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실제로 그를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셨는가 아니면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셨는가?”  “오직 선택받은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인가?”  만약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변은 ‘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 아니면 ‘후택설’ 견해를 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먼저 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작정하시기 전에 이미 일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는 ‘이중예정론’을 주장한다.  반면에 후택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전택설적 예정론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을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알고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강조하고, 후택설 입장은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선택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택했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유기될 자들의 죄(불신앙)에 대한 예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정죄받도록 예정했는지에 대한 Calvin의 ‘이중예정론’은 오늘날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Calvin이 그리스도가 택한 자들만을 위해 죽었다는 ‘제한속죄’를 믿었는지 혹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보편속죄’를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Calvin의 속죄 범위에 대한 논쟁은 크게 두 부류로 갈라진다.  하나는 제한속죄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W. R. Godfrey, R. A. Muller, J. H. Rainbow)과 다른 하나는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B. G. Amstrong, R. T. Kendall, J. B. Torrance)이다. 

이러한 Calvin의 속죄론을 가지고 Augustus H. Strong은 『Systematic Theology』에서 “Calvin은 그의 초기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속죄의 범위에 관한 자기의 결정적인 견해를 피력해 왔으나, 그의 후기 저서인 ‘주석’에서 보편적 속죄설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즉 전택설은 단순한 칼빈주의적이라기보다는 초극단적인 칼빈주의적이다”라고 말했다.  보편속죄론을 주장하는 B. G. Amstrong도 Calvin이 보편적 속죄교리를 강조하지만, Theodore Beza와 16-17세기 강성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처럼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다(요 1:29).  하지만 그 효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요 1:12),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막 16:16).  이들은 많은 성경구절들 중에 중요한 두 구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과 요한일서 2장 2절을 내세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충족하나(고후 5:14), 제한된 수의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보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구원을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롬 10: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롬 10:13).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든’(all)이란 단어와 ‘전체’(whole)라는 말은 언제나 그 의미대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가이사가 다스렸던 당시에 온 천하 사람들에게 호적등록 할 것을 명령했을 때(눅 2:1-5), 여기서 말하는 ‘온 천하’란 로마제국 전역을 말하는 것이지(행 11:28),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모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두 구절에서 나온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은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것처럼(신 7:8, 암 3:2),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모든 지역에 있는 택함 받은 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요 6:37-40).  이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자기 백성(마 1:21)과 자기 양(요 10:15), 그리고 자기 피로 산 교회(행 20:28)만을 구원하셨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9장 11-13절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의 소망으로 이끌지 않으시고(요 6:44), 오직 창세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엡 1:4), 구원을 허락하시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 구원에서 제외시키셨다고 주장한다.  즉 속죄의 적용은 오직 하나님의 소요된 백성만을 위한 것이지(벧전 2:9), 유기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37-40절에 나오는 말씀은 제한속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특정 수효만이 택함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으나 모든 사람에게는 유효한 것은 사실이고(요 12: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지만(딛 2:11), 구원은 실제로 정한 수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과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에(히 2:9), 이 관계를 거부하거나 거스리는 자는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양쪽 견해를 살펴보면 서로 간의 동의하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막 16:15-16)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행 1:8).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죽으심이 충분한 지불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죄 값만을 지불하였는지(마 1:21),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죄 값을 지불하였는지를 놓고 볼 때(딤전 4:10), 이것은 각 개인의 성경해석과 판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야 한다(롬 12:3). 

문제는 신학과 신앙에 균형 잡히지 않는 사람과 마귀에게 쉽게 충동질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야기시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편을 갈라 분쟁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Wayne A. Grudem이 말한 것처럼 성경은 이 난해한 교리를 매우 중요하게 따로 취급하거나 명백하게 신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보편속죄론보다 제한속죄론이 좀 더 강력한 논리적 기반을 가진 듯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른 교리적 혹은 실제적 문제들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질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일을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단정해서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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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

논쟁거리/속죄 2024. 7. 14. 17:17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대화는 참으로 중요하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나눈 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감정이나 의견의 대립을 해소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서로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해 준다.  이런 유익을 주는 대화와 달리 성도로서 해서는 안 되는 대화가 있다(딤전 6:4-5).  그것은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식한 논쟁적 대화이다(딤후 2:23). 

예를 들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졌을 때 물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와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백해무익한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상실하고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신학적 논쟁이 그칠 날이 없다’(딤전 6:5).

어느 신학자가 ‘유보적 칭의론’을 강론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판의 신학적 칼날을 세워가지고 공격하는 진영이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 보았더니 다름 아닌 Calvin의 살인적인 비판정신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이 주창한 전통적 구원론 하고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익한 변론들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리를 잘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Lloyd Jones는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벽한 정통적이면서도 죽어있는, 즉 영혼구원에 아무 쓸모없는 메마른 교리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로마서 14장에 보면 고기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삼을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을 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고 일깨워 준다.  

지금은 불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롬 2:24) 악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이 메마르고 패역한 세대에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막 16:15).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길 바란다.  관종(關種)이 너무나 많다.  로마 교인들이 먹는 문제로 서로 실랑이를 벌인 것처럼 신학적 무식한 논쟁을 통해 자기 좀 알아달라는 목사들 말이다.  이들은 어떤 교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할 시간은 있어도 영혼 전도나 기도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논쟁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성령을 근심시키고(엡 4:30)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살전 5:19).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짓을 일삼는 목사치고 죽은 정통 신앙에 묶여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님이 맡겨주신 목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기름부으심이 없는 메마른 설교를 가지고 앵무새처럼 나불거린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목회에 모범을 보이며 맡겨진 양들에게 헌신하는 올바른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식한 변론이나(딤후 2:23), 논쟁을 일삼는(딤전 6:3-5), 바리새인 목사의 가르침을 받거나 추종하는 것은 가룟유다와 같이 귀중한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먹는 것과 같다(요 13:2).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고 증거 한다(롬 5:8).  문제는 속죄의 범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의 양적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을 놓고, 한 부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한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성경적이고 맞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속죄론’과 택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제한속죄론’이 있다.  먼저 보편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속전(贖錢)을 지불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장 29절, 3장 16절, 6장 51절, 12장 32절, 로마서 8장 32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고린도후서 5장 14절, 디모데전서 2장 6절, 디도서 2장 11절, 히브리서 2장 9절, 베드로후서 2장 1절, 3장 9절,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4절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들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딴 길로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제한속죄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영원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1장 21절, 20장 28절, 눅 19장 10절, 요한복음 6장 37-39절, 10장 15절, 26-28절, 17장 9절, 15-17절, 20절, 사도행전 20장 28절, 로마서 3장 26절, 8장 32-33절, 에베소서 1장 4절, 11절, 5장 25절, 디모데전서 4장 10절, 디모데후서 1장 9절, 히브리서 9장 15절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한’은 구원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대상의 양적제한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실제로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교리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작정 순서에 대한 신학적 견해와 결부된다.  먼저 개혁파의 유명한 신학자들인 Martin Luther, John Calvin, John Owen, Theodore Beza와 같이 전택설(Supralapsarianism)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반대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직 선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에 같은 개혁파 안에서 이름난 신학자들인 Augustine, Charles Hodge, Louis Berkhof은 후택설(Infralapsarianism) 견해를 취한다.  이들도 상대방 입장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장한다.  두 부류 중 한 부류는 잘못된 것인가?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속전이 지불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이 불합리한 것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의 모든 관심이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얻은 값진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마 20:28, 롬 3:23-26, 벧전 1;18-21).  다시 말해 그 값을 누가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문제에 쏠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속죄의 범위에 대한 양대 견해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을 가지고, Lloyd Jones의 말대로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변론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딤전 6:4), 사람들이 언어적 유의를 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고전 1:12-13).  이것은 각 사람이 어떤 신학적 혹은 신앙 배경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롬 12:3).  무식하게 내 신학이나 신앙만이 맞은 것처럼 우겨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의견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서로 비방과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둘 다 멸망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갈 5:15).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엡 2:16).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롬 5:8)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요 3:15)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롬 5:1).  하지만 누구든지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구원으로 초청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한다면(눅 14:15-24),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남아 있게 된다(요 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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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거리/속죄 2024. 6. 2. 15:56

마가복음에 보면 고질적인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온다(막 5:26).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진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병이 더 호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막 5:34).  또 다른 여성이 요한복음에 나온다(요 4:7).  이 여자 역시 오랫동안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문제는 조상들을 잘못 만나 평생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죽은 전통에서 놓여남을 받았다(요 4:20-24).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가령 신학생이 교수를 잘못 만나면 평생 그 교수로부터 배운 것이 최고의 학문인양 나팔을 불어댄다.  더 큰 문제는 잘못 배운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이기까지도 한다(사 9:16).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가르치는 선생보다 갑절이나 더 지옥자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마 23:15).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시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를 잘못 만나면 영혼이 파멸될 수 있다(눅 11:52).  어감이 최악이긴 하지만 표준어이기에 사용한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요 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요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으로 예언되었다(사 11: 1-5, 40:3).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하나님’으로 호칭되었고(요 20:28)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나(마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눅 3:22).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 되심을 보여준다(행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그러나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사 26: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2:13).  특별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계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히 9:12).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2)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만물의 창조자이시고(골 1:16), 우주를 통치하시는(요 17:2), 율법의 제정자이시다(마 5:22-32).  이러한 성자 하나님께서 대속물(속전)이 되기 위하여(마 20:28), 자신의 신적위엄을 보류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빌 2:6-8),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요 10:18).

이렇게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원수 된 것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엡 2:16).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원해서(요 10:17),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되시고 그 십자가에서 처형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다(히 1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고(엡 1:7),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처럼 단 한 번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향한 구속사역이 완성이 된 것이다(히 10:14).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와 율법의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속량함으로써 대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갈 3:13).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내세우는 주장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다른 형제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약 4:11-12).  그런데 이들은 ‘구속’과 ‘구원’에 대해 혼동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행 5:30)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이다(롬 3:23-26).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고후 5:18-19).  그러나 이  십자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자 물린 자들마다 살아났다(민 21:6-9).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저 십자가만 바라보면(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요 3:14-16).  먼저 영혼이 사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엡 2:8)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요 6:37).  더 나아가 개인 스스로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을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막 16:16).  여기에 ‘불가향력적 은혜’라는 신학적 용어를 끌어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행 26:24-2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놀라운 복음(약 1:21)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롬 1:2).  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 성경에 나온다.  이 구절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핵심 본문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이다.  그런데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오직 십자가만 믿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소리 높여 메시지를 증거 했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행 2:22-36).  그가 고넬료 가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증거 했다(행 10:39-41).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총의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신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이야기했다(행 15:7).  또한 로마서 10장 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바울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행 26:23), 그리고 총독 벨릭스에게 증거 한 것처럼(행 24:21), 십자가의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포함시켜야 온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갈 1:4)과 부활(롬 5:10)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 1:3).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만약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만을 증거 한다면 그것은 복음도 다르고, 영도 다른 짝퉁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고후 11:4).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했다.  그가 십자가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팔을 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고전 15:17).  따라서 누군가 십자가만 믿고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도 없는 사악한 궤변이기 때문에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이런 반쪽짜리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증거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거짓을 일삼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딤전 4:1). 

심각하는 것은 이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신학적 논쟁이나 정치, 혹은 ‘개콘’을 보는 것처럼 떠드는 것 말이다.  Calvin은 설교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강단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모든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듯이’(마 7:16) 이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딤전 4:2).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상적인 목사라고 착각을 한다.  누구든지 영혼이 살아나려면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요 5:25).

예를 들어 초대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단들, 즉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만 인성을 부인하고(Docetists), 인성은 믿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Ebionites), 또는 위격의 통일(Nestorians)과 양성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Eutychians), 심지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무조건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계 22:18-19).  누구든지 성경을 편리한 대로 골라서 믿는 사람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딤후 2:16-18).  성령의 역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갈 5:22-23),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에는 신학적 비방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 밖에 없다(약 3:14-16).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영이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과 사건들, 출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는 믿음이다(계 22:18-1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것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한 구속이다(벧전 1:18-19).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잡소리’다.  개혁주의신학자 R. C. Sproul 박사의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덕이 된다.  하지만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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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논쟁거리/속죄 2024. 5. 5. 14:49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 Anselmus는 범죄 한 인간의 구원여부와 구원방법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Augustine은 택한 자의 구원에는 속죄나 공의의 만족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상대적 필요성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견해로서 속죄는 본래 필요치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결정하신 것뿐이라고 Schleiermacher는 주장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atonement) 사역이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죄가 속해지도록 인간의 죄책에 해당하는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히 9:11-14).  이는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법적으로 연합하기 위해(롬 6:5), 인간의 몸을 취하심으로 단순히 낮추신 정도가 아니라(빌 2:6-8), 아예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요 1:29),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요 19:34), 아버지께 버림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마 27:46). 

