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자살 2023. 7. 23. 17:09

오늘날 신문과 TV와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삶의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가 다르다.  오랜 전에 읽었던 Erwin W. Lutzer가 쓴 『One Minute After You Die』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자살은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천국 문으로 들어간다”라고 주장한다.  Lutzer가 말한 것처럼 자살을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주님을 믿더라도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까?

나는 자살이라는 문제를 놓고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저작권을 인정하는 것(벧후 1:21)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가장 유일한 기준이고 답이다(딤후 3:15-17).  지금 우리가 사는 문명사회에서는 자살을 공동체를 훼손하는 반사회적 위험한 행동으로 본다.  하지만 교회가 전통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보다 깊은 신학적인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첫째, 자살은 창조주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다(창 1:27).  개인의 생명을 위임받은 청지기이지( 25:14), 제멋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권자가 아니다(벧전 4:10).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나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다.  누군가가 반문하겠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고후 5:17).  값없는 은혜(엡 2:8)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일과 삶에 있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벧전 4:11).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즉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때문이다(히 9:12). 

둘째,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죄악이.  구약성경은 살인의 행위에 대해 극형을 명령하셨다( 24:17).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홍수가 끝나고 나서 가장 먼저 노아의 가정에게 살인에 대한 법을 주셨다(창 9:6).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창 5:1).  즉 인간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천명하신 것이다.  이 마찬가지로 개인의 생명을 스스로 취하는 행위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20:13).  왜냐하면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8:4).

셋째, 자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헛되게 만든다.  죽음은 인간의 공통적인 두려움이며 모든 인간의 최종적 경험이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야만 했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죽으심을 통해서만 사망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다(히 2:14-15).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사망이 패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롬 6:9).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요 10:10)을 값없이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켰다(롬 8: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요 5:24)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면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망은 우리가 이겨야 할 원수다(고전 15:55-57).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 사망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자살은 신학적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먼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사회성이 부족하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말이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이 자살한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중독되어 있다.  술, 도박, 성, 마약에 중독되어 자신을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으로 자학하는 사람이 이 길을 선택한다.  세 번째는 장기간 독신으로 살거나 직업을 잃은 실직자, 혹은 오랫동안 불치의 병으로 인한 상실감과 고독감, 그리고 자괴감에 빠진 경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 사람의 자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그 동기와 원인이 어떠하든지 그와 관계된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준다.  자살로 인해 가족들은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 가지 남겨진 문제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본인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다.

그러므로 자살의 충동을 느끼거나 자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마귀가 인간을 도적질 하고 죽이기 위한 속임수와 계략이다(요 10:10).  나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두려운 마음조차 주시지 않을뿐더러(딤후 1:7), 자살할 마음은 더더욱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마 7:9-11). 따라서 자살할 마음이나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절대 아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 성전 꼭대기 위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유혹하는 것과 같다(마 4:5-6).  만약 사람이 높은 빌딩에서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주 오래전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목격한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도의 견인 교리를 내세워 자살은 구원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영원한 저주에 처하게 된다는 주장은 신학적 근거가 없다. 한 순간의 자살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막거나 무효화할 수 없고 구원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은 한 마디로 ‘개소리’다.  작금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왜 그렇게 개소리들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도 시간이 없고 모자랄 판인데 말이다.    

만약 누구든지 자살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거나 동조한다면 그 사람이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그는 분명히 마귀새끼다.  왜냐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 이기 때문이다(요 8:44).  그리스도인이 자살의 충동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혼자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물론 귀신은 속삭일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야, 고민할 필요가 없어, 한 번만 해봐”  이럴 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행 16:16-18).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고(약 5:14),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마귀의 억압과 고통에서 놓여남을 받아야 한다(눅 4:18, 행 10:38).  사실 이러한 사역은 교회 담임 목사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눅 10:17).  예수님이 지역 교회 목회자들에게 양을 맡겨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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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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