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국민의 인권이 보장됨을 원칙으로 하여 자유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나라에서는 일 년에도 수백 건의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지며 또한 폐지된다.  어떤 법률은 제정된 후 몇 번 사용되지도 않고 개정, 혹은 폐지되어 그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의 사람들조차 그 법률의 존폐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법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모든 상황과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률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법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상황에 맞게 개정되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불안전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법은 지극히 엄정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번 제정 반포된 후에는 결코 폐지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일 그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이고(레 26:14-39),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임을 성경은 언급한다(레 26:3-13).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이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사 33:32).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율법을 기껏해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나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 법전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이 모든 피조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때(롬 2:15),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먼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제정하신 ‘자연법칙’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속에 특별한 본성을 심어 놓으셨다.  이 본성에 따라 곡식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1:11-12), 동물들은 육식 혹은 채식을 하며( 1:21-25),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르고 수많은 별들이 궤도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 1:14-19)도 모두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거역할 없는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서의 율법은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법칙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롬 1:19-21). 

예를 들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 2:23),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고( 5:45),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신다( 8:22).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이적을 통해 범죄 한나라와 사람들에게 진노와 경고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창 6:5-7, 7-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법칙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내재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 11:8).  반면에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자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법을 발견할 수 있다(골 3:10).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는 데 반해 불신자들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진다’(엡 4:18).

또한 이 율법에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양심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2:15).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엡 4:19)과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전 10:15).  하지만 이러한 양심과 이성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5:12), 많은 부분이 손상을 입고 부패해졌다( 17:9).  한 마디로 ‘썩어 문드러졌다’(창 6:12).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이성만으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3:12).  그러나 재물 많은 부자청년처럼 오직 상대적인 선만을 행할 수 있다( 19:16-22).  또한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딤전 4:1-2) 그 사람에게는 양심이 없는 것처럼 도덕적 불감증의 상태에 빠져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전한다(딤전 1:19-20).  그러나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러한 양심을 통해 사람들은 신앙유무를 떠나서도 도덕적인 것을 보고 선하게 여길 있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여기는 본능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8:9).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 양심은 가장 방해꾼이다( 10:22).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양심이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양심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계속 권유할 뿐만 아니라(삼상 24:5-7), 죄에 대하여 평가할 있도록 판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4:16).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율법을 새겨주셨다( 8:10).  따라서 인간의 심령에 새겨진 양심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렇게 피조 세계에 주어진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자연율과 양심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할 수 없다(롬 1:21-22).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런 ‘기본적 율법’ 이외에 성경에 기록된 ‘특별계시’로서의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율법’이라고 부르는 ‘성문 율법’(成文律法)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7:7-9), 그분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있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범죄 한 인간을 위한( 7:28),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아는 것처럼 그 율법을 준수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딤전 1:8).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3:20). 왜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갈 5: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롬 7:7).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필연적으로 요청됨을 직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다( 3:19-24).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2: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갈 3:22, 2:8).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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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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