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또는성령세례그리고기름부으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해한 구절이기 때문에 극단적 칼빈주의(Hyper Calvinism) 신앙을 가진 자들 중에는것이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느낀 나머지 그냥 회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방언이나 성령이 임할 나타나는 격렬한 감정의 표출, 특히지식의 말씀예언같은 새로운 형태의 계시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교리가 오용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없는 이유는 모든 교리가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바로 잡아지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여전히 오용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교리는 방언과 예언, 나아가 눈에 거스리는 성령 안의 안식거룩한 웃음’,  그리고 흐느낌몸의 진동등등 하나님께 대한 비이성적인 접근 방법에 관련되어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제도주의와 교회질서를 강조하는 종교적 전통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무시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교리와 관련하여 도에 지나친 행동들, 예를 들어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사람이 다른 형제에게 오만하거나 편협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만이 가장 성경에 근접한 순복음적이라고 주장할 , 바로 이러한 행동에 근거하여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좋지 않은 고정관념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왜곡시킨 나머지 교리에 대한 건전하고도 균형 잡힌 이해와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볼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는 성경 전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성령충만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에베소서 518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충만한 삶을 살기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성경적이고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 비록 그것이성령충만이라는 미명하에 행하여지는 어떤 것도 가령 그것으로 인해 오만하고 사랑이 결여된 행동을 한다면 그 성령의 충만함은 본인 자신에게는 신비스러운 충만(?)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수한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다시 말해 성령충만했다고 해서 우리가 전보다 더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말씀이나 주어지는 모든 예언들이 항상 옳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고전 14:29), 만일 누군가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원래부터 감정적이었던 사람은 더욱 감정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굳이 전보다 더 신령한 인간이 된 것 같이 외식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충만함 혹은 누군가를 통해 기름부으심을 받은 것을 가지고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떠벌이고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겸손과 사랑 가운데서 모든 면에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5).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시고 사역자로 써주시는 것이 우리가 선하거나 잘나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26-29).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11:13),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8:2), 구원의 주로 영접할 (10:9), 성령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16:16-17), 예수님을 진정 로 시인하도록 도와주십니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인성으로 인해 성령충만이 방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순절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드로와 같이 일단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16:17), 어느 때인가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2:1-4).  더 나아가 성령충만은 예수님을 닮아가고(5:18-21), 그 분처럼 사역을 행할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지만(14:12, 1:8), 여기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외부로부터 부어지는 것인지( 3:16, 2:2-3, 4:31),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름 부음(딤후 1:6, 요일 2:20, 27)분출되는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지 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성령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임해 주시기를 기대할 있습니다( 5:17).  그리고 이 성령충만은 회심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 바울처럼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9), 또 다른 사람에게는 디모데 같이 매우 부드럽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딤후 1:5-6).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지만( 2:4, 19:6),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고전 12:30)에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방언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10:46).  또한 어떤 사람은 사역자로부터 안수를 받음으로 성령충만을 받기도 하는데( 9:17), 사실 이러한 방식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 아닌 이유는 고넬료 가정처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0:44-48).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 영적인 삶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이고( 11:13), 결코 영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해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 15:5), 이러한 삶이 성령충만의 전제조건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빚진 자에게 빚을 요구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고전 12:11), 결코 사역자의 의로움이나 공로에 의해 주어지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4:4-5).  그렇지만 이 성령충만은 도덕적인 자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엡 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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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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