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Berkhof은 삼위일체론에 대해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해진 많은 노력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삼신론’과 ‘양태론’인 하나님 개념들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신적 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체 안에 있는 위격적 구별의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만 적절한 용어를 통해 가능한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Calvin은 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민할 것을 알았던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 같이 어리석으며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예증은 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마 28:19), 기독교가 ‘다신교’ 아니면 ‘일신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처럼 예수님이 단순히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대속의 문제, 즉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갈 3:13), 또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롬 3:28).  가령 예수님이 피조물로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가르침 역시 공적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돌리게 되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출 20:3).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라면, 그분이 아무리 위대해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우상숭배 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레 25:1), 그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14:13).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각 위격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 위격들이 존재하면서 각 위격이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Herman Bavinck는 “삼위일체의 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뛴다”라고 말했는데 반면에 이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더 건전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모순된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이기에 차라리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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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Küng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말할 때, 지상의 교회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고 말하며, George Eldon Ladd 역시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지 결코 그 나라 자체일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속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교회는 사람들의 사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제자들이 전한 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설교와(막 1:15), 천국 복음이지(마 24:14), 교회가 가까이 왔다거나 교회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행 8:12, 19:8, 20:25, 28:23, 31).  사실 로마 가톨릭처럼 자신들의 교회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며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거나 세대주의 신학에서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교회 시대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그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교회가 천국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로 들어올 것이고(막 16:15-16),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사 52:7), 그의 나라의 축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면서도 교회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자들의 무리만을 가리키는(벧전 2:9), 반면 하나님 나라는 주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포함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주님의 구원을 입은 자들이 축복을 입으며 거하는 공간(요 18:36), 그리고 그 안에서 행사되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이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구성원은 동시에 그 나라의 구성원이므로 양자는 일치되는 면이 있으나, 하나님 나라는 그 구성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롬 14:17), 그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 교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를 가리키는(시 103:19),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실제 성경 가운데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먼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로(눅 11:20), 세례 요한이 말할 것처럼 회개함으로 그 일원이 될 수 있으며(마 3:1-2), 주의 능력으로 악한 세력인 귀신들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마 12:28), 비록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급속히 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마 13:31-33), 이것은 눈으로 불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눅 17:20-21), 마치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서(마 13:44), 영적으로 미련한 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루신 그분의 영적 왕권이 미치는 모든 영역이라 할 수 있고(마 12:28),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성도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며(눅 17:20-21),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마 13:31-33, 44-45).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로(눅 22:30), 성경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보다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에 대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마 25:31-46), 이는 사단의 세력들이 활동하는 이 세상보다(엡 6:12), 사단의 세력이 멸절될 그 날에(계 20:10),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이 완전하게 행사될 것이기 때문에(고전 15:25), 성경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계 21:1-8), 즉 영원무궁한 안식의 세계는 죄악이 남아 있는 이 세상과는 완전 구분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1:43, 눅 22:18, 행 14:22, 고전 6:9, 갈 5:21, 계 21:1-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눅 8:10), 부르심에 소망과(엡 1:18), 죄를 정복함(롬 6:14, 14:17), 그리고 마귀의 대적을 물리침과(눅 10:17), 질병에서의 고침 받는 것을 통해(눅 10:9),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느 정도 맛보게 될 것이며, 또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능력인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 12:28, 롬 8:4-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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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약 율법에서는 대속 받지 못하는 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신성을 모독한 죄는 그 당시에 사형으로 다스려졌고(레 24:10-23), 신약에 와서 성령에 대한 모독 즉, 성령의 사역에 의해(마 12:28), 입증된 그분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최악의 죄로 규정하고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마 12:31).  사실 진정한 고백과 회개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요일 1:7-9),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가 하나 있다면(막 3:29), 그것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죄는 예수님 사역 배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눅 5:17),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눈으로 빛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요 3:19),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그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눅 12:10).  이 죄에 대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중상하였다.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성령이 제시하는 빛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끝 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막 3:29),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죄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불신, 예를 들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었지만 끝까지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거나 심지어 심각한 배교 구절인 히브리서 6장4-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죄는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고 성경 본문에서 의미하는 문맥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누군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물론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8:24-25),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는 사람을 두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은 없고 불신앙을 소유하고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할뿐더러 이 죄가 일반적인 ‘불신’(막 6:3)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마 12:31)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막 3:29)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본문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죄에 대해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힘입은(마 12;28), 예수님의 사역에 명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마태복음에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직후에(마 12:22),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난 후에(막 3:10-12), 그리고 누가복음은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고 고쳐주신 직후에(눅 11:14),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적인 비난을 받았는데(막 3;22), 분명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마 12:28),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마 12:24), 쫓아낸다고 적대적인 주장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를(눅 5:17),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왕하 1:6),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무 분명하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악한 마음으로 말로 성령을 훼방하고 자신의 사역을 귀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막 3:29),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1-32).  Louis Berkhof은 이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항하는 죄라기보다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성령의 공적 사역을 거부하는 죄이다”

 

