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초자연적인 역사와 은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기도생활 속에서 성경적인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사용하고 있는 다른 형제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방을 한다.  이들은 방언하는 자들을 향해 기만을 당했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어떻게 성도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엡 4:16).  또 다른 문제는 교회의 많은 지체들에게 있어(고전 12:12), 고린도교회처럼 신자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서로 다른 영적 수준을 설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영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고전 12:4-31).

사실 교회 안에서 어떤 표적과 기사(행 14:3)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에 있거나(롬 12:3), 아니면 각자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소위 계몽주의가 오랫동안 득세하던 기간이 있었고, 또한 현대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현상적인 진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적인 성향으로 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다수가 현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때때로 현실적이지 못한 이유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행하사…’라고 말씀하고 있다(렘 32:20).  이 구절은 출애굽 시대부터 포로기까지 표적과 기사의 예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례미야가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애굽에 징조와 기사를 베푸셨고(신 4:34), 지금도 이스라엘 땅과 세계 모든 나라에서 그와 같이 행하심으로(히 13:8),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이 역사의 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신다(신 4:34-39).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을 뿐 아니라(요 20:30), 낱낱이 기록하기에는 불가능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21:25).

이러한 것을 볼 때 표적과 기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지나친 폐쇄성을 초래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고 되는 기적들에 대해 부당한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기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온전히 구원할 수 없고, 구원에 이르는 능력은 오직 복음을 통해(롬 1:16),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 있다(고전 12:3).  하지만 누군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복음을 희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롬 15:19),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이고 바리새인처럼 생명력이 없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한다면(마 23:15), 그 역시 올바른 믿음이 아닌 반쪽짜리 병든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살전 1:5).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개인적인 가치를 스스로 가진 은사로 평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전 1:6-13).  예를 들어 누군가 더 크고 눈에 띄게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은사를 가진 사역자를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끊임없이 책망했고(고전 4:7), 이러한 책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일차적인 초점이 은사가 아니라 그 은사를 허락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2:11).  모든 신자들이 우선적으로 은사를 사모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먼저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24:37-40).  그 다음 은사를 사모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전 14:39).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경험과 놀라운 체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사역을 확증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을 안다고 고백했는데(고후 12:2), 그것은 자신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원천이 되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어떻게 덮어두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즉, 부활의 능력을 통해(요 6:40), 그러한 황홀하고 신비한 체험보다는(행 10:10),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롬 6:5),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현재의 삶에 있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빌 1:27).

모세의 개인적인 체험은 어떠했는가?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3:1-5).  모세가 유일하게 있었던 것은 오직 그분과의 만남에 대해 백성들에게 간증하는 것이다( 3:13-15).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이가 그들 조상의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증명할 있다.  모세가 경험한 것은 다른 사람이 경험할 없는 모세 개인만의 독특한 영적 체험이다.  따라서 개인이 받은 성령체험을 너무 자주 자신의 사역과 영성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아주 잘못된 행동이다.  설사 그러한 체험을더라도 그것은 사적인 것이라서 장려하거나 과시할 만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체험한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14:4), 자신만이 체험한 어떤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8:14),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고 있는 것이다(눅 22:31).  Jonathan Edwards 개인적인 체험을 유난히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사람이 비상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가증스러울 있다. 영적이고 영원한 영혼의 생명은 성령의 특별은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 있다”  그러면서 성령의 두 종류의 영향력, 즉 ‘일반적이고 은혜로운 영향력’과 ‘영감을 주시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주시는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오직 사랑하시는 자녀들과 그분의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성령의 은사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고 말한다.  

Edwards는 발람과 사울과 가룟 유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나오는 거짓선지자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은 그들이 영감을 받고 이적을 행한 것에 있지 않고 그들의 뛰어난 거룩성에 있었다. 그들 마음에 있었던 그 은혜야말로 이적을 행하는 그들의 은사들보다 천 배나 더 큰 그들의 존귀요 명예였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사도보다 환상과 계시와 이적적인 은사가 풍부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귀신들이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사도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받은 은사들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였다”  

요약하여 말하면 개인의 독특한 체험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님께 받은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은사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고전 12:11, 12:28, 엡 4:7-11)을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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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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