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보통 성숙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단어가 성경적인 이유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구절과 마태복음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71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온전히 지킬 능력도 주셨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길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 없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John Wesley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이것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고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완전’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 완전 성화의 가능성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인간이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해 질 수 있고,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때문에 알미니안주의나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시키지 않고 성화를 독립된 제2의 축복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적 논의에서 성화는 신자들의 점진적인 정결, 즉 순간적인 ‘지위상’ 혹은 ‘법적인’ 칭의를 받은 후에 이 과정을 통해 점점 거룩해 진다고 말합니다.  D. A. Carson 역시 이 성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신자의 회심 때 하나님을 향해서 한 개인이 마음을 정하는 첫 시점을 가리킨다는 것이 바울 신학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은 없지만(고전 1:7), 은사 문제로 시끄럽고(고전 12-14), 서로 간에 시기와 분쟁이 심하며(고전 3:3), 심지어 음행과(고전 5), 법정 싸움으로(고전 6:1-11), 여러 파로 나누어진(고전 1:12), 이상하게도 거룩하지 않고 싸움이 많은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have been sanctified)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전 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신자가 세상에 살면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 성화를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불안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27).  사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신빙성 있는 성경구절들은 없지만, 신자가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구절들은 신구약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20:9, 7:20, 5:16-24, 3:12-14, 요일 1:8).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14-2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물론 14, 18, 24절을 근거로 바울의 고백이 성화되기 전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John Murray가 말한 것처럼 이 고백은 성화된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Campbell Morgan 역시 성화에 대해 “성화는 완전히 죄에서 놓이거나 투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주도권과 파멸에서 놓여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말했고( 3:2),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죄 사함을 위한 기도가 신자의 삶 가운데 매일 반복되어야 할 기도의 모형인 것처럼(6:12), 성화란 무죄하고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한 거룩을 이루라고 한 말(고후 7:1)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온전히 거룩케 하시기를 바란다는 기도(살전 5:23)는 바울이 그들에게서 희망하는 목표, 즉 거기에 도달할 사람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도덕적 기준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도(요일 3:6), 누군가가 완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현재형 동사로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신자는 습관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일 3:9).  물론 성경에는 값없이 은혜 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했고( 4:1-8), 심지어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6:9), 이들이 의인이고 완전하다고 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3:9).  그 이유는 성경은 범죄치 아니한 사람(왕상 8:46)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20).  나아가 성경은 세상에 살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고전 5:10), 오히려 누구든지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일 1:8).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하심과 상반되게 거룩하게 자라 가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신자의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멈추지 말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후 7:1).  요약하면 Sinclair Ferguson이 말한 것처럼 성화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고(고전 1:30), John Murray는 이사야( 6:5)와 욥(42:5-6)이 하나님의 존전에 섰을 때,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한 다른 성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성화된 사람일수록 참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지 못한 사실로 인하여 안타까와 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을 향한 사랑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고, 예수 안에서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급을 얻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며, 아직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무게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어 죄에 대한 증오가 한층 깊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하심에 대한 계시에 가까이 접했던 모든 주의 백성들이 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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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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