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성경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먼저 테스트를 '문법적'으로 즉, 단어의 어원, 특히 동사나 명사 등의 각종 변화형과 문장 구문론 등의 문법적 요소와 문학양식, 문맥구분, 저자의 문체 등을 분석하여 문자기록의 해석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텍스트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것은 주관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막아줍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인데 이 단계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주석하고 텍스트 의미를 밝혀주는 신학을 세우는 작업으로 해석 대상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방법입니다이러한 해석론을 기초로 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고전 4:6), 사도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각 사람들이 해석하는데 있어 일치된 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단 신학에 입각해 성령세례에 대한 어떤 정의들을 내릴 때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나 강도,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결과는 받는 자가 믿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음에 얼마나 합당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Walter C. Kaiser는 “성경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경험을 처음 기록된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성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W.T. Conner는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분명하게 성령의 사역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되는 무엇가를 논하고 있다”

 

사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고전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그들(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 언급된 유일한 두 가지 적극적인 명령, ‘성령을 따라 행하라’( 5:16, 25)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5:1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현재 시제로 신자가 이미 맺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암시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호소나 명령은 없고 반면에 에베소서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성령세례는 하나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이 사도행전 15절과 217(주석)에서, 그리고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를 경험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들 중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개념적 오류들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개념을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그분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대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해서 경험의 진실성을 무시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을,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에 대해 서로 강하게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살전 4:8), 주어진다고(전치사 ‘엔’ 대신 ‘에이스’ 현재 시제의 사용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성령이 진행 중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강조) 말한 것처럼 성령론은 완성되지 않는 과정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서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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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만물의 활동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협력 섭리가 있다고 말하며(마 10:29-31), 그러한 그분의 섭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증거 합니다(잠 16:33).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각과 뜻대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협력이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외견상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자신이지만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그분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데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그의 형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섭리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창 45:45).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 가운데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은 악한 성격의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 22:20-23).  그렇다면 “죄의 최종 원인자가 하나님이신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사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고후 5:21), 거룩한 분이시고(사 5:16),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에 따른 악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으시지만 다만 허용하심으로 악인의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이 그 의지로써 죄를 짓는 것을 제지하시지 않으시고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만족한 답변을 얻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인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지혜가 무궁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신 것은 분명 어떤 거시적인 원대한 그분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사 55:8-9).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이 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배 밖으로 던져버렸지만 그러나 15절후에 요나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진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말하면서(욘 1:15),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증거 합니다(욘 2: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과 요나 스스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욘 3:1-4).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신약에 와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행위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요일 2:2),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요 3:14, 갈 3:13).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창 3:15), 단순히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그분이 계획하셨습니다(행 4:27).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지만(눅 2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하나님에게 그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는 한 문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지를 법 없는 자들의 도덕적 책임과 연관시켜 설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여기서 주목할 만할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그렇게 행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미리 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행 2:36).

 

