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거리/성화'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9.05.12 육체와 성령의 싸움
  2. 2019.04.06 은혜인가 아니면 노력인가!
  3. 2019.03.23 완전성화가 가능한가?
  4. 2018.08.19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
  5. 2018.07.07 성화란?
  6. 2018.04.28 성화 없는 칭의
  7. 2017.07.29 칭의와 성화

Calvin은 신자들의 성화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육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죄의 법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다소 흔적은 남아 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난 자녀일지라도(벧전 2:9), 그는 여전히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이며( 7),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6:6-14), 일생동안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죄와의 기나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4).

 

Louis Berkhof 역시 “새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완전하듯이 이생에서는 영적인 발전의 정도가 불안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신자들은 일생동안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Sinclair Ferguson도 성화의 기본 원리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등과 긴장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Christian Spirituality : Five Views of Sanctific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 특징은 잠잠함이라고 강조하는 가르침과는 반대로 개혁주의 신학은 순례의 여정과 거룩한 전쟁(갈등)을 강조했다. 개혁주의는 그러한 갈등을 운 나쁘게 일이 잘못되어 유발하거나 믿음 또는 영성이 부족의 결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갈등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의 본질적인 영광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갈등은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 때문에 죽었고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살면서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의 풍조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말을 간추린다면 갈라디아서 517절에서 나오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을 따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육체와 성령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권고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려는 마음이 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행하려는 이러한 의지를 가로 막고 육신의 욕망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는 힘도 작용하기 때문에( 4:1-3), 비록 성도가 믿음으로 거듭났더라도( 2:8), 죄에 물든 옛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 4:17-24), 여전히 육신의 욕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6:12).  다시 말해 성도가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면 내부적으로는 죄에 물들어 있는 사악한 육신의 욕망이 있고( 4:19), 외부적으로는 성도를 넘어뜨리는 사단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27).  사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은 확실하지만( 8:1-2), 죄는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어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Calvin은 이러한 갈등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자 속에 죄는 지배력을 잃어버렸으나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의 고백인 로마서 712-2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 신학자들은 바울이 ‘거듭난 후’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거듭나기 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만큼 확실한 것은 성도로서 현재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기를 원하지만 육신으로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7:25).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며(고전 3:16),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1:3), 속으로 탄식하며 최종적인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8:23).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 3:12-14)에 여전히 장막 집에 살아가는 우리는(고후 5:1), 육체의 욕망과 영적소망이 서로 충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7:23).  따라서 성령을 좇는 삶은 육체를 따르는 삶과 공존할 수 없고( 8:1-11), 만약 성령을 좇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5:18, 25), 이 둘은 서로를 전적으로 대적하기 때문( 5:16-17)에 타락한 세상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삶 자체가 ‘이미’( 1:7), 그러나 ‘아직’ 이라는( 4:30), 두 가지 시점에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의 제약받는 몸,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이라는 의미에서의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벧후 1:13).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체를 따르는 삶은 과거에 속했기 때문(벧전 4:3)에 성령의 사람에게 있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갈등은 일어날 수 있어도 육체를 따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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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성화의 진행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들을 찾아본다면 고린도후서 71절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히브리서 1214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115절에는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 구절들에서 중요한 단어들은 ‘이루어’, ‘좇으라’, ‘되라’는 말로서 이 구절들만 본다면 성화의 진행은 인간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인간의 노력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내적인 힘을 인간 자신의 것으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볼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서 기독교 밖의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도덕주의’와 기독교 내에서 흔히 말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은혜주의’로 갈라지게 됩니다.  사실 성화 과정에 있어 우리가 가장 오해하기 쉬운 부분은 인간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3:5), 성화를 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Martin Luther는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거룩해지려고 몸부림을 치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화를 이루는데 있어 우리와 하나님이 협력한다는 것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며, 우리가 거룩해 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살전 3:13), 우리도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요일 3:3).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의 진행 과정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지위에 맞는 방법으로 그분의 일에 협력한다는 것이지 그 역할이 같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성화사역에 있어서 독립적인 행위자가 되어 성화를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사역이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사역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성령을 통해 기도와 지성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성화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면 이를 오해해서 신앙생활의 수동적인 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마치 성화의 과정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가 해야할 일(살전 4:3-6), 즉 도덕적인 명령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사실(고전 3:16-17, 13:4)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벧전 1:15-16).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확실한 역할 중의 하나는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12:5-11).  먼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타락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내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했고( 2:12-15),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축도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역할과 성자 하나님의 역할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13:20-21).  또한 성화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화를 완성하셨고(고전 1:30), 믿음의 경주( 12:2)와 우리의 본이 되셨으며(벧전 2:21), 사도 요한도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2:6).  나아가 베드로 사도(벧전 1:2)와 바울을 통해(살후 2:13), 신자의 거룩한 삶을 언급한 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수준 높은 성화된 삶의 모습이며( 5:22-23), 우리가 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8:14, 5:16-18).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성령의 요구와 원하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화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만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역할도 있는데, 성경은 성화에 있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의지하고 성화를 위해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사용할 것( 6:13)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12:1).  또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할 것을 인식하였기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라’고 했으며( 8:13),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육체의 정욕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5:24).  사도 요한도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순결하심같이 자신들도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고(요일 3:3), 바울 역시 고린도교인들에게 음행을 피하고(고전 6:13), 믿지 않는 자와 연합하지 말며(고후 6:1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를 것을 명했습니다(고후 7:1).  히브리서 기자 또한 화평함과 거룩함 없이는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했고( 12:14), 베드로도 신에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경건에 힘쓸 것을 강조했습니다(벧후 1:4-7).  이렇게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구절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벧전 1:15-16), 신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살전 4:3-7).