이 속죄와 관련된 용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있다(롬 3:24).  이것은 속죄가 죄를 속하는 행위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엡 1:7), 구속은 속죄행위는 물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게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경에서 속죄라고 할 때는 죄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사역을 말하는(벧전 1:18-21), 반면에 구속은 속죄에 비해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이란 넓게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사역 전 과정을 가리키고(롬 3:24-26), 좁게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구금된 자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속량’을 가리킨다(갈 3:13).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때 구속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구속의 성격을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이다(마 20:28).  이것은 구약 희생 제사에서 대속교리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그의 형벌을 면해주셨다(레 9:7).  즉 예물을 드리는 자가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한 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시고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이다(레 1:4). 

이러한 구약의 동물 제사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대한 예표이기에(히 10장), 하나님은 생명이 피 속에 있으므로 동물의 피로 죄를 사하셨다(레 17:11).  하지만 동물의 피가 죄를 영원히 깨끗하게 할 수 없기에(히 10:11),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게 하셨다(히 10:4-18).  실제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시었고(요 1:29),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로 삼으셨던 것이다(고후 5:21).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리신 제사는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 지는 것들과는 구별된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영 단번의 성격을 띠는 완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히 10:10-14).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은 매년 지상의 지성소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다(히 9:1-7).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 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고통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외침과 동시에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었다.  이는 온전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닌 참 하늘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신 것이다(히 9:24). 

따라서 그 자신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었다.  그가 문자 그대로 피를 가지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에 필요한 모든 결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벧전 3:18).  그런데 Gore Charles는 『The Body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실 때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과 달리 그리스도는 단번(once for all)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되었다(히 10:12).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실제적인 제사가 십자가에서 드려졌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하고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히 10:18).

비록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하신 어떤 일에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원문 하고는 거리가 멀고 성경적이지 않다.  심지어 RSV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를 가지고’라고 번역하므로(히 9:12),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분은 지상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일이면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듯 하늘에서도 그런 대속적 행위를 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단 번에 제사를 드림으로(히 7:27), 대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완료된 것이고(히 10:12),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한 것이지(히 9:12, 24), 그 뒤에 일어난 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제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제물,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의 피(골 1:20)를 가지고 옛 지성소의 원형인 ‘참 하늘’(히 9:24)에 들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존전에 서셨고,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계신다(히 9:24).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19:30),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속죄사역의 단회성은 속죄의 완전성과 종결성, 즉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히 10:14).  따라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히 10:1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히 7:27).  무엇보다도 이 속죄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그 일에 관여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안전한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갈 4:4-5) 속에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히 9:14),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을 어김으로 받게 될 형벌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갈 3:13), 의식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졌다(갈 4:4-5).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받지 못한 자들 위에 왕 노릇 하던(요 12:31),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으로부터 구속을 받았으며(요일 3:8),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근본책임이 그리스도에게 다 전가된 것이다(롬 3: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속사역이 성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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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 계시

논쟁거리/계시 2023. 10. 30. 12:26

John Piper, 그리고 John MacArthur와 같은 신앙 라인에 서있는 R. C. Sproul는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다.  그는 흔히 정통 장로교 신자들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영적자발성(spiritual spontaneity)을 조금만 암시해도 미간(眉間)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찌푸리는 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교회는 감리교회, 두 번째 교회는 침례교회, 세 번째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그가 귀향해서 상급자들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감리교회를 방문했더니 신자들 모두가 ‘불! 불! 불!’ 소리만 지르고, 침례교회를 방문했더니, 그곳 신자들 역시 ‘물! 물! 물!’ 소리만 지르고, 장로교회를 방문했더니, 그들도 ‘질서! 질서! 질서!’ 소리만 질렀다”

Sproul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장로교 그리스도인들을 꼬집으면서 말하였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16장까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생략하고, 오직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다.  이 예화가 주는 의미를 장로교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특별히 칼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자신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이들의 문제는 바리새인처럼 너무 교회질서와 전통만을 따지기 때문(막 7:1-5)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한 은사(고전 12:7)를 무시하므로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이다(살전 5:19).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 안위와 권면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강조한다(고전 14:25).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에 나오는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이 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전 12:11).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서계시’ 혹은 ‘계시하다’라는 말은 꼭 정확무오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말한’(벧후 1:21),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딤후 3:16).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절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아는 것( 11:25)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 1:18),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1:17), 더 나아가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 11:27) 들이다.  모든 것은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전 14:26).  따라서 Grudem은 절대적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일절 없는 성경말씀(벧후 1:20-21)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를 구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4:29).  또한 신약의 예언자들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과신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D. A. Carson 역시 ‘계시’라는 말을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Showing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0절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정경의 완결성을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와 성경저자들의 용어를 혼동하는 것이다”  또한 『Exegetical Fallacie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해석자가 ‘계시하다’를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늘 생각한다면 그는 빌립보 3장 15절을 해석하기가 힘들 것이다”  

사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중단론 신학자와 목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삐뚤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문제는 예언하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계 22:18-19),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막무가내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누스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예언(계시)을 하면 곧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예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든지 아니면 꿈을 꾸는 사람들을(행 2:17),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정죄하거나 이단시하는 사람들 중 특히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John MacArthur가 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계시의 언약성과 구속역사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두 줄기로 계시하시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Richard B. Gaffin 도 있다.  물론 이들이 가르치는 말씀에서 배울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중계시관’ 즉 교회 전체에 대한 ‘정경적 계시’와 신자 개인을 위한 ‘사적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에 Grudem은 지금도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는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10).  이 문제를 가지고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Vern Poythress 교수는 Grudem과 Gaffin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에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 때문에 Gaffin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도 이런 은사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Sam Storms 역시 초대교회의 탄생을 위해 영적인 은사들이 필수적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왜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은사들이 덜 중요하거나 덜 필요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히 6:18).  그분은 우리에게 틀리거나 잘못된 예언(계시)을 주지 않는다(고전 14:3).  문제는 누군가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혹은 오랫동안 다듬어지는 훈련이 없이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많은 것이다.  가령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받은 사람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이 일이 세 번씩 반복될 때까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을 했다(행 10:9-17).  이것은 계시가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 할지라도(약 1:17), 그것을 받는 사람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계시를 받으면 무조건 ‘직통계시’라고 판단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나 광신자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받아 들려야 한다(살전 5:19-22).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하고 있다(요일 4:1).  또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 해야만 한다고 증거 한다(고전 14:29).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설된 모든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막 7:20-23).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6-37).  섣불리 판단하거나 함부로 이단이라고 비판하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가마리엘처럼 신중해야 한다(행 5: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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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논쟁거리/계시 2023. 10. 8. 03:12

구약시대에 이루어졌던 선지자들의 예언자적 사역의 예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 있어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전체 실례들은 커다란 단체를 대상으로 한 계시였다(사 6:6-8, 렘 11:6-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선지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을 전하며 기록할 수 있었다(렘 1:9).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라고(출 9:1, 삼상 10:18), 선포한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같았다(신 18:19, 겔 33:7).  이렇게 선지자가 말로 메시지를 전한 것은 곧 계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적용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그대로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민 22:38).  

따라서 구약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으며(신 18:18-20, 겔 2:7),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선지자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다(삼상 8:7, 왕상 20:35-36).  이렇게 구약 선지자들이 주요 역사가이며 오류 없는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었다면(대상 29:29, 대하 9:29, 12:15), 신약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행 4:33), 성경을 기록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행 1:2).  그들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처럼 불러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다. 이들은 구약의 선지자에 준하는 사람들이지만(고전 2:13, 갈 1:8-12, 벧후 3:2), 신약 교회의 권위 구조상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는 달랐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도들에게 각각 영역에 대해 다른 권위를 주셨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을 향한 권위가 있었고(벧전 1:1),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향한 권위가 주어졌으며(롬 11:13, 행 9:15), 교회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에 선지자란 호칭으로 호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다(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벧전 1:1, 벧후 1:1).  또한 이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엡 2:20).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말씀이고, 신약의 사도 또한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오늘날의 선지자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같이 자신이 전한 말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Wayne Grudem은 고린도의 예언자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Grudem이 제시하는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언은 계시를 전제하는데 구약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의 형식을 취하지만, 신약은 이런 경우들이 드물다. 구약 선지자가 일단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 그 예언이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이 없었으나, 신약 선지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게 되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신약의 선지자는 자기 메시지와 하나님의 메시지를 혼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언을 일인칭으로 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신구약 성경에 의해 테스트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선지자는 얼마든지 과오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행 21:10-12), 자신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른 지체들에게 겸손하게 확증받고 시정받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29).

신약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일상생활에서의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라는 의미보다는, 그저 “초자연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 아니면 신적인 권위라는 의미가 함축되지 않은 대변인” 정도를 의미했다(요 4:19, 딛 1:12).  이 문제를 가지고 Helmut Kramer는 ‘선지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단지 전하고 선포하는 ‘전달자’라는 공식적인 기능을 나타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의 선지자가 구약의 선지자처럼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히 간청할 때(행 21:12), 바울은 이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다(행 21:17).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두로의 제자들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결코 그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9절에 분변 하라고 명함으로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제시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다(살전 5:20-21).          

그러면 누군가 “예언자가 전한 계시를 바탕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구약 시대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확실히 그랬다.  백성들이 그에게 유다에 머물러야 하는지 이집트로 탈출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유다에 남아 있는 자만을 지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로 갔다가 죽음을 당했다(렘 42장).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이 계시를 전함에 있어 예레미야나 구약의 선지자를 표준으로 삼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9-30, 36절에 나타난 대로 예언의 은사가 상당히 규제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어떤 예언도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하지 않을뿐더러, Bruce Yocum이 말한 것처럼 신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언자로부터 구약 선지자처럼 인도함을 구하는 것은 신약에서는 완전히 불법화된다. 이것은 구약에만 있던 중요 기능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믿는 자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롬 8:14).  신약의 사람들은 인도와 방향, 삶에 대한 관리 등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딤후 3:16, 벧후 1:21)과 성령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갈 5:18).  그렇다면 “신약의 예언자들이 믿는 자들을 도울 수 없는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을 제시하여 예수님과의 개선된 관계로 나아가도록 권면의 말씀과 확신을 제공하기도 한다(고전 14:3).  하지만 신약의 어떤 선지자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다스리는 예언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대신에 믿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해 줄 수 있다(고전 14:3). 

만약 신약의 선지자로부터 미래에 관한 예언적 말씀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들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확인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4:1).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통해(딤후 3:16), 옳게 분변 할 것을 권면했고(딤후 2:15),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말하면서(벧후 1:19-20),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모든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벧후 3:16).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두 명의 강한 예언자들이 남아있다(계 11:3-13).  학자들은 ‘두 증인’에 대해 각기 해석을 달리한다.  나머지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고 믿으면 된다(롬 11:3).  그러나 이 세상 끝 날에는 예언자의 역할이 다시 살아난다.  이들의 권한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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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말한다.  “구약 예언자는 성령의 감동 하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구원을 선포했다. 예언의 주류는 몰아지경이나 광증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예언 속에 미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요엘 2장 28절의 예언이 성취되었고, 결과 모든 신자들이 받을 있었다( 2:17-18). 바울 서신에서도 예언은 널리 퍼진 현상이고(살전 5:19-22, 12:6), 회중의 건덕과 격려를 위하여(고전 14:3), 집회시간에 구두로 전달된 성령에 감동된 자발적이고 알아들을 있는 메시지로 구성되었다(고전 14:26). 그러나 예언자들이 예언을 통제할 있었다”(고전 14:26-33).

예언은 성령의 계시로 알아들을 있는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이다(고전 14:3).  이미 과거에 주어진 성경계시를 삶의 현장에 현재적으로 지혜롭게 적용하는 것과 미래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은사 중지론자들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기록된 이후에는 이것이 주의 백성을 위한 완전하고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이기 때문에 누군가 지속되는 예언적인 말씀을 더하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시대의 회중 예언이(고전 14:26), 그 권위에 있어 구약의 예언이나 신약 사도들의 말씀과 동등하다면 은사 중지론자들이 제시하는 이의는 지극히 타당할 것이다.  만약 오늘날 선지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는 말을 했다면, 이 말은 권위에 있어 성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경에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그들만의 주장의 근거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 지속론자들은 예언을 그렇게 보지 않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George Mallone은 기독교의 주류에 있는 은사 지속론자들 중에 오늘날의 계시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강조한다. 

Mallone의 주장이 맞는 이유가 있다.  만약 신약교회에서 회중의 예언이 성경적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면 바울은 예언을 분변 하는 것(고전 14:29)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예언을 멸시치 말고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살전 5:19-21).  여기서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라고 했다면 예언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선지자의 말이나(신 18:19, 렘 1:9, 겔 33:7), 신약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는(행 1:2, 엡 2:20, 3:5), 이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가치에 있어 성경을 위협하거나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및 회중의 성숙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고전 14:29, 요일 4:1).

