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에 보면 고질적인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여자가 나온다(막 5:26). 이 여자는 자신이 가진 고질적인 병으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탕진할 정도로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병이 더 호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다(막 5:34). 또 다른 여성이 요한복음에 나온다(요 4:7). 이 여자 역시 오랫동안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문제는 조상들을 잘못 만나 평생을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죽은 전통에서 놓여남을 받았다(요 4:20-24).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가령 신학생이 교수를 잘못 만나면 평생 그 교수로부터 배운 것이 최고의 학문인양 나팔을 불어댄다. 더 큰 문제는 잘못 배운 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영적으로 죽이기까지도 한다(사 9:16).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을 잘못 만나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가르치는 선생보다 갑절이나 더 지옥자식이 될 가능성이 많다(마 23:15).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당시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면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를 잘못 만나면 영혼이 파멸될 수 있다(눅 11:52). 어감이 최악이긴 하지만 표준어이기에 사용한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처럼 인생을 ‘조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고(요 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요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으로 예언되었다(사 11: 1-5, 40:3).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신 ‘하나님’으로 호칭되었고(요 20:28)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나(마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눅 3:22).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 되심을 보여준다(행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그러나 이 명칭이 예수님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사 26: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 22:13). 특별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계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히 9:12).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히 1:2)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히 1:3) 만물의 창조자이시고(골 1:16), 우주를 통치하시는(요 17:2), 율법의 제정자이시다(마 5:22-32). 이러한 성자 하나님께서 대속물(속전)이 되기 위하여(마 20:28), 자신의 신적위엄을 보류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빌 2:6-8),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요 10:18).
이렇게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생긴 원수 된 것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엡 2:16).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원해서(요 10:17), 자신이 저주의 대상이 되시고 그 십자가에서 처형의 형벌을 견디신 것이다(히 12:3).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고(엡 1:7), 베드로전서 3장 18절 말씀처럼 단 한 번의 죽으심을 통해 인간을 향한 구속사역이 완성이 된 것이다(히 10:14).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와 율법의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속량함으로써 대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갈 3:13).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내세우는 주장이 마치 성경에 가장 근접한 것처럼 다른 형제를 향해 신랄하게 비판한다(약 4:11-12). 그런데 이들은 ‘구속’과 ‘구원’에 대해 혼동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행 5:30)은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구속을 위한 속죄사역이다(롬 3:23-26).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고후 5:18-19). 그러나 이 십자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막 16:16).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자 물린 자들마다 살아났다(민 21:6-9).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저 십자가만 바라보면(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요 3:14-16). 먼저 영혼이 사늘한 시체처럼 죽어 있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엡 2:8)와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요 6:37). 더 나아가 개인 스스로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을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막 16:16). 여기에 ‘불가향력적 은혜’라는 신학적 용어를 끌어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행 26:24-29).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놀라운 복음(약 1:21)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롬 1:2). 복음의 핵심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절이 성경에 나온다. 이 구절은 기독교 변증을 위한 핵심 본문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이다. 그런데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오직 십자가만 믿으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소리 높여 메시지를 증거 했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행 2:22-36). 그가 고넬료 가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같이 증거 했다(행 10:39-41).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 총의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신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이야기했다(행 15:7). 또한 로마서 10장 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바울이 아그립바와 베스도 앞에서(행 26:23), 그리고 총독 벨릭스에게 증거 한 것처럼(행 24:21), 십자가의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사건까지 포함시켜야 온전한 복음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갈 1:4)과 부활(롬 5:10)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벧전 1:3).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마 16:21, 막 8:31, 눅 9:22),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롬 1:16). 만약 부활을 빼놓고 십자가만을 증거 한다면 그것은 복음도 다르고, 영도 다른 짝퉁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고후 11:4).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했다. 그가 십자가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나팔을 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고전 15:17). 따라서 누군가 십자가만 믿고 부활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경에도 없는 사악한 궤변이기 때문에 참 복음이 될 수 없다. 이런 반쪽짜리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증거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가 거짓을 일삼는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것이다(딤전 4:1).
심각하는 것은 이런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복음을 증거 하지 않고 신학적 논쟁이나 정치, 혹은 ‘개콘’을 보는 것처럼 떠드는 것 말이다. Calvin은 설교하는 강단을 하나님의 보좌라고 불렀다. 이게 무슨 말인가? 강단 위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 모든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듯이’(마 7:16) 이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딤전 4:2).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정상적인 목사라고 착각을 한다. 누구든지 영혼이 살아나려면 개 짖는 소리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요 5:25).
예를 들어 초대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이단들, 즉 예수님의 신성은 믿지만 인성을 부인하고(Docetists), 인성은 믿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Ebionites), 또는 위격의 통일(Nestorians)과 양성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Eutychians), 심지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도 무조건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계 22:18-19). 누구든지 성경을 편리한 대로 골라서 믿는 사람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될 가능성이 많다(딤후 2:16-18). 성령의 역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갈 5:22-23), 귀신들이 역사하는 곳에는 신학적 비방과 이간질이 난무하고 시기와 다툼과 요란함 밖에 없다(약 3:14-16).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영이다.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과 사건들, 출생, 고난,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믿는 믿음이다(계 22:18-1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한 영원한 제사’(히 10:12)를 드리신 것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한 구속이다(벧전 1:18-19). 만약 누군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빼놓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 외에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잡소리’다. 개혁주의신학자 R. C. Sproul 박사의 말이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데 덕이 된다. 하지만 ‘무지’와 ‘무식’을 나누는 것은 교회를 허물고 분쟁과 분열을 야기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