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거룩함의 습관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 이유는 성숙함을 측정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계속되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14).  그러나 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우리가 빨리 성화될 수 있는 지름길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된 것이 없고,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앞서간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한 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1:1-6), 기도하고( 4:6), 찬양과 감사(살전 5:18)와 예배( 5:18-20), 그리고 사랑의 수고(살전 1:3)와 구제를 통해( 10:2),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28:19-20), 지체들 간에 교제를 가지며( 10:25-25),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살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5:23).  따라서 성화는 거룩하게 만듬이라는 그 문자 의미 그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소명에서 양자되기까지의 과정(1:17)을 거쳐 값없이 주시는 선물(2:8)로 구원을 획득한 인간이 이제 남은 일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마땅한 응답으로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자체를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비록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각 성도가 스스로 성화되어 가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성화가 이루어지기(살후 2:13)에 성화는 엄연히 그분에 의하여 주어지는 구원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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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보통 성숙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 단어가 성경적인 이유는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구절과 마태복음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71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을 온전히 지킬 능력도 주셨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길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죄 없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John Wesley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이것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고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강조하면서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완전’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상에 있어 완전 성화의 가능성 여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재림 전에 인간이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해 질 수 있고,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천국의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죄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때문에 알미니안주의나 가톨릭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관련시키지 않고 성화를 독립된 제2의 축복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적 논의에서 성화는 신자들의 점진적인 정결, 즉 순간적인 ‘지위상’ 혹은 ‘법적인’ 칭의를 받은 후에 이 과정을 통해 점점 거룩해 진다고 말합니다.  D. A. Carson 역시 이 성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신자의 회심 때 하나님을 향해서 한 개인이 마음을 정하는 첫 시점을 가리킨다는 것이 바울 신학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은 없지만(고전 1:7), 은사 문제로 시끄럽고(고전 12-14), 서로 간에 시기와 분쟁이 심하며(고전 3:3), 심지어 음행과(고전 5), 법정 싸움으로(고전 6:1-11), 여러 파로 나누어진(고전 1:12), 이상하게도 거룩하지 않고 싸움이 많은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have been sanctified)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전 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신자가 세상에 살면서 온전한 성화가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 성화를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불안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27).  사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신빙성 있는 성경구절들은 없지만, 신자가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는 구절들은 신구약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20:9, 7:20, 5:16-24, 3:12-14, 요일 1:8).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714-25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물론 14, 18, 24절을 근거로 바울의 고백이 성화되기 전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John Murray가 말한 것처럼 이 고백은 성화된 바울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Campbell Morgan 역시 성화에 대해 “성화는 완전히 죄에서 놓이거나 투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의 주도권과 파멸에서 놓여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말했고( 3:2),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죄 사함을 위한 기도가 신자의 삶 가운데 매일 반복되어야 할 기도의 모형인 것처럼(6:12), 성화란 무죄하고 완전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온전한 거룩을 이루라고 한 말(고후 7:1)과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온전히 거룩케 하시기를 바란다는 기도(살전 5:23)는 바울이 그들에게서 희망하는 목표, 즉 거기에 도달할 사람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도덕적 기준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하는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도(요일 3:6), 누군가가 완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현재형 동사로 '지속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신자는 습관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요일 3:9).  물론 성경에는 값없이 은혜 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했고( 4:1-8), 심지어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6:9), 이들이 의인이고 완전하다고 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3:9).  그 이유는 성경은 범죄치 아니한 사람(왕상 8:46)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20).  나아가 성경은 세상에 살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고전 5:10), 오히려 누구든지 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고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요일 1:8).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하심과 상반되게 거룩하게 자라 가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신자의 삶의 진보를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멈추지 말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후 7:1).  요약하면 Sinclair Ferguson이 말한 것처럼 성화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고(고전 1:30), John Murray는 이사야( 6:5)와 욥(42:5-6)이 하나님의 존전에 섰을 때, 그리고 교회 역사를 통한 다른 성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성화된 사람일수록 참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지 못한 사실로 인하여 안타까와 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을 향한 사랑의 정도가 더욱 깊어지고, 예수 안에서 그를 부르신 부름의 상급을 얻기를 더욱 갈망하게 되며, 아직도 그의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무게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어 죄에 대한 증오가 한층 깊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하심에 대한 계시에 가까이 접했던 모든 주의 백성들이 이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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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에게 있어 ‘경건’이란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삶을 분리해서 인간이 세속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소위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경건주의 또는 은둔적 신령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는데,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경건에 대해 이렇게 강조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 오는 것이다.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구별된 삶’, 즉 신앙생활에 있어 믿는 것과 삶의 방식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세상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벧전 2:9), 이렇게 그분의 은혜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2:8), 이 세대을 본받지 말고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1-2).  물론 우리는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처럼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도 아니고(고전 5:10),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정하신 때까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5:13-16).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것은 세상 속에서 살라는 말씀이 음란하고 죄 많은( 8:38),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고 부패한 세속적인 문화를( 2:2),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적당히 타협하고( 5:11), 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4:4).  다시 말해 도살의 날을 위해 사치와 방종과 쾌락을 즐기며 살지 말아야 하고( 5:5), 무엇보다도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살기는 살되 세상 풍속을 본받거나( 12:2),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2:2), 즉 악한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벧전 4:3), 오히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2:15-16), 특히 불신자들 앞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입니다(벧전 2:12).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 살아가라는 것인데(11:33-36), 이를 위해서 절대 요구되는 삶의 원리가 있다면 바로 경건과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말을 인용하면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만이( 1:27),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연예인들처럼 특별한 몸짓이나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주목 받는 신앙을 가진다든지 혹은 세상과 단절하여 산 속 깊숙이 들어가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며 사는 생활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 것입니다( 14:21).