Jonathan Edwards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마태복음 12장22-3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함 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라고 말하면서 『부흥론』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비난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부에 대한 사악한 불경죄이거나 혹은 모르고서 성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모르고 한 것은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자신들이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특하게 영적 실재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빛에 대항한 고의적 죄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사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죄가 영적자살에 준하는 행위로서 드러난 진리를 최종적이고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시 영적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부흥을 악의적으로 반대하고 비난하며 마귀의 역사라 부르는 자들은 이제 한 가지 일만 더하면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셈인데 그 일이란 자신들의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촉구합니다.  “부흥이 임한 곳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탐문하라”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으로(행 3:6-9),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악의, 질투심, 교만)로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 역사를 마귀의 능력에 귀속시키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을 바리새인들은 주님 앞에서 직접 목격함에도 불구하고(눅 5:17-26), 이것을 거부한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학적으로 틀렸고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주의자이거나 감정주의자 사람들이 개인의 관계와 체험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적대시 하거나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만이 성경적이고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참된 성도라면 육신이 연약하여 경박한 말과 경솔한 행동을 통해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지만(엡 4:30),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행 16:18), 즉 은혜를 주시는 성령을 모독하지는 않습니다(히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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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을 ‘사도’라고 부르는데(마 10:2), 이 사도라는 명칭은 문자적으로 ‘사자’(빌 2:25)와 ‘사신’(고후 5:20)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요 13:23)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복음서 기자들은 이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막 6:12), 복음서에 나오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80퍼센트 이상은 오직 이 열 두 명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눅 9: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사도’라는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셨는데, 예를 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직접 대면한 바울과(행 9장),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키셨습니다(행 14:14, 고전 15:7, 갈 1:19, 살전 2:6).  먼저 사도적 직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사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들 모두는 선지자이거나 교사이지만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선지자처럼 환상과 계시를(민 12:6), 받았다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면에 바울은 계시를 받아(엡 3:3), 신약성경 거의반 정도를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 1:11-12).  즉, 바울은 선지자겸 교사이고(딤후 1:11),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라는 것을 말해주는데(행 15:35), 이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범위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령께서 따로 세워 보내심을 받을 때까지 아직 사도적 직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음 구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을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즉, 성경은 그들이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고(행 13:2-3),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첫 번째 선교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르는데(행 14:14), 이것은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함으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엡 1:4), 하나님께서 사도의 직임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26: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람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부름 받은 것을 확증 받았던 것입니다. Kenneth E. Hagin는 이 사도적 부르심에 대해 『He Gave Gifts Unto Me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지금 부르는(I am calling)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불러 시킨(I have called)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는데(행 13:2), 그것은 ‘과거시제’이다”  환언하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통해 받은 안수는 단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삶에 계획해 놓으신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오늘날처럼 교회의 공식적인 인증을 거치거나 사람들의 예언을 통하여 소명을 받고 사역의 직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직임을 받은 사도는 우선적으로 말씀의 설교자이며(막 16:15), 가르치는 교사인데(행 2:42),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처음부터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딤전 2:7, 딤후 1:11).  다시 말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갈 2:7-9),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먼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행 9:15).  사실 사도의 주된 사역이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이지(행 4:33), 교회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 사도적 직임과 관련하여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거나(계 2:2), 아니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조정자이며 분쟁 해결자이고 심지어 ‘영적권위’라는 말까지 쉽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은 교회를 조종하거나 지배한다고 나와 있지 않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동안에 오직 교회에 대해 영적인 감독만 했고(행 16:4), 예루살렘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감독하지 않았으며 일단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독권을 이양해 주기만 했습니다(행 20:28).  우리가 서신서를 통해 아는 것처럼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가 질문을 해오면 그것에 대해 바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을 뿐 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James. D. G. Dunn은 이 문제에 대해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은 그들 대적하는 사람들도 인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명령 투의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베푸는 대부분의 가르침은 명령이라기보다는 ‘권유’이며 그는 개심자들이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자가 하는 방식대로 자기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그는 자기 권위의 효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전 5:3-5, 고후 2:6-8). 그가 사도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자신이 위임받은 사역에서 야기된 문제에 국한되는데 예를 들어 주님의 말씀에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순종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경우에는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때조차 권위적인 태도를 삼가고 있다”(고전 7:25, 40).  물론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비중 있게 생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갈 2장), 더 나아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여겨(롬 1:5, 갈 1:1),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잘못된 교리와 교회의 질서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거짓 사도’들처럼(고후 11:1-15),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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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는 “삼위 곧 세 인격이 합해서 하나가 된다”, 혹은 “삼위는 세 하나님을 가리킨다”, 또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설명들이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하나님 전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들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판 아리우스파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인 성령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데 이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면서 왜 성경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가르치느냐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단들이 도전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사실 Calvin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거대한 신비이지만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 교리는 성경의 기준이 되었고 정통 기독교 교리로 공식 인준되었으며 이후 바른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과 기독교 조직신학 전체의 기초를 형성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신 6:4, 약 2:19), 그 한 분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립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마 28:19, 고후 13:13),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기독교 신앙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각 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면 그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딤후 16-18).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만을 믿는다면 성부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 3:17),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며(요일 2:1), 성령이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보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롬 8:27).  또한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한 분”이심만을 믿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한다면 분명 우리는 삼위 중에 어느 분은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리우스파처럼 종속된 분이거나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과 “삼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만을 믿는다면 결과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되고 이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충됩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오류들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에서 비롯되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과 유일신의 신앙 사이를 중재하고 이 둘을 합치시키려는 해석들 중에서 교회에 의해 배척된 두 가지의 극단적 이론, 즉 ‘로고스’이신(요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인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였던 Arius의 ‘종속설’과 하나님은 구속사의 과정에서 세 번 상이한 형태를 취했다는 Sabellius의 ‘양태론’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이론들을 배격하고 Athanasius의 주장에 따라 “아들은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영원하며 본질이 같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라고 선언했고, 주후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성령의 신성도 추가됨으로서 완전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본질상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다 같이 보존하면서 그분 안에 신적인 서열 단계를 인정하려는 종속론과 하나님이 다른 형태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양태론에 대항하여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오늘날 이 교리 논쟁에는 인간적 반목과 정치적 세력에 의해 정통 교회로 자처한 집단들 속에서 그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본질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삼신론’ 역시 잘못된 가르침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부인하는 것으로(신 6:4),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신적 본질을 말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한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세 인격을 증거 하지만 삼신론은 각각 다른 세 개체를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잡다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세 인격체가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세 분 중에 어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 이방 종교와 흡사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론의 신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는 Theodotus of Byzantium이 말한 “그리스도는 인성이 신성화했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신성도 영원성도 없다”라는 주장 역시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잘못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양심에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딤전 4:1-2),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을 끝까지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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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비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 가라지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진짜 성도처럼 행세를 하고 있고 또한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 역시 교회 간판을 걸어 놓고 참된 교회 행세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가짜 교회나 가짜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돈 문제나 이성 문제가 생기면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가 다 그런 양 비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기독교 교회 내에 소수의 목회자가 추잡할 정도로 돈과 여자 문제로 매스컴에서 시끄럽게 다루는 것을 볼 때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방과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참된 성도 때문이 아니라 가라지 교인과 삯군 목사가(요 10:12),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통 기독교 교회 안에서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 교회의 물을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단의 자식들로서(요 8:44), 마치 주님의 제자인 것처럼 활동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전체를(행 20:28), 욕되게 하고 있는데, 사실 값진 보석일수록 가짜가 많듯이 기독교의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든지 거짓된 교리를 따르는 가라지 교인과 가짜 교회는 있기 마련입니다(딤후 4:3-4).

 

사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 때문에 교회가 세속화됨으로 유형교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제거하고 순수한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3세기에 나타났던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Novatian으로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치스럽게도 신앙을 버리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후 박해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러한 배교자들은 어떠한 참회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교회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말했고 만일 이런 배교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사람들로서 유형교회는 혼합된 교회이기(마 13:47-48), 때문에 교회 정화에 힘쓸 필요가 없고 되는대로 내버려 두자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오늘날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보다 이런 방임적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며 이들은 마태복음 13장24-30, 36-43절의 말씀인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들어 교회 안에서 거짓교인을 구분하려다가 참 성도가 시험에 들거나 상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내버려 두고(마 4:12),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형교회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물론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처럼 인간의 힘으로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정화’와 ‘치리’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살후 3:1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15-17절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누가 구원받고 못 받고는 판단할 수 없겠지만(욘 2:9), 교회의 정화운동을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 1:20).  사실 유형교회에 중생하지 못한 거짓 교인이 있다는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참된 신자의 구원을 의심하기 시작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커다란 혼동과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하지만 이런 교회 안에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일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 받기가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항상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 안에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공연한 죄로 인하여 권징 받지 않는 이상 사람들을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본질상 교회는 각 지체들이 자신들을 한 몸으로 의식케 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엡 4:15-16),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고전 12:4-5), 은혜를 누린다는 점에서 Augustine와 Luther에 의해 “보이지 않는 교회”로 종종 불리었고 이 무형교회는 Louis Berkhor이 말한 것처럼 유형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불안전한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 대하여 연합된 교회는 비록 그 구성원들이 아직 죄를 지니고 있기에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요 8:31-32, 47, 14:23, 요일 4:1-3, 요이 9절),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며(마 28:19, 막 16:15-16, 행2:42, 고전 11:23-30),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될 때(마 18:15-18, 롬 16:17, 고전 5:2, 9-13, 고후 2:5-10, 살후 3:6, 14-15, 딛 3: 10-11), 교회는 거룩하게 되고 이런 공동체는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교회’에는 가라지가 섞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예수의 피 값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만이 있는 반면에(계 5:9-14, 7:9-17),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 교회 안에는 가라지 목사와 쭉정이 교인들이 얼마든지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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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분이 있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주제로 옮겨지면서 적지 않게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목사님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귀신들린 사람이 옹알거리는 소리이고 예언은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아주사의 부흥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도 종결되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직접 방언을 하고 나서 귀신이 옹알거리는 소리라고 말을 하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나서 이것이 환청에 시달리는 것인지 그분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고 본인이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제 개인기도 시간에 방언을 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기다릴 때 주님께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말씀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자 그분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그렇게 열려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는데 “목사님 보시기에 제가 귀신이 들렸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처럼 보이시나요?”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행 4:1-22),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자신의 신학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막 3:28-30), 그 이유는 자신의 판단이 주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8:15).  그렇다면 이 죄를 범한 자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반면에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실 ‘인자를 거역하는 말’‘성령을 거역하여 말’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주님과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를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던(마 10:1),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금하지 말 것”‘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막 9:3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당이나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마 1:21), 그것은 귀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무조건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단정지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요 8:15),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스스로의 신앙상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을 무조건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행한다면 그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며(눅 11:23), 만약 이런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은사를 귀신의 일로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마 12:36-37), 만약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마리엘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하며(행 5:34),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롬 8:14, 고전 2:14-15),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술로(잠 18:21),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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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 네 가지로 분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어떤 서열로 분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고(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보냄을 받은 사람’(요 3:17),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며 주님은 모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엡 1:22).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골 1:18), 공생애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사 61:1),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막 1:38), 위임을 받은 자였습니다(눅 4:18-19).  또한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마 1:2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으며(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동시에 교사이기도 하셨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따라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는 어린양의 사도들로서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이고(마 10:2-4), 예수님을 따랐던 이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행 1:21),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행 1:23),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분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니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행 9장),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행 1:26),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들 외에 더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15:5-9).

