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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3.09.10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
  3. 2023.09.03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
  4. 2023.08.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1

불교도인들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훌륭한 선생이지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이고,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구원은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제도 즉, 팔정도(Noble Eightfold Path)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涅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팔정도’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을 통해 죽음과 환생(還生)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1993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5면에 보면 불교인들이 존경한다는 퇴옹성철(退翁性徹) 스님은 1983년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여… 대중이여, 석가가 세상에 오심을 망상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오심도 망상이라”.  1987년 석가탄신일 법어(法語)에서는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같은 날짜 조선일보 15면에 그가 운명 직전에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28자로 된 열반송(涅槃頌)을 남겼다.  그 내용은 이렇다.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이 말은 본인 자신이 죽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남긴 말이다.

나는 불교와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평생을 살다가 성철 스님처럼 죽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때 빵을 준다는 선생님의 유혹(?)에 넘어가 몇 번 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구원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는 것 같다.  마치 400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신 것처럼(삼상 15:2), 교회에 가서 얻어먹은 빵을 기억하고 계셨다.  내 생각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를 목회자로 불러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이러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도 끝내 주님을 거부하고 죽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가령 누군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참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이나 오래전에 들었던 기독교 간증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지옥 가기로 작정한 것처럼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죽기 일보 직전에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평생을 망나니처럼 살다가 끝에 가서 예수님을 믿고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몬 24절).  한때 신실한 사역자였지만 세상을 사랑하여 타락하고 말았다(딤후 4:10).  그가 세상으로 떠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 Handley Moule은 말한다.  “데마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겁에 질려 떠났다”.  성경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지만 아마 그는 바울이 겪었던 고생과 고통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가룟 유다 역시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였다(마 10:1-4).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까지 부여받았다(눅 9:1).  하지만 돈 문제 때문에 주님을 팔고 회개도 하지 않고(마 26:24-25), 목매달아 죽었다(마 27:5).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눅 23:43)은 일평생 죽을죄만 짓고 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탕자처럼(눅 15:17-19), 회개하고 돌아왔다(눅 23:41).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사회적 지위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이 세상에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마 16:16).  이들은 무론대소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실 때 두 종류의 증인들이 나온다.  하나는 책들로 상징되고, 다른 하나는 생명책으로 상징되었는데(계 20:12), 각각의 경우에 증언이 일치할 것이다.  먼저 행위가 기록된 책들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각 사람이 그의 행위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시 62:12, 렘 17:10, 마 25:31-32, 롬 2:6, 14:10, 고전 3:13-14, 고후 5:10, 벧전 1:17).  이것은 구원이 선한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이 아니다(갈 2:16).  하지만 선한 행위가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요 15:8).  그리고 생명책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책이다(계 17:8).  이 생명책은 이미 세 번씩이나 계시록에 소개되었는데(계 3:5, 13:8, 17:8), 일종의 하늘의 시민권과 같다(빌 3:20).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엡 2:8-10, 딛 3:5).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며 아무도 그분에게 불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증거 한다(벧전 1:17, 3:25).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다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은 그 특권에 대한 보다 큰 책임을, 적게 받은 사람은 작은 책임을 수반하게 된다(눅 12:47-48).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책망하신 말씀( 11:22-24)을 통해 마지막 날 심판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15).  특별히 양들을 인도하고 돌봐야 할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많이 맡은 자이다.  잘못 가르치면 일반 신자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자다(약 3:1).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영적인 생활에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신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특별계시의 한 양식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2).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율법에 따라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안 것을 행한 것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된다(롬 2:21-23).  신약시대에는 점진적으로 발전된 계시의 양식인 복음이 완전히 주어진 시대로(요 5:24), 이 시대를 살아가며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최후 심판을 받게 된다(롬 1:16-17, 요 12:48, 마 7:21-27). 

그러면 복음을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하고 죽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 인간 마음에 태생적으로 새겨진 율법, 즉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롬 2:14-15).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는 도덕적인 감각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그런 역할을 한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알려주는 내적인 감시자(monitor)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그들의 도적적인 지각은 율법을 대신하여 그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느 순간, 혹은 어느 때가 되면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고후 5:1).  예수님은 죽으시기 직전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다.  스데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남긴 말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교계의 거장 성철스님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인간은 마지막 죽기 직전에 무슨 말을 남기는가 중요하다. 