성경에서 ‘계시’ 혹은 ‘계시하다’는 단어의 용법은 다양한 가능성의 넓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약의 모든 경우에서 ‘계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이 계시는 놀라운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으로(마 16:17), 베드로는 계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알려주실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엔 에모이’, 문자적으로 ‘내 안에’, ‘내게’ 혹은 ‘나에 관해서’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을 두고 한 말로, 여기서는 시공적 역사 속에서의 객관적 자기 계시(하나님의 아들), 즉 성경의 공적인 기록에 의해서 널리 증거 되고 지금 입증된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바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한 것을 말한다(마 11:27, 고전 2:10).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 역시 개별적인 계시(중생시), 이후에 은혜와 성숙과 관련된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빌 3:15).  이런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할 때(고전 14:30), 계시는 정경의 종료를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 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경계시의 종료와 함께 예언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를 성경저자들의 용어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언이 ‘계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언자들의 권위가 절대적이라고 결론을 짓지 않았다.  아무리 탁월한 예언적 말씀이라도 사도적 전통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는 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었다(갈 1:6-9).  D. A. Carson도 이러한 원리가 어떠한 예언(계시) 은사에서도 성경자체에 대한 위협을 발견하는 현대의 중지론자들의 경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언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계시종결과 함께 계시은사의 종결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있어 오류와 남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Donald Gee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개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은사를 통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사모하는 자들은 지난 세대를 통해 경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Dennis와 Rita Bennett도 『The Holy Spirit and You』에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예언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성령운동에 많은 손상을 입혔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하고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을 받을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언이나 방언통역, 혹은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을 무조건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라고 상기시켰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예언을 받을 때 신중하게 살펴보고 영이 하나님께 속해있나 분별하라는 것이다(요일 4:1).

John MacArthur 역시 계시의 지속성이 교회에 많은 이단 운동을 불러일으켰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무엇이든지 사용하는 데에는 남용이 있는 법이다.  은사의 바른 사용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은사의 남용을 우려하여 은사의 바른 사용을 금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충분성과 예언의 은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의 독특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것도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은사 중지론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지론자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경우에 거기에 따르는 하나의 위험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행하시는 일을 반대하고 그로 인하여 바리새인처럼 성령의 역사를 심하게 대적하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마 12:28-32).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다.  또한 그 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사 43: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어(엡 4:12),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셨다(고전 12:7).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과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약 1:17)을 대적하지 않도록 교법사 가말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행 5:34-39).  특별히 말을 조심해야 하며(마 12:34-37), 섣불리 판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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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1) 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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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훌륭한 선생이지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이고,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구원은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제도 즉, 팔정도(Noble Eightfold Path)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팔정도’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통해 죽음과 환생(還生)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1993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5면에 보면 불교인들이 존경한다는 퇴옹성철(退翁性徹) 스님은 1983년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여… 대중이여, 석가가 세상에 오심을 망상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오심도 망상이라”.  1987년 석가탄신일 법어(法語)에서는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같은 날짜 조선일보 15면에 그가 운명 직전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28자로 된 열반송(涅槃頌)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말은 본인 자신이 죽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남긴 말이다.

나는 불교와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평생을 살다가 성철 스님처럼 죽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빵을 준다는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는 것 같다.  마치 400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신 것처럼(삼상 15:2), 교회에 가서 얻어먹은 빵을 기억하고 계셨다.  내 생각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를 목회자로 불러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러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죽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가령 누군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이나 오래전에 들었던 기독교 간증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지옥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평생을 망나니처럼 살다가 끝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몬 24절).  한때 신실한 사역자였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타락하고 말았다(딤후 4:10).  그가 세상으로 떠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 Handley Moule은 말한다.  “데마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떠났다”.  성경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지만 아마 그는 바울이 겪었던 고생과 고통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 역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다(마 10:1-4).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까지 부여받았다(눅 9:1).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주님을 팔고 회개도 하지 않고(마 26:24-25), 목매달아 죽었다(마 27:5).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눅 23:43)은 일평생 죽을죄만 짓고 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탕자처럼(눅 15:17-19), 회개하고 돌아왔다(눅 23:41).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사회적 지위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이 세상에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마 16:16).  이들은 무론대소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실 때 두 종류의 증인들이 나온다.  하나는 책들로 상징되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으로 상징되었는데(계 20:12), 각각의 경우에 증언이 일치할 것이다.  먼저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각 사람이 그의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시 62:12, 렘 17:10, 마 25:31-32, 롬 2:6, 14:10, 고전 3:13-14, 고후 5:10, 벧전 1:17).  이것은 구원이 선한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지만 선한 행위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요 15:8).  그리고 생명책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책이다(계 17:8).  이 생명책은 이미 세 번씩이나 계시록에 소개되었는데(계 3:5, 13:8, 17:8), 일종의 하늘의 시민권과 같다(빌 3: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엡 2:8-10, 딛 3:5).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며 아무도 그분에게 불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벧전 1:17, 3:25).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 특권에 대한 보다 큰 책임을, 적게 받은 사람은 작은 책임을 수반하게 된다(눅 12:47-48).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책망하신 말씀( 11:22-24)을 통해 마지막 날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15).  특별히 양들을 인도하고 돌봐야 할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많이 맡은 자이다.  잘못 가르치면 일반 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자다(약 3:1).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생활에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신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특별계시의 한 양식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2).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율법에 따라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안 것을 행한 것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된다(롬 2:21-23).  신약시대에는 점진적으로 발전된 계시의 양식인 복음이 완전히 주어진 시대로(요 5:24),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최후 심판을 받게 된다(롬 1:16-17, 요 12:48, 마 7:21-27). 

그러면 복음을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하고 죽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 인간 마음에 태생적으로 새겨진 율법, 즉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4-15).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는 도덕적인 감각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알려주는 내적인 감시자(monitor)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들의 도적적인 지각은 율법을 대신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느 순간, 혹은 어느 때가 되면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고후 5:1).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스데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남긴 말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교계의 거장 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인간은 마지막 죽기 직전에 무슨 말을 남기는가 중요하다. 

누군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잠 28:26)을 굳세게 믿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자다(눅 12:16-21).  인간의 마음은 날씨와 음식과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한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끝마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창 27:2).  자연재해로, 인재로, 병으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고 말한다.  요지가 무엇인가?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이러한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만 오랫동안 주어진 것이 아니다(벧후 3:9).  놓치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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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 천국이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음은 물론 천국의 열쇠는 오직 가톨릭 교회에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간기 처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림보’(Limbu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라틴어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연옥’(Purgatory)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옥 변방(邊方)에 위치한 장소를 가리킨다.  이 지옥 변방을 두 종류로 나누어 하나는 ‘유아 림보’(Limbus Infantum), 다른 하나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고 부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조 림보’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롬 3:24),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옮길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에 ‘유아 림보’는 영아 때 죽어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할 죄는 짓지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유아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에는 이것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천국(마 5:3)과 지옥(마 5:30), 낙원(고후 12:4)과 음부(행 2:27) 등에 대하여는 직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연옥’이나 ‘선조 림보’ 혹은 ‘유아 림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과 연관 지울 수 있는 성경구절이 없다.  한 마디로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만 볼 수 있는 교리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의 세례관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유아 세례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세례 자체가 중생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례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된다.  가톨릭 신학자 Ludwig Ott는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순종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갈 3:10, 5:4).  이것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갈리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생각하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다(눅 23:43).  하지만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면 세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롬 5:12).  엄밀히 말해서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창 3:19)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에 앞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인생의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그분과 교통 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혼의 죽음’(엡 4:18)이 있다.  더 나아가 장차 영과 육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과 영원히 교통 하지 못하고 영육이 심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영원한 죽음’도 있다(마 25:41). 

교회사를 보면 사람이 죽어 의식 상태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칠일안식교다.  간혹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에 ‘영혼 소멸설’(annihilationism)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한때 칼빈주의자였던 Clark H. Pinnok과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John Stott, 그리고 Stott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John Wenham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Stott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른 신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복음주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댔다.  Stott는 이단인가?  여기서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다.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탄탄하게 세워 나가면서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과 Thomas Goodwin을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며,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의 편집자이고, 사망할 때까지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의 주요 기고자였던 B. B. Warfield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세계 3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Warfield도 이단인가?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Warfield의 저서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는 조금 충격적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다. 

영혼 소멸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무존재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심판으로 형벌이 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단지 그들만의 성경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궁금하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 말이다(요 8:7).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학자 중에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말씀을 가지고 ‘사후 전도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은 후에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하셨다(눅 16:24-26).  죽음 이후에는 단테의 신곡에서 말한 것처럼 희망이란 전혀 없다(눅 16:19-31).  무엇보다도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계 21:1-4).  그러나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형벌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히 9:29).  그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계 20;12), 지옥에서 그 영과 육이 세세토록 고통가운데 있게 된다(막 9:48).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들을 향한 심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계 22:11-12).  이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눅 12:47-48).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한다면(마 11:22-24), 마지막 날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눅 20:47).  이들의 죽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해 비로소 확인하게 되며 동시에 더 크고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3-15).  그야말로 슬피 울고 이를 가는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다(마 8:12).  이렇게 불신자들이 죽은 후에는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심판을 받고 이 심판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교리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마 26:41, 46, 막 9:43, 유 7절).       

반면에 성도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다르게 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이한 결과와 관련하여 성도와 불신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요 5:29).  이는 구속을 통한 구원의 기회를 거부한 불신자(요 8:24)와 달리, 비로소 모든 죄의 질고를 완전히 벗고 구원의 축복을 보다 더 온전히 누리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고후 5:1-3)에 불신자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빌 1:23).  다시 말해 성도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긴 하지만(눅 16:22), 일단 죽으면 그의 육체는 나사로처럼 이 땅에 묻히더라도 영혼은 기쁨 중에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눅 16:23, 23:43, 빌 1:23).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고(사 25: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의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는지 모른다(고후 5:8).

여기서도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여 성도가 죽고 난 후에 심판을 받지만(고후 5:10), 이 심판은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주장한다(고전 3:12-15).  반면 또 다른 부류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롬 14:10), 이들이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마 12:36).  즉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규명받기 위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딤후 4:1).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한다(고전 9: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하나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고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은 죽고 난 후(히 9:27),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고후 5:10), 그분의 최종적인 결정에 따라(계 22:11-13),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마 16:27, 롬 2:6-11). 

Robert N. Wilkin의 진술대로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0:28).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하지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이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 경의 신자들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똑같이 경계로 기록된 것이다(고전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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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ethics: A Primer For Christians』 저자이며 생명윤리학자인 Gilbert Meilaend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대상은 태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에서 태아를 제외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제는 쉽게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서 죽은 영아나 유아들, 특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낙태나 살해로 희생된 아기들이 있다.  또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영아도 있다(삼하 12:15-18).  그런데 이 영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마 20:28)에 대해 알리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사람들을 구원한다면 “이 영아들의 운명을 어떻게 되며, 또한 구원받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한다택하심을 입은 유아들은 어려서 죽더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구원받는데, 그분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선택받은 유아들은 유아기에 죽었어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학자 B.B. Warfield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Augustine 오직 세례를 받은 유아만이 구원받을 있다고 말하는 반면 Charles Hodge는 유아시절에 죽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Herman Bavinck 역시 언약의 자손인 유아들은 세례와 상관없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아를 포함한( 9:11), 모든 사람이 아닌 영생주기로 작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13:48),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 사역에 대해 번도 들어보지 못한아들이 아담의 죄를 공유하기 때문( 5:12)에 선택을 받지 않아 구원받을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요일 4:10),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있겠느냐는 것이다( 30:18).  이 주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풀고 제한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는 Calvin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방대한 책 『기독교강요』에서는 사랑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지 중요하게 다루질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머지 판단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가톨릭에서는 사후 영혼이 머무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Pope Benedict 16세의 지시로 폐기되었지만 ‘영세’(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머무는 장소를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자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영혼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연옥’(Purgatory)이나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있는 영혼들과 달리 천국으로 옮겨가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선조 림보’ 교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어떠한 구원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눅 16:25-26), 육체와 정신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유아들 역시 원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5:12).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와 상관없이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엡 2:8).  즉 ‘영세’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4:6, 행 4:12).  무엇보다도 성경은 ‘유아 림보’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할 뿐 아니라(삼하 12:21-23), 영원히 존재할 인간의 처소는 오직 ‘천국’과 ‘지옥’뿐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계 20:10, 21:1-7).