 

세 번째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서열로 이들 역시 신약 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두 번째 사도들처럼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엡 2:20).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복음이 이들에게 계시되었고(갈 1:16), 특히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고(갈 1:12),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기에(엡 3:3-5), 더 이상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을 뿐더러(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권위와 똑같은 서열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사도의 자격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 14:14).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에 속한 사도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폭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인데 문제는 오늘날 그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라는(눅 6:13),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이지만(막 3:13-15),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별한 대표’나 ‘특별한 사자’라는 뜻으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하는데(빌 2:25),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비록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는 있지만 그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에게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대표자’로서 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를 보내는 것처럼(고후 8:23), ‘회중의 대표’로 위임받아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 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어떤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는 것처럼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13:16), 또는 ‘대표자’(고후 8:23)라고 볼 수 있고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롬 10:15),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선교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가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처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행 13:4),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2:42).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는데(행 13-20장), 오늘날 진정한 선교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역, 즉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Wayne Grudem은 오늘날도 효과적인 개척자들/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용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 그리고 삶과 사역자의 열매입니다(마 7:20).  만약 이런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고(고후 12:12), 진정으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오늘날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이 보내심을 받은 네 번째 서열의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도들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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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술가이자 성직자인 Thomas Adams는 “삼위일체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 그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분으로서의 하나님(신 6:4, 갈 3:20)과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이(고전 8:4-6, 요일 5:20, 고전 3:16), 동시에 있는 이 신비한 현실에 대해 “삼위 하나님을 한 본체와 세 실체”로 대비되는 개념의 용어로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가 분명히 제안된 표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일체를 이루시는 한 본체요, 존재가 영구불변한 실체이고, 또한 상호 절대 독립된 삼위, 곧 세 분의 인격체이기도 하지만(시 2:7, 마 3:16-17, 행 5:3-4), 바로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라는(딤전 1:17), 사실을 추호의 차이나 기울어짐이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호 모순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는 신비하게 구현된 그분만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초월하여 구현된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연계와 인생에 '유비'(類比)시켜 이해하고자 한다면 혹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거나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Augustine이 『Of Faith and the Creed』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영혼의 구조를 끌어내기 위해 유비를 사용했지만 그가 나중에 고백한 것은 유비와 흔적을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관연 타당한가 하는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저들은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묵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딤전 2:5), 성경은 성부(갈 1:3), 성자(요 1:1), 성령(딤후 3:16)을 구별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유비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이 교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인간 안에 있는 “지, 정, 의”를 연합하여 말하는 것이나 나무의 세 부분인 “뿌리, 줄기, 가지”, 혹은 물의 세 형태인 “물, 증기, 얼음”을 통한 유비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독특한 삼위일체 교리를 훼손하거나 오해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의 여러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취한 많은 비유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어 반석과 같고(사 26:4), 돌보심에 있어 목자와 같다는(시 23:1-3), 표현을 사용은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무런 비유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어느 유비도 삼위일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Louis Berkhof이 말한 것처럼 다소 가치는 있겠지만 모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마 28:19), 이 말은 분명 다른 인격체를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관계에 있어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Philip Melanchthon이 말했듯이 이 교리는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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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당 건축 문제를 두고 수많은 분쟁과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할 때는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즉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이야기 할 때가 많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교회란 단순한 건물 그 자체가 될 수 없고(마 24:1-2),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마 16:16), 그분과 연합된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을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엡 4:15-16).  다시 말해 비록 외형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교회란 눈에 보이는 건물에 있지 않고(롬 12: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듯’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성전이나(눅 18:10), 집에서(몬 2절), 아니면 다락방(행 1:13-14), 그 어느 장소와 상관없이 두 세 사람이 모여(마 18:19).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요 4:21-24), 그곳이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교회에는 구성원들 모두가 죄인인(롬 3:9),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엡 2:8), 그리고 이렇게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혹은 ‘그리스도의 몸’(골 1;18),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계 22:17),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계 21:2).

 

이렇게 불리어지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유형/가견적 교회”와(고전 1:2, 살전 1:1, 몬 1-2절),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불가견적 교회”로(엡 1:10, 골 1:18, 24), 구분될 수 있는데 이것은 구교 당시 종교 개혁을 하기 전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지만 종교 개혁 때부터 구분하게 되었고 이 구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Martin Luther였으며, John Calvin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교회의 양상(樣相)이 아니라 영적 교회와 조직적 교회의 양면(兩面)을 말한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넓은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는 현재까지 구원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아직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나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피택자(被擇者)들까지 포함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현재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피택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 무형교회는 교파와 교단과 상관없이 거듭난 참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이지만 본질상 영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 신앙을 소유하며 참된 영적교제를 이루고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고(엡 1:22), 하나가 되어 있는(갈 3:28),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지만(벧전 2:9),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딤후 2:19).

 

이 무형교회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 들었고 지금 모여 들고 있고 장차 모여 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의 충만이다”  Louis Berkhof도 무형교회에 대해 “이 교회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영적인 본질이 육안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가 이 교회에 속하였고 누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는지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다. 예컨대 거듭남, 참된 회개, 참된 믿음,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 등과 같은 구원의 복들은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외형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적 변화의 외적 증거들을 볼 뿐이지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시며(민 16:5),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삶과(롬 12:1-2), 예배를 통해(요 4:23-24),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 12:33), 즉 보이지 않는 교회에 참예하게 됩니다.

 