이렇게 인간과 사단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용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속에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며 심지어 자신의 영광과(롬 9:14-18), 우리의 선을 위해(롬 8:28), 악을 사용하시고(출 9:16), 그 악을 심판하심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시 76:10, 잠 16: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잠 8:7),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며(욥 34:10-12, 롬 9:14), 악에 대한 책임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시 5:4).  그런데 만에 하나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이 공정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고 다만 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9:11-13).  물론 이러한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 받은 물건이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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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신앙을 가진 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는데 있고 목사가 말씀을 가르쳐 주기만을 기다리거나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들 중에 한 가지이기는 하지만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고 성경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0:27), 만약 주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요 10:3),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요 8:47, 10:2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Focus on the Family』의 창설자인 James Dobson은 “나는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친구를 통해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통해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내게 말씀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했고, 달라스 윌라드 역시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각,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다가오시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의지적인 삶 가운데로 오실 수 있다고 말하며, F.B. 마이어는 잠언 20장27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내적인 빛들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 즉 성경이 완성된 이후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 그리고 교회의 제도와 전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귀를 둔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시지만(히 13:8), 많은 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종교적인 편견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요일 2:3-4).  쉽게 말하면 불순종이 그분의 음성 듣는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주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하고(고후 13:5), 또한 언제나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에도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청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삼상 3:10).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순종 위에 무엇을 더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나 마귀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내가 듣고 있는 음성이 주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인지(겔 13:17), 혹은 귀신들의 속삭임인지(렘 23:13),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Roxanne Brant는 음성의 근원은 “진리의 성령”과 “마귀의 영” 그리고 “육신의 생각”에서 올 수 있다고 말하며, 3세기에 있었던 몬타누스의 사건을 예를 들면서 한 예언자가 얼마든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갈 3:3), 그는 『How to test prophecy, preaching and guid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 안에서 동시에 육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마 16:16), 곧 바로 사단에게 조종을 받고(마 16:22-23), 결국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처럼(마 26:69-75),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르스 요컴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라도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들, 즉 사람을 통해서(행 21:10-12), 혹은 성령께서 직접 개인에게(행 10:19-20), 또는 꿈이나(마 1:20, 욥 33:14-18), 환상을 통해(행 9:10-16, 10:3),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단 9장, 딤후 3:16),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타진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을 분별하는 것처럼(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1),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반드시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예를 들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은 차갑게, 명령조로 혹은 죄책감을 느끼도록 가혹하거나 비판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보편적으로 우리를 교정하거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삶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는데(삼하 12:1-15), 이와 달리 강압적이거나 조급한 마음,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듯한 메시지로 들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닌 마귀의 소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약하면 주님의 음성은 직접적이고 확정적이며 명백하기 때문에 성령은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고 위로하며 주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고전 14:3), 그 음성은 원리나 특성에 있어 기록된 성경말씀과 절대 상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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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롬 1:17),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고후 5:17 엡 4:22-24), 존 웨슬리는 주장하였는데,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잡는 것이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전자를 ‘의인’이라고 하고(롬 3:24), 후자를 ‘성화’라고 구분하여 취급하는데(엡 1:4, 살전 5:23-24), 웨슬리는『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ume VI』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객관적/율법적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결과로 우리가 죄책에서 용서받은 상태적인 변화를 말하며, 성화는 주관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질에서의 자유를 얻은 실제적인 변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성화에는 두 가지 체험이 있는데 하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체험 즉 '초기의 성화'와 다른 하나는 그 후에 오는 또 다른 체험, 곧 '온전한 성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초기의 성화는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은 순간적인 체험이라고 한다면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자신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이러한 체험을 『The Letter of the Rev John Wesley』에서 '제2의 축복' 혹은 '온전한 구원'으로 신자의 생활이 보다 높은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두 번째 축복은 중생 다음에 체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성결의 체험'이라고 불러지기도 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 체험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말하면서 온전한 성화의 체험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성도로서 승리할 때까지(엡 3:16-19), 계속 '기독자의 완전'에로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고후 7:1).  