조금 더 유아 구원에 대해 살펴보면 유아는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Christian Theology』에서 성경이 책임질 나이(age of accountability)에 관해 가르치고 있어(삼하 12:21-23), 그 나이에 이르지 않은 아이는 죄에 대한 책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최후 심판 때 이루어질 정죄의 기준은 개인적인 죄다(계 20:11-15).  그렇다면 유아들은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되기 전에 죽었거나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원죄에 관련하여 최후의 심판을 언급한 구절에서도(롬 2:4-8, 14:10, 고후 5:10, 계 20:12), 유아가 죽어서 실제적으로 옳고 그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경우 심판의 근거에 관해서는 언급한 것이 일절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성경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시 51:5).  만약 복음을 이해하고 믿기 어려운 나이에 죽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들의 공로와 의나 무죄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딤전 2:5)과 이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요 3:3).  이처럼 어려서 죽은 유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은 유아들, 특별히 불신자 자녀인 유아에 관해서도 성경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죽고 난 이후에도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사후 전도론’을 주창하는 자들이다.  증거 본문으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부터 4장 6절까지 말씀을 내세운다.  또한 구원받는 것에 있어 영아와 성인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괄적 구원론’ 자들이다.  이들도 사도행전 43절과 디모데전서 4장 10절을 증거 본문으로 내세운다.  ‘보편적 구원론’ 자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받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들 또한 증거 본문으로 로마서 5장 18절과 요한일서 2장 2절 말씀을 내세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논증이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는 이 질문들(구원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의 관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고난과 악은 인생 가운데 펼쳐진 위대한 드라마”인 것처럼 이 세상 안에 있는 악의 관한 문제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대해(욥 1-2장)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논쟁적이거나 이단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는 교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취급하고자 할 때 성경 한 구절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많은 자료에 의지할 수 있는 견해를 취하여야 한다.  물론 어떤 중요한 이슈들에서 입장 차이를 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으나 그 말씀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역설과 신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논리구조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55:8).  환언하면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문제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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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동남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죽은 사망과 실종자 숫자는 대략 30 명에 이른다.  이 일이 일어난 6년이 지난 2010년에는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 희생자와 부상자가 거의 30 명에 이르면서 아이티 인구 삼분의 일인 삼백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 쓰촨 성 지진과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한국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게 되는 사건들이 터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외신도 조명한 국내 최악의 안전사고 중 하나로 꼽힌 이태원 세계 음식거리에서 159명의 죽음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이다.  대형 참사가인재’(人災) 아니면 ‘자연재해’로 혹은 우연하게 일어났는가를 고심하면서 많은 희생자 중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은 얼마나 되며 복음을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의하면 인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죽는다고 한다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떤 이해도 없이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성경은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다( 16:15).  하지만 우리가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말을 듣고 거부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롬 19:14)에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문화권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들의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인가?

더 난해한 것은철이 들기 전에 죽은 영아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어린 정신박약자가 죽었을 경우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므로 고의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영아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3:22),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106:1),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영아를 포함한( 51:1), 모든 인간은 이미 원죄로 인해( 5:12),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9:27).

이러한 문제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한다.  즉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택함 받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14:38).  영아라도 선택받은 아이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을 없다는 것이다( 9:11).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신학자들은 선택받는 것과 상관없이 영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Ramesh Richard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유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영아살해 혹은 낙태로 죽었던 아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일까?

초대 교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것인가에 대해 일치한 주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 그리고 은사론과 종말론에서도 교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유아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의 운명에 대해 확실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유한한 지식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고전 13:12) 제한적인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조차도 죄의 영향과 피조적 한계로 인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신학자와 목사들은 짧은 단어 하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혹은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합의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죄악 된 본성을 가진 논쟁자들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어떤 중요한 주제에 있어 상당한 일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14:6).  불신자에게 있어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종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행 4:12).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최종적인 계시다( 16:25-26).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또 다른 계시는 없다.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계시의 원천이다( 1:11-12, 1:1).  모든 관점은 성경을 통해 증거를 찾고 해결한다.  이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다.  여기에는 칼빈주의자나 웨슬리주의자는 없다.  누군가 이 공통적인 특징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이단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따라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라는(행 4:12),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계시와 구원에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중보자다(딤전 2:5).  기독교 밖에서 구원 얻을 방법은 일절 없다(요 3:16).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논쟁적인 사람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형성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딤후 3:15-17).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특별한 성경해석 전통 아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성경을 해석할 때 교단과 신학적 배경, 혹은 자신이 신봉하는 늙은 교주로부터 전수받은 조잡한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가능성이 많다(고전 1:12).  이것은 우리가 인용할 본문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준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이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신학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자신을 멸망으로 초래할 것이다(벧후 3:16).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요 1:1-5), 그분께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셨는지(히 10:11-14),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갈 3:13),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를(요 14:21), 성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도 알고 계신다’(요 21:15-17).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말이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롬 8:38),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9).  이 구절은 바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조건적인 그분 사랑의 증거다(롬 5:8).  일단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현존하는 어떤 능력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탄이고 나발(?)이고 없다(삼상 25:25).

하지만 나는 어떤 것에 대하여도 심지어 내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것에 조차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었거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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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율법주의’란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은 물론, 율법에서 유추할 있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생활을 구애받게 없다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 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케 되었으므로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로마서 3장 28절 말씀에 나와 있듯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2:8)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2:1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4:1-4),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종류의 율법이든 이상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진노를 이루게 하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4:15),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이다( 5:18).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율법 폐기론자 혹은 도덕률 폐기론자’라고 부른다(롬 6:1-2).  이들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 안에 속한 인간의 삶을 경시하거나 지식에 근거한 영적인 삶만을 우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별히 Martin Luther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Johann Agricola 같은 사람도 가장 전형적인 반율법주의자로서, 오늘날 역시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율법 하면 구약의 모세 율법만을 생각하고 반대로 복음 하면 신약의 복음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롬 1:19-21)과 인간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 2:14-15), 구약 모세의 율법(성문적 율법)인 도덕법(출 20:1-17)과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시민법(레 25:39-41)과 신약의 산상수훈의 교훈(마 5-7장)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규범과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이란 Jonathan Edwards가 『구속사』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의 복음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사역(고전 15:1-8)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계시, 즉 에덴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 이후( 3:15), 각종 언약의 내용들( 19:1-6, 5), 더 나아가 예수님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 선포( 53:1-12, 31:31-34), 역시 복음일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역사 전개를 위한 경륜의 방법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구속사역을 행하실 것에 대한 언약( 9:1-10)과 구원의 객관적 조건을 제시하는 율법을 주로 강조하셨다( 3:24).  반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10:9-14), 천국에서의 최종 구원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 맺어주신 새 언약( 26:28)과 이미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모든 죗값을‘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치르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을 주로 강조하셨다( 9:11-15).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시대’이고, 신약은 ‘복음시대’라는 통념이 생겨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성육신 사건)으로 전후로 나누어지면서 그 강조점은 다르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속사역을 통한 죄인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이 된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이 그 역할은 다를지라도 구원이란 목적 하에서 서로 연결된 계시들 인 것을 보여준다( 3:22-24).  

먼저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여 인간이 죄인인지를 보여주고( 7:7), 죄의 대가인 형벌을 규정한다(딤전 1:8-10).  또한 모든 인간은 다윗의 고백한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죄인(시 51:5)인 동시에 태어나서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롬 5:12)로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형벌받을 마땅한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여기서 율법의 약점을 찾는다면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제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7:19, 10:1).  반면에 복음은 죄인에 대한 정죄에서 머무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속량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무서운 죄인을 구원하기까지를 선포한다( 3:13).  

그러므로 신구약을 불문하고 선택받은 자는( 1:4),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결과인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딛 3:5), 구속의 은총을 적용받아 그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살후 1:8-9)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역시 율법의 적용을 받아 심판을 받게 된다( 2:12-16).

조금 풀어서 말하면 율법의 근본 역할 자체가 복음의 전단계 계시인 동시에 율법은 필연적으로 복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그 목적이 상호동일하게 인간 구원이란 점과 그 수여자 및 집행자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점에서는 같다(사 33:22).  그러나 맡은 바 기능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롬 3:19-20), 어떻게 정죄당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딤전 1:9-11)을 제시해 주는 반면 복음은 율법이 죄인으로 규정한 자(롬 7:7)와 그에 관한 형벌의 해결까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갈 3:13). 즉 율법이 최소한의 선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 규범이라면 복음은 인간에게 절대적 선을 보여주는 영원한 규범이라고 볼 수 있다(히 7:28).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율법이 어떻게 해서 복음과 같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일 수 있는가(사 33:22)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야만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눅 5:8, 19:1-10, 행 16:30-32).  또한 율법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 것을 알아야(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롬 10:4, 갈 2:21).  그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갈 3:24), 율법은 우리를 복음이라는 완전한 계시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롬 3:31).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만이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행할 수 있다(롬 8:3-4).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며(롬 13:8-1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다(갈 3:24-29).  믿음은 율법을 적합한 자기 자리로 돌려놓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 안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대인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딤전 1:8).  요지가 무엇인가?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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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쉽게 율법이라고 통칭하는 ‘언약법’의 실체는 그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며 각 분야마다 또는 전체로서 범위 및 역할이 다양하고 구원의 복음과도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갈 3:22).  흔히 종교사학파에 속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율법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율법의 본질을 창조부터 종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약과 대응되는 구약의 언약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신약시대의 복음과 관련하여 갖는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갈 3:24)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시 19:7-1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율법서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이 대부분 각종 제사 제도, 정결 예법, 이스라엘의 절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율법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이 율법을 포함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즉 율법은 반포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출 24:12),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딤전 1:8).

먼저 구약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제사 제도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모세오경에 기록된 제사 규례(레 1:1-7:38)는 그 세밀함과 구체성, 그리고 반복적인 강조 등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이런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죽음(빌 2:6-11)과 부활(행 2:23-24) 이후 폐지된 것을 생각한다면( 2:15), 우리에게 과연 그렇게 상세한 기록이 필요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규례를 상세히 가르치시고 그 율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 즉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레 17:11)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희생제물의 피는 정결함과 용서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었다’ 사실상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히 9:22)  아울러 제사장이 매일 서서 반복되는 제사와 짐승의 피로서는 결코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다( 10:11).  오직 무흠 하신 예수 그리스도( 4:15)의 구속의 보혈만이 단번에 영원토록 모든 죄인의 죄와 허물을 사할 수 있다(히 9:12).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적으로 완벽하고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8:1).  

그런데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갈 3:10).  율법이 성취할 수 없는 요구 사항들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범죄 한 인간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다(롬 2:13).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았다(갈 3:13).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히 5:8-9), 죄 없는 희생, 즉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롬 5:18)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온전하신 분이었다.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짊어지셨다(신 21:23).  결국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생명에 이르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받는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이런 의미에서 구약 율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이기에( 8:5), 우리는 율법의 각종 규례와 가르침을 통해 그것들이 예표하는 실체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바라볼 있어야 한다( 3:13).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율법은 결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율법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율법 중의 핵심인 십계명( 20:1-17)도 크게 그 내용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신 6:5)과 이웃 사랑’이다(레 19:18).  만약 율법의 가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표면만을 바라본 사람들은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억지스러운 계명으로, 혹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법률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 22:36),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이것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12:28-31).  십계명과 다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두 계명을 지킨다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롬 13:8-10).  말씀의 의미는 구약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에 바탕을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바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례인 것이다( 22:35-40). 

사도 바울 역시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13:10)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3:20, 3:11, 5:4).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옥에 가야 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6).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이것을 있다면 율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율법을 받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는 것이다(신 30:10).  이런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출 24:12).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신앙(출 20장, 레 1-7장)과 공동체 내에서의 질서 유지(신 19-25장), 더 나아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였다(신 10:12-22).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거스리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셨다(신 30:15-20).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반복하는 역사를 전개함으로 인해 그에 따른 번영과 오욕을 역사에 남겨야만 했다(히 3-4장).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전 10:11).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하며 율법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 14:21, 계 1:3).  아울러 불순종하는 삶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엄청난 불행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고전 10:1-12).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율법은 구약시대의 백성만을 위한 법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는 생명의 법이 된다(마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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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국민의 인권이 보장됨을 원칙으로 하여 자유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나라에서는 일 년에도 수백 건의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지며 또한 폐지된다.  어떤 법률은 제정된 후 몇 번 사용되지도 않고 개정, 혹은 폐지되어 그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의 사람들조차 그 법률의 존폐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법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모든 상황과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률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법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상황에 맞게 개정되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불안전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법은 지극히 엄정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번 제정 반포된 후에는 결코 폐지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일 그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이고(레 26:14-39),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임을 성경은 언급한다(레 26:3-13).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이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사 33:32).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율법을 기껏해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나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 법전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이 모든 피조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때(롬 2:15),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먼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제정하신 ‘자연법칙’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속에 특별한 본성을 심어 놓으셨다.  이 본성에 따라 곡식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1:11-12), 동물들은 육식 혹은 채식을 하며( 1:21-25),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르고 수많은 별들이 궤도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 1:14-19)도 모두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거역할 없는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서의 율법은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법칙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롬 1:19-21). 

예를 들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 2:23),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고( 5:45),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신다( 8:22).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이적을 통해 범죄 한나라와 사람들에게 진노와 경고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창 6:5-7, 7-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법칙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내재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 11:8).  반면에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자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법을 발견할 수 있다(골 3:10).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는 데 반해 불신자들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진다’(엡 4:18).