반면에 유형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조직을 가리키는데 Wayne Grudem은 유형교회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불신자)들이 볼 수 있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킨다”  이 말의 의미는 무형교회는 거듭난 신자들을 포함한 교회인 반면에 유형교회는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교회로서 비록 참된 신자의 눈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불신자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거듭나지 않는 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이 두 교회의 구성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유형교회 구성원 가운데 장차 구원에 이르지 못할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고(마 22:14, 25:32), 아직 유형교회의 구성원인 되지 않았으나 장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무형교회의 구성원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행 13:44-48).  쉽게 말하면 무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유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무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형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양의 탈을 쓴 거듭나지 못한 거짓 목사들과(마 7:15),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거짓 선생들(딤후 2:16-18), 그리고 회심의 경험은 전혀 없고 육신적인 복(빵)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교인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 6:26-27).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놓고 Augustine의 말을 인용하여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다는 것인데(마 13:24-30),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LutherCalvin이 교회의 무형적인 면을 많이(물론 사도로부터 끊임없이 계승되어온 유형적인 거대한 조직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반대해서) 강조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 것은 주께서 자신의 백성, 즉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딤후 2:19).  그러나 우리가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를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유기체로서의 교회와(롬 12:15, 엡 3:6), 조직체로서의 교회를(마 18:15-17, 행 6:1-6), 무시하는 ‘무교회주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외형적 제도만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와 같은 ‘교회 지상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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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이 존재할 수 없고(막 9:40),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살던지 둘 중의 하나이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란 없습니다(요8:44-47).  물론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계 3:15-16), 주님은 신앙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마태복음 12장30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눅 9:50).  한편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1).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고(엡 4:30),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거나(살전 5:19), 심지어 저항할 수도 있지만(행 7:51),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근심시킬 수는 있어도(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마 26:69-75),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으며(요 21:15-18), 사도 바울 역시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딤전 1:13),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셨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행 9:15).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Augustine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며(롬 2:5), Chrysostom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사람들이 짓는 죄라고 하며(눅 12:10), 또한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바울의 동역자 데마(몬 24절, 딤후 4:10), 또는 가룟유다(눅 6:12-16, 요 18:1-3)처럼 신앙을 도중에 버린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히 6:4-6).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그리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은 아닙니다(요 3:1-8).  다시 말해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갈 1:13-14),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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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부흥강사인 Todd Bentley가 Florida Lakeland에서 “사도 임명식” 받는 장면을 2008년에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Peter Wager를 비롯해서 그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인 Rick Joyner, Che Ahn, Bill Johnson, John Arnott, Chuck Pierce 외 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특이하게 본 것은 여성 선지자로 알려진 Stacy Campbell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언하는 장면과 Bentley의 안수를 통해 Che Ahn 부부가 쓰러져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었는데 물론 이런 경우에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쓰러져서 떤다고 해서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같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 John Wesley, George Whitefield, Charles Finney와 같은 사람들이 집회할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한 것은 John Stott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들에게 행해진 임명식이 과연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했느냐는 것입니다(행 1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역자의 열매로(마 7:15-20), Bentley는 본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사역을 했던 아시아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지금도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 없고 다른 직임, 즉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다시 말해 이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될까요?  바로 뒷 절에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라고 말합니다(엡 4:13).  환언하면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10).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몸으로(엡 4: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벧전 2:2).  결코 우리들 중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은 없고(엡 4:15), 주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벧후 3:18),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친히(엡 4:7-10), 특별한 사역자들을(고전 12:28),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의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에 다섯 가지 직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신(막 3:13), 열두 명의 제자들이지만(마 10:2),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마 26:15), 맛디아가 제비뽑기로 선택되는데(행 1:26), 이 열두 명은 유일한 사람들이고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새 예루살렘 성벽 열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사도들이며(계 21:14).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행 1:21-22),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역을 했습니다(엡 2:20).  반면 또 다른 사도들이 있었는데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보내셨는데 그 중에 바울(롬 1:1, 행 22:4),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야고보(갈 1:19, 2:9), 그리고 본문에 많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롬 16:7), 사람들을 추가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추가하실 수 있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서는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란 용어를 놓고 George Peters는 『A Theology of Church Growth』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초기 사역에서 사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인정된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불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도들’이나 ‘교회의 사도들’로 불린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 여러 사도들이 나오지만(마 10:1-4, 갈 1:1), 그 어떤 구분만큼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롬 16:7, 고후 8:23, 빌 2:25).  John Stott도 일차적인 의미에서 열 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과 같은 계승자(갈 1:1)는 오늘날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로 ‘사도’라고 추겨 세우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사도된 사람들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Peter Wagner는 이 문제를 놓고『교회의 지각 변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신사도개혁운동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사도에 대한 점검 문제를 자주 제기하곤 했는데 일관성 있는 확실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Wagner 자신도 사도의 증명과 점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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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6:4, 딤전 1:17), 신성으로서의 성부와( 2:7, 벧전 1:2), 성자와( 9:6, 3:16-17), 성령으로( 1:1-2, 5:3-4), 구별된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C. F. Keil & F. Delitzs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셋인 동시에 하나”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심지어 신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 쉬운 쪽을 따라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이 삼위일체를 개념 짓기 쉬운데 그 결과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삼신론’, 또는 한 하나님과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사신론’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구분해 버리는 삼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신 분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많고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그분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한 채 마술사 시몬처럼 단지 무슨 비인격적인 큰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8:19), 이것을 엄격히 따진다면 신성모독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성부가 성자도 성령도 아니며 성자 역시 성령도 아니라는 의미로 이 삼위는 각각 독립된 인격체를 말하는데 성경 요한복음 11-2절과 1724절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증거와(요일 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성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7:25), 예수님이 아버지와 독립된 다른 위격이심을 보여줍니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도 성령이 아닌데 로마서 827절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령이 독립된 위격임을 보여주며 성자가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도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28:19), 그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14:16), 하신 말씀을 통해 성자 역시 성령과 독립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6:7).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one simple essence)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three persons) 또는 세 실재가(hypostases)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3:20), 동시에 세 신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각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는데, 먼저 성경은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1:1), 바울은 우상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없는 고린도 교회와(고전 8:4-6), 갈라디아 교회 인사말 속에서( 1:3), 인류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신 성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103:19), 예수님도 고난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 사건을 통해( 22:42),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역시 하나님 되심을 성경은 증거 하는데(요일 5:20),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완전한 인간이자( 1:21),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9:6), 사도 요한과( 1:1, 14), 바울( 9:5), 그리고 의심 많은 제자 도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진실로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20:28).  또한 성경은 성령도 온전하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물질에 눈이 어두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의 책망과( 5:3-4),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경고 속에서(고전 3:16), 성령은 단순히 어떤 감화력이나 치유의 은사를 내뿜는 막연한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살피시며(고전 2;11), 인생과 교제하시며( 14:26), 발걸음을 지도하시는( 16:13), 살아계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고 각위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지만 성경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강조하는데( 37:16), 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신명기 64절에 나오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여호와’라는 칭호가 함께 사용된 것을 볼 때에 여기서 여호와라는( 6:2), 성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왕상 8:60), 절대적인 신성을 소유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15:11).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10:30), 바울 역시 하나님이 한 분 되심을 고백했으며(고전 8:6, 딤전 2:5),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말합니다( 2:19).  이러한 성경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모세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4:35), 하나님 한 분만이 천하의 왕, 참 하나님이시고 그 이름 하나 밖에 없는( 14:9),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5:5-6).  , 하나님은 삼위인 동시에 결코 나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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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단 문제에 대해 신약 성경에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라는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케 할 거짓 선생들을 언급한 베드로후서 2장1절에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과 요한의 편지들 속에서는 외부로부터 박해 뿐 아니라 내부의 잘못된 교리를 물리치라는 권고가 나오는데(골 2:8-23, 요일 2:22, 4:1-3, 요일 7절),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웹스터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원리에 대항하고 분리와 이견(異見)을 조성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항상 거기에 대응하는 반대 세력들이 같이 하고 있었는데(마 13:24-30), 기독교의 진리에 대항하는 다른 의견을 갖게 되는 외부의 적보다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적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행 20:29-30).  수세기 지나는 동안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자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해 왔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실제로는 영이시며 육체를 가진 듯이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가현설’, 그리고 모든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며 지적으로 교화된 자들만이 신앙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2세기의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현대의 ‘사신론’(死神論)에 이르기까지 정통 기독교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대해 항상 도전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단은 엄격한 교리 차원에서의 교회의 해악을 끼치는 “비정통적인 신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자 John Miley는 『Systematic Theology』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교리 안에 기독교 구원론의 모든 위대한 사실들: 대속,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성령에 의한 거듭남, 새롭고 은혜가 넘치는 영적인 삶에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근거가 존재 한다”라고 말하며, 침례교 조직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Christian Theology』에서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죄를 대응하거나 하나님 수준까지 자신을 끌어 올릴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연합해야만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서 신성과 인성이 한 사람 안에서 연합되었던 성육신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지 아니하여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말을 쉽게 요약하면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은 기독교의 중추적인 문제로서(요 1:1, 눅 2:21), 만일 그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 것은(요일 4:1-6), 예수님의 참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분을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느 이단/사이비와 종교들 중에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과(빌 2:5-8),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벧전 2:24),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엡 1:7), 그리고 그분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행 4:10),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벧후 1:21), 권위 있는 말씀으로 믿는 집단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에 벗어난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고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딤전 6:3-5),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며(딤후 2:16-18), 논쟁하기를 좋아하고(딛 3:9), 예수님의 신성(요 1:18)과 인성(롬 9:5)을 부인하거나(요일 4:1-6), 돈(유 11절)과 호색에 놀아난다면(벧후 2:2), 분명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는(딤전 4:1-3), 이단/사이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확실한 것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서로 간에 쓸데없이 개인적인 주장과 이념들 속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부차적인 신학적 이슈들, 예를 들어 ‘은사들’, ‘예정’, ‘성령세례’, ‘견인’ 등에 관한 다른 의견에 대해 시간을 낭비한다면, 이것은 은혜의 참 복음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유익을 끼치기보다는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딛 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우리는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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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논쟁거리/교회 2014. 5. 17. 11:57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져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이 많고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교회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교회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엡 4:16).  따라서 교회란 단순한 사교 모임이나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 모임이 아니고 또한 한 개인의 영예나 물질적 만족을 위해 구성된 모임도 아니기에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 교회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계 3:1). Calvin은 교회를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면서『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의 태속에서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낳으시며 젖을 먹여 양육하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처럼 될 때까지(마 22:30), 돌보시고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품에서 떠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이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통해 거듭 천명된 바가 있듯이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예수님을 믿고 주안에서 성화 되어 가는 자들로 구성된 모임일 뿐 아니라 『스위스 일치신조』에서 고백한 것처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지속적인 모임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지만(행 2:43-47), 실상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이전 구약시대에서 부터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 예를 찾아보면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에서 그가 독자들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성도들’인데(고전 1:2, 엡 1:1, 빌 1:1, 골 1:1), 이 용어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배경에서 가져온 특정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거룩한 백성’(출 19:6, 신 7:6), 즉,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택함을 받고 구속된 자들로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을 가리킬 때 사용될 뿐 아니라(출 19:5-6), 종말에 대한 이상을 기록한 다니엘서 7장18절에서 사용되기도 했기에 바울이 새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갈 6:16), 사용된 모든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구약성경 70인역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할’(모으다, 소집하다/신 4:10, 왕상 8:1)의 파생어인 “이스라엘 회중”(출 16:3), 혹은 “백성들의 모임/집회”를 (시 26:5), 뜻하는 ‘에클레시아’ 헬라어 단어인데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지교회와(행 5:11, 11:25-26, 고전 11:18, 14:19, 28, 35), 개인의 집에서 모인 가정교회(롬 16:23, 고전 16:19, 골 4:15, 몬 1:2),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보편적인 유형교회와(고전 10:32, 11:22, 12:28, 엡 4:11-16),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무형교회를(엡 1:22, 3:10, 21, 5:23-25, 27, 30, 골 1:18, 24),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의 용어인 ‘백성’을(출 19:6), 자주 사용한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과(출 15:5-6), 연속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 백성의 참된 계승자로 보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렘 31:31-34), 이런 연속성의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히 8:5-8).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나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해 백성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볼 때(출 12:31), 교회는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로 구성된 그분의 소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시 24:1, 135:4, 겔 18:4).

