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vin은 신자들의 성화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육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다소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난 자녀일지라도(벧전 2:9), 그는 여전히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이며( 7),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6:6-14), 일생동안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죄와의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4).

 

Louis Berkhof 역시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Sinclair Ferguson도 성화의 기본 원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등과 긴장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Christian Spirituality : Five Views of Sanctific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특징은 잠잠함이라고 강조하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개혁주의 신학은 순례의 여정과 거룩한 전쟁(갈등)을 강조했다. 개혁주의는 그러한 갈등을 운 나쁘게 일이 잘못되어 유발하거나 믿음 또는 영성이 부족의 결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의 본질적인 영광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갈등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고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면서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의 풍조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간추린다면 갈라디아서 517절에서 나오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육체와 성령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권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행하려는 이러한 의지를 가로 막고 육신의 욕망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는 힘도 작용하기 때문에( 4:1-3), 비록 성도가 믿음으로 거듭났더라도( 2:8), 죄에 물든 옛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 4:17-24), 여전히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6:12).  다시 말해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내부적으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악한 육신의 욕망이 있고( 4:19), 외부적으로는 성도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27).  사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은 확실하지만( 8:1-2), 죄는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Calvin은 이러한 갈등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자 속에 죄는 지배력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의 고백인 로마서 712-2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신학자들은 바울이 ‘거듭난 후’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듭나기 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성도로서 현재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7:25).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고전 3:16),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1:3), 속으로 탄식하며 최종적인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8:23).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 3:12-14)에 여전히 장막 집에 살아가는 우리는(고후 5:1), 육체의 욕망과 영적소망이 서로 충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23).  따라서 성령을 좇는 삶은 육체를 따르는 삶과 공존할 수 없고( 8:1-11), 만약 성령을 좇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5:18, 25), 이 둘은 서로를 전적으로 대적하기 때문( 5:16-17)에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삶 자체가 ‘이미’( 1:7), 그러나 ‘아직’ 이라는( 4:30), 두 가지 시점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제약받는 몸,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벧후 1:13).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체를 따르는 삶은 과거에 속했기 때문(벧전 4:3)에 성령의 사람에게 있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갈등은 일어날 수 있어도 육체를 따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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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성화의 진행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들을 찾아본다면 고린도후서 71절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히브리서 1214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115절에는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 구절들에서 중요한 단어들은 ‘이루어’, ‘좇으라’, ‘되라’는 말로서 이 구절들만 본다면 성화의 진행은 인간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내적인 힘을 인간 자신의 것으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볼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서 기독교 밖의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도덕주의’와 기독교 내에서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은혜주의’로 갈라지게 됩니다.  사실 성화 과정에 있어 우리가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은 인간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3:5), 성화를 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는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거룩해지려고 몸부림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화를 이루는데 있어 우리와 하나님이 협력한다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며, 우리가 거룩해 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살전 3:13), 우리도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요일 3:3).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의 진행 과정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위에 맞는 방법으로 그분의 일에 협력한다는 것이지 그 역할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성화사역에 있어서 독립적인 행위자가 되어 성화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사역이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성령을 통해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성화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를 오해해서 신앙생활의 수동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마치 성화의 과정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가 해야할 일(살전 4:3-6), 즉 도덕적인 명령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사실(고전 3:16-17, 13:4)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벧전 1:15-16).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확실한 역할 중의 하나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12:5-11).  먼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타락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했고( 2:12-15),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축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역할과 성자 하나님의 역할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13:20-21).  또한 성화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화를 완성하셨고(고전 1:30), 믿음의 경주( 12:2)와 우리의 본이 되셨으며(벧전 2:21), 사도 요한도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2:6).  나아가 베드로 사도(벧전 1:2)와 바울을 통해(살후 2:13), 신자의 거룩한 삶을 언급한 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수준 높은 성화된 삶의 모습이며( 5:22-23), 우리가 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8:14, 5:16-18).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성령의 요구와 원하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만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역할도 있는데, 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의지하고 성화를 위해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사용할 것( 6:13)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12:1).  또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할 것을 인식하였기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라’고 했으며( 8:13),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체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5:24).  사도 요한도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순결하심같이 자신들도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고(요일 3:3), 바울 역시 고린도교인들에게 음행을 피하고(고전 6:13), 믿지 않는 자와 연합하지 말며(고후 6:1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를 것을 명했습니다(고후 7:1).  히브리서 기자 또한 화평함과 거룩함 없이는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했고( 12:14), 베드로도 신에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경건에 힘쓸 것을 강조했습니다(벧후 1:4-7).  이렇게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절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벧전 1:15-16), 신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살전 4:3-7).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거룩함의 습관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숙함을 측정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계속되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4).  그러나 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우리가 빨리 성화될 수 있는 지름길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된 것이 없고,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앞서간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한 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1:1-6), 기도하고( 4:6), 찬양과 감사(살전 5:18)와 예배( 5:18-20), 그리고 사랑의 수고(살전 1:3)와 구제를 통해( 10:2),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28:19-20), 지체들 간에 교제를 가지며( 10:25-25),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살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5:23).  따라서 성화는 거룩하게 만듬이라는 그 문자 의미 그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소명에서 양자되기까지의 과정(1:17)을 거쳐 값없이 주시는 선물(2:8)로 구원을 획득한 인간이 이제 남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마땅한 응답으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자체를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비록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각 성도가 스스로 성화되어 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성화가 이루어지기(살후 2:13)에 성화는 엄연히 그분에 의하여 주어지는 구원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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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보통 성숙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단어가 성경적인 이유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구절과 마태복음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71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온전히 지킬 능력도 주셨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길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 없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John Wesley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이것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고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완전’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 완전 성화의 가능성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인간이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해 질 수 있고,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때문에 알미니안주의나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시키지 않고 성화를 독립된 제2의 축복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적 논의에서 성화는 신자들의 점진적인 정결, 즉 순간적인 ‘지위상’ 혹은 ‘법적인’ 칭의를 받은 후에 이 과정을 통해 점점 거룩해 진다고 말합니다.  D. A. Carson 역시 이 성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신자의 회심 때 하나님을 향해서 한 개인이 마음을 정하는 첫 시점을 가리킨다는 것이 바울 신학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은 없지만(고전 1:7), 은사 문제로 시끄럽고(고전 12-14), 서로 간에 시기와 분쟁이 심하며(고전 3:3), 심지어 음행과(고전 5), 법정 싸움으로(고전 6:1-11), 여러 파로 나누어진(고전 1:12), 이상하게도 거룩하지 않고 싸움이 많은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have been sanctified)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전 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신자가 세상에 살면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 성화를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불안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27).  사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신빙성 있는 성경구절들은 없지만, 신자가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구절들은 신구약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20:9, 7:20, 5:16-24, 3:12-14, 요일 1:8).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14-2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물론 14, 18, 24절을 근거로 바울의 고백이 성화되기 전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John Murray가 말한 것처럼 이 고백은 성화된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Campbell Morgan 역시 성화에 대해 “성화는 완전히 죄에서 놓이거나 투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주도권과 파멸에서 놓여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말했고( 3:2),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죄 사함을 위한 기도가 신자의 삶 가운데 매일 반복되어야 할 기도의 모형인 것처럼(6:12), 성화란 무죄하고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한 거룩을 이루라고 한 말(고후 7:1)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온전히 거룩케 하시기를 바란다는 기도(살전 5:23)는 바울이 그들에게서 희망하는 목표, 즉 거기에 도달할 사람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도덕적 기준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도(요일 3:6), 누군가가 완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현재형 동사로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신자는 습관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일 3:9).  물론 성경에는 값없이 은혜 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했고( 4:1-8), 심지어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6:9), 이들이 의인이고 완전하다고 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3:9).  그 이유는 성경은 범죄치 아니한 사람(왕상 8:46)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20).  나아가 성경은 세상에 살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고전 5:10), 오히려 누구든지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일 1:8).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하심과 상반되게 거룩하게 자라 가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신자의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멈추지 말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후 7:1).  요약하면 Sinclair Ferguson이 말한 것처럼 성화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고(고전 1:30), John Murray는 이사야( 6:5)와 욥(42:5-6)이 하나님의 존전에 섰을 때,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한 다른 성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성화된 사람일수록 참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지 못한 사실로 인하여 안타까와 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을 향한 사랑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고, 예수 안에서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급을 얻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며, 아직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무게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어 죄에 대한 증오가 한층 깊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하심에 대한 계시에 가까이 접했던 모든 주의 백성들이 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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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에게 있어 ‘경건’이란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을 분리해서 인간이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소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경건주의 또는 은둔적 신령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는데,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경건에 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 오는 것이다.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구별된 삶’, 즉 신앙생활에 있어 믿는 것과 삶의 방식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벧전 2:9), 이렇게 그분의 은혜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2:8), 이 세대을 본받지 말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1-2).  물론 우리는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도 아니고(고전 5:10),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정하신 때까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5:13-16).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것은 세상 속에서 살라는 말씀이 음란하고 죄 많은( 8:38),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고 부패한 세속적인 문화를( 2:2),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적당히 타협하고( 5:11),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4:4).  다시 말해 도살의 날을 위해 사치와 방종과 쾌락을 즐기며 살지 말아야 하고( 5:5), 무엇보다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기는 살되 세상 풍속을 본받거나( 12:2),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2:2), 즉 악한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벧전 4:3), 오히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2:15-16), 특히 불신자들 앞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입니다(벧전 2:12).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인데(11:33-36), 이를 위해서 절대 요구되는 삶의 원리가 있다면 바로 경건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만이( 1:27),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연예인들처럼 특별한 몸짓이나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주목 받는 신앙을 가진다든지 혹은 세상과 단절하여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사는 생활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 것입니다( 14:21).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Sinclair B. Ferguson은 “성화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가운데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3:10).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화에 대해 Abraham Kuyper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영혼에게 있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거룩함이다.”라는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 12:1, 14)와 야고보( 1:22), 그리고 베드로 역시 독자들에게 모든 행실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이렇게 신약성경은 많은 부분을 여러 교회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자라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2:22, 4:13-15).  이 모든 도덕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화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한결 같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자의 삶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있어 더 거룩해져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2:15).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6:12-13),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은 온전한 성화가 완성될 수는 없겠지만( 3:13-14), 만약 우리가 죽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때에(고후 5:1-7), 우리의 영혼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해지므로 우리의 성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40-44).  예를 들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믿는 자는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게로 나아온다고 했는데( 12:23), 이는 거룩한 성 하나님 앞에는 부정한 것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요한계시록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21:27), 만일 성화가 우리의 육체까지 포함한 전인적인 것임을 인정한다면(고후 7:1, 살전 5:23), 이 성화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부활의 육체를 입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5:49).  다시 말해 회심 이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6:20), 회심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분명히 성화가 시작되었고(고전 6:11), 이 성화는 그리스도인 삶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3:21).  따라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죄와 일평생 싸워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6:10-18),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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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란?

논쟁거리/성화 2018. 7. 7. 13:21

구약성경 이사야 61-7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으로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성화시키시는 사건인데, 이 환상의 장엄함은 보좌 주위를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최고의 높은 차원임을 말해주는데, 사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백성의 무가치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댈 때에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자신의 죄로부터 분리되어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함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죄로부터 분리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이사야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화되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새 규범과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더 이상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20, 요일 1:8).

 

영국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John Owen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더욱 성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서로 연결된 동반자로서 항상 성화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처럼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거룩한 삶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고전 1:30)과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19).  이 문제를 두고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8:29).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3:27)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성화된 분이자(요한 10:36), 완전히 거룩하신 분으로(17:19), 우리가 진리되신 그분을 구원의 주로 믿고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이 되는 그 순간부터( 1:34-35),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죄의 유혹( 4:1-11)과 사탄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서( 2:14),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2:5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가운데( 5:7-10), 흠도 없고 점도 없이(벧전 1:19),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9:24).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9:20)라고 외치신 후에 왕의 존엄과 함께( 18:37),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23:46),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 2:8)과 성화의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벧전 3:15).  그리고 삼일 만( 16:21)에 부활하셨을 때( 1:3), 성화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은 신약에서 말하는 무궁하고( 7:16), 불멸한 생명의 능력으로( 6:9),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모했는데( 20:19, 26),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5:20), 처음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3).  따라서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8:9), 그들의 삶에서 성화가 진척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6:5), 그분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9).

