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대로 연결되는 뒷문을 통해 전시회장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한 젊은 남자가 한쪽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미처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뒤로 완전히 넘어졌다.  나중에 예배 중에 들으니 그 젊은이는 나와 부딪혀 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 넘어졌다고 했다.  다시 일어선 그는 더 이상 목발이 필요하지 않았다.  넓은 실내를 약 1만 2천 명의 청소년 대표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주님과 깊은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주님, 오늘 밤에 무엇을 하시렵니까?”  내가 휠체어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왼쪽 끝에 있는 한 여성을 주목하게 하셨고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휠체어에 앉은 저 여자가 오늘 완쾌될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단상에서 급히 내려가 그 여자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자매님을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  오늘 완쾌될 것입니다. 자매님은 일어설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일어서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 아내는 골반이 없어요.  골반 뼈가 연결되지 않았어요”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고 나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그녀는 천천히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일어나다가 휠체어에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넘어졌다.  그다음 내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쓰러진 것은 골반이 몸을 지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쓰러졌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즉시 쓰러진 그녀에게로 몸을 굽히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자매를 치료하고 계십니다”  “알아요, 알아요. 목사님, 제가 마취된 느낌이에요.”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자매를 수술하고 계십니다”  그때 Jean은 강력하고 놀라운 어떤 일이 몸속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다. 그녀는 골반 뼈가 제자리에 들어맞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한 다리는 다른 다리보다 5센티미터 짧았다.  그런데 그 다리가 길어져서 다른 다리와 같아졌다.  그다음에 뜨거운 쇠막대기가 그녀의 척추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위축되었던 그녀의 뼈, 신경조직, 근육이 유연해져 새 생명으로 역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내가 John(남편) 보니 나를 금방 때릴 것 같았다.  Jean은 몸을 추슬러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는 두 발로 섰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비디오카메라는 돌아갔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일어섰다.  Jean Neil은 양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으로 외치면서 실내를 빙빙 돌았다.  그 집회 장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불구가 아닌 사람들이 거짓으로 휠체어에 앉은 일도 있다.  하지만 Jean Neil의 경우에는 그녀 교회의 교인들이 그 간증의 능력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그녀를 담당했던 의사들도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었다.  이 치료의 역사는 하나님의 치유능력에 무관심했던 교회와 교인들을 일깨웠다.

이 간증은 오래전 모든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올 때 인천 공항 서점에서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가 쓴 『부흥, 성령의 축제』라는 책을 우연히 구입하는 가운데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던 스릴 넘치는 성령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을 수 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하거나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런 것은 하나님께로 것이 아니고 분명히 마귀의 장난 아니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일거야”라고 판단하거나 의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논쟁의 여지가 많은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인 것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부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그 쓰러지는 현상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임재와 능력 아래 쓰러졌는지( 1:28, 10:9, 17:6, 9:4, 1:17) 아니면 악령의 역사로 쓰러졌는지( 9:16-20, 눅 9:37-42) 혹은 또 다른 집단의 히스테리 현상이나( 19:32) 자기 최면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인지가 궁금했다.  분별이 필요했다(고전 14:29).  더 나아가 기도받고 쓰러질 때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과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나 글을 통해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질 때, 이것이 확실히 “성령의 역사이다”, “사탄의 역사이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체험한 것과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나에게 똑같이 적용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경험해 보거나 체험해 보지 않은 어떤 영적세계를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말들을 통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독단이나 독선적인 주장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 자신이 직접 그러한 집회에 참석해 보기로 마음에 결정을 하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자를 찾아 그 사람의 신앙성장과 신학배경, 그리고 집회 때마다 일어나는 일들과 서적들을 읽으면서 일 년 간 연구하고 기도하며 마음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이미 집회에 참석하기 전부터, 그리고 참석 후에도 임하기 시작했다.  막상 그 집회에 참석했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가 악령의 역사인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만약 바리새인처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가운데 집회에 참석했더라면 그분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약 1:6-8).

솔직히 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준비를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청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1:15).  호기심과 거룩한 두려움,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뒤섞여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듣고 나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 되었을 때,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심정으로 서 있었다( 5:28).  내가 경험한 바로는 기도해 주는 사역자가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과 같은 느낌과 함께 몸의 무게와 상관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 않았고 맥박과 호흡도 정상적이며 정신만큼은 멀쩡해서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저항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말하는 순간 온몸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강한 에너지가 흘렀다.

기도받고 바닥에 누워 있는 동안 조금도 불편하거나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초라함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몇 시간 동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실 개인적인 체험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후 12:1-6).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느끼면서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임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실신’이나 ‘의식불명혹은집단최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기도받고 쓰러진 후에 깊은 안식과 평안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건전한 성령의 사역인지 또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며 순수한 동기를 가진 헌신된 사역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눅 18:13),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마 16:16), 그분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때 일어나는 현상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는 말처럼(요일 4:2),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전 12:3).

물론 이런 경우 타락한 인간의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 그리고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것들로 인해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쓰러지는 현상이 심리적으로 유도해서 되어지는 행동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것이었다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마 18:7).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치고 걸림돌이 생기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롬 9:33).  따라서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강조하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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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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