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3박4일 동안 연합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수련회 이틀째 되는 날 오락시간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편을 가르고 밀가루 속에 있는 사탕을 집어 먹는 게임을 하다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혼자 수양관 이층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는 당시 고등부 선생 한분이 허겁지겁 상기된 얼굴로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 아이가 쓰러져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전도사님이 가보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는데 쓰러진 학생 곁에는 언니만 울면서 남아 있고 선생님 몇 분은 어찌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루는 가운데 그 많던 학생들은 무서워서 도망갔거나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쓰러진 여자 학생의 얼굴을 보니까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상태에서 입에 거품을 흘리고 눈은 뒤로 젖어져 흰자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입고 입던 바지는 소변으로 인해 다 젖었고 얼굴은 예전 얼굴이 아닌 완전히 뒤틀린 상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런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은 신학교 졸업반 때 한두 번 가진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축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학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전 “만약 이 학생에게 들어간 귀신이 나한데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면서 그 짧은 순간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있는 선생님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전도사님 빨리 기도하세요.”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고, 솔직히 “기도하고 싶으면 먼저 손을 얹고 기도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선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얼떨결에 손을 학생 머리 위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은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쓰러진 학생 입에서 이물질이 나오고 큰 숨을 한 번 내어 쉬더니 눈이 뒤집혀진 얼굴이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몸을 떠는 현상이 멈춘 것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좋고 충성스러운 일군이기에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분들이시고 귀신에게 억압을 받았던 학생 역시 매주일 주일학교에서 예배드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최종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벧전 1:17), 이들 가족과 3년 이상 같이 신앙생활을 해왔었기에 이들이 믿음의 가정인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자녀도 귀신이 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Thomas B. White가 말했듯이 악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회심할 때(골 2;15), 이미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셨고(롬 8:37-39),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며(고후 5:1-5), 하나님의 자녀는 John Calvin이 말한 것처럼 “신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둔다.”라는 말과 같이 고난 속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롬 8:18-39).  그러나 악에 대한 경험적인 승리는 믿음의 실천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의 백성들이 쟁취해 나가야만 하기 때문에(엡 6:10-13), 우리는 누군가 회심하면 마귀가 그에 대한 음흉한 계획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존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롬 7:17-24)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악과 씨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벧전 5:8-9),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과 죄의 결과를 치유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죄지은 과거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요일 1:7), 여전히 강박적인 행태와 정서적인 손상, 그리고 법적인 복권 등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는 용서받았지만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약 4:7).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문제로(롬 7:17), 이 죄는 하나님 자녀의 삶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귀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행 5:1-11).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견책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대적하셨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똑같이 말씀하셨는데(막 8:33), 이것은 주님을 구하려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의도는 좋았고 진실했지만 그 순간 그는 사단에게 틈을 주고 도구로 이용을 당하다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지만(마 16:16), 사단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마 26:69-75).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굴복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말 가운데서(마 26:33-35), 사단에게 틈을 보였기 때문이고(눅 22:24-34),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죄는 마귀로 하여금 신자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엡 4:26).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요일 5:18).  사실 사람들이 혼동하거나 문제가 되는 용어는 악한 영에게 ‘들렸다’라는 말과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라는 말인데, 실제로 영어번역본들 가운데는 ‘귀신들림’(have demon)을 ‘귀신에게 사로잡힘’(demon possessed)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막 9:17, 눅 4:33), 이것은 원본에 대한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어에는 그런 의미를 반영하거나 표현을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성경은 귀신 ‘들리다’라든지(마 11:18, 요 7:20, 8:48-49, 10:20), 아니면 마귀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심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눅 8:27), 마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A. A Hodge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들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고통을 주고 괴롭히며 시험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막 5:1-20),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용어의 문제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눌려버린 뜻을 지니고 있기에,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귀신들린’ 상태를 나타내는 헬라어를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로잡힘’이 아닌 ‘귀신들리다’가 되지만(마 4:24, 막 1:32, 눅 8:36, 요 10:21), 보통 사용하기 적합한 용어는 ‘귀신에게 시달리다’ 혹은 Francis MacMutt 박사가 말한 것처럼 ‘마귀화 되었다’로 이는 어떤 형태로든 악령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가운데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Mark I. Bubeck는 ‘귀신들림’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말이 신자에게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은 그 속박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당하거나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이 한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마귀에게 정복당했다는 의미로서 그에게 옳은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라면 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힌다는 개념은 성서적인 것도 아닐뿐더러(요일 4:4),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바 된 이후로는 죄가 다스리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여러 가지 차원의 마귀의 공격과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고(눅 4:2, 고후 12:7, 엡 6:12, 약 4:7), 만약 마귀에게 죄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결코 사로잡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귀신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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