 

신약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았고(고전 6:11), 사도행전 2032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을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의 처음 단계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요일 2:15), 죄의 세력으로부터 확실하게 단절시킴으로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고(6:6), 나아가 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신자의 삶을 죄에서 내어주는 것을 막아줍니다( 6:11, 18).  이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된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할 것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6:12-13).  다시 말해 죄의 권세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 6:5), 죄의 유혹과 시험을 뿌리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7).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12-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3:5),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17:22),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6:14),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은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12:12), Calvin은 “사탄은 성도가 절망으로 미치도록 유혹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 같이, 죄로부터의 우선적인 단절은 더 이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를 사랑하지 않도록( 12:1),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 12:4),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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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한 교인이 죽어 장례식을 치르는데 예배를 인도하던 목회자가 죽은 교인과 성도들을 앞에 놓고 이 성도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신앙이 초보인지라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이미 고인이 된 그 사람에 대해 비록 그가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한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 중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례를 맡은 목사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천국에 갔다, 안 갔다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최종판결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8, 20:11-15).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듣는 사람 전체가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분명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지옥에 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7:21).  사실 구원의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사람들 마음에 들려는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생명의 복음을 싸구려 다른 복음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합니다(1:8).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성경에 보면 한 때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들을 내놓고 있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심의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는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삼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9:1-6).  나아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 7:21-23)바울의 동역자이며( 24), 사랑을 받았던 데마는( 4:14),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헌신짝처럼 버렸고(딤후 4:10), 마술사 시몬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8:13), 성령의 능력을 주고 사려다 베드로 사도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8:18-23),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한 때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고, 반면 웨슬리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처음에는 참된 신자였지만 죄로 인해 타락의 길을 갔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회심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 815-16절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성령의 주관적인 증거가 있는데(요일 4:13), 이 증거는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수반하지만( 8:14), 만일 성령께서 진정으로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면 그는 소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 성품들을 형성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5:22-23).  물론 문제는내가 이러한 특징들을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나의 삶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런 특징들을 나의 가운데서 보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속일 있었다는 예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는 후메네오와 빌레도처럼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란과 분열을 야기 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딤후 2:17-18), 이들의 사역의 결과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대화를 하든, 기도를 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처럼 삶의 열매를 통해 그들을 있다는 것입니다( 7:16-20). 

 

이러한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의 중요한 부분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일 2:4-6).  물론 완벽한 삶을 살거나 혹은 완전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더 나아가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그분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4:25-32).  다시 말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2:17-22),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삶 가운데 분명히 순종의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요일 3:9-10, 24, 5:18), 무엇보다도 그 순종의 결과를 보일 수 있는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다른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요일 3:14, 25:31-46).  따라서 누군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 중에 하나인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계속 믿을 것이며, 또한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고( 1:23), 처음 시작할 때 믿은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것입니다( 3:14).  반면에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7:21), 삶이 불의로 가득하거나(13:23-27), 주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저버린(14:21), 가룟유다, 혹은 데마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세상으로 돌아간다면(딤후 4:10), 그는 실제로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딤후 4:10).   

 

이처럼 신앙을 저버리고 떨어져 나간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혹은 이 사람은 한 때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믿다가 타락한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의 과거에 대한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에서 균형 있는 교리를 가르치는 대신 목회자들이 변질된 교리, 즉 한번 신앙을 고백하거나 물세례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식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11:52).  그 결과 전혀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도 물세례를 받을 때 입술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7:21), 그렇지 않다는 거짓된 확신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지금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라는 질문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를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견디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22,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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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T. Wright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칭의를 설교하는 것은 할 일의 절반 밖에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구속구원에 대해 혼동하거나 로마서 425, 109절과 베드로전서 13절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칭의란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로운 자라는 법적 선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옛 사람은 죽고 그와 함께 새 사람을 입은 현재 완료형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는 선언이 종말적 선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Calvin에게 있어 칭의가 종교개혁의 핵심적 교리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지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행함은 인간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지만 행함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2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윤리와 도덕적(순종) 열매가 전혀 없더라도 처음 믿을 때 얻은 의는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켜주시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19:6), 성도( 30:4), 성별( 3:1), 성화(살전 5:23)라는 단어를 발견한다면 이는 대부분 ‘분리’, ‘따로 데어냄’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번역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뜻을 지닌 모든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잘라내다’, ‘이별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사물이 ‘거룩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세속으로부터 또는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거룩함은 단지 무엇으로부터의 분리만을 뜻하지 않고 무엇을 향한 성별’(따로 떼어내어 거룩하게 준비함)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 거룩함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20:7-8).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13절과 히브리서 21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성품, 즉 그분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같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그의 거룩하심( 11:44-45)을 알리시는데, NIV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who makes you holy)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너희를 성화시키는’(who sanctifies you)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란 사람, 장소, 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 즉 사람, 사물, 장소가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결별한 뒤 또 다른 차원의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보면 땅(호렙산)이 거룩해진 사건이 나오는데, 사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계시하시기 위해 따로 구별하신 장소였고( 3: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기 전( 19:10-14)에 시내산은 사람이나 짐승을 성결케 하신 곳이었습니다( 13:2).  성결은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안식일( 5:12)과 성막과 기구( 30:25-29), 성전(대하 7:16)과 도피성( 20)과 가옥(27:14)을 구별시켰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거룩은 사람이나 장소를 구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역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시는 장소(11:1)였기에 거룩한 곳이었습니다(4:5).  그리고 베드로전서 215-16절의 말씀처럼 ‘거룩’이란 단순히 도덕성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총임을 알 수 있는데(고전 6:11), 그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로 성결해지기 전에 그분이 먼저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2:11-14).  사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장소나 성전의 기물들 그리고 성전은 본래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성별된 사람은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28:9).

 

이렇게 구별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올 세대의 생명을 맛본 사람들로서 그 미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실현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양자 됨( 8:15)과 칭의( 5:1)가 그러하듯이 구속이란 이미’( 1:7)이며 동시에 ‘아직’인 것입니다( 4:30).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를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3:20).  이런 우리들에게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벧전 1:15-16),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 1:27)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삶( 5:27)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벧후 3:14).  비록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신자들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선언하지만( 6: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매일 죄와의 전쟁( 6:10-19)에서 주님의 승리( 8:37)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해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심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실질적인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기(벧전 5:8)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 12:14)과 죄를 정복함에 있어( 12: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습니다( 1:6).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칭의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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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해질 때 구원을 받는 사람과 정죄를 당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16:16), 이것은 복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24-29).  그래서 성경은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라고 말합니다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성경에 보면 바울 같은 사람은 복음에 반응하지 못했던 종교적 데러범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9:15),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23:43).  반면에 열 둘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은 선택 받은 가룟 유다( 6:12-16)는 돈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1:18), 복음 전파사역을 도왔던 데마 역시 바울의 조력자이며 필요한 존재였지만( 4:14),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했습니다(딤후 4:10).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서는 죽는 날까지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Martin Luther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첫째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지금까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도 당황하게 만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이 구절을 놓고 대략 다섯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  존재하는 일이 없는 상황을 가설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적인 배교를 경고한다는 해석  외관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신자가 아닌 거짓된 회심자라는 해석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잃는다는 해석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최우선적인 임무는 본문 말씀이 그것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본래의 의미에서 현재, 즉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의 압력 속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잠시 동안 동행하다가 고의적으로 돌아서서 주님을 거부하고 상반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배교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0:26).

 

그런데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던 이들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 이후에 원래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논쟁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John Calvin은 본문 구절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17:12). 확실히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중생의 영을 부어주시며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지고 장차 상속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보증을 받으며 똑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는 주님이 보호 하에 선택된 자들의 견인이 확실하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예를 들면서( 22:32), “한 번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말을 요약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타락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Michael S. Horton 역시 한번 구원받은 자가 항상 구원 받은 것이라는 원리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 이를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John Wesley는 본문을 주해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고히 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독자들은 분명히 전향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기독교 신앙과 체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따랐던 공허하고 무의미한 유대교 형식주의 되돌아가려는 것은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의도적인 배교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희망 없는 버림받은 상태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Explanatory Note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타락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사도는 고의적으로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다 버리고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10-11),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10: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부터 타락한 것이 고의적이며 완결된 행위였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속된 그들의 배교 행위도 고의적이며 지속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한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구원의 서정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지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누구든지 어떤 시점이나 상황에서도 가룟유다나 데마처럼 신앙을 배반하고(딤후 4:10), 타락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주의 신학자 Steven Harper도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면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졌던 믿음에 대해 칼빈주의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웨슬리주의자는 그가 거듭난 신자이지만 믿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목사들이 솔직해야 할 것은 믿다가 타락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누가 참되게 믿는 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구원을 받았는지 십원(?)짜리 동전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고후 13:5), 그것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9).  따라서 히브리 신자들이 유대교로 되돌아감으로써 배교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듯이,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이든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던지 혹은 믿다가 포기하거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6:16).  결국 누가 진실로 영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 성화와 순종을 강조한 Andrew Murray는 『The Holiest of All』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구원의 확증은 필요시 사용하도록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구원의 확증은 오직 사랑과 순종(계명)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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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을 웨슬리 계통 신학교에서 마치고 박사과정을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Calvinism 신학사상으로 무장된 교수들로부터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만이 정통 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다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오직 칼빈주의만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신학이라고 주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석두(石頭)교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습니다사실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John Gresham MachenCornelius Van Til, 그리고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W. G. T. Shedd 등등 개혁주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아갈 때 겸손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친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 교수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 만났던 모든 교수들은 겸손과 학식을 겸비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오늘날 같이 비루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사이비 칼빈주의자들과 다르게 교리적 논쟁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거만한 신학적 추론을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들은 종교적인 신학적 자긍심으로 인해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로운 논쟁을 일삼는 정통 칼빈주의가 아닌 골빈(?)주의사람들로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영원한 안전)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을 받고 성령의 의해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장된다는 칼빈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로 Calvin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견인교리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을뿐더러 끝까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 Saint Augustine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철저하게 보호받는 것을 『Of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도록 하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 전부터 이루어진 것이고(딤후 1:9), 그 놀라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17:4, 10:14),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 2:8)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11:29), 말한 것처럼 그분의 특권과 초대는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온전하고( 10:14)도 충분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2: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고전 15:3),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속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죄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3:23-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정죄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8:1-2),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많은 증거들을 내세웁니다( 22:32, 5:24, 6:37-40, 10:27-29, 17:6-11, 8:29-33, 35-39, 11:29, 고후 5:17, 1:4-5, 13-14, 1:6, 살전 5:23, 살후 3:3, 딤후 1:12, 4:18, 7:25, 10:14, 벧전 1:4-5, 요일 3:9, 유다서 2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부패되어 있고( 17:9),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6:44),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 2:1-3)에 타락한 인간의 중생 이전의 어떤 반응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러나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 13:48), 즉 바울( 9)이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16:14),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갖고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중생하도록 하는데( 2:8), 이렇게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러한 성도의 견인John Wesley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설교 『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고 고난 받는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용납 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Wesley전가된 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을 통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를 성경을 통해서 거부했는데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10』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는 말씀( 18:24)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후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10:26-29),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견인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1:22).