또한 이 율법에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양심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2:15).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엡 4:19)과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전 10:15).  하지만 이러한 양심과 이성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5:12), 많은 부분이 손상을 입고 부패해졌다( 17:9).  한 마디로 ‘썩어 문드러졌다’(창 6:12).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이성만으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3:12).  그러나 재물 많은 부자청년처럼 오직 상대적인 선만을 행할 수 있다( 19:16-22).  또한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딤전 4:1-2) 그 사람에게는 양심이 없는 것처럼 도덕적 불감증의 상태에 빠져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전한다(딤전 1:19-20).  그러나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러한 양심을 통해 사람들은 신앙유무를 떠나서도 도덕적인 것을 보고 선하게 여길 있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여기는 본능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8:9).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 양심은 가장 방해꾼이다( 10:22).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양심이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양심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계속 권유할 뿐만 아니라(삼상 24:5-7), 죄에 대하여 평가할 있도록 판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4:16).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율법을 새겨주셨다( 8:10).  따라서 인간의 심령에 새겨진 양심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렇게 피조 세계에 주어진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자연율과 양심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할 수 없다(롬 1:21-22).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런 ‘기본적 율법’ 이외에 성경에 기록된 ‘특별계시’로서의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율법’이라고 부르는 ‘성문 율법’(成文律法)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7:7-9), 그분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있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범죄 한 인간을 위한( 7:28),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아는 것처럼 그 율법을 준수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딤전 1:8).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3:20). 왜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갈 5: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롬 7:7).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필연적으로 요청됨을 직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다( 3:19-24).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2: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갈 3:22, 2:8).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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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율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 예수님을 삼위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들의 혈통적 선민의 지위에만 연연하여(마 4:7-10, 요 8:31-59), 구약만을 믿으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지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율법 절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부류는 ‘도덕률 폐기론’ 혹은 ‘반율법주의’로 불리는 자들로(롬 7:7-13),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 율법의 구속력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의와 형벌의 요구를 그분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유 4절),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으므로(갈 5:1),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성경적인 율법관’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엡 2:8), 여전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한 것으로(롬 7:12), 자기 힘이 아닌 성령을 힘입어(롬 8:4),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한다(겔 11:19-20). 즉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바른 도리(道理)로 율법이 교훈하는 삶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의 고유한 본질에 대해 알아본다면 율법은 근본적으로 그 법의 주체자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사 33:22).  나아가 그 원리가 그분의 창조와 섭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집행과정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므로 절대적으로 완전하다(시 19:7).  율법은 선택된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과 내용으로 체결한 법이지만(출 19:1-24:11), 구속사점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 효력이 시간적인 면에서 제한이 있고(마 11:13) 능력면에서 한계가 있다(히 10:1-2).  하지만 그 내용 자체만은 영원히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시 119:89).  따라서 율법은 단순한 구약시대의 생활규범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과 연결되어 매우 오묘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갈 3:24).  원칙적으로는 신구약을 망라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 규정 및 인간 양심에 내재(시 37-31)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까지 다 포괄하고 있지만(롬 7:7), 이것을 조금 더 구분하면 둘로 나누어진다.  

먼저 ‘기본적 율법’(Elemental Law)이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자체 안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신 29:29, 롬 2:15).  이는 그 대상이 비이성적 피조물인가(롬 1:19-21), 혹은 이성적 피조물인가(롬 2:14-15)에 따라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비이성적 피조물에 내재(內在)한 고유한 특성을 가리켜 ‘자연율’(Natural Law)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도덕률(Moral Law)은 자유 의지를 갖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이성과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롬 2:15).  도덕률은 이성적 피조물 내부에 선천적으로 심어준 것이므로 이에 대해 무지나 몰이해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강압적으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신적 지혜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것이므로 그 대상도 도덕률의 내용이 합리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의 『기독교강요』을 인용하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겪게 되는 죄책감을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안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 이성과 양심으로 반영된 것이다(창 4:13).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홍수가 인류 대부분을 쓸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창 6:5).

기본적 율법이 창조 시부터 모든 피조물 내부에 심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인 반면 ‘성문적 율법’(Enactive Law)은 그 후에 특별 계시의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히 1:1), 하나님의 의지로써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마 22:37-40).  이는 기본적 율법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닐 뿐 아니라(출 20:1-17), 간접적이고 제한적이나마 멸망받을 인간 구원의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탁월성을 지니고 있으며(갈 3:19-22), 이 성문적 율법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이 세 부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법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법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점은 어떤 측면은 한시적이고 또 다른 측면은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먼저의식법’은 구약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제사법( 1:1-7:38)과 성결법(레 17:1-22:33), 그리고 절기( 23:1-44), 특히 종교생활의 의식적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 24-27), 입법 원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원리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모든 제사에 관련된 의식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10:1).  따라서 법은 아직 예수님께서 성육신 강림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 전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 사역의 여러 원리와 측면을 반영하지만( 20:28), 그것이 예표 하던 본래의 내용이 성취된 신약시대에 와서는 규범으로서의 문자적 구속력은 상실되었다( 8:7, 13).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에 매일 드리던 모든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다( 10:10-12).  십자가 사건( 19:30)을 통해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제사와 의식들이 끝이 난 것이다( 15:38).  따라서 오늘날 짐승을 잡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26:28)을 힘입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4:16). 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의식적 율법이 성취된 것이고( 10:19-20), 신약의 예배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4:24), 생활 속에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이다( 12:1). 우리가 더는 의식법의 구속을 받지 않지만 그 배후의 원리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른 하나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함께 모여 살면서 성결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시민법’이다.  이 법은 재산법( 21:2-11, 19:14)과 형사법( 21:12-32, 21:1-9, 21:18-23, 24:16, 25:1-3), 이혼법( 24:1-4)과 재판법( 23:1-9, 19:15-21, 24:17-18), 그리고 민사법( 21:15-17)과 보장법( 23:24-25, 24:6-13, 14-15, 25:5-10)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분야의 율법은 그야말로 특정 시대와 공간의 상황, 역사 발전 단계에 맞추어 주어진 매우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법이기 때문에 자구적으로 영원히 적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데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문제를 판결해 이런저런 법을 만들어 주셨지만, 시민법도 예수님이 오시므로 막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21:43).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만을 두고너는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 16:16)이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10).  따라서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시민법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15).  그러나 이 법들의 배후에 있는 원리는 우리의 행동 지침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신약에 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시민법의 규정보다 그 원리를 극대화하여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더욱 고도의 시민법 규정을 주셨기 때문이다(마 5-7장). 

끝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을 규정한도덕법’이다( 12:28-31).  이 도덕법은 기본적 율법 가운데 도덕률(道德律)을 요약하여 성문화 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구속력을 가진 모든 법에 기본이 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구 불변한 창조와 섭리 원리에 근거한 것이므로 시대에 따라 불변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 및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강령이다(마 22:37-40).  이 법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8문항에서 이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도덕적 율법은 십계명에 요약적으로 포함되어있다. 이것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성으로 주어지고 판에 친히 써주신 것으로 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 나머지 여섯 계명에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10:4).  

도덕법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범죄 한 인간이 지키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10:4).  하지만 성경은 이 법에 대해서는 다른 두 법(의식법과 시민법)과 다르게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119:89).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의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공포된 가지 계명( 22:37-40)은 도덕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는 결국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눅 10:26-28).   도덕법의 핵심은 하나님( 6:5)과 이웃 사랑이며( 19:18), 주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답게 살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법으로( 3:31),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토록 존속되는 이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5:17).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이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폐지된 율법으로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의식법과 시민법이다(엡 2:15).  이 두 가지 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찢어질 때(눅 23:45), 의문에 속한 각 절기들과 안식일, 그리고 제사에 관한 모든 의식들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골 2:16-17, 갈 4:9-10).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율법에 내재된 정신과 원리들, 즉 거기 담긴 교훈적인 면과 내적 의미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할례’가 ‘세례’로, ‘무교절’이 ‘성만찬’으로 ‘제사’가 ‘예배’로 이어진 것이 그 사례이다.  그리고 폐지할 수 없는 율법으로는 도덕법이 남은 것이다(마 5:17).  

만약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폐지한다면 죄가 죄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롬 3:20, 5:13), 결국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율법은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죄를 지적해 주는 거울의 역할을 했지만(롬 7:7),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의 역할이 달라졌다.  즉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롬 5:20)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딤전 1:8).  따라서 율법은 비록 부정적인 측면을 반영하기도 하지만(롬 4:15) 반면에 인간 구원에 공헌을 하며 구원사역에 필요한 것이다(갈 3:24).  결론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을 받았지만(갈 3:13) 율법 자체만은 삶의 지표로 삼아 존중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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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신자들의 성화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육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다소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난 자녀일지라도(벧전 2:9), 그는 여전히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이며( 7),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6:6-14), 일생동안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죄와의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4).

 