누군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간이 자기의 마음(잠 28:26)을 굳세게 믿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자다(눅 12:16-21).  인간의 마음은 날씨와 음식과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한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끝마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창 27:2).  자연재해로, 인재로, 병으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밤에 잠자리에 들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약 4:14)고 말한다.  요지가 무엇인가?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이러한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만 오랫동안 주어진 것이 아니다(벧후 3:9).  놓치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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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전에 천국이 그 누구에게도 개방되지 않았음은 물론 천국의 열쇠는 오직 가톨릭 교회에만 맡겨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간기 처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림보’(Limbus)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라틴어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연옥’(Purgatory)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옥 변방(邊方)에 위치한 장소를 가리킨다.  이 지옥 변방을 두 종류로 나누어 하나는 ‘유아 림보’(Limbus Infantum), 다른 하나는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고 부른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조 림보’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롬 3:24),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옮길 때까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장소를 가리킨다.  반면에 ‘유아 림보’는 영아 때 죽어 지옥 형벌을 당해야 할 죄는 짓지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지 못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유아의 영혼이 들어가는 장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에는 이것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천국(마 5:3)과 지옥(마 5:30), 낙원(고후 12:4)과 음부(행 2:27) 등에 대하여는 직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연옥’이나 ‘선조 림보’ 혹은 ‘유아 림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것과 연관 지울 수 있는 성경구절이 없다.  한 마디로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만 볼 수 있는 교리다

여기서 가톨릭 교회의 세례관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유아 세례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며 세례 자체가 중생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례는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된다.  가톨릭 신학자 Ludwig Ott는 세례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든지 순종의 형태를 요구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갈 3:10, 5:4).  이것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갈리디아 교회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십자가 상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생각하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다(눅 23:43).  하지만 그리스도께 순종하려면 세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롬 5:12).  엄밀히 말해서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죽음’(창 3:19)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에 앞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인생의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신 그분과 교통 하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영혼의 죽음’(엡 4:18)이 있다.  더 나아가 장차 영과 육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과 영원히 교통 하지 못하고 영육이 심한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영원한 죽음’도 있다(마 25:41). 

교회사를 보면 사람이 죽어 의식 상태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칠일안식교다.  간혹 복음주의 신학자들 중에 ‘영혼 소멸설’(annihilationism)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한때 칼빈주의자였던 Clark H. Pinnok과 한국에서 많이 알려진 John Stott, 그리고 Stott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John Wenham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Stott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른 신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복음주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나팔을 불어댔다.  Stott는 이단인가?  여기서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다.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탄탄하게 세워 나가면서 청교도 신학자 John Owen과 Thomas Goodwin을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며,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의 편집자이고, 사망할 때까지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의 주요 기고자였던 B. B. Warfield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세계 3대 칼빈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Warfield도 이단인가?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Warfield의 저서를 좋아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는 조금 충격적 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다. 

영혼 소멸설을 지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무존재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심판으로 형벌이 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단지 그들만의 성경연구와 신학적 사유의 결과에 따른 것이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궁금하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 말이다(요 8:7).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학자 중에 베드로전서 3장 18-20절 말씀을 가지고 ‘사후 전도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죽은 후에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이것은 이미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하셨다(눅 16:24-26).  죽음 이후에는 단테의 신곡에서 말한 것처럼 희망이란 전혀 없다(눅 16:19-31).  무엇보다도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계 21:1-4).  그러나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형벌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히 9:29).  그 후에 영원한 심판을 받고(계 20;12), 지옥에서 그 영과 육이 세세토록 고통가운데 있게 된다(막 9:48).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심판을 받게 되는가?  이들을 향한 심판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계 22:11-12).  이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눅 12:47-48).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한다면(마 11:22-24), 마지막 날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눅 20:47).  이들의 죽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통해 비로소 확인하게 되며 동시에 더 크고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된다(계 20:13-15).  그야말로 슬피 울고 이를 가는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다(마 8:12).  이렇게 불신자들이 죽은 후에는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심판을 받고 이 심판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교리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마 26:41, 46, 막 9:43, 유 7절).       

반면에 성도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다르게 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이한 결과와 관련하여 성도와 불신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요 5:29).  이는 구속을 통한 구원의 기회를 거부한 불신자(요 8:24)와 달리, 비로소 모든 죄의 질고를 완전히 벗고 구원의 축복을 보다 더 온전히 누리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기 때문(고후 5:1-3)에 불신자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르다(빌 1:23).  다시 말해 성도의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긴 하지만(눅 16:22), 일단 죽으면 그의 육체는 나사로처럼 이 땅에 묻히더라도 영혼은 기쁨 중에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눅 16:23, 23:43, 빌 1:23).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고(사 25:9),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의 함께 거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했는지 모른다(고후 5:8).