 

이렇게 웨슬리주의자들은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7:21-23, 10:33, 12:31-32, 24:13, 8:13-15,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2:1, 3:6-14, 6:4-8, 10:26-39, 12:14,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 3:5, 15-16, 22:19).  물론 이러한 구절들이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경우에 대해 신자가 죄(알려진 죄보다는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3:13),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통해( 3:12), 그분에게서 떠나는 배교의 행위가 있을 때( 26:14-16, 딤후 4:10)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철저히 회개를 하더라도( 13:3-5, 요일 1:9), 웨슬리주의자들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예정과 선택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렸고, 더 나아가 구원의 진행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9:11-13), 이 구원의 교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상하게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는 기계에 불과한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16:16),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환언하면 Calvin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것이고( 1:17), Wesley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대해 인간 책임을 강조합니다( 3:36).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볼 때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을 일치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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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동영상을 통해 하늘에서 보석이 떨어지고 손바닥과 얼굴에 금가루가 생기면서 아말감으로 메운 썩은 이가 금니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현상은 비성경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반대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간혹  자신의 이를 금니로 변화시킬 수 있든지 손 안에 금가루를 뿌려주고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 성분검사를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참고인 입회하에 어떤 조건으로 내기할 것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할 근거를 찾기 위해 기적을 구하는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평생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기적을 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조차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23:8),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기드온처럼 기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책망하지 않지만( 6), 마술사 시몬( 8:18-24)이나 바리새인처럼 기적을 구할 때 책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16:1-4).  여기서 비판적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권사나 서리집사라는 직분이 성경적인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일학교나 주보, 혹은 설교하기 전에 종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니나 금가루 현상을 바라볼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의문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기적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실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에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 중에 무슨 특별한 기적과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과대망상증에 걸린 말씀에 깊이가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니나 금가루와 같은 것은 하나의 표적일 뿐이지(고전 1:22),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다가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3:16)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24).  이보다 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초자연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왜 이러한 기적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고( 5:37), 다른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기적의 은사들도 사라졌다고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확실히 유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단지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기적의 은사를 철회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했던 야곱과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28:16).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들에서 교훈을 유도해 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그것이 말랐을 때 제자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기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21:18-22).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기적에 대한 응답 역시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적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적 목적들을 다시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면 첫째,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 둘째는 불신자 전도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마지막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그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그를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5:1-11).  사실 시몬은 장모가 병에서 고침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4:38-39), 주님의 가르침도 이미 들은 적이 있었지만( 5:3),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획량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기적은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분 안에 내재한 거룩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기적은 전도의 문을 열 때 사용 되었는데( 5:20), 복음서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적이 일어난 후에 그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 땅에 퍼졌고( 9:26),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씀 듣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9:31, 5:15, 4:30, 42, 6:2, 12:9-11, 17-19).  이와 동일한 일이 빌립의 사역 속에서도 일어났고( 8:6),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켰을 때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9:32-35),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냈을 때에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9:42).  더 나아가 기적은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해 주었는데( 5:36),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가치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이면서너희가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기적들의 증거에 근거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4:11).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실제로 믿음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11:45), 이런 기적이 항상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생기게 했으나( 12:11), 또 다른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표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11:48),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주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일 것인가에 대해 살인을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11:53, 12:10).

 

이렇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1:29-34), 사도들( 3:1-10)과 다른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이( 8:4-8), 1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러한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12:28).  달리 말하면 성령에 힘입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기능을 가졌었다면 왜 그것이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능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런 기적들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잘못 가르치는 목사들에 의해서 혹은 신학교에서 잘못 배운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기적과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듯이 기적을 확증하는 가치에 있어 지리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도 메시야가 영적이고 육체적인 치유가 행해질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35:6-7, 61:1), 이것은 다가오는 메시야의 나라는 나이,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짐은 결국 꿈과 환상과 예언하는 것이( 2:28-32), 어느 한 세대의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구약시대와 달리 이런 기적적인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주의 백성들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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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 준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는데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음식 규제인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하는 가운데 싸웠습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일깨워 줍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14:4).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오늘날에는 그 이슈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고전 6:9-10), 추가 규범이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혹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 혹은 문화적인 선입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물이 오염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이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논쟁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절대적이지 않는 이슈(성령세례, 칭의, 예정, 은사들, 천년왕국, 기름부음, 삼위일체)들을 가지고 거의 예외가 없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으로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처럼 서로 비방하는데 온 시간을 보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이러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로 복음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사와 신학자들인데,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쓸모 없는 교리는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무조전적으로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중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제한속죄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지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무제한속죄인지에 대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둔 강성 칼빈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19 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침례교의 다수의 견해가 되었던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인 타락과 견인론에 있어 완화된 견해를 수용하면서 칼빈주의 5대 논점TULIP의 다섯 가지 조항 중 가운데에 놓인 세 가지 논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강성 칼빈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합니다.  이들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올바른 확신과 안전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회심 이전의 인간의 자유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의 영원한 안전(견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알미니안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미 예정된 길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을 조금 지적한다면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신앙이나 고백하지 않는 죄, 즉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인 행위, 즉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저버릴 때만 구원이 상실된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쪽 학파들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강성 칼빈주의자들과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존됨을 기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웨슬리주의자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견인(안전) 교리가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을 일으킨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피구원자인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권은 요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2:9),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기에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부르심을 입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이 『Willing to Believe: The Controversy over Free Will』에서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논쟁 속에 엉뚱한 그룹들이 종종 서로를 잘못 설명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이해를 근거 삼아 돈키호테들처럼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 나는 칼빈주의자로서 종종 그것이 진정 칼빈주의를 묘사한 것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기에 동의할 수 없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듣는다. 따라서 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똑같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과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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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for all Nations의 창시자이며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는 아프리카 Lesotho에서 선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서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서 설교할 때 사랑하는 주님이 기적들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시작했을 때, 곁에서 통역하던 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임재 속에 쓰러졌고 성령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떠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  Bonnke의 사역 속에서 이러한 기적들은 계속 일어났는데 그는 기적은 우리의 흥미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그분이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약이라고 말하면서( 1:8, 18-19, 17-20), “기독교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적의 운동이며( 2:43, 3:1-10, 6:8, 8:6, 13:50-14:3, 고전 12:28-29), 신유의 기적, 구출의 기적, 변화된 삶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안다. 이러한 경이는 그분의 검증서이고 예수님이 불변하신 이상 그분의 능력과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까지 기적 행함의 은사는 교회에 남아 있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다른 세상 사이에 벽을 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특별히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오직 구속을 근거로만 기적을 행하신다.”

 

반면에 오늘날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B. B. Warfield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기적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죄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9절에 나오는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불신자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들을 수반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정말 죄가 되는가?” 그리고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고 건강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는데,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첫 번째 요구는( 12:38), 예수께서 마귀에 사로잡혀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직후에 나왔고( 12:22), 두 번째 요구는( 16:1),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신 후에 나왔습니다( 15:32-39).  다시 말해 두 본문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요청받으실 때 이미 두 가지의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누가 표적을 요청했느냐는 것인데, 마태복음 1238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고 164절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이들은 불신앙과 외식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요청이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려서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혹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것보다 더 인상적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기적은 없을덴데 그 이상의 표적을 또 구한다는 것 자체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불순한 의도가 마태복음 1228절에 대응하는 구절에서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고( 11:16), 표적을 구하는 두 번째 요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 8:11).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왜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분명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있다면 이 기적만큼은 조작하거나 속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약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면 그분이 메시야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치유 받은 눈먼 사람은 진짜로 눈먼 사람인지 혹은 그의 실명은 신체적 원인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사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에 대한 보고는 어떤 가벼운 속임수로 과장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들은 의심하거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의 속마음은 진정으로 표적을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표적 보여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불신을 믿음이 없는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9:16, 22).  그러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에수님께서( 2:24), 그들을 꾸짖고 계신 것은 표적들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악하고 불신하는 마음에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믿게 하신 것보다( 6:26),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적들을 행하셨던 적이 많았습니다( 8:1-3, 2:5, 10:52, 7:9, 8:48).  그러므로 만약 표적들을 소망하거나 심지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신약교회는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고.( 4:29-30), 이 기도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지진을 수반하는 표적과 기사들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며( 4:31), 사도행전의 연이어진 표적과 기사들의 흘러 넘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12).  더 나아가 기적적인 일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방법과 올바른 이유들을 위하여 기적들을 구할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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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Jones와 사역한 바가 있는 전기 작가이자 부흥 신학자인 Iain Murray는 『The Life of Arthur W Pink』에서 20세기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Arthur Pink 진술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그가 회심하기 탁월한 영매였으며, 훗날 그가 회심하고 거듭나면서 자신이 의사소통했던 영혼들과 다른 영매들이 부르는 모든 영혼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이 아닌 바로 악한 영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안에 거주할 사람을  귀신들린 자( 4:24), 악한 영에들렸다라고 말하는데( 9:17, 4:33), 이런 귀신들이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은 축귀 사역에서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1:23-24).  예를 들어 보통 악한 영들은이것은 집이다( 12:43-44), 혹은나는 여기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주고 하나님의 자녀이기(벧전 1:18-19, 고전 6:19-20), 마귀의 소유물이 없을 뿐더러 무단 침입자인 귀신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법적인 권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이며 진정으로 귀신들린 자녀의 부모처럼 귀신을 내쫓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9:18-26), 어떤 마귀도 인간의 육체를 집으로 삼고 거주할 수는 없습니다( 4:7).

 

