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 MacNutt 박사는 목회자들 중에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것을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된 순서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리 짜여 놓은 순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불안해하거나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대체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글들을 보면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과 ‘주정론’(主情論)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한다. 실제로 오늘날 성령의 권능 아래 쓰러지는 것을 인도의 정통적 수련행법 Kundalini 명상과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Joseph Suenens는 『Ecumenism and Charismatic Renewal』에서쓰러지는 현상은 과거의 종교에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원시부족에서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여러 종파에서 두루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역들 기도받고 성령 하나님에 의해 압도되어 쓰러지는 현상을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읊다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영적인 차원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수밖에 없다.  사실 아프리카나 동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악령이 행하는 것인지 차이점을 그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더 확실한 것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에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4:1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서 십 대들이 우상처럼 바라보는 가수가 앞에 있을 때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절하거나 졸도, 혹은 쓰러지는 것과 같은 집단적인 광란에 의한 심리적인 현상들이 있다.  또한 인도의 Kundalini 명상은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명상에서 가르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몸의 떨림을 허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행하는 수련에서 떨림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을 기독교 사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교해서 쓰러지는 것과 떠는 현상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마 12:22-32).  분별이 필요한 것이지(고전 14:29)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행 7:51)처럼 모든 것을 다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아야 한다.

나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목회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역이 사탄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물론 사람들이 기도를 받고 쓰러질 때 그것이 ‘성령에 의한 임재’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원인’인지 아니면 ‘악한 영에 의한 초자연적인 힘’(살후 2:9)인지를 단순히 옆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무슨 힘으로 쓰러졌는지 식별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쓰러지는 현상이 기독교인이 기도받을 때도 일어나지만 무당이나 마술사들이 주문을 외울 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외형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그 현상은 비슷할 수 있다.  나 역시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마 7:20).   그것은 치유시간에 기도해 주는 목사와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치유의 근원으로 받아들였음을(행 4:10) 확인함으로써 사탄의 힘을 통한 치유를 효과적으로 배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비슷한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으로 사도 요한의 경우에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하고 있다(계 1:17).  다른 하나는 귀신에 의한 힘으로 쓰러진 경우이다.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고 말한다(막 9:20).  이 두 사건 모두 땅바닥에 쓰러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도 요한의 반응은 실제로 초자연적인 존재를 보고 이전에 예언자들이 그러했듯이(겔 1:28, 단 8:17, 10:9)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때문이었다.  반면에 아이는 악한 영이 예수를 보자 그는 그 아이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귀신은 마지막 한 번의 공격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반항과 적대감을 가진 사탄이 쫓겨 나갈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식별하는 근거 중에 하나는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먼저 아이가 몸을 뒤틀고 소리를 지르며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악령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막 9:26).  축귀 사역에 경험이 있는 자라면 자신의 분노와 저항을 보이기 위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귀신이 나갈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막 1:26).  그와 달리 사도 요한은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나 발작하는 것 없이 성령의 권능 아래 다니엘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졌다(단 10:8).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셨을 때 모세(출 3:6)나 다니엘이 보여주듯이 반드시 경배가 뒤따랐다(단 8:17-18).  그리고 경배에는 축복이 따랐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것만 가지고는 그 현상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그 체험의 효과 등을 알 수는 없다.  정확한 영분별의 은사를 받지 않는 이상 말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받고 쓰러져 안식을 취하는 동안 나타나는 그 효과를 관찰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쉽게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즉 쓰러짐을 통해 무슨 열매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기도하는 사람이나 기도받는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며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고 기도를 받는다면(요일 4:2-3), 그 쓰러짐을 통해 삶 전체를 변화시킬 만큼 주님과의 획기적인 만남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어떤 사람은 쓰러짐을 통해 회개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기도 하며, 혹은 귀신에게 놓여나는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 깨닫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쓰러지는 현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체험이 신자의 삶에 지속적인 효과를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하나님보다는 신비적인 체험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금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모순도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모순은 우리 삶에서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감이 넘치는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순간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행 7:54), 기도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한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아가는 데 있어 유익한 것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의 여정을 시작할 때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모세(출 3장)나 바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듯이(행 9장), 삶의 어떤 시점에서 성령 안에 안식을 통해 주님을 긴밀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신과 의사이며 제3세계의 선교사로 사역한 John White 박사는 자신이 성령 안에서의 안식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When the Spirit Come with Power』에서 사람들이 기도받고 쓰러지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실 때에 인간적인 예법(틀에 박힌 전통적인 사고방식) 따위는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아서 좋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나는 고질적인 회의적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조사해 보고, 시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시기를 원하면서도 그분의 역사를 충분하게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해 본 결과 그중 몇몇은 정신적 이상에 의한 현상이고, 또는 마귀적인 두려움이나 저항을 배경으로 귀신들의 발악에 의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표적(역사)들은 성령의 권능의 임재를 증명해 주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White 박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고 쓰러지거나 몸이 흔들리는 현상, 즉 성령 안에 안식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한 대가가 아닌 것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경성 발작이나 최면술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더더욱 아닌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일방적인 놀라운 은혜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재하시는 진정한 증거(징표)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분별이 필요하다(요일 4:1).  하지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붙잡아야 한다’(살전 5:21).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마귀가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믿지 말어 귀신의 장난이야”  이 말의 의미는 영적소경,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며 살라는 것이다(마 1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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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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