 

이렇게 신구약 시대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소집된 주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엡 1:22), 한 몸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성령을 공통적으로 풍성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겔 36:26-28).  따라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서 연합되어(고전 12:13),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 됨은(롬 12:5),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고(엡 2:14),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으며(갈 3:28), 예수의 피로 ‘한 새사람’이 되었고(엡 2:15), 외국인이 아닌 ‘동일한 시민’이요(엡 2:19),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엡 2:19).  Richard Gaffin의 말을 인용하면 신약 성경은 성령이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것을 다룰 때 더 광범위하게 교회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나서 그 결과로 개인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다룬다고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시각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개개인이 아니라 그분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백성으로 택하신 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엡 4:16), 이렇게 모인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골 1:18), 성령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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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 그분의 음성은 우리의 음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종종 하나님 자신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시는데 가령 우리가 확실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고(민 12:6, 마 1:18-22, 2:13, 행 11:1-10, 욥 33:13-18), 우리가 완전한 이해를 원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게 하십니다(고전 13:9).  그래서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순종할 덴데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는데(눅 6:27-35), 과연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명령을 들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단 9장, 딤후 3:16), 주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혹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닌 내면세계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이때 주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많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개개인을 지도하시거나 격려하기 위해서이고(고전 14:3),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주관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숨겨진 욕구에 비추어 그 음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고전 14:29, 요일 4: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대체로 객관적인 경우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우리 마음이나 생각에 들어 있는 이슈들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시 66:18).  왜냐하면 마음과 생각의 불결함, 또는 편견과(행 10:9-16), 잘못된 전통은(행 15:1-21),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오염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일에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 22-24장).

 

이렇게 발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모든 개인적으로 듣는 음성을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하며 주님께서는 성경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음식 법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듯이(행 10장),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성경해석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분은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예언, 꿈, 환상, 그리고 모든 종류의 초자연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만 합니다(살전 5:21).  그러므로 성경말씀과 상충되거나 위배되는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해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해도 뭔가 미심쩍은 사항이 들어 있다면 이를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영 안에 그분께로부터 왔다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마음과 생각 가운데 평강이 있게 마련인데(롬 8:6, 14), 만일 마음 한가운데 이러한 확신과 평강이 없다면 어떠한 음성을 들었던지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초자연적인 놀라운 것을 경험했더라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까지(골 3:15),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105:4).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범하도록 인도하시거나 유혹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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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C. Sproul삼위일체는 신비다.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격위에 있어서는 셋이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의 많은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을 들라고 하면 바로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할 것이고, 이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하는 독특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습관적으로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기도 하고, 예배 끝에 축도문 속에서 삼위의 공식을 듣기도 하지만(고후 13:13), 막상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거나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변증하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신자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성서용어가 아닐뿐더러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셋이 하나가 되거나 하나가 셋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구절들은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단어는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셋의 연합”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도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가리키는데 사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사색에 빠지지 않고서도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1:26),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와( 3:22), 바벨탑을 쌓을 때( 11:7), 사용된 ‘우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3:22), 복수를 사용한 일에 대해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지만 교부들과 초기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데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 본체상 한 분이시나( 6:4, 딤전 1:17), 존재 양식상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28:19), “인간 창조”라는 대주제를 놓고 삼위 상호간에 공동 상의 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 구절들에 대해 몇 분이었는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이 교리에 접근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한 분 이상이 관여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은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 것 외에( 6:8),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나타낸 표현들, 즉 한 위를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면서 역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다른 위와 구분한 구절들이( 110:1, 45:6-7, 48:16, 61:1, 63:7-11, 1:7, 3:1-2), 신약에 비해서는 희미하지만 구약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천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것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원문에는 ‘사자’라고 기록되었고 13절에서는 그 사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자는 곧 하나님이신데 그 사자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11-15, 18:1-19, 3:2-6, 22:35-38, 5:13-15, 2:1-2, 6:11-14, 3:24-25, 3:1).  물론 구약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단순히 창조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19:1, 20:16, 왕상 13:18, 12:4, 2:3), 적어도 위에 열거된 구절에서 주의 특별한 천사(사자)는 완전히 신이신 독립된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인격화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대한 묘사와( 3:19, 8:1-31, 33:4-6, 107:20, 119:89),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데( 6:3, 9:20, 51:11, 139:7, 40:13), 이렇게 구약 성경에는 추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삼위일체론을 뒷받침 해주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복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으로 인해 신약은 구약성경에 비해 훨씬 충분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2:6-8), 많은 사람들이 모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1:11), 성자는 물세례를 받으시고( 3:21), 성령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10:38),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을 통해( 3:16-17),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전승에 의하면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론을 부인할 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마태복음 2819절에 나타난 세례 분부의 표현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에게 친숙한 제도인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부와 성자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도 다른 두 위와 똑같은 차원에서 똑같이 표현되었기에 성령 또한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동등된 위치에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3:13).

 

만약 신약의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주’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인식한다면 고린도전서 124-6절에도 삼위일체를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에베소서 44-6절과 베드로전서 12, 그리고 유다서 20-21절에서는 세 인격체가 따로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에베소서 l장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3-5), 성자 하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7), 성령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인 치시는 것을(13-14),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enjamin B. Warfield는 『Biblical Doctrines』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환상이 아니고 전체의 증거이며 또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셋인 동시에 하나” 즉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세 신격이 존재한다는 교리는 불신자들과 이단들에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매도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로 함께 존재하시며 함께 활동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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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렘 31:33), 행복과 미래를 보장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특권과 권리만을 자랑하고 주장하며(마 3:9, 요 8:33),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언약적 의무 조항들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습니다(렘 22:9).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 기준이 있는지를 알려 주고자 건물의 견실성을 측정하는 도구인 다림줄을 아모스에게 보여주시는데 이 환상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의 잣대인 다림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면 전부 부수어 버린다는 무서운 심판을 보여줍니다(암 7:7-9).  여기서 나오는 다림줄이 오늘날에 석공들이 담을 곧게 수직으로 쌓아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것처럼 기독교와 다른 신앙, 즉 이단/사이비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재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는데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바른 기독교 핵심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을 찾으라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것과(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요일 4:2).

 