이러한 문제를 놓고 개혁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Sinclair B. Ferguson은 “성화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고후 5:17),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가운데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고 말합니다( 3:10).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화에 대해 Abraham Kuyper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영혼에게 있어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거룩함이다.”라는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 12:1, 14)와 야고보( 1:22), 그리고 베드로 역시 독자들에게 모든 행실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이렇게 신약성경은 많은 부분을 여러 교회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자라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2:22, 4:13-15).  이 모든 도덕적인 권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화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한결 같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신자의 삶이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있어 더 거룩해져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2:15).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6:12-13),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은 온전한 성화가 완성될 수는 없겠지만( 3:13-14), 만약 우리가 죽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때에(고후 5:1-7), 우리의 영혼이 죄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해지므로 우리의 성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될 것입니다(고전 15:40-44).  예를 들어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믿는 자는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에게로 나아온다고 했는데( 12:23), 이는 거룩한 성 하나님 앞에는 부정한 것은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요한계시록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21:27), 만일 성화가 우리의 육체까지 포함한 전인적인 것임을 인정한다면(고후 7:1, 살전 5:23), 이 성화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부활의 육체를 입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5:49).  다시 말해 회심 이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6:20), 회심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분명히 성화가 시작되었고(고전 6:11), 이 성화는 그리스도인 삶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3:21).  따라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능력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죄와 일평생 싸워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6:10-18),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고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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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란?

논쟁거리/성화 2018. 7. 7. 13:21

구약성경 이사야 61-7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는 장면으로 이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성화시키시는 사건인데, 이 환상의 장엄함은 보좌 주위를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이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이 최고의 높은 차원임을 말해주는데, 사실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동시대에 살아가는 백성의 무가치함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불타고 있는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댈 때에 그는 깨끗함을 입었고 자신의 죄로부터 분리되어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함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죄로부터 분리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를 성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이사야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화되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이제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여 새 규범과 성령의 능력을 지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더 이상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20, 요일 1:8).

