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볼로 신학

기름부으심 2023. 1. 8. 15:17

성경에 나오는 아볼로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로 소문나고 수많은 학자들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당대에 가장 훌륭한 교육 환경 속에서 자라나 훈련을 잘 받고 열정적으로 지역교회 목회에 힘썼던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아볼로를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고전 4:6).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 구약성경에 능한 설득력 있는 웅변가였다(행 18:24).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정확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완전했다.  비록 그가 박식함과 열심을 가진 탁월한 목회자이기는 했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다.  십중팔구 아볼로의 설교는 요한의 메시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리라’(마 3:2)를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 놓은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아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성령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볼로는 자신의 재능과 학문, 그리고 열성적으로 말씀 전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롬 8:9, 고전 12:3).  그가 회개를 선포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여러 교훈 및 구약의 가르침과 연계해 가르쳤지만(행 18:25), 성령의 능력 없이 그분에 대해 증거 했고,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성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행 19:2).  다시 말해서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지식적으로 머리로만 알았지 그분이 성령을 보내주시고(요 16:7),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요 1:33).

조금 더 살펴보면 아볼로가 가지고 있는 신학에는 두 가지가 빠진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예수의 죽음(요 19:30)과 부활(요 20:19)로 이어지는 대속의 사역(히 9:26)과 그에 입각한 ‘기독론’의 구원관이다.  즉 예수가 대속적 죽음(마 20:28)을 통해 인류의 구원(요 3:15)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진리의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서 신학적 지식에는 탁월했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롬 8:11),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겔 36:26-28)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환언하면 세례 요한이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처럼(눅 16:16), 아볼로의 성경 지식은 오순절 이전 기독교 신학이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떠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 신자들에게 ‘내가 …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디모데에게는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권면하면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딤후 1:12)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에서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강조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이 구절들은 바울의 확고한 결심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나타낸다.  자신이 증거 하는 복음(고전 15:1-4)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다.  따라서 그들이 돈과 권력, 인기, 쾌락, 특권 등, 이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분과 살아 있는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볼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18:25).  또한 그가 예수님과 함께 했었다는 증거도 얻지 못했다.  성경에 의하면  아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유창하고 열심을 다한 신학적이고 학문적인 설교자였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15:26), 그 성령이 빠진 상태에서 말씀을 가르쳤다.  여기서 나타난 열매가 무엇인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방문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여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까지 에베소 지방에는 성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무후무했다( 19:1-7).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 것 말이다(고전 12:3).  얼마든지 가능하다.  당시 에베소에는 장막을 만드는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보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행 18:1-3).  그들은 아볼로의 설교를 듣자 그의 메시지 속에 무엇인가 불완전한 부분들이 있음을 이내 발견하였다.  결국 그들은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의 진수인 ‘하나님의 도’,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19:26).

우리는 아볼로가 이러한 경험을 한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목회가 새로운 기쁨과 능력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얼마 후 아가야 지방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서 언뜻 볼 수 있듯이, 성경은 아볼로에 대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18:27).  복음의 핵심을 깨닫고 나서 더 완전한 신학 체계를 구비한 아볼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이 알고 있던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설득력 있고 확신 있게 증거 했다는 것이다(행 18:28).     

이때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러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내주시고(요 16:7),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오시는 성령을 거스려(행 7:51) 욕되게 하며(히 10:29)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엡 4:30)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물세례’만 아는 시대에 뒤떨어진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들 중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자기도 이해하기 어려운 원어를 들먹거리며 거의 ‘신들린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예수를 전한다.  오직 예수! 얼마나 듣기 좋은가?  한 술 더 뜨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4장 6절 말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적이지 않는가?  문제는 인간이 조류과에 속한 것도 아닌데, ‘주둥이’만 살아있어 능력이 없는 죽은 예수만 전한다는 것이다(히 4:12).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여기서 Gordon Fee의 말을 빌리고 싶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요한의 물세례만을 아는 목사에게 ‘기름부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신자를 앞에 놓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전 2:14).  만약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설교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 아볼로처럼 성경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바울처럼 따르는 표적으로 열매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험자로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설교가 죽을 맛(?)이고, 교회 안에 병든 신자들이 많은데 담임목사로서 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너스나 먹고 갈려나?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열매를 맺었는가?  로마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베푼 표적(semeia)과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기사(terata)를 행했다(18절).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전했다(19절).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 일어난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고전 2:4).  더 나아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증거 한다(살전 1:5).  바울의 설교만으로는 아무도 믿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게 되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에는 반드시 기적도 포함되어 있다(행 14:3, 16:17-18, 19:11-12, 롬 15:17-19, 고후 12:12).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볼로처럼 예수를 지겹게 외쳐도 성령이 빠지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내가 먹어봐서 아는데 도루묵은 맛이 없다.  영혼을 건조하게 만드는 메마른 설교 말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  “무슨 소리야!  우리는 오직 예수야!”  이런 골빈 소리로 떠드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이단이나 사이비 먹사들도 ‘예수’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이들이 주로 우려먹는 성경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는 구절이다.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는 목사다(고전 2:2).  하지만 이것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속이는 것과 같다(롬 10:9).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갈 3:13).  다 끝난 것인가?  내 죄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죽음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영생을 얻는 것 말이다.  그래서 부활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요 11:25-26).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이렇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히 5:11) 여기까지만 하겠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령을 거스리며 예수를 증거 하는 반쪽짜리 신학을 가진 목사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목사를 만나면 가룟 유다처럼 영혼을 마귀에게 받치는 꼴이 된다(요 13:2).  바리새인보다 더 한 지옥의 자식이 된다(마 23:15).  한 마디로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선생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약 3:1).      

이 기름부음을 이야기하려고 아볼로가 처음 가졌던 절름발이 신학을 예로 들어 지금까지 성경적 ‘썰’((說)을 풀었다.  한 가지만큼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기름부음’과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전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행하시는 일이기에 전적으로 그분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눅 4:18, 행 10:38).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즉, 기름부음은 성경적일 뿐 아니라(요일 2:20, 27)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나는 목사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평신도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다.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겸손히 배운 것처럼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쓰레기 같은 자존심, 의심의 씨앗 불신앙, 자기 성취감인 교만, 성령의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쓴 뿌리(악독)를 버리고 기름부음을 사모한다면 혹시 누가 아는가 다른 성령의 사역자나, 혹은 개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역사할지 말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목사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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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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