사실 성령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 하는 것이고(요 15:26),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요 16:13-14), 예수님의 인격이 곧 진리와 거짓을 구분 짓는 시금석이 되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고전 12:3), 사도 요한 역시 동일한 주장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던 이유는 그 당시 그것이 영지주의 이단의 대표적인 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요일 4:1-6).  그러나 이단/사이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즉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벧후 1:17), 육체를 입고 오신 인간이시고(요일 4:3),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요 2:22), 하늘에 올라가셨다가(행 1:11), 다시 오실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데(마 26:64),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즉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자(요 1:1),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눅 2:21), 부인하는 것을 보면 멸망의 길을 서슴없이 선택하는 자들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갈 1:8, 벧후 2:3. 3:16).  따라서 이단들이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들은 골로새서 1장15절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책 『You Can Live Forever in Paradise on Earth』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유일한 자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신 6:4), 성부와(시 90:2), 성자의(요 1:2), 동일한 본질에 대해 철저히 부정합니다.  또한 일부다처주의를 옹호하는 “몰몬교” 역시 한 선지자(조셉 스미스 2세)가 새로운 성서 『몰몬경』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이것 외에 『교리와 성약』, 『값비싼 진주』와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 포함해서 이 네 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권위가 있고 영감을 일으키는 “교회의 표준적인 경전”이라고 주장하지만(몰몬교 신조 8장),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경 외에 그 어떤 것도 포함시킬 수가 없고(계 22:18-19),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단적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요일 1:10-11).  그 외 '통일교', '뉴에이지', '유일신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등 수없이 많은 외국산 이단들이 오늘날 기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 못지않게 한국에도 수많은 이단/사이비들이 기생충같이 퍼져 나가는데 대표적인 것들만 찾아본다면 먼저 애천교회의 창시자이며 통일교 신도였던 정명석(JMS)은 통일교 원리강론을 표절하여 『30개론』이란 유사교리를 만들어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바른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가족 관계를 대입시켜 아버지가 성부, 어머니가 성신, 아들이 성자로서 성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적 수수관계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자신도 색욕을 일삼아 여성문제가 복잡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 황당한 집단은 '한농북구회'의 박명호로 그는 월간지 『새벽이슬』에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이천년 전 예수를 낳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인데 해괴망측한 것은 '창기십자가' 라는 교리를 만들어서 자신이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이단적 사상을 가르치며 『십계천국』4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술집 창녀를 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불행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천지', '영생교', '구원파', '베뢰아 귀신론', '하나님의 교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한국산 이단들이 기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많은 이단들에게 있어 그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인데, 이들은 교주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믿으면서 교주가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믿고 또한 그것을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이들은 지구 종말을 강조하면서 얼마 남지 않는 날을 준비하기 위해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처럼 광신적인 종교적 의식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사이비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이런 이단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바른 신앙과 신학이 절실히 필요하고 위에 열거한 이단들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실히 부정하거나 반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분명 그들을 이단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아닌 정통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어떤 사역을 통해 이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독단적인 주장이 아닌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D.A 카슨의 말을 인용한다면 어떠한 현상을 분별하거나 본문의 뜻을 해석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집어넣어서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실한 다른 형제의 신앙을 이단시하거나 비성경적인 인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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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인이면서 초대 교회의 교부이자 카르타고의 주교인 Cyprianus하나님께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잡다한 개개인의 신자들 무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한 한 백성을 구원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구원받은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목적은 전체로서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개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 하지만( 10:9-10), 구원을 단순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고전 12:13),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15-16).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에 몇몇 개개인들이 저지른 심각한 음행 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범죄한 개인뿐 아니라 그 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교회를 향해 책망을 하고(고전 5:1-13),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서도 교회를 꾸짖기도 하였는데(고전 6:7-11), 여기서 바울이 문제를 삼은 것은 구원받은 개개인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에 대해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역 교회 지체들과 아무런 교제 없이 혼자 집에서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영상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6).  가령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집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기독교 방송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설교자가 구원의 초청을 할 때 TV 앞에서 그 설교자를 따라 앵무새처럼 신앙고백을 할지라도 사실 그가 출석하는 교회가 텔레비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뿐 구속받은 신자들의 지역 모임과 아무런 교제가 없다면( 4:11-15), 과연 이러한 사람을 두고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겠지만( 2:9), 문제는 그런 식의 구원이 신약 성경이 정해놓은 틀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요일 2:19).  그런데도 사람들은 로마서 109절 말씀을 인용하여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본문은 적어도 물세례를 받을 때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장소가 기독교 공동체라는 전제를 두고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는 세례를 통하지 않으면( 2:37-42, 16:31-33),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쉽게 무시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다면 바울 서신서에서 나오는 ‘서로’(알렐론)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지체들이며( 12:5, 4:25),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고(고전 12:25), 서로 사랑해야 하며(살전 3:12, 4:9, 살후 1:3), 서로 유익을 위해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살전 5:15),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해야 하며( 4:2), 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 6:2).  나아가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겨야 하며( 4:32), 서로 복종하고( 5:21), 자신보다는 서로를 더 낫게 여겨야 하며( 2:3),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고( 12:10),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12:16).  이러한 것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개인을 구원하여(물론 구원하시지만) 세운 것이 아니라 전체의 백성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9:6-7), 이것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6:16),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언약을 맺은 대상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인 것처럼( 19:5-6),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5:3), 백성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속성을 드러냅니다.

 

Hans Küng은 이러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교회 온 하나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의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화(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1-2).  따라서 교회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새로운 백성의 무리들( 1:13), 즉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벧전 2:9),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구별된 “택함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교회론의 값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이며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20:28), 안에는오직 구원받은 참된 주의 백성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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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상대방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교제를 하기 위해 쌍방 간의 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대화란 최소한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주된 이유 중 하나는(창 1:27),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사 43:7, 21), 만약 정상적인 주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실 때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요 10:3-4).  그러나 문제는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괴상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귀신에게 속임수를 당하는 것이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갈 5:22-23),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이나 잡다한 이론들은 성령이 주신 영적은사들을(고전 12:4-11), 활용하지 못하도록 걸림돌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빌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주님의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며 또한 그를 따른다고 말합니다(요 10:27).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마 4:18-22),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목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첫째는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전도하기 위해서, 셋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막 3:13-15).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과 친밀해지는 것이 모든 사역의 실질적인 기초로서 이 친밀감이 우리에게 넘쳐흘러야만 전도와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버지의 음성을 잘 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이 원리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인데(요 5:30),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근거로 사역하셨고(막 1:35), 늘 행하시던 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분과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눅 5:16).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는 마음의 상태, 즉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을 찾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찾아야 하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매일 30분이나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사람들은 경험상 쌍방의 소통 없이 일방적인 대화, 즉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없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데(눅 18:12), 만족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반면에 친밀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의무감을 초월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조용한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나머지 시간을 종일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과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합 2:1),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삼상 3:10),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그분만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데서 만족합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과 우리의 미성숙함인 경우도 종종 있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신 4:29),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고 있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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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은 영적인 선물들이나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질 때마다 다양성과 사랑과 겸손을 포함하는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롬 12:5-10, 고전 12-14장, 엡 4:1-16, 벧전 4:7-11),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3),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롬 12:5), 구절에 대해 Gordon D. Fee는 말하기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적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은(엡 4:7, 11-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약 1:17), 아낌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때 고린도 교회처럼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시기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10-13, 3:3).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고(딤후 3:16-17),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기준은(벧후 1:20-21), 마땅히 받아들여할 확실한 것이지만(계 22:18-19),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중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3:8), 여기서 쓰인 ‘프뉴마’라는 단어는 문맥상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고 신비로우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이나(요 1:12-13), ‘성령충만’(행 2:4, 4:8),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들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할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깊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묘한 일들은 하나님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신 29:29),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신앙 형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고전 12:11), 임하기 때문에 매우 신비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Craig S. Keener는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에서 “성령 사역의 모든 차원은 회심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 이후에 성령의 여러 가지 또 다른 면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에 대한 확실한 안내를 이렇게 제공합니다.  “그 능력을 덧입는 경험을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면 물세례를 받을 때 경험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특별한 역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좀 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겠지만 주님은 분명 ‘성령세례’라는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분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요 17:22).  J. I. Packer는 이러한 논쟁을 두고 “성령세례와 계속되는 은사들, 성령의 현재적 현현들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신학적 사고 안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안에 계속해서 도전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적절하게 세우는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학을 예외적인 몇몇 경우들을 기반으로 세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폭넓게 신학적으로 잘 설명된 문맥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Sam Storms가 말한 것처럼 개혁/복음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 때 성령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종종 극적인 성령체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점에서는 그르다고 볼 수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에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성령과의 만남의 실재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이런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다고 볼 수 없고 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눅 1:41, 67, 행 4:31, 7:55, 13:9).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신자의 회심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결코 성령의 활동을 회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신약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다양한 이후의 경험을 인정하며 권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놓고 서로 간의 견해를 나누는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든 싫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영적 형제들입니다(고전 12:13). Richard B. Gaffin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의 공통된 연합에 대한 관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자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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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 신자들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풍부한 이해와 은혜로운 경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자 Athanasius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도전 받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이단들이 삼위일체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통 기독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침묵만으로 대처해 나가며 만약 이단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알고 피하는 것과 모르고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인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준으로 삼아야할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적 가르침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셋”이라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인데, 교회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밝혀 이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을 내세운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일신론’(一神論)으로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이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속론’(從屬論)으로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는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하나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樣態論)으로 이 이론 역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다르게 설명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신약에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식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이론은 하나의 본체를 놓고 그 모양만을 달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용어가 바로 ‘교제’와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숫자를 말할 때 개체보다는 오히려 의미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한 해석을 얻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고( 6:4), 말씀하시는 것은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이방 다신종교와 비교하면서 삼위일체의 유일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일체)라는 숫자를 강조하다 보니까 삼위(三位)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숫자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 분 하나님이 일체되어 그들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섬기며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사역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교제하며 돕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19).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할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비록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거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7:5),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신바 되었다고 말하며(1:14, 18), 주후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분은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확인했고, 같은 내용이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버지께 나오시는’ 구절 앞에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낳으심’이 어느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일임을 거듭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낳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해 분명하게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신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같은 생산(生産)의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1:18), 자신의 영광을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누리셨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5).  그러므로 이 호칭에 매여서 현대판 아리우스 자들처럼 예수님의 위상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30).