이렇게 귀신들의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귀신축출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고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셨기 때문에( 5:19), 사실 축귀사역에 있어 꼭 이렇게 해야만 귀신이 쫓겨나간다라는 공식은 없습니다.  Charles H. Kraft는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귀신축출이라는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사역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들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로서는 아주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축귀사역에 있어 비밀스러운 공식은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귀신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14:12)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오직 성령의 능력( 12:28)과 그리스도의 이름( 10:17)을 힘입을 때만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귀신들린 당사자 편에서의 협조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Robert G. Tuttle는 『The Partakers』에서귀신을 쫓아낼 역량을 가진 사람은 그 같은 직임을 세심한 주의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많은 기도와 금식 후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9:29),  Lloyd Jones 역시성령의 비상한 활동이 있을 때마다 귀신들림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누가복음 1120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하나님의 손을 힘입어라는 말은 마태복음 1228절에서는성령을 힘입어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언제나 성령을 힘입어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5:17, 10:38).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놀라운 권세가 우리 믿는 자에게 실제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있느냐는 것인데, 이것을 알려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귀를 물리친 권세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마귀를 이기셨고( 4:1-13), 십자가가 바로 마귀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순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2:15, 2:14, 12:11)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완전히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마귀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6:11).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 십자가가 견고한 영적 발판이 된다는 것으로( 2:15),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3:26).  한 마디로 칠십 인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10:17-19), 우리에게도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0:17).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귀를 대적할 것을 말했고(벧전 5:8-9, 4:7), 바울도 신자 모두에게 영적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6:10-18).  사실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인데( 10:10),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귀신을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16:17),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딤후 1:7), 더 나아가 귀신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요일 4:4).  이런 문제를 가지고 John Wimber귀신들에 대한 권세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능력에 있고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귀신들을 이기기에 필요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고( 16:17-18), Maxwell Whyte사탄과 귀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을 능가하는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권세를 받고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복종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지극히 높으신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11:22-24, 18:18-20)과 그분의 보혈의 능력에 대한 확신( 12:11), 그리고 우리가 부여받은 악을 대적할 권세를 사용할 용기( 10:19)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믿음( 10:38)은 어떠한 종류의 마귀의 억압이라도 물리쳐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일곱 가지 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실 수 있고( 4:1-11),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종종 마귀의 공격을 물리쳐 주시기도 하지만( 13:10-16),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더러운 영들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대적하면 그는 물러갈 것이고(요일 4:4),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간단한 명령이면 족할 때가 있으며( 16:18), 어떤 때에는 악한 영에게 떠나도록 명령하는 과정에서 주님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4:1-11).  결론적으로 성경은 귀신을 제거해 주기를 기도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고( 1:12), 하나님의 자녀는 그 주신 권세를 가지고 요한복음 14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얼마든지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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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The only proof of the new birth is the new life).  James Edwin Orr의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담긴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고(롬 3:24),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롬 6:11-14),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데(마 7:21),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막연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의 결정적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원의 총체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초의 범죄(롬 5:12)로 야기된 죄책에 시달리는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현재 신분(롬 3:9)과 그 비참한 현재 상태(히 2:15)의 극복을 말하는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 각자의 전인격은 물론 전우주의 갱신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자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창 3:15),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창 1:4)전부터 종말(히 9:28)까지의 전 역사에 걸쳐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는 장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할 때만이 그 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모든 관련 사항이 온전히 시사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구원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대해 세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엡 2:1),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엡 2:13),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이 있고(롬 10:10), 두 번째는 이미 구원을 확증 받은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인(벧전 1:15-16), 성화에 힘쓰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의 구원이 있으며(빌 2:12),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각각 구원을 받지만(롬 10:9), 그 구원이 최종 실현되는 곳인(계 7:5-17), 천국에서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히 9:28).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으로서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까지의 사건이 발생하는 단계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인 성화견인, 그리고 천국의 도래로 구현될 영화의 구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또한 이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30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의 가능성, 즉 ‘미리 정하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지, 일목요연하게 그 순서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한때 온갖 종류의 죄와 욕정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 안에서 씻겨 졌고(washed), 깨끗하게 되었고(sanctified),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씻김’‘깨끗케 함’ ‘의롭게 함’의 과정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순서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잘못된 것이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인 ‘칭의’보다(롬 4:6),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며 오랜 기간의 과정을 통해 죽을 때 완성되는 ‘성화’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롬 6:19-22).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정통신학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눈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그들이 거듭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괄적으로 밝힌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설사 성화의 열매가 없거나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의 타락 가능성이 전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칭의와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삶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은 열매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류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빌 1:27),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눅 6:46),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절들 중에 핵심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5장20절과 7장21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4-6절 등을 내세웁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온전한 수확,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받도록 예약된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 때 받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는 가운데(롬 5:1),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고전 10:12), 더 나아가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완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25:30).  한 마디로 ‘이미’ 얻은 온전한 칭의를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궤설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피로(요일 1:7), 단 한 번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에(히 10:10),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요일 5:18), 많은 성경구절 중에 요한복음 5장24절과 10장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과 에베소서 1장4절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는 법적인 선언(롬 4:6), 즉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엡 2:13),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번 내린 의로운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자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종 구원이 열매(도덕적 행위)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보적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신학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부류는 칭의를 단회적 사건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단회적이 아닌 점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가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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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칼빈주의자들 못지않게 진리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던 나에게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받은 은사들은 비록 성숙하고 잘 다듬어지는 과정이 없었지만 예배 때마다 교회 성도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 한분이 다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이 어느 동양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저 휘어지고 걸을 때마다 온 몸이 휘청거리는 저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집사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병자를 데려오려면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발목이 삔 사람 아니면 기도해도 쉽게 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려 왔을까 오늘 기적이 일어날까?”  이렇게 그 동양인 여성을 앉혀놓고 기도를 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적을 간절히 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않았고 이 단어가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표준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그날 ‘쪽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비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야는 이집트와 구스에 대한 예표로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고(사 20:3),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호 1:2), 엘리사의 유골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려냈고(왕하 13:21), 베드로의 그림자는 병자를 치료했으며(행 5:15),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행 19:12).  그리고 이것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누군가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를 닮은 네 가지 생물들이 있는데 각각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차 있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변을 주야로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계 4:6-8), 아마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증세가 심한 병자로 판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이치에 맞는 성경적 환상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려오는 모든 이상한 것들을 다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일 4:1),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상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든지 비성서적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기적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인데(출 10:2), 예를 든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눅 3:18-20), 헤롯처럼 눈으로 보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인지(눅 23:8), 아니면 마술사 시몬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8: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은(요 2:11), 복음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요 4:29, 행 8:4-8, 9:35, 42, 히 2:4),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마 14:14, 20:29-34, 눅 7:11-17), 복음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마 8:15, 행 9:36-43, 빌 2:25-30), 얼마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9:8, 요 9:3).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요 6:1-5), 주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고(막 6:30-44, 눅 9:10-11),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눅 9:1),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7-8).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기적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행 4:29-31).  더 나아가 룻다에 있던 제자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은 후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던 적이 있으며(행 9:36-43), 야고보 역시 교회의 장로들에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약 5:14-16).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적인 응답이 언제나 일반적인 방편, 즉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사 38:21), 더 낫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눅 5:31),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움을 위한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6-7).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히 4:16)라는 말씀처럼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신(시 91:15),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과부의 기도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겠지만(눅 18:1-8),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다윗처럼 신중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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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는 말씀에 기뻐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신자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눅 6:46), 귀신들이 결코 억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저 이 구절을 가지고 자신을 옹호하는데 사용합니다(요 10:28).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지 않는 자유를 신학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뿐이지(마 7:21), 만약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울 왕처럼 얼마든지 원수의 시험과 억압을 대적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삼상 16:14, 18:10).  한 마디로 이 약속의 말씀(요일 5:8)은 믿는 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요일 3:21-22).  그래서 베드로는 한 때 자신이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마귀에게 이용당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충고를 한 적이 있었고(벧전 5:5-9),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에게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 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주의 자녀라도 교만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얼마든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7-12).  다시 말해 십자가로 인해 신자들이 악의 세력에서 무장해제 된 것은 사실이지만(히 2:14-15), 아직도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엡 6:12).


사실 마귀는 닫혀진 문을 통해서는 들어올 수 없고 베드로나 가룟유다와 같이 책 잡힐만한 행동을 했을 때(마 16:22) 들어오게 되는데(요 13:27, 30), 가령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마귀를 만나거나 또는 집을 찾고 있는 귀신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영적전투에는 일정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요 8:44), 사탄 나라의 조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엡 6:10-13),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악의 세력에 의한 영적인 속박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Thomas White는 영적인 속박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네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한 우상숭배, 분노, 증오, 원한, 성적인 방종과 조상의 죄가 후대에까지 물려 내려온 경우,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범죄인 강간, 근친상간, 폭행, 더 나아가 마귀의 공격목표가 된 목회활동이다.”  그러면서 처음 세 가지는 사탄의 계략이 인식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공격과 억압을 잘 분별하는 가운데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누군가가 귀신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탐욕과 거짓말로 가득 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죄 문제를 간과할 수 없고(행 5:3), 이것은 저절로 생겨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Occult Bondage and Deliverance』의 저자인 Kurt E. Koch 박사는 정신병 환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하는데 있어 중요한 점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악령들이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하여 감추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정말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철저히 감추려하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마귀는 아주 교활하고 간교하며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요 10:10),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고후 11:14), 마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였던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처럼(요13:2, 27, 행 1:25),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전쟁을 경험해 본적이 없거나 성령의 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목회자에게는 이 말이 조금 비위가 거슬리거나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Maxwell Whyte가 말한 것처럼 만일 우리가 육체의 속성에 굴복하여 손과 눈과 귀를 그 속성에 내어준다면 그 특정 부위에 해당하는 귀신들이 그 부분을 차지해 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간이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과 금을 보고 탐내듯이(수 7:21), 정욕의 귀신은 눈을 점유하고(요일 2:16), 이렇게 들어온 귀신은 신자의 선한 판단을 거스려 죄악된 행위를 점점 더 많이 행하도록 계속 부축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음란한 영화가 시각이나 청각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오도하고 색욕을 자극하여 마귀가 역사할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12:43-45).


따라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악 가운데 살아갈 경우에는 그들이 사탄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귀신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귀신이 신자의 삶 가운데 발판을 마련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빨리 몸에 침투하는 방법은 죄를 통해서인데(갈 5:19-21), Francis MacNutt 박사는 이것을 ‘체내 침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신들이 체내에 침입할 수 있는 근거로 John WimberKevin Springer는 『능력치유』에서 여러 가지 죄악된 행동들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분노와 타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자기혐오, 그리고 복수심과 탐욕과 성적인 범죄와 변태적인 행위, 즉 성도착증, 동성연애, 동물과의 성교행위, 더 나아가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을 통해 귀신의 영향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어 놓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나는 악령이 들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그들에게 자신과 또는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 ‘밀교’나 ‘사교’ 특히 동양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이 없었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것들에 관련된 경험이 있을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귀신들림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밀교(密敎)에 관련된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성경구절 출애굽기 20장3-5절, 레위기 19장31절, 20장6-8절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는 과정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계속된 불순종으로 인해(삼상 13:8-14, 15:17-23),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삼상 16:1),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6:14).  신약에 와서는 초대교회의 신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그 모든 수입을 교회를 위해 헌금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이들 마음속에 탐욕이 생겨 그 돈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남겨 놓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을 때, 베드로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 이들의 잘못을 알아내어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쉽게 말해 탐욕이란 죄 때문에 이들 부부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들의 마음을 거짓말과 속이는 영들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의 영을 시험한 것입니다(행 5:4, 9).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이와 같은 일이 생길 수 있고(살후 5:19, 히 10:29), 무엇보다도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육체에게 죄짓는 것이며(갈 5:19-21), 그런 죄를 통하여 마귀가 침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의 본성에게 죄를 짓는 것(막 7:21-23)과 마귀에게 공격당하는 이중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날마다 점검하는 가운데 죄와 싸워야 하고(히 12:4),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겸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막 16:17).


