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율법주의’란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은 물론, 이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 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케 되었으므로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로마서 3장 28절 말씀에 나와 있듯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엡 2:8)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갈 2:1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롬 4:1-4),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종류의 율법이든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진노를 이루게 하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롬 4:15),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이다(갈 5:18).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율법 폐기론자’ 혹은 ‘도덕률 폐기론자’라고 부른다(롬 6:1-2). 이들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 안에 속한 인간의 삶을 경시하거나 지식에 근거한 영적인 삶만을 우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별히 Martin Luther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Johann Agricola 같은 사람도 가장 전형적인 반율법주의자로서, 오늘날 역시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율법 하면 구약의 모세 율법만을 생각하고 반대로 복음 하면 신약의 복음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롬 1:19-21)과 인간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롬 2:14-15), 구약 모세의 율법(성문적 율법)인 도덕법(출 20:1-17)과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시민법(레 25:39-41)과 신약의 산상수훈의 교훈(마 5-7장) 등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규범과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이란 Jonathan Edwards가 『구속사』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의 복음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사역(고전 15:1-8)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계시, 즉 에덴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 이후(창 3:15), 각종 언약의 내용들(출 19:1-6, 신 5장), 더 나아가 예수님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 선포(사 53:1-12, 렘 31:31-34), 역시 다 복음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역사 전개를 위한 경륜의 방법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구속사역을 행하실 것에 대한 옛 언약(히 9:1-10)과 구원의 객관적 조건을 제시하는 율법을 주로 강조하셨다(갈 3:24). 반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히 10:9-14), 천국에서의 최종 구원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 맺어주신 새 언약(마 26:28)과 이미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모든 죗값을‘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치르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을 주로 강조하셨다(히 9:11-15).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시대’이고, 신약은 ‘복음시대’라는 통념이 생겨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성육신 사건)으로 전후로 나누어지면서 그 강조점은 다르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속사역을 통한 죄인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이 된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이 그 역할은 다를지라도 구원이란 목적 하에서 서로 연결된 계시들 인 것을 보여준다(갈 3:22-24).
먼저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여 인간이 왜 죄인인지를 보여주고(롬 7:7), 죄의 대가인 형벌을 규정한다(딤전 1:8-10). 또한 모든 인간은 다윗의 고백한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죄인(시 51:5)인 동시에 태어나서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롬 5:12)로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형벌받을 마땅한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여기서 율법의 약점을 찾는다면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제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히 7:19, 10:1). 반면에 복음은 죄인에 대한 정죄에서 머무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속량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무서운 죄인을 구원하기까지를 선포한다(갈 3:13).
그러므로 신구약을 불문하고 선택받은 자는(엡 1:4),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결과인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딛 3:5), 구속의 은총을 적용받아 그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살후 1:8-9)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그 역시 율법의 적용을 받아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2-16).
조금 풀어서 말하면 율법의 근본 역할 자체가 복음의 전단계 계시인 동시에 율법은 필연적으로 복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그 목적이 상호동일하게 인간 구원이란 점과 그 수여자 및 집행자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점에서는 같다(사 33:22). 그러나 맡은 바 기능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롬 3:19-20), 어떻게 정죄당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딤전 1:9-11)을 제시해 주는 반면 복음은 율법이 죄인으로 규정한 자(롬 7:7)와 그에 관한 형벌의 해결까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갈 3:13). 즉 율법이 최소한의 선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 규범이라면 복음은 인간에게 절대적 선을 보여주는 영원한 규범이라고 볼 수 있다(히 7:28).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율법이 어떻게 해서 복음과 같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일 수 있는가(사 33:22)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야만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눅 5:8, 19:1-10, 행 16:30-32). 또한 율법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 것을 알아야(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롬 10:4, 갈 2:21). 그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갈 3:24), 율법은 우리를 복음이라는 완전한 계시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롬 3:31).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만이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행할 수 있다(롬 8:3-4).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며(롬 13:8-1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다(갈 3:24-29). 믿음은 율법을 적합한 자기 자리로 돌려놓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 안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대인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딤전 1:8). 요지가 무엇인가?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