 

예를 들면 히브리서 15절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7), 라는 구절에 대해 영원 전에 출생하신 아들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성육신, 혹은 그분의 부활과 승귀를 염두해 둔 아들직, 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를 가리킨다는 이런저런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확실하게 “이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없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골로새서 115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 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13절에 보면 아버지 다음에 아들의 순서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이 세 분 하나님이 동등하시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방식인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과 권능과 인격이 같고 가지신 목표가 같기 때문에 하나가 되시고 서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에 누군가하나님은 몇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고 나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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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적으로 ‘이단’이라고 말할 때 어떤 쟁점에 대해 사소한 견해차이나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어떤 특수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기독교 내에서 분파를 달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든지 아니면 성경의 명백 자명한 가르침을 교리적으로나 행위로 부정하든지 혹은 성경의 내용을 감하거나 더하는 경우에 이단으로 규정했지 단지 무지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자들에게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지 않았고 오직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재삼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아서지 않고 고집하는 자들만을(딛 3:10), 가리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단들, 즉 예수님이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요 10:30-31), 부인하거나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빌 2:7-8),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많았는데(요일 4:2-3), 전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분의 지위를 하락시켰고(요 17:5), 후자는 인간으로 오사(마 2:1),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롬 5:8),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골 1:21-22), 육체의 부활을 부인함으로서 그분의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롬 1:4).  또한 어떤 이단에 속한 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재림주로, 혹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이 퍼져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고 이들에 특성에 알아야만 이들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는데, 먼저 이단들의 공통된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이들은 처음의 주장과 나중의 주장을 서로 달리하고 처음에는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가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른 말을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문으로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다”는 뜻으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딤전 4:1-3).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조명하심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교주의 주장이나 인간의 사상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교주의 말은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헤롯처럼 인간 교주를 절대적 권위를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로 신격화하기도 하고(행 12:22), 절대 성경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이 일부를 왜곡 해석하거나 다른 무엇을 성경에 첨가하여 해석하는데(딤후 2:17-18),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이신득의 교리” 등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신들이 만든 교리들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더러운 행위들을 일삼으면서(벧후 2:2), 그것을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고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떠나게 만들거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구원론, 즉 기존 교회를 떠나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서 서머나 교회는 발람의 가르침을 통해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가르침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계 2:14, 20), 이단에 대해 올바로 분별하여 잘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딛 3:10-11, 요이 1:10-11),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신앙의 노선을 가진 사람들처럼 신앙과 신학에 있어 교조주의적이거나 배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학이 아니라(고전 1:10-13),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열매이고(마 7:15-20),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바가 무엇이냐는 통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예수님의 신성(요 10:30-31)과 인성(마 2:1),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다면 이단일 것이고(요일 4:1-6), 가령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신자들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거나(벧후 2:3), 형제간의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고(딤전 6:3-5),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다면(유 4절), 그는 발람의 길을 가는(벧후 2:15), 거짓 선생으로(벧후 2:1), 분명 육에 속한 자이며 성령이 없는(유 19절), 흉악한 이리일 것입니다(행 20:29).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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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그분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우리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혹은 기도할 때나, 아니면 누군가의 간증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공부나 읽는 책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간접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진(히 1:14), 천사의 방문과(창 19:12-24, 행 27:23), 주님께서 중단시키기 전까지 멈출 수 없거나 인간의 노력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베드로가 경험한 무아지경/황홀경/환상(행 10:10), 그리고 욥기에서 말한 것처럼(욥 33:14-18), 꿈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 하시기도 합니다(마 1:20, 2:13, 20-22).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으로 영이 끌어올려지는 것인데(겔 3;12-15, 고후 12:1-3), 이것은 오늘날 사교나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유체이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며 더 특별한 경우가 있다면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행 9:1-19).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명확한 지침서 같은 것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예시해줍니다.

 

먼저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정상적인 방법이며(민 12:6), 이러한 일들이 신약에 와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행 2:17),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꿈과 환상에 대해 말하면 신비주의자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신자들에게는 그런 일에 추구하거나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마 1:18-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이사야 7장14절만 상기시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만약 꿈과 환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맞다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과 환상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사용하셨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13), 이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본문인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1:1-10), 이 환상은 앞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말씀 아모스 9장11-12절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욥 33:13-18).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 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고(요 10:27),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행 2:17-1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익숙해지면 더 이상 꿈이나 환상 같은 방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매우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마치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고 가령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에 친숙해 질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처럼 말로 성령을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않는 이상(마 12:32),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치 가족끼리 서로의 음성을 알 수 있듯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고 그분의 음성은 보편적으로 '내적 속삭임', 혹은 '느낌'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그분은 매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고 요한복음 10장27절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점차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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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시 119:68), 그분이 창조한 만물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악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악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물리적인 악”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도덕적인 악”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악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창 3:1-15, 마 15:18-20).  이 세상 안에 있는 악과 고난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스 9:15),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고(이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필수적인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숫한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선한 하나님과(합 1:13), 창조 세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악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악이 부정되는 곳에는 더 이상 구원도, 가치규범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롬 5:21), 결국엔 인간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를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는(사 45:7),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악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자주 언급하지만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문의 ‘라’(ra)가 악과 악의 결과, 즉 악행과 그 결과를 망라하여 뜻하는데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용된 ‘짓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bara’로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서 절대적 창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는(애 3:38), 반면에 그분은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시고(신 32:4),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합 1:13), 시편 5편4절에서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은 아이러니하게 악한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 하지만(삼하 16:11, 왕상 22:20-23), 또 다른 한편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호 9:15),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욥 34:10-12),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잠 8:7).

 

초기 교회 시대의 이단 마르시온은 이 구절을(사 45:7), 근거로 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미치광이들은 악이란 말을 놓고 왜곡하여 마치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 즉 죄를 만드신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야의 본절을 얼마나 어리석게 오용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에 속하는 재앙의 조성자일뿐 범죄에 속하는 악의 조성자는 아니라는 통상적인 구분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사건의 조성자이시다”라고 합니다.  칼빈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악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악 같은 것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Heinrich Ott는 이 세계 안의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 한계의 질문으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G. Gutierrez는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에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결국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인간의 신학적 개념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그 지식에서 작용되는 논리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분으로(롬 11:33-34, 고전 1:25),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사 55:8),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처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시며(욥 13:6),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렘 32:19).  Herman Bavinck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시면서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면서 자녀에게는 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는 아니시지만 그 어떤 재난도 그분의 주권적 뜻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욥 1-2장, 암 3:6), 만약 우리가 이 상충적인 양 진리를 무리하게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라고 한 Louis Berkhof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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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란?

논쟁거리/이단 2013. 11. 2. 08:06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비성경적이다', '거짓교사다' 혹은 '종교다윈주의자다' 더 심하면 '이단이다' 라고 까지 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신앙과 신학이 성경과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YWAM의 창설자인 로렌 커닝햄에 대해서 말할 때에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존 파이퍼와 인터뷰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웨렌에 대해서는 종교다윈주의자이며, 제임스 패커는 유진 피터슨의 성경번역본 『The Message』를 극찬했다는 이유로 에큐메니칼 사상을 지닌 자로, 존 스토트는 “영혼 멸절설”을 말했다고 해서 비성경적인 인물로, 그 외 A.W. 토저, 빌 브라이트, 등등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을 정도의 복음주의자들을 경계의 대상이나 요주의 인물 아니면 거짓 선생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핵심 인물인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사건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어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칼빈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교회를 개혁한다는 이유 아래 돈키호테처럼 쓸데없는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기도 받고 쓰러지면 '이단!', 예언과 방언을 하면 '사이비!',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면 '신비주의자!', 육체의 질병을 고치면 용한 무당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기에 자살한 목사의 입에서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균형 잡히지 않은 반쪽짜리 설교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분명 성경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고(요일 4:1), 분별하여(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는데(살전 5:21), 무조건 칼빈주의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다른 신앙을 적대시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막 9: 38-40).  누가복음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상대방 세리에 대해서 멸시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이 착각한 것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것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세리를 보니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눅 18:11).  그러나 결과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자부심을 가졌던 바리새인은 예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고 신학과 관계없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눅 18:14).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다른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잘못되었다고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그분께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롬 2:1-3).