 

영국이 낳은 개혁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John Owen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더욱 성결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서로 연결된 동반자로서 항상 성화의 중요성을 내세우지만 이 둘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처럼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거룩한 삶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고전 1:30)과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19).  이 문제를 두고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의 ‘머리’(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8:29).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 3:27)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성화된 분이자(요한 10:36), 완전히 거룩하신 분으로(17:19), 우리가 진리되신 그분을 구원의 주로 믿고 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임신이 되는 그 순간부터( 1:34-35),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죄의 유혹( 4:1-11)과 사탄의 세계에 맞추어져 있는 인간의 연약한 육체에서( 2:14),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2:52),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가운데( 5:7-10), 흠도 없고 점도 없이(벧전 1:19),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9:24).  또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19:20)라고 외치신 후에 왕의 존엄과 함께( 18:37),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23:46),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 2:8)과 성화의 삶을 살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벧전 3:15).  그리고 삼일 만( 16:21)에 부활하셨을 때( 1:3), 성화된 예수님의 인간적 삶은 신약에서 말하는 무궁하고( 7:16), 불멸한 생명의 능력으로( 6:9), 물리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모했는데( 20:19, 26), 이러한 놀라운 일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고전 15:20), 처음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3).  따라서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8:9), 그들의 삶에서 성화가 진척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6:5), 그분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9).

 

신약성경은 이 성화에 대해 성령의 사역과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미 완성된 사건으로 보았고(고전 6:11), 사도행전 2032절에서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을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의 처음 단계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요일 2:15), 죄의 세력으로부터 확실하게 단절시킴으로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고(6:6), 나아가 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생명의 능력이 신자의 삶을 죄에서 내어주는 것을 막아줍니다( 6:11, 18).  이것은 한 개인의 삶에 있는 죄악된 행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을 말해주는데,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할 것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6:12-13).  다시 말해 죄의 권세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에 힘입어( 6:5), 죄의 유혹과 시험을 뿌리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4:7).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 안에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12-17).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에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3:5), 성화는 거듭날 때부터 분명하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 17:22), 우리는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6:14),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은 최종적으로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12:12), Calvin은 “사탄은 성도가 절망으로 미치도록 유혹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 같이, 죄로부터의 우선적인 단절은 더 이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죄를 사랑하지 않도록( 12:1),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겠다는( 12:4),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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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T. Wright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칭의를 설교하는 것은 할 일의 절반 밖에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구속구원에 대해 혼동하거나 로마서 425, 109절과 베드로전서 13절 말씀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칭의란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로운 자라는 법적 선언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한다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옛 사람은 죽고 그와 함께 새 사람을 입은 현재 완료형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는 선언이 종말적 선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Calvin에게 있어 칭의가 종교개혁의 핵심적 교리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지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행함은 인간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지만 행함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2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윤리와 도덕적(순종) 열매가 전혀 없더라도 처음 믿을 때 얻은 의는 나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켜주시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한( 19:6), 성도( 30:4), 성별( 3:1), 성화(살전 5:23)라는 단어를 발견한다면 이는 대부분 ‘분리’, ‘따로 데어냄’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번역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뜻을 지닌 모든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잘라내다’, ‘이별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사물이 ‘거룩하다’라는 것은 그들이 세속으로부터 또는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거룩함은 단지 무엇으로부터의 분리만을 뜻하지 않고 무엇을 향한 성별’(따로 떼어내어 거룩하게 준비함)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 거룩함을 재생산한다는 것입니다(20:7-8).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13절과 히브리서 211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성품, 즉 그분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와 같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그의 거룩하심( 11:44-45)을 알리시는데, NIV 성경은 이 구절을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who makes you holy)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너희를 성화시키는’(who sanctifies you)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화’란 사람, 장소, 사물을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 즉 사람, 사물, 장소가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결별한 뒤 또 다른 차원의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보면 땅(호렙산)이 거룩해진 사건이 나오는데, 사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계시하시기 위해 따로 구별하신 장소였고( 3: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기 전( 19:10-14)에 시내산은 사람이나 짐승을 성결케 하신 곳이었습니다( 13:2).  성결은 다른 여러 방면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안식일( 5:12)과 성막과 기구( 30:25-29), 성전(대하 7:16)과 도피성( 20)과 가옥(27:14)을 구별시켰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거룩은 사람이나 장소를 구별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역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교통하시는 장소(11:1)였기에 거룩한 곳이었습니다(4:5).  그리고 베드로전서 215-16절의 말씀처럼 ‘거룩’이란 단순히 도덕성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은총임을 알 수 있는데(고전 6:11), 그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로 성결해지기 전에 그분이 먼저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2:11-14).  사실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장소나 성전의 기물들 그리고 성전은 본래 평범한 것들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성별된 사람은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28:9).