Louis Berkhof 역시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Sinclair Ferguson도 성화의 기본 원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등과 긴장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Christian Spirituality : Five Views of Sanctific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특징은 잠잠함이라고 강조하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개혁주의 신학은 순례의 여정과 거룩한 전쟁(갈등)을 강조했다. 개혁주의는 그러한 갈등을 운 나쁘게 일이 잘못되어 유발하거나 믿음 또는 영성이 부족의 결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의 본질적인 영광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갈등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고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면서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의 풍조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간추린다면 갈라디아서 517절에서 나오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육체와 성령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권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행하려는 이러한 의지를 가로 막고 육신의 욕망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는 힘도 작용하기 때문에( 4:1-3), 비록 성도가 믿음으로 거듭났더라도( 2:8), 죄에 물든 옛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 4:17-24), 여전히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6:12).  다시 말해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내부적으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악한 육신의 욕망이 있고( 4:19), 외부적으로는 성도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27).  사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은 확실하지만( 8:1-2), 죄는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Calvin은 이러한 갈등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자 속에 죄는 지배력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의 고백인 로마서 712-2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신학자들은 바울이 ‘거듭난 후’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듭나기 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성도로서 현재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7:25).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고전 3:16),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1:3), 속으로 탄식하며 최종적인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8:23).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 3:12-14)에 여전히 장막 집에 살아가는 우리는(고후 5:1), 육체의 욕망과 영적소망이 서로 충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23).  따라서 성령을 좇는 삶은 육체를 따르는 삶과 공존할 수 없고( 8:1-11), 만약 성령을 좇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5:18, 25), 이 둘은 서로를 전적으로 대적하기 때문( 5:16-17)에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삶 자체가 ‘이미’( 1:7), 그러나 ‘아직’ 이라는( 4:30), 두 가지 시점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제약받는 몸,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벧후 1:13).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체를 따르는 삶은 과거에 속했기 때문(벧전 4:3)에 성령의 사람에게 있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갈등은 일어날 수 있어도 육체를 따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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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성화의 진행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들을 찾아본다면 고린도후서 71절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히브리서 1214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115절에는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 구절들에서 중요한 단어들은 ‘이루어’, ‘좇으라’, ‘되라’는 말로서 이 구절들만 본다면 성화의 진행은 인간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내적인 힘을 인간 자신의 것으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볼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서 기독교 밖의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도덕주의’와 기독교 내에서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은혜주의’로 갈라지게 됩니다.  사실 성화 과정에 있어 우리가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은 인간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3:5), 성화를 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는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거룩해지려고 몸부림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화를 이루는데 있어 우리와 하나님이 협력한다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며, 우리가 거룩해 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살전 3:13), 우리도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요일 3:3).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의 진행 과정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위에 맞는 방법으로 그분의 일에 협력한다는 것이지 그 역할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성화사역에 있어서 독립적인 행위자가 되어 성화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사역이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성령을 통해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성화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를 오해해서 신앙생활의 수동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마치 성화의 과정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가 해야할 일(살전 4:3-6), 즉 도덕적인 명령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사실(고전 3:16-17, 13:4)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벧전 1:15-16).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확실한 역할 중의 하나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12:5-11).  먼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타락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했고( 2:12-15),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축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역할과 성자 하나님의 역할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13:20-21).  또한 성화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화를 완성하셨고(고전 1:30), 믿음의 경주( 12:2)와 우리의 본이 되셨으며(벧전 2:21), 사도 요한도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2:6).  나아가 베드로 사도(벧전 1:2)와 바울을 통해(살후 2:13), 신자의 거룩한 삶을 언급한 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수준 높은 성화된 삶의 모습이며( 5:22-23), 우리가 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8:14, 5:16-18).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성령의 요구와 원하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만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역할도 있는데, 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의지하고 성화를 위해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사용할 것( 6:13)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12:1).  또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할 것을 인식하였기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라’고 했으며( 8:13),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체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5:24).  사도 요한도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순결하심같이 자신들도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고(요일 3:3), 바울 역시 고린도교인들에게 음행을 피하고(고전 6:13), 믿지 않는 자와 연합하지 말며(고후 6:1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를 것을 명했습니다(고후 7:1).  히브리서 기자 또한 화평함과 거룩함 없이는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했고( 12:14), 베드로도 신에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경건에 힘쓸 것을 강조했습니다(벧후 1:4-7).  이렇게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절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벧전 1:15-16), 신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살전 4:3-7).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거룩함의 습관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숙함을 측정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계속되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4).  그러나 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우리가 빨리 성화될 수 있는 지름길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된 것이 없고,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앞서간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한 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1:1-6), 기도하고( 4:6), 찬양과 감사(살전 5:18)와 예배( 5:18-20), 그리고 사랑의 수고(살전 1:3)와 구제를 통해( 10:2),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28:19-20), 지체들 간에 교제를 가지며( 10:25-25),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살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5:23).  따라서 성화는 거룩하게 만듬이라는 그 문자 의미 그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소명에서 양자되기까지의 과정(1:17)을 거쳐 값없이 주시는 선물(2:8)로 구원을 획득한 인간이 이제 남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마땅한 응답으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자체를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비록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각 성도가 스스로 성화되어 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성화가 이루어지기(살후 2:13)에 성화는 엄연히 그분에 의하여 주어지는 구원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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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보통 성숙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단어가 성경적인 이유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구절과 마태복음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71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온전히 지킬 능력도 주셨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길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 없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John Wesley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이것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고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완전’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 완전 성화의 가능성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인간이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해 질 수 있고,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때문에 알미니안주의나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시키지 않고 성화를 독립된 제2의 축복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적 논의에서 성화는 신자들의 점진적인 정결, 즉 순간적인 ‘지위상’ 혹은 ‘법적인’ 칭의를 받은 후에 이 과정을 통해 점점 거룩해 진다고 말합니다.  D. A. Carson 역시 이 성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신자의 회심 때 하나님을 향해서 한 개인이 마음을 정하는 첫 시점을 가리킨다는 것이 바울 신학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은 없지만(고전 1:7), 은사 문제로 시끄럽고(고전 12-14), 서로 간에 시기와 분쟁이 심하며(고전 3:3), 심지어 음행과(고전 5), 법정 싸움으로(고전 6:1-11), 여러 파로 나누어진(고전 1:12), 이상하게도 거룩하지 않고 싸움이 많은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have been sanctified)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전 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신자가 세상에 살면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 성화를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불안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27).  사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신빙성 있는 성경구절들은 없지만, 신자가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구절들은 신구약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20:9, 7:20, 5:16-24, 3:12-14, 요일 1:8).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14-2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물론 14, 18, 24절을 근거로 바울의 고백이 성화되기 전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John Murray가 말한 것처럼 이 고백은 성화된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Campbell Morgan 역시 성화에 대해 “성화는 완전히 죄에서 놓이거나 투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주도권과 파멸에서 놓여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말했고( 3:2),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죄 사함을 위한 기도가 신자의 삶 가운데 매일 반복되어야 할 기도의 모형인 것처럼(6:12), 성화란 무죄하고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한 거룩을 이루라고 한 말(고후 7:1)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온전히 거룩케 하시기를 바란다는 기도(살전 5:23)는 바울이 그들에게서 희망하는 목표, 즉 거기에 도달할 사람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도덕적 기준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도(요일 3:6), 누군가가 완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현재형 동사로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신자는 습관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일 3:9).  물론 성경에는 값없이 은혜 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했고( 4:1-8), 심지어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6:9), 이들이 의인이고 완전하다고 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3:9).  그 이유는 성경은 범죄치 아니한 사람(왕상 8:46)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20).  나아가 성경은 세상에 살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고전 5:10), 오히려 누구든지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일 1:8).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하심과 상반되게 거룩하게 자라 가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신자의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멈추지 말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후 7:1).  요약하면 Sinclair Ferguson이 말한 것처럼 성화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고(고전 1:30), John Murray는 이사야( 6:5)와 욥(42:5-6)이 하나님의 존전에 섰을 때,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한 다른 성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성화된 사람일수록 참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지 못한 사실로 인하여 안타까와 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을 향한 사랑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고, 예수 안에서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급을 얻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며, 아직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무게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어 죄에 대한 증오가 한층 깊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하심에 대한 계시에 가까이 접했던 모든 주의 백성들이 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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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에게 있어 ‘경건’이란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을 분리해서 인간이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소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경건주의 또는 은둔적 신령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는데,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경건에 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 오는 것이다.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구별된 삶’, 즉 신앙생활에 있어 믿는 것과 삶의 방식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벧전 2:9), 이렇게 그분의 은혜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2:8), 이 세대을 본받지 말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1-2).  물론 우리는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도 아니고(고전 5:10),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정하신 때까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5:13-16).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것은 세상 속에서 살라는 말씀이 음란하고 죄 많은( 8:38),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고 부패한 세속적인 문화를( 2:2),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적당히 타협하고( 5:11),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4:4).  다시 말해 도살의 날을 위해 사치와 방종과 쾌락을 즐기며 살지 말아야 하고( 5:5), 무엇보다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기는 살되 세상 풍속을 본받거나( 12:2),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2:2), 즉 악한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벧전 4:3), 오히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2:15-16), 특히 불신자들 앞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입니다(벧전 2:12).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인데(11:33-36), 이를 위해서 절대 요구되는 삶의 원리가 있다면 바로 경건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만이( 1:27),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연예인들처럼 특별한 몸짓이나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주목 받는 신앙을 가진다든지 혹은 세상과 단절하여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사는 생활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 것입니다( 14:21).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Sinclair B. Ferguson은 “성화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가운데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3:10).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화에 대해 Abraham Kuyper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영혼에게 있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거룩함이다.”라는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 12:1, 14)와 야고보( 1:22), 그리고 베드로 역시 독자들에게 모든 행실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이렇게 신약성경은 많은 부분을 여러 교회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자라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2:22, 4:13-15).  이 모든 도덕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화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한결 같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자의 삶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있어 더 거룩해져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2:15).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6:12-13),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은 온전한 성화가 완성될 수는 없겠지만( 3:13-14), 만약 우리가 죽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때에(고후 5:1-7), 우리의 영혼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해지므로 우리의 성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40-44).  예를 들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믿는 자는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게로 나아온다고 했는데( 12:23), 이는 거룩한 성 하나님 앞에는 부정한 것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요한계시록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21:27), 만일 성화가 우리의 육체까지 포함한 전인적인 것임을 인정한다면(고후 7:1, 살전 5:23), 이 성화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부활의 육체를 입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5:49).  다시 말해 회심 이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6:20), 회심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분명히 성화가 시작되었고(고전 6:11), 이 성화는 그리스도인 삶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3:21).  따라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죄와 일평생 싸워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6:10-18),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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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란?

논쟁거리/성화 2018. 7. 7. 13:21

구약성경 이사야 61-7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으로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성화시키시는 사건인데, 이 환상의 장엄함은 보좌 주위를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최고의 높은 차원임을 말해주는데, 사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백성의 무가치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댈 때에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자신의 죄로부터 분리되어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함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죄로부터 분리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이사야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화되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새 규범과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더 이상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20, 요일 1:8).

 

영국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John Owen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더욱 성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서로 연결된 동반자로서 항상 성화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처럼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거룩한 삶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고전 1:30)과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19).  이 문제를 두고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8:29).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3:27)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성화된 분이자(요한 10:36), 완전히 거룩하신 분으로(17:19), 우리가 진리되신 그분을 구원의 주로 믿고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이 되는 그 순간부터( 1:34-35),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죄의 유혹( 4:1-11)과 사탄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서( 2:14),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2:5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가운데( 5:7-10), 흠도 없고 점도 없이(벧전 1:19),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9:24).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9:20)라고 외치신 후에 왕의 존엄과 함께( 18:37),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23:46),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 2:8)과 성화의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벧전 3:15).  그리고 삼일 만( 16:21)에 부활하셨을 때( 1:3), 성화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은 신약에서 말하는 무궁하고( 7:16), 불멸한 생명의 능력으로( 6:9),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모했는데( 20:19, 26),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5:20), 처음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3).  따라서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8:9), 그들의 삶에서 성화가 진척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6:5), 그분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9).

 

신약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았고(고전 6:11), 사도행전 2032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을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의 처음 단계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요일 2:15), 죄의 세력으로부터 확실하게 단절시킴으로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고(6:6), 나아가 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신자의 삶을 죄에서 내어주는 것을 막아줍니다( 6:11, 18).  이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된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할 것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6:12-13).  다시 말해 죄의 권세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 6:5), 죄의 유혹과 시험을 뿌리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7).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12-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3:5),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17:22),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6:14),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은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12:12), Calvin은 “사탄은 성도가 절망으로 미치도록 유혹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 같이, 죄로부터의 우선적인 단절은 더 이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를 사랑하지 않도록( 12:1),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 12:4),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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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한 교인이 죽어 장례식을 치르는데 예배를 인도하던 목회자가 죽은 교인과 성도들을 앞에 놓고 이 성도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때에는 신앙이 초보인지라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말이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이미 고인이 된 그 사람에 대해 비록 그가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한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내적으로 중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례를 맡은 목사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천국에 갔다, 안 갔다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최종판결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8, 20:11-15).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듣는 사람 전체가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분명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지옥에 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7:21).  사실 구원의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사람들 마음에 들려는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생명의 복음을 싸구려 다른 복음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합니다(1:8).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성경에 보면 한 때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들을 내놓고 있지만,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이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심의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유다는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삼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9:1-6).  나아가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 7:21-23)바울의 동역자이며( 24), 사랑을 받았던 데마는( 4:14),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헌신짝처럼 버렸고(딤후 4:10), 마술사 시몬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8:13), 성령의 능력을 주고 사려다 베드로 사도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8:18-23),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한 때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칼빈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예정의 토대에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고, 반면 웨슬리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처음에는 참된 신자였지만 죄로 인해 타락의 길을 갔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회심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 815-16절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성령의 주관적인 증거가 있는데(요일 4:13), 이 증거는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수반하지만( 8:14), 만일 성령께서 진정으로 개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면 그는 소위 바울이 말한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 성품들을 형성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5:22-23).  물론 문제는내가 이러한 특징들을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나의 삶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런 특징들을 나의 가운데서 보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성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속일 있었다는 예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는 후메네오와 빌레도처럼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고 혼란과 분열을 야기 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딤후 2:17-18), 이들의 사역의 결과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대화를 하든, 기도를 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처럼 삶의 열매를 통해 그들을 있다는 것입니다( 7:16-20). 

 

이러한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의 중요한 부분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일 2:4-6).  물론 완벽한 삶을 살거나 혹은 완전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더 나아가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그분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4:25-32).  다시 말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2:17-22),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삶 가운데 분명히 순종의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요일 3:9-10, 24, 5:18), 무엇보다도 그 순종의 결과를 보일 수 있는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다른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요일 3:14, 25:31-46).  따라서 누군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 중에 하나인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계속 믿을 것이며, 또한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고( 1:23), 처음 시작할 때 믿은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것입니다( 3:14).  반면에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7:21), 삶이 불의로 가득하거나(13:23-27), 주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저버린(14:21), 가룟유다, 혹은 데마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세상으로 돌아간다면(딤후 4:10), 그는 실제로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딤후 4:10).   

 

이처럼 신앙을 저버리고 떨어져 나간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혹은 이 사람은 한 때 그리스도인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믿다가 타락한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의 과거에 대한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에서 균형 있는 교리를 가르치는 대신 목회자들이 변질된 교리, 즉 한번 신앙을 고백하거나 물세례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식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11:52).  그 결과 전혀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도 물세례를 받을 때 입술로만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7:21), 그렇지 않다는 거짓된 확신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지금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가?”라는 질문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를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견디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22,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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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T. Wright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칭의를 설교하는 것은 할 일의 절반 밖에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구속구원에 대해 혼동하거나 로마서 425, 109절과 베드로전서 13절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칭의란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로운 자라는 법적 선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옛 사람은 죽고 그와 함께 새 사람을 입은 현재 완료형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는 선언이 종말적 선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Calvin에게 있어 칭의가 종교개혁의 핵심적 교리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지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행함은 인간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지만 행함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2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윤리와 도덕적(순종) 열매가 전혀 없더라도 처음 믿을 때 얻은 의는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켜주시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19:6), 성도( 30:4), 성별( 3:1), 성화(살전 5:23)라는 단어를 발견한다면 이는 대부분 ‘분리’, ‘따로 데어냄’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번역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뜻을 지닌 모든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잘라내다’, ‘이별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사물이 ‘거룩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세속으로부터 또는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거룩함은 단지 무엇으로부터의 분리만을 뜻하지 않고 무엇을 향한 성별’(따로 떼어내어 거룩하게 준비함)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 거룩함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20:7-8).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13절과 히브리서 21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성품, 즉 그분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같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그의 거룩하심( 11:44-45)을 알리시는데, NIV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who makes you holy)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너희를 성화시키는’(who sanctifies you)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란 사람, 장소, 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 즉 사람, 사물, 장소가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결별한 뒤 또 다른 차원의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보면 땅(호렙산)이 거룩해진 사건이 나오는데, 사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계시하시기 위해 따로 구별하신 장소였고( 3: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기 전( 19:10-14)에 시내산은 사람이나 짐승을 성결케 하신 곳이었습니다( 13:2).  성결은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안식일( 5:12)과 성막과 기구( 30:25-29), 성전(대하 7:16)과 도피성( 20)과 가옥(27:14)을 구별시켰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거룩은 사람이나 장소를 구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역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시는 장소(11:1)였기에 거룩한 곳이었습니다(4:5).  그리고 베드로전서 215-16절의 말씀처럼 ‘거룩’이란 단순히 도덕성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총임을 알 수 있는데(고전 6:11), 그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로 성결해지기 전에 그분이 먼저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2:11-14).  사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장소나 성전의 기물들 그리고 성전은 본래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성별된 사람은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28:9).