오늘날 마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을 공격하기 위해 땅에 두루 돌아다닌 것처럼(욥 1:7),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을 통째로 멸망시키려고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렇다면 마귀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삼키고 파괴시킨다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고 내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가?”(요일 4:4)라는 신학적 강령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것은 논쟁이 심한 신학적 문제이긴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경고를 했고(딤전 4:1), 성경은 귀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든지 미혹할 수 있으며 신자들 역시 ‘귀신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고후 11:3-4).  예를 하나 더 들어 마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와서(고후 11:14), 신자들을 미혹하여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귀신들과 영적간음을 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데(약 4:4),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남편/아내)이 유혹에 넘어가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을 범하여 한때 신실했던 부부관계가 깨어진다면 그는 이미 간음케 하는 귀신에게 복종하고 굴복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적의 진영, 사단에게 속박되어 있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눅 4:5-7), 육체의 본성과 욕구를 철저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갈 5:24), 마귀는 그것을 발판삼아 우리를 공격하고 억압하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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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큰 재앙과 그 결과로 일어난 그의 백성들을 그 나라로부터 인도해 내심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었던 표현이고(신 4:34, 6:22, 7:19, 23:9, 26:8, 34:11, 느 9:10, 시 135:9), 신약성경에서도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행 2:22)과 사도들(행 2:43, 14:3, 15:12, 롬 15:18-19:2, 고후 12:12), 그리고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의 사역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활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과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경탄하게 만드는 ‘기사’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그저 한두 가지의 기적이나 치유가 일어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발생했던 장소, 예를 들면 사도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손으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행 5:12),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헬라파 유대인 빌립(행 6:5)이 많은 기적을 행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표적과 기사들은 복음의 선포와 관련하여 신앙부흥이 한창일 때 일어났는데(행 2:43, 5:12, 6:8, 14:3), 이 기적들이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제외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사람들 중에 사도가 아닌 일반 평신도인 스데반과 빌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해 B. B. Warfield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켰는데 『Counterfeit Miracles』에서 “특별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가 아니라 소수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기록을 볼 때 매우 분명하다. …사실상 사도의 교회나 혹은 사도 시대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은사들은 분명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사들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인정된 대리인들로서 사도들 자격 인정물 중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은사들의 기능은 그들을 사도의 교회에 분명히 한정시켰고, 사도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은사의 목적은 사도들을 믿을만한 교리 선생들로 확증하는 것이었고 사도들이 죽었을 때 그 은사들도 그들과 함께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표적과 기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행한 많은 기적들을 말하고 있는데(막 6:7, 행 5:12, 19:11-12), 솔직히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스데반과 빌립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행 6:5-6), 이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 6:8, 8:5-8).  여기서 질문할 것은 Warfield와 그의 신학적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표적과 기사의 주요 목적이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이었다면, 왜 사도가 아닌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Warfield와 오늘날 그의 계승자들이 Jack Deere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도들이 안수했기 때문이고(행 6:6),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의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은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사들이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이 기적들을 행해야 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만약 사도들 외에 어떤 사람이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도구로서의 표적과 기사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중단론을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목사/신학자들 가운데서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이 궤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행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은사들의 목적을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같은 부류인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인용한다면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두 제자와 달리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속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회의 설립자입니다(엡 2:20).  그리고 대부분의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행 1:12-14), 여기서 궁금한 것은 “만약 소수의 사람만이 교회를 세우거나, 제자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도 끝났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은(마 28:18-20), 세상을 복음화하고 가르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4:47, 행 1:8).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눅 10:17-19), 만약 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적적인 은사를 받거나 이 은사가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본문구절은 상당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의도하셨다면, 왜 사도가 아닌 칠십 인에게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었고 사도들과 친분을 쌓거나 사도들 집단의 공식적인 멤버도 아니지만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막 9:38-39).  이것은 기적이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다는 이론에 대한 중요한 예외가 되는데,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역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스데반과 빌립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다섯 사람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행 2:43), 다른 사도들 역시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5: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아나니아는 기적적인 사역을 한 비사도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비교적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율법을 헌신적으로 지키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행 22:12).  그가 사울에 대한 사역에서 그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행 9:10-18), 이외에도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의 손에 의해서인 것처럼(행 9:17), 사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열 두 사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 아나니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 즉 사도들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기적들이 사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신학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고, 더 나아가 사도행전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로지 사도들을 통해서만 주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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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글에 가명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댓글을 남기면서 익명성 뒤에 숨으려하는 좋지 못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정상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언제나 가명보다는 실명을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댓글을 달 때 실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예의에 벗어난 댓글을 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에 쓰여진 댓글들을 간혹 읽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욕설을 무차별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신자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엡 4:18),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불신자 못지않게 비난이나 악성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사람은 ‘말기증상’은 아니지만 귀신들릴 수 있는 ‘초기증세’라고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 3:15)라는 말씀처럼, 만약 이런 행동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이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측면을 다루기 위해 마음의 치유와 귀신축출 사역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은 자신의 삶을 조금도 그의 수중에 넘겨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접근할 길이 없지만(벧전 5:8-9), 가령 마음속에 상대방에 대한 미움, 원한, 복수심, 두려움 등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사단에게 역사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엡 4:26-27).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믿었던 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은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 13:25-27).  마찬가지로 귀신들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막 5:1-20), 그러한 사람에게 귀신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증세들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귀신에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귀신들린 것처럼 보이는 증세라고 해서 모두 귀신이 역사한 결과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귀신들림’인지 아니면 ‘정신병’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고(마 4:24, 막 1:34), 귀신들림이 영적인 현상이라면 정신질환은 육체적인 병이기에 귀신들림은 축귀사역을 통해 ‘영적치유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정신질환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귀신들림과 신경학적 증상인 뇌전증(epilepsy)이 결합하여 발생할 수도 있지만(마 17:14-18), 이런 경우에는 영적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하고, 단지 문제가 되는 행동이나 증세만 보고 그 원인이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단에 의해 좋은 추측을 만들 수는 있지만 영분별의 은사(고전 12:10)를 받지 않는 이상 성령께서 이런 면에 도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Frank Hammond는 『Pigs in the Parlor』에서 축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일곱 가지 징조들에 대해 이렇게 제시합니다.  ① 감정적인 문제들 (증오, 분노, 공포, 거절, 질투, 우울증, 걱정. 열등감, 불안감), ② 정신적인 문제들 (정신지체, 우유부단, 타협, 혼란, 의심, 기억상실증), ③ 언어상의 문제들 (거짓말, 저주, 신성모독, 비평, 조롱, 악담, 험담, 비방), 성적인 문제들 (정욕, 변태, 동성애, 자위행위, 호색, 간음, 근친상간, 매춘, 흥분제 사용, 공상적인 성경험), 중독증 (마약,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약물, 음식), 육체적인 질병들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니지만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던 여자 / 눅 13:10-17), 종교적 오류 (거짓종교/집단들, 기독교 이단들, 신비주의와 강신술, 거짓교리, 사이비). 반면에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위에 열거된 것들 외에 두 가지를 더 추가시켰는데 하나는 생리학적 요인(간질, 편두통, 건망증, 노쇠현상, 조울증, 스트레스, 피로증후군, 월경전 증후군)과 상황적 요인(결혼생활의 파탄, 가족 간의 불화, 재정적인 압박, 가족의 질환, 계절적인 스트레스, 불순한 일기, 우울한 사회분위기) 등을 제시하면서 귀신의 역사로 인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심리적, 정서적, 생리학적 요인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나타남에 의해 직면되어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증세들(심하게 귀신들림)을 열거해 본다면 Francis MacNutt가 말한 것처럼 ‘신체적인 뒤틀림’‘목소리의 바꿈’ 그리고 ‘얼굴의 표정’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체적 뒤틀림의 현상에 대해 찾아보면 마가복음 1장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체적인 경련 즉 돌발적인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인정하며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혹은 기도모임에서 평상시 그런 일이 전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귀신에게 억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래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누가복음 8장28절에 보면 거라사의 광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상시 음성하고는 전혀 다른 매우 부자연스러운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귀신들린 여성에게 축귀사역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말을 하거나 혹은 비열하고 무례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귀신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것의 가장 흔한 외부적인 표시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인데, 만약 상담을 받던 사람이 대화중 더 이상 상대방의 눈을 보려하지 않고 눈이 위로 말려 올라가 섬뜩한 느낌의 흰 자만을 보일 때, 이것은 축귀사역자에게 도움 받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징후로 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인 예로 마귀의 출현에 대한 또 다른 징후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치유사역자인 Francis MacNutt 박사는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더러운(좋지) 않은 냄새와 무엇보다도 싸늘한 냉기이다. 성령 하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종종 뜨거운 열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악한 영이 나타나면 방안에 차가운 냉기가 돈다.”  이외에도 귀신들린 사람의 증세는 엄청난 완력을 보여주기도 하고(눅 8:29, 행 19:16),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막 5:6-7, 행 16:16-18), 말을 하되 ‘나’ 대신 ‘우리’ 라는 복수로 말을 사용하는데(마 8:29), 자신을 일인칭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이인칭, 그리고 자기가 내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삼인칭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눅 8:27-28).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징후들이 나타날 때 그것이 마귀의 행동 결과인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합심 기도할 필요가 있고(약 5:14), 아니면 더 숙련되고 경험이 많은 축귀사역자에게 보내야 할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악한 영의 출현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이 있다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처럼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이지만(고전 12:10), 문제는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논쟁이 심한 틈을 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대부분의 교회가 마귀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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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 Kraft는 기적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다.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유, 귀신축출, 천사의 보호,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인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죄인을 용서하는 일,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는 것, 세상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의 관점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에 있어서는 서양적인 시계관이 그렇게 하듯이 우주를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특면을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물을 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준에 따라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나오는 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고 계신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의 선봉에 서있는 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에서 “성경 속에서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다음 세대들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는다. 혹은 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의 어떤 기적적인 표현들을 구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다시 인용하면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 의하면 은사들은 교회를 강화시키고(고전 14:4),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고전 12:7),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MacArthur는 다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신자들의 강화를 위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가? 아니다. 사실상은 진실은 정반대의 것이다.”  사실 MacArthur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가 교회를 강화하는 목적에 대해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관련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7절과 14장3-5절에 관하여는 결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인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읽거나 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은사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거나(엡 4:13), 진보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는 진리의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고(막 16:14-20),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역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요 14:12),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리새인처럼 눈에 아무리 낯설게 보일지라도(마 12:22-24), 그 일을 우리가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행 5:12)과 예수님의 제자들(행 6:8, 8:6)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하는데 있어 능력 나타남과 기적적인 은사가 필요했고(행 8:12-13), 교회의 탄생, 즉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는데 필수적이라면(막 16:17-20), 오늘날처럼 죄악이 넘쳐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마 17:17)에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엡 4:13),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14:11),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행 9:36-42).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을 했고(행 9:29),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행 17:1-4).  구약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전도할 때(행 17:16-18), 바울은 어김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지만(행 18:19), 반면에 이방인을 다룰 때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롬 15:18), 말씀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Palmer Robertson은 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람 마음 가운데 확신하는데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인데(행 8:4-8), 그 사례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행 14장)와 귀신들린 여종 사건(행 16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 앞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희한한 능을 행할 때였습니다(행 19장).  이렇듯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다른 권위와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24-25).


D. A. Carso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라고 상기시켰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만 한정되어 있다거나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또 다른 이유로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목회 서신이나 바울의 후기 서신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할 것과 신약성경의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교리를 서신서 위에만 세워서는 안 되고 서신서들은 반드시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눅 17;17), 분명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고전 15:1-4),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반드시 필요하고(막 16:20), 이렇게 교회 속에 나타난 은사들은 결코 진리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전 2:4).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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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악의 유혹과 시험에 부딪치고 있으며(벧전 5:8), 때로는 마귀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기에(엡 6:10-18),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자녀들에게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악한 마귀의 흉계를 경계하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해 Louis Berkhof는 “어둠의 세력들인 타락한 천사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항하며 선택된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고 그릇 인도하려고 하며 또한 죄인들을 자극하여 악을 행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관적인 편집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흘러야 하지만(고전 14:15), 문제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의 길을 가로 막고 있을 때 그 귀신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Lloyd Jones는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에서 “천사나 성령이나 심지어는 모든 영적인 영역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인격과 영적인 영역을 믿으면서도 귀신들림을 정말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시달리거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경멸적인 어투로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사로잡히다’라는 말은 고통당하는 자를 귀신이 꼼짝달싹 못하게 완전히 차지해 버린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막 5:2,16, 18), 이것은 불신자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어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로잡힘’이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괴로움’‘속박’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용어상의 문제로 발생하는 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C. Fred Dickason는 『Demon Possession and the Christian』에서 “‘다이모니조메노스’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마귀가 ‘들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마귀가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다양한 차원의 지배를 통해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로잡힘이라는 개념은 신약의 용어나 그 용례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건실한 이론을 제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혼동과 정서적인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말보다는 ‘귀신들리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 즉 귀신에게 억압과 속박을 받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냐는 것입니다.  먼저 ‘들리다’(have)라는 말을 고려해 볼 때 이런 비유가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령 집에 달갑지 않는 방문객을 갑작스럽게 ‘맞아들일’ 경우가 있는데 만일 생쥐 한 마리가 집에 몰래 ‘들어와 있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들어와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더러운 쥐 한 마리가 집을 장악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짜증이 나는 귀찮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난 빨리 쥐덫을 놓아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도 달갑지 않는 불청객인 귀신들의 방문을 욥이 받은 것처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욥 1-2장).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는 자신이 사단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한 적이 있는데, 물론 베드로가 그 당시 사단의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해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막 8:3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단이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것처럼(요 13:2, 행 1:25), 베드로를 청구하려고 애썼고(눅 22:31-32), 그가 선한 의도에서 예수님을 견책했던 그 순간까지도(마 16:22), 틈이 있던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악령이 결코 한 사람 안에 함께 거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마귀가 거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과 혼과 몸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보면 먼저 ‘영’(spirit)을 뜻하는 신약적 단어는 pneuma(눅 8:55)로 육적인 것, 즉 혼과 대조해 볼 때 영은 거룩한 것들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부분인(고전 2:14), 반면에 ‘혼’(soul)을 뜻하는 단어는 psyche(살전 5:23)로 생명 그 자체, 즉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정의하고 있는데(히 4:12), 성경에서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은 허물과 죄악 가운데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2:1).  쉽게 말해 육체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엡 4:18).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롬 6:4),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영에 자신의 생명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요일 5:11-12).  이것으로 볼 때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성령은 우리의 영속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고전 12:3), 이렇게 거듭난 자는 구원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요 3:6), 그와 동시에 일정 영역은 특정 죄에 의해 귀신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벧전 5:8).