물론 여기서 말한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단어는(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를 말함) 당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용어로서 오늘날에도 논쟁의 불씨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기독교의 완전 교리를 가장 중요시하였고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면서 '기독자 완전성별'과(벧전 1:15-16), '온전한 성화'(살전 5:23),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마 22:36-40),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완전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The Works of John Wesley, 3rd』에서도 “우리는 이 둘(칭의와 성화)을 각자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함께 묶어 두셨고 사람들이 갈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똑같은 열정과 성실함과 한편으로는 값없이 완전한 현재적인 칭의 교리를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과 삶이 다 같이 성화되는 완전한 성화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웨슬리 신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에 대한 특징이 “오직 믿음”과 “거룩한 삶”을 끝까지 붙들었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예를 들어 구속 같은) 특히 성령 교리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설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웨슬리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성화와의 긴밀한 상호 관련 속에서 보는 것인데 그의 설교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깃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두 번째 은혜, 성령의 능력이 그 가운데서 드러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하는 것은 두 번째 축복,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겔 36:26-28), 우리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4).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19세기 일어났던 성결운동은 예외 없이 성화를 '성령세례'로 보고 오순절을 두 번째 은혜의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이 웨슬리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부흥 운동을 이끈 설교가들 역시 완전성화가 성령세례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완전성화는 즉각적이면서 동시에 회심에 뒤이어 일어나는 '두 번째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오순절 성령세례 교리의 뿌리가 웨슬리주의 신학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 Mildred Bangs Wyncoop은 “많은 용어 중에 웨슬리는 완전성화라는 말을 사용했지 한 번도 성령세례나 다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주의자들에게는 완전성화를 의미하며 '새로 거듭남', '후속적으로 경험되는 채워짐' 그리고 '인격의 변화'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이끌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친구인 John Fletcher도 '성령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완전성화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완전성화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슬리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웨슬리의 성령세례에 대한 주장은 복음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장10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아무것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라고 결심할지는 몰라도, 오늘날 성령사역의 다양한 국면들에 대한 폭넓은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는 완성되지 않는 먼 미래의 물결이지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Dunning, H. Ray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두고 “나는 칼빈보다 칼빈주의의 몇몇 형식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슬리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는 유산의 일부인 모든 은혜와 은사들을 포함하여(고전 12:7, 엡 4:7), 성령의 가장 주된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지(빌 2:5, 벧전 2:21), 서로 신학과 신앙에 대해 비방하는 것이나 자신들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 간의 일상적인 교제가 불가능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대의 속에서의 존중과 사랑과 협력은 여전히 경계를 넘어 필수적인 기독교 교리의 다른 영역에서 동일한 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로 계속 흘러 넘쳐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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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원론적인 사고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거룩하고 경건한 일에만 관여하시고 악하고 속된 일에 대해서는 무관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단순히 성도들의 삶만을 주관하시고 불신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떼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과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정신적인 것이든 또는 선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관여하시는데 이것에 관해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을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잠 16:4).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소소한 사건조차도 신앙의 눈으로 다시 확인해 보면 그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손길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삶을 회고하고 자기를 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행동과 적용들에도 관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며 인간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통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삼하 12:11-12),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하신 말씀이 앞으로 자신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그와 그의 종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삼하 16:5-8), 그는 시므이에게 보복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그의 군사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삼하 16:11)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생애 말년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자극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을 때(삼하 24:1), 다윗은 후에 그것이 죄인 줄을 깨달았고(삼하 24:10),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하여 유대 땅에 벌을 내리셨습니다(삼하 24:12-17).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다윗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하신 것을 알 수 있고(삼하 24:1),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하신 또 다른 수단이 '사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이 한 사건을 통해 성경은 한 가지 행동이 일어나도록 각기 다르게 영향을 준 세 가지 요소에 대한 경이할 만한 통찰력을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셨고 또한 그를 격동시키기 위해 사단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다윗에게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삼상 24:10).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 하닷과(왕상 11:14),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왕상 11:23),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욥의 재산과 자녀들을 해롭게 하도록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태풍과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의 악을 통해서였습니다(욥 1:12-19).  욥은 이러한 사건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 부차적인 원인을 넘어 그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지만(욥 1:21), 그분을 원망하거나 잘못하셨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습니다(욥 1:22).  다시 말해서 부차적인 원인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악으로 인해 그분을 원망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약 5:9), 욥은 그러한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욥 2:10).

