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 사역

기름부으심 2022. 12. 25. 14:48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거나 혹은 귀신이 들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폄하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인들 중에 귀신이 들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것을 놓칠 리 만무한 이단 사냥꾼들, 즉 신학적 논쟁에 열을 올리는 목사들은 먹이를 만난 하이에나처럼 ‘기름부음’에 대해 비판적이고 공격적으로 글을 쓰거나 어떤 말 같지 않는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나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귀신 들려 떠드는 이 사람이 진정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귀신 들린 자 한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가지고 기름부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세상에는 ‘국민에게 짐 지우는 패륜당’처럼 ‘신구개하’(信口開河)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만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  만약 어떤 목회자가 돈 문제, 혹은 이성 문제, 아니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서 그 한 사람을 통해 모든 목사를 똑같이 매도할 수는 없다.  개중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며(빌 2:12) 맡겨진 사역에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있다(고전 4:2).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신비주의적 망상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 전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사실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주어진 목회에는 관심이 없고 눈만 뜨면, 입만 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행 7:51) 보고 듣는 것마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한다.  대단한 착각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도 모르고(마 12:36-37), 이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8)라는 말씀을 망각한 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나팔을 불어댄다(마 3:7-10).  그러나 열매가 없이(마 7:16) 하는 짓들을 보면(막 3:20-30, 눅 11:14-23) 늘 성령을 대적하는(눅 12:10)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마 12:22-37).  아니, 거듭나지 않았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구원받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 목사다(눅 13:23-24).  이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갈 2:16).  내가 배운 성경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엡 2:8, 딛 3:5).  물론 세상에는 개나 소나 쉽게 대통령 되고 장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좇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눅 9:57-6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마 7:13-14).    

사도 바울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는 격렬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14절).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광적으로,  때로는 난폭할 정도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 없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과대망상증 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갈 1:14).  중생의 체험이 없었던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 Calvinism)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설물 같은 더러운 신학이었다(행 9:4).  마찬가지로 목사라도 거듭나지 않는다면 ‘쓰레기’(빌 3:8) 같은 신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딤전 1:13).  이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오래전 후배 목회자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로 판명되었다.  이 사람은 바른 진리를 전한다는 신념하에 그렇게 성령의 사역에 대해 늘 부정적이고 대적하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읽을 가치도 없지만 그의 설교를 글로 쓴 것도 있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개혁교단에 소속되었지만 신앙 노선은 완전히 달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경이 완성되면서 더 이상 기적이 필요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병과 죽음, 그리고 귀신 들림 같은 사망의 증상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일뿐 아니라, 마태복음 12장 39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 역시 사탄에게 붙들려 있다고 주장한다.  분별력이 없는 교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런 설교에(딤후 4:3) ‘아멘’으로 화답한다.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싫어하는 일인지 잘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그가 설교를 하면서 바리새인처럼(막 3:22-30)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엡 4:30) 거스리는 가운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히 10:29).  마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능력을 성령이 아니라 사탄에게 돌림으로써 성령을 훼방하듯 말이다(마 12:24).  이것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오해가 없기 바란다.  물론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갔다고는 말할 수 없다(삼상 2:6).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들 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교단에 속한 것 하나만을 가지고 개혁주의자인 것처럼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큰 병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중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운동의 모태가 된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규칙들을 만들어 내려하는 인간의 성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어떤 것들을 알고 나면 자기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원칙을 세운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것처럼 그러한 원칙들을 강요한다.  마치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사이비 목사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태극기 부대 늙은이들을 모아 놓고 이태원 참사가 북한의 공작이라고 세뇌시키듯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는 말씀처럼(사 55:8) 하나님께서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실 때 이들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 보면 기독교 초기의 히브라인들 역시 이러한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이 되어야 하며 히브리인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15:5).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사용하셨다는 것이 이유였고,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 관한 그들의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규칙들을 깨시고 할례고 나발(?)이고, 히브리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 15:1-21).

여기서 John Stott가 『Baptism and Fullness』에서 한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은사주의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나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것과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무척 꺼려왔던 점에서 내가 미성숙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풍성하고 다채로운 다양성을 지니신 분이다. 그분은 모든 인간과 모든 풀잎, 모든 눈송이를 제각각 다르게 만드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든 정형화된 것들에 대해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특정한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것 같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 아닌가?”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가 그 사람의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를 묻고 있었다(요 9:2).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신학적인 것만을 문제 삼았다(요 9:16).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잣대로 소경이 치유받은 엄청난 기적(요 9:18)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다(요 9:22).  오히려 소경을 치유한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세우기에 급급했다(요 9:24).  반면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담대히 간증할 수 있었다(요 9:25).

바리새인들이 문제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식’, 즉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과 안식일에 율법을 어긴다는 표면적인 모습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류금지를 결의한 것이다(요 9:22-23).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유대적 세계관에서 나왔다(갈 1:14).  오늘날에는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죽은 전통과 제도주의, 그리고 골빈 신학에서 나온다.  만약 이들이 바울처럼 자신이 배운 신학을 ‘오물’로 여겼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빌 3:7-9).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소경이 체험한 그 증거를 무시하고 스스로 소경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요 9:39-40).    

꼭 기억하길 바란다.  메시지 전달자에 대한 거부는(심지어 성자 하나님께 대한 것일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마 12:32).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마 12:31).  이 죄는 용서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완전히 도말(塗抹)된다(요일 1:7).

지금 이 시대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적으로 소경 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Francis of Assisi는 말한다.  “지극히 높으시며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소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안목을 설명하신 적이 있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23).  특별히 성령의 기름부음 사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아볼로처럼 ‘반쪽짜리’ 성경지식을(행 18:24-26) 끝까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 요엘이 말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행 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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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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