예를 들어 바울은 신자의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 가르쳤는데(고전 3:16),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적으로 오염될 수 있는 성전의 ‘바깥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막 11:15-17), ‘인간의 혼’은 성결한 제사장이 접근할 수 있는 ‘성소’에 해당되고(히 9:6), ‘인간의 영’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성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 9:7).  만약 제사장의 삶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듯이(레 10:1-7), 사단도 전능하신 그분의 거룩함으로 충만한 지성소와 같은 인간의 영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민 18장).  같은 맥락에서 영원한 구속을 위해 성별된 영은(요 5:24), 여전히 타락의 가능성을 지닌 혼과 몸과 구별되지만(살전 5:23),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에 속박되거나 부분적으로 귀신들릴 가능성(억압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Calvin 역시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단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영은 성령으로 점유될 수 있는 반면에 혼과 육(요일 2:16)은 아직 그분의 주권 하에 온전히 항복시키지 않았습니다(롬 7:19).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요 5:24, 골 1:13), 아직 혼과 육체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빌 2:12), 죄악 된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 구석에 얼마든지 악한 영이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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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3박4일 동안 연합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수련회 이틀째 되는 날 오락시간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편을 가르고 밀가루 속에 있는 사탕을 집어 먹는 게임을 하다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혼자 수양관 이층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는 당시 고등부 선생 한분이 허겁지겁 상기된 얼굴로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 아이가 쓰러져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전도사님이 가보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는데 쓰러진 학생 곁에는 언니만 울면서 남아 있고 선생님 몇 분은 어찌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루는 가운데 그 많던 학생들은 무서워서 도망갔거나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쓰러진 여자 학생의 얼굴을 보니까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상태에서 입에 거품을 흘리고 눈은 뒤로 젖어져 흰자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입고 입던 바지는 소변으로 인해 다 젖었고 얼굴은 예전 얼굴이 아닌 완전히 뒤틀린 상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런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은 신학교 졸업반 때 한두 번 가진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축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학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전 “만약 이 학생에게 들어간 귀신이 나한데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면서 그 짧은 순간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있는 선생님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전도사님 빨리 기도하세요.”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고, 솔직히 “기도하고 싶으면 먼저 손을 얹고 기도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선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얼떨결에 손을 학생 머리 위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은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쓰러진 학생 입에서 이물질이 나오고 큰 숨을 한 번 내어 쉬더니 눈이 뒤집혀진 얼굴이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몸을 떠는 현상이 멈춘 것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좋고 충성스러운 일군이기에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분들이시고 귀신에게 억압을 받았던 학생 역시 매주일 주일학교에서 예배드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최종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벧전 1:17), 이들 가족과 3년 이상 같이 신앙생활을 해왔었기에 이들이 믿음의 가정인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자녀도 귀신이 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Thomas B. White가 말했듯이 악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회심할 때(골 2;15), 이미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셨고(롬 8:37-39),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며(고후 5:1-5), 하나님의 자녀는 John Calvin이 말한 것처럼 “신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둔다.”라는 말과 같이 고난 속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롬 8:18-39).  그러나 악에 대한 경험적인 승리는 믿음의 실천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의 백성들이 쟁취해 나가야만 하기 때문에(엡 6:10-13), 우리는 누군가 회심하면 마귀가 그에 대한 음흉한 계획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존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롬 7:17-24)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악과 씨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벧전 5:8-9),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과 죄의 결과를 치유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죄지은 과거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요일 1:7), 여전히 강박적인 행태와 정서적인 손상, 그리고 법적인 복권 등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는 용서받았지만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약 4:7).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문제로(롬 7:17), 이 죄는 하나님 자녀의 삶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귀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행 5:1-11).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견책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대적하셨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똑같이 말씀하셨는데(막 8:33), 이것은 주님을 구하려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의도는 좋았고 진실했지만 그 순간 그는 사단에게 틈을 주고 도구로 이용을 당하다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지만(마 16:16), 사단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마 26:69-75).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굴복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말 가운데서(마 26:33-35), 사단에게 틈을 보였기 때문이고(눅 22:24-34),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죄는 마귀로 하여금 신자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엡 4:26).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요일 5:18).  사실 사람들이 혼동하거나 문제가 되는 용어는 악한 영에게 ‘들렸다’라는 말과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라는 말인데, 실제로 영어번역본들 가운데는 ‘귀신들림’(have demon)을 ‘귀신에게 사로잡힘’(demon possessed)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막 9:17, 눅 4:33), 이것은 원본에 대한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어에는 그런 의미를 반영하거나 표현을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성경은 귀신 ‘들리다’라든지(마 11:18, 요 7:20, 8:48-49, 10:20), 아니면 마귀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심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눅 8:27), 마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A. A Hodge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들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고통을 주고 괴롭히며 시험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막 5:1-20),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용어의 문제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눌려버린 뜻을 지니고 있기에,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귀신들린’ 상태를 나타내는 헬라어를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로잡힘’이 아닌 ‘귀신들리다’가 되지만(마 4:24, 막 1:32, 눅 8:36, 요 10:21), 보통 사용하기 적합한 용어는 ‘귀신에게 시달리다’ 혹은 Francis MacMutt 박사가 말한 것처럼 ‘마귀화 되었다’로 이는 어떤 형태로든 악령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가운데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Mark I. Bubeck는 ‘귀신들림’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말이 신자에게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은 그 속박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당하거나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이 한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마귀에게 정복당했다는 의미로서 그에게 옳은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라면 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힌다는 개념은 성서적인 것도 아닐뿐더러(요일 4:4),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바 된 이후로는 죄가 다스리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여러 가지 차원의 마귀의 공격과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고(눅 4:2, 고후 12:7, 엡 6:12, 약 4:7), 만약 마귀에게 죄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결코 사로잡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귀신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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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imber에 의하면 1982년 6월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세계복음화로잔위원회 후원으로 이루어진『전도와 사회적 책임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회의』에서 27개국으로부터 50여명의 지도자들이 Grand Rapids, Michigan에 모여 복음의 사회적 표적을 토론했는데 그들의 최종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표적은 귀신축출이다. 우리는 귀신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비신화하는 것을 반대한다. 정사와 권세가(엡 6:12), 비록 악마적 이념들이나 구조들을 언급하는듯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하게 귀신의 명령에 따르는 악한 개인적 지성이라고 믿는다. 귀신들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상황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대결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1989년 7월 Manila, Philippines에서 있었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2차 로잔대회에서 영적인 전투분야를 담당하고 세미나를 인도했던 전문사역자인 Thomas B. White도 “구원받은 자들의 임무는 깨어 무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적의 술책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서와는 달리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는 현실만을 인정하려는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귀신들의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며, 특히 ‘신자의 귀신들림’에 대한 그와 같은 현실을 믿는 것은 고대문화와 성경이 가르친 진부한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체로 회의적인 견해를 취하며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을 ‘비신화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Rudolf Karl Bultmann은 마귀와 천사의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존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고대의 신화들이고, 신약성경의 메시지에서 그와 같은 모든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비신화화 시켜 현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Kerygma and Myth』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힘과 법칙들이 발견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선한 영이건 악한 영이건 할 것 없이 도대체 영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병과 그 치유는 모두가 자연적 인과율에 돌려야 하는 것이지 마귀의 장난 혹은 악한 귀신의 저주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니다.”  지금 Bultmann이 제시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로 된 신약의 세계관을 신화라고 비판하고 과학과 인간 자율사상에 근거하여 신약을 재해석함으로써 사단이 없는 현대에서 인간 스스로 무엇이든지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낙관적 인간관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는 찾나니’라고 말하는데(벧전 5:8), 사실 귀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거짓을 무기로 사용하는 귀신에게 속은 것이고(요 8:44), 만약 우리의 오감을 가지고 그와 같은 관여를 느낄 수 없다면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듯 Bultmann이 귀신이 없다고 선언한 반면에 또 다른 극단은 악한 사람의 죽은 영이 귀신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류와 아담 이전에 살았던 인류의 영 혹은 노아 홍수 이전 사람과 천사 사이에 태어난 존재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질병과 사고와 고통이 귀신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는 귀신론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불신자의 사후가 귀신이라고 보고 귀신들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 사람이 수명은 80-120년인데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죽을 경우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주로 가족에게 들어가 질병이나 사고를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것은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천사장의 부하들이고(사 14:12-15, 계 13:9), 질병의 원인도 육체적, 정신적, 영적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마 4:24, 요 9:3).  사실 귀신의 활동기간을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다음부터 본래 인간의 수명인 80-120년까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고, 만약 사람의 수명이 본래 80-120년이라면 노아 홍수 이후에 셈의 후예 족보에 나오는 200년 이상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것입니다(창 11:10-26).  이렇게 양극단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귀신의 활동을 단순히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만 사단은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계 20:10).