 

이렇게 구별되고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올 세대의 생명을 맛본 사람들로서 그 미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실현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양자 됨( 8:15)과 칭의( 5:1)가 그러하듯이 구속이란 이미’( 1:7)이며 동시에 ‘아직’인 것입니다( 4:30).  그러나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를 라고 진정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동안 천국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3:20).  이런 우리들에게 성경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벧전 1:15-16),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 1:27)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흠이 없는 삶( 5:27)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벧후 3:14).  비록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신자들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선언하지만( 6: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매일 죄와의 전쟁( 6:10-19)에서 주님의 승리( 8:37)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해 현실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회심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탄의 실질적인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기(벧전 5:8)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 12:14)과 죄를 정복함에 있어( 12:4),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습니다( 1:6).  그러기에 성화가 없는 칭의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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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유일한 증거는 변화된 삶이다.” (The only proof of the new birth is the new life).  James Edwin Orr의 짧지만 깊은 통찰력이 담긴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고(롬 3:24),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롬 6:11-14),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고후 5:17).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개념이 아닌데(마 7:21),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막연히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여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원의 결정적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원의 총체는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초의 범죄(롬 5:12)로 야기된 죄책에 시달리는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현재 신분(롬 3:9)과 그 비참한 현재 상태(히 2:15)의 극복을 말하는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 각자의 전인격은 물론 전우주의 갱신을 통하여 영원한 축복을 주시고자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창 3:15),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세(창 1:4)전부터 종말(히 9:28)까지의 전 역사에 걸쳐 다양한 단계로 진행되는 장구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을 이해할 때만이 그 복합적이고도 포괄적인 모든 관련 사항이 온전히 시사되는 것이고, 이와 같은 구원은 일련의 총체적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구원에 대해 세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엡 2:1),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엡 2:13),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이 있고(롬 10:10), 두 번째는 이미 구원을 확증 받은 성도가 날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인(벧전 1:15-16), 성화에 힘쓰는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는’ 현재의 구원이 있으며(빌 2:12),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각각 구원을 받지만(롬 10:9), 그 구원이 최종 실현되는 곳인(계 7:5-17), 천국에서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히 9:28).  즉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으로서 (예정), 소명, 중생, 회심, 칭의, 양자까지의 사건이 발생하는 단계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인 성화견인, 그리고 천국의 도래로 구현될 영화의 구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또한 이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30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순서들의 가능성, 즉 ‘미리 정하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만을 언급하고 있지, 일목요연하게 그 순서를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이 말씀을 쉽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한때 온갖 종류의 죄와 욕정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이름 안에서 씻겨 졌고(washed), 깨끗하게 되었고(sanctified), 의롭게 되었습니다(justified).”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씻김’‘깨끗케 함’ ‘의롭게 함’의 과정을 신학적으로 올바른 순서에 입각해서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순서는 잘못된 것이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인 ‘칭의’보다(롬 4:6),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며 오랜 기간의 과정을 통해 죽을 때 완성되는 ‘성화’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롬 6:19-22).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정통신학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의 서정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눈에 가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순서를 제시하는 대신 그들이 거듭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포괄적으로 밝힌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사람은 설사 성화의 열매가 없거나 자칫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의 타락 가능성이 전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해한 문제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지는데, 한 부류는 칭의와 상관없이 최후의 심판에서 그 사람의 행한 삶을 통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칭의를 받은 사람은 열매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류는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거나(빌 1:27),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서 있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눅 6:46),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구절들 중에 핵심적인 구절로 마태복음 5장20절과 7장21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4-6절 등을 내세웁니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온전한 수확,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에 받도록 예약된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 때 받은 ‘칭의’를 법정적 개념으로만 해석하는 가운데(롬 5:1),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고전 10:12), 더 나아가 칭의는 최후의 심판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완전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25:30).  한 마디로 ‘이미’ 얻은 온전한 칭의를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 5:10).  이러한 ‘유보적 칭의론’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궤설로 들릴 것입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전통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피로(요일 1:7), 단 한 번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기 때문에(히 10:10), 의롭다함을 입은 자가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거나 혹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덜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마 28:20),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요일 5:18), 많은 성경구절 중에 요한복음 5장24절과 10장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39절과 에베소서 1장4절을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 칭의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김을 받는 법적인 선언(롬 4:6), 즉 관계회복이라는 의미라면(엡 2:13),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한 번 내린 의로운 판결을 취소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인 자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종 구원이 열매(도덕적 행위)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면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유보적 칭의론은 성경적이지 않을뿐더러 신학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부류는 칭의를 단회적 사건으로 본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단회적이 아닌 점진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가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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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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