여기서도 구원받은 성도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여 성도가 죽고 난 후에 심판을 받지만(고후 5:10), 이 심판은 상급을 주기 위한 심판이라고 주장한다(고전 3:12-15).  반면 또 다른 부류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롬 14:10), 이들이 심판대 앞에서 선악 간에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마 12:36).  즉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규명받기 위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딤후 4:1).  이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 말한다(고전 9: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두 가지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뜻으로, 다른 하나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고 상 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인간은 죽고 난 후(히 9:27),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고후 5:10), 그분의 최종적인 결정에 따라(계 22:11-13),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마 16:27, 롬 2:6-11). 

Robert N. Wilkin의 진술대로 우리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내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0:28).  얼마나 든든한 말씀인가?  하지만 자기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씀이다.  이 이야기들은 1세기 경의 신자들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똑같이 경계로 기록된 것이다(고전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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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ethics: A Primer For Christians』 저자이며 생명윤리학자인 Gilbert Meilaende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대상은 태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인간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에서 태아를 제외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주제는 쉽게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어려서 죽은 영아나 유아들, 특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낙태나 살해로 희생된 아기들이 있다.  또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부모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로 죽은 영아도 있다(삼하 12:15-18).  그런데 이 영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마 20:28)에 대해 알리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사람들을 구원한다면 “이 영아들의 운명을 어떻게 되며, 또한 구원받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한다택하심을 입은 유아들은 어려서 죽더라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구원받는데, 그분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선택받은 유아들은 유아기에 죽었어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학자 B.B. Warfield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Augustine 오직 세례를 받은 유아만이 구원받을 있다고 말하는 반면 Charles Hodge는 유아시절에 죽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Herman Bavinck 역시 언약의 자손인 유아들은 세례와 상관없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해아를 포함한( 9:11), 모든 사람이 아닌 영생주기로 작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13:48),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 사역에 대해 번도 들어보지 못한아들이 아담의 죄를 공유하기 때문( 5:12)에 선택을 받지 않아 구원받을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요일 4:10),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있겠느냐는 것이다( 30:18).  이 주제도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성경을 아주 상세하게 풀고 제한적 선택 교리를 주장하는 Calvin은 『요한일서 주석』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요한의 진술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를 요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다룬 방대한 책 『기독교강요』에서는 사랑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지 중요하게 다루질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머지 판단은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면 된다(롬 12:3).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가톨릭에서는 사후 영혼이 머무는 곳이 여러 곳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Pope Benedict 16세의 지시로 폐기되었지만 ‘영세’(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죽었을 때 그 영혼이 머무는 장소를 ‘유아 림보’(Limbus Infantum)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자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영세를 받지 않아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영혼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지 않고 각자의 재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연옥’(Purgatory)이나 ‘선조 림보’(Limbus Patrum)에 있는 영혼들과 달리 천국으로 옮겨가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선조 림보’ 교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 근거나 타당성을 갖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어떠한 구원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며(눅 16:25-26), 육체와 정신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는 유아들 역시 원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5:12).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인용하면서 세례와 상관없이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엡 2:8).  즉 ‘영세’는 구원을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요 14:6, 행 4:12).  무엇보다도 성경은 ‘유아 림보’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침묵을 할 뿐 아니라(삼하 12:21-23), 영원히 존재할 인간의 처소는 오직 ‘천국’과 ‘지옥’뿐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계 20:10, 21:1-7).