 

이렇게 구별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올 세대의 생명을 맛본 사람들로서 그 미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실현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양자 됨( 8:15)과 칭의( 5:1)가 그러하듯이 구속이란 이미’( 1:7)이며 동시에 ‘아직’인 것입니다( 4:30).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를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3:20).  이런 우리들에게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벧전 1:15-16),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 1:27)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삶( 5:27)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벧후 3:14).  비록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신자들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선언하지만( 6: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매일 죄와의 전쟁( 6:10-19)에서 주님의 승리( 8:37)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해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심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실질적인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기(벧전 5:8)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 12:14)과 죄를 정복함에 있어( 12: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습니다( 1:6).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칭의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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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전해질 때 구원을 받는 사람과 정죄를 당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데( 16:16), 이것은 복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영원한 시간을 천국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지옥에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24-29).  그래서 성경은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 있으리니’( 9:27)라고 말합니다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고후 5:10).  성경에 보면 바울 같은 사람은 복음에 반응하지 못했던 종교적 데러범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9:15),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은 낙원에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23:43).  반면에 열 둘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도의 직분을 받은 선택 받은 가룟 유다( 6:12-16)는 돈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1:18), 복음 전파사역을 도왔던 데마 역시 바울의 조력자이며 필요한 존재였지만( 4:14),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한 자로 전락했습니다(딤후 4:10).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서는 죽는 날까지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Martin Luther는 천국에 가면 세 가지 놀라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첫째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6절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해석하기가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지금까지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도 당황하게 만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이 구절을 놓고 대략 다섯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  존재하는 일이 없는 상황을 가설적으로 설정해 놓고 가상적인 배교를 경고한다는 해석  외관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거듭난 신자가 아닌 거짓된 회심자라는 해석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잃는다는 해석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해석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최우선적인 임무는 본문 말씀이 그것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먼저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본래의 의미에서 현재, 즉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의 압력 속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잠시 동안 동행하다가 고의적으로 돌아서서 주님을 거부하고 상반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배교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0:26).

 

그런데 이 구절을 놓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던 이들이 믿음에서 떠날 때, 그 이후에 원래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문제를 두고 논쟁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정말 거듭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John Calvin은 본문 구절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17:12). 확실히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중생의 영을 부어주시며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지고 장차 상속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보증을 받으며 똑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강요』에서는 주님이 보호 하에 선택된 자들의 견인이 확실하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 예를 들면서( 22:32), “한 번 선택된 사람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말을 요약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타락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신학자 Michael S. Horton 역시 한번 구원받은 자가 항상 구원 받은 것이라는 원리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 이를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반면에 John Wesley는 본문을 주해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고히 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독자들은 분명히 전향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기독교 신앙과 체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따랐던 공허하고 무의미한 유대교 형식주의 되돌아가려는 것은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의도적인 배교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희망 없는 버림받은 상태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Explanatory Note Upon the New Testament』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놀라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부터 타락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사도는 고의적으로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다 버리고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10-11),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10: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부터 타락한 것이 고의적이며 완결된 행위였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계속된 그들의 배교 행위도 고의적이며 지속적인 행위였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한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구원의 서정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지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누구든지 어떤 시점이나 상황에서도 가룟유다나 데마처럼 신앙을 배반하고(딤후 4:10), 타락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주의 신학자 Steven Harper도 구원의 소유가 하나님의 작정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 가지 분명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다가 타락하면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졌던 믿음에 대해 칼빈주의자는 입술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웨슬리주의자는 그가 거듭난 신자이지만 믿다가 타락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목사들이 솔직해야 할 것은 믿다가 타락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onathan Edwards의 말을 빌리면 누가 참되게 믿는 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구원을 받았는지 십원(?)짜리 동전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고후 13:5), 그것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2:9).  따라서 히브리 신자들이 유대교로 되돌아감으로써 배교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경고하듯이,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이든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종교로 개종하던지 혹은 믿다가 포기하거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16:16).  결국 누가 진실로 영생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인간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구원에 있어 성화와 순종을 강조한 Andrew Murray는 『The Holiest of All』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구원의 확증은 필요시 사용하도록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기차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 구원의 확증은 오직 사랑과 순종(계명)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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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과정을 웨슬리 계통 신학교에서 마치고 박사과정을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 당시 Calvinism 신학사상으로 무장된 교수들로부터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배운 개혁주의 신학만이 정통 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다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오직 칼빈주의만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신학이라고 주장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정신나간 석두(石頭)교수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습니다사실 구 프린스톤 학파인 Charles Hodge B. B. Warfield, 웨스터민스터 학파인 John Gresham MachenCornelius Van Til, 그리고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W. G. T. Shedd 등등 개혁주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교만의 성()을 높게 쌓아갈 때 겸손과 남에 대한 배려를 가르친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학 교수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 만났던 모든 교수들은 겸손과 학식을 겸비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오늘날 같이 비루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사이비 칼빈주의자들과 다르게 교리적 논쟁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훼손하면서까지 거만한 신학적 추론을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목사들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들은 종교적인 신학적 자긍심으로 인해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로운 논쟁을 일삼는 정통 칼빈주의가 아닌 골빈(?)주의사람들로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견인’(영원한 안전)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예정에 의해 선택을 받고 성령의 의해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장된다는 칼빈주의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로 Calvin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견인교리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을뿐더러 끝까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 성도의 견인에 대해 Saint Augustine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철저하게 보호받는 것을 『Of 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도록 하셨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떠나지 못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 전부터 이루어진 것이고(딤후 1:9), 그 놀라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며( 17:4, 10:14),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 2:8)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11:29), 말한 것처럼 그분의 특권과 초대는 결코 취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온전하고( 10:14)도 충분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일 2:2).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고전 15:3),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속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죄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3:23-2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정죄 아래에 놓여 있지 않고( 8:1-2),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많은 증거들을 내세웁니다( 22:32, 5:24, 6:37-40, 10:27-29, 17:6-11, 8:29-33, 35-39, 11:29, 고후 5:17, 1:4-5, 13-14, 1:6, 살전 5:23, 살후 3:3, 딤후 1:12, 4:18, 7:25, 10:14, 벧전 1:4-5, 요일 3:9, 유다서 24).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부패되어 있고( 17:9),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6:44),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 2:1-3)에 타락한 인간의 중생 이전의 어떤 반응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봅니다.  그러나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 13:48), 즉 바울( 9)이나 자주장사 루디아처럼( 16:14),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갖고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중생하도록 하는데( 2:8), 이렇게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러한 성도의 견인John Wesley궁극적인 구원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설교 『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고 고난 받는 이유 때문에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용납 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칼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Wesley전가된 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을 통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성경에 지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를 성경을 통해서 거부했는데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10』에서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는 말씀( 18:24)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후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10:26-29),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견인 교리를 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포도나무의 가지인 신자들( 15:4-6), 즉 거룩함을 입은 자들(벧전 2:9)도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마든지 타락할 가능성이 있고( 4:1-2), 영원히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1:22).

 

이렇게 웨슬리주의자들은 교회에서 물세례를 받고 중생한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타락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결국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7:21-23, 10:33, 12:31-32, 24:13, 8:13-15, 8:31-59, 15:4-6, 고전 3:11-17, 9:27, 15:2, 5:4, 살후 2:3, 딤전 4:1-2, 5:15, 딤후 2:12, 2:1, 3:6-14, 6:4-8, 10:26-39, 12:14, 2:14-26, 벧후 2:20-22, 3:17, 요이 8, 3:5, 15-16, 22:19).  물론 이러한 구절들이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경우에 대해 신자가 죄(알려진 죄보다는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짓는 죄)를 고백하지 않거나( 3:13),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통해( 3:12), 그분에게서 떠나는 배교의 행위가 있을 때( 26:14-16, 딤후 4:10)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철저히 회개를 하더라도( 13:3-5, 요일 1:9), 웨슬리주의자들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두 부류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예정과 선택에 있어 인간의 공로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렸고, 더 나아가 구원의 진행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여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9:11-13), 이 구원의 교리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The Works of John Wesley』에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상하게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는 기계에 불과한 타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의적인 존재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16:16),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이 질문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환언하면 Calvin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것이고( 1:17), Wesley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대해 인간 책임을 강조합니다( 3:36).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볼 때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의견을 일치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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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느 동영상을 통해 하늘에서 보석이 떨어지고 손바닥과 얼굴에 금가루가 생기면서 아말감으로 메운 썩은 이가 금니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현상은 비성경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반대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간혹  자신의 이를 금니로 변화시킬 수 있든지 손 안에 금가루를 뿌려주고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 성분검사를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참고인 입회하에 어떤 조건으로 내기할 것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할 근거를 찾기 위해 기적을 구하는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평생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기적을 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조차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23:8),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기드온처럼 기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책망하지 않지만( 6), 마술사 시몬( 8:18-24)이나 바리새인처럼 기적을 구할 때 책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16:1-4).  여기서 비판적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권사나 서리집사라는 직분이 성경적인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일학교나 주보, 혹은 설교하기 전에 종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니나 금가루 현상을 바라볼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의문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기적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실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에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 중에 무슨 특별한 기적과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과대망상증에 걸린 말씀에 깊이가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니나 금가루와 같은 것은 하나의 표적일 뿐이지(고전 1:22),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다가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3:16)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24).  이보다 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초자연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왜 이러한 기적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고( 5:37), 다른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기적의 은사들도 사라졌다고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확실히 유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단지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기적의 은사를 철회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했던 야곱과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28:16).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들에서 교훈을 유도해 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그것이 말랐을 때 제자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기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21:18-22).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기적에 대한 응답 역시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적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적 목적들을 다시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면 첫째,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 둘째는 불신자 전도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마지막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그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그를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5:1-11).  사실 시몬은 장모가 병에서 고침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4:38-39), 주님의 가르침도 이미 들은 적이 있었지만( 5:3),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획량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기적은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분 안에 내재한 거룩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기적은 전도의 문을 열 때 사용 되었는데( 5:20), 복음서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적이 일어난 후에 그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 땅에 퍼졌고( 9:26),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씀 듣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9:31, 5:15, 4:30, 42, 6:2, 12:9-11, 17-19).  이와 동일한 일이 빌립의 사역 속에서도 일어났고( 8:6),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켰을 때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9:32-35),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냈을 때에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9:42).  더 나아가 기적은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해 주었는데( 5:36),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가치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이면서너희가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기적들의 증거에 근거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4:11).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실제로 믿음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11:45), 이런 기적이 항상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생기게 했으나( 12:11), 또 다른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표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11:48),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주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일 것인가에 대해 살인을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11:53, 12:10).

 

이렇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1:29-34), 사도들( 3:1-10)과 다른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이( 8:4-8), 1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러한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12:28).  달리 말하면 성령에 힘입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기능을 가졌었다면 왜 그것이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능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런 기적들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잘못 가르치는 목사들에 의해서 혹은 신학교에서 잘못 배운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기적과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듯이 기적을 확증하는 가치에 있어 지리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도 메시야가 영적이고 육체적인 치유가 행해질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35:6-7, 61:1), 이것은 다가오는 메시야의 나라는 나이,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짐은 결국 꿈과 환상과 예언하는 것이( 2:28-32), 어느 한 세대의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구약시대와 달리 이런 기적적인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주의 백성들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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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0장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이 그 우상 예배에 참여한 것이 되지 않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음식 예비와 특별한 유대인의 절기 준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 특별한 날이나 음식 예비에 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는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기 전에 우상에게 바친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고기들이 이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관심 사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데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음식 규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날의 준수 문제였는데 사실 음식과 날의 준수는 할례 문제 다음으로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가장 큰 민감한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대화의 핵심 주제로 삼고 시도 때도 없이 밤낮 음식 규제인 고기 먹는 문제만을 가지고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하며 비판하는 가운데 싸웠습니다.  이렇게 만날 때마다 먹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자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런 말로 일깨워 줍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14:4).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오늘날에는 그 이슈가 다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데, 교회는 성경이 분명히 금하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되지만(고전 6:9-10), 추가 규범이나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법과 똑같은 비중을 두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혹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개인적인 견해나 취향 혹은 문화적인 선입관에 근거하여 자신의 도덕적인 판단을 쉽게 내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중세에는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물에 파리가 빠지면 물이 오염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파리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이 문제를 가지고 밤낮으로 논쟁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앙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문제만을 발생케 하는 내용을 가지고 헛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절대적이지 않는 이슈(성령세례, 칭의, 예정, 은사들, 천년왕국, 기름부음, 삼위일체)들을 가지고 거의 예외가 없이 자신의 신학과 신앙으로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처럼 서로 비방하는데 온 시간을 보냅니다.  솔직하게 말해 이러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주로 복음 전도에는 관심이 없고 편파적이고 단편적인 메마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사와 신학자들인데, ’교리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쓸모 없는 교리는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에 대한 예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무조전적으로 선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중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오직 택자들만을 위한 제한속죄인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충족하지만 제한된 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는 무제한속죄인지에 대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Calvin의 사상에 기원을 둔 강성 칼빈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19 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침례교의 다수의 견해가 되었던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전적인 타락과 견인론에 있어 완화된 견해를 수용하면서 칼빈주의 5대 논점TULIP의 다섯 가지 조항 중 가운데에 놓인 세 가지 논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강성 칼빈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재해석합니다.  이들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올바른 확신과 안전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혜에 저항할 수 있는 회심 이전의 인간의 자유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개인의 영원한 안전(견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알미니안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이미 예정된 길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조종을 받는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믿음을 지키지 않는다면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웨슬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점을 조금 지적한다면 웨슬리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불신앙이나 고백하지 않는 죄, 즉 의식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짓는 죄로  인해 얼마든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갱신된 회개를 통해 다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신자가 죄로 인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배교를 나타내는 결단적인 행위, 즉 불신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저버릴 때만 구원이 상실된다고 강조하면서 배교는 다시 회복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양쪽 학파들 모두 자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강성 칼빈주의자들과 온건 칼빈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 보존됨을 기뻐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웨슬리주의자들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견인(안전) 교리가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을 일으킨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해석의 난점은 신학자와 목회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피구원자인 인간이 확실하게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권은 요나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 2:9), 하나님에 속한 비밀이기에 누가 예정되었거나 내적부르심을 입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이 『Willing to Believe: The Controversy over Free Will』에서 한 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논쟁 속에 엉뚱한 그룹들이 종종 서로를 잘못 설명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잘못된 이해를 근거 삼아 돈키호테들처럼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 나는 칼빈주의자로서 종종 그것이 진정 칼빈주의를 묘사한 것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기에 동의할 수 없어 그들로부터 비판을 듣는다. 따라서 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상황을 겪으면서 똑같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 신학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논쟁을 일삼는 자칭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스펙트럼과 해석하는 방법론에 있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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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for all Nations의 창시자이며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는 아프리카 Lesotho에서 선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서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서 설교할 때 사랑하는 주님이 기적들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시작했을 때, 곁에서 통역하던 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임재 속에 쓰러졌고 성령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떠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  Bonnke의 사역 속에서 이러한 기적들은 계속 일어났는데 그는 기적은 우리의 흥미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그분이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약이라고 말하면서( 1:8, 18-19, 17-20), “기독교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적의 운동이며( 2:43, 3:1-10, 6:8, 8:6, 13:50-14:3, 고전 12:28-29), 신유의 기적, 구출의 기적, 변화된 삶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안다. 이러한 경이는 그분의 검증서이고 예수님이 불변하신 이상 그분의 능력과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까지 기적 행함의 은사는 교회에 남아 있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다른 세상 사이에 벽을 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특별히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오직 구속을 근거로만 기적을 행하신다.”