여기서 더 나아가 과연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고전 3:16),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고전 6:19-20, 행 20:28), 성령과 귀신이 결코 한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몸에 동시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구약신학자 Merrill F. Unger는 사울 왕이 귀신들린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사무엘상 10장6절에 의하면 사울 왕은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고(삼상 10:1),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지만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악한 영(악신)에게 괴로움을 당한 것을 제시하면서(삼상 16:14),『What Demon Can Do to Saints』에서 ”하나님의 영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시점에 그에게로 들어와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요 14:16). 반면에 마귀는 무단 침입자로 들어와 일순간에 쫓겨날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요일 3:8).  그러면서 Unger는 몇 가지 예를 들면서 마귀는 성령께 복종하는 신자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에 대하여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딤전 4:1).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는 귀신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귀신이 들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John Calvin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은(창 3:15),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단에게 정복되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상처는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Kurt E. Koch 박사는『Occult ABC』에서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써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귀신들린 자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고 부정하는 반면 귀신들린 자를 다수 카운슬링 해 본 경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귀신의 지배를 당하며 제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요약한다면 신약시대보다 현재 귀신들의 활동이 줄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고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요 8:44),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3), 그리고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유다(요 13:2), 심지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처럼(마 16;17), 만약 누구든지 마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다면(엡 4:26), 신자라도 얼마든지 귀신에게 억압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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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감리교 신학대학 변선환 교수와 총신대학 박아론 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변 교수는『월간목회』를 통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논박했습니다.  변 교수는 다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박 교수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재차 맞섰으나 더 이상 논쟁이 전개되지 않고 중단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D. Bonhoeffer의 영향을 받은 변 교수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전통적인 종교의식, 즉 예배와 기도와 각족 모임을 통해서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세상의 삶속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한 참여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박 교수는 기독교가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세속을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세속교회, 또는 인류주의 교회관은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 대다수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구원을 어느 한 측면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그 전 과정을 각 단계별로 나누어서 취해진 진술 방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성경이 구원의 서정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알미니안 교회, 심지어 장로교회 안에서도 학자들 간에 이 견해에 대해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엡 2:8), 육체의 질병(마 9:21)과 귀신에게 놓여남을 받는(눅 8:36), 것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악, 즉 전쟁(출 15:2)과 고통(시 34:6)과 원수들(삼하 22:36), 그리고 포로(시 106:47)와 사망(시 6:4)과 죄(마 1:21)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으로 “구원은 총체적인 죄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내놓으신 확실한 해결책이고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기초한 과거의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딛 3:5), 별도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현재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며(고후 5:17), 장래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벧후 4:13).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소유하고 체험하지만 동시에 장래의 완성을 대망하는데(빌 2:12),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롬 8:21).  이같이 바울은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종말, 즉 삼중적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일련의 구속사건으로 이루어진 복음을(고전 15:1-4),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하고(롬 1:16),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벧전 1:18-19), 믿음에 의해서라는 진리를 선언했는데(엡 2:8-10), 이것은 바울신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구원의 근본조건이 믿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구원론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이(엡 2:8),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확산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열렸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람은 성화은총을 통해 내면적으로 칭의를 얻으며 값없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협력할 때만 선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믿음을 통해서만 구속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로마가톨릭주의를 대변하는 Ludwig Ott는 막연히 믿는 신앙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교리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처럼 가톨릭의 입장은 칭의를 전가된 의가 아닌 주입된 의, 즉 사람의 내면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변화시킨 ‘의’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근거해서가 아닌(딛 3:5),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롬 3:21-22),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롬 8:1)과 달리 단순히 죄사함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와 더불어 태어났음을 믿지만(롬 5:12),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롬 10:9-10),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악한 생각이나 정욕(막 7:21-23), 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본죄’(本罪), 혹은 ‘자범죄’(actual sin), 라고 말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이 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대죄(mortal sin), 다른 하나는 소죄(venial sin)라고 부릅니다.  먼저 ‘대죄’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죄로 구속의 은총을 잃게 하는 것으로 이유 없이 성일이나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 술에 만취되는 것, 물건을 절도하는 것, 다른 종교서적을 읽는 것, 등을 말하고, ‘소죄’는 대죄처럼 심각한 죄가 아니며 영혼을 죽이지 않고 구속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는 가벼운 죄로 험담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 과식하는 것, 싼 물건을 훔치는 것 등으로 이 소죄가 계속되면 대죄(大罪)/중죄(重罪)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인간은 ‘성세성사’(聖洗聖事)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으며 성세성사를 받은 이후 범한 죄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성례’(sacrament)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마 28:19)와 성찬(눅 22:19-20) 이외에도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견진’, ‘고해’, ‘종부’, ‘신품’, ‘혼인’ 등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성례 즉, 성사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 성례 자체가 은혜를 준다고 가르치기 때문인데,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고 성사 없이는 하나님과 상통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구원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 점이고,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교훈 밖에 아무것도 믿는 바가 없는 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온전한 성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더 추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명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막 16:16, 고전 11:26), 그 밖에 다른 성사들을 명하신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엡 2:8), 결코 어떤 외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형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말처럼 성례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 이전의 성도들과(창 17:10),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회개함으로 성례를 받을 수 없었던 강도의 구원에 대해 결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눅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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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Mariology)은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교리학으로 그녀의 인격과 구속 계획, 특히 성육신에 관련하여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한다면 ① 마리아는 예수 출생 후에도 처녀성을 잃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죄 없는 삶을 일평생 살았다. ③ 마리아는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친 후 몸과 영혼이 승천하였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⑤ 마리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고 구속에 있어 예수와 함께 간접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개신교의 견해와 전혀 다른 구속에 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이고 이들은 이것을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옹호하고 있는데, 사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됨에 따라 ‘이교’(異敎)의 여신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와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4세기에는 ‘영원한 처녀성’ 주장과 431년에 개회된 에베소공의회에서 그녀를 ‘천주의 모친’으로 승인했지만 이런 마리아 예찬이 가톨릭에 의해 과도하게 행해지도록 된 것은 1854년 ‘무죄수태’ 교리와 1950년 ‘성모승천’을 교리로 선언함으로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눅 1:26-35), 문제는 교회에서 그녀의 상(像)을 중심으로 발전한 숭배에 대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명분이 역사나 신학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적 근거로 마 1:16, 13:55, 눅 1:27, 43, 요 2:1-5, 19:25, 행 1:14, 등을 마리아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들로 사용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녀에게 돌리는 영광과 역할에 대하여 지지하는 곳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침묵하고 있고 오히려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증거를 막 3:33-35, 눅 1:47, 2:49, 11:27-28 등에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및 유년의 기사들 외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마태는 주로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면서(마 1:16), 예수님이 잉태된 것은 두 사람이 정혼을 하되 아직 결혼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임을 분명히 밝혔으며(마 1:18-25),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진술은(마 1:25), 두 사람이 그 후에 정상적인 결혼생활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처음 두 장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라는 아기를 낳을 것을 ‘고지’(告知) 하였고(눅 1:26-38), 여기서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령이 잉태케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독특할 역할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모습과 천사가 그녀를 가리켜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닌 ‘은혜 받은 자여’라고(눅 1:28),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눅 1:39-56)과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일, 즉 목자들이 천사의 명령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눅 2:1-20), 이어서 할례를 받은 일(눅 2:21)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공헌한 일을 언급하고(눅 2:22-24), 성전에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 때문에 칼이 그녀의 영혼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25-35).  마지막으로 열두 살 때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눅 2:41-51), 여기서 마리아는 아이 예수에게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정 어린 꾸지람을 듣는데(눅 2:41-51), 비슷한 종류의 꾸지람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에도 나오고(요 2:1-11), 그 밖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사 중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간간히 기록되었을 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혈육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3:31-33, 눅 11:27-28).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던 일(요 19:25-27)과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성경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직 사도행전 1장14절에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마리아를 흠 없는 성모로서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내포할 뿐 아니라(출 20:4),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가톨릭에서 성스럽게 높이는 마리아가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서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처음에는 두 번씩 외웠고, 1986년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 의하여 두 번씩 되풀이하던 것을 지양하고 한번만을 외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평생토록 남자와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라고 선언했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지 않았고 많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네 형제들과(마 13:55), 그의 누이동생들이 나옵니다(마 13:56).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들은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마 12:46-50), ‘다른 친척’ 혹은 ‘이종사촌’이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치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가톨릭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역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섭리해서 원죄 없이 태어난 특전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성경에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기 3장15절누가복음 1장28절을 들고 나오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는 보지 않았고, 비록 1854년 교황 Pius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라고 선포했지만, Thomas Aquinas는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은 온 인류에 원죄가 없고(시 51:5, 롬 5:12), 자범죄가 없으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히 4:15).  한마디로 마리아가 원죄가 없고 죄 없이 거룩하게 살았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마리아가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는 ‘몽소승천’(夢召昇天) 교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성모승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 교리는 4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적 신약외경에 처음 나타나지만 7세기경에 이르러 동/서방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승천축일을 정해 지키기도 했으며 마침내 1950년 교황 Pius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까지도 승천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오순절 이후의 마리아의 생애에 대해 믿을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핵심적인 이유는 그녀를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토록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가 되고 그 모성이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선언했는데,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모친인 것은 맞지만(마 12:46), 천상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요 8:58),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에(빌 2:6),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마리아의 구원의 중보성 그리고 기도의 유효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들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을 내세우면서 마리아는 참된 중개자인 예수님을 낳은 모친이 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밀접하고 탁월한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녀가 주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문제를 위해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대사전을 인용한다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및 지상생애에서 이룬 구속행위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세말까지 그의 구원활동에 온전히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말해주듯이 초기 기독교 교부 중의 한 사람인 Epiphanius가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들과 싸웠고, 5세기에 들어서는 Nestorius 논쟁을 계기로 보편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Theotokos’ 즉, ‘하나님을 낳은 자’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개념으로 대두되었고, 이런 개념들은 그녀의 무원죄 잉태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주장에 의하면 하와(인류 타락의 원인)와 마리아(인류 구속의 원인) 간의 대조는 그녀가 구원경륜에서 중재역할을 맡고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섬김과 동시에 마리아에 대한 개념이 대중신앙에서 많이 강조되었고 아울러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개념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해괴망측하고 이상한 교리가 오늘날 가톨릭을 대변하는 것은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잘못된 사상으로 성경은 이를 지지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교리들은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발로’(發露)일 뿐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중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며(딤전 2:5),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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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이란 계시된 교훈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은 세계 공의회들과 공인으로서의 교황은 신앙과 윤리를 가르칠 때 오류에서 면제된다는 내용으로 이 결정은 가톨릭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태복음 16장18절과 누가복음 22장31절 그리고 요한복음 21장15절 말씀을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재확인 되었고 또한 교황이 그 직권을 가지고 말할 때 특별한 방법으로 이 권위를 지닌다고 말하며 B. C. Butler의 『The Church and Infallibility』와 George Salmon의 『The Infallibility of the Church』에 의하면 교황의 무류한 범위는 “신적인 믿음의 퇴적물만큼이나 넓어서 거룩한 위탁물로 간직하고 충실히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이 무류성을 교회의 임무에 적용시켜 규칙을 결정할 경우 그와 같은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톨릭에서는 교황 무류설을 변증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한때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다가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독일 튀빙겐대학교의 Hans Küng은『Infallible?: An inquiry』에서 개신교회의 논쟁과 같은 열정으로 교황 ‘무류성’(無謬性)의 허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이 교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그 대신 교회의 ‘무흠성’(無欠性)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눌 때 17절 이후에 나오는 구절부터 가톨릭교회와 의견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을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맨 처음 교황에 임명되었고 그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교리의 근거로 두면서 신약에서의 베드로와 역사에서의 로마교회의 지위라는 근거 위에 정립한 ‘교황 수위권’ 즉, 가톨릭에서의 교황은 사도들 중 수위인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로마의 대주교이고 교회 규율과 정치에서 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 문제에서도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관한할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태복음 16장18-19절 말씀을 로마 지교회의 최초 주교로 베드로가 임명되었고 그가 로마에서 그의 후계 주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인계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Water M. Abbott가 쓴 『Documents of Vatican II』의 글을 인용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 개인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도록 허락하셨고 천국의 열쇠도 그가 홀로 갖게 하셨으며 모든 양떼의 목자로 그를 임명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가톨릭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반석’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데 비록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며(마 16:16-17), 초대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행 1:15, 2:14), 문제는 이 문맥이나 다른 어떤 서신서에서도 그의 사도직 계승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있었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성경적/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로마에서 대감독이 되어 선교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전해지지만(요 21:18),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로마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행적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많은 내용을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연구는 불안전한 학문이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연구가 아니라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 오순절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베드로가 취했던 사도(벧전 1:1)적 권위는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교회 설립에 관해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을 반석으로 교회가 지어졌다고 말하며(벧전 2:4-8),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고(엡 2:20),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3:11).  그리고 마태복음 16장19절에 ‘매고’ ‘푸는’ 권세 역시 ‘토라’ 해석에 기초한 행위를 허락하거나 허락지 않는 랍비적 개념으로 여기서 매고 푸는 권세는 가톨릭의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열 두 제자(교회전체)에게 위임된 것이고(고후 5:18), 그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할 때에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막 4:1-9),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막 16:15-16).  요약해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롬 10:9), 즉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신앙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고(요 20:28), 또한 ‘참된 교회’란 어느 사람이 세운 종교나 단체가 아니라 오직 반석이시고 모퉁이 돌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엡 2:20),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마 16:15-16),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마 18:20)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교황의 수위권’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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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기독교 1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인구의 4분의1에 해당되는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울 시내를 돌아보거나 밤에 남산에 올라가보면 불과 몇 미터 사이를 두고 크고 작은 교회들이 같은 상가 안에 혹은 길 하나를 두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와는 분명 다른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의문시 되는데 오늘날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실상은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들이 적지 않은 상태이고(계 3:1),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기보다는 지탄을 받는 일이 허다하며 신자조차 자신의 삶 가운데 불신자와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빌 3:18).  성경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3:1-2), 요즘 현대교회는 이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 않아 교파 간에 교리만 조금 달라도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 경쟁 상대로 여겨 대화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고 과연 이런 교회들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고 뜨고 서로 싸우다 멸망당할 교회들(갈 5:15)에 대해 Hans Küng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죄 많은 동시에 거룩하고 거룩한 동시에 죄 많은 공동체이다”  그러면서 교부시대 이래로 자주 일컬어지고 있는 비유를 들어 교회는 하나의 ‘순결한 창녀’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세상으로부터의 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유사품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 땅에 세워진 유일한 제도로서(행 20:2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사 43:7, 21), 그 구성원을 영생으로 이끄는 교회들 중에는 ‘사단의 회’(계 2:9), 즉 거짓된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인데(요 10:10), 만약 이것을 깨닫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참된 교회에 속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방신전들에 관해 논한 적이 있는데(고전 10:19-22, 12:2), 여기서 ‘이방신전’이란 거짓된 종교 모임을 말하고 계시록에 나오는 ‘사단의 회’ 역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참된 유대인이 아닌 자칭 유대인의 모임을 가리키는데(계 3:9), 바로 이런 것이 거짓된 교회의 모습이며 이들은 사단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식하게 해주는 독특한 특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LutherCalvin은 견해를 같이 하는데 Calvin『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주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말씀과 성례를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진리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성례를 행하지 않는 교회, 인간적인 교훈이나 듣기 좋은 허탄한 이야기(딤후 4:3-4), 즉 망령되고 거짓된 교리가(딤전 6:20), 선포되는 곳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통한(엡 2:8), 구원의 복음 소식을 감추거나(롬 1:15-17),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위격을 부정한다면 그 어떤 모임도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행 20:28),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이렇게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요 8:31-32, 47, 14:23, 요일 4:1-3,),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키도록 명령하신 ‘세례’와(마 3:13, 28:19), ‘성찬’을(마 26:26-30),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하는데(행 2:38, 고전 11:23-26, 갈 3:26-27), 여기서 세례는 사람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수단이고, 성찬은 교회의 지속적인 회원임을 표시하는 수단이긴 하지만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볼 때(마 26:25-28),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행 1:16-18).  따라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 “성례는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혜 계약의 거룩한 표요 인치심”이라고 했고, Calvin 역시 “성례를 올바로 거행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해 주며 또한 견고케 해주는 방식”이라고 강조했지만, 만약 이 성례를 집행함에 있어 성경에 가르치는 바에 따라 죄의 용서와(행 2:38), 주님과의 연합(갈 3:26-27), 그리고 새 생명으로의 부활과(롬 6:3-5),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됨을(고전 12:13), 확신하지 못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마 28:19), 집행되지 않는다면 성례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는 성례의 근본 뜻과 의미를 상실하고 시행한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말씀과 성례의 시행이 있을 뿐 아니라 ‘권징’의(마 8:15, 살후 3:6-16, 딤전 1:20, 딛 1:13, 계 2:14-20), 신실한 시행도 뒤따르는데 그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모인 교회 안에는 성도의 성결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만약 교회가 성결함을 훼손하는 죄악된 행위를 고린도 교회처럼 치리하지 않고 묵인한다면(고전 5:1-8), 교회는 더 이상 순결성을 유지할 수 없어 급속히 부패할 것입니다. 사실 Calvin은 권징을 중요시 했지만 『French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참된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말씀’과 ‘성례’를 강조했고, 후에『Belgic Confession』이나 이것보다 앞서 작성된 『Scots Confession』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을 교회의 삼대 표지로 정의했으며 이것은 후에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분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이한 경우로는 구세군처럼 예배 속에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거짓 확신을 심어주거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성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악용하여 엘리 제사장처럼 범죄한 사람들을 묵인하고 내버려 둔다면(삼상 3:13), 그런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처럼 인간의 비위를 맞추거나(미 3:11), 권징이 올바로 시행되지 않는다면(마 18:15-17), 그러한 교회 역시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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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상세한 이해는 주로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후 33년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여겨지고 십자가에 처형되던 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은 오순절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강림사건인데 이로 인해 어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점화시킨 그리스도 복음의 불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로마까지 퍼져 나갔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 있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누어 불렀지만 11세기까지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는 언어, 철학적 경향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수장(首長)이 없이도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2세기 초 안디옥 감독이었던 Ignatius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 곳에는 가톨릭교회가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2세기 말에는 각 지역 개교회에 대조되는 보편교회이자 이단적 종교집단들에 대조되는 정통이라는 의미로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이라는 용어에 대한 좀 더 제한적인 이해는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교회들을 분리시켰고 교회사 전체를 통해 주요한 분열이 세 번 일어났는데 먼저 주후 553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본성을 중심으로 한 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입장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 간의 분열과 주후 1054년에 권위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 서방(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일어났던 분열, 그리고 1517년 ‘양성론’(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서방교회 안에서 일어난 ‘항의자’(신교)라 일컫게 된 기독교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의 분열을 둘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교회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지만 당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초기 기독교 30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함께 예배드리고 일하며 기도하고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Constantinus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후 445년에 이르러 교황 Leo가 지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라고 선언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섬기는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들 가운데 가톨릭에서는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근거를 두고 “가톨릭교회 외의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말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신자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그전에는 개인이 성경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성경해석에 있어 가톨릭 교권만이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었던 James C. Gibbons는 『The Faith of our Fathers』에서 “교회는 성경 해석자와 보관자를 성스럽게 지정했으며 하나님은 살아있는 교회의 권위를 떠나서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법칙으로 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가톨릭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하나님 말씀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오류를 고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교정 수단을 스스로 박탈해버린 것으로 Hans Küng의 말을 빌리면 자신들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이 어떤 권위들에 의해서만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 의해서도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Martin Luther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각 사람이며(요 5:39), 그리고 각 개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공부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권면합니다(골 3:16).  물론 성경을 배우는데 있어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행 8:30-31), 문제는 예수님께서 탁월한 성서학자나 목사,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이 완전무결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약 3:1), 이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기는 하되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주관주의적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마 23:15, 눅 11:52), 가톨릭에서도 신자들에게 성경해석 권한을 주지 않고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하는 두 번의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권좌 즉, 사도계승의 최고 권위로 그가 신앙과 도덕에 관계되는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절대적으로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마태복음 16장18절에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에 기반을 두고 잘못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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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Bruce는『열 두 제자 훈련』에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들어 열매를 남긴 위대한 사역자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고난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세상의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도덕적 위대함과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대가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신 특권 중 하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필수적이고(요 15:18-20),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 16:1-3).  그리고 사도 바울이 쓴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도에게는 ‘특징’과 ‘표징’들이 있는데(마 10:1, 막 6:7, 행 2:43, 5:12, 6:6, 8:14-17, 19:6, 고전 12:12), 이러한 특징과 표징들은 다른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사도는 아니지만 소유할 수 있으며 만약 사도라고 하면서 이런 특징과 표징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후 11장).  따라서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어떤 일반적인 특별한 특징과 표징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데(눅 9:1-11),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도(계 2:2), 이러한 특징이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도의 표징들에 대해(행 5:12), 바울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표징은 사도의 ‘고난’으로(고전 4:9-13, 고후 4:7-12), 이 고난당하는 목적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고후 6:3-10), 그 어느 누구도 질그릇 같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하여(딤후 2:20-21),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해받는 것과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고후 12:7).  다시 말해 이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위대함을 통해(벧후 1:16-18), 사람들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행 3:12), 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사도들이 단지 인간이고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따르면(행 14:22), 고난과 박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도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고후 11:23-33),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참 사도로서 고난의 흔적이 없거나 사람들을 통해 대접 받기만을 좋아한다면 사도라는 말을 삼가 해야 하고(갈 6:17), 성경에 보면 죽을 것 같은 고난을(고후 1:8-9), 사도들은 누구나 경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요 21:18).