 

구약성경 다른 곳을 보면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 왕의 모든 선지자들에 넣으셨고(왕상 22:23),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했으며(사 10:5),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느부갓네살을 비롯한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보내시면서 “이 땅과 그 거민들을 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라고 말하시면서(렘 25:9), 더불어 바벨론을 벌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렘 25:12).  그리고 우상숭배를 인하여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에 관한 내용 중에서 거짓 소식을 전하는 미혹된 선지자가 있다면 그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로 하여금 유혹을 받도록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14:9).  아모스 선지자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수사학적 질문들을 열거하면서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암 3:6),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에게 기근과 기갈과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와 메뚜기 염병과 말과 사람의 죽음을 주셨음을 상기시키지만(암 4:4-13), 그럼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암 4:6, 8, 9, 10, 11).

 

이러한 구약의 많은 사례들을 볼 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그들에게 악과 재앙이 임하게 하셨는데 비록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모두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만(롬 3:9-18, 5:12), 그렇다고 언제나 심판으로 재앙이 임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께서는 악인들이나 마귀의 세력들 혹은 자연재해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히 12:6-10), 아니면 불신자들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단 4:25-37, 롬 1:18-19), 혹은 완악한 죄인들에게 저주와 멸망의 심판을 하시기 원하실 때에(잠 16:4, 롬 1:28), 즉 악한 일이 인간에게 일어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시 5:4).  궁극적으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선하신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롬 8:28).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 바로나 가나안 사람들, 혹은 바벨론 사람들처럼 악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출 9:16, 롬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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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세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먼저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에 대해 『The Sovereign Spirit』과『성령세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거듭난 신자가 될 수 있다(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은 즉각적이며 이것은 이론이나 신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체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세례"이며 그 목적은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능력과 확신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로이드 존스는 이미 중생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눅 24:49), "성령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에 대해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사도행정 2장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와 고린도전서 12장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찾고자 했던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시초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다. 그것은 새 시대에 소속된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둘 다 주신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그것은 단회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세례는 중생 이후에 받게 되는 뒤따라오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와 상반되게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뒤따르는 후속적 경험이 아니라 중생과 일치되는 "제1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시에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벤자민 B. 위필드, 리차드 개핀, 제임스 던, 월터 C. 카이저, 프레드릭 D. 부루너,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가 회심 때 일어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견해를 달리하는데,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성령세례의 경험은 받는 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개핀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에 대한 바울과 누가의 신학이 같다는 점에 있어 공통된 의견을 갖습니다.  반면에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 중에 D.L. 무디, 찰스 피니, R.A. 토리, A.J. 고든, F.B. 마이어, 앤드루 머레이, 로이드 존스는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 죄로부터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면서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통해 죄를 이길 힘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죄를 이기며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서로간의 의견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된 한 가지 견해는 성령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임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 나름대로 성령을 받는 방식과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 해석을 했지만 일치된 성령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일치된 교리가 없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나 체험마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Eduard Schweizer는 “성령은 교리의 주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중생을 성령세례로 보고 그 후에 받는 것을 성령의 충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체험하는 성령충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성령으로 세례 받는 사건에 관한 일곱 구절들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고전 12:13),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얽매인 교회가 아닌 이상 성찬식 때 가운을 입을 것인가 정장을 할 것인가, 찬양할 때 드럼을 사용할 것인지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 라는 사사로운 것들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깊이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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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분되기에 그것은 회심 후에 따라오는 경험이며, 그 첫 번째 육체적 증거는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선조들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이미 거듭난 신자들에게성령세례’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그리고 오순절 사건인 사도행전 2장과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역사( 8),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와( 10),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 받은 일을 내세우며( 19), 이러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도 먼저 거듭나고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삶속에서 오순절과 같은 ‘이차적 체험’ 즉 ‘제2의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어야 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능력을 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보통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의 전제 조건이 ‘회심’이라고 말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지만 일단 회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조건들,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죄와의 결별과 회개’, ‘순종과 기도’, 그리고 ‘인내와 믿음’ 등이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회심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한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세례’란 새 시대를 여는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 이후 신자 개개인의 삶속에 회심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지 그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속으로 유입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다르게 중생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며 구원 이후에 오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을 ‘성령충만’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묘사적 본문, 즉 서술적 본문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서술적 본문들을 교리로 근거 삼는 것을 기피하고 오히려 교훈적 본문들, 즉 일반적인 바울의 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벤자민 B. 위필드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칼빈은 오늘날 논쟁이 심한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주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 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냈을 때에만 성령으로 베푸신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해 둔다. 그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며 또 마찬가지로 날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는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중생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사건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넬료가 그리스도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음에 틀림없다.   쉽게 말하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중생의 영’이기보다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부가적인 ‘성령의 은사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3:2),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내려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처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을( 2:38/주석), 구원의 은혜보다는 ‘은사’로 해석하고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을 제외한 네 번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구원 이후에 받는 ‘제2의 축복’, 즉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이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영’으로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고전 12:3), 다른 하나는 Anthony D. Palma가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력 있는 증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증인들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 이외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영적인 은사와 기사와 이적을 베풀게 하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능력과 은사의 영’을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순절주의자들과 칼빈이 같은 점이 있다면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는 은사들을 동반하는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빈은 사도행전에 일어난 성령사건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2:38/주석), 오순절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The Sovereign Spirit』에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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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인간을 범죄 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죄까지도 만드신 것은 아닌가?”인데 과연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시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죄를 짓도록 적극 간섭하셨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이미 그들이 장차 범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지만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범죄를 예견하시고 그것을 허용하실 뿐(시 78:29, 행 14:16), 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주선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창 2:17).  다시 말해서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정의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창 2:7, 살전 5:23).  그리고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고 그들의 자의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방해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잘못인가를 일깨워 주셨고 인간의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간섭하시고 또 관여했습니다(창 4:6-9).

