 인도하고 돌봐야 할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많이 맡은 자이다.  잘못 가르치면 일반 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자다(약 3:1).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생활에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신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특별계시의 한 양식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2).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율법에 따라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안 것을 행한 것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된다(롬 2:21-23).  신약시대에는 점진적으로 발전된 계시의 양식인 복음이 완전히 주어진 시대로(요 5:24),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최후 심판을 받게 된다(롬 1:16-17, 요 12:48, 마 7:21-27). 

그러면 복음을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하고 죽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 인간 마음에 태생적으로 새겨진 율법, 즉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4-15).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는 도덕적인 감각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알려주는 내적인 감시자(monitor)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들의 도적적인 지각은 율법을 대신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느 순간, 혹은 어느 때가 되면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고후 5:1).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스데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남긴 말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교계의 거장 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인간은 마지막 죽기 직전에 무슨 말을 남기는가 중요하다. 

누군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잠 28:26)을 굳세게 믿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자다(눅 12:16-21).  인간의 마음은 날씨와 음식과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한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끝마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창 27:2).  자연재해로, 인재로, 병으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고 말한다.  요지가 무엇인가?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이러한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만 오랫동안 주어진 것이 아니다(벧후 3:9).  놓치면 끝난 것이다.

'죽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0) 2023.09.10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  (0) 2023.09.03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1) 2023.08.27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