조금 더 유아 구원에 대해 살펴보면 유아는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복음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Christian Theology』에서 성경이 책임질 나이(age of accountability)에 관해 가르치고 있어(삼하 12:21-23), 그 나이에 이르지 않은 아이는 죄에 대한 책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최후 심판 때 이루어질 정죄의 기준은 개인적인 죄다(계 20:11-15).  그렇다면 유아들은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되기 전에 죽었거나 혹은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원죄에 관련하여 최후의 심판을 언급한 구절에서도(롬 2:4-8, 14:10, 고후 5:10, 계 20:12), 유아가 죽어서 실제적으로 옳고 그른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경우 심판의 근거에 관해서는 언급한 것이 일절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성경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시 51:5).  만약 복음을 이해하고 믿기 어려운 나이에 죽은 유아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들의 공로와 의나 무죄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딤전 2:5)과 이들 안에서 역사하신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하신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요 3:3).  이처럼 어려서 죽은 유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은 유아들, 특별히 불신자 자녀인 유아에 관해서도 성경이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죽고 난 이후에도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사후 전도론’을 주창하는 자들이다.  증거 본문으로 베드로전서 3장 18절부터 4장 6절까지 말씀을 내세운다.  또한 구원받는 것에 있어 영아와 성인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괄적 구원론’ 자들이다.  이들도 사도행전 43절과 디모데전서 4장 10절을 증거 본문으로 내세운다.  ‘보편적 구원론’ 자들 역시 모든 사람들이 정죄를 받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들 또한 증거 본문으로 로마서 5장 18절과 요한일서 2장 2절 말씀을 내세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의 논증이 더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는 이 질문들(구원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악의 관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누군가 말했듯이 “고난과 악은 인생 가운데 펼쳐진 위대한 드라마”인 것처럼 이 세상 안에 있는 악의 관한 문제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대해(욥 1-2장)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판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논쟁적이거나 이단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는 교리를 자신의 사상으로 취급하고자 할 때 성경 한 구절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성경의 많은 자료에 의지할 수 있는 견해를 취하여야 한다.  물론 어떤 중요한 이슈들에서 입장 차이를 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으나 그 말씀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역설과 신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논리구조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55:8).  환언하면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문제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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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동남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죽은 사망과 실종자 숫자는 대략 30 명에 이른다.  이 일이 일어난 6년이 지난 2010년에는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 희생자와 부상자가 거의 30 명에 이르면서 아이티 인구 삼분의 일인 삼백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또한 중국 쓰촨 성 지진과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와 한국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게 되는 사건들이 터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외신도 조명한 국내 최악의 안전사고 중 하나로 꼽힌 이태원 세계 음식거리에서 159명의 죽음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실로암 망대 사건’이다.  대형 참사가인재’(人災) 아니면 ‘자연재해’로 혹은 우연하게 일어났는가를 고심하면서 많은 희생자 중에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다 간 사람은 얼마나 되며 복음을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본다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 의하면 인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죽는다고 한다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어떤 이해도 없이 죽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성경은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다( 16:15).  하지만 우리가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말을 듣고 거부해서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롬 19:14)에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문화권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들의 영혼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인가?

더 난해한 것은철이 들기 전에 죽은 영아나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어린 정신박약자가 죽었을 경우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문제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스스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므로 고의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죽은 영아들은 하나님의 긍휼 하심과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3:22),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106:1), 이런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영아를 포함한( 51:1), 모든 인간은 이미 원죄로 인해( 5:12),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9:27).

이러한 문제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한다.  즉 예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택함 받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14:38).  영아라도 선택받은 아이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을 없다는 것이다( 9:11).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신학자들은 선택받는 것과 상관없이 영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Ramesh Richard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유아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복음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영아살해 혹은 낙태로 죽었던 아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일까?

초대 교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것인가에 대해 일치한 주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세례와 성찬, 그리고 은사론과 종말론에서도 교회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유아나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의 운명에 대해 확실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유한한 지식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고전 13:12) 제한적인 지능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조차도 죄의 영향과 피조적 한계로 인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신학자와 목사들은 짧은 단어 하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혹은 신학적 용어 하나를 가지고 합의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죄악 된 본성을 가진 논쟁자들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보다 더 성경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를 인정하면서도 어떤 중요한 주제에 있어 상당한 일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14:6).  불신자에게 있어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종교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행 4:12).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최종적인 계시다( 16:25-26).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또 다른 계시는 없다.  더 나아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계시의 원천이다( 1:11-12, 1:1).  모든 관점은 성경을 통해 증거를 찾고 해결한다.  이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가 하나이다.  여기에는 칼빈주의자나 웨슬리주의자는 없다.  누군가 이 공통적인 특징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이단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따라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라는(행 4:12),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계시와 구원에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중보자다(딤전 2:5).  기독교 밖에서 구원 얻을 방법은 일절 없다(요 3:16).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의 궁극성과 유일성을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고전 15:1-4)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관점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논쟁적인 사람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신학자와 목사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각자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형성된 성경 해석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딤후 3:15-17).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특별한 성경해석 전통 아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 없이 성경을 해석할 때 교단과 신학적 배경, 혹은 자신이 신봉하는 늙은 교주로부터 전수받은 조잡한 신학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가능성이 많다(고전 1:12).  이것은 우리가 인용할 본문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영향을 준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이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완벽하게 논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신학을 자기의 신()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자신을 멸망으로 초래할 것이다(벧후 3:16).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요 1:1-5), 그분께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셨는지(히 10:11-14),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갈 3:13),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를(요 14:21), 성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도 알고 계신다’(요 21:15-17).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관하여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말이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롬 8:38),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9).  이 구절은 바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조건적인 그분 사랑의 증거다(롬 5:8).  일단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현존하는 어떤 능력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탄이고 나발(?)이고 없다(삼상 25:25).

하지만 나는 어떤 것에 대하여도 심지어 내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것에 조차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이해를 하고 있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었거나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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