 

루이스 벌코프는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기동하고 우리의 존재를 갖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행 17:28). 이 신적인 활동은 매순간 인간의 행동을 동반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는다. 행동은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 즉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사10:23).  그러나 만일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되신다면 “하나님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이 질문에 접근함에 있어 우선 하나님이 악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게 하신 원인이었다고 한 가장 분명한 예는 요셉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창 37-50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에서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음을 거듭 강조하시면서(출 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출 8:15, 32, 9:34).  어떤 사람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스스로가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반역한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출 4:21, 7:3),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출 8:15), 말하기 훨씬 전에 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같은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두 가지 요소 모두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하심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단지 바로의 마음속에 있던 악한 정욕과 선택을 더욱 강렬하게 하신 것뿐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이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악에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에 악한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렘 17:9, 막 7:21-2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출애굽기 9장16절에 관해 생각하면서 로마서 9장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구체적인 예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추론해 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까지 쫓아오게 하셨고(출 14:17, 시105:25), 또 다른 예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멸망되었던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구약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으며(수 11:20, 삿 3:12, 9:23), 믿지 않는 팔레스타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삼손의 요구에서(삿 14:4), 또한 엘리의 아들들이 악행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삼상 2:25), 심지어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말합니다(삼상 16:14).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지만(렘 33:2),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욥 34:10. 대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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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인간의 도움이나 협력 없이 혼자의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이후부터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인간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영광을 받으셨고 앞으로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사람과 협력하시되 그분의 거룩한 사역 수행에 동참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도덕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인간의 범죄까지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신적인 질문은 고대로부터 계속 제기되어 왔고 때때로 우리들 자신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의문을 갖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죄악과는 절대 무관한 분이시고 인간의 범죄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으십니다.  다만 악인이 그 사악한 마음으로 범죄 하여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뿐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시라는 구절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도덕적인 피조물의 의지적인 행동을 통하여 악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셨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66:3-4, 전 7:29).  성경에는 악으로 인해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을 비난한 적이 없으며(출 15:11, 사 5:16), 하나님은 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고(욥 34:10), 인간들이 범한 잘못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겔 18:4, 롬 8:13).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악을 즐기시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4, 시 5:4).  사실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악한 일이 행해지도록 하셨다고 한 성경구절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경우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기로 한 사람이나 마귀가 악을 행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의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기를 원했고 결국 그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마침내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시 105:17),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창 37장).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창 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창 50:20).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죄악된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는데 이 둘 모두 사실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이사야 45장7절의 말씀도 하나님이 친히 악을 행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악이 행해지도록 예정하셨지만 구체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하나님은 실제로 악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 강요』에서 지혜롭게 말합니다.  “다른 악행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주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신 심판을 이루시도록 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행동을 사용하시고 그의 심판이 임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모든 악으로부터 순결을 유지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위해 악을 사용하시지만 악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거나 의로우신 분이 아니시며 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고(욥 34:10),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악이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28).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지도 않으셨는데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분이 원치 않고 의도하지 않은 악들이 이 세상에 점점 더 많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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