 

반면에 오늘날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B. B. Warfield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기적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죄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9절에 나오는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불신자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들을 수반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정말 죄가 되는가?” 그리고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고 건강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는데,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첫 번째 요구는( 12:38), 예수께서 마귀에 사로잡혀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직후에 나왔고( 12:22), 두 번째 요구는( 16:1),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신 후에 나왔습니다( 15:32-39).  다시 말해 두 본문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요청받으실 때 이미 두 가지의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누가 표적을 요청했느냐는 것인데, 마태복음 1238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고 164절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이들은 불신앙과 외식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요청이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려서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혹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것보다 더 인상적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기적은 없을덴데 그 이상의 표적을 또 구한다는 것 자체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불순한 의도가 마태복음 1228절에 대응하는 구절에서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고( 11:16), 표적을 구하는 두 번째 요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 8:11).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왜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분명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있다면 이 기적만큼은 조작하거나 속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약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면 그분이 메시야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치유 받은 눈먼 사람은 진짜로 눈먼 사람인지 혹은 그의 실명은 신체적 원인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사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에 대한 보고는 어떤 가벼운 속임수로 과장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들은 의심하거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의 속마음은 진정으로 표적을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표적 보여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불신을 믿음이 없는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9:16, 22).  그러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에수님께서( 2:24), 그들을 꾸짖고 계신 것은 표적들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악하고 불신하는 마음에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믿게 하신 것보다( 6:26),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적들을 행하셨던 적이 많았습니다( 8:1-3, 2:5, 10:52, 7:9, 8:48).  그러므로 만약 표적들을 소망하거나 심지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신약교회는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고.( 4:29-30), 이 기도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지진을 수반하는 표적과 기사들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며( 4:31), 사도행전의 연이어진 표적과 기사들의 흘러 넘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12).  더 나아가 기적적인 일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방법과 올바른 이유들을 위하여 기적들을 구할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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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Jones와 사역한 바가 있는 전기 작가이자 부흥 신학자인 Iain Murray는 『The Life of Arthur W Pink』에서 20세기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였던 Arthur Pink 진술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면서 그가 회심하기 탁월한 영매였으며, 훗날 그가 회심하고 거듭나면서 자신이 의사소통했던 영혼들과 다른 영매들이 부르는 모든 영혼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이 아닌 바로 악한 영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안에 거주할 사람을  귀신들린 자( 4:24), 악한 영에들렸다라고 말하는데( 9:17, 4:33), 이런 귀신들이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은 축귀 사역에서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1:23-24).  예를 들어 보통 악한 영들은이것은 집이다( 12:43-44), 혹은나는 여기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주고 하나님의 자녀이기(벧전 1:18-19, 고전 6:19-20), 마귀의 소유물이 없을 뿐더러 무단 침입자인 귀신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법적인 권리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이며 진정으로 귀신들린 자녀의 부모처럼 귀신을 내쫓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9:18-26), 어떤 마귀도 인간의 육체를 집으로 삼고 거주할 수는 없습니다( 4:7).

 

이렇게 귀신들의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귀신축출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고 모든 상황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셨기 때문에( 5:19), 사실 축귀사역에 있어 꼭 이렇게 해야만 귀신이 쫓겨나간다라는 공식은 없습니다.  Charles H. Kraft는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귀신축출이라는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사역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들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그러한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고자 하는 우리로서는 아주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축귀사역에 있어 비밀스러운 공식은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귀신들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14:12)라고 말씀 하신 것처럼 오직 성령의 능력( 12:28)과 그리스도의 이름( 10:17)을 힘입을 때만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음성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귀신들린 당사자 편에서의 협조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Robert G. Tuttle는 『The Partakers』에서귀신을 쫓아낼 역량을 가진 사람은 그 같은 직임을 세심한 주의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많은 기도와 금식 후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9:29),  Lloyd Jones 역시성령의 비상한 활동이 있을 때마다 귀신들림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라고 말하면서 누가복음 1120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하나님의 손을 힘입어라는 말은 마태복음 1228절에서는성령을 힘입어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언제나 성령을 힘입어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5:17, 10:38).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놀라운 권세가 우리 믿는 자에게 실제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있느냐는 것인데, 이것을 알려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마귀를 물리친 권세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마귀를 이기셨고( 4:1-13), 십자가가 바로 마귀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순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2:15, 2:14, 12:11)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완전히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마귀는 이상 우리를 다스릴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6:11).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영적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 십자가가 견고한 영적 발판이 된다는 것으로( 2:15),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3:26).  한 마디로 칠십 인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10:17-19), 우리에게도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0:17).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귀를 대적할 것을 말했고(벧전 5:8-9, 4:7), 바울도 신자 모두에게 영적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6:10-18).  사실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인데( 10:10), 만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귀신을 꾸짖고 책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16:17),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딤후 1:7), 더 나아가 귀신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요일 4:4).  이런 문제를 가지고 John Wimber귀신들에 대한 권세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능력에 있고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귀신들을 이기기에 필요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고( 16:17-18), Maxwell Whyte사탄과 귀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을 능가하는 합법적인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권세를 받고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히 복종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지극히 높으신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11:22-24, 18:18-20)과 그분의 보혈의 능력에 대한 확신( 12:11), 그리고 우리가 부여받은 악을 대적할 권세를 사용할 용기( 10:19)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믿음( 10:38)은 어떠한 종류의 마귀의 억압이라도 물리쳐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일곱 가지 무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실 수 있고( 4:1-11),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종종 마귀의 공격을 물리쳐 주시기도 하지만( 13:10-16),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더러운 영들에게 직접 명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대적하면 그는 물러갈 것이고(요일 4:4), 때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간단한 명령이면 족할 때가 있으며( 16:18), 어떤 때에는 악한 영에게 떠나도록 명령하는 과정에서 주님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습니다( 4:1-11).  결론적으로 성경은 귀신을 제거해 주기를 기도하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고( 1:12), 하나님의 자녀는 그 주신 권세를 가지고 요한복음 1412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얼마든지 믿음으로 담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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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The only proof of the new birth is the new life).  James Edwin Orr의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담긴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고(롬 3:24),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롬 6:11-14),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데(마 7:21),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막연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의 결정적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원의 총체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초의 범죄(롬 5:12)로 야기된 죄책에 시달리는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현재 신분(롬 3:9)과 그 비참한 현재 상태(히 2:15)의 극복을 말하는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 각자의 전인격은 물론 전우주의 갱신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자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창 3:15),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창 1:4)전부터 종말(히 9:28)까지의 전 역사에 걸쳐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는 장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할 때만이 그 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모든 관련 사항이 온전히 시사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구원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대해 세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엡 2:1),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엡 2:13),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이 있고(롬 10:10), 두 번째는 이미 구원을 확증 받은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인(벧전 1:15-16), 성화에 힘쓰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의 구원이 있으며(빌 2:12),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각각 구원을 받지만(롬 10:9), 그 구원이 최종 실현되는 곳인(계 7:5-17), 천국에서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히 9:28).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으로서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까지의 사건이 발생하는 단계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인 성화견인, 그리고 천국의 도래로 구현될 영화의 구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또한 이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30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의 가능성, 즉 ‘미리 정하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지, 일목요연하게 그 순서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한때 온갖 종류의 죄와 욕정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 안에서 씻겨 졌고(washed), 깨끗하게 되었고(sanctified),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씻김’‘깨끗케 함’ ‘의롭게 함’의 과정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순서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잘못된 것이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인 ‘칭의’보다(롬 4:6),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며 오랜 기간의 과정을 통해 죽을 때 완성되는 ‘성화’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롬 6:19-22).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정통신학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눈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그들이 거듭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괄적으로 밝힌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설사 성화의 열매가 없거나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의 타락 가능성이 전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칭의와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삶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은 열매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류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빌 1:27),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눅 6:46),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절들 중에 핵심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5장20절과 7장21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4-6절 등을 내세웁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온전한 수확,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받도록 예약된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 때 받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는 가운데(롬 5:1),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고전 10:12), 더 나아가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완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25:30).  한 마디로 ‘이미’ 얻은 온전한 칭의를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궤설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피로(요일 1:7), 단 한 번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에(히 10:10),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요일 5:18), 많은 성경구절 중에 요한복음 5장24절과 10장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과 에베소서 1장4절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는 법적인 선언(롬 4:6), 즉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엡 2:13),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번 내린 의로운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자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종 구원이 열매(도덕적 행위)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보적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신학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부류는 칭의를 단회적 사건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단회적이 아닌 점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가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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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칼빈주의자들 못지않게 진리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던 나에게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받은 은사들은 비록 성숙하고 잘 다듬어지는 과정이 없었지만 예배 때마다 교회 성도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 한분이 다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이 어느 동양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저 휘어지고 걸을 때마다 온 몸이 휘청거리는 저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집사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병자를 데려오려면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발목이 삔 사람 아니면 기도해도 쉽게 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려 왔을까 오늘 기적이 일어날까?”  이렇게 그 동양인 여성을 앉혀놓고 기도를 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적을 간절히 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않았고 이 단어가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표준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그날 ‘쪽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비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야는 이집트와 구스에 대한 예표로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고(사 20:3),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호 1:2), 엘리사의 유골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려냈고(왕하 13:21), 베드로의 그림자는 병자를 치료했으며(행 5:15),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행 19:12).  그리고 이것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누군가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를 닮은 네 가지 생물들이 있는데 각각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차 있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변을 주야로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계 4:6-8), 아마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증세가 심한 병자로 판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이치에 맞는 성경적 환상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려오는 모든 이상한 것들을 다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일 4:1),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상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든지 비성서적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기적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인데(출 10:2), 예를 든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눅 3:18-20), 헤롯처럼 눈으로 보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인지(눅 23:8), 아니면 마술사 시몬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8: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은(요 2:11), 복음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요 4:29, 행 8:4-8, 9:35, 42, 히 2:4),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마 14:14, 20:29-34, 눅 7:11-17), 복음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마 8:15, 행 9:36-43, 빌 2:25-30), 얼마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9:8, 요 9:3).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요 6:1-5), 주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고(막 6:30-44, 눅 9:10-11),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눅 9:1),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7-8).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기적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행 4:29-31).  더 나아가 룻다에 있던 제자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은 후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던 적이 있으며(행 9:36-43), 야고보 역시 교회의 장로들에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약 5:14-16).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적인 응답이 언제나 일반적인 방편, 즉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사 38:21), 더 낫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눅 5:31),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움을 위한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6-7).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히 4:16)라는 말씀처럼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신(시 91:15),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과부의 기도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겠지만(눅 18:1-8),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다윗처럼 신중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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