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Piper, 그리고 John MacArthur와 같은 신앙 라인에 서있는 R. C. Sproul는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다. 그는 흔히 정통 장로교 신자들에 대한 문화적 이미지는 영적자발성(spiritual spontaneity)을 조금만 암시해도 미간(眉間)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찌푸리는 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다.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교회는 감리교회, 두 번째 교회는 침례교회, 세 번째 교회는 장로교회였다. 그가 귀향해서 상급자들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감리교회를 방문했더니 신자들 모두가 ‘불! 불! 불!’ 소리만 지르고, 침례교회를 방문했더니, 그곳 신자들 역시 ‘물! 물! 물!’ 소리만 지르고, 장로교회를 방문했더니, 그들도 ‘질서! 질서! 질서!’ 소리만 질렀다”
Sproul은 이 예화를 소개한 뒤 장로교 그리스도인들을 꼬집으면서 말하였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장부터 16장까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다 생략하고, 오직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다. 이 예화가 주는 의미를 장로교 사람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특별히 칼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자신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 이들의 문제는 바리새인처럼 너무 교회질서와 전통만을 따지기 때문(막 7:1-5)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한 은사(고전 12:7)를 무시하므로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이다(살전 5:19).
Wayne A. Grudem은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에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 안위와 권면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강조한다(고전 14:25).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에 나오는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이 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전 12:11).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경에서 ‘계시’ 혹은 ‘계시하다’라는 말은 꼭 정확무오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말한’(벧후 1:21),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딤후 3:16).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절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엡 1:17), 더 나아가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마 11:27) 들이다. 이 모든 것은 기록된 성경과는 상관없는 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고전 14:26). 따라서 Grudem은 절대적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일절 없는 성경말씀(벧후 1:20-21)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를 구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4:29). 또한 신약의 예언자들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과신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D. A. Carson 역시 ‘계시’라는 말을 전문용어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Showing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0절에서 예언의 은사가 계시에 의존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정경의 완결성을 위협하는 권위적 계시형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의 조직신학 용어와 성경저자들의 용어를 혼동하는 것이다” 또한 『Exegetical Fallacies』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해석자가 ‘계시하다’를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특별한 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늘 생각한다면 그는 빌립보 3장 15절을 해석하기가 힘들 것이다”
사실 ‘계시’라는 말을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는 것은 중단론 신학자와 목사들만이 가지고 있는 삐뚤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입장의 사람들은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신약의 예언이 성경과 동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문제는 예언하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마치 종결된 성경의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계 22:18-19),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막무가내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계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데서 나온 신학적 편견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몬타누스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의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예언(계시)을 하면 곧 성경말씀에 무엇인가 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과민반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예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든지 아니면 꿈을 꾸는 사람들을(행 2:17), 신비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정죄하거나 이단시하는 사람들 중 특히 개혁주의 신학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 John MacArthur가 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계시의 언약성과 구속역사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두 줄기로 계시하시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Richard B. Gaffin 도 있다. 물론 이들이 가르치는 말씀에서 배울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이중계시관’ 즉 교회 전체에 대한 ‘정경적 계시’와 신자 개인을 위한 ‘사적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반면에 Grudem은 지금도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는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2:10). 이 문제를 가지고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Vern Poythress 교수는 Grudem과 Gaffin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에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 때문에 Gaffin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도 이런 은사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Sam Storms 역시 초대교회의 탄생을 위해 영적인 은사들이 필수적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왜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은사들이 덜 중요하거나 덜 필요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히 6:18). 그분은 우리에게 틀리거나 잘못된 예언(계시)을 주지 않는다(고전 14:3). 문제는 누군가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 혹은 오랫동안 다듬어지는 훈련이 없이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많은 것이다. 가령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받은 사람이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든다면 피장 시몬의 집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베드로는 이 일이 세 번씩 반복될 때까지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슨 뜻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을 했다(행 10:9-17). 이것은 계시가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 할지라도(약 1:17), 그것을 받는 사람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해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계시를 받으면 무조건 ‘직통계시’라고 판단해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나 광신자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받아 들려야 한다(살전 5:19-22).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말하고 있다(요일 4:1). 또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 해야만 한다고 증거 한다(고전 14:29).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설된 모든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막 7:20-23).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6-37). 섣불리 판단하거나 함부로 이단이라고 비판하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가마리엘처럼 신중해야 한다(행 5: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