 

두 번째 표징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엡 3:1-6)과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이스라엘 회심에 대한 비밀’(롬 11:25-32)을 보는 거룩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바울은 그가 사람들에게는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들었다고 말합니다(고후 12:1-4, 7).  세 번째 표징은 사도의 흠 없는 ‘성결성’이고(고후 1:12, 2:17, 4:2), 네 번째 표징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표적’과 ‘기사’들이 따랐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것임을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고(눅 24:49, 행 1:8), 이것은 열두 명(행 2:43, 5:12)과 이후에 나온 사도들의 사역에도 가득했습니다(행 14:3, 15:12, 롬 15:19, 고후 12:12).  물론 표적과 기사는 사도 사역의 표징이지만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도 그러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막 16:17-20).  마지막으로 사도의 권위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과 모든 질병을 물리칠 권위가 주어졌는데(마 10:1, 막 3:15, 6:7, 눅 9:1), 이 권위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실 때 그 권위가 그들에게도 주어졌고(눅 10:19), 마가복음 9장38-41절에 언급된 익명의 사람에게도 분명히 귀신들을 꾸짖고 물리칠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위에 열거한 사도적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직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이상의 것들이 참된 사도들의 표징이었다면 그것을 모방한 거짓사도들이(계 2:2), 초대교회처럼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는 한 가지 매우 단순한 방법은 참된 사도는 건전한 성경적 기초,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 새 일을 개척해 나가고 삶의 열매가 있으며(마 7:20),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2:20), 반면에 거짓사도는 분열, 분쟁,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어지럽게 만듭니다(딤전 4:1-3).  Gordon Lindsay는 참된 사도사역에 대해 『Apostles, Prophets and Governments』에서 “진정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겸손함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임을 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하는 역사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의 직임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도 사도의 사역을 행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사도의 사역을 행하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됨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John Eckhardt 역시 『The Ministry Anointing of the Apostle』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면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 은사가 분명히 나타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된 사도는 다른 사역의 은사들 위에 군림을 하지 않을뿐더러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검증된 다른 복음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복종시키는데(갈 2:1-2),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행 9:26), 적어도 17년 이상 사역에 몸담아 오고 있었습니다(갈 1:18, 2:1).  쉽게 말하면 바울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회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전파한 것에 대해 여전히 명성 있고 견고한 믿음의 사역자들과 의논하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갈 2:2).  만일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검증받고자 사역자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면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 말씀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롬 14:4),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인데(고전 14:29), 만약에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거짓사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갈 1:12), 사도로서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올바르고 성경적으로 건전한가를 판단받기 원했던 것이고(행 17:11), 그것이 바울이 사역에 오래 몸담아 옴으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나누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자신들을 은사중단론자로 여겨 1세기 교회 가운데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 사용이 중단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사도를 속사도시대의 직임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문용어로 보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 사도적 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사도 직함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초대교회의 근간을 이룬 사도직임은 종료되었지만 사도의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여전히 계속 부어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도에 대해 많은 논쟁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거짓사도가 있었다는 것은(고후 11:13-14), 오늘날도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사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롬 11:13, 고전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의 명칭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나타나는 ‘표징’과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면서 위에 열거한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칭 사도’일 수밖에 없고(계 2:2), 그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7:15-18).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엡 4:11-12), 그렇다고 아무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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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의사이자 음악인이며 아프리카 내전 국가인 남부 수단의 딩카족 마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백분 활용한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의사로서의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버리고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내전지역에 가서 10년간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도중 대장암 선고를 받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톨릭에서 또 한 분 있었는데 노벨 평화상을 받은 45년간 Kolkata, India에서 빈민과 병자, 그리고 고아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 Mother Teresa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인데 그녀가 죽었을 때 인도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사람 중에 한분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저널리스트 Christopher Eric Hitchens는 『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에서 Mother Teresa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는 성녀가 아닌 종교적인 사업가라고 혹평을 하고 가톨릭에 의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과 헌신 무엇보다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솔직히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톨릭 신자와 달리 얼마 전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수는 좋지만 기독인들은 싫다”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답을 했고,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Mahatma Gandhi“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비종교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가톨릭 그리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교로 기독교를 뽑았는데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이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타종교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랑한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다”,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교회건물에 집착한다”, 등등을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실 비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개신교보다는 타종교 특히 가톨릭을 더 선호하는 입장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인데 예를 들어 단군상을 부수거나 절간에 가서 기타 치며 찬송을 부르고 땅 밟는 행위 심지어 같은 교인끼리 교회건물 문제와 헌금문제 혹은 교파간의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볼 때 종교(기독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위선적이고 부정직하며 너무 모순된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이 가톨릭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가톨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사제들끼리 교회건물이나 헌금문제로 싸우거나 법정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가톨릭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높은 반면에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이 하늘을 찌르고 안티기독교인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언행 불일치’와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톨릭에서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고 예를 들어 권위의 문제에 있어 개신교는 성경만을 절대적 지침서로 사용하지만(딤후 3:15-17, 요한일서 5:13, 신 12:32),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구원에 있어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롬 3:24, 5:1, 10:9-10, 엡 2:8-9), 믿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신덕’(믿음)과 선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목회자 중에 어떤 이들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톨릭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이고(욘 2:9),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 7:21).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 55:8).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고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단이고 그들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나 많기 때문에(눅 13:22-27), 개신교가 정통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마 13:24-30), 가톨릭에 교리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딛 2:11).  그러기 때문에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구원의 문제를 놓고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하고(시 3:8), 특히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에 대해 눈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판하거나 적대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5).  잠언에 보면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고 하는데(잠 6:6), 하물며 타종교에서 모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면 비판적인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그들의 모범된 삶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기는 타종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성전을 찾은 세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고(눅 18:1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행실과 언행을 통해(벧전 3:16),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모독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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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erkhof은 삼위일체론에 대해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해진 많은 노력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삼신론’과 ‘양태론’인 하나님 개념들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신적 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체 안에 있는 위격적 구별의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만 적절한 용어를 통해 가능한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Calvin은 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민할 것을 알았던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 같이 어리석으며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예증은 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마 28:19), 기독교가 ‘다신교’ 아니면 ‘일신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처럼 예수님이 단순히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대속의 문제, 즉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갈 3:13), 또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롬 3:28).  가령 예수님이 피조물로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가르침 역시 공적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돌리게 되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출 20:3).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라면, 그분이 아무리 위대해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우상숭배 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레 25:1), 그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14:13).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각 위격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 위격들이 존재하면서 각 위격이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Herman Bavinck는 “삼위일체의 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뛴다”라고 말했는데 반면에 이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더 건전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모순된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이기에 차라리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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