 

사실 교회를 분열시켰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과(딤후 2:17-18), 이단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령의 증거에 열렬히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과 신학을 제시할 경우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영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요일 4:1).  왜냐하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종교들과 이단/사이비들이 범람해 왔으며 늘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를 모방해 왔기 때문입니다(갈 1:6-8, 벧후 2:1).  최근에 우리 주위에서 이단적인 행태와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문제를 놓고 H. Wayne House는 이단에 대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에 모순되는 중심 교의를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는데, 사실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단들이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이단들은 때로 교회 안에서 생겨 누룩처럼 퍼져 나가기도 하고(행 20:30), 어떤 경우에는 밖에 있는 이교적인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벧후 2:1), 진리의 일부를 왜곡시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이단들이 말세에는 더욱 횡행하여 신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4:5, 요일 2:18).

 

그러나 이러한 것을 빌미로 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에서 유익한(고전 12:7), ‘예언’과 ‘방언’(고전 13:8-13), 성령의 놀라운 영광에 압도되어 쓰러지는 것을 가지고(겔 1:18, 단 10:8-9, 마 17:6, 행 9:4), 비성경적이거나 신비주의, 더 심하면 이단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 받고 쓰러지는 경우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인 사라가 일주일 이상 천국의 영광(황홀경)을 체험한 것에 대해 간증을 하면서『균형 잡힌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광신주의적인 것이며 정신이 돌아서 생긴 일이라면 내 머리가 더욱 이런 정신병에 걸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것이 미친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아름다고 영광스럽게 미치기를 기도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라가 체험한 황홀경에 대해 비성경적이지 않고 이단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역시 에드워즈에 대해 그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에 대해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 있게 말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에드워즈를 보고 이단이거나 비성경적, 혹은 성경에서 벗어난 요주의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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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악해져 가는 불신 세상에 둘러싸여 다음 천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교리’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도취에 빠져 냉랭한 성령론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든 Fee는 『God’s Empowering Prese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약 4:8), 보기 드문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임재라고 부를만한 현상은 종종 전율(합 3:16), 위엄에 사로잡힌 경외심(사 6:1-5), 서 있지 못함(왕상 8:10-11, 대하 7:1-3, 계 1:17), 압도적인 기쁨(시 16:11) 및 이와 관계된 다른 징조 등과 같은 반응을 촉발하는데 이 점은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의 시대에는 특별히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회 신자인 고든 Fee가 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은사들, 가령 "예언적 은사"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기시대의 교회에 “정경적” 원리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그런 은사들은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 수립과 관련된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특정한 용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정한 용어의 사용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큰 진리를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특정한 언어적 언급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냐 아니냐가 결정될 때는 더욱 그러한데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논리학 이론과 언어 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던 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D. A. 카슨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 단어 하나를 놓고 신학자들끼리 언어학적인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에 대해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 즉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 때문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오순절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경험에서 그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행 2:3), 드러나는 같은 경험 또는 유사한 체험을 매번 기대해야만 하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성령이 처음 임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람소리나 불의 혀 같은 모든 현상들이(행 2:1-4), 다 나타나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야만 하는가?  이렇듯 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신학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절되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Robert W. Lyon는 『Wesleyan Theological Journal』(volume 14, 1-Spring 1979). “Baptism and Spirit Baptism i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믿는 자들은 회심할 때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또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구별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이 모든 표현이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 모두 믿는 자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존 브라이트는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성경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많은 것은 의미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이 해석되는 원칙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고전 4:6),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교리 문제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두고 은사주의 신학분야의 초기 선구자인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로 회중의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균형 잡힌 사역을 하고 있는 Larry Christenson는 『Speaking in Tongues』에서 오순절주의자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결정할 문제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사역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자가 독특하다. 성령은 각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신비스럽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어떤 확실한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것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편견으로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이나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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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교회가 범하는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판매원이 소비자에게 재품을 파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제공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지옥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질병뿐만 아니라 결혼생활과 삶의 제반적인 문제들, 즉 좋은 직장과 차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시며 다른 모든 일도 하실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6:1-2).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주님이 가정생활과 직장, 혹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그분과의 친밀감이 아닌 주로 사람의 표면적인 문제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을 떠나거나 상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필요에 의해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분과의 우정은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르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두 유형 중 어느 유형이 주님의 기뻐하는 유형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먼저 마르다는 헌신적으로 손님을 접대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는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고(눅 10:38),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솔선수범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친 봉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열심히 행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0:40).  정신이 분산되면 좋은 일이 고된 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섬기는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한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걱정은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눅 10:41).  분명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같이 계셨지만 마르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벅찬 자신의 일에 부담을 가져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주함은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그분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눅 10:40),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마르다가 주님에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오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분노, 즉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약 1:20),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생 마리아까지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그분과의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이때 하는 봉사는 마르다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롬 14:4),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야와 같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왕상 19:12), 들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르게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그저 거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제자들 곁에 앉아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녀가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제자들 곁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부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눅 10:39).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눅 10:42),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친밀감은 우리 인생의 잔치상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만일 오늘날 주님께서 마리아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마치 친구가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터놓고 교제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소중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요 15:14-15).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떠나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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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이 믿는 대로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죄까지도/사 45:7),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그분에게 하나도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인간이 악에 대하여 인과율적으로 책임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지만(요일 3:4),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에 의해(시 115:3), 인간의 죄에 대하여(잠 16:4),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왠지 불공평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시 25:8), 악을 작정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며 왜 그분만이 면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 야고보서 1장13-1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더욱이 그분은 누구라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거나 죄를 짓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죄는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요 8:44),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 9:14).  반면에 에베소서 1장11절은 하나님이 부득이 하게 모든 것, 심지어 죄까지라도 미리 정하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딜레마는 역설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출 15:18), 그분의 절대적 거룩함(시 47:8),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역설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은 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구절인 로마서 9장18-21절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라니…’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19절에서는 지적 궁금증을 제시하고 20-21절에서는 바울이 이에 대하여 답하고 있지만 19절에서 제기된 질문은 지적 문제뿐만 아니라 질문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0-21절에서 바울은 태도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지적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할 수 없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해 역설이라는 견해가 실제로 입증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 안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규범적 뜻”과 “하나님의 허용적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이 세 개의 뜻 모두는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속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1-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그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 명하셨습니다(창 17:8).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6:2),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으로 이 규범적 뜻 안에는 오직 ‘선’만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합 1:13).  반면에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기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저버리고 약속의 땅을 출발하여 애굽을 향해 떠난 것처럼(창 12;10), 이 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허락하신 것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 동안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행 14: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완악한 뜻에 맞추신 것입니다(마 19:8).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여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는데 먼저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는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뜻은 호세아 11장1절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지만(벧전 1:15-16),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악에 대하여 용인하듯이 죄를 허용하는데(요일 1:10),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 안에서 우리의 죄에서조차 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롬 8:28).  마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창 50:20).  사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나기는 하지만(롬 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창 2:17), 결과적으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렘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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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학교 운동장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과연 몇 명의 아이들이 그 음성에 반응할까요?   아마도 오직 한 명만이 그 음성을 듣고 반응을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 엄마의 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분과 조용히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의 귀는 그분의 음성에 친숙해질 것이고 성경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요 10:27), 말씀하고 있는데 문제는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히거나 환청이라는 증세에 시달리는 의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고 성령께서도 이런 바리새적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정상적인 신자라면 하나님은 어떤 형식에 갇혀 있지 않는 분이라는 것과 주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다양하지만(민 22:25-28, 삼하 12:1-12, 욥 33:14-18, 행 8:26, 10:3),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주된 근원은 성경인데(딤후 3:16),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을 더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듣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달라스 윌라드는 『In Search of Guidance』에서 A.W. Tozer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부하여 성경과 교리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지식에 영적인 조명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마음에 베일이 덮여 있는 것과 같아서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은 머리에 든 지식에 불과하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고(마 23:2, 눅 11:52),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늘 암송하기도 했지만(요 5:39-40),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마 26:57-68).

 

또한 이들은 성경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자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훈련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고 주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요 5:37).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적 교리는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 2:13),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오늘날 신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성경공부를 할 때에 신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강조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열심히 성경공부는 했지만 결국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종교적 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C.S. 루이스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분에게만 열중하는데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성경을 묵상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기록된 성경말씀에 아주 친밀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대신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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